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the right one in 3
불면의이쑤신
카에데는 조용한 병원 로비에 맨발로 섰다.
자동문이 열렸다. 스테이션을 혼자 지키던 간호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문이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두 번째로 찬바람이 들어오자 그제야 간호사가 문밖을 내다보았다.
어린 소녀? 소년?
간호사는 황급히 스테이션 밖으로 나왔다.
"어디 아픈 데 있니?"
갈라진 목소리가 속삭이듯 묻는다.
"들어가도 되나요?"
"어서 들어와. 신발이 없니? 발을 다친 거니?"
카에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얀 눈이 덕지덕지 묻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간호사를 올려다본다.
"저기. 얼굴을 많이 다친 사람은 어디에 있나요? 경찰이랑 같이..."
간호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희 아버지인데요."
간호사는 한층 더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테이션 뒤로 돌아가 입원 명부를 뒤진다.
"7층 7호실인데, 지금은 아마 면회가 안 될 거야. 내가 경찰에게 한 번 확인을 하고... 어머?"
스테이션 위로 고개를 들었을 때, 병원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에 젖은 작은 발자국만 바깥을 향해 찍혀 있었다. 자동문이 스르르 닫혔다.
카에데는 아무도 없는 병원 건물 벽을 올려다보았다. 아래에서부터 창문을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중앙에서부터 다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목적지를 정한 뒤 심호흡을 한다. 차가운 눈이 스민 공기가 폐부를 깨운다. 카에데의 심장이 빠르게 펌핑하며 온몸으로 피를 돌린다. 이목구비 옆에 시퍼런 핏줄이 튀어나오며 카에데의 모든 근육이 순간적으로 팽창했다. 카에데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강철로 된 짐승 같은 손톱을 콘크리트 벽돌 사이로 박아 넣으며 순식간에 벽을 오른다.
바람이 새지 않는 두터운 병실 창문 가에 위태하게 선 카에데가 안을 들여다본다. 얼굴이 붕대로 칭칭 감긴 남자 한 명뿐. 제대로 찾았다. 경찰은 보이지 않는다. 굳게 문을 잠그고 바깥을 지키고 있겠지.
카에데가 창문을 작게 두들겼다. 얼굴이 사라진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팔다리에 꽂은 주사기를 죄다 뽑아버린 뒤, 그중 가장 큰 것을 하나 손에 쥐고 비척비척 침대를 나와 창문을 열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카에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남자에게 입술이 남아있었다면 당겨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남자는 손에 쥔 주삿바늘을 카에데에게 건넸다. 그리고 주춤주춤 상체를 창문 밖으로 내밀었다. 화상과 열상으로 녹아내린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꾹 참고, 애써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카에데는 쭈글쭈글한 피부 너머로 대동맥의 위치를 가늠했다. 그리고 주사바늘을 단번에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 목 가죽을 찢었다. 피가 창문 위에 선 카에데의 정수리까지 튀어올랐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숨을 참았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
찢어진 가죽 사이로 카에데의 입술이 느껴진다. 남자는 황홀하게 눈을 감았다. 카에데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혈액에서 모르핀 성 진통제의 씁쓸한 약품 향을 맡았다. 그래도 카에데는 최선을 다해 삼켰다. 언제고 카에데의 식사는 맛을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남자가 의식을 잃어간다. 카에데는 머리통을 붙잡고 창문 밖으로 전신을 끌어내는 동시에 세게 뒤틀었다. 남자는 목뼈가 부러지는 동시에 추락했다. 5초 뒤,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에 피가 산산조각으로 튀었다. 카에데는 시체를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면 거울처럼 까만 밤하늘을 비추는 병실 창문이 있었다.
창문에 비친 까만 밤하늘 속에도 카에데의 얼굴은 반사되지 않았다.
카에데는 더듬더듬 이마를 만졌다. 아직 따스한 피가 묻어 나왔다. 카에데는 창가에 쌓인 눈을 한 움큼 쥐었다. 그리고 무심하게 제 얼굴을 닦아냈다. 눈이 녹아 물이 되어 희석된 피가 목덜미로 주르륵 흘러내려 낡은 니트를 엉망으로 적셨다. 그래도 얼굴과 목에서는 점점 핏자국이 지워졌다.
다섯 번 정도 얼굴과 목과 손을 닦은 뒤에, 카에데는 검은 밤하늘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식사를 한 직후에는 힘이 남아돈다.
카에데는 센도 가 다락의 동그란 창문에 매달려 있었다. 아무것도 잡을 곳이 없는 가파른 지붕에서 오직 하체 힘만으로 버티고 섰다. 바깥의 눈보라와 대조되는 다락 안은 아늑하고 따스해 보인다. 아키라는 이불을 반쯤 걷어차고 자고 있다.
똑똑. 카에데가 창문을 두들겼다.
아키라는 뒤척였지만 깨지 않았다.
똑똑똑. 카에데가 더 크게 창문을 두들겼다. 이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면 다른 식구를 깨울지도 모른다.
"아키라. 나야. 아키라."
낮은 목소리로 끈질기게 속삭이자 반응이 있었다. 아키라는 몸을 애벌레처럼 웅크리며 얼굴을 이불 더미 속에 처박았다. 잠기운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여전히 창가를 향해 등을 돌린 채로 아키라가 응답했다.
