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암의 꽃 5
불면의이쑤신
뾰족이가 보송이의 희멀건 목덜미를 할탓다. 챱. 챱. 소리가 낫따. 뾰족이는 꼭 보더콜리 같앗다...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보송이인지 흰둥이인지가 말해따... "이러지마 뾰족아... 나는 팬이고 너는 아이돌이자나." "우움.." "조리가 빤니" "나눈 보송이가 조은데...ㅜ나도 보송이 팬 하까?" 보송이는 그의 본분을 저버린 발언에 화가 나 뾰족이를 뚜까팻다... 뾰족이는 그렇게 보송이의 본명을 알 수 잇엇다. "이름 이뿌다 보송아" "피해자분 조서 아직 안 쓰셨어요? " 수갑을 찬 보송이는 그냥 개빡쳣다. 뾰족이는 조서를 쓰며 책상 너머로 보송이의 손목을 바라봤다. 보송이 쿨톤이구나.
미친
아
제가지금뭘본거죠
뾰족이 시발
뾰족이와 보송이...
뾰X보
시발 웃다가 액정에 침뱉음
윤대협 최애 고인물 8인의 카톡방이 순식간에 ㅋ으로 가득 찼다. 스크롤을 내려도 내려도 뚱뚱한 말풍선을 꽉 채운 ㅋ의 끝나지 않는 향연.
윤대협은 데뷔 초부터 뜰 때까지 앞머리를 길러서 거의 수직으로 쫙 올려 세운 완깐을 고수했기 때문에 그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헤어인지 덮대협 활동기에도 오프에는 그때처럼 머리를 올린 셀카나 라방이 많았다. 그래서 공식 굿즈도 직접 그린 뾰족 머리 스마일을 아무 데나 갖다 붙여서 팔았다. 스티커, 배지, 이름표, 패턴 엽서, 안경닦이까지... 팬들은 그냥 호구처럼 다 샀다.
아무튼 그런 맥락이 깔려 있다 보니. 뾰족이라는 서방명이나 별명이 흥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윤대협 팬이면 누구나 그렇게만 써도 얼굴을 연상할 수 있었다. 금지된 일반인 알페스, 심지어 트친 알페스에 빠져 버린 한 여성은 데뷔 때부터 댑왼 포타를 책임져 온 알페서답게 '보송이'라는 팬픽 주인공 사상 최악의 이름과 딱 어울릴 만한 윤대협의 새 별명을 지어내 버린 것이다. 고맥락을 이해하고 웃어 주는 데다가 최애X트친 알페스를 보고도 수갑 찰 일 없도록 참고 견뎌주는 이 세상 단 7명의 독자 앞에서 댑보러 아니 뾰보러...는 아낌없이 창작의 재능을 발휘했다.
하 너무 웃어서 얼굴 땡김 경락이 따로 없네
괄사 왜함 이 카톡방이 있는데
보송이 있는 카톡방이랑 헷갈리기만 해... 사회적 자살이야
어 나 안 그래도 그 카톡방 배경화면 바꿔놨다 시뻘건 궁서체로 여기다아무것도쓰지마 도배했어
그래 차라리 회사 카톡에 올리는 게 데미지가 덜할 듯
보송이 착하게 살았는데 미안하다... 내가 남성 대상화에 좀 미쳐가지고
언제부터 당사자한테 들켜도 될 창작을 하셨다고 그러세요
그건 또 그렇네
맞아 양심보다 꼴림을 택한 당신을 응원합니다
어쩔 수 없어 누가 잘생기래? 우린 잘생긴 놈들을 서로 엮으려고 태어났어 그냥 그런 유전자
보송이 자기소개서에 인생 최대 시련으로 우리를 써라 "5년 솔플하다 간신히 덕친 생겼는데 저를 가지고 제 최애랑 알페스를 했어요" 어라? 시련이 아니고 포상인듯
님들이 보송이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억까도 억빠도 아닌 그저 한 마리 짐승
투머치러브윌킬보송
아~ 어디서 댑보 떡밥 또 안 떨어지나
역생카 핵폭탄 얼마나 됐다고 또 달래 욕심쟁이네
그래 워터밤도 고작 6개월 전이야
