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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5.07.27

페어 플레이 2

불면의이쑤신

[스포츠 / 농구 / 최신 기사 / 많이 읽은 순 ]

1 [단독 인터뷰 ①] 윤대협&서태웅 알고 보니 3년 차 룸메이트… “'적과의 동거?' 싸운 적 없다”

2 [단독 인터뷰 ②] 해외파 서태웅, 최연소 얼리 드랲 정해진 수순 “대입 전에 이미 제안받아”

3 윤대협 vs 서태웅… 사상 최초 ‘얼리 전체 1번’ 탄생할까

4 대농 괴물 신인 서태웅, 최연소 ‘얼리 전체 1번’ 도전

5 ‘최대어’ 윤대협 '최연소' 서태웅… ‘얼리 매드니스’ 드래프트 각축전


프로 농구선수 서태웅의 하루는 언제나 촘촘하다. 훈련. 경기. 잠. 틈틈이 식사. 이외의 일정은 매우 드물다. 가족을 만나거나 아는 사람들과 친목을 도모하는 최소한의 사회생활은 식사 시간을 활용하는 편이다. 엄격한 식단 관리 때문에 많은 배려를 받고 있다. 취미는 음악 듣기. 주로 이동 시간이나 유산소나 웨이트 때 듣는다. 휴일엔 사람 만나거나 NBA 본다.

의외로 교우 관계는 넓다. 주로 과거의 방향으로만. 고등학교 때나 NCAA 시절 친했던 팀메이트들과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보통 농구 얘기 물어본다. 그러다 가족이며 다른 팀메이트 안부도 물어 보고. 그러다 보면 궁금해져서 걔한테도 연락하고. 이런 식으로 태평양을 건너 결성된 단체 채팅방도 있다. 그들이 종용해서 SNS를 만들었다. 하지만 사진은 안 올리고 댓글만 단다. 오로지 연락용이다. 오는 연락에 실시간으로 전부 답할 정도로 섬세하진 않다. 그래도 이동 시간에 잠들지만 않는다면 음악 들으면서 늦게라도 답해주려 노력하는 편. 다들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 준다.

프로리그 적응은 생각보다 설렜고. 생각보다 쉬웠다. 그 무엇보다 농구해서 돈을 번다는 부분이 새로웠고. 감격스러웠다. 기억에 남아 있는 가장 어릴 적부터 항상 농구를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늘 새로운 경험이 온다. 나아간다는 느낌 속에서 농구하고 있다.

남들보다 빠르게 프로에 왔다. 서태웅은 언제나 탑클래스였다. 최소한 국내에선.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대학 리그에 오면서 원했던 실력에 대한 자타공인은 금방 끝났다. 한 학기만에 최연소 얼리 드래프트에 도전해 전체 2번 순위로 뽑혔다. 그럼에도 리그 수준을 한 단계 올릴 땐 어느 정도 적응 기간이 있어야겠지. NCAA를 경험한 서태웅은 그 지점을 확실하게 알았다. 그래서 첫 시즌은 벤치나 심지어 엔트리 제외까지도 각오했다. 별로 2군이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보이면 언제나 다음 기회가 열린다는 걸 서태웅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단에선 곧바로 서태웅을 주전으로 기용했다. 전체 2번으로 뽑아 놓고 썩히는 것도 아깝다는 생각인지. 전무후무한 화제성에 노를 저어보겠단 심산인지. 업계의 추측은 둘 중 하나였지만 서태웅은 그냥 자신이 잘해서라고 생각했다. 물론 진실은 셋 다였다.

연예인 뺨치는 외모와 입단 즉시 MVP를 겨루는 실력. 그런 선수가 하나가 아니라 둘. 대학 농구에 이어 프로 농구도 사상 최고의 화제와 흥행을 기록했다. 아직 성적으론 갈 길이 먼 국제대회조차 윤대협과 서태웅을 한 시야 속에 잡을 수 있다는 엄청난 시각적 가치로 티켓이 동났다.

서태웅은 그러려니 했다.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경험은 드물지 않다. 잘하니까. 당연하지. 쿨한 건지 오만인지. 하여간 서태웅의 머릿속은 단순했다. 윤대협의 인기에 대해서도. 잘하니까. 다음에 붙으면 내가 이길 거지만.

