피그말리온
불면의이쑤신
대리석 조각상을 본 적 있니?
나는 좋아해.
도쿄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가 우에노에 있는 미술관이었어. 그런 것 치곤 자주 가진 못했지만. 중학생 때 여름방학 미술 숙제 때문에 처음 가 봤어. 르네상스 조각 특별전. 유럽에서 들여온 대리석 조각들이 잔뜩 모여 있는 전시였어. 아마도 유명한 작품들이었겠지?
작품 하나하나에 얽힌 역사라든가, 미술사적 의미라든가, 소위 중요 체크할 점이 무엇인지는 하나도 모르겠더라. 딱히 도슨트의 해설에 맞춰 방문한 건 아니었거든. 그때도 키가 제법 컸으니 뒤쪽에서 군중들의 머리 너머로 혼자 보는 게 좋았어. 어차피 기억에 남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르네상스 시대 대리석 조각은 대부분... 육체였어. 육체 그 자체. 천사이거나 신이거나 악마이거나 그들에게 휘둘리는 인간이거나. 모두 육체였어.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하나같이 역동적인 순간을 포착했지. 강렬한 감정들이 돌에서 튀어나오려 몸부림치는 것 같았어. 당연히 조각을 만져볼 순 없지만 왠지 손을 대 보면 따뜻할 것 같고, 축축한 땀이 찰 것 같고, 맥박을 느낄 수도 있을 것만 같았어. NBA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슈퍼 플레이 못지않게 뜨거워.
사실 조각 이름은 잘 기억 안 나. 머릿속에 최대한 클로즈업해서 찍은 사진들이 흩어져 있나 봐. 불끈 쥔 주먹에서 튀어나온 핏줄, 허벅지 근육을 꾸욱 누르는 손끝, 하늘로 높이 쳐 든 팔뚝에서 융기한 전완근, 도톰한 입술이 갈망하며 벌어져 있고... 그런 것들이 생각나. 이젠 전체적인 모습이 뭐였는지도 잘 모르겠어.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솔직히 말하면 감수성 풍부한 사춘기에는 약간 자극적이었나 봐. 헐벗고 있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폭발적인 정념 때문에. 그때까지 그런 게 내 안에 있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막상 나의 외부에서 그게 나를 바라보니까, 안으로 찔러 들어오는 듯한 충격이 있더라. 압도적인 에로티시즘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아름다웠어. 아름다운 데다 살짝 야하다면, 건강한 남자 중학생이 푹 빠질 만도 하지?
숙제는 빨리 해치워 버리고 놀고 싶어서 제법 일찍 갔었는데, 미술관 문이 닫을 때까지 한참 바라봤어. 스쳐 지나가는 관람객의 물살에 끼이지 않고 저 뒤에서. 육체를 모사한 돌조각이 내뿜는 격동이나 관능 같은 것들이 익숙해졌을 때쯤에는, 이런 것들을 깎아 낸 사람들에게로 생각이 흘렀어. 인간 육신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썩지 않는 돌로 박제해 버린 사람들. 솔직히 난 좀 변태 같다고 생각해.
전시가 매우 인상 깊었기 때문에 난 다음 날 도서관에 가서 대리석 조각에 대해 찾아봤어. 그러다 조각하기 전 원석 덩어리의 사진을 봤어. 작은 흑백 사진 속에 놀랍도록 초라하고, 밋밋하고, 아무 재미를 찾을 수 없는, 그냥 돌덩어리가 있었지. 하다못해 암석처럼 삐죽삐죽하거나 거칠지도 않아. 매끈하고 새하얗고 거대한 직육면체. 이게 맥박이 뛸 것 같은 팔뚝이며 허벅지가 된다고?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본 말랑하고 보드라울 것만 같은 곡면체가 된다고? 조각은 생각보다 마술에 가까운 영역이었나 봐.
어떤 조각가는 돌이 자신한테 말을 건다고 주장했대. 그러니까 돌 속에 갇힌 조각이. 꺼내 달라고. 예술가가 영감을 받는 순간을 과장되게 묘사한 거겠지만. 어쨌든 그 예술가에게는 보이고 들리는 거겠지. 그냥 커다란 돌조각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그런데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건, 사실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원석, 유망주, 루키. 그런 말이 칭찬인 건 알았지. 그렇지만 우쭐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어. 딱히 내가 겸손해서가 아니야. 올 포지션이 가능한 건 무엇이든 잘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엇도 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잖아. 그릇에 담긴 물처럼 모양을 바꾸는 거. 좋으냐 싫으냐 묻는다면 좋아. 질타보다는 칭찬이 낫지. 그렇지만 영원히 가능성에 머물 수는 없었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건 아무것도 되지 않았을 때만 가능한 거였어.
모든 것을 동시에 다 할 수는 없어. 코트에 서는 순간 나는 어떤 포지션을 선택해야 해. 가능성이 지속될수록, 종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기대를 상회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져. 계산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야.
슈퍼 루키. 너는 이런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을까?
아마 없겠지. 넌 계산을 하지 않아. 그게 네 최고의 무기야.
그렇다고 네가 무적은 아니지. 나를 만났으니까.
많은 이가 묻지만 너는 한 번도 나에게 묻지 않은 게 있어. 왜 료난 고교에 진학했냐고. 신기한 건 그 누구도 왜 카나가와냐고 물어보진 않아. 왜 료난이냐고. 카이난도 쇼요도 아니고. 중학교 때 잘했으니까 둘 다 불가능은 아니었을 거야. 도전한 적이 없어서 이젠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영원히 가능성으로 남는 거지.
