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애프터 타임
불면의이쑤신
서태웅은 공원에 나와 있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짓을 하는 중이었다.
바로 농구 골대 백보드 밟고 서 있기.
이게 되네. 서태웅은 팔짱을 낀 채로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농구 골대 더하기 187cm는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저 멀리 바다가 평소보다 넓게 보인다. 전깃줄에 앉아 있던 갈매기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부리부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내가 보이는 건가? 서태웅도 마주 고개를 갸웃했다.
아래를 내려다본다. 공원 옆을 지나가는 학생들의 머리꼭지가 보인다. 삼삼오오 모여 하교 중이다. 왁자지껄. 아무도 자신을 보고 손가락질하지도 깜짝 놀라지도 갈매기처럼 고개를 갸웃거리지도 않는다.
아직 해가 높은 공원엔 기다란 농구 골대 그림자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다.
백보드를 밟고 선 남자의 그림자는 없다.
서태웅은 자신의 그림자의 부재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생각했다.
오. 나 유령이네.
서태웅은 죽었다.
눈을 떴을 때는 평범하게 자신의 방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기상 시간인 새벽 5시는커녕 오후가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휴일인가?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집 안이 이상하게 고요했다.
옷을 갈아입으려다 실패했다. 옷이 벗겨지지 않았다. 다른 옷을 입을 수도 없었다. 집어 올릴 수도 없었다. 발로 차면 대충 굴러가긴 하는데. 서태웅은 집안의 온갖 사물과 씨름하다 그냥 나왔다. 쿵쾅대며 1층으로 내려갔다.
가족들은 아무도 없었다.
거실 테이블에 못 보던 불단이 있었다. 거기 서태웅의 이름이 쓰인 위패가 있었다.
서태웅 1977. 1. 1. ~ 1992. 10. 8.
그래서 서태웅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죽은 날짜도. 10월 8일이었구나. 지금은 며칠이지? 거실 벽의 달력을 본다. 10월 14일. 철야는 지났지만 일주일은 안 됐다. 서태웅은 어렸을 때 한 번 가 본 친척의 장례식 절차를 어렴풋이 떠올려 본다.
현관 앞의 전신거울에는 서태웅의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내려다본 자신의 몸에 입혀진 옷은 자주 입던 보라색 트레이닝복. 어딘가에 제대로 쓸린 듯이 낡고 구겨지고 더러웠다.
선명한 핏자국이 있었다.
마지막 순간이 생각났다. 서태웅은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깜빡 졸았던 것 같다. 그다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서태웅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고라도 당했나? 어쨌든 아픈 기억은 없다. 아프기도 전에 죽었나 보다.
집에 있어봤자 할 일도 없는 유령 서태웅은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자전거를 힐끗 쳐다봤지만. 왠지 탈 수 없을 것 같아서 일찌감치 포기한다. 옷 갈아입는 것도 안 되던데.
터덜터덜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뺨을 스치고 앞머리를 시원하게 넘겨주는 바닷바람은 죽어서도 기분 좋았다.
낯익은 공원에서 서태웅은 충동적으로 백보드 위까지 기어 올라갔다. 유령이면 하늘을 날 수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되진 않았고 그냥 원숭이처럼 낑낑대며 나무 타듯 매달렸다. 살아있는 몸이었다면 중간에 떨어졌을 것 같은데 끝까지 수월하게 갔다. 지금은 미묘하게 온몸에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백보드에 발을 대고 서 있는 것도. 살아있는 서태웅이었다면 진작 기우뚱 떨어져 그때야말로 죽어서 유령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서 있다.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다.
바람. 서태웅은 뭔가 힌트를 얻는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자신이 세상에 끼칠 수 있는 물리력은 바람과 비슷한 정도인 것 같다. 바람은 농구 골대를 타고 올라가 백보드 위에 설 수는 있지만, 옷을 갈아입을 순 없다. 현관문을 끼익 열 수는 있지만, 고양이를 쓰다듬을 수는 없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만난 고양이. 쓰다듬고 싶었는데 손이 슉 통과해 버렸다. 아무 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따스한 살집도 부드러운 털도 촉촉한 코도. 모처럼 도망가지 않았는데.
뭐 그런 식인가보다. 서태웅도 유령은 처음이라 잘 모르지만.
팔짱을 낀 채로 위풍당당하게 서서 아래를 굽어보던 서태웅의 시야에 뭔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온다. 누군가 농구 골대 앞으로 오고 있다. 조감도나 마찬가지인 서태웅의 시야에는 얼굴이 안 보인다. 그림자가 훨씬 잘 보인다. 그림자만으로 한 번에 누군지 알 수 있는 사람이다.
윤대협.
농구를 하러 온 건가? 바람직하군. 서태웅은 유령인 주제에 눈을 빛낸다. 발끝으로 백보드를 짚고 쪼그려 앉는다.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절대 균형을 유지할 수 없는 자세로 윤대협을 유심히 내려다본다. 이제 보니 농구공을 들고 있다.
