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암의 꽃 막간
불면의이쑤신
서태웅은 만으로 19세...도 아니고 심지어 빠른이라 18세에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갔다. 1년 10개월 육군 복무 뒤에 상반기 1금융권 은행 공채 특성화고 전형으로 취직했다. 만 20살이었다.
4년 차까지 서태웅은 집 헬스장 회사 집 헬스장 회사만 다녔다. 헬스도 별로 재밌어서 하는 거 아니고 그냥 오래 앉아 있으려니 허리 아픈 것 같아서 시작했다. 아침에 샤워하고 출근하기도 편하고. 러닝머신 30분. 웨이트 30분. 척주기립근과 둔근과 허벅지 위주로. 요즘도 처음 온 사람들은 서태웅을 트레이너로 착각한다. 정작 진짜 트레이너들은 맨날 서태웅 회원님 바디 프로필 찍어 보실 생각 없냐고 살살 꼬셨는데 서태웅은 가차없이 거절했다. 내 바디를 왜 찍지. 서태웅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제안이었다.
좋은 회사는 복지도 빵빵해서 헬스장 제휴 할인도 되고 자기 계발 비용 지원으로 돈도 내 준다. 사실상 서태웅은 생활에서 돈 들 일이 거의 없었다. 집도 여의도 근처라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니 교통비도 안 들고. 점심과 커피는 거의 선배들이 사 주거나 개인 법카로 사 먹었다.
팀의 유일한 고졸인 서태웅은 연차가 쌓이는 동안에도 나이로는 오랫동안 막내여서 거의 계산할 일이 없었다. 운동 끝나고 아침 식사는 탕비실을 털었다. 팀 간식 담당에게 부탁한 고단백 두유에 단백질 쉐이크를 타서 훈제란 두 개와 함께 먹었다. 이러니까 근육이 잘 붙어서 바디 프로필 찍으라는 소리가 나오는 건데.
하는 일은 별거 없는데 성과급과 상여비는 꼬박꼬박 통장에 쌓인다. 서태웅은 심지어 부모님 댁에 산다. 부모님께 다달이 얼마쯤 부쳐 드리긴 했지만 생활비라기엔 민망하고 용돈이라기에도 귀여운 금액이었다. 부모님은 그저 막내아들이 갓 스물에 돈 벌어서 조금이나마 성의 표시를 하는 것이 마냥 기특했다.
진짜로 돈 쓸 일이 없다. 서태웅은 옷 취향도 예전부터 그대로라 새로 살 것도 별로 없고 고등학교 때 지금 체격이 된 이후로 산 옷들을 그냥 입었다. 유행은 잘 몰랐다. 그냥 가끔 좋아하는 브랜드 거 샀다. 회사에는 비즈니스 캐주얼까지는 허용인데 어떤 걸 입어야 할지 잘 몰라서 그냥 선배들이 맨날 입는 체크무늬 셔츠가 가이드인 줄 알고 색깔별로 잔뜩 사서 그거만 돌려 입었다. 사실상 개발조직의 유니폼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시간도 남아돌았다. 서태웅은 친구도 없고 술도 별로 안 마시고 여행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낮잠을 제외하면 집에서 게임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일찍 퇴근해도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서태웅은 편안하게 게임 삼매경에 빠졌다. 연차는 거의 돈으로 받았다.
게임에도 질린 서태웅은 외주 일을 시작했다. 풀 스택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외주를 딸 수 있었다. 주로 프론트엔드가 많았지만. 회사에서 쓸 일 없어 발전이 없는 개발 실력을 단련하기 좋았다. 인맥이라는 게 없는 서태웅은 고등학교 때 친구의 여자 친구 따위의 희미한 연으로나마 알음알음 외주 일을 소개받았고 딱히 다른 할 일이 없어서 마감을 잘 지켰다.
서태웅은 입출금 통장에 삼천만 원이 넘게 쌓일 때까지 내버려 두다가 엄마한테 들켜서 혼나고 적금과 예금에 대해 배웠다. 은행 다니면서 왜 이런 것도 모르냐고 한 소리 들었다. 할 말이 없었다.
4년 차까지는 그랬다.
윤대협의 데뷔 무대를 보기 전까지는...
서태웅은 24살부터 27살까지 햇수로 4년 간 윤대협을 쫓아다니느라 쌓인 연월차를 몰아 쓰는 것은 물론 다음 해와 다다음 해 연월차까지 죄다 땡겨썼다. 이 회사에 뼈를 묻으리라. 무조건.
지금까지 쌓이기만 했던 돈은 술술 빠져나갔다. 가까이는 부모님의 칠순 잔치, 멀리는 첫째 누나네 조카 대학 등록금으로 쓰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던 목돈은 윤대협 덕질의 개미지옥으로 빨려 들어갔다. 엄마 아빠 죄송합니다. 조카 미안.
2년을 미친 듯이 덕질하고 저금이 5분의 1 수준으로 줄었을 때 팬데믹이 터졌다. 영통팬싸 한 번 이외에는 돈을 쓸 수가 없어 다시 통장에 돈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는 서태웅의 울분도 함께 쌓였다.