"카에데?"
카에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가 아키라가 아직 눈을 감은 채 등을 돌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뒤늦게 소리 내어 대답했다.
"나야. 들어가도 돼?"
아키라가 이불에 처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에데는 끈질겼다.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줘."
"들어와..."
잘 잠겨있던 다락 창문이 확, 안쪽으로 열렸다. 찬바람과 눈보라를 몰고, 카에데가 피 뭉친 머리칼을 휘날리며 아키라의 다락방에 사뿐 내려앉았다. 카에데가 돌아보지 않아도 창문은 조용히 닫혔고, 혼자서 잠겼다.
여전히 꿈과 현실 중간 어디에서 뒹구는 기분으로, 아키라는 카에데를 위해 침대 안쪽으로 꾸물꾸물 움직였다. 카에데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보라와 피로 얼룩진 낡고 더러운 니트 원피스를 벗었다.
카에데는 완전한 알몸으로 이불 아래에 기어들어 가 아키라의 등 뒤로 붙었다. 매끄러운 강철처럼 차가운 카에데의 피부가 얇은 잠옷 한 겹 너머로 보드랍게 아키라를 감쌌다. 아키라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잠기운이 쫓겨나는 듯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이게 된다.
카에데는 아키라의 따끈따끈한 뒷목뼈 아래에 뺨을 기댔다. 두 손을 뻗어 아키라의 팔 아래로 넣어 꼭 끌어안았다. 아키라는 카에데가 더 많이 닿을수록 어쩐지 안심되는 느낌에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더듬더듬 제 배 근처에 있는 카에데의 손을 쥐었다. 얼음장처럼 차갑다. 동상에 걸린 건 아니겠지. 이 애는 또 장갑도 양말도 없이 돌아다녔겠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열심히 만지작거린다. 온기가 옮도록. 카에데는 아까 열심히 피를 씻어낸 것이 조금 뿌듯했다. 그래도 손톱 아래는 더러울지도 몰라서 손끝을 조금 오므렸다.
카에데의 차가운 허벅지가 엉덩이 아래에 닿았을 때야 아키라는 그 애가 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돌아볼 수가 없게 됐다. 아키라는 눈을 깜빡이며 벽을 바라보았다. 하릴없이 카에데의 조그맣고 단단한 손가락 열 개만 만지작거렸다. 아까까진 고드름처럼 차가웠지만 이제는 아키라의 체온이 옮아 미지근하다.
카에데는 아키라의 뒤에서 오른뺨, 왼뺨을 차례대로 아키라의 날개뼈에 번갈아 갖다 댄다. 온기를 찾는 아기 고양이처럼. 차가운 카에데의 피부와 따뜻한 아키라의 피부가 열을 교환하여 비슷한 온도로 미지근해진다. 둘은 한동안 가만히 그것을 느꼈다.
카에데는 아키라의 손가락에 얽혀있던 자신의 손가락을 빼냈다. 아키라의 손등부터 시작해 천천히, 손목으로, 팔뚝으로, 연한 팔꿈치 안쪽을 지나 어깨까지 쓰다듬었다. 깨질 것 같은 도자기를 만지는 것처럼, 강아지를 처음으로 쓰다듬어보는 아이처럼, 조심스럽고, 하지만 망설임 없는, 호기심 가득한 손길이었다. 이제 그렇게까지 차가운 손끝이 아닌데도 아키라는 왠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위에서 다시 아래로 슬슬 쓰다듬어 내려오는 카에데의 손을 느끼면서 아키라가 중얼거렸다.
"카에데."
"응."
"나랑 사귈래?"
카에데의 손이 멈췄다. 카에데는 아키라의 얇은 잠옷 너머로 도드라진 날개뼈에 이마를 붙인 채 물었다.
"사귀는 게 뭔데?"
"글쎄..."
사실 아키라도 잘 모른다. 사귀자고 고백하던 여자애들도 정작 그게 뭔지는 알려준 적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렇게 물어야 할 것 같았다. 카에데의 손이 다시 천천히 손등을 향해 내려온다.
"사귀면 지금까지 하고 달라져?"
아키라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리고 신중하게 대답했다.
"음... 아니."
"그럼 좋아."
카에데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손가락을 찍고 다시 손등을 타고 올라가려는 카에데의 손을 아키라가 꼭 붙잡았다.
"그래. 그럼 넌 내 여자 친구야."
"난 여자가 아니야."
"그럼... 남자 친구?"
"난 남자도 아니야."
"그럼 뭔데?"
카에데는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대답을 기다리던 아키라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양쪽 검지 손가락을 번갈아 카에데의 손가락에 두들기며 무심코 노래를 중얼거렸다.
"한 마리 코끼리가 거미줄에 걸렸네, 신나게 그네를 탔다네..."
어릴 때 어머니가 자주 놀아주던 동요였다. 노랫말에 맞춰 카에데의 손등을 타고 검지와 중지로 걷듯이 올라가다, 그네 타듯 카에데의 팔을 앞뒤로 붕붕 휘두르다가, 손뼉을 치다가, 세 개의 손가락으로 다시 간질이듯 카에데의 피부 위를 걸었다.
"너무너무 재밌다, 좋아 좋아 랄랄라. 다른 친구 코끼리를 불렀네. 두 마리 코끼리가 거미줄에 걸렸네..."
