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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3.04.18

레몬

불면의이쑤신

센도 아키라는 신발장 앞에 섰다. 하품을 하면서 실내화를 꺼낸다. 거의 무의식적인 반복 동작. 근데 뭐가 같이 떨어진다. 팔락. 힘없는 낙하가 바닥에 닿기 전에 반사적으로 공중에서 낚아챈다. 새하얀 종이봉투였다.

'축의'나 '조의'가 굵게 쓰여 있어야만 할 것 같은 아주 평범한 일반 규격 봉투. 그러나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의도도 이름도.

센도는 정확히 같은 위치 조건에 분홍색이나 노란색이나 아무튼 파스텔톤의 조그맣고 모서리가 동그란 편지봉투가 놓여 있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건 처음 봤다. 가로로 여는 게 아니고 좁은 세로 편에 옹졸한 입구가 달린 봉투라니. 마음을 전하기보다 선고를 내릴 것 같은.

천정으로 들어 올려 형광등 불빛에 비추어 본다. 빈 봉투는 아니라는 것 정도만 알겠다. 이 정도 수작으론 내용물을 훔쳐볼 수 없는 빳빳한 격식. 진짜 조의금 봉투인가? 결투장인가? 니 장례식 준비해라 뭐 이런? 평범할 줄 알았던 하루가 갑자기 시작부터 흥미진진. 협박편지일 가능성에 두근거리면 나 너무 지루하게 사는 건가.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당연하다. 지각했으니까. 괜히 뜸 들이면서 봉투를 열어 본다. 그 편이 서스펜스가 더해질 것 같아서. 손바닥에 편지 봉투 모서리를 톡톡 두들기자 내용물이 튀어나온다. 길게 한 번 접힌 원고지 한 장. 기대감에 입이 약간 벌어진다.

왼쪽 상단 구석에 딱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레몬을 좋아합니까?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데.


루카와 카에데는 문구점 편지지 코너 앞에 섰다. 과히 호화로운 선택지 앞에 압도 당할 위기다. 기선제압을 피하려고 총천연색 종이들을 노려본다. 별로 싸우러 온 건 아니지만. 모처럼 마음먹었는데 이런 장면에서 기세를 잃고 싶지 않다.

그래 도구는 중요하지 않아. 아무거나 하나 뽑자. 무난해 보이는 걸 대충 집어 올렸다가 하단에 난무하는 하트 무늬가 드러나자 조용히 원위치. 너무... 여자애 같다. 받는 녀석이 그런 걸 좋아할 리 없다. 남자다운 선배니까. 그렇지만 남자다운 디자인의 편지지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why...

현대 사회의 지나친 풍요가 루카와가 제일 싫어하는 걸 강요한다. 복잡한 거. 루카와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속으로 왜 이런 상품은 없는지 한탄한다. '농구 잘하고 상냥한 2학년 남자 선배용 편지지.' 그냥 그거 사고 싶다.

가장 시선이 오래 머물렀던 건 가장자리를 따라 레몬이 그려 넣어진 편지지였다. 연습 틈마다 입에 넣어주던 레몬 슬라이스가 떠올라서. 자동적으로 혀 아래 침이 고인다. 모아서 꿀꺽 삼킨다.

입부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루카와가 동기들처럼 제 손으로 레몬꿀절임을 집어먹으려고 하자 그 선배는 손등을 찰싹 때렸다. 뭐야. 본인이 먹으라고 한 주제에. 포크를 주든가. 항의와 불만을 담아 쳐다보면 도저히 침 뱉을 수 없는 웃는 낯으로.

"손 끈적거리잖아. 내가 먹여 줄게."

친절하게 미소 띤 강인한 하관이 아 하면 따라서 아 하게 된다. 그 이후로 레몬에 손대는 건 포기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떨 땐 쉬는 시간인지도 모르고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데 다가와서 입에 쏙 넣어 버린다. 디펜스 할 틈도 없는 재빠른 스피드. 역시 에이스.

그러니까 모두가 좋아하게 되는 거겠지.

