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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3.03.27

기다리다 1

불면의이쑤신

서태웅이 안 온다.

윤대협은 농구 골대 밑에 기대앉아 있었다. 백보드 뒤 쪽에서 올려다보는 네트는 평소 보는 각도와 정 반대라서 왠지 이상했다. 익숙한 것도 새로운 위치에서 쳐다보면 없던 재미가 생길까 했지만 농구 골대는 그냥 농구 골대였다.

청명한 가을 날이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온과 새파랗고 높은 하늘. 햇살은 따스한데 바람은 시원하다. 모든 것이 밸런스가 맞는다.

한 놈만 없다. 그 애가 맨날 가져오는 농구공도 없다. 윤대협은 할 일이 없어서 앉아 있다.

이건 좀 이상한 일이다. 서태웅은 별로 늦은 적이 없다. 항상 먼저 와 있었다.

반면 윤대협은 일찍 올 이유가 없었다. 시간 약속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약속한 건 장소뿐이다. 윤대협이 정했다. 처음 승부했던 공원으로. 학교로 찾아오는 게 난처했기 때문이다.

윤대협은 오늘 손목시계가 없었다. 시간 개념에 철저한 편은 아니었다. 연습에 10분 또는 한 시간 일찍 간다고 인생이 바뀌거나 다음 경기에서 승리할 것 같진 않았다. 항상 시합은 그 자리에서 결정이 났다. 절대적으로 투자해야 할 1만 시간의 법칙은 진작에 넘겼기 때문에 윤대협에게 남은 변수는 결정적인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지, 올바른 전략을 재빨리 떠올릴 수 있는지, 충분히 빠른 판단과 실행이 가능한 지였다. 윤대협은 결정적인 순간에 집중하려면, 덜 결정적인 순간에는 딴짓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서태웅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농구공을 붙잡는 모든 순간에 무섭도록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연습도 실전처럼, 실전도 연습처럼. 그래서 농구하지 않는 순간에 아무것도 안 하고 자 버리는 걸까? 0 아니면 1인 디지털 인간처럼. 어떨 땐 그냥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 말고는.

그리고 서태웅이 좋아하는 일에는 윤대협과 농구하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윤대협은 명치 근처를 벅벅 긁었다. 알 수 없는 벌레에 물린 것처럼.


첫 번째는 그냥 치기 어린 승부였다. 나는 너한테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는 오기 같은 거. 기특하게도. 밟아 주는 맛이 있는 파릇파릇 질긴 새싹과 최선을 다해 승부해서 결국 이겼다. 퍽 재미있었던 나머지 이런저런 되도 않는 조언까지 해 버렸던 것 같다. 나중에 집에 가면서 코치도 감독도 아닌데 너무 개폼 잡았나 윤대협은 약간 후회했다.

그러니까 두 번째부터는 승부가 아니었다. 첫 번째 승부의 결과는 났으니까 더 이상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서태웅은 또 학교로 찾아왔다. 그날은 평일이었기 때문에 윤대협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체육관에서 부활에 전념하고 있었다. 어떤 부원이 저 자식 또 왔네 해서 윤대협은 첫 번째에도 얘가 학교에 왔었다는 걸 알았다.

일단은 나를 찾아온 손님이니 친절하게 인사를 해야 했다. 윤대협은 멋쩍어서 웃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헤이. 농구하자."

서태웅은 인사도 안 하고 멋쩍게 웃지도 않고 사교적인 말도 하나 덧붙이는 법이 없었다. 윤대협은 대가리를 긁적이는 수밖에 없었다. 서태웅한테는 아주 평범한 사실도 친절하게 설명하고 가르쳐 줘야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음... 지금 하고 있는데. 보시다시피."

"나랑 하자고."

"부활 빼먹으라는 말을 아주 당당하게 하네, 태웅이는... 나 이래 봬도 주장이라서. 좀 곤란한데."

