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난의 별
불면의이쑤신
다정한 5월의 햇살이 교실 기둥을 하얗게 밝힌다. 1학년 교실의 홈룸 분위기는 활기차다. 고등학생으로서 첫 중간고사를 끝낸 여파다.
딱 한 명만 책상에 엎드려 있다. 깨우려 드는 이는 없다. 클래스메이트로 서로를 만난 지 두어 달. 서먹해서는 아니다. 원래 홈룸은 루카와 카에데의 2차 렘수면에 해당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루카와의 교실 내 수면주기는 매우 규칙적이다. 졸기, 얕은 수면, 렘수면, 깊은 수면 사이클이 매일 5회 정도 반복된다. 그냥 밤에 자는 수준으로 쭉 잔다는 소리다.
1학년 1학기 초반인데 루카와는 벌써 유명인이다. 학급을 넘어서 학년 전체 단위로. 큰 키에 미남,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고양이 수준의 숙면. 튀는 요소밖에 없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무려 농구부에 들어갔다. 료난 운동부 중에서도 최고의 인기. 학내 구성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농구부. 특히 작년 센도 아키라의 입학 이후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신 타이거스를 응원하는 오사카 사람처럼 성원을 보내고 있다.
결정적으로 얼마 전 교내 체육관에서 열린 쇼호쿠 농구부와의 연습경기가 루카와의 유명세에 쐐기를 박았다. 놀랍게도 스타팅 멤버. 유일한 1학년. 모두의 시선을 빼앗았다. 센도에 지지 않는 화려한 플레이, 그리고 상대편 빨간 머리 1학년과의 살벌한 신경전으로. 거의 주먹 다툼 직전이었다. 양 팀 주장이 나서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피를 봤을 것이다. 얌전한 사립학교에선 극히 드문 자극이었다. 루카와는 군중이 제일 좋아하는 스펙터클을 아낌없이 제공했다. 우리 편이 이기는 스포츠, 그리고 싸움 구경. 화제성과 주목도로는 물론 후자가 압승. 슈퍼스타 센도 아키라의 뒤를 이을 슈퍼 루키의 혜성 같은 등장이었다.
다음 날 아침, 교실로 돌아온 혜성 같은 슈퍼 루키는 평소와 똑같았다. 쿨쿨 잤다.
지나가면 수군대는 정도로는 적당히 학내 연예인 취급을 받는 루카와지만. 같은 반 친구들의 시선은 좀 달랐다. 풍경은 멀리서 봐야 아름답다. 루카와도 그렇다. 환상은 빠르게 깨졌다. 그들은 루카와의 잠자는 머리꼭지나, 침 자국이 남은 입가나, 교복 주름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진 하얀 볼따구에 금방 익숙해졌다. 박력 있는 체구와 외모로 평범한 사람을 긴장시키는 첫인상. 그러나 의외로 요령만 알면 루카와는 같이 지내기 어려운 동급생은 아니었다. 건드리지 않으면 탈이 없다. 요컨대 커다란 고양잇과 야생동물을 대하듯이. 특히 잘 때. 즉 항상 늘 언제든지.
결과적으로, 오늘도 활기찬 홈룸이다. 마이너스 한 명.
학급 전체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시험이 끝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교 첫 이벤트, 운동회가 다가온다. 오늘 홈룸 안건 역시 <종목별 선수 선발>이다. 명단은 빠르게 채워졌다. 일부는 자진 참여, 다수는 추천 내지 강제로. 체육 수업을 담당하는 학급 임원이 남은 종목을 훑으면서 물었다.
"다음은 달리기 종목. 여러 가지 많은데. 빠른 녀석 누가 있지?"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쉽사리 참여도 추천도 없다. 운동신경이 좋거나 키가 큰 편인 몇몇 남자애들에게 시선이 쏠리지만 난색이다. 이유인즉슨 다른 반에 육상부가 있어서. 3반과 5반. 그러니까 질 확률이 높은 종목이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지면 쪽팔리니까.
하지만 1학년 10반엔 유난히 승부욕 넘치는 학우가 많았다. 특히 '운동회는 무조건 계주를 이겨야 이겼다는 느낌'이라는 누군가의 발언이 큰 호응을 얻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계주는 순서도 마지막이고, 다른 종목과 달리 메달도 준다. 얘가 낫다 쟤가 낫다, 네가 나가라 아니다 너다, 입씨름을 계속하던 중 누군가 외쳤다.
"우리는 운동부 없어?"
짠 것처럼 일제히, 모두의 시선이 교실 맨 뒤를 향한다.
숙면 중인 루카와 카에데. 학내에서도 선두를 다투는, 유명 운동부.
포개 놓은 팔뚝을 베고 엎어진 머리꼭지. 들숨 날숨에 맞춰 규칙적으로 살짝 부풀었다가 내려가는 청록색 등짝. 수비를 세 명 정도 제치며 골대를 향해 번개처럼 돌진하던 재빠른 모습과는 정반대. 교실 전원의 주목을 한 눈에 받아도 깰 기미는 전혀 없다.
잠자는 사자의 정수리를 앞에 두고 1학년 10반 학생들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잘 됐다. 지금이다.
"그래서, 달리기 종목은 전부 나가게 됐다고?"
제자리에서 가볍게 점프하며 탭 패스. 센도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과 함께 되묻는다. 연속 점프 도중에 말을 섞어도 호흡이 편안하다.
맞은 편에서 루카와도 똑같이 점프한다. 공중에서 공을 받자마자, 그대로 탭 패스로 돌려준다. 다시 공이 되돌아오기까지 2초 정도의 공백. 그 틈을 탄 재빠른 끄덕끄덕. 뚱한 무표정을 보고 센도는 웃음이 터졌다. 기계 같던 패스 타이밍이 살짝 어그러진다. 루카와는 힐난하듯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다시 패스를 되돌려 줄 차례에, 루카와가 갑자기 몸을 낮춘다. 기습적인 드리블로 센도를 제치려 한다. 어허, 어딜. 센도가 바로 막아섰다. 기초 훈련하다 말고 갑자기 시작된 스피디한 일 대 일에 부원들의 시선이 모인다.
"거기! 센도! 뭐 하는 거야?"
"앗. 죄송해요."
결국 주장에게 한 소리 들었다. 루카와도 사과의 뜻으로 작게 목을 끄덕였다. 센도 뒤에 슬쩍 숨어서. 꼴 좋다는 생각은… 아주 조금만.
주장 우오즈미 준은 손목시계를 흘끗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 타이밍 하나는 기똥차다. 10분간 휴식!"
"오, 럭키."
"감사합니다!"