서태웅이 폴짝 백보드에서 뛰어내려 림에 엉덩이를 쏙 넣고 걸터앉았다. 농구 골대는 흔들리지도 않는다. 유령은 편리하군. 긴 다리를 까딱이며 윤대협의 슛을 기다린다. 아무래도 이 각도에서 농구를 지켜본 적은 없으니까.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 올라 온 농구공을 쳐낼 수는 있을까? 바람이라면 살짝 빗나가게 하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여기서 스틸해도 정당한 스틸이지. 아닌가. 인간 대 유령은 좀 치사한가.
서태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농구 생각만 하고 있는 동안 림 아래 윤대협은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왜 농구를 안 하지? 서태웅이 고개를 갸웃했다.
윤대협은 약간 고개를 숙이고 손안의 농구공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늘진 얼굴 표정을 가늠하기 힘들다.
답답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서태웅은 과감하게 뛰어내렸다. 사뿐. 소리도 없이 착지한다. 유령은 편리하군.
코 앞에 서태웅이 착지해도 윤대협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야 유령이니까. 얼굴 앞에 손을 휙, 지나쳐 본다. 속눈썹 하나 깜짝 안 한다. 손에 든 농구공을 세게 내리쳤다. 슉 통과했다. 서태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유령이 되어도 열 받는 건 그대로군.
윤대협은 두 손으로 농구공을 꾹 쥐고 있다.
왜 아까부터 안 움직이지?
서태웅은 무릎을 굽혀 아래에서 위로 고개를 들이밀고 윤대협의 표정을 확인해 보았다.
윤대협은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주 이상했다. 진지하고. 허무하고. 힘없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눈에 초점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차갑다고 표현하기도 어색했다. 아무 온도가 없는 것을 차갑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꺾인 목의 각도 때문에 얼굴 전체에 드리워진 그늘까지 표정의 일부 같았다.
윤대협. 왜 이러냐.
서태웅은 다소 당황했다. 육신과 생명이 있을 때도 서태웅은 딱히 위로에 소질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지금 윤대협에게 필요한 게 위로가 맞다면. 어쨌든 뭔가가 필요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아이 같았다.
농구하러 온 거 아니야? 농구라도 해 봐. 서태웅은 윤대협의 농구공을 빼앗으려 노력했다. 바람 정도의 물리력으로는 어림없었다. 윤대협의 긴 손가락은 때때로 농구공을 터뜨리려는 듯이 꾹 누르다가. 다시 힘이 쭉 빠진 듯이 끝을 툭 떨궜다.
윤대협의 손아귀에 힘이 빠진 타이밍에 서태웅이 농구공을 아래로 톡 쳤다. 우연히 손에서 미끄러진 것처럼 농구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구르르 굴러간다. 서태웅은 얼른 쫓아갔다.
그러나 유령이라 농구공을 집어 들 수 없었다. 멈춰 세우는 게 한계였다. 서태웅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유령은 불편하군. 매우 엉거주춤한 자세로 두 손을 써서 농구공을 살살 건드리자 마지못해 굴러간다. 이게 한계인가. 어쩔 수 없지.
서태웅은 윤대협의 발치까지 농구공을 데굴데굴 굴렸다. 커다란 신발을 톡 건드리고 농구공이 멈췄다. 서태웅은 허리를 펴고 뿌듯하게 말했다.
"헤이. 승부하자."
윤대협은 아무 대답 없었다. 맞다. 난 유령이지.
묵묵히 발치의 농구공을 바라보던 윤대협이 얼굴을 확 찡그렸다. 서태웅이 흠칫 놀랄 정도로.
윤대협이 얼굴을 마구 문지른다. 화가 났나?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서태웅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승부를 거절한 적이 없었는데. 살아있을 땐. 낯선 상황과 낯선 유령 상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기 어렵다.
갑자기 윤대협이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내가 보이나? 서태웅은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 한 개를 들어 제 가슴팍을 가리켰다. 하지만 윤대협은 눈을 맞추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윤대협의 시선은 여전히 농구공에 처박혀 있었다. 다 갈라진 목소리가 낯설다.
"같은 학교도 아니고. 선후배도 아니고. 라이벌... 그 정도일 텐데."
윤대협이 잠깐 헛숨을 마셨다. 눈이 커졌다. 어금니를 꽉 물더니. 이어진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정도였을... 텐데."
과거형으로 제가 뱉은 말을 첨삭하며 윤대협은 숨을 쉬기 어려운 듯 가슴팍을 움켜잡았다.
그 장면을 보고 서태웅은 충격을 받았다. 윤대협의 일그러진 얼굴 같은 건 처음 봤다. 항상 여유 있게 웃는 표정밖에 모르는데. 설마 눈물이 고인 건가? 식은땀을 잘못 봤나?
윤대협이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농구공을 끌어안는다. 작아진 윤대협. 서태웅은 묵묵히 그 머리꼭지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농구공에 애절하게 이마를 부비면서 윤대협이 중얼거린다.
"나는 이럴 자격이 없는데. 그렇지?"
그런데 나도 죽을 것 같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윤대협은 그렇게 말했다. 윤대협은 울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농구공에 처박은 채 주먹만 꾹 쥐었다. 종종 터지는 오열을 참는 듯이 가슴팍이 크게 들썩이며 호흡 곤란을 겪는 사람처럼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윤대협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서태웅이 죽어서. 라이벌이 사라져서...?
