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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3.03.27

기다리다 2

불면의이쑤신

서태웅은 계획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갈림길에선 고민 없이 하나를 택했다. 한다. 안 한다. 재밌는 것, 즐거운 것, 좋아하는 건 하고 지루한 것, 귀찮은 것, 껄끄러운 건 안 했다.

그리고 재밌다는 건, 즐겁다는 건, 좋아한다는 건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 충돌 사고처럼 강렬하고 불가항력적인 종류였다. 뒷일을 생각하고 농구에 빠져들었을 리가 있나. 열두 살 중학생은 생애 평균 연봉 순위나 체육계의 진로 따위는 상상조차 하지 않고 단순히 제일 재미있는 일을 매일매일 하면서 열다섯 살 고등학생이 됐다.

윤대협을 찾아가서 승부를 거는 건 완전히 그 연장선에 있었다. 계획한 적 없었지만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농구 그 자체였다. 서태웅은 언제나 하고 싶은 걸 뒤로 미루지 않았다. 그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좋아하는 건 1초라도 더 해야 한다.

윤대협도 딱히 계획적인 성격은 아닌 듯했다. 서태웅의 무계획적이고 충동적인 일 대 일 신청을 별일 없으면 받아 주고, 별일 있으면 곤란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서태웅보다는 예측 가능성을 원했는데 자의로 보이진 않았고 아마 2학기부터 주장을 맡은 탓이리라. 물론 서태웅은 추측하는 성격이 아니다. 윤대협은 자기 입으로 '이래 봬도 주장'이라는 사실을 곤란의 주요 사유로 꼽았다. 윤대협의 곤란으로 인해 충동은 루틴으로 틀이 잡혔다.

주장이라는 책임 때문에 요일은 지정했으나 시간은 지정하지 않는 윤대협. 역시나 천성이 계획적인 건 결코 아니었다. 박경태의 표현에 따르면 '시간 개념이 전혀 없는' 지경이었다. 필연적으로 약속 장소에 늘 먼저 도착하는 건 서태웅이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서태웅은 윤대협을 기다리는 동안 농구를 했다. 좋아하는 걸 기다리면서 좋아하는 걸 한다. 1초의 낭비도 없었다.

좋아하는 걸 기다리면서?

서태웅은 감정을 언어화해서 흑백처럼 명확하게 나타내는 데에 능숙한 편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감정은 서태웅에게 있어 그냥 감각되는 그대로였다. 배고프다. 졸리다. 지기 싫다. 짜릿하다. 좋다.

윤대협을 기다리는 건 좋다. 언제든 도착할 것이다.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된다. 어디선가 윤대협이 농구하러 오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이 분비된다. 그러면 날아갈 듯이 농구가 잘 된다. 조던처럼 날아올라 덩크를 꽂는다.

윤대협을 기다릴 때 서태웅은 고양된다. 그게 그냥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딱히 윤대협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오늘 컨디션 좋네. 이따가 윤대협 오면 압도적으로 눌러 줄 테다. 서태웅이 자각할 수 있는 건 겨우 이 정도 수준이었다.

서태웅은 이런 감각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할 예정이 없었다. 당연하다. 스스로도 명확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서태웅은 인생을 계획적으로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충동적으로 주둥이를 튀어 나가는 말은 골대를 향해 돌진할 때처럼 재빠른데 그 누구도 가드 해 주지 않아서 항상 후회가 한 박자 늦었다.

일 대 일을 하러 가다 발견한 고양이 때문에 처음으로 윤대협을 기다리게 했던 날. 서태웅은 스스로도 잘 몰랐던 사실을 끝내 언어로 구체화해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당사자한테 말했다.

"나는 원래... 좋아하면 시간을 잊어버려."