간단히 말하면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대가리를 하고 싶었을 뿐이야. 중학교 때 느낀 건 농구만큼 원 맨 캐리가 쉬운 팀 스포츠도 드물다는 거였어. 동시에 객관적인 전력 차이를 우연이나 기세 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스포츠이기도 하다는 거. 공은 하나이고 오직 두 손과 육체만으로 그걸 컨트롤하니까. 결국 언더독 팀이 걸어 볼 만한 반전은 미친놈 하나가 날뛰는 거지. 누군가 얼마나 미치느냐에 따라서, 또 팀이 그놈을 얼마나 받쳐 주느냐에 따라서 경기 결과가 달라질 수 있잖아. 물론 중요한 순간에 미친놈처럼 날뛰려면 많은 것을 타고 나야 하고, 죽도록 훈련을 쌓아가야겠지. 결국 그게 객관적인 전력이니까 도돌이표 같은 얘기지만...
어쨌든 난 미친놈처럼 날뛰고 싶었던 것 같아. 멋부려 말한다면 임팩트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지. 어차피 도쿄를 떠나 어떤 고등학교 농구부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선택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 될 수밖에 없는데. 나의 입장이 이미 맛있는 케이크에 딸기 한 개 더 올리느냐 마느냐 하는 정도의 시시한 장식이 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아. 난 나한테 주도권이 있는 게 좋거든. 입학시험을 통과하는, 주전으로 선택받는, 불특정 다수 속에서 선발되는 그런 종류의 도전에 끌리지 않더라고. 곧바로 부딪히고 싶었어. 자신도 있었고. 내가 날뛰기 시작하면 영원히 뱀에서 그치진 않을 거라고.
가능성을 제한하는 선택. 장애물을 설치해서 물살의 방향을 정하는 작업이었어. 사실 난 최적의 성장 조건은 최적의 장애물이라고 봐. 나의 한계를 뛰어넘지만 그렇다고 너무 높아서 의욕까지 꺾진 않는.
료난은 장단점이 뚜렷한 팀이지. 사실 그거야말로 성장이 쉬운 조건이야. 장점을 키우고 단점을 보완하면 되니까. 뭐든 잘 할 것 같은 게 진짜 불안한 거야. 생각보다 방향을 잡기 어려워. 그래서 나는 단점이 뚜렷한 팀의 명백한 장점이 되고 싶었어. 철저히 계산적이지. 실제로 결과를 어느 정도 얻었고.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는 (계산할 줄 모르는 건 아닌지 가끔 의심하곤 해) 슈퍼 루키에겐 낯선 사고방식이겠지. 감독님이 너는 가까워서 쇼호쿠에 갔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나.
그렇지만 난 너와 달라. 합리적인 계산 끝에 료난을 선택했어. 그게 내게 가장 이득이 될 것 같았어. 료난의 환경과 조건이 나를 가장 강하게 키울 것 같았어.
아마 너에겐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사실이겠지. 전철 몇 구역만 가면 네가 원할 때 언제나 나를 찾아올 수 있었다는 결과적인 편리함을 제외하면.
사실 나한테도 그게 제일 중요하긴 해.
너를 처음 봤을 때는 불꽃이라고 생각했어. 화려하게 춤추는. 눈부시게 빛나는. 뜨겁게 전염되는.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 조각가가 우리 경기를 봤다면 점프하는 네 모습을 대리석으로 빚었을 것 같아. 예술가의 도전 의식을 자극할 만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해. 썩지 않는 돌 속에 영원히 박제할 만한 약동이었다고. 나는 기억 속에 새겨 놓아 그럴 필요가 없지만.
쇼호쿠에 지고 나서 많은 생각을 했어. 어떤 생각은 사소했지. 쓸데없었고. 그런 건 흘러갔어. 기억도 안 나. 반면 끝까지 남는 것들도 있어. 내 의견일 뿐이지만 사실일 가능성이 조금 더 높은.
그냥, 다 지나고 나면 여러 생각을 하게 되잖아. 원래 계산적인 사람들은 그래. 이미 끝났는데도 수식을 뒤적거려. 마치 그걸 바꾸면 결과가 달라질 것처럼.
그땐 너한테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너를 무시해서가 결코 아니야. 계산이 서기 때문이야. 전국 대회 진출 결정전에서 쇼호쿠의 가장 큰 장점은 센터와 너. 가장 큰 단점은 선수층이 얇고 감독이 부재했던 점. 사쿠라기는 미지수.
너는 무섭지 않았어. 넌 최고의 무기지만, 작동법이 잘 알려진 무기였고, 예상 가능한 무기였기 때문이야. 특히 나는 모든 포지션에 자신 있는 슈퍼 루키의 맹점을 누구보다 잘 알아. 거울을 들여다보면 되는 일이지.
결과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미지수만큼 무서운 게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은 경기였어. 계산이 익숙한 사람에게 예측이 불가능한 변수만큼 두려운 것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위협감을 느끼기엔 너무 초보적인 미지수라서 그저 흥미롭다고 여겼던 것 같아. 복기해 보면 이 지점도 방심이었는지도.
센터 싸움에서 밀린 건 분하지만 우리 팀의 단점이지. 난 그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어... 어쩌면 그런 결정이 패배에 기여했는지도 몰라. 난 너에게 너무 집중했어. 틀린 판단은 아니지. 판단하에 집중했다기보다 끌려갔던 게 꺼림칙할 뿐. 눈을 뗄 수 없는 방식으로. 너와 맞대결이 정말 재밌었거든. 농구는 팀 경기인데도 말이야. 당연히 궁극적으로는 너를 막는 게 그 무엇보다 팀 승리에 기여하는 일이고, 네가 센터 싸움을 도울 정도의 여유를 주지도 않았지만...