나 때문이잖아.
서태웅은 옷자락에 묻은 핏자국을 매만졌다. 윤대협이 이걸 봤을까? 피투성이가 된 내 모습. 장례식에 왔을까? 동료들도? 가족들도...
무언가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하다.
윤대협이 살짝 고개를 든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처럼 껴안고 있던 농구공을 쓰다듬는다. 푹 숙이고 있어서 그런지 피가 몰려 벌게진 얼굴. 흐느낌을 참느라 갈라진 목소리로 또 뭐라고 중얼거린다.
"국체... 기대했는데."
기다렸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 놓는다. 장기를 떼어 놓는 양 아프게.
"윈터컵도. 내년도. 너랑. 승부할 거라고... 당연히. 졸업 전까진..."
빼앗긴 미래만큼은 참을 수 없이 억울했는지. 마지막 말과 함께 결국 눈물이 터졌다. 큰 눈에서 후두둑 떨어진 눈물이 그대로 농구공을 때린다. 거칠게 얼굴을 쓸어버려도 잠깐일 뿐. 한 번 터진 둑은 쉽게 막히지 않았다. 커다란 등이 들썩인다.
서태웅은 굉장히 허둥거렸다. 윤대협이 울고 있다. 나 때문에. 어떡하지?
근데 아까 '너'라고 말하지 않았나? 내가 보이나?
서태웅은 재빨리 윤대협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두 손을 잠시 허둥거리다 어설프게 어깨를 다독인다. 슉 통과했다. 고양이를 만질 때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는데 이것도 여의치 않다. 삐죽삐죽한 머리가 손바닥 위로 쑥쑥 솟아 나온다. 답답하다. 서태웅은 아무렇게나 급한 대로 지껄여 본다.
"나도 그럴 줄 알았어. 내일도 겨울도 내년에도. 너랑 승부하려고 했어. 어쩔 수 없잖아. 울지 마. 네 잘못이 아니야. 왜... 우는 거야. 일어나. 농구하자..."
아니 할 수가 없구나. 서태웅도 이를 꾹 물었다. 분하다. 유령 따위가 되는 바람에. 윤대협이랑 농구도 못하고... 울고 있는데 달래 주지도 못하고... 울려 버리고...
최악이다. 서태웅은 유령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지독하게 후회했다.
윤대협이 갑자기 울음을 뚝 그쳤다. 엉망이 된 얼굴이 슥 올라온다. 스위치를 끈 듯한 갑작스러운 변화에 서태웅은 움찔 놀랐다.
윤대협이 소매를 당겨 축축한 얼굴을 슥슥 닦는다. 처음처럼 죽은 듯한 무표정으로. 실컷 울어서 시원해진 걸까? 전혀 그런 느낌은 아니다. 피곤해 보인다. 허무해 보인다. 입을 꾹 다물고 감정까지 묶어버린 것 같다. 서태웅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차라리 우는 게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윤대협이 시선을 들었다. 서태웅은 눈을 반짝였다. 오늘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눈동자. 드디어 내가 보이는 걸까?
아니었다. 윤대협의 시선이 서태웅을 지나친다. 서태웅도 그 각도를 따라 뒤를 돌아본다.
함께 농구 골대를 쳐다본다.
서태웅은 농구를 할 수 없다. 죽었기 때문에.
윤대협은 농구를 할 수 없다. 서태웅이 죽었기 때문에.
두 번째 사실은 서태웅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멍하니 앉아서 하염없이 농구 골대만 쳐다보고 있는 바보 자식을 어떻게든 일으키고 싶은데 유령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죽지 말았어야 해.
서태웅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가 죽지 말았어야 해. 머릿속에서 무언가 뒤엉킨다. 계속 농구를 하고 싶었어. 가슴 속이 울컥거릴 때마다 온몸이 조금씩 뜨거워진다.
나도... 죽고 싶지 않았어.
서태웅은 충동적으로 달려 나갔다. 주저앉은 윤대협을 뒤로하고 공원을 빠져나간다. 전력 질주. 유령은 아무리 달려도 숨이 차지 않았다. 땀도 나지 않았다.
집에 도착했다. 지금 가족들의 얼굴을 보면 울어버릴 것 같다. 마당에 있는 자전거에 올라탔다. 놀랍게도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바람처럼 빠르게 달린다.
마지막 순간이 점점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윤대협과 농구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고. 큰길에서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잠깐 졸아서 신호등을 못 봤다. 그대로 맞은 편에서 트럭이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달려왔고...
바로 지금처럼...
서태웅은 달려드는 트럭을 향해 눈을 크게 떴다. 운전자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야 유령을 치고 놀라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유령이 된 서태웅의 시간이 끝났다.
서태웅은 교실 책상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났다. 1학년 10반이 맞다. 텅 빈 교실은 조용하다. 입은 옷을 내려다본다. 평범하게 교복이다. 시계를 확인한다. 평범하게 하교 시간이다.
서태웅은 의심스러웠다. 나... 아직 유령인가?
조심스럽게 가방을 집어 들었다. 평범하게 들어 올려진다. 서태웅의 머릿속에 환희의 느낌표가 몇 개인가 떠올랐다. 가방을 메고 칠판 앞을 지나가다 우뚝 섰다.