닥쳐 손끝 하나 안 닿았는데 우연히 서 있는 자리 순서가 좀 달라졌다 따위의 미미한 떡밥으로 몇 년을 버티던 알거지 신세는 끝났어 나는 이제 케이크만 먹고 자란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쏟아지는 떡밥에 배가 처 불러가지고 착즙기가 퇴화되어 버렸단 말이야 (댑보로 가득한 에르메스 가방을 집어 던지며 울다)
하긴 최애가 이 정도로 적극 말아주는 알페스 맛은 처음이라 전두엽 살살 녹긴 해
돌이 팬한테 줄 수 있는 나페스 떡밥의 끝판왕이라 봐야지
맞음 솔직히 이 이상 뭐가 나올 수가 있단 말임
공교롭게도 바로 그 시각에 실시간으로 그 이상의 뭐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중이었다. 그들이 없는 R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윤대협은 사옥 투어 내내 서태웅에게 손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묵직한 유리문과 자동문 버튼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기다란 팔뚝으로 누르면서 앞장섰다. 여기가 식당이야. 이따 밥 먹고 가. 맛있어. 여기는 녹음실. 밖에서만 볼 수 있어. 여기부터 세 개 층은 일하시는 곳이니까 지나갈게. 스튜디오는 지금 누가 뭐 찍나보다.
자컨에 자주 나와 익숙한 곳도 있고 난생처음 보는 곳도 있다. 눈이 휘둥그레 뜨고 프레리독처럼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서태웅을 보면서 윤대협은 나직하게 웃었다.
서태웅은 걸어서 자컨 속으로를 찍고 있는 듯한 기분에 정신이 없어서 잘 눈치채지 못했지만 주말임에도 사옥에는 일하러 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지나가다 윤대협을 만난 직원들은 모두 반갑게 인사를 했다. 여어 대협아. 어쩐 일이냐. 스케줄 없니.
그리고 마스크를 꼈어도 알 수 있는 다소 지성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구석에서 계속 방영되는 자컨 영상 속에 초롱초롱 빨려 들어가고 있는 서태웅을 흘끗 보고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치뜨거나 인중을 늘리면서 입을 다물었다. 아하. 지금 그 소문의 미션에 착수하였구나 대협아... 힘내라...
윤대협은 서태웅을 데리고 보컬연습실 층을 지나 댄스연습실 층에 도착했다. 한 층 전체가 연습실이다. 모든 방에 거울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튀어나온 제법 넓은 헬스장에 운동기구로 꽉 찬 걸 보고 서태웅의 눈이 한 번 더 커졌다. 이래서 다들 몸이 좋구만.
연습생 몇 명이 쓰고 있는 연습실 몇 개를 지난 후 윤대협은 가장 구석에 있는 문을 열었다. 다섯이 모두 들어와 연습하기엔 다소 좁은 공간이었다. 서태웅은 여기가 어딘지 알았다. 윤대협이 혼자서 브이라이브 틀어 놓고 커버댄스를 연습하던 방이랑 똑같이 생겼다.
윤대협이 구석에 놓여 있던 접이식 의자 위에서 핸드폰 스탠드를 치우고 한 손으로 의자를 가볍게 들어 서태웅 앞에 내려놨다. 흐르는 듯한 제스처와 시선과 친절한 미소. 일체화된 바디랭귀지로 딱 한 가지 메시지만 발화했다. 앉으라고.