목소리가 성대를 울리고 혀 위로 굴러서 이빨 사이로 빠져나가는 한 음절마다 전신을 관통하는 깨달음. 지금까지 코트에서 윤대협을 기다렸던 모든 순간 동안 모호한 가운데 끝도 없이 치밀던 고양감과 설렘과 가슴 벅참이 한 단어로 꿰어지는 소름 돋는 재편성. 서태웅은 이런 감각마저 충동적으로 입 밖으로 튀어 나갈까 봐 오른손을 꾹 쥐었다 폈다. 왠지 그것만은 막아야 할 것 같은 본능적인 절제였다.

그런가. 좋아해서 그랬군. 남의 일처럼 담담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신체적 반응은 의식과는 별개라 멋대로 귀가 화끈거리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왜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귀가 화끈거릴까? 서태웅은 영문을 몰랐다. 농구 좋아한다고 말할 땐 그런 적이 없는데. 사람을 좋아하는 건 처음이라.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윤대협은 그걸 다 보고 있었다. 같이 농구할 때마다 생각하는데 이 자식은 눈이 좋다. 관찰을 판단으로 연결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고 그래도 될 만한 성과를 올려 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서태웅에게 윤대협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서태웅은 살면서 타인의 생각을 중요시해 본 적이 없다. 서태웅은 타인이 뭐라고 생각하든 지금 하고 싶은 걸 하는 방식의 삶에 익숙했다. 방금 좋아하는 감정을 깨달은 상대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좋아하는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부가 자신의 감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아직은 그 단계까지 경험이 없었다.

일단은 자각조차 없었던 스스로의 감정에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얼한 상태에서 침착하게 빠져나오는 게 우선이었다. 왜냐하면 이제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정을 되찾은 서태웅이 갈 채비를 마치고 입을 열었다.

"이제 농구하자."

그렇지만 역시 윤대협은 서태웅을 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윤대협은 화내는 건 아닌데 웃지도 않는 얼굴로, 커다란 눈동자 속에 시합 중에나 봤던 차분한 이글거림을 끓이면서, 맨날 하던 농구를 보류하고 서태웅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그런 눈빛을 잘 알았다. 승부를 거는 눈동자였다. 그렇지만 여기는 농구 코트가 아니고 지금은 시합 중이 아니었다. 윤대협의 목적은 골이 아니라 서태웅을 집에 데려가는 것이었다.

윤대협은 승리가 아니라 서태웅을 원했다.

그 이질적인 맥락으로 인해 서태웅은 참을 수 없는 혼란과 고양감에 동시에 빠지고 말았다. 승부할 땐 절대 먼저 눈을 피하는 법 없는 서태웅이 눈을 돌려 버린 이유다. 윤대협을 기다릴 때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한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혈관에 퍼부어져 조던만큼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동시에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쟤는 왜 갑자기 나를 저렇게 쳐다보는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자신의 어휘력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의 폭주 속에 고장 난 듯이 멀뚱히 서 있는 중에도, 서태웅은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았다. 지금 하고 싶은 거. 서태웅은 언제나 그거 하나만큼은 분명히 알았다.

서태웅은 자전거 핸들을 꾹 쥐고 방향을 잡았다. 묵묵히 자전거를 밀고 앞서 나간다. 전철역과 반대 방향이었다. 서태웅은 윤대협 집으로 가는 길을 안다.


"실례합니다."

"네에, 어서 오세요."

서태웅은 윤대협 자취방의 현관을 넘을 때마다 습관처럼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윤대협은 대체로 적당히 맞장구를 치거나 샤워 먼저 하라면서 못 들은 척할 때가 많았는데, 오늘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제법 애교를 담아 성실하게 대답해 줬다.

서태웅은 상당한 바보를 바라보는 표정으로 윤대협을 잠시 째려보았다. 왜 저런 뚱한 얼굴까지 귀엽지. 서태웅의 이마에는 아직 주차장 철망에 기댔던 자국이 희미한 연분홍빛 우물 정 자로 남아있다. 바보 같기로는 어디 가서 안 빠지는 얼굴로 남을 바보 취급한다.