체육관 곳곳에 흩어져 있던 1학년 부원이 일제히 외친다. 각각 페어를 짜서 기초 훈련을 도와준 2학년 선배 짝꿍에 대한 감사다. 루카와도 허리를 꾸벅 숙이며 작은 소리로 얹어갔다. 감삼다.
허리를 들면 센도의 미소가 반겨준다.
"레몬 먹을래?"
"괜찮슴다."
"이리 와 봐."
이 선배는 거절의 말을 제대로 들어 준 적이 없다. 그럴 거면서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센도가 벤치 위에 놓아뒀던 반투명한 용기를 집어 들어 뚜껑을 열었다. 달달하고 새콤한 향기가 퍼진다. 1학년 전원 호출. 얘들아 이거 하나씩 먹어라.
농구부원은 절대로 먹을 것을 거절하지 않는다. 우르르 몰려든 땀투성이 팔이 얇게 저민 레몬을 낼름낼름 하나씩 건져 간다. 아우, 셔! 몸서리치는 놈도 있고. 손가락 끝까지 쪽쪽 빨아먹는 놈도 있고. 딱히 신 게 당기지 않았던 루카와도 왠지 군중심리에 손을 뻗게 된다.
찰싹. 누군가에게 손등을 맞았다. 황당해서 범인을 쳐다본다. 아까 그 미소다.
"손 끈적거리잖아. 내가 먹여 줄게."
친절하게 미소 띤 강인한 하관이 아 하면 따라서 아 하게 된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진득한 꿀에 감싸인 반달 모양 과육이 쏙 미끄러진다. 씹을수록 달콤함을 뚫고 날카롭게 번져 오는 새콤함. 루카와는 턱을 오물거리면서 레몬 준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센도는 루카와를 먹여주느라 엄지와 검지 끝에 남은 꿀을 혀끝에 싹 문지른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동작. 저 손끝에서도 내 혀끝에서와 똑같은 맛이 나겠지.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잘생겼다거나 그림이 된다거나 하는 그런 평범한 감상보다도.
"잘 먹었습니다."
루카와는 꾸벅 인사를 하고 수건을 가지러 돌아섰다. 1학년 소지품은 함께 구석에 모아 놓았다. 하늘 같은 선배들과는 별도다.
"그래서 몇 종목을 나가는 거야?"
분명히 인사를 하고 돌아섰는데 어느새 뒤에 따라붙었다. 발소리도 안 들렸는데. 재빠른 풋워크. 역시 에이스.
"100미터도 나가고 200미터도 나가고?"
센도는 아까 그 화제에 아직 관심이 남았나 보다. 루카와가 두 개 접은 손가락에 두 개를 더 접으면서 중얼거렸다.
"계주도 나가고. 미션 달리기도..."
"진짜로?"
센도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대단한데, 그런 뜻으로 휘파람을 한 번 휙 분다. 그냥 뛰는 종목은 전부 다 맡겼구나.
논리 자체는 예상이 간다. 아마 루카와의 농구를 보고 빠르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았겠지. 그렇지만 순간적인 돌파와 육상은 또 다른 건데. 음... 그래도 남들보다 다리가 기니까 유리한가? 시킨다고 다 나가는 루카와도 의외였다. 싫은 건 싫다고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착하네.
"몇 개는 거절하지 그랬어."
"하나 뺐어요."
"오, 그래? 뭔데?"
루카와가 평온한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인삼각."
이인삼각? 센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한쪽 발을 루카와의 발 옆에 딱 붙인다.
"이렇게 묶고 하는 거?"
루카와는 서로 붙은 발날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러고서야 고개를 끄덕.
센도는 생각했다. 제일 힘든 경기도 아닌데 그걸 뺐네. 왜 하필이면? 다른 사람이랑 붙어있는 게 싫어서? 딱히 누군가와 달라붙어 다니는 일 없는 마이웨이 루카와의 성격이라면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찰싹 붙어 있는데. 괜히 몸을 옆으로 바짝 맞대면서 떠 본다.
"루카와, 협동심에는 자신이 없었던가?"
바로 미간을 찌푸린다. 반응이 빨라. 좋은 공격수의 자질이다. 물론 귀엽기도 하고. 아까보다 3mm 정도 전방으로 튀어나온 입술이 바로 반박한다.
"그런 거 아닌데요."
"그럼 왜?"
"키가 안 맞아서..."
"아하."
과연. 훨씬 타당한 이유다. 루카와와 키가 맞는 사람. 농구부를 제외하면, 아니 농구부에도 많지 않다. 가령 아이다 히코이치와 루카와의 이인삼각을 상정해 본다. 보폭을 맞추긴커녕 어깨동무부터 애로사항이 꽃 피리라.
루카와와 이인삼각이 가능한 료난 학생 리스트. 길지 않은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다. 센도는 제 것보다 아주 약간 아래에 맞닿아 있는 루카와의 어깨선을 쓱 내려다본다.
"나랑 하면 잘할 텐데."
루카와는 대꾸도 없다. 서늘한 의문이 서린 눈빛으로 빤히 쳐다본다. 불손하기 짝이 없다. 뭔 헛소리냐는 걸까? 정말 건방지고 귀엽다. 센도는 웃으면서 제 발목으로 루카와의 발목을 툭툭 건드렸다.
"나랑은 키도 잘 맞잖아. 해 볼래?"
"지금요?"
"응. 저기 벽까지 뛰어가기."
"끈이 없는데."
안 한다고는 안 한다. 은근히 착하다니까.
으음. 센도는 잠깐 생각하다 저지를 집어 들었다. 반팔 차림인 루카와의 어깨를 덥석 붙잡는다. 도망가기 전에. 저지 소매를 잡고 루카와의 몸통을 가로질러, 붙잡아 둔 팔을 척 끼워 넣는다. 후배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반 정도 겹친다. 나머지 소매는 자신의 팔에 꿰었다.
센도와 루카와가 상체를 딱 붙이고 센도의 저지 한 팔씩 나눠 입으면, 완성. 등짝이 한계까지 팽팽하게 늘어났다. 신축성 좋은 재질이라 다행이다. 벌써 4월부터 입을 생각 별로 없던 겉옷을 이럴 때만 써먹는다. 입술 바로 앞에 루카와의 얇고 동그란 귓바퀴가 있다. 평소보다 작게 말하게 된다.
"됐지? 이인삼각."
루카와는 잠시 대답을 안 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한참 만에 그런다.
"전혀 아닌데요."
고르고 고른 말치고는 상당히 건방지다. 센도는 또 웃어버렸다. 이 말 없는 후배는 먼저 인사 외의 말을 걸어오는 일은 거의 없지만. 툭툭 찌르면 찌르는 대로 꼬박꼬박 말대답을 한다. 어이없으면 대놓고 어이없어하고. 맞는 말 같으면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상쾌할 정도로 가차 없다.