달력이 보였기 때문이다. 10월 8일. 서태웅이 죽은 날이다.
서태웅은 홀린 듯이 교문으로 걸어갔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발이 멋대로 움직였다. 무의식적인 습관이다. 자전거 체인을 풀다가 흠칫 정신이 돌아왔다. 자전거... 타도 되겠지?
서태웅은 인생 최고로 안전운전을 하며 조심조심 능남고등학교 근처 공원으로 출발했다. 횡단보도가 나올 때마다 3m 앞에 멈춰 서서 유난스럽게 좌우를 세 번씩 살폈다. 삼거리나 사거리에서 꺾어지기 전에도 일단 한 번 무조건 정지하고 좌우를 살폈다. 차도로 쌩 달려가는 일도 없이 인도를 타거나 철저하게 자전거 도로를 따라갔다. 평소의 서태웅이라면 전혀 하지 않는 행동이다. 이상하게 경계심이 배가 됐다. 조금만 빠르게 지나가는 차가 있어도 흠칫 놀랐다.
당연히 도착 시간은 훨씬 늦었다. 거의 두 배 정도 걸렸다. 이제 거의 해가 질까 말까 하는 초저녁이다. 윤대협이 벌써 집에 갔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윤대협은 있었다. 혼자서 실컷 농구했는지 땀에 푹 젖은 채로 서태웅을 맞았다.
"여어~ 지각생."
웃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녹았다. 지금까지 얼어있었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서태웅은 무작정 달려가서 윤대협을 다짜고짜 끌어안았다. 갑자기 제 가슴팍에 퍽 부딪혀 오는 이마 때문에 윤대협이 헉 소리를 냈다. 윤대협의 손에서 튕겨 나간 농구공이 탕, 탕, 데구르르... 소리를 내며 멀어져갔다.
서태웅은 잠시간 고목에 붙은 매미처럼 어설프게 윤대협을 껴안고 있었다.
윤대협은 황당했다. 이게 뭘 잘못 먹었나...?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꽉 맞붙은 서태웅의 가슴팍에서 후우, 바람 빠지는 게 느껴졌다. 뻣뻣했던 상체가 퍽 안심한 듯 녹아오는 미묘한 변화가 주는 감동이 있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농구할 때 늦는 녀석이 아닌데 이상하다 했더니. 윤대협은 말없이 서태웅의 등짝을 토닥여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서태웅은 한 번 더 울컥했다. 이제 절대 죽지 말아야지. 윤대협의 셔츠를 꾹 쥐고 그런 다짐을 했다.
윤대협은 그 손길을 살짝 오해했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구나. 서태웅은 누군가에게 쉽게 의지할 줄 아는 성격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도대체 서태웅을 이 정도로 동요하게 만든 일이 뭔지 짐작조차 되지 않지만. 어디 따로 기댈 곳이 없어서 다짜고짜 나에게 안긴 거라면.
좀... 귀엽다. 윤대협은 제 셔츠를 꼭 쥔 주먹을 따뜻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조용히 떨어진 서태웅이 교복을 벗는다. 윤대협이 말렸다.
"됐어. 이제 곧 해지는데. 오늘은 끝."
불만을 가득 담고 찡그려지는 얼굴. 윤대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얼굴 해도 네가 늦었으니까 어쩔 수 없어."
서태웅은 억울했다. 네가 농구하고 싶다고 해서 어떻게든 살아 돌아왔는데.
아니, 살아 돌아온 게 맞나? 서태웅은 잠시 현실 감각을 잃는다. 혹시 꿈이었을까? 종례 시간에 잠드는 바람에 내가 죽고 윤대협이 우는 개꿈을 꾼 걸까? 일단 지금은 꿈이 아닌 것 같은데.
문득 손을 뻗어서 윤대협의 볼을 꽉 쥐어 본다. 아야야야. 윤대협이 3초 정도 참아 주더니 탁 쳐낸다. 꿈은 아닌 것 같다.
윤대협은 약간 열받은 표정이지만 더 짜증 내진 않는다. 그저 가방을 챙겨 들고 휙 돌아섰다.
"그럼 간다. 또 봐, 슈퍼 루키."
서태웅은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 불쑥 말했다. 또렷하고 큰 목소리였다.
"헤이."
윤대협이 뒤돌아본다. 약간 놀란 표정. 서태웅은 지금까지 돌아서는 윤대협을 붙잡은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서태웅은 아주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내일 또 봐."
윤대협은 눈을 세 번 깜빡이고 곤란한 듯 말했다.
"내일은 부 활동인데..."
서태웅은 간발의 차도 없이 말했다.
"그래도 봐."
"너넨 연습 안 해?"
"해."
"근데 어떻게 봐?"
"땡땡이."
"완전 불량 학생이구나, 너."
서태웅을 비난하며 윤대협은 기분 좋게 웃었다. 지는. 서태웅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부 활동이 있든 없든 윤대협은 승부를 거절한 적이 없다. 오히려 농구부 일정을 우선했던 건 항상 서태웅이다.