세 마리 코끼리가 거미줄에 걸릴 때쯤에 카에데는 간지럽다는 듯 팔을 비틀며 크크큭, 작게 웃었다. 아키라의 노래에도 들뜬 웃음이 섞였다. 다섯 마리 코끼리쯤에는 이불 아래에서 서로 팔뚝 여기저기를 마구 간지럽히고 있었다.
어느 순간 아키라는 미간을 작게 찡그리며 웃고 있는 카에데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너무 가까이 붙어있어서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작게 주름진 카에데의 하얀 미간, 살짝 휘어진 까만 눈동자, 웃느라 도톰하게 밀려오른 애굣살 위로 솟구친 빽빽하고 촘촘한 아래 속눈썹만 보였다.
아키라의 눈을 빤히 마주 보던 카에데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아키라의 시야 앞이 까매졌다.
카에데의 차가운 입술이 아키라의 입술에 살짝 붙었다가 떨어졌다. 아련한 냉기가 아키라의 떨리는 날숨 한 번에 순식간에 지워졌다.
카에데가 아키라의 눈앞에서 속삭였다.
"아키라. 난 너랑 같아."
카에데에게서는 눈 냄새가 났다. 그리고 예방주사를 맞으러 갈 때 의사에게서 풍기던 냄새도. 소독약 냄새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카에데가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망설이다, 결국 천천히 말했다.
"난... 혼자야."
아키라는 순간 울고 싶어졌다.
카에데가 하는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카에데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지만, 아키라와 같고, 또 혼자다. 아키라는 카에데의 벗은 어깨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벅차오르는 마음이 물리적으로 전해질 것처럼.
아주 집중하면, 새처럼 가녀린 가슴뼈 너머에서, 심장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아키라는 눈을 감았다.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좋은 꿈이 예상되는 밤이었다.
아키라가 눈을 떴을 때 카에데는 없었다.
창문은 잘 닫혀 있었다. 바닥에 남은 젖은 발자국 몇 개 외에는 지난밤 카에데가 여기 있었다는 흔적이 없었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건 그랬다. 코끝에 남은 눈보라와 소독약의 향기. 입술과 팔뚝과 온몸에 생생히 새겨진 카에데의 냉기. 혼자야,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 카에데가 남기고 간 흔적이었다.
아키라는 침대를 나와 기지개를 켰다. 씻으러 가려다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성냥갑을 찢어 펼친 조각에 메모가 쓰여있었다.
아키라. 난 널 좋아해. 하지만 언젠가 떠나야 해. 그래도 난 널 좋아해. 카에데.
편지라기엔 너무 짧고 메모라기엔 너무 깊었다. 아키라는 그 쪽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쓰다듬기도 소중해서 그대로 공책 사이에 끼워 책가방에 넣었다. 하루 종일 지니고 싶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할아버지가 읽는 조간신문에 따르면, 연쇄살인범은 어젯밤 병원에서 자해 후 추락해 자살했다. 발견된 시체의 모습은 자신의 살인 수법과 완전히 같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너무 소중한 건 가지고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아키라는 마음 깊이 후회했다.
들뜬 나머지 방심했다. 잠시 책상 아래로 카에데의 메모를 만지작거리다가 종례가 다 끝나는 줄도 몰랐다. 세상에 아키라와 메모,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아키라의 손에서 메모를 채갔다. 가슴이 철렁했다. 황급히 따라 일어선 곳엔 당연히 며칠 전 아키라의 입가에 멍을 찍어 놨던 놈이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예상 그대로의 등장에 안도감이 들 정도로 화가 났다.
"카에데?"
이죽거리는 입술에서 나오지 말아야 할 이름이 나왔다.
"이 새끼, 여자가 있었네."
그 자식은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아키라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메모를 잡은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카에데가 써 준 글자가 엉망으로 구겨진다.
가슴에서 머리까지 순식간에 불이 붙은 것처럼, 속이 뜨거워졌다.
아키라는 메모를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하체에 힘을 주어 땅을 박차고 그 반동 에너지를 오른손 주먹에 실었다. 그대로 그 자식의 얼굴로 휘둘렀다.
큰 소리로 메모 내용을 읽고 있느라 멍청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앞니가 아키라의 손등을 길게 찢으면서 우드득, 안쪽으로 부서졌다. 충격을 받은 녀석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다 아기처럼 울면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손틈으로 피거품이 울컥 터졌다. 녀석의 패거리들은 아키라가 제게도 달려들까 겁먹었는지 차례로 뒤돌아 도망쳤다. 어느새 주변을 둘러싼 구경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선생님을 부르러 갔다.
가슴 속의 불은 꺼졌다.
그러나 하나도 홀가분하지 않았다. 딱 한 번의 반격으로 전의를 상실한 녀석의 모습이 너무 추해서 찝찝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더 이상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아키라는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메모는 금방 발견했다. 처맞은 녀석이 얼결에 그랬는지, 반으로 찢어지고 너덜너덜 구겨져 교실 구석을 뒹굴고 있었다. 누군가 소동 틈에 밟았는지 신발 자국이 선명했다.
아키라는 차마 그것조차 손을 뻗어 집어 올리지 못했다. 피투성이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해서. 오히려 더 더럽히는 꼴이다. 찢어진 손등보다 마음이 훨씬 더 얼얼했다.