"왜? 비슷한데?"
"이인삼각은 발을 묶는 건데 이건 팔..."
"그럼 이인삼완?"
약간 그럴듯했는지 루카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생각에 빠진다. 기출 변형은 혼란스러웠구나. 센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루카와의 허리를 꾹 잡아서 신호했다.
"뛰자."
냅다 반대편 체육관 벽을 향해 뛴다. 루카와도 얼떨결에 같이 뛴다. 하나 둘, 하나 둘. 센도가 붙이는 구령에 발이 저절로 따라간다.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안쪽 발을 모아서 동시에 내밀었다. 발날을 불편하게 꼭 붙인 채로. 거의 비슷한 강도로 힘주어 서로의 신발을 아슬아슬하게 밀어내면서.
"오. 우리 좀 잘하는데?"
센도가 감탄했다. 루카와도 느끼고 있었다. 금방 호흡이 맞았다. 발을 내미는 타이밍, 땅을 밀어내는 힘, 그에 맞춰 성큼 내딛는 보폭이 한 몸처럼 맞아 들어갔다.
몇 걸음 못 가서 센도와 루카와는 반대쪽 벽에 도착했다. 갑자기 옷 하나에 몸을 구겨 넣고 척척 뛰어가는 두 사람을 보면서 농구부원들은 의문에 빠졌다. 쟤네 왜 저러냐...
"뭐 잘못 먹었냐?"
"코시노. 이거 봐. 이인삼각이야."
"너 이인삼각의 뜻 모르지...?"
"우리 방금 되게 잘 맞지 않았어?"
나 이인삼각 처음 해 본 건데. 신이 나서 약간 흥분한 센도에게 코시노의 지극히 타당한 태클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상기된 얼굴로 자랑하듯 팔을 앞뒤로 붕붕 흔든다. 딸려 가듯 루카와의 상체도 흔들흔들. 루카와는 속으로 생각했다. 불편하다. 덥다. 선배 얼굴, 너무 가깝다...
코시노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루카와 좀 그만 괴롭혀라. 이제 쉬는 시간 끝이야."
"넵."
"앗 벌써?"
센도한테 충고한 건데 대답은 루카와가 빨랐다. 얼른 팔을 쑥 빼내 버린다. 한 쪽 소매의 주인을 잃고 힘없이 추락하는 저지의 절반. 에이... 센도는 약간 실망한 기분으로 저지와 함께 스르륵 내려가 체육관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이구 편하다. 좋다.
루카와가 옆구리에서 사라지자 맞닿았던 부분이 허전해졌다. 연습 때문에 송글송글 올라온 땀방울로 축축하고 미끈거렸던 따스한 상체. 아마 더웠나 보다. 닿은 곳도 홧홧했고 뒤돌아선 지금도 루카와의 목덜미는 좀 벌겋다. 장난 거느라 쉬지도 못하게 만든 게 그제야 미안해진다.
눈앞에 루카와의 발목이 보인다. 센도는 괜스레 손을 내밀었다. 뭐하냐는 눈빛이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게 느껴진다. 탄력 있는 발목을 만지작거리면서 다정하게 걱정을 건넨다.
"운동회 날 조심해. 풀타임보다 힘들 수도 있겠어. 특히 종아리."
루카와가 움찔한다. 주저앉은 센도의 얼굴 근처에 내려와 있던 오른 주먹이 꾹 쥐어진다. 조용히 발끈한 것이다.
종아리. 쇼호쿠와의 연습 경기 얘기다. 리바운드가 제법 높은 초짜가 하나 있었는데. 기초가 형편없는 주제에 체력과 점프만큼은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멍청할 정도로 참혹한 경기 매너의 소유자였다. 농구 선수라기보다 빨간 원숭이에 가까웠다. 엄청나게 싸웠다.
초보자를 살살 피하면서 농락하긴 쉽다. 하지만 문제는 그럴수록 기가 죽기는커녕 시끄러워지는 녀석이었다는 점이다. 루카와는 그를 조용하게 만들고 싶었다. 무력감마저 느끼도록 압도적으로 이기고 싶었다. 늘 그렇듯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래도 결국엔 시끄러워졌지만.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심했다. 짐승은 지칠 줄을 몰랐다. 경기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충돌이 있었다. 아마 고의가 아니라 본능으로, 어떻게든 루카와를 막으려고 진로 방향에 몸을 끼워 넣었던 것 같다. 그때 종아리에 쥐가 났다. 루카와는 마지막 버저가 울릴 때 코트 안에 서 있지 못했다.
그걸 지금 찌르다니. 루카와는 항의의 뜻으로 붙잡힌 발목을 슬 빼내려고 했지만. 센도가 손아귀에 힘을 꽉 주고 놔주지 않았다. 황당해서 내려다보면 싱글싱글 웃고 있다. 루카와는 포기했다. 그냥 무뚝뚝하게 내뱉는다.
"안 힘들어요."
"정말? 쉴 틈 없이 달릴 텐데?"
"농구도 그러니까."
"너 러닝할 때 맨 뒤에서 오던데?"
"... 시합 땐 전력 질주해요."
"하하, 그건 그렇지. 자신 있으니까 다 나갔겠지?"
"그건 아니고요."
루카와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땀이 묻은 자국을 따라 군데군데 약간 발그레한 목덜미가 더 잘 보였다.
"자는 동안에 다 정해져서..."
"으하학."
결국 센도는 참지 못했다. 주저앉은 채 커다란 몸을 접으며 박장대소한다. 루카와는 점점 더 무표정해졌다. 너무 웃는데.
빠질 기회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타이밍이 안 좋았다. 깊게 생각하기엔 너무 졸렸다.
자고 일어났더니 상황 종료. 칠판에 적힌 달리기 종목마다 자신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지난번에 경기 봤다, 농구부 레귤러만 믿는다, 잘 부탁한다고 입을 모아 엄지를 치켜드는 클래스메이트들. 아직 잠이 덜 깨 멍한 상태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던 루카와는 그냥 쿨하게 포기했다. 이건 나가고, 저건 안 나가겠다고 신중하게 고르기도 귀찮았다. 못할 건 뭐람.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한 동급생들은 다 함께 환호했다. 시끄러워. 루카와는 다시 엎드렸다. 세 번째 수면 사이클을 시작했다.
시원하게 웃은 센도는 눈꼬리에 삐져나온 눈물을 닦았다. 정말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그런다.
"아~ 재밌다. 넌 정말 재밌어..."