서태웅은 아주 어색하게 무릎과 발을 가지런히 모아서 앉았다. 윤대협은 거울을 등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 쪽 무릎만 세우고 걸터앉은 자세. 윤대협이 가장 좋아하는 앉는 방법이다. 서태웅은 윤대협에 대해 그런 작은 사실들을 줄줄 꿰고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이 순간 무엇이 벌어질지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는 하나도 몰랐다. 왜 자신을 여기로 데려왔는지. 사옥 구경은 끝났는지. 집에 가도 되는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벽 하나를 천장부터 바닥까지 도배한 전면 거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비치는 건 서태웅뿐이다. 윤대협은 거울에 기대앉아 있다. 거울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서태웅만 윤대협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거울플 꾸금 소재를 좋아하는 댑보러가 봤으면 흥분한 나머지 진짜로 코피를 쏟을 수도 있는 환경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 리가 없는 서태웅은 제 앞에 앉은 윤대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반 발만 더 내밀면 신발 끝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 윤대협이 있다.
진짜 윤대협. 화면 속에 있는 것도 무대 위에 있는 것도 아닌. 자신보다 살짝 낮은 눈높이에. 뒤통수를 거울에 툭 기대고 편안히 쉬는 사람처럼 미소를 띤 채 눈을 감고 있는 윤대협.
사실 아까부터 현실감이 별로 없다. 서태웅은 R엔터테인먼트 사옥 바닥이 어떤 질감인지 잘 몰랐다. 상식적으로 딱딱해야 마땅한데 그런 기억이 없다. 발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반 무중력 시스템이 바닥에 깔려 있다고 어떤 놈이 사기를 쳐도 아하 어쩐지 그래서... 따위로 저항 없이 수긍할 것 같은 심경이다.
왜냐하면 윤대협이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가까웠다. 잘 뻗은 콧잔등의 모공을 셀 수 있을 정도로. 모공 비슷한 것조차 하나도 없었지만.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놀랍도록 하얀 피부가 너무 가까웠다. 그저 그 생각뿐이었다. 너무 가깝다. 그래서 목소리도 너무 잘 들리고. 계속 들리고. 저기를 보라면서 설명을 해 주면 거긴 또 자컨에 나오던 풍경이 현실 그대로 튀어나와 있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코앞에 있는 윤대협을 똑바로 보기가 너무 마음이 힘들어서 더 열심히 사옥 구석구석을 눈 빠지도록 쳐다봤다. 인류가 왜 오랫동안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생각해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숨을 쉬기가 답답했다. 그래도 얼굴이 빨개져 있을까 봐 끝까지 마스크는 벗지 않았다.
"마스크 안 답답해?"
지금까진 그랬다. 윤대협은 봐주는 법이 없다. 서태웅은 마지막 저항으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윤대협이 세운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목소리가 작으신 편이라 잘 안 들리는데. 벗어주면 안 되나."
서태웅의 목소리가 작은 건 팩트였다. 회사에서도 잘 지적당하는 약점이었다.
서태웅은 순순히 마스크를 벗었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무표정을 한참 쳐다봤다. 커다란 눈을 예쁘게 뜨고 입가에는 빙그레 미소를 띤 채로. 반갑다는 듯이.
서태웅은 먼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얌전히 그 시선을 견디고 있었다. 윤대협과 눈을 맞추지 않으면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멍청한 얼굴을 봐야 한다. 눈을 둘 곳이 없다.
다소 산만하던 시선이 반 발짝만 더 뻗으면 윤대협의 운동화 끝에 맞닿을 것 같은 제 발끝에 정착했을 때. 윤대협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태웅 씨가 여기 있다니 너무 신기하네."
내가 할 말인데. 서태웅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윤대협의 감격이 쑥스러워서 목소리를 못 내고 그냥 대충 느릿느릿 끄덕이고 말았다.
훔쳐보듯 곁눈에 걸리는 윤대협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윤대협이 팬을 보는 눈빛이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해 주는 윤대협. 갑자기 최애 앞에 있다는 게 뜬금없이 실감이 난 서태웅의 귀 아래부터 볼까지가 화악 달아올랐다. 정말 이상한 사람 같겠군. 갑자기 혼자 빨개지고.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오타쿠는 그런 존재다. 순식간에 치밀어 오르는 좋아하는 마음을 참을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사람...