그냥 너와 승부할 때마다. 그 모든 초 단위의 플레이가 너무 즐거웠다는 게. 팀의 패배 후엔 고스란히 죄책감으로 반전했나 봐. 이겼다면 최고의 경기였을 텐데 말이야. 가끔 우리가 가는 길이 너무 극단적이고 잔혹하다고 생각해. 농구라는 경기가. 1점 차이로 모든 판단이, 결정이, 과정이, 플레이가 최고로 아름다워질 수도 죄책감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졌는데 베스트 5가 됐을 때 기분이 아주 나빴어. 뱀의 머리가 되고 싶다는 게 그런 뜻은 아니었거든. 나 혼자서 튀고 싶어서 료난을 선택한 게 전혀 아닌데. 누구도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해도 혼자서 화가 났어. 결과가 이렇게 된 건 다 내가 모자라서라는 오만한 책임감에 빠져 있었거든. 패배 직후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말이야. 그땐 내게 주어진 기회의 횟수를 세고 있었어. 내 주장에게 주어졌던 기회도. 내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보다 누군가의 마지막 기회를 날린 듯한 기분이 특히 더러웠던 것 같아.
하지만 지나고 나면 기분이 결코 사실은 아니라는 것도 실감이 나.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답이 없는 기분 속에서 빠져나왔어. 다행히도 그랬을 때 너를 다시 만났어.
넌 잘 모르겠지만 료난의 선후배들은 내가 농구 코트 안과 밖이 많이 다르다고들 해. 이중인격 같은 건 아니야. 그저 상황이 다를 뿐이야. 코트 안에서는 팀플레이가 우선이지만 인생은 혼자 사는 거니까. 또 농구는 초 단위로 결과가 나오지만 인생은 앞일을 모르지. 나비의 날갯짓이 인생 전체로 봤을 때 어떤 폭풍을 일으킬지. 그래서 구체적인 미래보다는 나아가려는 큰 방향성만 목표하는 것이 정확도가 높아진다고 생각해. 전제가 달라서 결과가 달라졌을 뿐, 나는 언제나 최선의 효율을 계산하고 예측하고 판단해서 선택하는 사람이야. 그러다 보면 시간이 정말 잘 가더라. 정신을 차려보면 하루가 지나 있고 그래.
연습 경기에 늦잠을 자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크게 중요한 실수는 아니라고 생각해. 진짜 경기도 아니니까. 훈련을 빠지고 너와 농구하는 것도 들키면 미안한 일이지만 미래를 크게 바꿀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어. 들키지 않는 것에만 주의하면 된다고 믿었지.
그렇지만 너는 항상 내 알량한 계산을 부수려는 기세로 달려들어. '기세'라는 단어가 영어에는 없다는 거 알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동적인 힘. 너는 기세가 옷을 입고 농구하는 사람 같아. 네 별명 중 '루키'가 젊음에 대한 찬사라면 '슈퍼'는 기세에 대한 경외일 거라고.
너는 바스켓은 산수가 아니라고 단언하지.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계산하는 습관이 들어 버린 이유를 예측이 들어맞는 메시아 놀이를 하고 싶어서라고 오해하면 서운해. 대략 예측대로 돌아가는 세상을 살다 보면, 그 무엇보다 짜릿한 게 예측할 수 없었던 돌발이거든.
그리고 너는 돌발 그 자체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어. 그 희열. 아무것도 계산할 생각이 없는 너는 영원히 모를 거야.
사실 그날도 너는 승부하자고 했지 훈련하자고 한 적은 없었어. 죽자고 농구하는 건 비슷해 보여도 둘은 엄연히 다른 행위니까. 훈련 중에 같은 팀원들과 경기를 하기도 하지만 누구도 그런 걸 승부라고 보진 않아. 스코어도 승패 기록도 중요치 않지. 훈련은 과정과 배움이 전부니까.
그런데 너와 승부하다 보면 내가 알던 개념이 흩어져. 너는 다른 무엇보다도 승부의 과정에서 배우는 것 같아서. 파죽 같은 기세로 오직 결과에만 눈이 돌아 있는데 그 과정에서 성장해. 사냥을 하면서 허물을 벗는 동물도 있나? 신기해.
아무도 스코어를 세어 주지 않는데 끝없이 달려드는 너. 아무리 상대해 줘도 이상하게 질리지가 않던 나. 사실 스코어를 셀 필요가 별로 없었지. 간발의 차로 내가 계속 리드하고 있었으니까. 너에게는 이길 때까지 달려드는 게 곧 승부이자 훈련인 것 같더라.
그래서 내가 보는 세계를 조금 말해 주고 싶었어.
사실 그건 그날 즉흥적으로 들었던 생각은 아니야.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세 번 승부하며 계속 했던 생각이야. 내가 너에게 아직은 지지 않는다고 확신했던 이유. 당시 네가 부딪혀 있던 한계 말이야.
그걸 알려 준 건 순전히 감정적인 충동이었어. 나답지 않았지. 뒤늦게 계산해 보면 그건 나에게도 료난에게도 득 될 것 없는 행동이었어. 심지어 넌 나에게 딱히 가르침을 구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사실 내버려 두면 네가 알아서 깨달았을 확률이 높기도 했어. 나도 2학년 때 알았거든. 패스, 공격 루트의 다양화, 경기 운용의 재미. 그런 거. 너는 내가 아니라서 어쩌면 나보다 더 잘할 수도 있는 것들 말이야.
이전의 내가 아니었던 것이 되어가는 과정. 그건 기술적으로 보기엔 공격 포지션을 벗어나 올라운더가 되는 것 같지만, 나에겐 무한한 가능성에서 하나를 택하는 작업이었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가는 것. 암석 덩어리에서 윤곽을 쳐내는 것.