맨날 그 소리. 루카와는 흥 하고 작게 코웃음 쳤다. 연습 재개를 알리는 주장의 호통 소리가 들린다. 루카와는 센도를 돌아보지 않고 동기들이 모인 곳으로 뛰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센도는 똑같이 말했다.
1학년 부원들이 처음으로 합류한 날. 일렬횡대로 서서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하던 선배들 사이에 센도는 없었다. 저 사람이 센도 아키라인가? 저 사람인가? 속으로 가늠하고 있었던 1학년들은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없네. 도쿄에서 왔다는 에이스 선배. 그 선배의 이름을 모르는 1학년은 없었다. 루카와도 마찬가지였고 속으로 생각했다. 농구 잘한다더니. 연습 빼먹네.
농구... 좋아하는 건 아닌가?
그 감정이 실망이라는 건 한참 뒤에야 알았다.
어차피 오래 가지도 않았다. 다행히 결석은 아니고 지각이라서. 그것도 왕창 지각.
연습 후반부. 실력 테스트를 겸해 1학년을 두 팀으로 갈라서 연습 경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루카와는 사양 없이 코트를 휘저었다. 연습이어도 이기고 싶은 마음은 똑같으니까. 누가 공을 잡든 헤이, 하고 적극적으로 요구해 골대로 돌진했다. 경험자 중에서도 스피드나 스킬로 루카와를 따라올 레벨의 1학년은 없었다. 공격 루트가 점차 단순해지고, 거의 상대 팀 전원이 루카와를 막느냐 못 막느냐의 싸움으로 흘러가던 순간.
"밸런스가 안 맞는 거 아니야?"
"센도 이 자식! 너 지금 몇 시야!"
"하하, 죄송합니다. 종례 끝난 줄 모르고 잠드는 바람에..."
안녕.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교복 차림의 키 큰 남자. 시합 중이던 1학년들이 제자리에 흐지부지 멈춰 섰다. 안녕, 하심까, 한 사람씩 타이밍 안 맞게 어색한 목례. 루카와는 생각했다. 저 사람이 센도. 연습을 빼먹은 건 아니었구나. 잠들었으면... 어쩔 수 없지. 개인적으로 충분히 공감되는 지각 사유였다. 실망은 지워졌다. 센도는 가쿠란을 벗으면서 제안했다.
"감독님, 제가 들어갈까요?"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럴 만했다. 1학년 테스트 시합에 갑자기 에이스가 낀다니. 하지만 타오카 감독은 의외로 순순히 교체를 지시했다. 루카와 상대편에서 가장 지쳐 있던 한 명을 뺐다. 센도에게는 옷 갈아입을 틈도 없으니 빨랑빨랑 움직여라, 이게 다 네가 지각한 탓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점프볼을 하러 나온 루카와 앞에 센도가 섰다. 교복 차림 그대로 팔뚝과 종아리만 둥둥 걷었다. 얕보는 건가? 루카와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가슴 안쪽이 불붙은 것처럼 서서히 뜨거워진다.
센도는 목을 이쪽저쪽으로 스트레칭하며 물었다. 전혀 긴장감이 없는 가벼운 태도였다.
"이름이 뭐야?"
"루카와 카에데. 토미가오카 중학교에서 왔습니다. 포지션은 딱히 없습니다."
아까 했던 자기소개를 무뚝뚝하게 반복. 손목 발목을 툭툭 털며 선배는 환하게 웃었다.
"오. 나돈데."
그리고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센도 아키라야. 잘 부탁해."
루카와는 그 손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리고 악수라기보다 하이 파이브에 가까운 속도로 기세 좋게 마주 잡았다. 짝! 시원한 소리가 체육관에 울려 퍼진다. 신호처럼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오오 루카와~ 근성 좋은데! 지지 마라! 센도 봐주지 마! 지각했으니까 어디 고생해 봐라! 선배들이 열띤 응원인지 야유인지를 한 마디씩 보탰다.
질 생각 없는데. 루카와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자세를 낮췄다.
눈앞의 센도는... 좀 전보다 훨씬 크게 미소 지었다. 잘생긴 광대가 동그랗게 올라가며 눈꼬리를 접고 가지런한 치아가 다 드러났다.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루카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굉장히 반짝거린다.
똑같이 자세를 낮춘 센도가 거의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뱉었다. 루카와만 들을 수 있는 볼륨이었다.
"너 정말 재밌다."
호각 소리와 함께 점프볼.
그날 루카와는 연습 경기에서 교복을 입은 센도한테 왕창 깨졌다.
초반부엔 일 대 일에 집중하게 만들어 놓고 현란한 페이크와 한 박자 빠른 패스 플레이로 루카와를 따돌렸다. 솔직히 루카와는 정신이 없었다. 실전만큼 정신을 집중한 끝에 움직임을 따라잡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깨닫는 게 최선이었다. 대부분의 구경꾼은 그마저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센도와 팀을 이룬 1학년들은 방금 만난 사이라서 당연히 호흡이 잘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루카와 대 전원 수준이었던 압도적인 열세는 금방 사라졌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실력 차이에 다소 주눅이 들어 있었던 동기들도 돌파구가 생기면서 긴장이 풀렸는지 훨씬 좋은 기량을 보여주었다. 각자의 주특기와 강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감독은 대놓고 흐뭇한 표정이었다.
루카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센도가 들어오고 난 이후 경기가 훨씬 더 재밌었다. 지는 것만 빼고. 그건 분했다. 가슴이 끓었다. 뜨끈뜨끈 달아오른 심장이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그날부터 루카와의 머릿속엔 센도 밖에 없다.
운동회날은 화창했다. 해가 높이 솟아올라 완연한 초여름. 운동장 모래에 반사된 햇빛이 눈 부시다.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지나가면 발자국과 함께 새하얀 먼지가 일어난다. 호각 소리와 응원의 함성이 시끄럽다. 루카와는 팔뚝까지 올려놓은 까만 리스트밴드에 이마와 콧대를 따라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문질렀다. 보들보들했던 밴드가 벌써 촉촉해졌다.
땀 흘린 보람이 있어 루카와의 달리기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100m는 1등, 200m는 4등. 반 친구들은 흥분했다. 이대로라면 계주도 1등 아니냐며 벌써 우승한 것처럼 날뛰었다. 그래봤자 우승 상품은 주스 하나인데. 어쨌든 루카와도 불만은 없었다.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게 좋으니까.
같은 반 친구들과 다 같이 무언가를 하는 건 처음이다. 일반적으로 클래스메이트란 함께 수업을 듣는 사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 같이 수업을 들을 때 루카와는 듣지 않기 때문이다...