음... 루카와는 잠시 고민한다. 역시 레몬 편지지는 그만두자. 연습 때만 먹는 걸로는 선배가 레몬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냥 영양소 보충일 수도 있다.

루카와는 문득 깨달았다. 난 선배가 좋아하는 게 뭔지 잘 모른다. 농구 빼고. 농구공이 그려진 편지지는 과연 없었다.

상대방을 기쁘게 할 방법을 모른다면 최대한 정중하기로 했다. 루카와는 가장 정중함이 느껴지는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골랐다. 200자 원고지와 일반 규격 봉투였다.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다. 원고지 한 장을 조심스럽게 뜯어내고 연필을 든다.

뭐라고 써야 하지.

루카와는 머릿속에 많은 단어를 담고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연필 끝이 원고지를 톡 톡 친다. 맨 첫째 칸을 무심코 까맣게 채워 버렸다. 이건 안 돼. 다시 한 장을 뜯는다. 안녕하세요. 라고 썼다가. 인사는 어차피 매일 얼굴 보고 하는데. 다시 한 장을 뜯는다. 센도 아키라 귀하. 귀하? 편지 쓰는 형식은 잘 모른다. 선배...라고 쓰면 나인 줄 알까. 잘 따르는 후배가 워낙 많으니까 묻히지 않을까.

딱히 내가 보냈노라고 밝히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고백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냥 전하고 싶을 뿐이다. 커져 가는 건지 깊어지는 건지 걷잡을 수 없이 농구공처럼 튀어 다니는 건지 알 수 없는 마음의 조각을. 너무 늦기 전에.

불행히도 루카와는 잘 모르는 사람에게 고백받는 입장의 귀찮음을 알고 있다. 그렇구나. 알겠다. 이걸로 대화가 안 끝나는 게 납득이 안 됐다. 나를 언제 봤다고 좋다는 건지.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의문스럽기만. 어차피 돌려 말할 줄 모른다면 빠른 거절이 최선이었다. 나중엔 아예 불러도 안 나갔다. 시간이 아까웠다. 자는 게 나았다.

이제 입장이 뒤바뀌었다. 루카와는 고백에 대한 대답 따위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구나. 알겠다. 그렇게 끝나겠지. 하지만 무덤덤한 루카와와 달리 사람 좋은 그 선배는 다소 난처할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사람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고백은 아예 접었다. 옵션에 없다.

어쩌면 나중에. 더 친해지고 나서. 선배가 뭘 좋아하는지, 농구를 안 할 때 뭘 하는지, 어떤 편지지를 기뻐할지 알게 된다면. 그때는 고백할 자격이 조금은 생길지도. 그럼 선배도 약간은 납득하겠지. 아, 나의 이런 점을 보고 좋아하게 되었나 보다. 그렇구나. 알겠다. 고맙다... 정도만 덤으로 붙어도 행운일 것 같다.

사실 그런 세세한 건 몰라도 좋아하지만.

알고 싶긴 하다.

루카와는 드디어 편지지를 채웠다.

레몬을 좋아합니까?

200자 중 191자가 공란인 편지를 봉투에 넣는다. 어쨌든 지금 마음은 이거다. 하나씩 가자.


센도 아키라는 입학 이래 한 번도 도서관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다. 아무에게도 들키기 싫은 비밀을 몰래 검토하기에는 점심시간 도서관이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아무도 없다. 그중에서도 구석진 자리에 의자를 빼고 앉는다. 어느 책상에도 잘 안 들어가는 긴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방만한 자세로. 옆구리에 낀 월간 고교농구를 내려놓는다. 구겨질까 봐 사이에 끼워 둔 재미없는 일반 규격 봉투 다섯 개를 포커 카드처럼 부채꼴로 펼친다.

맨들한 봉투 표면을 손으로 슥 쓸어내려 본다. 왠지 따스한 느낌. 무기물인 건 알지만. 이걸 열기 전엔 이상하게 아무도 없는 줄 알면서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온 순서대로 하나하나 열어서 차곡차곡 겹쳐 본다. 사실은 꺼내 보지 않아도 다 외운 문장들.