서태웅은 신발을 벗자마자 가방을 툭 내려놓고 습관적으로 샤워실 문을 열었다가 부자연스럽게 굳었다. 맞아, 태웅아. 오늘은 우리 농구 안 했어. 샤워할 일이 없지...

"서태웅, 씻을 거야?"

"... 음..."

"씻고 나서 뭐 하려고?"

윤대협은 짓궂게 굴고 싶어서 한 말이었는데 서태웅은 반응이 없었다. 그저 세면소로 들어가 묵묵히 손을 씻고, 문을 닫고 나와서 거실로 걸어 들어간다.

윤대협의 자취방은 철저하게 입식이다. 190cm 소년에게 좌식은 물리적으로 무리였다. 밥은 싱크대와 붙어 있는 아일랜드 테이블에서 스툴 의자에 앉아 먹었다. 일반인은 높아서 불편할 스툴이지만 윤대협은 평범하게 발바닥을 붙이고 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실에는 1인용 리클라이너 소파와 탁자가 TV를 마주 보고 있고, TV 옆에는 학생의 체면을 겨우 붙드는 정도의 공부용 책상과 꽤 편한 의자가 있었다. 미닫이문 하나 건너 침실에는 190cm도 편안히 잘 수 있는 특별 주문 사이즈 침대와 붙박이 옷장으로 꽉 차서 책상을 넣을 수 없었다.

서태웅은 주방과 거실 사이에 잠시 서 있었다. 그 뒤통수를 바라보며 윤대협은 지금까지 서태웅이 이 집에서 샤워실과 주방 외에 사용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서태웅은 샤워하고, 밥 먹고, 볼 일 다 보면 쓰윽 가 버렸다. 처음 만나는 볼 일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서태웅은 있어야 할 곳을 몰라 버그가 난 게임 속 NPC처럼 멀뚱하게 서 있었다. 빌려 놓은 고양이. 라는 일곱 글자가 윤대협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입꼬리가 또 움찔거렸다.

서태웅의 시선이 지긋이 집안을 훑는다. 아일랜드 테이블을 슬쩍 보고, 1인용 소파를 흘끗 보고, 책상을 본다. 과연 어디에 앉을 것인가. 갑자기 윤대협은 빌려 온 고양이의 최종 선택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

서태웅이 결심한 듯이 발을 뗀다. 모든 의자를 다 마다하고 거실 한가운데 빈 공간에 엉거주춤 앉는다. 다리가 너무 길어서 어설퍼 보이는 책상다리를 한 채로 구부정히 윤대협을 바라본다.

조그마한 머리로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가 저거라니. 윤대협은 웃음을 참지 않기로 했다. 기분 좋게 반원을 그리는 이목구비. 윤대협은 자기 다리 사이즈에 꼭 맞는 1인용 소파도 꽤 편한 의자도 바닥에 다리가 닿는 스툴도 마다하고 서태웅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내 집인데도 그런 곳에 앉아 본 건 처음이었다. 한 쪽 무릎을 세워 턱을 괴고 서태웅을 지긋이 바라본다. 자신도 모르게 다정한 목소리가 나온다.

"왜 이런 데 앉아 있어? 불편하게. 소파도 있고 의자도 있잖아."

"..."

윤대협은 답을 들을 생각으로 던진 질문이었지만 서태웅은 침묵했다. 못 들은 척은 아니었다. 윤대협을 빤히 쳐다보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아마 답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고민할 질문인가? 윤대협은 의문이었다.

"아무 데나 앉아도 돼. 손님을 바닥에 앉히니까 내가 너무 미안하네."

"됐어..."

"나 때문에 그래? 너 소파에 앉으면 내가 책상 의자에 앉으면 되는데."

"지금이 좋아."

"정말? 엉덩이 안 아파?"

"너나 아프겠지. 바보."

"하하. 진짜 걱정한 건데. 바보는 너무하네."

"옆에 앉았잖아."

"응?"

"소파는 옆에 앉을 수가 없으니까... 의자도..."