100m 결승선을 맨 처음으로 통과했을 땐 모두가 루카와에게 달려와 등짝을 두들기며 기뻐했다. 헹가래를 시도하려는 많이 흥분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루카와가 거절했다. 평범하게 바닥으로 내팽개쳐질 것 같았다.
같은 팀이 되니 비로소 가까워진다. 평소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던 아이들도. 누구든 루카와와 마주치면 수고했다며 스스럼없이 하이 파이브를 청했다. 루카와도 다른 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친구들에게 자연스럽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기든 지든. 같은 팀이니까. 농구부 말고는 별로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던 루카와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즐거웠다. 표정으로 티가 나진 않았지만.
오늘은 우리 팀이 아주 많다.
1학년, 2학년, 3학년 순서로 종목별 반 대항 경기를 한다. 공 굴리기 종목을 마친 루카와네 반이 그늘에서 쉬는 동안 운동장은 2학년의 차지였다. 2학년 3반 대표가 낯이 익다. 센도였다. 지름이 3m 정도 되어 보이는 거대하고 새파란 고무공도 그와는 덩치가 비슷해 보였다.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지만.
센도는 눈에 확 튀었다. 남들보다 배로 훤칠해서만은 아니다. 처음에는 선두로 치고 나가는 것 같았는데. 중간에 무슨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거대한 공을 드리블하듯이 튕기면서 뛰려다가 반동이 걸려서 몸쪽으로 튀어 오르는 바람에 얼굴을 맞았다.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거기다 시야가 제대로 가려져 우왕좌왕하다가 쭉쭉 뒤처진다. 방송부가 익살맞은 해설을 덧붙였다. 아 이게 무슨 일입니까! 료난 농구부 에이스 센도 아키라가 드리블에 실패합니다! 카나가와 고교 농구계의 특종입니다! 모두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루카와도 참다 참다 입을 가리고 슬쩍 웃었다.
결국 꼴등이었다. 아이고 곡소리를 내면서 허리춤에 손을 짚는다.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웃는 얼굴이 5월의 햇살 아래 환하게 빛났다. 패배자가 아니라 왕자님이었다. 군중 사이에서 절로 박수갈채가 터졌다. 휘파람을 부는 사람들도 있었다. 센도는 부끄럼도 없이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꼴찌로 들어와도 슈퍼스타.
루카와는 그 광경을 운동장 맨 끝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반에서 가장 키가 크니까 맨 뒤에서도 다 보였다. 어느 각도에서는 센도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센도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면서 손을 세게 흔든다.
착각이 아닌가?
루카와는 물끄러미 센도를 바라보았다. 센도가 두 번 정도 더 손을 흔들었다. 앞에 있던 반 친구 중 한두 명이 루카와를 흘끔흘끔 돌아보았다. 루카와도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와 학교 담장뿐이었다. 다시 돌아봤을 때 센도는 웃음이 터져있었다. 손가락으로 루카와를 척 가리킨다. 입을 크게 벌린다.
너 말이야.
손가락 두 개로 자기 눈을 한 번, 루카와 쪽을 한 번 찌른다. 선전포고인가? 루카와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걸까? 루카와는 선배의 제안에 순종했다. 시키는 대로 있는 힘껏 노려봐 주었다. 질 수 없지. 선배라도. 센도는 더 크게 웃으면서 돌아섰다. 내가 이긴 건가?
대체 뭐가 웃긴 지 모르겠다. 하지만 선배는 만족한 모양이다. 저렇게까지 해서 후배와 눈싸움을 하고 싶을까. 어차피 전교생의 시선은 다 자기한테 쏠려 있는데.
정말 이상한 선배다. 언제나 예측불허다.
루카와는 쇼호쿠와의 연습 경기를 떠올린다. 타오카 감독은 센도-루카와 콤비라는 막강한 새 무기를 만천하에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그래서 1학년임에도 첫 연습 경기에 선발로 나갈 수 있었다. 물론 루카와는 스타팅 멤버로 나서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편이었지만.
선배와는 시합 중에 점점 더 호흡이 맞아들어갔다. 좋았다. 누군가가 이끌어 주는 농구는 처음이었다. 본인이 해결하는 선택과 루카와에게 패스를 돌리는 선택과 제3의 선택 사이에서 빠르고 정교한 판단. 선배의 플레이를 하나하나 뜯어 보고 있으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장 짜릿한 순간은 별다른 신호 없이 이 대 일 패스에 성공해서 완벽하게 수비진을 뚫었을 때. 득점은 센도였지만 루카와가 각도를 만들어 낸 플레이였다. 센도는 주먹을 내밀어 부딪히며 칭찬해 주었다. 잘했다고.
다만 사쿠라기 하나미치에게는 페이스가 다소 말렸다. 시끄럽고 멍청하고 기본이 하나도 없는데 갑자기 골 밑에서 깜짝 놀랄만한 연속 점프가 나오기도 하고. 블로킹이라고 부르기 뭐한 그냥 점프였지만. 어쨌든 깜짝 놀랐다. 발끈해서 일부러 인유어페이스를 때리기도 했다. 하나하나 말대꾸하다 보면 어느새 같이 유치해져 있었다.
센도는 초짜라고 전혀 봐주지 않았다. 4쿼터 내내 스피드가 전혀 죽지 않는 야생 짐승 같은 빨간 원숭이를 혼자서도 잘만 따돌렸다. 선배의 특기인 살살 긁는 말로 도발하기도 했다. 지금은 나한테 완전히 진 거 아닌가? 가끔 루카와도 재료로 써먹었다. 꽤 빠른 줄 알았는데, 우리 1학년보단 못하네.
연습 경기를 준비하며 주목했던 대상은 아카기 타케노리 하나였을 텐데. 어느새 센도의 시선은 듣도 보도 못한 1학년 뉴페이스에게 가 있었다. 집중력이 서린 두 눈이 즐겁게 반짝거렸다. 낯익은 빛이었다. 루카와는 금방 알아보았다.
선배는 재밌는 거야. 저 녀석이.
나보다 더?
그때 끓어오른 마음의 온도. 물론 뱃속이 뜨거워지지 않은 시합 같은 건 없지만. 이기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잔잔히 흐르기보다는 활활 타오르는 편이지만.
그날 료난은 큰 점수 차로 쇼호쿠를 이겼다. 그럼에도 진정되지 않았다. 루카와는 가끔 그때의 마음을 떠올린다. 지금처럼 선배가 자신을 보고 있을 때. 보려고 할 때. 웃고 있을 때. 눈빛이 반짝거릴 때.
