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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3.03.26

자장자장 2

불면의이쑤신

"아이구 잘 먹는다."

옆자리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서태웅을 구경하던 윤대협은 자기도 모르게 이유식 먹는 조카를 바라보는 삼촌 같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야무지게 덮밥을 끝장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사작용이었다. 서태웅은 진짜 잘 먹었다.

상쾌하게 낮잠 자고. 가벼운 몸으로 오후 내내 일 대 일 때리고. 주린 배를 채운다. 단순하고 충실하고 즐거운 하루였다. 점심도 윤대협이 샀는데 저녁도 산다. 서태웅은 감사요 한 마디 던지고 순순히 얻어먹는다. 무슨 속셈이 깔린 지도 모르고.

윤대협이 슬슬 주둥이에 시동을 건다.

"태웅아."

"?"

우물우물 바쁘게 움직이는 솜털 보송한 볼따구. 의욕에 비해 한 입이 크진 않다. 입이 작은 줄 알았는데 턱 자체가 작은 듯. 양이 많은데 먹는 속도는 느려서 두 그릇을 한 시간에 걸쳐 비우고 있다. 테이블에 턱을 괸 채로 윤대협은 최대한 무해하게 웃었다.

"아침에 말한 거 있잖아. 나 요즘 잠이 잘 안 와."

"알아."

"그래서 너랑 농구하기 힘들 것 같아. 컨디션이 안 좋아서."

서태웅이 숟가락을 들고 입을 아 벌린 채로 일시정지했다. 효과 만점이다. 윤대협은 눈썹 앞쪽을 들어 올려서 짐짓 미안하구 서운한 표정을 만든다. 입꼬리는 빙글빙글 올라가고 있지만.

잠깐 허공에 떠 있던 숟가락이 밥그릇으로 얌전히 주차된다. 서태웅이 묵묵히 밥그릇을 내려다본다. 윤대협이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맞추려 든다.

"왜 그래? 밥맛 떨어졌어?"

"음."

그렇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평소 같은 무표정으로 제법 심각하게 앉아있다. 뭔가 곰곰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윤대협이 슬슬 다시 한번 자극을 던질까 싶을 때쯤 서태웅이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재워 줄게."

"와우."

이렇게까지 제 발로 굴러올 줄이야. 윤대협은 무심코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살살 구슬릴 방법을 여럿 준비했는데 쓸데없는 짓이었다. 아차 나 방금 너무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했나? 그렇지만 또 참을 수 없는 순수한 질문.

"어떻게 재워 줄 건데?"

"아까처럼."

심플하다. 고민이 사라진 서태웅은 내려놨던 밥숟가락을 다시 입으로 옮긴다. 우물우물우물. 수염 자국조차 없는 하얀 턱이 열심히 움직인다. 윤대협은 활짝 웃었다.

"그럼 우리 집 가야겠네."

된장국을 한 입 마신 서태웅은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대협은 왠지 뿌듯해졌다. 월척을 낚았을 때처럼.


윤대협 자취방으로 가는 길에 서태웅은 공중전화에 들렀고 윤대협은 편의점에 들렀다.

공중전화 안을 꽉 채운 서태웅. 목소리가 작아서 뭐라고 하는지는 하나도 안 들렸다. 아마 집에 외박 허락을 구하는 거겠지. 윤대협은 문득 서태웅이 부모님에게 제 집을 뭐라고 말했을지 궁금해졌다. 친구 자취방. 음... 친구는 아닌데. 아는 형 자취방. 태웅이가 나를 형이라고 불러 줄까...

"뭐 하냐. 가자."

어느새 통화를 마치고 나온 서태웅이 어깨로 툭 치고 지나간다. 자기 집에 가는 듯이 앞서 걷는 뒤통수를 얼른 쫓아간다.

나란히 걷다 보니 손목에 걸고 있던 편의점 비닐봉지가 서태웅의 허벅다리를 자꾸 건드렸다. 에구구. 반대쪽 손으로 옮긴다.

서태웅이 슬쩍 쳐다본다. 봉지 한 번. 윤대협 얼굴 한 번. 윤대협은 서태웅이 이렇게 시선으로 말을 할 때마다 웃음이 난다.

"앞을 보고 걸어야지, 태웅아."

"뭐 샀어?"

"너 칫솔하고 속옷."