서태웅은 무슨 구구단을 외우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담담하고 느릿하게 그런 말을 했다. 이 앙큼하기 짝이 없는 1학년은 농구 말고 다른 거 하자고 데려온 옆 학교 선배네 자취방 구석구석을 스캔하면서 무려 같이 앉을 곳을 생각했던 거였다.

예상을 뒤엎는 슈퍼 플레이는 언제나 서태웅의 전가의 보도다. 윤대협은 당할 때마다 짜릿했다. 더 하라고 부추기고 싶어진다. 실제로 항상 부추겨왔고 그 결과가 지금 여기다.

윤대협은 지금껏 어차피 혼자 사는 집에 3인용 4인용 소파를 쓸데없다 여기며 1인용 리클라이너에 정착해 온 1년 반을 축복해야 할지 후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러그 하나 없는 딱딱한 바닥에 190에 육박하는 두 남자 애들이 엉덩이를 나란히 붙이고 앉아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이 시점에.

윤대협은 안면근의 통제를 포기한 채 뭐라 말 할 수 없는 기분으로 서태웅을 쳐다봤다. 대답할 말이 없다. 윤대협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나랑 옆에 앉고 싶어서 푹신한 걸 다 마다하고 바닥에 털푸덕 앉아 있었다는데... 내가 뒤따라와서 자기 옆에 앉을 걸 알고서... 생각이 이어질수록 가슴의 떨림은 심해졌고 더더욱 목구멍이 메일 정도로 할 말이 없어졌다.

서태웅은 그냥 앉아 있었다.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멍하니 지 발가락을 쳐다보던 시선이 힐끗 윤대협을 쳐다본다.

뒤따르듯이 서태웅의 새하얀 목에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발갛게 열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얘는 왜 항상 폭탄을 던져 놓고 한 박자 늦게 빨개지는 거지. 시간차 부끄러움은 심장에 좋지 않을 정도로 귀여웠다.

와르르 쏟아지는 감정과 생각 속에 가장 빠른 녀석이 하나 있었다.

일단 지금 키스 타이밍인 것 같다.

윤대협이 손을 뻗어 서태웅의 손을 잡는다. 농구하는 애답게 커다란 손이었다. 손바닥이 크기보다 손가락이 길었다. 그래서 손바닥도 크고 손가락도 긴 윤대협보다는 작았다.

그대로 조금 만지작거린다. 손끝으로 손바닥을 슥 쓸고 올라가 하얀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혔다가 살짝 깍지를 껴 본다. 생각보다 뜨거웠다.

서태웅은 가만히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잡은 손에 잠시 머물렀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맥박이 기분 좋았다.

동시에 눈을 들어 마주 봤다. 서태웅의 무표정은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윤대협은 빙긋 미소 지었다. 무반응보다는 긴장 반응이 좋았다.

반대쪽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린다. 기다란 손가락이 다가올수록 서태웅이 더 긴장하는 걸 알고, 일부러 천천히 서태웅의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긴다. 손끝이 이마에 닿았을 때 서태웅은 움찔 눈을 깜빡였다. 서태웅이 긴장할수록 윤대협은 여유로워졌다.

손끝이 무심코 서태웅의 귀 쪽으로 흘러내린다. 귓바퀴 뒤를 스치고 지나갈 때 서태웅의 어깨가 튀었다. 윤대협은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그대로 뒷머리를 손으로 감싸면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윤대협의 입술은 목적지에 닿지 못했다.


윤대협의 입술은 서태웅의 손바닥에 뭉개져 있었다.

마지막 순간, 서태웅이 잡히지 않은 손을 두 사람의 얼굴 사이에 끼워 넣었기 때문이다.

속눈썹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윤대협이 눈을 껌뻑거렸다. 이런 식으로 거부당한 건 처음이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분위기 괜찮지 않았나? 기습이라기엔 힌트도 꽤 줬고. 손잡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키스는 아직인가?