처음엔 질문의 연속이었다.

레몬을 좋아합니까?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냅니까?

이런 걸 왜 물어보는 걸까.

아니지. 아리송한 내용에 말려들지 말자. 핵심은 발신자다.

네모난 칸을 채운 동그란 글자와 제법 오랜 시간 눈싸움을 해 봤다. 남자? 여자? 둘 다 가능성 있다. 글씨체만으론 단언이 어렵다.

편지는 등교했을 때 신발장 안에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발신자는 센도보다 늦게 하교하거나 일찍 등교하는 사람이다. 지난 일주일 간 자신의 일정을 대강 떠올려 본다. 등교 시간은 대체로 아슬아슬하다. 하교 시간은 부 활동에 따라 대중없다. 가끔 땡땡이칠 때도 있으니까 더더욱... 그렇다면 나보다 일찍 학교에 오는 사람? 앗. 후보가 너무 많다. 추리는 싱겁게 막다른 골목에. 명탐정도 아무나 되는 건 아니구만.

삼 일째엔 평소보다 훨씬 일찍 등교해 봤다. 운이 좋으면 우편배달 현장을 포착할까 싶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당신은 상냥합니다.

백문 백답이나 스무 고개에 가깝던 편지 내용이 확 달라졌다. 갑자기 칭찬? 여기서? 근데 내가 상냥하다고?

분위기가 수상해진다. 잘못한 것도 없이 뒷머리를 긁적거린다. 단순한 흥미나 궁금증을 넘어서 가슴이 간지러워지기 시작한 건 분명 세 번째부터다.

항상 건강하세요.

사일째. 교문에서 만난 코시노는 센도가 신발장에서 실내화가 아닌 다른 걸 꺼내자 경악했다. 뭐야. 연애편지? 제법 흉흉한 얼굴로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남고생이란 사촌이 땅을 샀을 때보다 친구가 러브레터를 받았을 때 훨씬 더 배가 아픈 존재. 하지만 실물을 보여주니 코웃음 쳤다. 가정통신문이네.

그런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외관이다. 우연인지 통찰력인지 내용도 딱히 가정통신문과 다를 바 없었다. 어딘지 간지러웠던 직전 편지와 낙차가 지나치게 크다. 센도는 멀미와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다섯번째에 또 롤러코스터가 치솟았다.

당신보다 나은 사람이 있을까요?

진짜 연애편지였네.

다섯 통의 편지를 연이어 보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발신자는 한 사람이다. 글씨체가 똑같다.

연애편지였다니.

센도의 평온한 정신세계는 충격을 받았다. 드문 일이었다.

지금까지 받았던 그 어떤 러브 레터와도 달랐다. 형식의 기발함도 놀랍긴 했으나 무엇보다 마음을 때린 건 오늘 받은 마지막 편지. 이렇게나 단순하고 로맨틱한 문장. 심장이 묵직하게 뛴다. 풀타임 경기를 뛴 것처럼. 내가 이상한 건가? 아니지? 센도는 잠시 코시노에게 네가 봐도 객관적으로 설렐 법한 문면인지 물어보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곧 기각했다. 이것만은 혼자 보고 싶었다.

아무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센도는 독차지한 문장들을 내려다본다. 문체는 투박하고 단순하다. 내용은 엉뚱하고 종잡을 수 없다. 꾹꾹 눌러쓴 글자들이 단정하게 적혀 있는 원고지 다섯 장. 얇은 선을 여러 번 겹치면 선명해지듯. 처음엔 안개 같던 편지의 의도가 다섯 장을 모아 놓으니 솜사탕처럼 뭉쳐진다.

센도에 대해 알고 싶다.

센도의 좋은 점을 알려 주고 싶다.

센도가 건강하기를 바란다.

부드럽고 똑바른 호의. 어떤 속임수도 다른 복심도, 심지어 아무런 요구도 강요도 없는. 순수한 존중뿐이다. 무심코 쓰다듬고 싶어진다. 비어 있는 여백마저도.