죽는 꿈을 꿨을 때 서태웅은 그걸 약간 후회했다. 그렇게 빠른 끝이 있었다면 더 자주 만났을 것이다. 농구부도 재미있지만. 윤대협도 재미있으니까. 아니, 윤대협이 제일 재미있으니까...
어쨌든 말은 저렇게 해도 웃고 있다면 윤대협도 내일 나오겠다는 소리다. 서태웅은 걱정 없이 돌아섰다. 잘 가~ 뒤에서 친절한 인사가 들린다. 대충 손을 흔들어 주고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마음이 가볍다. 페달이 쑥쑥 나간다. 개꿈은 끝났다. 농구와 윤대협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좋은 교훈이었다 치고. 이제 내일부터 더 열심히 농구를...
그새 해가 져서 어두웠다. 아직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은 채로 교차로 빨간불에 비보호 우회전을 택한 트럭이 정면에서 다가온다. 서태웅은 소리 내서 욕을 했다. 이런 씨발.
자전거 핸들을 쥔 채로 공중에 몸이 떴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눈을 떴을 때는 또 평범하게 자신의 방이었다. 오후가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집 안이 이상하게 고요했다. 서태웅은 달력부터 확인했다. 10월 14일.
옷자락을 잡아당겨 핏자국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교복이었다. 아무래도 유령은 죽은 순간의 모습을 하게 되나 보다. 다리 하나 없을 만도 한데 그렇지는 않군. 냉정하게 그런 평가를 했다.
서태웅은 침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생각에 빠졌다. 지금 이건 꿈인가? 서태웅은 이전에 유령이 되었던 상황을 꿈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렇다면 지금도 꿈을 꾸는 도중일 가능성이 있다.
이상하게 생생한 꿈에서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서태웅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꿈에서 깨도록 도와줄 도구. 별다른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일단 냅다 뺨을 쳐본다. 아프다. 하지만 깨어나진 않았다. 자신의 볼을 단단히 잡고 주욱 당겨 본다. 아프다. 눈물이 찔끔 난다. 하지만 깨어나진 않았다.
서태웅의 눈에 창문이 들어왔다. 서태웅의 방은 2층이다.
드르륵 창문을 열고 냅다 창틀에 발을 올린다. 어머니가 보면 기절하실 일이지만 지금은 유령이거나 꿈속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훌쩍 뛰어내린다. 왠지 어디선가 뛰어내리면 꿈에서 깰 것만 같아서.
사뿐, 서태웅은 소리도 내지 않고 뒷마당에 착지했다.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꿈이 아닌 것 같다. 심지어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 가벼운 몸의 감각. 너무나 익숙하다. 당연하다는 듯 정원 어디에도 서태웅의 그림자가 없었다.
서태웅은 뒷마당에 우뚝 선 채로 생각에 잠겼다. 오히려 이렇게 되면... 이전에 유령이 됐던 것도 꿈이 아니었다는 얘긴데...?
차근차근 정리해 보자. 서태웅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순서대로 늘어놓아 보았다. 서태웅은 죽었다. 자전거를 타고 윤대협을 만나러 가다 트럭에 치였다. 그래서 유령이 됐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다시 교실이었다. 멀쩡히 살아있었고 날짜와 시간상으로도 죽기 전이었다. 그래서 다 꿈인 줄 알고 마음 놓고 윤대협 만나러 갔다가 자전거 타고 돌아오는 길에 또 트럭에 치였다. 그래서 유령이 됐다. 아무래도 꿈이 아니라 진짜로 죽은 것 같다.
그전에는 꿈이었고 지금은 진짜로 죽은 걸까? 아니면 그전에도 진짜였고 지금도 진짜? 거기서 서태웅의 생각이 막혔다. 어쨌든 그때는 꿈에서 깨어나거나 혹은 시간을 되돌려 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떻게 했었지? 관자놀이 근처의 머리카락을 붙들고 며칠 전의 꿈처럼 벌써 아스라해진 기억을 최대한 쥐어짜 본다.
어딘가 높이 올라갔던 것 같은데. 어디였지?
아. 공원이었다. 윤대협이랑 맨날 농구하는 곳.
갑자기 머릿속에 선명하게 윤대협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는 얼굴이.
서태웅은 방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숨도 쉬지 않고 한 번에 공원까지 달렸다. 물론 유령이라 숨을 쉴 수 없지만.
공원에는 윤대협이 와 있었다. 멍하니 농구공을 바라보는 뒷모습. 완전히 데자뷰다.
서태웅은 무심코 윤대협 어깨를 붙잡고 돌려세우려고 했지만 유령이라서 실패했다. 서태웅의 손은 윤대협의 두터운 어깨를 슉 통과해 버렸다. 열 받아서 쿵쾅쿵쾅 윤대협의 앞에 바짝 다가선다. 윤대협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윤대협! 정신 차려! 울지 마!!"
이제 우는 얼굴은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다시 돌아갈게. 다시 돌아가면 안 죽을 테니까. 이제 진짜 안 죽어. 알겠어? 울지 말라고!"
그렇다고 울지도 못하는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 걸 좋은 핑계로 삼아 윤대협의 이마에 제 이마를 바짝 들이댔다. 숫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선언을 남겼다.
"이깟 걸로 포기하지 마."