"오..."

서태웅이 턱을 만지작거린다. 뭐야 그 반응은. 윤대협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서태웅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게 필요한 지 몰랐어. 처음이라서."

"진짜?"

"응."

"오..."

이번엔 윤대협이 같은 반응을. 멋쩍어서 한 번 더 중얼거린다. 처음이구나.

잠시 침묵. 서태웅이 얼마였냐고 물어본다. 윤대협이 손을 내젓는다. 서태웅은 두 번은 안 물어본다.

노을이 진다. 가을밤은 서늘하다. 귀뚜라미가 운다. 서태웅이 점퍼 지퍼를 올렸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걸음 소리에 맞춰 걸었다.


서태웅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하겠다며 욕실로 사라졌다.

윤대협은 편의점 비닐봉지를 식탁에 대충 던져 놓고 냉장고를 열어 물병을 꺼냈다. 입을 크게 벌리고 곧장 붓는다. 설거지가 귀찮아서 컵은 잘 안 쓴다. 꿀에 절이고 남은 레몬 쪼가리를 넣어 놓으면 왠지 더 시원한 느낌.

샤워기 소리가 멈췄다. 욕실 문이 열린다. 구름 같은 훈김과 함께 서태웅 머리가 쑥 나왔다.

"나 속옷 좀."

"아 맞다."

비닐봉지에서 속옷을 꺼내서 그대로 패스한다. 길고 하얀 팔이 공중에서 척 낚아챈다. 땡큐. 서태웅 머리가 쑥 들어갔다.

예상 가능한 다음 장면이 번개처럼 윤대협의 머리를 스친다. 거의 시합 때와 같은 스피드로 옷장으로 돌진한다. 눈에 띄는 대로 아무 반팔 반바지를 찾아 움켜 쥔다.

1분 뒤 서태웅은 윤대협의 예상 그대로 속옷만 입은 채 어슬렁 걸어 나오려다 윤대협이 내민 옷가지에 가로막혔다. 오. 땡큐. 덤덤하게 말하면서 눈앞에서 티셔츠를 뒤집어쓴다.

윤대협은 보지 않았다. 등을 돌려 주방에서 유리컵을 꺼내 레몬 조각이 담긴 시원한 물을 쪼르륵 따른다. 바지까지 순순히 챙겨 입은 서태웅 손에 꾹 쥐여 주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가 곧바로 다시 나왔다. 옷을 챙겨 간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윤대협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서태웅은 아니나 다를까 졸고 있었다.

그런데 위치 선정이 독특했다. 침대였다. 헤드 쪽을 다 차지한 채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윤대협 베개는 좌표는 그대론데 매트리스 대신 서태웅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다.

윤대협은 헤어드라이어를 켰다. 요란한 소리가 나는데도 서태웅은 평온하다. 고개를 꾸벅이는 패턴이 안정적이다. 쭉 뻗은 서태웅 다리는 윤대협 사이즈에 맞춰서 제작한 침대 가로 폭보다 좀 길어서 발목부터 공중에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윤대협은 무심코 말했다.

"엄청 하얗네."

머리카락은 금방 말랐다. 침대 아래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동동 떠 있는 발목이 눈앞이다. 장난기가 돋아서 발바닥을 간지럽혀 봤다. 매서운 발차기가 날아온다. 예상 범주였다. 하하 웃으면서 손으로 잡는다. 발목을 요리조리 비틀면서 구경했더니 역정을 내길래 순순히 놔준다.

문득 이 녀석은 여름 내내 농구가 실내 스포츠라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뛰어댕겼다는 걸 떠올린다. 오늘만 해도 가을 땡볕 아래 낮잠도 자고 농구도 했는데. 그을려 본 흔적이 없다.

"태웅이는 맨날 밖에서 농구하는데도 안 타는구나."

"아니야. 탔는데."

이거 봐 하면서 서태웅이 헐렁한 티셔츠 목 부분을 아래로 쑥 내린다. 갑작스러운 속살 공개. 과장 없이 눈부시다. 왠지 보면 안 될 것 같은 색이다. 쇄골 근처에 은은하게 시퍼런 힘줄이라든가 좀 더 아래 분홍색 뭔가에 눈의 초점이 잡히기 전에 윤대협은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음... 그래... 그나마 탄 거였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자꾸 말리는 기분이 든다. 낮에 잘 때 얘 새끼손가락을 입에 넣는 게 아니었다고. 윤대협은 후회했다. 양손바닥 아랫부분으로 눈썹 뼈를 꾹 누른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서태웅의 시선이 느껴진다. 침대에 턱을 대고 올려다본다. 서태웅이 퉁명스럽게 뱉는다.