어깨를 으쓱이며 눈썹을 팔자로 들어 올렸다. 윤대협은 거절이 싫었다. 특히 밟아 주는 맛이 있는 파릇파릇하고 질긴 농구 새싹에게는 웬만한 건 다 해 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미우나 고우나 여기저기 도움 요청에 불려 다닌 경력만 17년, 미움받지 않으려면 선약을 우선하는 원칙이 필요하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윤대협은 미움받지 않고 거절하는 법도 잘 알았다. 이 정도면 보통 상대방이 미안해한다. 내 사정을 충분히 이해해 주고. 그러면 나도 조금은 양보해 줄 수도 있다. 감독님을 설득해서 잠깐 견학 정도는 시켜 준다거나. 아니면 잠깐 기다리면 오늘은 조금 먼저 끝내고 나온다거나...

그러나 서태웅은 아무것도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알았어. 그럼 다음에."

홱 돌아서는 서태웅의 팔뚝을 붙잡은 건 거의 본능이었다.

얘는 왜 이렇게 미련이 없지. 다음에는 또 뭐야. 또 오겠다는 거야? 전환이 빠른 서태웅 앞에서 윤대협이 세워 놓은 시나리오는 허무하게 백지가 되었다.

서태웅은 자신의 팔뚝을 붙들고 있는 윤대협의 손가락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약간 귀찮다는 듯이 삐죽이는 아랫입술 때문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뭐야. 다짜고짜 찾아온 건 너잖아. 얘는 진짜 지루할 틈을 안 주네.

너 부활은? 물었더니 오늘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일주일에 이틀은 아침 훈련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중 하루는 능남 농구부가 쉬는 요일과 겹쳤다.

윤대협은 그때 장소와 요일을 지정했다. 서태웅이 맘대로 주말도 추가했다. 체육관 안쪽에서 윤대협을 부르짖는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윤대협은 협상을 포기했다.

그래도 이유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만족스럽게 돌아서는 보송보송한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근데 왜 나랑 해야 돼?"

서태웅이 고개만 돌려서 윤대협을 쳐다본다. 말끄러미 곧은 눈빛.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 감추는 것이 없어서. 작은 입을 거의 벌리지 않고도 서태웅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너랑 하는 게 재밌어."

웃기게도 머릿속에서 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밌어. 뇌가 맘대로 마지막 어절을 반복 재생한다.

보송보송한 뒤통수가 멀어진다. 윤대협은 안영수가 뒤통수를 칠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쟤는 내 이유는 안 궁금한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뭐 물어보나 마나, 나도 똑같은 이유지만. 혹시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티 많이 나나? 쟤랑 하는 농구가 제일 재밌다는 게. 괜히 들키기 싫은 마음이 부풀어 올라서 심장이 낑기는지 좀 아팠다. 이상하게 능남 농구부 부원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복잡한 심경이었다. 윤대협은 그날 심장이 터질 때까지 농구했다. 서태웅을 생각하면서.


서태웅은 재밌다는 일에 늦는 녀석이 아니다.

평일에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왔는지 바구니 달린 자전거를 타고 가방 속에 교복을 넣어 왔다. 가끔 갈아입을 옷을 안 챙겨 왔는지 학교 체육복을 입고 뛰기도 했다.

윤대협은 집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기 때문에 대체로 서태웅과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다. 방금 도착한 듯 자전거를 세우고 농구공을 꺼내서 두어 번 튕기며 인사를 대신하곤 했다.

주말에는 서태웅이 정확히 언제 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항상 걔가 먼저 와 있었기 때문이다.

윤대협은 그냥 대충 눈 뜨면 나왔다. 이르면 정오에 가까운 오전이었고, 늦잠 자면 오후였다.

늘 저녁을 같이 먹었다. 더운 날엔 집에 데려가서 샤워도 시켰다. 만나는 시간도 돌아가는 시간도 늘 달랐지만 한 가지는 똑같았다. 먼저 와 있는 건 항상 서태웅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평일인데도 안 나타났다. 공원 시계를 흘끗 쳐다봤다. 서태웅이 올 시간을 한참 지나고 있었다. 도착한 게 몇 시더라? 아주 오랫동안 기다린 느낌이지만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

혹시 늦는 게 아니고 안 오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윤대협은 하하, 실없이 웃었다. 약간 짜증이 났을 때의 버릇이었다.