윤대협이 양 무릎을 삼각형으로 안으면서 상체를 앞으로 훅 기울였다. 호기심이 넘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런다.
"나 궁금한 거 엄청 많은데. 물어봐도 돼요?"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서태웅은 목이 메는 느낌이었다. 한 번도 팬싸에 가 본 적 없는 서태웅은 지금 자신이 역팬싸와 정확히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 몰랐다.
"키 몇이야? 나랑 비슷하던데."
"백팔십... 크흠... 칠이요."
너무 오랫동안 말을 안 해서 걸걸한 가래 끓는 소리가 튀어나와 다급하게 헛기침으로 정리했다. 다시 얼굴이 빨개진다. 쪽팔려서. 그러거나 말거나 윤대협은 종알종알 말을 잇는다.
"역시. 비슷할 거 같더라고. 언제 컸어? 나는 중학생 때 키야. 고1 때 부상 이후로는 안 컸어."
알아.
"음... 나도 중학교."
"엄청 아프지. 너무 빨리 자라서 무릎 양쪽이랑 허벅지에 가로로 살 터진 자국 아직도 있어. 아무리 관리받아도 안 없어지더라. 반바지나 수영복 입고 뭐 찍으면 컨실러 발라야 되잖아. 더울 때 대중교통 타면 정수리 냄새 땜에 너무 힘들지 않아? 아참 차 가져왔어? 주차 등록해 줄게."
"지하철 탔는데..."
"그럼 이따 데려다줄게."
"괜찮..."
윤대협이 운동화를 정확히 반 발짝 앞으로 뻗어서 서태웅의 운동화 앞코를 톡 건드렸다. 서태웅은 굳어버리는 바람에 말을 멈췄다. 거절을 거절하는 윤대협의 살인미소.
"타고 가."
장난꾸러기처럼 웃는다.
"아님 어디 들러서 놀다 갈까?"
뭔 소린지 모르겠다. 서태웅은 어지러웠다. 집에 가고 싶어졌다.
윤대협은 계속 질문을 퍼붓는다.
"트위터는 안 해?"
"..."
"오케이. 요건 패스. 안경이랑 마스크는 왜 쓰는 건지도 궁금했어. 처음에는 안 썼는데."
"그냥 얼굴 가리려고..."
"아하. 너무 잘생겨서 피곤하구나."
서태웅이 입을 다물고 티벳여우 같은 표정을 지었다. 윤대협이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놀려먹고 있는 건가? 이 세상 다른 누구도 아닌 윤대협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조롱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비꼬는 태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외려 윤대협은 격의 없는 동시에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가령 뒷머리를 만지면서 이런 말을 할 때.
"음. 이런 말은 좀 그런가?"
부드럽게 눈을 맞추면서 부탁한다.
"무대 볼 때 태웅 씨 얼굴은 어차피 나만 보는데. 그때는 벗어주면 안 돼요? 얼굴 보이는 게 좋은데... 부담스럽지 않으면."
이마를 짚고 싶다. 어른들에게 절대로 거절당하지 않는 부탁 방법을 배운 한창 예쁠 나이의 애교쟁이 막내 같다. 어떻게 안 된다고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선택지를 앗아가는 비열한 최애를 향해 서태웅은 패배한 심경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야호 신난다. 윤대협은 속도 모르고 상큼하게 소리 내어 쾌재나 불렀다.
두 손을 꽃받침처럼 받치고 또 묻는다.
"여자 친구 있어?"
"아니요."
있으면 4년 내내 너 쫓아다닐 수 있겠냐고. 서태웅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애인 같은 거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주변에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잉꼬 커플을 보면 직장 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서태웅이 직장 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건 윤대협이었다. 화면 속의 윤대협. 움짤 속의 윤대협. 무대 위의 찰나의 윤대협. 그리고 지금은 눈앞의 윤대협...
"나 때문에?"