다른 사람을 보고 있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무언가가 잘못 끼어들어 간 듯 불편한 기분. 그러나 영원히 바로잡을 수 없는 위화감.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그랬다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사라진다. 보통 농구공을 손에 잡으면 진정된다. 그때부턴 잘 알고 있는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내가 잘 한다는 확신도 있고. 미지가 사라지고 나면 루카와는 일단 안도했다. 한참 동안 떠올리지 않았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센도 때문이다. 그 외엔 없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사람.
3학년 공 굴리기까지 끝났다. 방송반이 다음 종목을 외친다. 루카와의 차례다.
미션 달리기는 줄다리기, 박 터트리기와 함께 전 학년이 동시에 참가하는 경기 중 하나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모든 반의 대표가 운동장 양쪽에서 한꺼번에 우르르 출발한다. 한 가운데 가로로 길게 펼쳐진 테이블에는 종이쪽지가 늘어서 있다. 하나를 집어서 쪽지 내용에 해당하는 물건이나 사람을 찾아 방송부의 중계 단상에 가져간다. 도착한 순서대로 쪽지를 공개해 미션에 성공했는지 확인한다. 중계진 겸 심판진에게 성공을 인정받으면 그대로 순위 확정. 실패로 판정 나면 다시 쪽지를 가지러 가야 한다.
이건 달리기가 빠른 것과 상관없지 않나? 룰을 들었을 때부터 루카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딱히 선발에 태클을 걸진 않았다. 뭐든지 와라. 내가 이겨주지. 같은 반 친구들은 적극적이었다. 예상 미션을 이것저것 추측하면서 몇 가지 조언도 줬다. 가령 '농구부'나 '미인'이라고 쓰여 있는 경우 아무것도 찾지 말고 혼자서 가도 된다고 했다. 실격의 지름길일 것 같아서 귀담아듣진 않았다.
선수들 전원 출발선에 일렬횡대.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신호탄이 발사된다. 탕!
스타트가 좋았다. 테이블을 향해 맹 대시하는 루카와는 독보적인 선두였다. 그야 다른 반은 굳이 육상부나 빠른 사람들을 미션 달리기에 배정하지 않았다. 스피드가 필요한 육상 종목에만 뽑았다. 마구잡이로 죄다 선발된 루카와와 달리...
누구보다 빠르게 낚아챈 쪽지를 읽자마자 루카와는 망설임 없이 2학년이 무리 지어 앉은 곳을 향해 돌진했다.
목표물을 찾기는 쉬웠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쑥 빠져 있으니까. 표적은 루카와 화이팅! 하면서 자기 반 대표 놔두고 속 편하게 1학년을 응원하고 있다가, 바로 그 1학년이 자신에게 가까워질수록 어라? 점점 나사 빠진 표정이 되어갔다.
설명할 시간도 없다. 루카와는 센도의 손목을 낚아채서 단상을 향해 뛰었다. 지금 가면 1등이다. 뒤쪽에서 1학년과 2학년이 동시에 탄성 같은 함성을 질렀다.
끌려가던 센도가 점차 루카와의 전력 질주에 속도를 맞춰 온다. 체육관에서 했던 말도 안 되는 이인삼각 때처럼. 첫 연습 경기 때처럼. 뛰는 도중에 호흡이 맞아간다. 언제나 그랬다. 센도는 루카와보다 한 학년 위고. 그만큼 농구를 많이 했고. 항상 여유롭고. 끝을 알 수 없는 실력을 갖추고도 계속 성장하고 진화하고. 루카와를 자극한 다음 또 맞춰 오고.
루카와는 전력을 다해 달려간다. 언제나 그랬다. 죽을 힘을 다해 몰두하면. 항상 센도 생각만으로 머리가 가득하면. 그만큼 철저하게 연습하면. 루카와도 센도와 합을 맞출 수 있다. 따라잡을 수 있다. 또 멀어지더라도. 그게 너무 분하지만.
이기고 싶다. 센도를 이기고 싶다. 센도와 함께 이기고 싶다. 루카와는 둘 다였다. 그래서 어떨 땐 무엇인지 모를 기분에 가슴이 가득해지기도 하지만.
하얀 쪽지 한가운데 정자로 쓴 두 글자를 본 순간. 루카와는 그 기분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안개 속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윤곽다운 윤곽. 어렴풋하나마. 마음에 뭉게뭉게 가득 찼던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맑게 개듯 사라진다. 손안에 농구공이 없는데도. 손안에 원흉의 손목이 단단히 붙들려 있는데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맑게 갠 가슴이 다시 두근거린다. 콩닥콩닥 기분 좋게 심박수가 올라간다. 전력 질주 때문만은 아니다.
센도와 루카와가 단상에 도착했다. 거친 숨을 뜨겁게 쏟아 놓는 거대한 남자들에게 중계진이 흥미진진하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자아, 1학년 10반 루카와 군의 미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루카와는 자신 있게 쪽지를 펼쳤다. 마이크가 낭랑한 목소리를 운동장에 퍼뜨렸다.
"존경하는 사람."
센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 손으로 입을 덮었다. 커다란 손에 코까지 가려졌다.
군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농구부원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그들도 모두 센도를 존경하기 때문에. 2학년들이 기특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보냈다. 료난 2학년들은 언제든 센도를 자랑스러워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3학년들은 우오즈미를 찌르면서 히죽히죽 놀리기 시작했다. 농구부 신입생이 존경하는 사람, 어째 주장이 아니네? 응? 이거 어떻게 된 거냐? 무시하려 애쓰던 우오즈미는 결국 시끄럽다고 발끈해서 하이에나들의 즐거움을 채워주고 말았다.
한편, 중계 단상 뒤. 그늘에 앉은 교사진 사이에서는 타오카 감독이... 남몰래 진심으로 상처받고 있었다. 공들여 스카우트해 온 예뻐해 마지않는 1학년 신입에게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어떤 기대를 확인하면서, 아니 확인사살 당하면서… 그래도 너희들이 행복하면 되었다... 아련히 코를 훌쩍였다.
중계진이 센도에게 소감을 물었다. 다분히 짓궂은 뉘앙스였다. 가문의 영광입니다, 하고 목덜미를 문지르며 너스레를 떠는 센도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중계석은 그늘인데도. 전력 질주의 여파일까. 함께 뛰었던 루카와도 덩달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괜스레 땀에 푹 젖은 하얀 티셔츠의 목 부분을 붙잡고 펄럭거렸다.
어쨌든 내가 이겼다. 루카와는 무사히 전교에서 첫 번째로 미션 달리기 성공을 인정받았다.