윤대협과는 코트에서보다 집에서 더 자주 본다. 의외였다.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 때는 더 그랬다. 윤대협은 개인 시간을 거의 집에서 보내기 때문이다. 낚시를 좋아한다고 능남 동기들이 말했던 것 같은데. 함께 살며 관찰한 결과로는 행동반경이 그렇게 넓은 것 같진 않다.

서태웅이 보기에 윤대협은 농구할 때나 아닐 때나 별로 차이가 없다. 여전히 신중하고, 그러면서 과감하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고 싶어서 방을 알아봤다면서 다짜고짜 같이 살자는 서태웅의 제안에 쿨하게 오케이. 하지만 막상 실제로 동거를 시작하니 굉장히 까다롭게 굴고.

윤대협이 제일 먼저 요구한 건 방 선택권이었다. 서태웅은 끄덕였다. 본인은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이다. 방이 네 개나 있으니까 그중 최소 두 개를 차지할 수 있다면 종류는 상관없었다. 미국에선 2인 1실 기숙사를 썼다. 절반의 방에서 두 개의 방이면 무려… 아무튼 많이 늘어난 거다. 뭘 해도 이득이었다.

윤대협은 욕실과 화장실이 딸린 방을 골랐다. 대신 작은 방은 서태웅에게 먼저 고르라고 했다. 서태웅은 창문이 없는 방을 골랐다. 어차피 옷방 겸 창고로 농구용품과 잡동사니만 넣어 둘 생각이었다.

각자의 가구를 가져왔기에 각자의 방은 분위기가 제법 달랐다. 큰 방에 침대가 있다는 건 같았다. 윤대협의 방 욕실 옆에는 파우더룸 같은 것도 딸려 있다. 머리 말리고 싶으면 와서 쓰라는데, 그런 건 욕실에서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싶어 사양해 두었다.

윤대협은 자기 몫의 작은 방에 책상과 의자를 놓았다. 장식장 하나에 지금까지 받은 트로피나 유니폼을 걸어 두었다. 부모님 댁에 놔둘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서태웅도 냉큼 따라 했다. 농구용품을 보관하는 수납장 옆에 중학교, 고등학교, NCAA, 대학 리그 유니폼을 나란히 늘어놓았다.

윤대협은 서태웅보다 훨씬 더 까다로웠다. 방을 먼저 고르는 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다지 넓지 않은 주방의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위한 아일랜드 식탁에 앉은 윤대협은 맞은편에 앉은 서태웅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하얀 A4 용지 위엔 글자가 제법 빽빽했다. 눈썹을 찌푸리고 열심히 그걸 읽는 서태웅의 머리꼭지에 대고 윤대협은 나직하게 말했다.

“난 가족 말고 누구랑 같이 사는 건 처음이라… 최소한 이런 건 서로 지키면 어떨까 싶은 걸 써 봤어.“

그건 일종의 룰을 나열한 종이였다. 엄청나게 섬세한 룰. 공과금과 관리비와 집세를 매달 며칠에 누가 모아 낼 것인지부터 냉장고 구역 분배의 제안, 식비는 각자 계산하는 대신 식사 시간이나 메뉴는 서로 간섭하지 말 것이며 공통으로 먹어도 되는 건 따로 구역을 정해 놓자든지, 쓰레기 버리는 요일에 따른 당번 결정, 손님을 데려올 땐 무조건 상대방의 허락을 사전에 구해야 하며 가족은 예외로 하되 미리 통지는 해 주자든가, 화장실 및 욕실을 포함한 각자의 구역 청소와 세탁은 당연히 알아서 하겠지만 피해를 끼칠 정도의 비위생은 자제하자, 서로의 공간에는 반드시 노크하자는 등…

서태웅은 조금 기가 빨렸다. 미국인 룸메이트와는 이런 걸 서면으로 작성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서로 좀 불편해도 참을 수 있을 만큼 참다가 안 되면 얘기했다. 공용 구역은 암묵적인 룰로 돌아갔다. 서태웅은 자는 시간의 소음을 제외하면 무던한 편이어서 대충 다 참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윤대협이 제시한 룰에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은 없었다. 특히 개인 공간과 공용 구역이 명확히 나뉘는 만큼 가사 책임 분배는 확실한 편이 좋았다. 어쨌든 공동 생활에서 누군가가 이런 걸 열심히 챙기면 나머지는 편하면 편했지 손해볼 건 없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방금 씻고 나와도 희한한 냄새가 나는 온갖 종류의 인종과 함께 일 년을 꽉 채우고 온 서태웅은 룸메이트로서 스스로의 무난함에 자신이 있었다. 뭐든지 가져와라. 지키면 그만이지.