나도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농구도. 너도. 살아가는 것도.
서태웅은 윤대협을 지나쳐 달려 나갔다. 데자뷰와 함께 선명하게 떠오른다. 다시 돌아간 방법이.
서태웅은 집에 도착해 자전거를 타고 공원으로 달렸다. 공원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원 바로 앞에서 오토바이 드리프트 하듯이 화려하게 자전거를 유턴해서 다시 집 방향으로 페달을 있는 힘껏 밟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우회전해서 다가오는 트럭을 향해 계속 밟았다.
유령이 된 서태웅의 시간이 또 끝났다.
서태웅은 교실 책상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1학년 10반이 맞다. 텅 빈 교실은 조용하다. 달력부터 확인한다. 10월 8일. 서태웅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당탕 교문까지 달려 나간다. 숨이 찬다. 이제 살아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자전거를 향해 가다 멈춰 섰다. 미련 없이 뒤돌아서 달려간다. 아니 속도를 줄여 아예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앞만 보고 뛰는 것도 위험할지 모른다.
전철을 타고 능남 고등학교 근처 공원으로 간다. 서태웅은 살인자에게 목숨을 위협 받는 사람처럼 잔뜩 곤두선 채로 걸었다. 특히 교통수단에 매우 민감해졌다. 전철이 올 때도 안전선보다 한참 뒤쪽에 서서 기다렸다. 내릴 때는 전철과 플랫폼 사이를 세 번 확인했다.
전철을 탔는데도 역대급으로 시간이 오래 걸렸다. 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림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해가 져 있었다.
그런데도 윤대협은 있었다. 서태웅을 기다렸다.
"여어~ 지각생."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서태웅은 울고 싶어졌다. 그 기분을 감추려고 냅다 윤대협에게 뛰어들었다. 두 번째라 별로 쪽팔리지도 않았다.
윤대협은 헉 소리를 내면서 서태웅을 받아줬다. 이 자식이 왜 이래. 뭐 잘못 먹었나?
가슴팍에서 색색거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설마 울음을 참는 건가? 무슨 일이 있었나? 윤대협은 당황했다. 어설프게 자신의 가슴팍을 꾹 끌어안고 굳어 있는 서태웅의 등짝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두 번이나 있었지. 서태웅은 하마터면 그렇게 대답할 뻔했다. 그러나 귀찮은 설명이 될 것이 분명하며 솔직히 자신도 정돈된 말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무작정 고개를 흔들었다. 윤대협은 그것마저 뭔가 안쓰럽게 받아들였는지 서태웅의 동그란 뒤통수를 토닥여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뭔지도 모르면서 그런 소리를 한다. 서태웅은 억울했다. 너 때문에 지금 내가... 윤대협에게 주먹을 날리지 않기 위해 대신 윤대협의 셔츠를 꾹 쥐고 참는다. 윤대협은 그걸 또 뭔가 오해했는지 따스한 손길로 서태웅의 떨리는 주먹을 감싸 주었다.
몸을 떼고 고개를 살짝 숙여 눈을 맞춰 온다.
"이제 좀 진정됐어?"
따스한 눈빛. 여유로운 미소. 이거다. 윤대협은 이래야 한다. 서태웅의 마음에 안도감이 퍼진다.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서태웅은 진심을 담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대협은 곤란할 때 짓는 미소로 말했다.
"어떡하지? 이제 림이 안 보여. 집에 가야 할 것 같은데."
서태웅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지난번에 이 비슷한 말을 듣고 룰루랄라 집에 갔다가 사망해 버린 서태웅에게는 PTSD 트리거나 마찬가지다. 윤대협의 셔츠를 꾸욱 당긴다.
"싫어."
윤대협은 당황해서 딸려 온다. 제일 편한 운동복이 사망 위기에 처했다.
"일단 놔 봐. 다 늘어난다."
"싫어."
얘 캐릭터 너무 바뀌지 않았나? 윤대협은 억지로 서태웅의 손을 떼어내려 시도했으나 만만치 않은 악력만 확인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대안을 제시한다.
"대신 손 잡아 줄게. 옷은 잠깐 놓자. 응?"
오늘따라 어린애처럼 구는 슈퍼 루키는 그제야 인질이 된 셔츠를 놔 줬다. 다 구겨졌군. 내일은 못 입겠어. 서태웅은 윤대협의 두꺼운 손가락 세 개를 놀이공원 제트코스터 손잡이 잡듯이 꾹 움켜쥐었다. 윤대협은 한숨을 한 번 쉬고 제 손을 움직여서 서태웅의 손바닥 전체를 맞잡아주었다.
무슨 일이 있긴 있나 보군. 농구할 때 늦는 녀석이 아닌데 이상하다 했더니. 이런 때 더 불안하게 만드는 건 좋지 않다. 일단 한번은 진정시키는 게 빠르다. 손바닥이 맞닿자 기다렸다는 듯이 꼬옥 힘을 주는 건... 좀 귀엽다. 서태웅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을 때가 있구나. 그 상대가 자신이었다는 사실에는 묘한 감동마저 느꼈다.
윤대협은 최대한 상냥하게 다독이듯 말했다.