선생님에게 잡히기 전에 아키라도 도망쳤다. 손등에서 똑똑 떨어지는 핏줄기를 붙잡고 헨젤과 그레텔처럼 복도에, 또 눈 덮인 교정에 빨간 흔적을 남기면서 뛰었다.
당연히 집에 도착하자마자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아키라는 운이 좋았다. 타지역에 사는 친척의 장례식 때문에 할아버지는 오늘부터 꼬박 세 밤을 외박이다. 가는 것만 하루, 철야가 하루, 오는 게 또 하루. 할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절대로 아무 전화도 받지 말아야겠다고 아키라는 굳게 다짐했다.
아키라는 찬장에서 구급상자를 꺼냈다. 길게 찢어진 손등의 상처는 꾹 누르고 집에 오는 동안 어느 정도 피가 멈춰 있었다. 거실에서 왼손으로 고군분투하며 소독약을 뿌리고, 연고를 바르고, 어설프게 밴드를 붙였다. 금방 주르륵 미끄러졌다. 조그마한 밴드 몇 개로 될 상처가 아니었다. 그냥 다짜고짜 붕대를 둘둘 감았다. 한결 나았다.
한바탕 수습이 끝나고 나서야 아키라는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소파에 머리를 기대자 온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아키라는 그제야 자신의 오른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통증 때문일까? 아니면 상실감 때문에. 아니면 역시 조금 후련한 걸까...
졸음이 쏟아졌다. 아키라는 그대로 거실 바닥에 구겨져 해가 질 때까지 푹 잤다.
눈을 떴을 때는 어둑했다. 피 흘리고 잠도 잤더니 배가 고팠다. 아키라는 할아버지가 차려주시고 간 밥을 먹었다. 설거지는 할 수 없었다.
아키라는 손등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다. 얼얼한 감각도 거의 사라졌다. 아키라는 농구공을 꺼냈다. 조심스럽게 마룻바닥에 한 번 탕, 튀겨 본다. 손등은 멀쩡했다.
아키라는 나는 듯이 헛간으로 달렸다.
카에데는 헛간 문밖에서 아키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을 돌아보는 얼굴을 마주한 순간 아키라는 갑자기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괜찮을 뿐 만 아니라, 최상으로 느껴졌다. 메모는 금방 잊어버렸다. 눈앞에 카에데가 있었다.
아키라는 카에데의 손을 잡고 헛간으로 들어갔다. 카에데는 얇은 긴팔과 바지를 입고 있었다. 농구할 때는 바지가 더 편하다고 했던 조언을 받아들인 것 같다.
아키라는 카에데와 평상시처럼 농구를 했다. 어젯밤 말한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귀는 사이가 되어도.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아도. 그게 뭐라고 죽을 정도로 안심이 됐다. 날아갈 것처럼 행복했다. 지금이라면 덩크도 꽂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키라는 손등의 상처가 벌어져 다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몰랐다.
카에데는 바로 알았다.
비릿한 핏방울의 냄새 입자가 공기 중에 미약하게 퍼지는 즉시 날카롭게 카에데의 후각을 자극했다. 심장과 식도가 동시에 크게 요동쳤다. 팽창하듯 두근거린다. 소금을 한 움큼 삼킨 듯한 치밀한 갈증이 숨통을 막는다.
카에데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제 팔뚝을 잡아 뜯듯이 움켜쥐다 황급히 타겟을 바꿔 무릎을 봉쇄하듯 찍어 누른다. 혀 아래에서 타액이 넘친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겨우겨우 삼킨다.
"카에데?"
아키라가 한 발짝 가까이 온 순간, 붕대에 고여 있던 피 얼룩에서 기어이 한 방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왕관 모양을 그리며 핏방울이 파열했다.
카에데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 오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되어 나오고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아키라는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혀 굳었다. 앞머리 아래로 그늘진 카에데의 얼굴이 시커멓게 주름지고 있었다. 카에데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빛났다. 사냥감을 포착한 것처럼. 어둠 틈에서 간신히 엿보인 홍채는 피보다 붉은 색이었다.
"뛰어..."
어디 아픈 거냐고, 괜찮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키라는 입을 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이가 딱딱 떨렸다.
카에데가 변하고 있었다.
바닥에 제 무릎을 꾹 누르고 있는 카에데의 팔뚝에서 검은 핏줄과 근육이 불끈대며 솟아올랐다가 사라진다.
"뒤돌아서 뛰어!"
짐승의 목소리로 카에데가 외쳤다. 기세에 놀라 아키라의 뒤꿈치가 주춤, 뒤로 밀렸다. 그러면서 몸의 긴장이 풀렸다. 아키라는 농구공을 꼭 붙든 채로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도 카에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헛간 밖으로 나왔을 때, 카에데는 아키라가 서 있던 자리에 달려들어 먼지투성이 헛간 바닥에 스며든 아키라의 핏방울을 정신없이 핥고 있었다.
악몽 같은 장면이 눈에 새겨진 직후, 아키라는 뒤돌아서 집을 향해 뛰었다.
그날 밤 아키라는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공포영화를 본 날처럼 불안감에 휩싸여 천장의 어둠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눈을 감아도 떠도 카에데가 보였다.
