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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3.07.02

Flower Dance 4

불면의이쑤신

윤대협은 아이돌 은퇴 이후 여유가 늘었다. 새로운 직업도 아이돌과 마찬가지로 프리랜서이긴 했지만. 매일매일의 스케줄 밀도는 차원이 달랐다. 물론 공모도 있고 의뢰도 있고 공동 작업이나 프로젝트도 있다. 그런 것이 들어오는 창구가 되어 줄 인맥 관리 차원의 모임도. 그래도 기본적으로 윤대협의 시간의 주인은 윤대협이었다.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비울 시간, 미룰 시간, 몰입할 시간. 윤대협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윤대협은 딱 두 가지만 철저하게 지켰다. 마감. 그리고 공부. 윤대협은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 제 안에 꺼내놓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것과 별개로 기술적으로 따라잡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많이 듣고, 많이 상상하고, 많이 연주하고. 그 방법밖에 없었다.

나머지 일정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진 않았다. 인맥이 중요하다지만 인맥 없이 일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기회를 즐겁게 해내면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다음 기회로 이어질 수 있다. 일과 무관한 약속은 언제든지 취소해도 무방하다.

윤대협은 자신과의 약속도 쉽게 미뤘다. 수면이라든가 산책이라든가 가사라든가, 잔뜩 쌓아뒀다가 아무 때나 했다. 그렇게 이것저것 미루고 취소하면 빈 시간이 생긴다. 17살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윤대협은 텅 빈 시간이 좋았다. 내키는 행동으로만 채우는 게 즐거웠다.

요즘 가장 내키는 건 서태웅이다. 그래서 윤대협은 삼일이 멀다 하고 서태웅을 만났다. 되찾은 시간의 주인으로서 윤대협은 남는 것을 고스란히 서태웅에게 바쳤다.

서태웅은 생각보다 한가했다. 부를 때마다 나왔다. 뭐해? 바빠? 산책할래? 세 마디면 윤대협 앞에 서 있었다. 산책이 드라이브일 때도, 인스타에서 본 제법 맛있어 보이는 음식일 때도, 일없이 윤대협 작업실에 놀러 가기일 때도.

윤대협은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짐짓 다정하고 세심한 척, 나 신경 써서 매번 나올 필요 없다고, 피곤하면 집에서 쉬라고 챙겨 주기도 했다. 서태웅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시간 많아. 덕질 안 해서."

윤대협은 상승하는 입꼬리를 잡지 못했다. 자꾸 찌그러지는 입술 윤곽을 감추느라 괜히 고개를 모로 돌리고 턱을 긁었다. 이러나저러나 서태웅이 바쁠 이유는 윤대협밖에 없다는 사실이 기뻤다.

서태웅은 처음 윤대협의 작업실에 놀러 온 날부터 제 집처럼 편하게 지냈다. 의외였다. 친구 집에 놀러 간 적 없다더니. 물론 빌려 온 고양이처럼 눈치 보길 바란 건 아니니까 좋지만. 처음에는 윤대협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매 순간 얼떨떨하던 서태웅인데. 한 번 경계심을 해제하니 방어선이 아예 없었다. 자주 만난 보람이 있었다.

작업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눈에 보이는 건 악기다. 서태웅이 무슨 악기에 호기심을 보이든 윤대협은 바로 손에 쥐고 연주를 선보였다. 기타, 베이스, 피아노, 드럼, 신시사이저, 우쿨렐레까지. 서태웅은 묵묵히 윤대협의 손끝에서 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고 연주가 끝나면 작게 박수를 쳤다. 윤대협은 웃으면서 물었다.

"감사합니다. 신청곡 있으세요?"

서태웅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네가 만든 거."

한결같은 대답을 들을 때마다 윤대협은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다. 자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완성된 것도, 미완성인 것도, 왠지 서태웅 앞에서는 다 꺼낼 수 있었다. 다음 방문 전에는 들려 줄 곡을 준비해 놔야겠다. 서태웅과 보낸 시간은 그런 식으로 금방 노래가 되었다. 윤대협에게는 다른 영감이 필요 없었다.