센도는 발신자 추측을 포기한다. 찾아낼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궁금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누구라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남자든 여자든. 후배든 선배든 동급생이든. 막상 얼굴을 마주했을 때 실망할까 봐 두려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해야 한다. 이렇게나 투명한 마음을 전해 준 것에.

추측은 관두고 확인을 결심한다. 자아. 어떻게 찾지?

센도는 골똘히 작전을 짠다. 일방적으로 끝낼 생각은 없다. 원래 추격은 특기다. 성미에 맞다. 선공에 대한 최선의 방어는 가로채기 속공.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딸깍, 심을 꺼낸다.


루카와 카에데는 농구부 입부 이래 한 번도 체육관 열쇠를 남한테 맡긴 적이 없다. 가장 먼저 체육관에 가서 가장 나중에 나왔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열쇠 담당이 되었다.

원래도 1학년은 뒷정리 담당이다. 개인 연습을 더 하고 싶은 1학년이라면 그중에서도 늦어진다. 루카와는 마지막까지 코트를 떠나지 않는다.

후쿠다 킷쵸는 농구부에 복귀한 뒤부터 가끔 루카와를 따라 남는 유일한 2학년이다. 티는 안 내지만 루카와는 반갑다고 생각한다. 티는 안 내지만.

일 대 일로 죽어라 붙는다. 후쿠다는 루카와를 상당히 의식하고 있다. 1학년 주제에 센도와 견줄 만한 실력이기 때문에. 몇 번 붙으면 자신의 장점을 몽땅 흡수해 가는 스펀지 같다. 이런 캐릭터는 만화에 나와도 사기라고 욕먹지 않나. 선배치고 시합 경험이 부족한 후쿠다보다 한 수 위인 점이 많다. 사실 일 대 일도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점 때문에 같이 농구하면 재밌다. 후쿠다의 제안으로 패스 연습도 한다. 롱패스를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서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멀리서 노바운드로 패스하려고 기를 쓰고 경쟁하게 된다. 후쿠다는 루카와를 존중하기 때문에 가르칠 후배가 아니라 경쟁자로 의식한다. 루카와는 후쿠다를 존중하기 때문에 공을 잡으면 계급장 떼고 달려든다.

체육관 바닥에 드러누운 루카와가 숨을 몰아쉰다. 체력은 확실히 후쿠다가 위다. 땀을 닦는 후쿠다를 올려다본다.

"훗키 선배."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인터하이 현 예선 카이난전 이후로 루카와는 후쿠다를 이렇게 부른다. 진 소이치로가 후쿠다를 부르는 호칭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고양이처럼 엿듣기나 하다니. 후쿠다는 선배의 위엄을 갖추기엔 중학교 때 별명이 지나치게 귀엽다고 생각한다. 건방진 후배가 벌떡 일어난다. 꾸벅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개인 훈련."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좋다. 이것이 후배를 키우는 짜릿함이구나... 후쿠다의 가슴이 뿌듯함으로 차오른다. 뭐 이런 걸 가지고. 선배라면 당연한 일이지. 짐짓 관대하게 손을 내저어 본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있어요."

즉답이다. 의외였다. 현내에서 공격력으로는 나이와 상관없이 1, 2위를 논하는 녀석이 나에게? 다시 뿌듯함으로 가슴이 떨린다. 도대체 어떤 질문일까. 긴장되기도 한다. 막상 본론을 꺼내려니 망설이는 듯 우물거리던 조그마한 입술이 열린다.

"센도 선배는 오늘 점심시간에 어디 있었나요."

"..."

농구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질문도 아니었다. 센도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구체적인 시간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 물어보는... 그거 아닌가? 알리바이? 후쿠다는 이쪽을 묵묵히 응시하는 루카와의 날카로운 눈매를 바라보며 최근 재밌게 읽었던 추리 만화를 떠올린다. 센도 이 자식 무슨 혐의를 뒤집어쓴 거냐. 범죄는 안 돼. 출전 정지다. 다행히 후쿠다는 센도와 같은 반이라 그의 알리바이를 알고 있었다.