혹시 마음이 바뀌어 이 장벽을 치워주지 않을까 싶어 얼굴을 살짝 뒤로 했더니 그대로 서태웅 손바닥이 따라온다. 얼굴을 떠밀린 꼴이 되니 과연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윤대협은 멋쩍은 얼굴로 서태웅에게서 떨어졌다. 깍지를 끼고 있던 손도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사라진 체온이 퍽 허전하게 느껴졌다.

윤대협은 잠시 멍 때리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냉수 한 잔이 절실했다.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내서, 쪼로록 컵에 따르는 동안 윤대협은 침착하게 반추했다.

사실 하나. 서태웅은 윤대협을 좋아한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태웅은 숨기는 것도 척하는 것도 속이는 것도 재능이 없다. 그저 좋아하는 걸 열심히 좋아하는 것에 재능이 몰빵되어 있다. 윤대협은 자기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사람 보는 눈, 특히나 농구 선수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다. 실제로 틀린 적이 거의 없다. 백 명을 모아 놓고 물어봐도 서태웅은 윤대협을 좋아한다는 데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사실 둘. 윤대협은 서태웅을... 꽤 좋아하는 것 같다. 명확한 정리 없이 말려들듯 돌진하게 된 꼴이지만 정리해 보자면 확실히 그렇다. 서태웅은 재미있다. 같이 있으면 웃음만 나온다. 귀여운 면이 있다. 농구도 잘하고, 단순무식하고, 아무것도 숨기지 못하고. 직사광선처럼 투명하고 그늘이 없었다. 다 좋았다. 얼굴도 괜찮다. 지금까지 그런 쪽으로 의식해 본 적 없으나 최소한 무심코 키스하고 싶어질 정도로는 취향에 맞았다.

사실 셋. 서로 좋아하는 사이에 키스는 바람직한 일이다. 대체 내가 왜 자취방으로 데려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당연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바람직한 진도를 나가자는 제안 이외에 다른 의미는 없었다. 아까 뽀뽀했을 때도 경악한 얼굴을 하고 경륜 선수 같은 스피드로 쌩 도망가긴 했지만 하지 말라고는 안 했는데. 서태웅도 윤대협의 검은 속내를 전혀 모르고 여기까지 따라온 것은 아닐 터.

"..."

오히려 그건가? 전혀 몰랐던 것일까? 치고 올라오는 속 터지는 가능성에 윤대협은 원샷으로 비운 잔에 냉수를 한 잔 더 따랐다. 농구 이외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물며 연애에는 전혀 지식은커녕 상식조차 느낄 수 없는 서태웅이라면 가능할지도... 그럼 우리 집 가잔 말에 얼굴은 왜 붉히냔 말이야... 너 그거 파울이야...

답지 않게 속이 복잡해진다. 윤대협은 연애에 무심하면 무심했지 속 시끄러워 본 적이 없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써도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서태웅한테 자신이 처음일 수 있다는 생각만 했지, 자신에게 서태웅이 이렇게 빡센 첫 연애 고민을 안길 거라곤 예측하지 못했다.

냉수 두 잔에 윤대협은 냉정을 되찾았다. 싱크대에 두 손을 짚은 채로 가설을 몇 가지 세워본다.

가설 하나. 서태웅은 윤대협을 좋아할지언정 오늘은 그냥 정말 순수하게 친한 형 집에 놀러 온다는 생각으로 쫄래쫄래 따라왔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키스에 당황해서 거부한 것이다. 다소 열받지만 현재 상태로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

가설 둘. 서태웅은 윤대협을 좋아하지만 남성과의 키스에는 아직 거부감이 있다. 이것도 가능성 있다. 윤대협 또한 맹세코 오늘 이전까지 남성을 키스 상대로 상정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호감을 자각하고 상황이 갖춰지자 본능적으로 손이 나갔을 뿐이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에피메테우스. 하지만 경험만큼 신체에 확실히 새겨지는 앎도 없다. 윤대협은 이제 확실히 안다. 나는 서태웅과 키스하고 싶구나.