"자자."

"지금 아홉 신데?"

서태웅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윤대협은 침대에 턱을 붙인 채로 고개를 갸우뚱한다. 침대 머리 쪽을 다 차지한 서태웅이 베개를 만지작거리며 묻는다.

"넌 몇 시에 자는데?"

"음... 모르겠네. 요즘은 잘 못 자서."

"어젠 몇 시에 잤는데?"

"새벽 여섯 시… 그럼 오늘인가?"

서태웅이 베개를 만지작거리던 손길을 딱 멈춘다. 눈이 동그래졌다. 놀라니까 더 어려 보이네. 가로로 길게 찢어진 눈이 위아래로도 커지니까 얼굴의 반이다. 한가하게 서태웅 미모를 감상하는 윤대협.

오래 가진 못했다. 서태웅이 윤대협의 멱살을 잡고 침대 위로 끌어올린다.

"으겍. 갑자기 왜 그래 태웅아. 옷 늘어나."

"빨리 누워."

"아무리 그래도 아홉 시는 무리지..."

"왜?"

"너무 일찍이잖아."

"자면 그만이지."

심플하다. 할 말이 없다. 대체 서태웅의 하루 수면시간은 몇 시간인가. 아홉 시에 자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도 8시간 수면이다. 윤대협은 불현듯 주말이면 해 뜨기 무섭게 농구공을 챙겨 오는 서태웅의 미라클 모닝형 들이닥침을 납득한다. 이건... 부러움을 넘어선 경지일지도... 윤대협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꿀잠 능력자가 수면을 재촉한다. 윤대협은 고수에게 감히 세팅을 지적한다. 비상식적이기 때문에.

"네가 거기에 가로로 앉아 있으면 잘 수가 없잖아. 그쪽이 머리인데."

서태웅이 눈썹을 모으고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무릎 베고 자는 거 아니야?"

윤대협은 다시 눈썹 뼈를 지그시 누른다. 으으음... 무릎베개가 고수의 비법인 건 알겠으나... 윤대협은 잠시 고민한다.

서태웅을 집에 데려오기로 한 이후. 아니 사실은 오늘 하루 내내. 윤대협은 나름대로 개수작을 부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쉽지는 않았다. 결코 쉽지는 않았다. 누구의 탓인지 몰라도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분위기가 자꾸 야릇한 방향으로 굴렀다.

대체로 흐름에 몸을 맡기는 편이지만 책임지지 못할 만큼 선을 넘는 건 싫다. 되면 한다, 하면 된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산다는 건 최소한의 책임감을 버리지 않아야만 가능하다.

다시 생각이 많아진다. 익숙한 두통의 전조. 어어 지금 고민? 고민하는 거야? 나 아플 거다? 지끈지끈 해 버릴 거야? 편두통의 협박이 스멀스멀.

에라 모르겠다. 오늘 최우선 순위는 숙면이다.

"태웅아."

"어."

"그렇게 앉으면 네가 못 자잖아."

"음..."

"잠시만."

윤대협은 서태웅의 양 발목을 잡고 쭉 당겼다. 의외로 얌전히 끌려온다. 서태웅의 몸을 90도 돌려서 침대에 똑바로 눕혔다. 베개를 빼앗아 목 아래 받쳐 준다. 하얀 베개에 까만 머리카락이 흩어진다. 눈이 깜빡깜빡. 올려다본다. 서태웅이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했다.

"이러면 넌 어디서 자?"

"옆으로 좀만 가 봐."

꿈질꿈질 벽에 붙는다. 말도 잘 듣네. 윤대협은 불을 껐다.

아홉 시에 잠자리에 들다니. 초등학교 때도 이보다는 늦게 잤던 것 같다. 서태웅 옆에 눕는다. 베개를 본인 쪽으로 당겨 오며, 빈 공간이 생긴 서태웅 목덜미 아래에 팔을 넣는다. 팔베개가 완성됐다. 자유로운 팔로 서태웅의 상체를 횡단한다. 다키마쿠라가 완성됐다. 사이즈 괜찮네. 작지 않고 품에 꽉 차서 좋다.