물론 악기를 만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서태웅은 윤대협이 모아 둔 LP나 오래된 콘서트 DVD를 뒤적이다 관심이 가는 걸 뽑아선 슥 내밀곤 했다. 프린스. 퀸. 마이클 잭슨. 장르가 다양했다. 신나는 거 좋아하는구나. 95년 라이브 에이드 영상을 틀어 놓고 발을 까딱이는 서태웅을 구경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멋진 모습을 보고 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하지만 윤대협의 무대를 보러 왔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우쭐함과 안도감과 애틋함.

윤대협의 컬렉션 사이에는 N그룹 콘서트 DVD도 있다. 하지만 서태웅은 한 번도 그걸 가져와서 내밀지 않았다. 서태웅은 윤대협과 함께 있었다. 친구와 시간을 보냈다. 아이돌과 팬이 결코 보낼 수 없는 시간을.

윤대협은 서태웅이 있으나 없으나 정해진 시간에 연습을 했고, 영상으로 기록해서 유튜브에 올렸다. 그건 공부의 한 종류였기에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서태웅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윤대협이 무엇을 해도 방해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켜면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점만 달랐다. 어차피 말 없는 성격이라 큰 차이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조용히 음악을 듣고 끝나면 작게 박수를 쳤다.

한 달 정도 작업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윤대협은 서태웅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몇 가지 알게 됐다. 원래 말이 없는 줄은 알았지만 정말 없다. 생각보다 호기심이 많다. 예상외로 음악 취향이 분명하다.

그리고 잠이 엄청나게 많다. 진짜로. 윤대협이 뭘 연주하든 세 곡을 넘긴 적이 별로 없었다. 아무리 시끄러운 노래를 틀어도 마찬가지였다. 서태웅은 금방 졸았다. 졸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잠들었다. 침대에 앉아서든, 의자에 앉아서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자세로 소파 아래 방바닥에 앉아 등을 기대서든, 윤대협의 어깨에 기대서도.

윤대협은 서태웅이 잠든 후에도 끝까지 한 곡을 마쳤다. 짝짝짝. 없는 박수 소리를 머릿속으로만 재생했다. 따끈하게 늘어진 서태웅을 번쩍 들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침대에 눕혀 줬다. 이불을 가슴팍까지 잘 덮어주고 토닥였다. 서태웅은 남의 집에서 새근새근 잘도 잤다. 윤대협은 시간을 잊은 채 하염없이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가까워지는 속도를 인식조차 못한 채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마치 처음부터 항상 곁에 있었던 것처럼. 왜 이렇게 편안한 걸까?

여기 있기 위해서 나는 무대를 내려온 걸까?

윤대협은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저 혼자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무대는 혼자 채워야 하는 공간. 주변의 모든 시선을 윤대협에게 고정시켜야 했던 시간. 자기 자신마저 완전히 잊을 수 있는 몇 초의 몰입이 지나고 나면 대체로 외롭기 마련이었다. 물론 객석에서 보내주는 뜨거운 에너지가 있었지만, 그것조차 쏟아지는 조명이 너무 밝아 누구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한 달 전에 친구가 된 사람의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서태웅의 따끈한 잠 숨을 들을 때에, 윤대협은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잃은 줄 몰랐던 일부가 돌아온 것처럼 충만했다.

잠든 서태웅이 내쉰 숨을 자신이 마시고, 자신이 뱉은 숨을 서태웅이 삼키는 걸 느끼며 윤대협은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서로가 타인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남은 방법이 피부를 맞대는 것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윤대협은 서태웅에게 닿기가 아주 두려웠다. 무심코라도 보드라워 보이는 뺨에 손등을 댈 마음을 먹지 않았다. 코 앞에 놓여 있는 결 좋은 피부의 촉감이나 온도 같은 걸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날도 윤대협과 서태웅은 작업실 침대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뒹굴고 있었다. 윤대협은 다음에 서태웅을 데려갈 맛집을 찾고 있었다. 오. 여긴 근처에 커다란 온실이 있는 식물원이 있네. 형은 추위 많이 타던데 괜찮을지도.