그런 걸 뭐라고 하지? 뱀파이어? 드라큘라?
창문 밖에서 달빛이 아닌 무언가가 깜빡인다. 아키라는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림막이 사라진 카에데의 창문에서 불빛이 말을 걸고 있었다. 모스 부호다.
미 안 해
그리고 조금 있다가 또
미 안 해
세 번 정도 숨을 쉬고 나면 또
미 안 해
그렇게 영원히 사과의 불빛이 깜빡였다. 무언가 넘칠 것 같은 기분에 아키라는 주먹을 꾸욱 쥐었다. 손등에서 또 피가 터져 붕대로 스미는 게 느껴졌다.
아키라는 스위치로 달려갔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할 말을 정했다. 방 전체를 번쩍거리며 온 힘을 다해 전한다.
카 에 데
좋 아 해
다시 창문 가로 달려간다. 한동안 오두막에는 어둠뿐이었다. 다시 한 번 신호를 보낼까 싶은 생각이 들 때쯤에 짧은 답장이 돌아왔다.
잘 자
가림막이 다시 오두막의 창문을 가렸다. 아키라는 침대로 다이빙했다.
그리고 죽은 듯이 잠들었다.
다음 날 아키라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선생님의 잔소리나 당사자의 보복 이외 어떤 좋은 일도 예상되지 않았다. 좀 뭉개다 보면 잊혀지겠지. 내일은 몰래 농구부실에 가서 짐이나 빼 올 생각이었다.
밥을 먹고 다락방 안에서 빈둥거렸다. 감금 생활 같기도 하고 요새를 지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창밖으로 괜히 카에데의 오두막을 내려다본다. 창문을 가린 널빤지가 보인다. 그러고 보니 카에데는 햇빛이 있는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학교에 가지 않는 것도 그래서였구나.
카에데를 생각하면 다시 심장이 흉곽을 때린다. 두려워서인지 사랑스러워서인지 알 수가 없다. 창고 바닥을 게걸스럽게 핥던 기괴한 광경과 아키라의 팔을 쓰다듬는 도자기 같은 손길과 나는 너와 같다고 말하는 까만 눈동자와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진심 어린 사과가 뒤섞인다. 모든 기억이 심장 박동을 한 칸씩 키운다.
그때 익숙하고 정적인 풍경 속에 이질감이 섞인다.
누군가 센도 가 뒤쪽에서 나와 카에데의 오두막 쪽으로 걷고 있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였다. 그는 오두막 앞에서 창문 안쪽을 기웃거리다 가림막을 확인한 뒤, 큰 소리로 현관문을 쾅쾅쾅 두들겼다. 아무 반응이 없자 거칠게 문고리를 돌린다. 문은 싱거울 정도로 쉽게 열렸다. 남자는 제풀에 넘어질 뻔했다. 굉장한 경계심을 드러내며 남자가 주춤주춤 반걸음씩 카에데의 오두막으로 침입한다.
아키라는 벌떡 일어나 계단을 구르듯이 뛰어 내려갔다.
남자의 옆구리엔 엽총이 끼어 있었다.
남자의 아들은 정체 모를 괴물에게 살해당했다.
남자는 그날 밤 아들과 함께 있었다. 생각보다 귀가가 늦어져 숲을 가로질러 간 것이 일생일대의 후회로 남았다. 어릴 때부터 해가 진 뒤에는 숲에 들어가지 말라고 그렇게 어른들이 말했었지. 정작 자신이 어른이 되고선 잊었다.
아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아주 이상했다.
숲에서 어린애를 본 것 같아. 저쪽 같은데... 잠깐만 가 볼게.
십 분 뒤에 아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봤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비틀거리는 아들의 그림자. 한쪽 어깨 전체에 달라붙어 있는 이상한 생물. 아주 커다란 거미나 아주 깡마른 원숭이 같은... 무언가가 아들에게 기생충처럼 단단히 달라붙어 있었다. 아들은 상체를 크게 흔들어 그걸 떼어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것이 앞발을 휘둘렀다. 아들은 베어 낸 묘목처럼 볼품없이 쓰러졌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헤치고 정신없이 쫓는 사이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보라 속에서는 그것이 사라지는 방향조차 포착할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아들뿐이었다.
경찰은 남자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초동 수사에서는 곰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곰 발자국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는데도. 눈보라가 치는 날이라 금방 사라졌을 거라면서. 물론 작은 짐승의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이 세상에 그걸 본 건 남자 한 명뿐이다.
아들의 살인범이 잡혔을 때 남자는 믿지 않았다. 그건 분명히 인간이 아니었다. 잘못된 사람을 잡은 거다. 그가 아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목에서 피를 흘리며' 추락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더욱 확신했다. '그것'이 또 저지른 거다.
그러나 추락사한 그 사람은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려다 현장에서 잡혔다. 심지어 범행 미수 내용에 따르면 피해자의 '목'에서 피를 뽑아내려고 했다. 그래서 경찰이 아들의 살인범으로 기소를 준비했던 것이다. 결국 뭐였을까. '그것'의 공범? 사육사? 기르던 괴물의 먹이를 구하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굶주려 주인을 물었나?
어린애 사이즈의 흡혈박쥐라도 되는 건지?