그러나 이 짜증은 정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데 짜증을 감추려고 노력한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진 늘 서태웅이 윤대협을 기다렸을 것이다. 걔도 짜증 났을까?

아니다. 주말에 본 서태웅은 언제나 농구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내가 안 와도 쭉 혼자서 농구하고 있을 것처럼... 시간 약속을 한 적이 없으니 늦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뻔뻔스럽게 인사를 건네면 헤이, 여어, 대충 그렇게 대꾸하면서 볼을 패스했다. 눈을 감고 그때 서태웅의 표정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떠올려 본다. 표정이 적은 애라서 디테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윤대협이 눈이 삔 게 아니라면 그건 짜증이 아니라 반가움이었다.

역시 짜증을 낼 군번이 아닌 것 같다. 시간 약속을 한 적이 없으니 윤대협이 늦어도 무죄인 것처럼 서태웅이 늦어도 무죄였다. 지금까진 한 번도 빠짐없이 자신이 늦는 게 아니고 서태웅이 빨리 온 것으로 치부했던 주제에, 오늘은 자신이 빨리 온 게 아니고 서태웅이 늦는 것처럼 느껴진다니. 자기중심적인 것도 정도가 있다. 윤대협은 스스로에게 객관적인 편이었지만 오늘만은 감정이 논리를 따라가 주지 않았다.

왠지 기운이 빠진다. 억울할 일이 아닌데 억울하다. 윤대협은 코트에 모로 누워 버렸다. 그냥 이대로 자 버릴까? 밥 먹으러 갈까? 낚시하러 갈까? 그래, 낚시가 있었네. 그러고 보니 윤대협은 기다리는 일에 서툴지 않은 편이었다. 오히려 기다리는 게 취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짜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원래 아무런 입질도 없는 상태가 자연스러운 낚시라면 천에 하나 입질이 왔을 때가 짜릿한 법이다.

그러니 원래 서태웅이 윤대협을 기다리는 게 당연한 일이라면 서태웅이 없는 날엔 짜증이 날 법도 하다. 당연할 일은 아니지만... 언제부터 당연한 사이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윤대협은 또 명치를 벅벅 긁었다. 왠지 경기가 잘못 돌아갈 때의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파 놓은 함정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 같은. 아무런 승부도 하지 않았는데. 이건 그냥 재밌어서 하는 농구인데.

농구공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덜 심심하긴 했겠지만 짜증이 덜 나진 않았을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러 윤대협은 벌떡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말리는 기분이 드는 거다. 원하는 건 자기 손으로 쟁취하자는 주의다.

서태웅 찾으러 가야지.


윤대협은 북산 고등학교까지 가는 길을 몰랐다.

그렇지만 몇 번인가 자전거 대신 전철을 타고 온 서태웅을 역까지 데려다준 적이 있었다. 그때 몇 정거장 가냐고, 어느 역에 내리냐고 물어봤었다. 아무 말도 안 하기 어색해서 건넨 사교적인 질문이었는데 서태웅은 대화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단답형으로 툭툭 끊었다. 그런데도 몇 정거장이냐는 말에는 입을 다문 채로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진지한 얼굴이 평범하게 귀여웠다.

일단 거기까지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역에서 주변 지도를 하나 줍거나. 아니면 역무원에게 북산 고등학교까지 어떻게 가냐고 물어보는 방법도 있었다.

목적지를 정하고 나니 윤대협은 세상 태평해졌다. 아까는 1분이 한 시간처럼 느리게 흘러가더니 지금은 여유가 넘쳐서 괜히 천천히 걷고 싶어졌다. 서태웅이 없는 건 똑같은데, 한자리에서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과 조금씩 가까워져 가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인생에서 처음 느껴보는 아주 미묘한 차이에 감탄조차 나왔다. 윤대협은 휘파람까지 불면서 걸었다. 기분 좋은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그러나 산책은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전철역에서 두어 블럭 떨어진 길가 주차장 앞 자판기 옆에 쪼그리고 앉은 거대한 고등학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윤대협은 뒷모습인지 옆모습인지 애매한 각도에서 그 덩어리만 보고도 서태웅이라는 걸 확신했다. 잠깐 그 자리에 서서 서태웅을 관찰했다.