너도 같을 거라는 확신 같은 건 없었어. 대리석 덩어리에 뾰족한 정을 갖다 댄 순간 엄습하는 의심. 이 각도에서 이 정도 힘으로 망치를 내려치는 게 맞을까? 너는 나에게 아무 말도 안 했어. 꺼내 달라는 그런 예술적 영감은 찾아온 적이 없어. 그런데도 나는 입을 열었지. 몸으로 부딪힌 승부로 끝나지 않고 굳이 말을 보탰어. 너는 충격받은 얼굴이었지. 하지만 내 말을 이해했는지는 의문이었어.
저질러 놓고 집에 누워서 생각해 보니, 이길 게 없는 게임이더라고. 네가 내 말을 이해하고 한 단계 더 성장하면, 료난의 손해. 내 말을 이해 못 하고 그대로 머문다면, 쓸데없는 말 낭비. 내 말을 잘못 이해하거나 지나치게 의식해서 독이 된다면 (이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 놈인 건 잘 알지만) 슈퍼 루키를 잃은 일본 고교 농구계의 손해...
그렇지만 네가 나를 찾아왔잖아.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눈앞에 네가 나타났다고.
그건 예술가가 들었다는 목소리보다 훨씬 강력한 거 아닐까. 계시가 아니라 현현인데.
너는 부딪힐 만한 한계를 찾아서 나한테 온 거잖아. 지금까지 어떤 조건과 환경이라도 상관없었던,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지 못했던 네가. 나는 네가 부딪힌 첫 번째 벽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어. 그래서 내가 너의 진짜 성장의 시작이라는 것도. 너는 기로에 서 있었어. 슈퍼 루키에서 루키를 떼고 에이스로 넘어갈 수 있는지.
나는 가만히 벽이 되어 그저 존재할 수도 있었어. 그냥 해 달라는 대로 하고 돌아서거나. 아니면 애초에 널 지나쳐서 원래 예정된 훈련을 하러 갈 수도 있었지. 넌 준비된 게 없었잖아. 승부해 달라면서 농구공도 없이, 편안한 옷도 없이 찾아왔어. 그냥 귀여운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수도 있었을 거야. 굳이 내 자취방까지 데려가서 이것저것 챙겨 나올 필요는 없었을 지도 모르지. 어차피 다음 경기에서 네가 또 부딪히러 왔을 테니까. 혹은 우리 팀을 이기고 전국 대회에 간 네가 또 다른 벽을 만날 테니까...
그렇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기를 택했어. 그저 존재하는 벽보다는 조금 더 뾰족한 의도를 가지기로 했어. 이대로 나를 넘기 전에 또 다른 벽을 만나는 건 돌이켜 생각해도 그렇게 내키지 않아. 너도 그런 마음으로 날 찾아온 거잖아. 네가 헛손질을 하는 건 왠지 나에게도 낭비라고 느껴졌어. 내가 여기 있는데 굳이?
너를 코트에 남겨 두고 집으로 가면서 나는 대리석을 조각하는 사람들을 생각했어.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 말이야.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아. 농구도 결국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라고. 팀의 승리이거나. 심지어 승리가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무언가... 공간을 꽉 채우는 역동하는 에너지. 지금껏 쌓아 온 시간과 연결된 판단이 뭉쳐서 오로지 찰나를 빛내는. 그건 돌로 붙잡지 못해 쉽게 잡음이 끼는 비디오나 연속된 몇 장의 사진, 아니면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영원히 기억으로 박제되어 버리지만. 어쨌든 포착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리석 조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우린 모두 조각가들이었다고...
나는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만들 손재주는 없지만.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 당연히 해야 하는 료난의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나만의 무언가를... 팀이 아닌 내 손으로.
새하얗고 매끄럽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대리석에 손을 대는 건 아주 리스키한 일이야. 사실 내 성격엔 정말 맞지 않아. 더 아름다운 것이 나오리란 보장이 없는데. 그럼에도 나는 위험을 무릅썼다고 말하고 싶은가 봐. 생색을 내고 싶은 걸까? 조금 다른 것 같아. 너의 폭풍 같은 기세가, 투명하고 직선적인 불꽃이, 순수가 순수인 줄 모르는 순수하고 매끈한 단단함이... 나를 그만큼 휩쓸어 갔다고 탓하는 거야.
나는 내 입에서 나간 말들이, 함께 보낸 시간이, 너에게 승리의 날개가 되어 주길 진심으로 바랐어. 어쨌거나 날개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으니까. 르네상스 대리석 조각에 천사와 여신과 성자들이 많은 건 그래서일지도 몰라.
경기 이외에 네가 나를 개인적으로 찾아온 건 딱 세 번이지.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왔다가 그냥 간 건 아니지? 혹시 그랬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우연한 만남으로 느껴지긴 했어. 약속을 하긴커녕 넌 언제나 제대로 준비된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두 번째는 쇼호쿠가 전국 대회 2회전에서 패하고 돌아온 직후였던가. 네가 내 자취방 초인종을 눌렀어. 의도치 않은 모닝콜이 됐지. 나는 늦잠을 자서 훈련에 늦었다는 걸 네가 깨워줘서 알았고. 너는 한심해하는 것 같았지만 난 두 번째도 농구공 없이 몸만 달랑달랑 온 네가 더 황당했어. 첫 만남이 워낙 강렬해서 당연히 나와 일 대 일 승부를 하자고 온 줄 알았던 거야. 쇼호쿠의 전국 대회 성적은 알고 있었어. 그래서 화풀이를 하러 온 걸지도 모른다고, 확증 편향에 무게가 더 실리기도 했지. 난 어차피 훈련에 늦은 김에 그냥 너랑 농구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 이것도 어쨌든 농구 훈련이니까.