"도서관에 간다던데."

"도서관?"

루카와의 눈초리가 더욱 예리해졌다. 후쿠다도 입으로 꺼내 놓고 보니 상당히 수상하다. 센도가 도서관을? 너무 안 어울리잖아! 이렇게 거짓말 같을 수가. 알리바이가 없는 것보다 더 수상한 게 있다면 거짓 알리바이인 법. 후쿠다는 왠지 변명하듯이 말을 늘어놓게 된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냥 조용한 데서 밥 먹으려고 한 거 아니겠어? 그렇게 궁금하면 아까 물어보지 그랬어."

"..."

루카와의 눈빛이 수그러들더니 네에 하고 대충 대답한 뒤 입을 다물어 버렸다. 후쿠다는 영문을 몰라서 어깨를 으쓱하고 라커룸으로 들어간다. 먼저 간다. 내일 봐. 루카와는 뒤통수에 대고 꾸벅 목례한다.

도서관... 혼자 남은 체육관에 아주 작은 루카와의 목소리가 울린다.

루카와는 옥상에서 점심을 먹는다. 조용해서. 아무도 없어서. 식후에 곧장 드러누워서 잠들기 편해서. 그것도 다 맞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다.

료난 고등학교 교사는 운동장을 바라보고 기역 자로 꺾어진 건물이다. 난간 근처 지정석에 앉으면, 모퉁이 건너편 교사가 내려다보인다. 아슬아슬하게 시야에 걸리는 2학년 교실 맨 뒤 창문.

센도의 자리다.

루카와는 여기서 센도가 도시락을 먹고, 친구들과 잡담하고, 꾸벅꾸벅 졸다가 팔꿈치에 턱을 대고 잠드는 모습을 내려다본다. 매일.

평온하게 잠든 얼굴을 보다가 같이 잠드는 순간이 좋다. 일방적으로 함께 한다는 감각을 누린다. 그러다가 점심시간 끝나는 종소리를 못 들으면 오후 수업은 날린다. 부 활동 전에만 일어나면 다행이다.

오늘은 센도가 자리에 없었다. 드문 일이다. 그래서 훗키 선배한테 행방을 물었더니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왔다. 도서관엔 대체 왜. 또 선배에 대해 모르는 게 늘었다. 이것도 편지로 물어봐야 하나. 도서관엔 왜 가셨죠. 숫제 취조다. 그만두자. 따져서 뭐 하나.

물론 루카와도 부 활동 이외의 시간에 센도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편지로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답변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다. 궁금하다고 꼭 알아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좋아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 알면 좋지만 알 권리가 있나? 루카와는 시시콜콜 알아내기보다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를 선호했다. 어디서 뭐 하냐는 팩트가 중요한 게 아니고. 멀리서라도 상관없으니 그 자체를 지켜보는 쪽이 마음이 갔다. 좋아하는 마음은 정보 수집이 아니다.

지금 주어진 시간도 충분했다. 매일 부 활동에서 볼 수 있다. 농구도 실컷 할 수 있다. 집중 훈련 기간에는 주말에도 본다. 선배가 땡땡이만 안 치면. 그래도 2학년 들어 현저히 개근에 가까워졌다며 코시노 선배가 고평가했다.

한 번 제대로 빠졌을 때가 하필이면 우오즈미 선배의 은퇴식이었다.

당시 2학년 선배들은 화가 난 것 같았다. 분위기가 안 좋았다. 팀워크가 깨지는 건 싫다. 제가 찾아올게요. 연습복 차림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교문을 나섰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손에 농구공을 든 채였다.

료난은 쇼호쿠와 쇼요를 꺾고 인터하이에 진출했으나 2회전에서 탈락했다. 많은 걸 준비했지만 최강 산노를 넘진 못했다. 가진 카드를 다 썼는데 역부족이었다. 아깝게 졌으니 그 정도면 잘 따라갔다는 평가도 있었다. 루카와는 동의할 수 없었다. 활활 불타올랐다. 다음에 만날 땐 절대 안 져. 미국이든 어디든.