서태웅은 뒤에서 몰래 어깨를 꾹 눌러서 주저 앉히고 싶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오른 손가락 5개를 주차장 철조망에 걸치고 이마를 살짝 기대어 있었다. 뭔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윤대협의 각도에서는 그게 뭔지 보이지 않았다.

반가움과 흥미진진함과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의아함이 뒤섞여서 화학 반응을 일으켜 윤대협의 무료하던 심장 옆에서 다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서태웅은 지겨울 틈을 안 준다. 보고만 있어도 재미있다. 짜증을 감추기 위한 미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얼굴이 풀어지는 것을 느낀다. 몰래 가서 놀래 줄까? 눈을 가리고 '누구게~' 해 볼까? 한 대 맞으려나?

유치한 장난을 몇 가지 떠올리는 동안에도 서태웅은 미동이 없었다. 보도블럭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농구공 가방과 책가방. 철망 앞에 딱 붙여서 정중히 주차된 바구니 달린 자전거.

결국 반가움이 이겼다. 윤대협은 그냥 하고 싶은 걸 했다.


서태웅은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뒤로 쓰러질 뻔해서 양손으로 철망을 꽉 잡았다. 올려다봤더니 윤대협이 태양을 뒤통수에 진 채로 눈을 예쁘게 접어서 웃고 있었다. 덕분에 서태웅의 머리 위로 그늘이 생겼다.

"안녕. 여기서 뭐해?"

서태웅은 말없이 턱으로 주차장 안쪽을 가리켰다. 후방 주차된 세단 아래에서 삼색 고양이가 쏙 머리를 내밀었다가 다시 사라졌다.

서태웅은 저것 보라는 의미로 눈에 힘을 빡 주며 다시 윤대협을 올려다봤다. 윤대협은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콧잔등에 주름이 잡혀 있었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서태웅은 윤대협이 킁킁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서 고양이가 도망갈까 봐 쉿! 하면서 손가락을 입술에 세로로 세웠다.

윤대협이 옆에 조심스럽게 주저앉았다. 바닥에 앉으면 엉덩이 더러워질 텐데.

고양이는 아직 안 간 것 같았다. 꼬리가 살랑거렸다. 서태웅을 경계하면서도 완전히 멀리 가지는 않았다. 더워서 그늘 속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윤대협이 귓가에 속삭였다.

"고양이 보느라고 안 왔어?"

"아."

"나랑 만나는 거 까먹었어?"

"미안... 고양이가..."

서태웅은 소곤소곤 대답했다.

언제부터 고양이를 보고 있었지? 학교 끝나자마자 공원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고양이가 철망 너머 주차장에서 차 아래쪽으로 달려 들어가는 걸 보고 자신도 모르게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처음에는 고양이가 차에 치이는 줄 알고 허겁지겁 들여다봤는데 정차된 차 아래로 피한 것뿐이었다. 그다음부터는 그냥 귀여워서 떠나지 못했다. 자판기에서 물이라도 뽑아 주고 싶은데, 잠깐 기다려 준다면 편의점에서 츄르도 사다 주고 싶은데, 자리를 비운 동안 사라져 버릴까 봐 움직이지 못했다.

서태웅은 조리 있게 말하는 재주가 없어서 순서를 뒤죽박죽 섞고 미안한 감정과 일어났으면 했던 일과 실제 일어난 일을 뒤섞어서 띄엄띄엄 말했다. 문장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영원히 마무리되지 않는 아주 지리멸렬한 설명인데도 윤대협은 중간중간 응, 응, 그래서? 정말? 아, 그건 착각이었구나. 적절히 대꾸하며 요점을 잘도 파악했다.

그동안에도 소심한지 용감한지 알 수 없는 고양이가 가끔 서태웅과 눈을 마주쳐 줬고, 그 때마다 서태웅은 말하다 말고 눈에 힘을 빡 주면서 윤대협을 쳐다봤다. 지금 봤냐고. 날 쳐다봤다고!!! 침묵으로 웅변하는 커다래진 눈동자에 윤대협의 웃음을 꾹 참는 얼굴이 비쳤다.