어쩌면 처음부터 승부하러 온 게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뒤늦게 했어. 그럼에도 너는 승부를 거절하는 법이 없지. 내가 자연스럽게 농구공을 들고 코트로 향하는 걸 막지 않았어. 흐르는 듯이 자연스럽게 우리 둘만의 농구에 빠졌지. 네 입장에선 두 번째는 내가 일 대 일을 신청한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날도 재미있는 한 판이었어. 한여름인지라 열사병에 걸리기 전에 멈춰야 했지만. 그때도 말했지만 너는 전국 대회 두 경기만에 농구가 늘어 있었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플레이를 했지. 내가 키타자와라고 잘못 말했던 친구에게 배운 것 같았어. 승부를 하며 또 성장해 온 거야. 이건 예측 가능한 영역이긴 했지만 그래도 순수하게 감탄했어.
늘었다고 말하면 넌 코웃음 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서. 그건 좀 귀여웠어. 처음으로 후배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농구할 때는 네가 1학년인 걸 자주 잊어버렸거든. 내가 1학년 때보다 잘 했으니까.
그때 네가 전국 대회 얘기를 했지. 자세한 플레이 얘기는 하지 않았어. 경기 결과도 내가 알고 있다고 하자 부연하지 않았지. 넌 전국 대회 얘기를 하는데... 전국 대회에 가지 못한 선수 얘기를 했어.
그건 나였어.
넌 전국에 나보다 더 나은 녀석이 없었다고 했어.
당연히 나는 반박했지. 그렇지 않을 텐데. 실제로 키타자와...가 아닌 사와키타와 맞대결하고 온 너는 성장해 있었고. 내가 아닌 더 높은 벽에 있는 힘껏 부딪히고 돌아왔고. 2회전을 넘지 못했고. 그만큼 더 많은 것을 배워 강해졌을 것이고.
그런 뜻이 아니라고 네가 말했어.
나는... 센도 아키라는 루카와 카에데에게 그냥 벽이 아니라고.
내가 했던 말, 이제 무슨 뜻인지 안다고.
산노를 이긴 건 그걸 깨달아서였다고. 사와키타 에이지는 루카와 카에데에게 이겼지만 산노는 쇼호쿠에게 졌다고. 아이와 경기에선 여러 가지 역부족이었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시점은 산노전 승리였다고. 그 이후로 뭔가... 달라졌다고.
너는 열심히 말을 이었어. 묻지 않는 말에 네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 봤어. 오랫동안 정리해서 전하기로 한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어.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은 쳐부수면 돼. 마지막엔 내가 최고가 될 거니까.상대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사와키타도 그랬어. 자기가 최고니까 나를 눌러 버릴 거라고.
그런데 너는 이제 쳐부술 수 없잖아. 더 잘하는 방법을 나한테 알려줬잖아. 우리 팀도 아닌데.
네가 나한테 뭔지 모르겠어. 적인지, 라이벌인지... 동료인지... 셋 다 아닌 것 같아.
어쨌든 네가 아니었다면 이기지 못했을 거야. 그걸 인정하고 싶었어.
확실한 건 너 같은 녀석은 전 세계에도 없어."
끝을 모르는 아득한 어둠으로 떨어지는 오싹한 기분이었어.
나는 네가 그것을 깨달을 줄 몰랐어. 내가 너에게 끼친 영향을. 대리석 조각의 눈동자가 움직여서 조각가를 똑바로 바라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조각에게 조각가의 정체를 들켜버린 거야.
너는 네가 던진 질문에 스스로 대답을 해 버려. 그냥 농구 실력에 대한 얘기였는데 이제는 아니야. 우리는 그전과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 거야. 내가 너를 바꾸어 버려서. 내가 몰랐던 나의 가치를 못 박아 버리는 건 오히려 너였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들은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어. 그렇지만 액면 그대로 '감사'를 들었다면 오히려 모욕적이었을지도 몰라.
나는 무엇을 만든 것일까? 확신도 없는 상태로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예전의 나는커녕 지금의 나까지 따라잡힌 기분이었어. 더 이상 너를 위에서 조언할 입장이 아니었어. 나는 1학년 여름 때 전혀 몰랐던 것들을 너는 완전히 체득해 버렸으니까.
나는 더 이상 너에게 해 줄 말이 없었어. 이제부터 만나는 너는 새로운 사람이니까. 적도 라이벌도 동료도 아닌 채.
그날 너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어. 나에게도 너 같은 녀석은 없어. 아마 영원히.
마지막으로 네가 나를 찾아온 건 윈터컵 현 예선 직후였어. 우린 사쿠라기가 빠르게 복귀한 쇼호쿠에게 또 한 번 카나가와의 전국 대회 티켓을 내줬지. 자유투 실패 한두 개가 달랐다면 달라질 수 있었던 아쉬운 결과였어. 그만큼 최선을 다했고 어느 한 쪽이 우월하다 할 수 없었어. 원래 그런 경기에서 지면 제일 억울하잖아.
그날 나는 해가 진 뒤에 미끼도 없는 낚시를 하고 있었어. 패배 후엔 늘 그렇듯이 바다에 많은 생각을 흘려보내며. 조금 쓸만할 것 같은 생각은 붙잡아 놓고. 수없이 많은 기분이 밀려들었어. 이상하게도 여름만큼 화가 나지 않았어. 난 그게 당황스러웠어.
현 예선에서 나는 확실하게 느꼈어. 네가 이미 나를 따라잡았다고. 1학년의 내가 아니라 2학년의 나를. 여름의 예감은 현실이었던 거야. 이제는 반대로 네가 나의 벽이 되어 나를 성장시켜 줄 차례인 걸까? 1학년 때부터 내가 넘어야 하는 벽은 카이난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너에게 집착하는 건 과거를 반추하는 재미인 것 같았지만 실은 미래와도 닿아 있었던 거야. 기세를 타고 달려가는 너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어느새 너와 함께 나의 미래를 보고 있었어.