시간을 들여 빽빽한 종이를 다 읽은 서태웅이 종이를 식탁에 척. 내려놓고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거렸을 때. 미소 짓는 윤대협의 눈에는 분명한 안도가 스쳐 지나갔다.

그때 서태웅은 알았다. 그렇게 세세한 규칙을 잔뜩 제안하며, 천하의 윤대협도 약간은 긴장했던 것이다. 어떤 결과를 짐작한 긴장인지 서태웅은 모른다. 질색하며 거절하거나, 읽지도 않고 대충 알겠다고 하거나, 그냥 지금부터 다른 룸메이트 알아보라고 하거나…

어쨌든 서태웅에겐 별거 아니었다.

실제로 짧은 대학 생활을 거쳐 프로 생활에 이르기까지. 윤대협과 서태웅은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사소한 일로도. 다른 사람들에겐 이게 신문 기사로 낼 정도로 놀라운 일인지 모르겠지만. 윤대협은 상식적인 룰을 요구했고 서태웅은 불평 없이 따랐다. 룰이라 해 봤자 그냥 자연스럽게 살다 보면 어길 일이 없는 상식적인 요구였다. 어쩌다 사정이 생겨 쓰레기 당번을 놓치면 재깍 사과했고 쿨하게 용서했다. 서로 한 번씩 실수하면 퉁치고 넘어가기도 하고. 서태웅에겐 숨 쉬듯이 편했다.

어느 정도 서로의 생활이 안정된 후에야 문득 서태웅은 그 이유를 알았다. 윤대협이 원한 건. 개인적인 영역에 대한 철저한 상호 존중이었다. 괜히 예의상 누군가가 식사를 기다리거나, 큰맘 먹고 사 놓은 식재료를 아무 생각 없이 먹어 버리거나, 문을 열었는데 모르는 사람이 자기 집에 들어와 있는 순간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서태웅은 미국에서 전부 겪어 본 일이다. 그래서 설령 그런 일이 발생한대도 잠깐 당황할 뿐 금방 수습된다는 걸 알지만. 윤대협은 그저 예측할 수 있는 불편을 예방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렵지 않았다. 그냥 상대방의 영역을 존중하면 되는 것이고. 그만큼의 존중을 받으면 된다.

숨을 쉬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는 건 아니다.

예를 들면 인사. 훈련하다 보면 윤대협은 대체로 서태웅보다 귀가가 늦었다. 아마 서태웅이 새벽 운동을 선호하고 윤대협은 저녁 운동을 선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윤대협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 서태웅은 언제나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짧게 손을 들어 올렸다.

“헤이.”

거실이나 주방에 있을 때는 물론, 자신의 방에 있다가도 문을 열고 나왔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러 가는 길을 겸했다. 심지어 화장실이나 욕실에 있다가도 볼일을 보고 나오면 윤대협의 열린 방문 앞을 지나가며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헤이. 왔냐.”

윤대협은 그때마다 눈을 접어 환히 웃었다.

“어. 다녀왔어.”

아주 기뻐 보였다. 서태웅은 윤대협이 인사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버릇이라기에도 묘한 그것은 사실 역으로 윤대협 때문에 붙은 것이다. 드물게 서태웅이 친구들과의 술 약속이나 (마시지 않아도 빠지진 않았다) 소개받은 여자와의 데이트와 같은 (큰 하자가 없으면 소개자를 생각해 거절하지 않고 만났다) 사회적인 이벤트로 인해 윤대협보다 집에 늦게 들어올 때, 윤대협은 반드시 얼굴을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태웅이 왔네. 잘 다녀왔어?”

규칙으로 정한 적은 없다. 하지만 윤대협의 인사가 너무나 규칙적이었기 때문에. 서태웅에게도 비슷한 버릇이 붙어 버렸다. 집에 오자마자 윤대협의 인사가 들리지 않으면 이리저리 은근슬쩍 기웃대며 윤대협을 찾게 된 것이다. 거실에 윤대협이 안 보이면 주방이나 윤대협 방 쪽으로 스윽 발길을 옮겼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여 보기도 했다.