신상 다키마쿠라는 다소 황당해했다.

"너 뭐 하냐."

"재워 준다며."

서태웅은 납득하는 기색이 없다. 윤대협이 머리를 굴린다. 생물 시간에 들은 말을 대충 주워섬긴다.

"사람 체온 정도의 커다란 걸 끌어안고 자면 옥시토신이 분비된다고 하잖아. 그러면 잠이 잘 온대."

"호오..."

납득이 빠르다. 조금 걱정될 정도로. 얘 어디 가서 사기당하고 다니는 거 아니겠지.

서태웅이 몸을 돌려 마주 안겨 온다. 상체가 맞붙었다. 조금 뒤척여서 머리 두기 편한 곳을 찾는다. 최종 종착지는 윤대협의 겨드랑이와 쇄골 사이였다. 눈을 두어 번 꿈뻑거린다. 아까부터 졸던 서태웅의 몸뚱이는 뜨끈뜨끈하다.

새근새근. 금방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오똑한 코 아래에서 따스한 날숨이 벌새의 날갯짓처럼 아주 작게 흔들린다. 깨어있을 때도 조용한 서태웅은 잘 때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래도 살아있는 존재가 완전히 정적일 순 없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다.

윤대협은 코 끝에 닿을 듯한 서태웅의 좁은 이마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거의 잠결이었다.

"잘 자. 태웅아."


서태웅은 꿈을 꿨다.

입에 무언가가 가득한 꿈이었다. 뜨거운데 청량하다. 입안 구석구석을 문댄다. 혀가 이리저리 휩쓸린다. 이게 뭘까. 혀끝을 시작으로 온몸이 휩싸인 것처럼 습하고 뜨거워진다. 저항의 의지를 담아 입을 오물거려 보지만 소용이 없다. 깊은 곳으로 빨려 드는 동시에 허공으로 떠오르는 느낌.

바다다. 바다가 침입한다. 아릴 정도로 달큰한 바다.

쪽 소리를 내며 바다가 입술을 놔준다. 사라졌다. 숨쉬기가 편하다.

한숨을 훅 뱉으며 서태웅은 다시 꿈 없는 잠 속으로 까맣게 떨어졌다.


서태웅은 기상과 동시에 좆됐음을 직감했다.

눈앞에는 반듯한 이마. 짙은 눈썹. 긴 속눈썹 가운데 곧은 콧대. 종합 결과 윤대협 얼굴. 입술이 침 범벅이다. 서태웅처럼.

잠들었을 때와 자세가 달라져 있었다. 똑바로 누운 서태웅의 상체 위에 윤대협의 팔 한 쪽이 이불처럼 덮여 있었다. 팔베개는 그대로. 저리지도 않나. 물론 서태웅의 현재 스코어는 남 걱정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결코 아니었다.

안쪽 허벅지와 배꼽 아래의 차가운 끈적임. 익숙한 불쾌함.

몽정이다. 남의 집에서.

윤대협 집에서.

서태웅은 윤대협 팔뚝을 채찍처럼 휘둘러 쳐내며 이불을 박차고 샤워실로 뛰어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밖에서 으악 소리가 들린다. 반동 때문에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한 윤대협의 비명이다. 서태웅이 알 바가 아니다. 아니 알 바이긴 한데.

전광석화처럼 옷을 벗고 샤워기를 최대 수압으로 튼다. 물줄기가 저를 좀 때려 주길 바라며. 여름에도 뜨순 물로 샤워하는 서태웅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냉수마찰이 절실했다.

아 씨발. 욕이 절로 나온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게 다 그 이상한 꿈 때문에! 어제 새로 산 것이 무색한 팬티를 집어 분노의 빨래질을 한다.

서태웅은 몽정이 처음은 아니다. 중학교 삼학년쯤부터 종종 겪었다.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자위를 하지 않으니까. 자위를 하지 않는 이유는 당연히 성교육 시간에도 본인의 잠을 방해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았으니까. 당혹스러운 현상이긴 하나 딱히 큰 문제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가족들 모르게 조용히 뒤처리만 해 왔다.