저런 소리나 하는 윤대협...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에. 서태웅은 눈썹으로 물음표 모양을 만들면서도 마지못해 끄덕여 주긴 했다. 야호 신난다. 윤대협은 또 상큼한 쾌재를 불렀다. 내가 모솔인 게 뭐가 신나지? 서태웅은 충동적으로 불쑥 말했다.
"윤대협... 씨는."
"응?"
"있나요. 여자 친구."
윤대협이 오늘 들어 처음으로 정지화면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아차. 서태웅은 속이 철렁했다. 지금 내가 다소 진상 팬 같은 말을 했나. 너는 아이돌이니까 절대 연애할 생각도 하지 말고 성실하게 웃음 팔고 유사 팔라고 대놓고 본인 앞에서 강요하는 사람 같았나. 그건 아니고 그냥 순수하게 질문을 되돌려 줬을 뿐인데...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은데... 있으면 그렇구나 하고 무덤까지 비밀로 할 건데... 얼떨결에 아이돌에게 가장 예민한 질문을 해버렸다는 걸 깨달은 서태웅은 수습할 방법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손을 내저어 질문을 취소하려 했으나 윤대협이 한 발 재빨랐다. 심플하게 대답한다.
"없어. 있었던 적도. 데뷔한 후에는."
"아 네. 그냥 저기 먼저 물어보시니까. 별로 그렇게 저는 참견할 생각은."
"괜찮아. 팬분들은 대체로 궁금해하시니까. 서태웅 씨도 그런 줄은 몰랐는데. 같은 남자라서."
"안 궁금한데요."
딱딱한 단답형 문장에 윤대협이 또 장난꾸러기처럼 웃는다.
"근데 왜 물어봐?"
서태웅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억울한 진실을 어금니에 꽉 깨문 채로. 니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윤대협은 어깨를 으쓱 털면서 안 물어본 것까지 주절주절 말해 준다. 별것도 아니라는 태도로.
"뭐 솔직히 대시는 받아봤는데. 데뷔했을 때는 연애할 분위기가 아니었고. 회사 다 비상이었으니까. 나도 좀 집중해서 달렸던 시기고. 2년 차 때부턴 감사하게 바빠져서 진짜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었고. 그냥 그런 제안이 있으면 아직 나 쓸만한가보다 안 죽었나보다~ 자존감엔 도움이 돼."
라디오에서 나오던 톤 좋은 목소리가 한 쪽 귀에서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가는 기분으로 서태웅은 경청하는 듯 하나도 안 듣고 있었다. 그다지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윤대협이 아주 솔직한 태도로 자신을 대해준다는 것만 피부에 닿는 듯이 느껴졌다.
그런 탓에 머릿속의 제어장치가 약간 느슨해진 서태웅은 불쑥 진심을 묻고 말았다.
"외롭지 않나요."
윤대협은 또 조용해졌다. 눈이 아주 약간 커지고.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가. 눈썹이 살짝 내려가면서 다시 웃는다. 나직하게 말한다.
"외로워."
서태웅은 기습당했다. 부정맥이 의심되는 증상에. 갑작스럽게 심장이 쪼그라드는 아픔. 기관지까지 잡아당기는지 목이 메인다. 왜 이러지. 오늘은 내장이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는 날인가보다.
서태웅의 심장을 쏴 놓고 윤대협은 웃지도 울지도 않는 차분한 눈동자로 담담하게 덧붙인다.
"애인은 사귄 적 없어서 그렇게 없다고 부족한지 모르겠어. 근데 친구가 없어. 그래서 외로워."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손목을 붙잡는 듯 따뜻한 체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런다.
"서태웅 씨가 친구해 주면 안 되나."
서태웅은 아랫입술 바로 아래를 입 속으로 꼭 물었다. 그리고 눈을 잠깐 감았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심장박동을 열 번 들으면서 머리를 식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서태웅은 입술을 열어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에엥. 왜?"
윤대협이 만화 캐릭터처럼 울상을 짓는다. 서태웅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이돌과 팬은 친구가 될 수 없어. 친구 하려면 나 탈덕해야 돼."