어느 가설이 정합한가에 따라 해결책이 달라진다. 첫 번째라면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된다. 좀 진정시키고 설득해 보면 잘하면 오늘 안에 한 번 정도는 더 시도해 볼 만할지도.

두 번째라면... 좀 더 까다로울 수 있다. 그래도 포기할 정도는 아니다. 조금씩 의식시키면서 천천히 거리를 줄여가다 보면 적당한 때가 올 것이다.

낚시라고 생각하자. 물고기 입술에 낚싯바늘을 들이미는 꾼은 없다. 적절한 미끼를 붙이고, 살랑살랑 흔들면서, 최대한 매력적인 자태를 유지한 채 꼬셔야 하는 것이다. 끈질긴 인내심을 가지고.

두 손을 양 뺨에 찰싹! 맞붙이고 윤대협은 심신을 다잡는다. 사고는 빠른 편이다. 나름대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으나 실제로는 물 두 잔 마실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 새 잔을 꺼내 냉수를 가득 따라 거실로 돌아간다.

서태웅은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설픈 아빠 다리. 구부정한 등. 고개를 조금 더 숙인 것도 같았다. 앞머리 때문에 눈이 잘 안 보였다. 윤대협은 다시 한번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서태웅과 마주 보고.


눈만 들어서 올려다보는 서태웅에게 물잔을 내밀었다. 최대한 다정하게 웃는 얼굴과 함께.

"너도 마실래?"

서태웅은 말없이 두 손으로 물잔을 받았다. 그대로 꼴깍꼴깍 잘도 마신다. 숨도 안 쉬고 계속 마신다. 고개가 점점 뒤로 젖혀져 새하얀 목이 꿀떡이는 게 보인다.

제법 많았던 물을 한 번에 원샷하고 다시 윤대협에게 내민다. 윤대협은 그걸 받아서 옆에 내려놨다. 한숨 돌린 것처럼 보이는 서태웅을 바라보며 이걸 어떻게 구워 삶...는 게 아니고 어떤 가설이 맞는지 확인할까 고민하는데.

의외로 먼저 입을 뗀 건 서태웅이었다.

"너 말이야."

"너가 아니고 형이지. 태웅아."

"이제 와서."

"그건 그렇긴 한데... 네가 너무 당당하니까. 혹시 내가 형인 거 모르나 하고."

"아무튼 너."

"그래. 맘대로 부르렴."

"너는..."

서태웅이 오른쪽 주먹을 꾹 쥔다. 또 무슨 폭탄 발언을 하려는 거지. 윤대협은 본능으로 긴장했다. 아까 키스하려고 폼 잡을 때는 서태웅이 긴장할수록 여유가 생겼는데, 한 번 거부 당한 지금은 아니었다. 윤대협이라고 상처받고 싶을 리는 없었다.

서태웅이 작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열었다.

"너는 몸을 소중히 여겨야 돼."

"에엥?"

윤대협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아마 매우 이상한 표정도 지었을 것이다.

역시 폭탄 발언이었다. 근데 이제 물음표 폭탄. 어처구니를 도둑맞은 윤대협을 앞에 두고 서태웅은 더없이 진지했다. 무릎에 올려놓은 양손 주먹을 꼭 쥔 채로, 윤대협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진중하게 한 단어 한 단어를 눌러서 말한다.

"아무한테나 뽀뽀하면 안 돼. 소중한 사람한테 하는 거야."

"......"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하는 거라고."

윤대협은 살면서 이 정도로 말문을 잃어 본 적이 많지 않았다. 속 사정을 모르는 서태웅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놀랍게도 이 폭탄 발언에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폭탄 맞은 윤대협의 한 쪽 귀에서 다른 쪽 귀로 뒷이야기가 지 페이스대로 흘러간다.