한숨 돌리고 돌아서자 저 멀리 반 친구들이 보인다. 단상에서도 도저히 눈치를 못 챌 수 없는 광란의 환호. 혼자서 2승 획득. 명실상부한 1학년 10반의 에이스. 루카와는 이미 오늘의 영웅이나 마찬가지였다. 얼굴 윤곽을 따라 한 박자 늦게 후두둑 솟아오르는 땀방울을 팔뚝의 리스트밴드로 닦아내며, 루카와는 열정적인 응원단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루카와의 손목을 황급히 붙잡는다. 깜짝 놀라서 돌아본다. 센도였다. 왠지 머쓱하게 웃고 있다. 손바닥이 뜨겁다.
"왜 그렇게 놀라. 네가 잡고 뛸 땐 언제고."
그건 경기 규칙이 그러니까. 루카와는 대답 없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아닌가? 손목을 잡고 와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던 것 같기도...
"갈 때는 안 잡아 줘? 좀 매정한걸."
이건 확실히 이상하다. 루카와가 2학년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배네 반은 저긴데."
"너무한데. 나 덕분에 1등 해놓고."
루카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선배다. 존경스럽지만. 농구는. 농구만.
아직 운동장에선 연이어 미션 달리기가 진행되고 있다. 성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다시 운동장 한가운데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안타까움의 함성. 루카와는 센도에게 잡힌 손목을 슬쩍 빼냈다. 센도의 얼굴에 잠깐 실망한 기색이 스쳤을 때.
다시 루카와가 센도의 손목을 잡았다. 아까 함께 뛰었던 모습 그대로. 학교 건물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센도는 얌전히 따라왔다. 루카와가 유리문을 밀고 실내로 들어가자 그제야 말을 건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목소리에 설렘이 잔뜩 묻어있어 루카와는 픽 웃었다. 돌아 본 센도의 눈빛은 반짝거린다. 루카와가 좋아하는 표정.
"자판기요."
"갑자기?"
"선배 덕분에 이겼으니까. 음료수 살게요."
"하하, 좋은데."
그럼 나 포카리. 센도는 손목을 붙잡힌 채로 루카와 옆에 나란히 붙어 보폭을 맞춘다. 루카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리품을 들고 개선하는 장군처럼 씩씩하게 걷는다. 내 손으로 찾아낸 나의 승리를 쥐고서.
마지막 경기는 학급별 1200m 계주. 네 명의 주자가 운동장 한 바퀴, 즉 200m씩 뛰고 마지막 다섯 번째 주자가 400m를 맡는다. 루카와는 1학년 10반의 마지막 주자다.
첫 번째 주자가 출발선에서 긴장을 푸는 동안 후속 주자들은 트랙 안쪽에서 대기한다. 루카와는 출발선에 서려는 첫 번째 주자를 불렀다. 다짜고짜 다섯 개의 손을 한가운데 모았다. 경기 직전 파이팅 콜은 루카와에겐 상식이다. 아래로? 누군가 물었다. 아래로. 루카와가 대답했다. 하나 둘 셋 하면 가자, 하는 거다. 누군가 먼저 제안했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와도.
하나 둘 셋, 가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시원하게 겹쳤다. 사실 루카와는 외치지 않고 얹혀 갔다. 손만 슬쩍 타이밍 좋게 아래로 내렸다. 그래도 충분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메아리처럼 응원의 환호를 보냈다. 아까보다 훨씬 어깨에 힘이 풀린 모습으로 첫 번째 주자가 스타트 자세를 잡았다.
검은 총구가 하늘을 향하고. 신호탄이 경쾌하게 터진다. 탕!
나쁘지 않은 출발. 하지만 선두는 놓쳤다. 5반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마지막 주자일 줄 알았던 육상부를 맨 앞에 배치했다. 처음부터 격차를 벌려놓겠다는 전략이었다. 과연 유효한 것 같다. 선두가 반 바퀴 정도 앞서나가고 루카와네 반이 그 뒤를 쫓았다.
두 번째 주자가 무사히 출발했다. 루카와네 반을 바짝 쫓아오던 3반은 그만 바통을 놓쳤다. 호재다. 저긴 육상부가 마지막 주자라 만만치 않은데. 간격이 훨씬 벌어졌다. 선두는 여유롭다. 그 찰나의 방심을 이용해 죽어라 뒤쫓아 온 루카와네 반이 조금씩 격차를 줄였다. 특히 바통 터치가 침착하고 매끄러워 주자를 바꿀 때마다 확 따라잡았다. 승부욕 넘치고 부 활동 안 하는 주자들끼리 열심히 연습한 결과다.
루카와는 세 번째 주자에게 바통을 이어받으면서 생각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따라잡는다. 우승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상 이길 수밖에 없다.
기어를 높이고 보폭을 최대한 늘려 스프린트로 달린다. 점점 가까워지는 앞 사람의 등짝에서 반팔 아래 팔꿈치가 번갈아 튀어나온다. 초조한 표정으로 힐끔힐끔 돌아본다. 이 사람은 팀에서 가장 빠른 주자가 아니다. 에이스가 아니다. 그래서 자신감이 없다. 루카와는 좀 더 속력을 높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넘어지지 않도록, 발뒤꿈치부터 발끝까지, 발바닥 전체가 순서대로 땅을 박차고 가는 감각에 집중한다. 접지력 좋은 신발 바닥에 달라붙는 까끄러운 모랫바닥이 기세 좋게 파인다.
지금이다 싶었을 때 루카와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마지막 바퀴, 마지막 커브에서 몸을 기울이며 작정하고 바깥쪽으로 루트를 크게 돌아 선두를 제친다. 역전의 순간 전교생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환성이 바람과 함께 스쳐 지나간다. 숨소리와 심장 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건 바깥이 아니라 안쪽부터 들려오니까.
눈앞에 아무도 없다. 모두 제쳤다. 우리 팀과 함께.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혼자 달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수록 절대 속력을 떨어뜨려선 안 된다. 나는 듯이 자유로워진다. 루카와는 이 자유를 잘 알고 있다. 모두를 제치고 골을 향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
하얀 결승 테이프가 빠르게 가까워진다. 저곳은 림과 마찬가지. 루카와가 남은 힘을 다 끌어모아 마지막 스퍼트를 냈다. 허리에 하얀 결승 테이프가 걸린다. 이겼다.