윤대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그냥 하면 안 돼?"
"안 돼. 탈덕하기 싫어. 절대로."
윤대협은 갑자기 누가 깃털로 가슴을 간지럽힌 거 같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볼이 약간 발그레해진 것도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태웅은 눈썹을 엄하게 치켜올리며 아까부터 굉장히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그리고 왜 자꾸 반말하는 거지? 내가 형인데?"
"앗."
윤대협이 대리 출석 걸린 대학생 같은 표정으로 혓바닥을 살짝 깨물었다. 이 자식 알면서 그랬단 말이지. 하긴 소속사가 서태웅의 생년월일을 알고 있다면 윤대협도 간단히 알 수 있으리라. 애교 부려도 봐주지 않겠다고 서태웅은 생각했다. 아무리 최애라고 해도 여기는 동방예의지국이다. 꾹 쥔 주먹에 힘을 주고 서태웅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형이라고 해라."
윤대협은 해맑게 웃었다.
"네. 태웅이 형."
서태웅의 엄격함은 금방 녹아버렸다. 젠장. 귀여워...
윤대협이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아 맞다. 숙제가 있었지.
"그럼 아이돌도 하기 싫겠네?"
서태웅이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아이돌 하면 윤대협 탈덕해야 된다. 절대로 싫다.
"그래 알았어. 감독님이 물어보라고 해가지고... 아 감독님은 대표님 별명이야."
"알아. 자컨에 나왔어."
"맞다 그랬지."
서태웅은 고개를 갸웃했다. 간절했던 유명호의 통화와 달리 윤대협은 서태웅을 설득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외부 미팅이 있다던 뻥카와는 정반대로 대표실에 홀로 앉아 다리를 달달 떨며 윤대협만 철석같이 믿고 있는 유명호의 간절한 마음을 서태웅이 알 리가 없다. 표정만 보고도 서태웅의 의문을 짐작했는지 윤대협이 설명을 덧붙였다.
"감독님은 내가 하자고 하면 형이 할 줄 알았나 봐. 근데 나도 별로 이득이 없어서. 우리 그룹 새 멤버로 뽑겠다는 것도 아니고. 같은 회사 다른 그룹이면 활동기 겹치지 않는 이상 자주 볼 수도 없고."
윤대협이 다른 한쪽 발을 뻗어서 서태웅의 운동화 끝에 톡 붙였다. 두 발 끝을 맞댄 채로 씩 웃는다.
"나도 내 팬 탈덕하는 거 싫어. 특히 태웅이 형은 안 돼."
해사한 미소가 주변 사물보다 고해상도로 보인다. 서태웅은 이 감각을 잘 알았다. 세계의 명암과 채도가 왜곡되는 이상 현상. 뜨거운데 청량한 빛의 에너지가 몸을 채우고 순환하는. 처음 덕통사고가 났을 때의 그 느낌...
친구하자면서 탈덕문에 못질하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반칙이지...
차마 입 밖으로 말하지 못하고 서태웅은 맞붙은 두 발끝만 묵묵히 쳐다보았다.
윤대협은 진짜로 서태웅을 집으로 데려다줬다. 매니저도 없이 직접 운전해서. 승차감이 끝내주는 외제 차였는데 자동차에 관심 없는 서태웅은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냥 현실감을 잃어버리고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집 앞이었다.
창문을 내리고 커다란 손바닥 휘휘 젓던 윤대협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서태웅은 한참 동안 집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갑자기 온몸에서 기운이 빠졌다. 잠깐 아파트 앞 계단에 주저앉았다. 아주 오랫동안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것 같다. 근데 잠은 한숨도 못 잔 것 같은...
서태웅은 30분 정도 그 자리에 앉아있다가 집에 네발로 기듯이 들어갔다. 그대로 침대에 들어가서 다음 날 아침까지 죽은 듯이 꿀잠을 잤다. 이번에는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낮에 있었던 일은 꿈이 아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