그 때 윤대협 옆에 드러누워 있던 서태웅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앉은 채로 심각하게 핸드폰을 바라보다. 아직 누워있는 윤대협을 돌아본다. 그랬다가 다시 핸드폰이랑 눈싸움을 한다.

백 퍼센트 뭔가 재밌는 일이 일어나고 있구만. 윤대협은 살짝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서태웅이 웬일로 답변을 망설인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윤대협도 상체를 일으켰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나서야 머릿속이 정리된 서태웅이 찬찬히 말했다.

"친구들이 파티를 한다고 놀러 오라는데.”

"친구들?"

"음... 지인들."

서태웅에게 복수의 친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위한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던 윤대협의 대뇌피질이 애쓴 끝에 하나의 가설을 내놓았다. 윤대협은 아! 하고 무릎을 치면서 물었다.

"내 팬들?"

서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 사녹이나 행사에서 언제나 혼자였던 서태웅이 어느 순간부터는 오랜 팬들 몇 명과 함께 다니곤 했다. 자주 봐서 얼굴을 확실하게 기억하는 누나들이었다. 이름은... 윤대협의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잘 모르지만. 하도 예전이라 잠깐 잊고 있었다. 윤대협이 짓궂게 미소 지었다.

"가서 내 얘기 할 거야?"

"아마도."

"엑."

얄짤 없는 대답. 입술을 삐죽이던 윤대협은 별생각 없이 덧붙였다.

"그럼 나도 데려가면 안 돼?"

서태웅은 아주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거절도 아니고 수긍도 아니고. 굉장히 혼란스럽고 희한한 제안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 윤대협은 점점 더 그 자리에 꼭 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태웅이 신중하게 반문했다.

"너 생일 카페라는데?"

윤대협은 씨익 웃으며 서태웅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그럼 내가 꼭 가야겠네."

이리 줘 봐. 윤대협은 아예 서태웅의 핸드폰을 뺏었다. 서태웅의 어깨에 한쪽 팔을 걸친 채로, 서태웅을 품 안에 가둔 자세로, 본인 눈앞에 핸드폰 화면을 보란 듯이 펼쳐 두고 카톡 창에 글자를 입력한다. 한 명 더 가 도 되 나 요...

그리하여 윤대협과 서태웅은 8인의 전 윤대협 오타쿠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남들보다 부지런히 움직여 문을 열러 갔다는 죄로 그들을 생눈으로 맞닥뜨린 두 명의 고인물(한 명은 전 찍덕이고 한 명은 전 알페스 글러다)은 그대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굳었다.

서태웅은 오랜만이랍시고 또 반가운 눈치다.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뒤에 서 있는 윤대협을 힐끔 보고, 손날로 정중히 가리키며 소개한다.

"친구예요."

뭐라고요? 고인물들은 귀를 의심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전 윤대협 찍덕이 재빨리 뒤쪽 방으로 도망갔다. 잔상이 남을 듯한 스피드였다. 홀로 남은 전 윤대협 알페스 글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만 뻐끔거렸다.

서태웅의 어깨를 잡고 앞쪽으로 쑥 나온 윤대협이 달칵, 문을 닫으면서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고인물은 입을 틀어막았다.

윤대협과 서태웅은 실제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를 지나쳐 초대 받고 온 자의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거실에 입성했다. 윤대협이 자기 얼굴로 잔뜩 도배된 거실을 보고 우와아 육성으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직후에 짧은 비명이 시간차로 들렸다. 마중 나갔던 고인물은 다리가 풀려서 벽을 짚어가며 천천히 그 뒤를 쫓았다.

그 후로 30분 정도는 아수라장이었다.

세 사람 정도가 음속을 방불케 하는 속도로 거실로부터 방문 뒤로 얼굴을 가린 채 피신했다. 아까 이미 현관에서 도망간 사람까지 합치면 넷이다. 불면을 포함해 도망갈 타이밍을 놓친 세 명은 거실에서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로 덩그러니 굳어있었다. 가장 먼저 이 참사를 마주한 탓에 제일 빨리 제정신이 돌아오고 있는 마중러 고인물만이 침착하게 주방에서 냉수 한 사발을 원샷했다. 그러다 사레가 들러서 죽을 듯이 기침했다.