곧 윤대협은 방문을 닫아 놓지만 않으면 딱히 자기 방에서 나올 필요 없이 서태웅에게 귀가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윤대협도 그걸 눈치챈 것 같았다. 열린 방문 뒤로 방금 귀가한 서태웅이 고개를 불쑥 내밀면 기다렸다는 듯이 의자를 빙글 돌려 “다녀왔어?”라고 인사를 건네왔다. 그럴 때는 특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서부터였다. 서태웅 역시 윤대협이 귀가할 때 꼬박꼬박 인사를 챙기게 된 것은. 결코 룰은 아니다. 하지만 매너 정도는 될까. 반응도 좋고. 윤대협이 속셈 없이 웃을 때는 행운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어쩌면 서태웅이 개인적으로 지키는 징크스에 가까운지도. 윤대협에게도 그런 걸지도 모른다.

같이 보내는 시간은 딱히 정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윤대협이 거실 소파에 앉아 NBA 중계를 보고 있으면 소리를 듣고 방에서 나온 서태웅이 자연스럽게 옆에 앉았다. 코멘트나 분석을 주고받다 보면 끝날 때까지 밥 먹는 것도 잊었다. 중계가 끝나면 앞다투어 꼬르륵 소리가 거하게 들렸고. 네가 먼저네, 네가 더 소리가 크네, 실없이 시비를 털며 외식하러 나갔다.

한가한 날. 이 집의 최고 장점이자 동거를 결심했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단지 내 야외 농구 코트에서 서태웅이 농구공을 튀기고 있으면. 분명 아까까지 자기 방에 있던 윤대협이 슬쩍 내려와 어느새 스틸해 갔다. 아무 말 없이도 일 대 일이 시작되었고. 질릴 때까지 농구했다. 승패는 그때 그때 달랐다. 지는 사람이 밥을 샀다. 서태웅은 칼같이 스코어를 세는 편이었고 윤대협은 귀찮으면 자기가 진 걸로 치겠다고 했다. 졌으면 진 거지 진 걸로 치는 건 뭐지? 서태웅은 그런 점에 발끈하는 만큼 더욱 열심히 점수를 셌다.

어차피 둘은 생활 패턴이 비슷했다. 학교. 운동. 학교. 운동. 서태웅이 새벽 훈련을 선호하고 윤대협이 저녁 훈련을 선호하고, 서태웅은 적은 풀에서 최대한 사람을 만나지만 윤대협은 서태웅보다 아는 사람이 훨씬 많은데도 최대한 혼자 지낸다는 정도의 차이만 빼면.

또 하나. 윤대협과 서태웅의 차이점. 의외로 윤대협은 간식을 좋아한다. 특히 새로 나온 희한한 맛의 과자를 조금씩 맛보기를 좋아했다. 처음에는 한 개씩 사서 냉장고나 방에 두고 먹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꼭 두 개씩 사서 하나를 서태웅에게 건네기 시작했다. 좀 이상한 맛이어도 서태웅은 왠지 거절하면 지는 느낌에 절대 빼지 않고 꼭 한입씩 받아먹었다. 어떨 땐 의외로 괜찮았고. 어떨 땐 진짜 욕하고 싶었다. 가타부타 입을 열지 않아도 윤대협은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다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얼굴에 다 쓰여 있다면서.

서태웅이 윤대협이 주는 간식을 슬슬 경계하기 시작할 때쯤엔 반응이 좋은 것만 두 개씩 사서 말없이 냉장고 공용 구역에 채워 두었다. 따로 생색을 내거나 자기가 사둔 것 먹었느냐고 확인 한번 하지 않고. 윤대협은 가끔 그런 식으로 고요하게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한다. 서태웅은 좋다고 느꼈다.

그래서 자신도 비슷한 호의를 표현하려고 했다. 하지만 몸 관리를 하느라 스스로 간식을 안 산 지 너무 오래돼서 뭘 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식량으로 사 두는 닭가슴살이나 단백질 바나 프로틴 셰이크를 전부 두 개씩 사 봤다. 절반은 냉장고 공용 공간에 넣어 뒀다. 입맛대로 먹어보고 맘에 들면 얘기하겠지 싶었다.