"그럼 내가 츄르 사 올까?"

서태웅은 오늘 본 중 가장 커진 눈동자로 윤대협을 뎅그러니 바라봤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윤대협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웃더니 한 번 더 서태웅의 부스스한 머리를 슬쩍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다리가 성큼성큼 멀어진다. 서두르는 태도가 아닌데도 제법 속도감이 느껴진다. 서태웅은 다시 고양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윤대협이 오기 전에 재빨리 자기 머리를 한 번 더 쓸어 본다. 커다란 손이 지나갔던 자리를.


윤대협은 편의점으로 향하면서 웃고 있었다. 커다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내서 웃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배를 안고 박장대소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서 최대한 자제하는 중이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마름모꼴 철망 자국이 발갛게 찍힌 하얀 이마가 너무 웃겼다. 무슨 할 말이 있을 때마다 느낌표를 한가득 실어서 안광을 빛내며 쳐다보는 새까만 눈동자가 너무 웃겼다. 입보다 많은 말을 하는 눈. 고양이가 뭐라고 농구하자는 약속도 까먹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15세 고등학생.

하아, 너무 웃기다. 대충 고양이 간식 몇 개와 생수 한 병을 골라 계산을 하는 도중에도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샜다. 이건 근데 눈으로 봐야 웃긴 거라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누구도 이 재미에 공감해 주지 않겠지. 진짜 웃긴데. 서태웅. 진짜 웃겨.

윤대협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또 서태웅이 웃긴 짓을 할까 봐 편의점에서 산 물건들을 안고서 나는 듯이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서태웅은 아까 발견한 자세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정물이나 다름없었다. 츄르를 건네니까 또 눈동자에 힘을 빡 주고 쳐다본다.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어서 활짝 웃었다.

츄르를 빼앗듯이 가져가더니 뽀시락 뽀시락 뜯는다. 차 아래에 있던 고양이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빼꼼 내민다. 이번에는 다시 몸을 숨기지 않고 뚫어져라 츄르를 쳐다본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서태웅이 흥분했는지 츄르를 뜯다가 헛손질을 했다.

"이리 줘 봐. 내가 해 줄게."

윤대협은 서태웅의 손을 그대로 감싼 채로 츄르를 뜯어 버렸다. 서태웅은 쉽게 뜯긴 츄르를 잠시 쳐다보다가, 시종 싱글벙글 웃고 있는 윤대협을 쳐다보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츄르 끝을 철창 사이로 스윽 내밀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처럼 비장한 태도였다. 윤대협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고양이는 츄르 냄새를 맡았다. 잠시 서태웅과 눈싸움을 하더니,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윤대협은 마주 닿은 서태웅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고양이가 다시 한 발을 내디뎠다. 또 한 발. 한 발. 점차 빠르게 다가오더니 고개를 쭈욱 내밀어 조그마한 분홍색 혀끝을 츄르에 갖다 댔다. 서태웅과 윤대협이 서로를 마주 봤다. 흐뭇하게 입을 벌리고 웃는 윤대협과, 환희와 공포로 가득 차올라 새하얘진 서태웅의 얼굴. 윤대협은 폭소를 터뜨리지 않기 위해 속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서태웅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조금씩 츄르를 앞으로 밀었다. 고양이는 신나게 츄르를 먹다가 서태웅의 손가락을 조금 핥았다. 서태웅이 조그마한 입을 쩌억 벌렸다. 이 세상이 끝난 듯이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윤대협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옆으로 쓰러졌다. 결국 폭소를 참을 수 없었다.

고양이는 츄르 한 개를 다 얻어먹고 서태웅의 손끝에 묻어 있는 츄르까지 야무지게 핥아먹더니 감사의 인사처럼 철창에 몸을 한 번 쓰윽 부비고 유유히 걸어가 버렸다.

서태웅은 고양이가 보이지 않게 되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을 펴려다가 이상한 비명 소리를 냈다.

"왜 그래?"

"다리 저려서…"

윤대협은 웃음을 참느라 고인 눈물을 닦아내다가 하하하 소리 내서 웃었다. 서태웅은 불퉁거렸다. 윤대협이 서태웅의 종아리를 주무르자 서태웅이 지금 만지면 이상하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발길질을 했다. 그래도 일으켜 주려고 뻗은 손은 마다하지 않고 얌전히 잡고 일어섰다.