아들을 죽인 괴물의 정체가 점점 구체화 될수록 터무니없는 것만 연상되었다. 미칠 것 같은 공상과 추리 속에서 남자는 닥치는 대로 사건이 발생한 장소들을 돌아다녔고, 쓸데없이 기웃거리며 시간을 죽이고,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엿들었다. 그러다가 병원 간호사가 동료와 소곤거리는 말을 계시처럼 주워 듣게 되었다. 그날 밤에 살인범의 딸이 왔었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냐고 물었는데. 그래 그가 자살한 바로 그날에 말이야...
딸. 아버지. 그 단어를 듣자마자 남자는 퍼뜩 생각해 냈다. 인구 적은 마을에 등장한 외지인에 대한 소문들. 사냥꾼 센도 할아범의 집 근처에 있는 폐가. 사람이 살 수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그 집에 갑자기 나타나, 어린 딸을 데리고 산다던. 슈퍼에서, 술집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서 사과하며 사라지던...
흩어진 정보들이 일렬로 맞춰진다.
남자는 엽총을 들고 오두막에 쳐들어갔다.
괴물 사냥을 하러.
오두막 안은 밤처럼 어둡고 고요했다. 남자는 벽을 한참 더듬고야 스위치를 찾아냈다. 알전구 하나에 간신히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몇 개 있지도 않은 조그마한 창문들은 널빤지로 꼼꼼하게 가려져 있었다. 엽총을 양손에 제대로 꼬나쥐고 발소리를 죽인다.
휑뎅그레한 거실 안에는 가구랄 게 없었다. 골판지 박스만 몇 개 덩그러니 뭉쳐있었다. 옷가지가 더러 보였다. 부엌에는 작은 냉장고. 싱크대에는 며칠 묵은 접시가 쌓여 있었다. 남자는 방문이 보일 때마다 발로 뻥 차서 활짝 열어 젖히고 다짜고짜 총부리를 겨눴다. 그러나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욕실이었다. 문은 당겨서 열어야 했다. 남자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단번에 문을 젖혔다. 어둠 속으로 총구를 들이댄다. 아무도 없었다.
널빤지로 위를 덮은 욕조가 하나 있었다. 관처럼 묵직하고 고요했다.
남자는 마른침을 삼키고 욕조에 가까이 다가갔다. 잠시 총을 치우고, 덮개를 치웠다. 낡은 담요가 나왔다. 세 겹을 치웠다.
천사처럼 자고 있는 어린애의 얼굴이 나왔다.
새하얀 뺨을 감싼 까만 머리칼. 단정한 미간. 거짓 없이 곧은 눈썹. 편안히 아래를 향한 속눈썹. 살짝 다물려 있는 창백하고 조그마한 입술.
남자는 후들후들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냥 애잖아. 진짜 살아있는 애라고. 초등학생이나 될까 말까 한. 아들의 마지막 말이 연상되었다. 숲에서 어린애를 본 것 같아...
다음 순간 아들의 목에 붙어 있던 그림자가 불붙듯이 떠올랐다. 딱 이 정도의 체격이었다. 어린애 사이즈의 흡혈박쥐...
남자는 무릎에 힘을 주고 벌떡 일어났다.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어떻게든 엽총을 장전한다. 철컹, 시끄러운 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욕조에 한쪽 발을 걸치고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총구를 괴물의 심장에 조준한다. 손에 자꾸만 땀이 고여서 남자는 개머리판을 턱에 괴고 세 번 정도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자꾸만 차가워지는 손가락을 천천히 방아쇠를 향해 가져가고 있을 때.
퍽!
뒤통수를 엄청난 충격이 때렸다. 남자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차가운 타일 바닥에 쓰러졌다. 누군가 엽총을 빼갔다.
욕지거리와 함께 비틀거리며 돌아본 곳에는 키 큰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아니 얼굴이 앳되다. 고등학생?
그의 뒤쪽으로 웬 농구공 하나가 굴러갔다. 저걸로 맞은 건가? 남학생은 덜덜 떨리는 팔로 어설프게 치켜든 엽총을 겨누고 있었다. 아직도 통증으로 머리가 울리고 어지러웠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 겁에 질린 남학생의 얼굴이 빙글빙글 돌았다.
남자는 지끈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남학생이 놀라 엽총을 바투 잡았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두 손을 들어 올려 공격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일단 이 아이를 진정시켜야 한다.
"도망쳐. 여긴 위험해... 괴물이..."
욕조에서 카에데가 뛰쳐나왔다. 남자의 등에 업히듯 달라붙어 목을 물었다. 비명과 피가 솟구쳤다. 아키라는 두개골 안에서 카에데의 목소리가 직접 울리는 것을 들었다.
아키라. 눈 감아.
순순히 내려감은 아키라의 하얀 눈꺼풀 위로 새빨간 핏줄기가 뿌려졌다.
비명소리가 멈췄다.
아키라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카에데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물소리가 난다. 다음 순간 이마에 차가운 물기가 와 닿았다. 가만가만 아키라의 얼굴을 닦는다. 동시에 하수구 냄새 같은 게 확 풍겼다.
아키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카에데의 눈동자가 보인다. 까맣다. 카에데가 말했다.
"고마워."
살짝 잠긴 허스키한 목소리. 아키라는 다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큰일을 해낸 사람처럼 팔다리에 힘이 풀렸다. 꾹 쥐고 있던 엽총이 바닥에 닿아 툭, 하고 맥없는 소리를 냈다.