서태웅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런 종류의 식량은 한 번 시킬 때 많이 시켜야 이득이다. 모든 수량을 더블로 쟁이면? 냉장고 공용 공간은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윤대협이 무심코 냉장고를 열었다가 거의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키는 것을 서태웅은 분명히 들었다. 곧이어 숨을 죽이고 웃음을 참는 소리. 못 들은 척했다. 윤대협은 하나씩 잘 먹어 보는 것 같았고 가끔 뭐가 맛있다더라는 얘기도 했다. 그러면 다음엔 그런 것만 두 개씩 시켰다. 새로운 걸 사 볼 때는 여전히 버릇처럼 수량을 하나씩 추가했다.

정말로 버릇이 되어 버려서 곤란한 적도 있었다. 인터넷으로 오랜만에 옷을 사다 숨 쉬듯이 두 개를 주문해 버린 것이다…

건조대에 나란히 걸린 완전히 똑같은 옷 두 벌을 발견한 윤대협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윤대협은 가끔 그런 식으로 날카로운 데가 있어 사람을 짜증 나게 했다.

“왜 같은 옷을 두 개 샀어?”

왠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침묵 후에 서태웅은 퉁명스럽게 진실을 밝혔다.

“버릇돼서.”

윤대협은 무슨 버릇이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렇게까지 짜증 나는 놈은 아니다. 그러니까 같이 살 수 있는 거겠지. 하지만 능글맞게 웃으면서 다 마른 옷 한 벌을 냉큼 집어 가 버리긴 했다.

“그럼 이건 내 거네?”

서태웅은 딱히 반박을 찾지 못했다. 그런 의미로 버릇이 잘못 든 게 맞았다. 억울했지만 단순 변심 환불이 귀찮아 그냥 이틀씩 돌려 입자 싶어 세탁까지 한 마당에. 주인 찾아 가는 게 순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음부터는 절대 실수하지 말아야지. 서태웅은 속으로 이를 갈았고 그렇게 무심코 두 개 시키는 버릇은 고쳤다. 그래도 윤대협이 맛있다고 했던 단백질 바는 두 개씩 시켰다.

프로가 된 후로 공용 공간의 집안일과 세탁은 외주화했다. 학생 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도의 훈련 및 원정 일정을 따라가려면 다른 옵션이 없었다. 부모님께 생활비와 용돈을 받으며 절약했던 대학 시절과는 다르다. 둘 다 기록적인 계약금을 받았으니 자금은 충분했다.

일정 자체는 더 비슷해졌다. 팀은 다르지만 다행히 둘 다 수도권 팀이다. 각자 등하굣길 편도 15분 정도였던 대학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적당히 다닐 만한 거리다. 서태웅은 주로 택시를 탔고 가끔 근처 사는 선배 차를 얻어 타고 귀가했다. 윤대협은 대학생 때 따 놓은 면허가 있어 차를 뽑았다. 운 좋게 둘 다 홈 경기, 즉 수도권 라이벌의 홈 더비가 있는 날에는 윤대협이 서태웅을 태우고 집으로 갔다. 서태웅은 사양 없이 타는 대신 가끔 공과금과 관리비와 집세 몫에 주유비를 보태서 입금했다.

프로가 되고 나서 몇 가지 가구가 추가됐다. 학생 시절부터 공용 가구는 각자 가져온 사람이 소유권을 유지했다. 그런 룰이다. 예를 들어 세탁기는 윤대협이, 냉장고는 서태웅이 가져왔다. 돈이 생기고 나서 윤대협은 스타일러를 사서 현관 옆에 두었고 서태웅은 건조기를 새로 샀다.

윤대협은 소파를 바꿨다. 원래 소파는 윤대협, TV는 서태웅의 것이다.

하지만 윤대협이 소파를 바꾼 이유는 서태웅이다.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서태웅은 알았다.

왜냐하면 서태웅이 소파에 누워 낮잠 자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다리의 절반 정도를 팔걸이 너머로 걸친 채로. 그런데 눈을 뜰 때마다. 종아리 아래에 적당한 무언가와 쿠션이 받쳐져 있었다. 어느새 발은 머리보다 조금 위에. 윤대협은 한 번도 자기가 했다고 말한 적 없고 서태웅도 물어본 적 없지만 어차피 이 집에 서태웅을 제외하면 윤대협밖에 없다. 윤대협은 가끔 그런 식으로 고요하게 제멋대로다.