서태웅은 엉덩이를 툭툭 털더니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고마워."

그건 서태웅이 윤대협에게 처음 건넨 것이었다. 다짜고짜 농구하자고 들이대도 거절하지 않았고, 부탁한 적 없는 조언도 건네 봤으며, 나름대로 그 조언이 유효했다는 보고까진 들었지만 감사 인사를 받은 적은 없었다.

대각선 아래를 바라보는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쑥스러워하는 건가. 윤대협은 또 심장이 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렇지만 평소와 달리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햇빛 아래 너무 오래 앉아 있었나. 아니면 서태웅도 평소와 달리 윤대협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아서일까. 이런 때는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한다.

"태웅이는 고양이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미안. 나는 원래 그래."

"아무리 그래도 약속도 안 오는 건 너무한 거 아냐? 나 계속 기다렸는데."

"나는 원래... 좋아하면 시간을 잊어버려."

서태웅이 오른손을 꾹 쥐었다 펴는 것이 보였다. 오른쪽 귀 끝이 엄청나게 빨개진 게 보였다. 나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아니구나. 다행이다. 얘도 햇빛 아래 너무 오래 앉아 있었나. 아니면...

서태웅은 윤대협을 쳐다보지 않고 보도블럭에 내팽개쳐 두었던 가방을 주섬주섬 둘러맸다. 철망에 기대 뒀던 자전거 핸들을 잡고 스탠드를 발로 툭 차서 일으켜 세운다. 그제서야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윤대협을 쳐다보며 말한다.

"이제 농구하자."

그렇지만 윤대협은 아직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윤대협은 항상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내 얼굴 굉장히 이상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윤대협은 어떤 결심을 했다. 오늘 얻은 정보로부터 연역적으로 유추했을 때, 어떤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서태웅은 좋아하면 시간을 잊어버린다. 다리가 저려서 펴지도 못할 시간 동안 정신없이 고양이를 쳐다보고, 밤이 늦어 농구 골대가 안 보일 때까지 정신없이 농구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농구 코트에 나와서 하루 종일 윤대협만 기다린다. 꼭 시간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오늘은 다른 거 하자."

"다른 거?"

"우리 집 갈래?"

서태웅이 윤대협을 빤히 쳐다봤다.

오늘은 둘 다 농구공 한 번 튀긴 적이 없다. 오후의 햇살 아래 꽤 오래 앉아 있긴 했지만 땀이 뻘뻘 날 정도의 날씨도 아니었다.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평소처럼 샤워를 한다거나 더위를 피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방문 사유가 오늘은 없었다. 윤대협은 명백하게 평소가 아닌 일을 제안하고 있었다.

서태웅이 먼저 눈을 피했다. 다시 대각선 아래를 향한 속눈썹. 주먹을 쥐듯이 꾸욱, 자전거 핸들을 잡는 손가락이 하얘졌다.

서태웅은 묵묵히 자전거를 밀고 앞서 나간다. 전철역과 반대 방향이었다. 서태웅은 윤대협 집으로 가는 길을 안다. 양쪽 귀 끝이 엄청나게 빨개져 있었다. 교복 칼라 위로 튀어나온 목덜미는 대부분 검은 뒷머리에 가려져 있지만 언뜻 비치는 속살이 귀 끝이랑 똑같은 색으로 빨개져 있었다.

윤대협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구불구불 일그러지는 입술을 꾹 물고 엄청나게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서태웅을 휘적휘적 따라잡아 보송보송한 까만 머리를 마음껏 헝클어 버렸다. 하지 말라고 말하는 입술 옆에 말랑하게 튀어나온 볼따구에 쪽! 소리 내서 뽀뽀했다. 서태웅은 눈동자에 힘을 빡 주고 쳐다보더니 자전거 위에 냅다 올라타서 겁나 빠른 속도로 앞서가 버렸다. 윤대협은 소리 높여 웃으면서 그 뒤를 따라 전력질주했다. 오늘은 날아서라도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