"오늘은 더 이상 무리니까, 내일 또 만나자. 오케이?"
쿨하게 끄덕이고 뒤돌아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서태웅이니까.
하지만 오늘의 서태웅은 이상했다.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입술이 어긋날 정도로 이를 꾹 물더니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
아까부터 이 자식이 싫다고만 하네? 윤대협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러나 여전히 상냥하게 묻는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난 집에 갈 건데."
서태웅은 책가방 손잡이를 꾹 쥐더니. 성큼성큼 다가와서. 윤대협 옆에 섰다.
"따라갈래."
"어딜?"
"너네 집."
진짜 죽었다가 다시 태어났나? 윤대협은 어안이 벙벙했다. 가까스로 외마디 질문을 꺼냈다.
"왜...?"
서태웅은 진중한 표정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떨어지기 싫으니까."
윤대협의 심장이 이상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상체의 윤곽을 따라 소름이 일어나며 온몸이 간지럽다. 저녁 바람에 땀이 식어서 그런 거겠지. 윤대협은 뒷목을 긁적이다 마지못해 뒤돌아섰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티셔츠 자락을 꾹 쥔 채로 따라왔다. 미치겠네. 윤대협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대로 집까지 따라 온 서태웅은 전화부터 빌렸다. 부모님께 행방을 알리는 것까진 좋았는데, 곧 윤대협과 합의되지 않은 일정을 마음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고 갈게요."
"어이."
무심코 튀어나온 제지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끝까지 정중하게 통화를 마친다. 하아. 윤대협은 또 한숨을 쉬었다. 오늘따라 말 안 듣는 서태웅. 이쯤 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봐야 할 것 같기도 한데.
"너 자지 말고 기다려."
일단은 샤워가 먼저다. 끈적임을 참지 못하고 윤대협은 욕실로 들어갔다. 서태웅은 뒤통수에 대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처음 와 본 윤대협의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일단 척 보기에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것 같은 흉흉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천장에 무거워 보이는 전등이 매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부엌에는 아무래도 칼이 있을 테니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하자. 저녁 식사는 대충 굶어도 상관없으니까. 욕실에서도 미끄러지면 죽는다. 샤워는 내일로 미루고 세면소에서 손, 발, 얼굴만 씻고 자도록 하자.
갑자기 집에 비행기나 트럭이 와서 처박히지 않는 한 일단은 안심이다. 서태웅은 윤대협이 없는 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심 어린 안도였다. 여기는 안전해.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자면 안 되는데. 서태웅은 고개를 힘차게 흔들었다. 약속했는데. 그렇지만 며칠 사이 시간과 생사를 건너다니며 미친 듯이 뛰어다닌 피로감이 눈꺼풀을 무자비하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결국 잠들고 말았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쪼그린 채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윤대협의 얼굴이 있었다.
"오. 깼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차분한 얼굴로 그렇게 맞아주었다. 안심했다. 다시 방 안으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유령도 아니다. 서태웅은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기지개를 쭉 켰다.
윤대협은 입을 쩌억 벌려봤자 조그맣게 하품하는 서태웅을 쳐다보다 픽 웃어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의미심장한 말투에 서태웅이 움찔했다. 아직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정리한 말을 갖지 못했다.
"이제 괜찮은 것 같네."
윤대협은 침대에 기대고 있는 서태웅을 건너가서 풀썩 누워버렸다. 묵묵히 바닥을 쳐다보는 서태웅을 쿡 찌른다.
"자고 간다며?"
서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준비를 해야지."
서태웅이 묵묵히 자기 교복을 내려다본다. 일단 주섬주섬 벗기 시작한다. 운동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옷이라도 입으면 되겠지. 윤대협은 침대에 누운 채로 서태웅의 스트립쇼를 구경만 했다.
서태웅이 교복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풀었을 때 윤대협이 뭔가를 휙 던졌다. 하얀 티셔츠. 방금 전까지 윤대협이 입고 있었던 거다. 윤대협은 상체를 벗은 채로 두 손을 깍지 껴 뒤통수를 받친 채 웃고 있다.
"난 원래 벗고 자."
"10월인데."
"12월에도."
서태웅은 그러다 감기 걸린다고 말하려다 울컥했다.
"그러다 일찍 죽어."
"과장이 심하네."
"흥."
서태웅은 불퉁한 얼굴로 윤대협의 티셔츠를 뒤집어썼다. 죽는다는 말 다 과장 같지?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세상 끝난 듯이 엉엉 울 때는 언제고.
윤대협의 우는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서태웅은 가만히 티셔츠에 남아 있는 윤대협의 체온을 감각하다 뒤돌아섰다. 침대에 두 팔을 딛고 윤대협을 내려다본다.
"왜?"
서태웅은 묵묵히 윤대협을 바라봤다. 느긋한 얼굴. 여유로운 미소. 이게 윤대협이다.
"응?"
둘 다 살아있을 때 해야 하는 말이 있었다. 죽고 나서야 알았다.
"윤대협."
"왜. 서태웅."
서태웅은 잠시 말을 골랐다. 죽어도 후회하지 않도록 명확히 전하고 싶었다.
"내가 죽어도..."