서태웅한테는 여섯 살 유치원생 조카가 있다. 조카는 서태웅을 정말 좋아했다.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 헤어질 땐 또 만나자고 뽀뽀했다.

그런데 어느 날 유치원에서 돌아온 조카가 서태웅의 뺨에 뽀뽀하기를 거부했다. 충격을 받은 서태웅에게 조카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나 여자친구 생겼어. 뽀뽀는 여자친구랑 할 거야. 선생님이 뽀뽀는 제일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하는 거래. 소중한 사람하고 하는 거래.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기는 거라고 했어.

문자 그대로 유치원생 수준의 근거를 들어 서태웅은 윤대협을 비난했다. 왜 유치원생 조카도 아는 데 너는 모르냐고. 아까 자전거 타고 올 때도. 그렇게 아무한테나 뽀뽀하면 안 된다고.

자기 딴에는 엄청나게 긴 연설을 마친 사람처럼 서태웅은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준비된 말을 제대로 전했다는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내가 냉수 두 잔 먹고 속차리는 동안 얘는 이 말을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윤대협은 폭소를 참을 수 없었다. 하하하하! 시원한 웃음소리가 작은 자취방을 가득 채웠다. 윤대협은 러그도 없는 바닥에 드러누워 큰 소리로 웃었다.


서태웅은 잠시 벙쪘다. 한 손을 이마에 짚고 옆으로 쓰러져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웃는 윤대협.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서태웅은 얼굴이 벌게지는 걸 느꼈다. 목에서 시작된 열꽃이 기어이 턱 경계선을 넘었다. 서태웅에게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웬만큼 쪽팔리는 짓을 하지 않으면, 귀나 목은 좀 화끈거릴지언정 얼굴만은 멀쩡했는데.

서태웅은 억울했다. 지금은 그렇게 쪽팔리는 짓을 하지 않았다. 마땅히 해야 할 충고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윤대협은 성대하게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서태웅은 책상다리를 풀고 굴러다니는 윤대협을 발로 찼다. 옆구리를 제대로 얻어맞은 윤대협이 악 소리를 냈다. 그런데도 잔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쿡쿡쿡 들썩거렸다.

"멍청이."

"후... 후후후..."

"그만 웃어."

"미안 미안... 너무 귀여워서..."

"조카가?"

"아니. 너."

"..."

대꾸할 말을 잃어서 그냥 멍청하다고 했더니 윤대협은 또 웃는다. 이번에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눈과 입만 큼직하게 접는다. 윤대협은 저런 식으로 웃을 때 예쁘다. 인간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 대체로 화가 풀린다. 서태웅은 짜증도 잃어버린 채로 허무해졌다. 다시 책상다리를 엉거주춤 접는다. 남은 진지하게 충고해 줬는데 허파에 바람 들어간 여고생처럼 깔깔 웃기나 하는 윤대협. 멍청한 윤대협.

한숨을 푹 쉬었더니 윤대협이 갑자기 좀비처럼 코어 힘으로 벌떡 일어나서 두 손을 붙잡는다. 뭐야. 서태웅은 눈이 커진다. 윤대협의 눈에는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승부할 때의 안력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붙잡은 손이 뜨끈뜨끈했다.

"태웅이 너는 괜찮아?"

"뭐가."

"너도 몸을 소중히 해야지. 나 아까 올 때도 너한테 뽀뽀했는데. 그대로 집에 따라왔잖아."

"난 상관없지."

"무슨 소리야."

"난 너 좋아하니까... 상관없지."

윤대협이 하아아아 큰 소리로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수리가 보였다. 뾰족뾰족 머리카락을 세워 뒀는데도 두피가 안 보인다. 숱이 많은가 보다.

아. 서태웅은 윤대협 머리꼭지나 감상하다가 한 박자 늦게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서 생각했다. 큰일 났다. 또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이제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해버렸다. 돌이킬 수 없다는 감각이 새삼스럽게 엄습해 왔다.