선배는 절망했을까?

정처 없이 헤매다가 역 앞에서 센도와 딱 마주쳤다. 센도는 놀란 얼굴이었다.

"선배."

"미안해. 찾으러 나왔어?"

"승부해요."

"응?"

"일 대 일. 승부해요."

충동적인 제안이었다. 그렇지만 선배는 거절하지 않았다.

마침 복장도 갖췄고 공도 있고. 해가 질 때까지 공원에서 미친 듯이 붙었다. 선배는 끝까지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럴 사이는 아니었다. 같은 농구부 선후배니까? 오히려 언제든지 가능하다며 다음으로 미뤄 버려도 그만인데. 주장 은퇴식도 가고 싶지 않은 기분으로 1학년 후배를 최선을 다해서 상대해 준다. 할 수 있는 한 오랜 시간 동안. 왜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그럴 사이가 아니었다.

평정을 찾고 싶은데 숨이 차올라서 그냥 헉헉거리면서 말했다. 선배.

"농구를 더 잘 하고 싶어요."

"지금도 잘 하는걸."

"누구한테도 지고 싶지 않아요."

"..."

"선배한테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또렷한 눈빛. 잠시 침묵하다가 센도가 말했다. 너는 일 대 일이나 경기 중에나 플레이가 똑같아.

지금까지 한 번도 입에 댄 적 없었던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팀 내에서 센도의 리더십은 장점을 격려하는 방향이다. 실수를 감쌀지언정 약점을 들이대지 않는다. 어차피 전력은 정해져 있고 성장은 각자의 몫인데 감정이 상해서 좋을 게 없다는 식이다. 마냥 사람 좋은 선배인 줄 알았더니 차가운 메스를 들이댄다. 자기보다 더 나은 선수가 되라고.

전신이 떨릴 정도로 기뻤다.

그날 밤 루카와는 평소보다 두 시간 늦게 잤다. 첫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오즈미 선배의 은퇴식을 떠올린다. 지금 2학년 선배들도 두 학기 뒤엔 농구부를 떠난다. 그 후엔 졸업이다. 이별에 대해 생각한다. 전하지 못하고 남은 마음에 대해서.

더 늦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구나. 루카와는 두 시간의 불면 속에서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내일 문구점에 가서 편지지를 사야지. 한 번 마음을 먹으니 스르르 잠이 왔다. 꿈도 안 꾸고 새근새근 잤다.

여섯 번째 편지는 루카와의 가방 속에 있다.

후쿠다가 떠난 뒤, 그새 땀투성이가 된 체육관 바닥을 대걸레로 한 번 훔치고, 이곳저곳 흩어진 농구공을 정리한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불을 끄고 열쇠로 문을 잠근다. 교무실에 들렀는데 담당 선생님이 안 계신다. 자리에 열쇠를 놔두고 메모를 남겼다.

신발장 앞에 도착했을 땐 해가 지고 있었다. 루카와는 오늘 짝사랑 상대의 신발장에 마지막 편지를 넣을 계획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전하고 싶은 건 이게 다였다. 나머지는 루카와만의 보물이다.

제 것처럼 낯익은 신발장 문을 열었다가 그대로 굳었다.

신발 위에 뭐가 잔뜩 쌓여 있다.

허리를 숙여서 어두컴컴한 직사각형 안을 열심히 들여다본다. 미확인 물체를 포착한 고양이처럼.

봉투? 설마 동지들인가. 하긴 몇 통이 더 있어도 이상하진 않다. 근데 오늘 무슨 날인가. 평소엔 하나도 없더니 몰려 있네. 설마 생일? 그럼 농구부원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고. 발렌타인... 그건 아닌데. 내가 모르는 무슨 무슨 데이인가. 음. 그럴지도.