그러지 말 걸. 이런... 가능성은 상상도 못 했다. 남의 집에서. 그것도 윤대협 집에서. 서태웅은 인생에 몇 번 겪은 적 없는 감정에 수몰된다. 쪽팔림.

똑똑똑. 윤대협이 욕실 문을 두드린다.

"태웅아, 괜찮아?"

존나 안 괜찮다고 대답하고 싶다... 서태웅은 벽에 머리를 박았다.

윤대협은 묵묵부답인 욕실 문을 바라보다 기지개를 한 번 늘어지게 켰다.

음. 일단 상쾌한 아침. 지난밤의 숙면은 훌륭했다. 역시 숙면의 고수. 최고의 다키마쿠라. 서태웅을 가급적 앞으로도 이 방 침대에 레귤러로 영입하고 싶다.

아니 이게 아니고. 윤대협은 상황을 파악하고자 한다. 눈 뜨자마자 내 팔을 날려 버릴 기세로 욕실로 뛰쳐 들어간 서태웅. 침대에서 뾰족한 거에 찔리기라도 한 것 마냥.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혹시나 싶어 이불을 들춰 본다.

아주 작은 얼룩이 있다.

만져 보니 차갑다. 액체다. 겉이 살짝 말라 있다?

응...?

윤대협이 설마에 멱살이 잡혀 있는 동안 욕실 문이 열린다.

달칵. 서태웅의 젖은 머리가 반만 나온다. 놀랍게도 곤란해 보인다. 얼굴이 시뻘겋다. 그런데 뜨순 수증기는 안 나온다. 서태웅이 조그맣게 말한다.

"나 속옷 좀 빌려줄래..."

윤대협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냉정하자. 그런데 얼굴 표면 온도는 자율신경이라 조절이 안 된다. 지멋대로 화끈거리기 시작. 뭔가 말해야 한다. 그런데 목소리가 떨리지 않을 자신이 없다. 간신히 주먹을 꾹 붙잡고 성대를 울린다.

"미안. 새 거 없는데."

"괜찮아."

내가 안 괜찮다고 대답하고 싶은 걸 참고 윤대협은 묵묵히 옷장에서 속옷 하나를 꺼내 서태웅에게 건넨다.

서태웅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시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윤대협은 잠깐 멍 때리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시트를 벗겨냈다. 빨래를... 해야겠지... 무념무상. 애써 무념무상.

그때 서태웅이 나왔다. 팬티만 입고. 윤대협의 팬티.

서태웅의 얼굴이 발갛다. 윤대협이 침대 시트를 벗기는 중이었다는 걸 깨닫자 다소 허둥대며 다가온다. 윤대협 손에서 시트를 가로채려 한다. 팬티만 입고. 윤대협의 팬티.

"빨래... 할게. 미안."

서태웅의 떨리는 목소리는 지금까지 한 마디도 들어 본 적 없다. 시트를 빼앗아 안고 있는 하얀 팔다리. 유일한 옷가지라 할 수 있는 윤대협의 팬티가 시트에 가려져서 안 보인다. 흡사 아무것도 안 입고 침대에 앉아 있는 것처럼...

윤대협은 큼지막한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아아아아아....

변명할 수 없는 분명한 신체 변화. 윤대협은 발기했다. 서태웅을 보고.

두 사람은 한참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둘 다 간절히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입 닥치기 경쟁. 할 수 있다면 소멸하고 싶다.

먼저 항복한 건 서태웅이다. 시간이 좀 지나니까 쪽팔림이 한바탕 가라앉았다. 저지른 일은 저지른 일. 수습이 최선이다. 집에서처럼 몰래...는 물 건너 갔지만. 서태웅은 재차 사과했다.

"미안."

"아니야.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우리 태웅이는 어려서 그런지 혈기왕성하네."

"너도."

윤대협은 닥쳤다. 보였니. 하긴 가릴 수단이 없네. 쟤가 시트를 둘둘 말아 안고 있으니까. 서태웅은 주섬주섬 변명을 덧붙였다.

"내가 원래 꿈을 잘 안 꾸는데. 이상한 꿈을 꿔서."

"앗. 아니야. 안 알려 줘도 돼."

"멍청아.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입안이..."

윤대협이 눈을 크게 뜬다. 서태웅은 자기 입술을 만져 본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되지?

"바다가 입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어."

"..."