의식의 흐름을 굳이 붙잡을 생각 없이 앉아 있는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던 그림자. 너는 그날도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어. 바다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어. 수평선 너머로 넘어가기 직전, 짙어진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 찡그리던 너의 눈매가 생각나. 실내 운동인 농구 선수는 입을 일이 없는 두꺼운 벤치 코트를 무릎 아래까지 꼭 닫고서 침낭처럼 후드를 꼭 싸매고 있었지.
인사를 하면서 나는 웃고 있었던 것 같아.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으니까. 여름에 비하면 확실한 패배인데도. 네가 성장하는 동안 나도 그만큼 성장해야 했는데. 너보다는 속도가 느렸던 것 같아. 반성은 되지만 화는 나지 않았어. 내 약점이 분명한 상황이 싫지 않았으니까. 이젠 반대로 내가 네 가르침을 깨닫는 순간을 기다려야 할 지도. '바스켓은 산수가 아니다.' 지금 생각해도 멋진 한 방이었어.
인사를 받아 주는 너는 웃지 않았어. 언제나 그랬듯이. 전국 대회 진출을 축하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어. 이번에는 승부하러 온 건지 미리 확인을 해 봤는데, 아니라고 했어. 그럼 무슨 용건일까 생각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어. 네가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거든. 어차피 네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아무 말 없는 너를 두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봐. 네가 말없이 내 손에서 낚싯대를 빼앗아 바닥에 내려다 놨어. 너는 낚싯줄을 거둘 줄 몰라서, 그러다가 낚싯대 째로 바다에 빠뜨릴까 봐, 우리는 한바탕 허둥거렸지. 결국 내가 낚싯대를 갈무리하고 너를 마주 봤어.
까만 벤치 코트 속에 파묻힌 너의 까만 눈. 아직 영하는 아닌데 조금 쌀쌀해졌다고 벌써 빨개진 코끝. 그런 게 클로즈업된 사진처럼 기억이 나.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던 너. 낯설었어. 너답지 않다고 느꼈어.
미국에 가기로 했다고. 너는 그 말을 하러 온 거였지.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건 없다고. 하지만 여러 학교와 연락 중이고, 윈터컵 결과에 따라 최종 합격이나 장학금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미국은 9월에 학기를 시작한다고. 그래서 내년 여름방학까지는 일본에 있을 것 같다고. 하지만 적응을 위해서는 썸머 캠프부터 가는 게 좋다고 하니 인터하이는 출전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그래서 이번 윈터컵이 마지막 전국 대회라고.
거기까지 말하고 너는 잠시 입을 다물었어. 우리는 침묵했어. 우리 사이에 침묵이 불편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네가 망설이다가... 눈에 띄게 망설이다가 덧붙였던 걸 기억해.
"너한테 제일 처음 말하는 거야."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어. 버릇처럼 그럴듯한 몇 가지 가설은 세울 수 있었겠지. 쇼호쿠 팀원에겐 아무래도 윈터컵 단결에 방해가 될까 봐 끝나고 말하려고 했다든가, 주변의 친한 친구들에겐 일정이 확실해진 뒤에 말하려 했다거나.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적도, 라이벌도, 동료도 아닌 나에게 가장 먼저 말해 주는 이유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어.
그렇지만 왜냐고 묻지도 않았어. 이유를 알게 되면 그 감정이... 감동이라 부를 수 있는 떨림이 사라질까 봐. 무서웠어. 너도 떠나고 이 순간의 감정까지 사라진다면. 나에게 남는 것이 너무 적잖아.
솔직히 말하면 내 졸업이 다가오는 때에 우리의 적도, 라이벌도, 동료도 아닌 관계가 끝날 거라고 무의식중에 예상했던 것 같아. 그때가 오면 나는, 인생의 모든 기로에서 그랬듯이, 구체적인 미래는 예측할 수 없지만 큰 방향성을 정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관계가 적도, 라이벌도, 동료도 아닌 다른 무언가를 지향할 수 있도록, 어떤 답을 내려야 한다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어.
그렇지만 2학년 겨울방학을 앞둔 시점에선 졸업이 아직 멀어 보였어. 그래서 미뤘어. 너와의 관계에 어떤 답을 내리는 걸. 그리고 너는 떠난다고 말했지.
물론 너는 끝이라고 말한 적이 없어. 나는 그걸 듣는 게 두려워서 먼저 작별 인사를 했어. 잘 가라는 말을 먼저 하고 나서 축하한다고 덧붙였던 것 같아. 사실 축하하고 싶지 않았거든.
미국은 내가 상상해 본 적 없는 세계였어. 국내에서 평생 농구를 놓지 않고도 먹고사는 삶을 상상한 적은 있었어. 그렇게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미래는 구체적인 직업보다 방향성을 목표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여겼으니까. 무엇을 하든 농구처럼 하면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나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어. 그보다 덜 재미있으면 더 재미있어 보이는 무언가를 찾아가면 된다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너에게 미국이라는 세계를 알려줬겠지. 뒤따라 갈 만한 미래를. 어느 때보다 네가 나를 넘었다는 게 사무치는 순간이었어. 내가 꿈꿔 본 적도 없는 낯선 미래로 나아가기로 했다고 선언하는 너. 네가 나의 미래가 될 거라는 건 착각이었어. 이제 내가 너의 과거에 머물게 된 거야. 결코 돌아보는 법 없는 너의 뒤에 서게 된 거야.
그건 분명한 좌절이었어. 나는 너에게 좌절을 내보이기 싫어서 입을 다물었어. 너는 가만히 잠시간 내 말을 기다렸어. 잘 가. 축하해. 그것 말고 다른 말이 없는지 기다려줬어. 그렇지만 나는 떠오르는 어떤 말도 꺼내기 싫었어.