서태웅은 자기가 고백받았을 때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수많은 여자애들과 드물게 남자애들이 내려놓았던 말. 좋아해. 그때마다 서태웅은 달리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라고 물어보면 사귀자. 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서태웅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더 설명을 요구하는 몇몇에게는 나는 농구해야 돼. 그러면 상황이 정리됐다. 대부분은 묵묵히 물러났고 드물게 뺨을 때리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지만 서태웅이 키가 너무 커서 턱을 스치는 정도로 끝났다.

윤대협이 그래서? 라고 물어보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윤대협의 머리꼭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서태웅이 생각한다. 네가 나를 좋아해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서태웅은 그다음에 할 말이 없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서태웅은 이미 윤대협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 첫 패배도 첫 라이벌도 이기고 싶다는 간절한 투지도 결국 팀이 이겼을 때의 짜릿함도 더 농구를 잘 할 수 있게 될 만한 힌트도 가르침의 씨앗도 그게 폭발한 승리의 순간도. 지금처럼만 내가 기다리는 코트에 나타나 준다면. 그리고 자기 몸을 소중히 여겨서 아무한테나 뽀뽀하지 말고...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윤대협 머리꼭지가 사라졌다. 대신 굵게 쌍꺼풀진 커다란 눈과 시원한 아래 속눈썹이 나타났다. 잘생긴 윤대협 얼굴이 묻는다.

"태웅아, 나 좋아해?"

"바보냐?"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건 파울이지."

"방금 말했잖아. 멍청..."

여기까지 말했을 때 윤대협이 갑자기 서태웅의 두 손목을 모아 쥐고 그걸 자기 코끝에 가져갔다. 엄지손가락쯤이 윤대협의 입술에 닿았다. 윤대협이 한숨을 쉬자 입술에 닿은 손끝부터 열기가 퍼져나갔다. 서태웅은 굳어버렸다.

윤대협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잘생긴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승부를 거는 눈동자. 그런데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길 싸움만 하는 윤대협이 아닌 것처럼.

"알아. 들었는데. 그래도 한 번만 더 말해줘. 부탁해."

서태웅은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오늘 하루 끝에 해가 질 것이며 물은 축축하다고 여러 번 말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들은 것처럼. 또 나를 비웃으려는 건지 의심할 수 있다면 오히려 단순하고 편했을까. 윤대협의 잘난 얼굴 위에서 이런 절실한 눈동자를 본 기억이 없었다.

어쨌든 서태웅은 좋아하는 사람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는 재주가 없었다.

"좋아해."

여러 번 말하다 보니 좀 덜 쑥스러워진 것 같다. 똑바로 쳐다보고 말 맺는 순간에 윤대협의 눈동자가 꾸욱 감겼다. 사진을 찰칵 찍는 것처럼 두 손안에 쥔 서태웅의 손목을 꼬옥 힘주었다. 서태웅은 문득 윤대협이 아무 말 없이 대답을 해 주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도... 좋아해."

착각이 아니었다.

윤대협이 거의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얀 서태웅의 손 앞에 기대어진 윤대협의 우뚝 솟은 코 끝을 기준으로 양옆의 볼이 발그레했다. 윤대협도 얼굴이 빨개지는구나...

서태웅은 하, 짧게 뱉었다. 확신은 없었지만 아마 자신은 웃고 있을 것이다. 서투르게 입술이 삐뚤어지는 것을 느꼈다.

윤대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잡고 있던 손목을 천천히 내려놓고, 커다란 두 손이 서태웅의 양쪽 귀 아래로 뻗어 온다. 놀랍게도 그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윤대협은 웃지 않았다. 어딘가 안타까운 듯, 간절한 듯, 꿈틀대는 굵은 눈썹이 잘생겼다고, 서태웅은 생각했다.

입술이 서서히 다가온다. 서태웅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첫 키스는 레몬맛이었다. 순정 만화를 한 권도 읽어 본 적 없는 서태웅에게는 놀라운 발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