불면은 윤대협이 윤대협의 얼굴이 크게 인쇄된 현수막과 윤대협 사진 액자와 190cm를 맞춰서 제작한 엑스 배너를 하나하나 구경하는 걸 TV를 보는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아무런 현실감이 없었다는 뜻이다.

윤대협은 자기 사인을 발견할 때마다 와, 이거 생각난다, 하면서 보송이한테 와서 구경하라는 듯이 손짓했다. 놀랍게도 보송이는 시큰둥하게 다 본 건데, 하고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철 들고 남 앞에서 이렇게 충격을 받아 본 적이 있던가. 떡 벌어진 입이 다물리지 않아서 혀끝이 살짝 말랐다. 가출한 영혼이 돌아오질 않는다.

그 와중에도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진짜 잘생겼다. 미쳤다. 진짜 잘생겼다.

윤대협은 감동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면서 거실 테이블 주인공 자리에 떡하니 앉았다. 그리고 밝은 목소리로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생일 카페 열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올해도 이렇게 축하받을 수 있을 줄 몰랐는데."

거실에 있던 세 명과, 주방에 있던 한 명과, 각각 방문을 빼꼼 열고 (한 명은 화장실이었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네 명이 그 말을 듣고 동시에 울컥했다. 오장육부를 타고 찌르르 내려가는 감동. 개중에 감성적인 멤버들은 눈가가 촉촉해졌다. 윤대협의 목소리를 통해 언제나처럼 아주 담백한 진실만이 담겨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는 윤대협이 맞았다. 그들이 몇 년씩 좋아했던 윤대협이 맞았다. 팬들을 좋아하지만 절대 반말은 안 해 주고, 생일카페 순회를 하다못해 역생카를 준비하고, 얼굴은 다 기억하면서 이름은 끝내 기억하지 못했던 그 윤대협. 센터이자 메인 보컬이자 메인 댄서이자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났고 잘하고 유명했던 아이돌 윤대협. 어디다 자랑해도 안 꿀리던 내 아이돌.

주책맞게 흐를 뻔한 눈물을 잘 수습한 불면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더듬더듬 뭔가 인간의 말을 해 보려 애썼다.

"어떻게... 아니... 왜... 어떻게 여기를... 아니..."

쉽지 않았다. 두 마디 이상을 잇기가 힘들었다. 제대로 말하지도 않았는데 얼굴 전체가 화끈거렸다. 불면은 최선을 다해 정신줄을 잡았다. 팬싸다. 이건 팬싸다. 나는 지금 팬싸에 온 거야. 그건 여러 번 해 본 적 있잖아. 물론 그때와 달리 어떤 멘트도 마음의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고 그 모든 팬싸 역시 엄청나게 떨렸었지만 아무튼 간에!!!

윤대협은 불면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대답했다. 불면은 그것만으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니 나 완덕했는데 왜 이래.

"제가 너무 오고 싶어서 태웅이 형 졸랐어요."

태웅이 형?

여덟 명의 머릿속에 동시에 네 글자와 물음표가 떠올랐다.

"태웅이 형?"

주방에 있던 한 명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가 헙 손으로 막았다. 윤대협 옆에 자연스럽게 앉아 있던 보송이가 뭔가 눈치를 본다. 슬금슬금 방을 나와 거실 구석에 서기 시작한 사람들까지 포함해 설명을 요구하는 눈동자 16개가 잘생긴 얼굴에 꽂힌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보송이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듣는 침착하고 나직한 목소리.

"제가 R엔터에 캐스팅 제안을 받았었는데..."

예? 허에? 헐? 무어? 다채롭게 얼빠진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물론 보송이의 와꾸를 생각할 때 납득이 안 되는 시나리오는 아니다. 근데 그걸 우리한테 얘기를 안 해줬다고? 언제? 왜? 쏟아지는 경악에 당황한 듯한 보송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윤대협이 천천히 말하라는 듯이 보송이의 손등을 토닥였다. 구석에 숨어 있던 댑보러의 눈빛이 번뜩였다.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한 불면이 보송이를 거들었다.