카에데는 왠지 알몸이었다. 아키라는 흠칫 놀라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차가워서인 줄 알고 카에데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다시 아키라의 목 아래 튄 핏자국을 정성스레 닦는다. 카에데가 손에 쥔 건 걸레 냄새가 나는 물 적신 천의 끝자락이었다. 그 더러운 천은 욕실 바닥까지 흘러내려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방금까지 카에데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그 자리에서 옷을 벗어 소맷부리에 물을 묻혀 짜낸 거다. 아키라에게 튄 핏자국을 닦아주기 위해서. 아키라는 그 망설임 없는 행동이 카에데의 애정이자 사과임을 알았다.
눈을 내리깔고 아키라를 닦아주는 카에데의 가슴팍은 납작했다. 갈비뼈가 살짝 드러날 정도로 마른 상체. 홀쭉 들어간 배를 지나 그 아래 솜털도 없는 다리 사이는 밋밋햇다. 아무것도 없었다. 덜렁이는 것도 갈라진 틈도.
자신도 모르게 카에데의 벗은 몸을 훑어봤다는 것을 깨닫고 아키라는 퍼뜩 시선을 올렸다. 카에데는 아키라의 시선을 전혀 모르는 듯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키라의 목 주변과 손목까지 섬세하게 살피면서 남은 핏자국이 있는지 살폈다. 옷에 묻어 빠지지 않는 얼룩을 아쉬운 듯이 끝끝내 문질렀다.
걸레 같은 옷가지를 욕조 쪽으로 휙 던진 카에데가 망부석처럼 서 있는 아키라를 지나쳐 거실로 나갔다. 아키라는 박스에서 잡히는 옷을 꺼내 뒤집어쓰는 카에데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문득 지금이 모든 것을 물어보기 좋은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에데."
"응."
"그 사람이 너한테 괴물이라고 했어."
카에데는 아키라를 마주 보았다. 천천히 무릎을 끌어안고 바닥에 앉는다. 아키라도 스르르 주저앉았다. 까만 눈이 서로를 마주 본다. 카에데가 속삭였다.
"나는 괴물이 아냐."
아키라도 그렇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카에데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릎을 끌어안은 카에데의 손이 꼬옥 주먹을 쥐는 것이 보인다.
"나는 너와 같아. 그냥... 병에 걸린 거야. 안 좋은 병에."
아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카에데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사람이 그걸로 나를 쏴도 나는 안 죽어. 나를 죽이려면 저걸 치워야 해."
카에데가 창문을 가리켰다. 널빤지가 꼼꼼하게 덧대어져 있었다. 카에데의 말투는 침착하고 담담했다.
"그러면 나는 불타서 죽어."
아키라는 전율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굶어서 죽는 건 잘 안됐어. 정신을 차리면 무언가를... 먹고 있었어. 아까처럼."
카에데의 말투는 침착하고 담담했다. 자신을 향한 동정도 비난도 없었다. 아키라는 깨달았다. 아까 그건 카에데에겐 살인도 아니고 공격도 아니고 식사였던 거라고. 카에데가 걸린 병은 그런 것이었다.
아키라는 충동적으로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너 그러면 열두 살이 아니야?"
카에데가 의문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열두 살이야. 말했잖아."
"그러니까... 영화 같은 걸 보면 뱀파이어들은 몇백 년씩 살잖아. 너는 아니야?"
"아."
카에데가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사람 손톱이 열 개라는 걸 설명하듯이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다.
"12년 전에 태어난 건 아니야. 하지만 나는 열두 살이야. 언제나 그랬어."
아키라는 그 말을 곱씹어봤다. 그래도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었다. 손에 턱을 받치고 카에데를 바라본다. 카에데는 조금 불안한 듯이 재촉하며 물었다.
"이상해?"
아키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안 이상해."
카에데는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손가락을 조금 꼼지락거리면서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켜줘서 고마워."
아키라의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말이었다.
"나도 널 지켜주고 싶어."
카에데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아키라를 바라본다.
"나를 크게 부르면 돼.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면 내가 갈게. 꼭 지켜줄게."
아키라는 무릎을 꿇고 바닥을 기어가서 카에데를 끌어안았다. 차가운 카에데의 몸에서는 꿉꿉한 먼지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상하게 하나도 역겹지 않았다. 카에데의 온도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그날 아키라와 카에데는 욕조 속에서 서로를 꼭 껴안고 잠들었다. 관처럼 숨 막히고 바다처럼 어둡고 죽음처럼 따스했다.
다음 날, 아키라는 해가 다 진 다음에야 체육관으로 몰래 숨어 들어갔다. 확실하게 아무도 없는 시간을 노린 것이었다. 라커에서 제 짐만 빼돌려 얼른 돌아가려고 했지만.
"찾았다. 센도. 쥐새끼 같은 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타난 녀석은 아키라만큼 키가 큰 고등학생 뒤에 숨어 있었다. 척 봐도 양아치였다. 놈의 형이라고 묻지도 않은 자기소개를 하더니 아키라의 목덜미를 붙들고 강제로 연행했다. 항상 끌고 다니는 무리 두 명이 망을 보고 있었고, 아키라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동료 부원이 찜찜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뒤를 졸졸 따라왔다.