"좀 기분이 이상해서... 아무튼 미안하게 됐다."

불행히도 윤대협은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안 들킬 줄 알았는데. 윤대협은 초조해졌다. 심장 고동이 본격적으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완전 범죄가 들통난 사람처럼. 혓바닥으로 볼 안쪽을 꾸욱 누르며 고심한다.

에이. 글렀다. 윤대협은 자수해서 광명 찾기로 했다. 두 손바닥을 딱 붙이고 고개를 푹 숙인다.

"내가 미안해."

서태웅은 깜짝 놀랐다. 얼굴에 티는 안 났지만. 어벙하게 반문한다.

"네가 왜?"

"내가 그랬거든."

"네가 뭘?"

주어만 빼고 육하원칙을 순서대로 다 묻게 생겼다. 윤대협은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재현을 택했다. 어차피 저지른 거. 어떻게든 되겠지.

서태웅 손에서 시트를 치워 버리며 바짝 다가 앉는다. 서태웅이 꿈쩍 놀랐다. 달래듯이 두 손으로 귓가를 쓰다듬는다. 뒤통수를 감싸고 그대로 입술을 먹었다.

서태웅은 깨닫는다. 그건 꿈이 아니었다.

바다는 윤대협이었다.

곧 해 뜬 이래 두 번째로 좆됐음을 직감한다. 기분이 지나치게 좋았기 때문이다. 반응해선 안 되는 것이 반응하고 있다... 난 정말 혈기왕성한가 보군. 냉정하게 윤대협의 평가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윤대협의 혀끝이 서태웅의 윗입술 한가운데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살짝 누르듯 핥았다. 보드라운 탄력을 즐긴 뒤 마지막으로 도톰한 아랫입술을 한 번 쪽 빨면서 떨어진다.

상기된 얼굴이 보인다. 하아 내뱉는 숨결이 서태웅의 얼굴에 가만히 퍼져서. 전신에 열이 한 번 더 돈다. 서태웅은 자기가 제대로 숨 쉬고 있는지 확신이 어렵다. 윤대협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연다. 목소리가 낮다.

"미안. 너 잘 때 키스했어."

서태웅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침 범벅이 된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려 했다.

윤대협이 손목을 붙든다. 대신 큼지막한 엄지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쓸어 준다. 서태웅은 어지러움 같은 것이 머리에 꽉 차 있다고 느낀다. 동강 동강 떠오르는 생각을 간신히 언어화한다.

"옥시토신?"

"응?"

"잠이 잘 와?"

윤대협이 웃었다.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자는 거랑 상관없어."

"그럼 왜?"

윤대협이 서태웅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는다. 두 눈이 두 눈을 정면에서 마주한다. 미소를 띠고 있지만.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붙잡지 않아도 서태웅은 윤대협의 시선을 피할 생각이 없다.

"좋아해서 그런가."

"좋아해?"

"응. 키스하고 싶어."

서태웅의 눈동자가 도르륵 아래를 향한다. 윤대협이 아랑곳 않고 계속 말한다.

"그리고 같이 자고 싶어. 가급적 자주. 여기서."

서태웅은 드디어 이야기의 맥락을 이해했다. 자신 있게 확인한다.

"잠이 잘 와서."

"아니. 안 잘 건데. 안 재울 거고."

단호하다. 이해한 줄 알았더니 헛발질이었다. 뭔 소리지. 서태웅은 이번에야말로 갈피를 잃는다.

아침부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과부하로 작동을 거부하는 대가리를 굴려서 윤대협이 한 말을 종합해 본다. 좋아해. 키스하고 싶어. 같이 자고 싶어. 근데 안 재울 거야. 뭔 소리냐고 그러니까.

서태웅은 다 집어치우고 자기가 아는 것만 말하기로 했다. 내 감정은 내가 아니까.

"그래. 알겠어."

"알긴 뭘 알아. 하나도 몰랐구만."

"키스해. 기분 좋았어."

양손으로 장난스럽게 서태웅 볼을 문대던 윤대협이 딱 멈춘다. 입을 일자로 꾹 다문다.

서태웅은 잠시 기다리다가 제 쪽에서 입술을 갖다 댔다. 그리고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너 이런 거 다른 놈이랑 하면 죽어."

윤대협이 박장대소했다. 맑은 웃음소리의 끝자락을 서태웅이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