계약금을 받자마자 윤대협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파를 바꿨다. 심지어 서태웅한테 같이 소파 고르러 가자고 했다. 8인 가족이 나란히 앉고도 남을 거대한 가죽 소파. 서태웅이 직접 누워 보고 만족한 걸 확인한 뒤 윤대협은 직원에게 말했다.

“이걸로 주세요.”

그래서 서태웅은 윤대협이 소파를 바꾼 이유가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

프로가 된 후로 서태웅의 침실에는 턴테이블과 우퍼가 생겼다. 계약금으로 산 것이다. 음악을 들을 때 서태웅은 방문을 꼭 닫는다. 윤대협은 시끄러운 걸 안 좋아한다. 그런 점에서 서태웅과 닮았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방에 무엇이 늘어났는지 모른다. 들어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용건이 있으면 노크를 했다. 가끔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낼 때도 있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방 안에 있는 물건 중 윤대협 외에는 전혀 용건이 없었다.

윤대협은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와인이다. 어디서 배웠는지 가끔 휴식일 전에 아일랜드 테이블에서 홀짝홀짝 한두 잔씩 마시곤 했다. 서태웅은 술자리는 안 빼지만 술은 한 방울도 안 마신다. 윤대협은 술자리는 잘 안 가면서 집에서 혼자 한 잔씩 마신다. 묘하게 닮았지만 전혀 안 닮았다. 언제나 그랬다.

한번은 서태웅이 윤대협이 칠링한다고 냉장고에 넣어 둔 와인병을 깼다.

서태웅은 무릎 꿇고 냉장고 아래쪽의 과일 칸을 뒤지던 자세 그대로 얼음처럼 굳었다. 이미 일은 화려하게 저질러졌다. 뭐가 어떻게 부딪혔는지, 지금까지 조금씩 적재된 충격이 임계선을 넘은 건지, 깔끔하게 사선으로 두 동강 난 와인병에서 루비처럼 영롱한 붉은 액체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하얀 냉장고며 음식물을 전부 더럽힌 상태였다.

충격적으로 엉망진창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서태웅의 머릿속에는 와인 한 잔 마신 뒤 식탁에 턱을 괴고 있던 윤대협의 편안한 뒷모습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윤대협이 사 두는 와인은 언제나 가격대가 있는 편이다. 본인이 그렇게 말했다. 자주 마시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허락할 때나 특별히 힘든 경기를 끝내고 릴랙싱이 필요할 때. 딱 한두 잔만 마시고 고이 넣어 두는 걸 누구보다 서태웅이 잘 알았다.

내부 기체에 노출돼 차갑게 식은 서태웅의 귓가에 빨리 문을 닫으라는 냉장고의 비명이 삑삑 울렸다. 서태웅은 일단 천천히 문을 닫았다. 지금은 그 정도가 침착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됐다. 무엇부터 어떻게 치워야 하는지 감이 안 왔다. 서태웅은 무던하긴 해도 별로 부주의한 성격은 아니다. 그래서 윤대협과 살기 시작한 이래 살림 부분에서 이 정도의 사고를 친 적이 없었다.

충격이 사라져야 뭔가 방안이 떠오를 것 같았다. 서태웅은 일단 영롱한 루비색 와인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싱크대에 담근 채 멍 때렸다. 잘 빠진 글라스에 와인병을 기울이던 윤대협의 뒷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좀 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서태웅은 일단 소파로 퇴각했다. 쿠션을 베고 다리를 쭉 뻗은 다음, 좀 더 편안해진 마음으로 제대로 된 대책을 생각할 계획이었는데.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눈을 떴을 때 서태웅이 가장 먼저 느낀 건 뒷덜미가 철렁한 느낌이었다. 덴 듯이 벌떡 일어난 순간. 윤대협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소파 앞에 앉아 있던 윤대협이 고개를 돌렸다. 꼭 평소처럼 다정했다. 기껏 8인 가족이 전부 앉을 정도로 큰 소파를 사 놓고 윤대협은 종종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앉아 있곤 했다.

윤대협의 얼굴에는 미소뿐이었다. 짜증도 책망도 놀림도 없었다. 서태웅은 어안이 벙벙했다. 꿈은 아닌 것 같은데. 확인할 방법은 한 가지뿐.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깨끗했다. 과일 칸을 열었다. 와인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삑삑 문 닫으라고 냉장고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서태웅은 현실로 돌아왔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소파에 기대앉은 윤대협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오래 자서 잠긴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와인…”

“그럴 수도 있지.”