우리가 적이거나 어떻게든 서로를 이겨 먹으려 드는 라이벌이었다면 쉽게 나도 간다는 말이 나왔을 거야. 그렇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이 아니었어. 여름에 네가 나를 찾아왔고, 내가 너를 바꾼 이후로는. 적도 라이벌도 동료도 아닌 나는 무엇으로 너의 곁에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질문을 꺼내기가 두려웠어. 어떤 답이 나올지 알 수 없는 게 무서웠어. 무슨 답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원하던 답을 듣지 못하면 영원히 무너질 것 같았어.
적도 라이벌도 친구도 동료도 가족도 아니기 때문에, 네가 가장 먼저 이별하러 온 게 나라면. 아무것도 아니라서 우선이 될 수 있다면. 끝까지 너의 처음으로 남을 수 있다면. 난 그런 알량한 우월감에 매달리고 싶었는지 몰라. 간단하고 비겁한 논리야.
나는 다시 낚싯대를 잡지 않았고 너는 쉽게 돌아서지 않았어. 우리는 꽤 오랫동안 마주 보고 있었던 것 같아. 해가 다 넘어가고 바다가 칠흑같이 물들 때까지. 바닷가의 밤바람은 거셌고 네가 요란하게 재채기를 했어. 나는 낚싯대를 정리했어. 역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 너는 거절했어. 우리 집에서 자고 가도 되냐고 물었지.
그때 거절했으면 너는 잠자코 집에 갔을까?
이젠 영원히 알 수 없는 가능성일 뿐이지만.
그 이후로는 시간이 아주 빠르게 흘렀던 것 같아. 사실 나는 기억나는 게 별로 없어.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 앞서가던 게 나였는지, 너였는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누가 먼저 씻었는지. 내가 늘 하던 대로 설거지나 빨래 걷기 같은 자질구레한 가사를 하는 동안 너는 무얼 했는지. 모든 게 어색한 동시에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 내 집에 네가 계속 있는 게. 곧 떠나게 될 네가. 우리는 꼭 필요한 대화 외에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해. 혹은 영원히 기억나지 않을 아주 쓸데없는 잡담을 나눴을지도 몰라.
비로소 잘 준비를 하고 누웠던 게 몇 시였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원래 시간관념이 정확한 편은 아니지만. 적당히 어두웠고 충분히 피곤했기 때문에 너나 나나 하루를 끝내기로 했던 것 같아. 내 자취방엔 키에 맞추느라 널찍한 침대를 넣는 대신 이불을 하나 더 깔 공간이 없어서 우리 둘 다 침대에 누웠던 건 똑똑히 기억해. 그래도 최대한 양쪽 끝에 붙으면 우리 둘 다 누울 수는 있었어.
너를 자주 본 건 아니지만 농구를 하지 않을 때 쉽게 눈을 붙인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 농구공을 가지러 우리 집에 들르거나, 일 대 일 도중에 잠깐만 틈이 생겨도 졸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네가 모로 누웠을 때 이미 잠들었다고 생각했어. 너는 벽 쪽에 등을 대고 나를 향해 누웠지. 나는 똑바로 천장을 보고 있다가 눈을 감았어. 그렇지만 잠들진 못했지.
난 내가 오랫동안 잠들지 못할 걸 알았어. 이미 네 옆에 누운 순간부터 긴장하고 있었어. 혹시 팔꿈치가 서로 닿을까. 허벅지가 서로 닿을까. 닿지 못하게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들키기 싫었어. 미국에 가면 넌 누구랑 방을 쓰게 될지 생각하기도 했어. 내가 그런 시답지 않은 고민을 하는 사이에 이미 너는 잠들었을 거라고 확신했지. 문득 자는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고개를 돌려서 너를 바라본 거야.
달빛에 까맣게 반짝이는 너의 눈동자와 마주칠 줄 모르고.
난 그때 정말 숨이 멈춰 버리는 줄 알았어. 실제로 잠깐 멈췄을 거야. 너도... 숨 소리를 내지 않았어. 내가 고개를 돌릴 줄 몰랐다는 듯이... 평소처럼 무표정했지만 아주 약간 놀란 얼굴이라고 느껴졌어. 왜냐면 넌 꽤 오랫동안 눈을 깜빡이지 않았거든. 물론 나도 그랬고.
나의 어깨와 너의 어깨 사이에, 아무도 숨을 쉬지 않는 진공이 발생한 것 같았어. 나의 얼굴과 너의 얼굴이 그 진공 속으로 빨려 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그건 정말 이상한 순간이었어. 아주 찰나였지만. 지금도 나는 눈을 감으면 그 시공간 속에 존재하던 감각을 정확하게 되살릴 수 있어.
네가 먼저 눈을 깜빡였어. 내가 먼저 조심스럽게 숨을 쉬기 시작했어. 한숨 같은 날숨이 나왔어.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다시 천정을 볼 수 있었어. 네 반대쪽에 있는 손을 들어서 내 눈을 가려버렸지. 너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내 옆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으니까.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어. 얼마나 지났을까. 네 쪽에서 얕은 숨소리가 들리고. 따스한 잠숨이 내 귓바퀴까지 닿았어. 나는 솔직하게 사랑스럽다고 인정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 밤 다시는 네 쪽을 보지 않았어.
그건 기회였을까?
이젠 알 수 없겠지. 나는 가능성의 영역에 남겨 두기를 택했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만큼 무서운 건 없었어.
그렇다 해도.
너와 나는 영원히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곳에 남겨 두기로 했어.
현 예선에서 우릴 누른 쇼호쿠가 전국 대회 결승전에 갔다고 해서 패배가 덜 억울해지는 건 아니었어. 료난 농구부는 우리가 가지 못한 전국 대회를 공부 삼아 견학하기보다는 내년을 바라보고 훈련하길 택했어. 하지만 난 도쿄에서 열린 전국 대회 결승을 보러 갔었어. 솔직히 말하면 널 보러 간 거야. 내가 달아 준 날개로 비상하는 너를 보고 싶었어.