심각한 얼굴을 보고 윤대협이 이상한 표정을 했다. 농담으로 여겨지는 게 싫어서 덥석 손을 잡았다. 그제야 윤대협도 심상치 않은 표정을 한다. 서태웅은 안심하고 말을 이었다.
"내가 죽어도 울지 마. 농구도 하고.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니까."
윤대협은 정말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야 못 알아듣겠지. 그래도 말해야 했다.
"계속 살아. 울지 말고. 근데 울어도 괜찮아. 우는 걸 참지는 마. 이상한 거 아니니까. 괜찮으니까."
잡고 있던 손에 나머지 한 손을 마저 겹쳤다. 윤대협의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붙들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유령이 돼서 보고 있을 거니까. 다 듣고 있으니까. 하고 싶은 말... 다 해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 그래도 울지 마."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일단 농구는 계속 해."
"하..."
윤대협이 서태웅에게 붙들리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진 않지만. 서태웅은 일단 만족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기 때문이다. 이제 갑자기 무슨 일이 닥쳐서 서태웅이 죽더라도 윤대협은 눈물을 참지 않아도 된다. 허공에 묻는 대신 대답을 갖고 시작하게 된다.
지금은 못 알아듣더라도... 그때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윤대협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침대 아래 앉은 서태웅을 내려다보는 구도가 된다. 한쪽 손을 붙들린 채로 묻는다.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생각은 있어?"
"..."
생각은 있는데 설명할 자신이 없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절대 내가 설명을 못 해서는 아닌데. 서태웅이 대답을 골몰하는 동안 윤대협은 침묵을 어떤 대답으로 오해해 버렸다. 한숨을 한 번 쉬고 자신의 손을 붙들고 있는 서태웅의 두 손에 나머지 제 손을 겹쳐 잡는다.
"갑자기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어?"
그렇게 다정한 질문을 받으면 성실하게 대답하고 싶어진다. 서태웅은 눈을 깜박이다 말했다.
"그냥..."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막무가내 서두에도 윤대협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래서 서태웅은 말할 수 있었다. 눈을 똑바로 보면서.
"내가 죽었을 때 네가 우는 건 싫다고 생각했어."
죽으면 이 눈을 마주 볼 수 없게 되니까.
"그런데 우는 걸 참는 건 더 싫어. 우리가... 아무 사이 아니라서. 그냥 라이벌이라서.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제일 싫어."
윤대협의 입이 서서히 벌어진다. 생각을 읽혀서 그런 걸까?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음? 서태웅은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하고 싶은 말을 계속 밀어붙인다. 맞잡은 두 손에 꼬옥 힘주며 선언했다.
"널 두고 죽지 않게 최선을 다해 볼게."
윤대협의 얼굴이 벌게졌다.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가. 조심스럽게 부른다.
"태웅아..."
서태웅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다. 윤대협이 매우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나 좋아해?"
서태웅의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갑자기? 지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다. 다소 뜬금없다. 서태웅은 자신이 던진 말이 얼마나 열렬한 프로포즈에 가깝게 들리는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
황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서태웅은 눈알을 굴리면서 성실하게 대답을 찾는다. 윤대협은 그걸 또 다른 의미로 오해해 버렸다. 서태웅이 망설일 때도 있구나. 뭐든지 곧바로 대답하는 녀석이. 이건 좀... 귀엽다.
불행히도 서태웅은 딱히 수줍어서 망설이는 중은 아니었고 그냥 성실하게 질문을 곱씹는 중이었다. 윤대협. 좋아하냐 싫어하냐 둘 중에 고르라면. 당연히 좋다. 농구 잘하고. 승부를 거절하지 않고. 봐 주지도 않고. 약점은 알려 주고. 강점은 인정해 주고. 친절하고. 자상하고. 오늘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태웅이 하자는 대로 다 받아주고. 서태웅이 죽으면 서럽게 울어 주고...
생각이 여기까지 닿았을 때 이미 서태웅의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좋아해."
서태웅의 두 손을 맞잡은 윤대협의 두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입술 끝이 꽉 모인 얼굴을 보고 서태웅은 어떤 생각을 했다. 곧바로 입을 통해 빠져나간다.
"그런데 너도 나 좋아하잖아."
윤대협이 주먹으로 명치를 맞은 것 같은 소리를 냈다. 팩트로 허를 찔렸다. 할 말이 없었다. 윤대협은 벌어진 입을 서서히 다물고. 명치를 뚜들겨 맞은 것처럼 쿵쾅대는 심장 소리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대협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리 와."
서태웅은 천천히 일어나서 윤대협이 앉아 있는 침대 위로 올라가 마주 앉았다. 윤대협이 다가왔다. 깨지기 쉬운 물건을 만지는 것처럼 가만히 서태웅을 껴안는다. 서태웅은 가만히 안겨 있었다. 뺨을 윤대협의 쇄골 근처에 갖다 대고 기대어 본다. 윤대협이 움찔거렸다. 그대로 서로의 체온을 나눴다. 죽으면 느낄 수 없는 생명의 따스함.
윤대협은 서태웅을 껴안은 채로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서태웅은 순순히 따라 누웠다. 꼭 껴안은 채 옆으로 누워 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유령은 결코 들을 수 없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