윤대협은 자세히 묻지도 않고 그렇게만 말했다.

“안 다쳤어?”

그게 유일한 질문이었다. 서태웅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윤대협이 손을 까딱인다. 주춤주춤 소파에 앉자 서태웅의 양손을 가져가서 제 눈으로 꼼꼼하게 확인을 했다. 흠집 하나 없는 걸 보고 만족스럽게 돌려준다. 리모컨으로 TV를 켠다. 맨날 보는 스포츠 채널에서 마침 NBA 하이라이트가 나온다.

“오. 지난주 원정이라 못 봤는데. 나이스.”

그게 다였다. 서태웅은 며칠이 지나도록 깨진 와인병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가끔 윤대협은 그런 식으로 고요하게 서태웅을 감동하게 했다. 그건 배려라든가 감사라든가 관대함 같은 단편적인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서태웅의 정서는 무언가의 깊은 움직임을 느꼈다. 그러니 글자 그대로 보자면 ‘감동’에 가장 가까웠다.

단순한 서태웅은 윤대협에게 보답하고 싶어졌다. 강렬하게. 하지만 그 와인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할 재간은 없었다. 고심 끝에 새로운 것을 찾기로 결정. 열심히 검색하고 주변에 물어 가며 조금 비싸더라도 호불호 없이 수준 높고 괜찮은 와인을 추천받았다.

바쁜 원정 중에 짬짬이 해내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급기야 한 번도 게시물을 올린 적 없는 연락용 SNS까지 동원했다. 서태웅이 술 안 마시는 건 워낙 잘 알려진 사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꼭 구매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선물로 주는 건 금지라고 못 박은 전제로 수배문을 업로드. 미국 친구들은 물론 팬들까지 우르르 온갖 와인을 추천해 줬다. 가장 겹치는 답변을 모아 신중하게 두어 개를 선정했다. 그 다음엔 구할 방법을 알아보았다. 이건 검색으로 쉽게 해결됐다. 다행히 그렇게 복잡하진 않았다.

원정에서 돌아온 윤대협은 아일랜드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웬 와인 한 병을 발견했다.

“헤이.”

거실에 앉아 TV를 보던 서태웅이 언제나처럼 짧게 인사를 건넨다.

“어. 웬 와인이야?”

서태웅은 술자리는 안 빼지만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다. 윤대협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당연히 이 집의 모든 와인은 윤대협의 몫이다. 그럼에도 자연스럽게 물어보는 거겠지. 서태웅은 짐짓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먹으라고.”

하지만 눈으로는 주의 깊게 윤대협의 반응을 살폈다. 윤대협은 신기하다는 듯이 와인을 가져다 라벨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가격표를 뗐던가 안 뗐던가… 서태웅이 가늠하는 사이 윤대협의 눈이 커졌다. 라벨만 봐도 아는 종류인가. 하지만 놀란 표정은 금방 사라진다. 능글맞게 웃으면서 헛소리를 한다.

“선물? 무슨 일로? 지난번 라운드에 져준 보답?”

“죽는다.”

서태웅이 으르렁거리자 소리 내서 웃는다. 제법 기분이 좋은가 보다. 속셈 없이 웃는 윤대협의 얼굴을 볼 때마다 서태웅은 징크스처럼 행운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고마워. 잘 마실게. 바로 맛 좀 보고 자야겠다.”

외투만 벗고 바로 글라스와 코르크 스크루를 꺼낸다. 잘 들어 보면 조그맣게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다. 서태웅은 어깨에서 힘을 쭉 빼고 소파에 완전히 드러누웠다. 대성공이군. 지금 윤대협보다 기분이 좋은 단 한 명의 인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서태웅이다. 윤대협은 잘 모르겠지만.

서태웅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꿈도 없이 잠들었다. 윤대협은 부모님이 아니라서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잔소리하지 않는다. 자신이 존중받는 만큼, 어떨 땐 그보다 더 서태웅을 존중한다.

윤대협은 그런 식으로 고요하게 곁에 있다. 서태웅은 좋다고 느꼈다. 언제나.

그게 윤대협이 스물둘, 서태웅이 스물인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