"전 가도 되는 거죠? 이제 열쇠 주세요."
"다 끝나면 알아서 줄 테니까 닥치고 있어라."
양아치는 아키라를 체육관 옆 실내 수영장으로 끌고 갔다. 아키라의 머리부터 물속으로 처박는다. 중학교 수영장의 가장 깊은 곳은 170cm. 아키라는 발끝을 들어야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 물 밖에 쪼그리고 앉은 그가 가죽 재킷 안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냈다.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흔들다가, 턱을 들어 올려 콧구멍을 수면 밖으로 유지하려 애쓰고 있는 아키라의 미간을 가리켰다.
"그렇게 쫄지 마. 이건 그냥 놀이니까."
칼끝이 양아치의 등 뒤쪽 벽을 가리킨다.
"저기 벽에 시계 보여? 우리 숨 참기 놀이하자. 네가 3분간 물 속에서 숨을 참으면 그냥 꺼질게. 못 참으면 뭐..."
다시 주머니칼이 찰랑찰랑 소리를 낸다. 아키라는 고개를 흔들고 싶었다.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벌리면 물이 들어올 것 같았다. 지금은 반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럼 셋부터 시작이다. 하나, 둘, 셋!"
아키라는 숨을 잔뜩 들이마시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속으로 애타게 외쳤다.
카에데.
농구부원은 아키라가 걱정이었다. 수영 시간에 가장 숨을 오래 참은 아이도 1분 20초였다. 시계가 40초를 넘어간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그가 초조하게 외쳤다.
"저기요, 너무한 거 아니에요? 진짜로 센도가 물에 빠지면..."
"닥치고 있어!"
양아치가 위협적으로 칼을 흔든다. 농구부원은 지금이라도 달려 나가 누구라도 불러올까, 그럼 이 양아치가 칼을 휘두르며 저를 쫓아오지 않을까, 차라리 그동안 아키라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이번엔 내가 당하는 걸까, 별생각을 다 하면서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그때, 유리로 된 수영장 천장의 채광창이 와장창 깨졌다. 모두가 그쪽을 쳐다보았다.
창문이 있던 곳에 새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앉아 있었다. 밤하늘을 등에 짊어진 천사가 날카롭게 명령했다.
"들어오라고 말해!"
정확히 농구부원을 보고 있었다.
"나한테 들어오라고 말해!"
농구부원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들어와."
센도는 물속에 있었다. 그래서 다음에 벌어진 일을 직접 보지 못했다.
중학교 실내 수영장에서 밤중에 일어난 사건은 최근 있었던 두 건의 끔찍한 연쇄살인을 뛰어넘는 잔혹한 범죄였고 금방 전국 뉴스를 탔다. 하지만 진짜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사망자 두 명은 형제로 알려졌다. 각각 고등학생과 중학생인 그들의 사체 일부는 물에 떠 있었고 일부는 있을 수 없는 곳까지 날아가 있었다. 현 단위의 모든 법의학자가 달려들어도 일의 경위를 파악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했다. 무엇이 사람의 신체를 이렇게 가르거나 뜯거나 찢을 수 있단 말인가? 절단면을 아무리 분석해 봐도 갈라진 건지 뜯긴 건지 찢긴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디에서 어떤 공격을 받아야 마지막 위치가 그렇게 될 수 있는지도. 핏자국 역시 힌트를 주기는커녕 더욱 미궁에 빠뜨렸다. 가령 현장에서 발견된 특정한 핏자국이 자연스럽게 남으려면 최소한 천장 높이에서부터 피가 떨어져야 한다는 식이었다.
목격자는 세 명. 모두 중학생. 그들의 진술은 서로 어느 정도 일치했다. 한결같이 판타지 소설이나 추상화나 악몽과 별다를 바 없는 횡설수설이라는 점에서.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이 봤다고 생각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를 줄줄 읊는 목격자들의 모습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기괴하기까지 했다.
경찰은 너무나 끔찍한 범죄가 아직 아이인 목격자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기는 바람에 환상과 뒤섞인 것이 아닐까 결론 내렸다. 상식적인 어른이라면 누구나 그런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아키라는 역무원에게 표를 내밀었다. 틀림없는 특등석 침대칸이었다. 역무원은 안쪽으로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짐 태그는 잘 가지고 계신가요?"
아키라는 주머니에서 다섯 개의 태그를 꺼내 보여주며 싱긋 웃었다. 역무원은 살짝 묵례를 남기고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카에데의 박스는 화물칸에 잘 실려 있다. 몇백 년을 함께 떠돌아다닌 카에데의 간소한 짐에는 현금과 현금화할 수 있는 패물이 충분했다. 아키라가 소지한 짐은 사람만큼 커다란 캐리어 하나뿐이었다.
똑똑똑, 캐리어 안쪽에서 길고 짧은 두드림이 들렸다.
모스 부호다.
아키라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은 노을이 지고 있다. 불타는 하늘이 재가 된 후에야 긍정적인 신호를 되돌려 줄 수 있으리라. 기차 안의 몇 없는 사람들이 다 잠들고 난 깊은 밤에는, 무임승차한 연인을 몰래 꺼내어, 꼭 껴안고 함께 별을 셀 수 있을지도.
기차는 북쪽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