"아, 대협이 대신에?"

윤대협이 빠진 N그룹에 비주얼과 화제성이라도 채워 보겠다는 소속사의 시도였다면 말이 된다. 남신팬은 워낙 유명했으니까.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캐스팅이 안 들어온 게 신기하다. 그야 멤버가 다 차 있으면 일반인을 캐스팅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윤대협이 빠졌다면 누구라도 급하게 대체 멤버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일련의 논리적 정합성에 다른 고인물도 내심 '호오...'하며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쐐기는 윤대협이 박았다.

"비슷해요. 아무튼 사무실에서 만났는데 반가워 가지고. 제가 친구 하자고 했어요. 캐스팅은 거절했지만."

친구? 8명 중 5명 정도가 아직도 보송이의 손등 위에 있는 윤대협의 커다란 손을 힐끔 쳐다보았다. 고요 속에서 댑보러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제발 그녀에게 영영 목소리를 낼 정신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파티의 주최자로서 사태를 수습할 책임을 짊어진 불면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그래... 아무튼... 대협아... 생일 축하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였다. 호텔 방 구석 여기저기서 메아리처럼 축하해... 축하해요... 생일 축하해... 이런 소리가 하나씩 튀어나왔다.

윤대협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와~ 감사해요. 노래도 불러 주실 건가요?"

불면은 속 입술을 한 번 꽉 깨물고 피 흘리는 심정으로 말했다.

"미... 미안... 케이크가 없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냉장고 속 커스텀 케이크의 장엄하고 추한 디자인. 그냥 없다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그러자 보송이가 손바닥을 척 내밀더니. 정신이 빠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계속 들고 다니다가 등 뒤에 내려놨던 커다란 상자를 로우테이블 한 가운데에 올려놓았다. 하얗고 정갈한 종이 상자 속에서 멋진 레몬색 크림이 올라간 타르트가 나왔다. 윤대협이 의기양양하게 (왜?) 자랑했다.

"태웅이 형이 오면서 사 줬어요."

보송이는 듣는 둥 마는 둥 신중하게 타르트 한가운데에 숫자 초를 꽂았다. 2 하나, 7 하나. 살짝 기울어진 7을 똑바로 세우더니 무표정으로 뿌듯해했다. 윤대협은 지가 보송이를 낳은 것 같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 일거수일투족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멀리서 차마 가까이 못 오던 전 찍덕이 슬금슬금 다가와 불면의 어깨를 손가락 하나로 톡톡 치더니 라이터를 건네고 다시 다섯 발짝 물러섰다. 이 미친 것들이 진짜. 빨리 안 앉아?! 불면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도망간 배신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생선 지느러미 파닥이듯 빠르게 왕복 손짓을 했다.

주춤주춤 다가온 멤버들이 로우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았다. 윤대협의 오른쪽에 보송이가 있었고 왼쪽은 테이블 한 면이 쭉 비어있었다. 무릎을 꿇고 겁먹은 햄스터들처럼 옹기종기 붙어 앉아 아직도 상황을 잘 해석하지 못한 채 윤대협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8명의 고인물 사이에서 대장 햄스터 불면이 침착하게 초에 불을 붙였다. 아까 문 열었던 전 알페스 글러가 그다음으로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서 거실 불을 끄고 왔다.

크흠. 가장 먼저 목을 가다듬은 건 보송이였다. 느릿한 저음이 대한민국 모두가 아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두 번째 소절부터는 더듬더듬 따라 부르는 목소리가 8개 더 늘어났다. '사랑하는 윤대협'을 제대로 부를 수 있었던 건 보송이 뿐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차마 똑바로 발음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래도 마지막 소절이 끝나고 나서는 긴장이 좀 풀려 다 같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윤대협은 스스로 신나게 박수를 치다 눈을 꼭 감고 소원을 빈 다음 후! 한 번에 초를 다 껐다.

데뷔부터 은퇴까지 덕질했던 불면은 어렴풋이 느꼈다. 자신이 봤던, 찍었던, 그 어느 때의 윤대협보다 행복해 보이는 눈웃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