준비한 편지를 맨 위에 올려야 할지 아래에 넣어야 할지 다소 버벅대다가 편지 무더기를 살짝 건드렸더니 균형이 무너지는 바람에 미끄러져 내려 바닥에 우수수 떨어진다. 앗. 이런. 안 돼. 남들의 편지를 바닥에 내버릴 생각은 아니었다. 먼지라도 묻을까 봐 얼른 주워 모으는데 이 새하얀 봉투는 뭔가... 낯이 익은...

내가 보낸 거랑 똑같이 생겼네.

우연이라기엔 하필 다섯 개. 그것도 전부 동일한. 루카와는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줍느라 쪼그려 앉은 채로 다섯 장의 편지봉투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혹시나 싶어 하나 열어 본다. 가로로 한 번 접힌 200자 원고지. 하나를 더 열어 본다. 똑같은 200자 원고지.

다섯 개의 봉투 안에서 연이어 나온 건 꼬박꼬박 두 시간씩 밀렸던 다섯 밤의 수면.

보냈던 편지가 다 돌아왔다. 완벽한 거절? 근데 난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건 넣지도 말라는 뜻인가? 내가 불러내도 안 나가는 것처럼? 스멀스멀 밀려드는 혼란. 억울함. 불복심. 식은땀이 날 것 같다. 이런 기분은 중학생 때 제대로 체했던 이후로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뭔가 위화감이 있다. 넣을 때와는 달라진 점이 있는 것 같다. 한 번 펼쳤다가 다시 접었다는 점 외에도... 루카와는 원고지를 앞뒤로 살피다 조심스럽게 하나를 펼쳐 본다.

당신보다 나은 사람이 있을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알려주세요.

답장이었다. 200자 원고지 우하단에 쓰인 세 문장.

다른 편지를 펼쳐 보는 손가락이 떨렸다.

항상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당신도요.

또 하나를 부리나케 펼친다.

당신은 상냥합니다.
그런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편지는 상냥합니다.

미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는 심장을 편지를 잡지 않은 손으로 꾸욱 누른다. 이런 건 기대하지 않았다. 이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이런 건... 감당이 조금 어려운지도...

심호흡을 하고 네 번째를 펼친다.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냅니까?
바스켓합니다. 최근에는 소중한 후배와 일 대 일이 즐겁습니다.

"소중한 후배..."

무심코 소리 내서 읽는다. 다 아는 내용만 있어서 정보 값이 0에 가까운 문장 중에 그 다섯 글자만 남는다. 소중한 후배.

심장이 약간 미친 것 같다. 훗키 선배랑 녹초가 되도록 개인 훈련을 했을 때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레몬을 좋아합니까?
좋아합니다.

이런.

망했다.

루카와는 편지지에 얼굴을 묻었다. 정수리에서 김이 나는 것 같다. 입에서 뭐라고 욕지거리가 나갔다. 패배감 때문이다. 다시 얼굴을 들어서 다섯 글자의 답장을 노려본다. 시원시원하고 큼직한 글자.

좋아합니다.

지금 어깨 위를 짓누르는 건 분명한 패배감이다. 열받아.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물론 이건 레몬이 좋다는 뜻이지만. 그래도.

완전히 똑같은 다섯 글자가 쓰인 여섯 번째 편지를 꺼낸다. 아쉽다. 이걸 맨 먼저 쓸 걸 그랬다. 물론 선배는 레몬이 좋다는 뜻이지만 그래도, 완전히 똑같은 다섯 글자를 먼저 받아 버렸다. 내가 하려던 공격으로 한 방 당해 버린 기분. 왜 짝사랑인데 선수를 뺏겨야 하느냔 말이다. 버저비터를 빼앗긴 심경. 김샌다. 마무리가 중요한 건데.

이길 수가 없네. 역시 에이스. 언젠가 꼭 꺾어 버릴 거야. 농구로. 편지지를 손에 쥐고 벌떡 일어난다.

편지를 신발장에 넣으려고 내민 오른손을 누가 뒤에서 콱 잡았다.

"너였구나."

심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안녕. 루카와."

진짜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