다리를 서서히 멈추며 허벅지를 짚고 상체를 숙이자 이마에서 후두둑, 미처 닦지 못한 땀방울이 운동장 모래를 점점이 적시는 게 보였다. 그런 풍경도 찰나, 곧 결승선에서 기다리던 팀원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 들었다. 루카와를 얼싸안고 기뻐한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커다란 함박웃음과 쓰다듬과 두들김 속에서 루카와는 거친 날숨 속에 안도의 한숨을 섞었다. 생각보다 해냈다는 감각이 컸다. 루카와에게는 많은 사람의 기대가 걸려있었고 그걸 제대로 충족해 냈다. 한숨 돌린 지금에서야 그런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아직 귓가를 둥둥 울리는 심장 소리도 진정되기 전에 메달 수여식이 시작된다. 운동회의 꽃 계주만은 특별히 다른 종목에 없는 메달을 준다. 1학년 계주팀 전체가 순위대로 숫자가 적힌 깃발 앞에 줄을 섰다. 새파란 깃발에 하얗게 새겨진 숫자 1이 자랑스럽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10반 주자들은 마음껏 소리 높여 떠든다.
위풍당당 행진곡이 제법 장엄하게 울려 퍼진다. 메달 수여자는 각 반 담임 교사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한 명씩 목에 메달을 걸어 준다. 맨 뒤에 서 있던 루카와가 메달을 받을 때 10반 전원이 루카와의 이름을 한 글자씩 연호했다. 루카와는 반응하지 않았다. 같이 우승한 건데. 그렇게만 생각했다.
계주 메달은 3등까지 준다. 차례로 메달 수여가 끝나고, 그 이하 순위 팀에도 하나하나 박수가 돌아간다. 루카와는 한참 대기했다. 모든 순서가 끝나자 다리가 묵직하다.
반으로 돌아가던 루카와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시원해 보이는 나무 그늘이 눈에 들어온다. 조용히 그리로 빠진다. 밑동에 스르르 기대앉았다. 바람이 땀에 젖은 관자놀이를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가 체온을 식혀 준다. 모래 먼지 가득한 운동장 위를 덮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 햇살은 살짝 기가 죽었지만 여전히 새파랗다.
불쑥, 익숙한 얼굴이 하늘 속에 등장했다.
"멋지던데. 슈퍼 루키."
센도다.
"육상부가 스카우트하러 오는 거 아니야?"
일으켜 주지도 않고 실없는 소리만 한다. 루카와는 평소처럼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안 갈 건데요."
짐짓 기특하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센도 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한창 뜨거웠던 정오보다 훨씬 시원하다. 공기에 섞인 어렴풋이 새콤한 습기. 고된 연습으로 땀을 실컷 흘린 날 선배의 체취와 똑같다는 걸 루카와는 알고 있다.
"나도 뺏길 생각 없어."
내려다보는 하얀 얼굴. 눈동자가 빛난다고 루카와는 또 생각했다. 개구쟁이처럼 즐거움에 눈을 빛낼 때와 약간 다르게. 좀 더 강렬한... 온도를 느낀다.
그 순간 루카와는 가슴이 붙잡힌 것 같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불쾌함은 아니지만 불편감은 있다. 그러나 불쾌하진 않다. 조금도.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이것 또한 존경하는 마음일까?
센도가 불쑥 손을 내민다. 파란 하늘과 눈부신 모래 먼지 속을 가르는 기다란 팔. 루카와는 그 손을 망설임 없이 꽉 붙잡았다. 척골을 둘러싼 두툼한 손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서로 살짝 끈적하다. 센도가 당기는 대로 체중을 실어 몸을 일으킨다. 무거울 법도 한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어선 루카와의 손에서 센도의 손이 빠져나간다. 뜨끈하고 부드러운 것이 곧 차갑고 단단한 것으로 바뀐다. 아쿠아리어스 캔이었다. 센도가 자기 손을 빼내면서 교차하듯 쥐여 준 것이다. 언제 뽑아왔지. 아직 차가운데.
루카와를 일으키지 않았던 손의 검지와 중지 끝으로, 센도가 루카와의 볼을 톡 건드리며 말했다.
"이제 내 차례야."
선배의 손끝은 아쿠아리어스 캔처럼 차가웠다. 아마 주머니 속에 넣고 있었겠지. 음료수랑 같이.
센도의 말처럼 어느새 2학년 계주 준비가 한창이다.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반으로 돌아간다. 우승 확정으로 축제 분위기다. 선배가 준 차가운 음료수를 꿀꺽꿀꺽 넘기자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기분. 파란 하늘처럼 맑아진다.
센도는 2학년 3반 마지막 주자였다. 거의 한 바퀴 차이로 여유롭게 우승. 결승선을 끊으면서 두 주먹을 불끈 들어 올렸을 때 이름을 연호하는 함성은 루카와보다 더 컸다. 메달 수여식에선 뒷짐을 지고 가슴을 펴고 서 있기만 해도 누군가 당장 실신하는 듯한 높은 비명이 들렸다. 당당한 상체 한가운데에 얌전히 놓여 있는 메달이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작아 보였다.
모두 이기게 해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센도의 엄청난 인기도 기본적으로는 그런 이유겠지만. 또 그것만이 전부인 건 결코 아니다. 둔한 루카와조차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잘 설명할 순 없어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누구나 센도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자신만 그런 게 아니다.
루카와는 개의치 않았다. 전교생이 센도를 보고 있을 때, 루카와는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조심스럽게 꺼내 펼쳐 본다. 그새 약간 구겨졌다. 가운데에 정자체로 또박또박 쓴 글씨를 속으로 읽는다.
존경하는 사람.
이 글자를 손에 꼭 쥐고 망설임 없이 달렸다. 그때 느낀 바람의 온도를 기억한다. 가까워지며 점점 커지던 눈동자와 바보 같은 표정도. 붙잡은 손목의 단단한 감촉과 속력을 금세 맞춰 오는 기분 좋은 질주도. 심장이 얼마나 빠르게 뛰었는지도.
누구나 센도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상관없다. 루카와는 가장 먼저 그를 찾아낼 수 있다. 마음껏 바라볼 수 있다. 종목에 따라서는 달려가 손목을 붙잡고 뛰어 승리할 수도 있다. 농구라면. 농구로는. 따라잡을 것이다. 이기고 싶다. 선배를 이기고 싶다. 선배와 함께 이기고 싶다. 선배와 함께 이기다 보면 선배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루카와는 쪽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날. 1학년 10반 교실에 우승 기념 주스가 배달되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팩 하나씩 차지했다. 굳이 요란하게 건배까지. 계주 첫 주자였던 녀석이 나서서 ‘하나 둘 셋, 가자!’를 다 함께 외치자고 졸랐다. 쓸데없이 비장하다고 야유하는 녀석들도 제법 있었지만. 결국 마지막엔 모두 함께 우렁차게 외쳤다. 한 명만 빼고.
루카와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주스 팩만 들어 올렸다. 그래도 무려 깨어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감동했다.
한 모금에 쪽 빨아먹을 150ml짜리 사과 맛 주스. 시원하고 달콤했다. 모든 승리가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