쇼호쿠의 경기는 언제나 재미있어. 쇼호쿠에는 너 못지않게 기세로 가득한 녀석들뿐이야. 쉬운 일이 아닌데. 불꽃 다섯 개를 합친다고 꼭 커지는 건 아닌데, 쇼호쿠는 불꽃에 기름을 붓고 가스를 던지고 폭탄을 굴린 듯한 팀이야. 언제 불발할지 언제 폭죽이 터질지 알 수 없어. 그럼에도 여름보다 팀플레이가 다져진 게 강력했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핵폭탄 같은 팀에서, 예리한 조준 기능을 단단히 추가한 핵미사일 같은 팀이 된 것 같았어.
료난과 가장 다른 점은 스타팅 다섯 명 중 네 명이 경기의 주인공이 되려고 날뛰고 있다는 점이었지. 료난은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정하는 편이야. 대부분의 팀이 그렇지. 쇼호쿠는 작전과 별개로 모두가 기회만 온다면 경기를 지배하려고 해. 난 그게 마르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이라고 생각해. 예측 불허의 플레이가 나오는 토양이기도 하고. 쇼호쿠는 거친 원석끼리 부딪혀 가며 서로를 조각하고 승리를 형성하는 팀인 것 같아.
농구가 팀플레이인 건 맞지만, 결국 스포츠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건 영웅이고, 쇼호쿠는 너도 나도 모두가 영웅이 되려고 해. 그럴 자질이 충분하기도 하지. 영웅이 한 명인 팀보다는 네 명인 팀이 유리하고. 게다가 영웅끼리 팀플레이도 맞는다면? 모두가 기적이다, 이변이다 말했지만 나는 쇼호쿠가 전국 대회 결승까지 간 게 놀랍지 않았어.
그날의 영웅은 누가 봐도 너였어.
마지막 버저비터는 네 손에서 나온 삼 점 슛. 쇼호쿠 벤치가 쏟아져 나왔고 모두가 너에게 달려들었어. 사쿠라기가 너의 머리를 마구 헝클며 쓰다듬는 건 충격적인 장면이었지.
나는 1층 맨 뒷좌석에 있었어. 내 키 때문에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만 너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전체가 잘 보이는 2층을 버리고 내려와 있었어. 결국 나는 농구 공부를 하러 온 게 아니라. 너를 보러 온 거니까.
그렇지만 네가 나를 볼 줄은 몰랐어.
어쩌면 내 착각이었을지도 몰라. 우린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
다시 진공 상태로 돌아간 것 같았어.
네가...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접으며 환하게 웃었어.
시간이 멈췄어.
그다음 장면은 잘 기억이 안 나. 아마 네 웃는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팀원들이 더 격렬하게 겹쳐졌겠지. 너와 몇몇 주전이 코트 바닥을 뒹굴었던 것 같기도 해. 선수들은 서로를 밀고 당기며 감독을 헹가래 치러 달려갔겠지. 모든 사람이 지나가며 너의 머리를 헝클어 버렸을 거야. 눈앞엔 대충 그런 게 지나갔으리라고 예상돼.
난 그런 걸 보고 있지 않았어. 나도 너를 따라 크게 웃고 싶었어. 동시에 더 크게 울고 싶었어. 나는 날개를 보고 있었어. 내가 달아 준 날개. 네가 스스로 펼친 날개. 비상도 이별이라는 걸 그때서야 알았어. 그렇지만 승리의 여신에겐 머리도 팔도 없어도 날개만은 있어야 하니까. 비록 너의 승리가 나의 이별일지라도.
그때는 그게 많이 슬펐어. 네가 조각해 낸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나는 비참함을 느끼는 게 싫었어.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분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돼.
너를 보낼 준비를 하며 나는 비상이 이별이 되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을 알았어. 들어 볼래?
모든 슛은 땅에서 하늘로 솟구치고. 모든 날개 달린 것들은 땅에서 하늘로 비상하니까.
내가 하늘이 되면 돼. 결코 돌아볼 일 없어도 항상 등 뒤에 있는.
그렇게 생각하면 네 뒤에 남는 것이 무엇보다 영광스러워.
그러니까 루카와. 언제든지 기억해. 네가 넘어져도 멈춰도 심지어 후퇴한대도. 나는 기꺼이 다시 네 옆에 있을게. 예전에 네 앞에 처음 섰던 벽은 더 이상 아니지만. 농구를 해도 안 해도. 농구와 아무 관련 없이 살아도. 그때는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에서 내가 먼저 걸어 나올게. 그때는 내가 너의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려 줄게. 헷갈리지 않게.
지금 내 목표는 너의 하늘이야. 아주 야심찬 목표를 가지고 네가 있는 미래의 시나리오를 그리기 시작했어. 구체적인 승부처는 여럿 예상돼. 네가 일본에 돌아오는 시나리오도 있고, 영원히 미국 NBL을 휘어잡으며 돌아올 일 없는 가능성도 있어. 그렇다고 내가 미국에 갈 구실이 아주 없진 않거든. 몇 가지 가설을 염두에 둔 채로 일단은 네가 없는 전국 대회를 뚫어 보려고 해. 눈앞의 목표와 3년 뒤, 5년 뒤, 10년 뒤의 비전은 별개의 문제이니까.
사실 이건 내가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야. 너의 미래가 내가 쳐 둔 그물에 걸리면 내가 행복하고. 걸리지 않고 너른 바다로 향해 가면 네가 행복하고. 네가 행복하면 내가 행복하니까.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시절을 모르는 채 조각해서 나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랑을 만들어 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