사실 생각보다 서태웅은 덕질에 엄청나게 돈을 많이 쓰진 않았다. 일단 악명 높은 돈 먹는 하마인 팬싸 보기를 돌같이 했으니까. 또 카메라나 캠코더에 돈을 쓸 일도 없었고. 황금손이라 대리티켓팅에 한 재산 들일 필요도 없었다. 다만 모든 행사에 다 갔기 때문에 교통비가 들었고 (슬프게도 숙박비는 들지 않았다... 거의 길에서 잤기 때문이다...) 해외 투어가 요주의 잔액 진공청소기였다.
그래도 서태웅은 갈 수 있는 무대가 있으면 갔다. 데뷔 해에는 무대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빛나는 윤대협을 보고 싶어도 기회 자체가 없었던 시절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돈이 드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정 궁하면 다시 외주를 구해도 된다. 몸으로 때우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 서태웅에게는 윤대협의 퍼포먼스를 볼 수 있는 모든 순간이 귀했다.
일반인 코스프레. 서태웅은 일코의 마스터클래스다.
서태웅은 덕질을 시작하면서 기기부터 분리했다. 일할 땐 앱등이. 덕질할 땐 애국자.
윤대협이 데뷔하기 전부터 회사 일과 외주 일은 아이맥과 맥북으로 했고 아이폰과 애플워치를 썼다. 전형적인 개발자처럼.
그런데 덕질을 시작하면서 고민에 빠졌다. 일단 회사 네트워크가 깔린 컴퓨터로 덕질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갤럭시를 하나 더 사서 투 폰을 쓰기 시작했다. 노트북도 하나 샀다. 터치스크린이 되는 걸로. 드럽게 비쌌지만 티켓팅을 찢을 수 있는 비결 중 하나이기도 했다. 손은 어디를 터치해야 하는지 알면 눈으로 보고 쫓아가야 하는 클릭보다 무조건 빠르다. 서태웅은 수제 매크로도 몇 번 시도는 해봤지만 매크로끼리 경쟁과 충돌이 빡세다는 걸 알고 접었다. 의외로 진입만 빠르면 손이 훨씬 나았다. 움짤을 따고 자컨을 보기 위해 갤탭까지 질렀다. 개발자인 서태웅은 IT 기기를 새로 사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대신 한 번 사면 오래 썼다. 새 걸 계속 사진 않았다. 덕질 초반에 마련한 장비들은 5년째 서태웅을 든든히 지원했다.
고로 덕질할 때 들고 나가는 핸드폰은 얼마든지 댑.꾸(대협꾸미기라는 뜻)를 해도 된다. 덕질용 갤탭과 노트북에도 이것저것 붙인다. 서태웅은 굿즈에 반포자이 살 돈을 들이지는 않았지만, 트윗덱과 번개장터와 당근마켓에 키워드 알림을 걸어 놓고 자신이 마음속으로 설정한 가격 이하의 양도가 뜨면 망설임 없이 채팅을 걸어서 차지했다. 다른 분과 채팅 중이라는 말에는 저는 오늘도 거래되고 직거래도 가능하고 택배도 상관없다고 최대한 밀어붙여서 거래를 따냈다.
문제는 직거래에 서태웅이 직접 나갈 수는 없다는 거였다. 그러면 같은 오타쿠에게 트위터 거래계와 당근마켓 계정과 번개장터 계정과 남신팬이 연결된다. 서태웅이 고심 끝에 발견한 해결책은...
작은누나였다.
대학생 때 잠깐 자취를 해 보더니 저는 엄마 아빠랑 사는 게 훨씬 좋다며 취직 뒤에도 안 나가고 눌러앉은 작은누나. 작은누나는 서태웅을 조수석에 태우고 엄마 차를 몰고 직거래를 하러 나갔다. 길가에 불법정차를 하고, 비상등을 켜고, 서태웅이 얌전히 기다리는 동안 누나는 10초 만에 거래를 끝내고 털레털레 돌아왔다. 집에 가는 길에 서태웅은 수고비로 떡볶이 타코야끼 아이스크림을 뜯겼다. 서씨 집안 남매들은 예로부터 잘 먹었다.
이런 전차로 서태웅의 작은누나는 막내의 윤대협 덕질을 잘 알고 있었다. 서태웅은 브로마이드를 방 안에 덕지덕지 붙이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제일 마음에 드는 거 한 개 정도는 붙여놨다. 1집 때 윤대협 단독 브로마이드. 작은누나는 그걸 보고 올드비 부심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서태웅은 흥 코웃음 치고 말았다. 맘대로 생각하시라. 그 외에도 책상 위에 조그맣게 윤대협의 성전을 만들어서 마음에 드는 굿즈와 슬로건을 전시해 놨다. 제 방에 허락 없이 쳐들어 올 사람은 작은누나 정도였기 때문에 눈치 볼 일도 없었다.
서태웅의 큰누나는 이미 결혼해서 애가 있고 작은누나는 뼛속까지 머글이었다. 오타쿠 DNA 자체가 없었다. 서태웅은 본인도 그런 줄 알고 살았다. 윤대협 데뷔 전까지는.
지방 스케줄을 쫓아다닐 때는 부모님께도 윤대협 덕질을 오픈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 출근 아니고는 집 밖을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던 막내가 갑자기 외박한다고 하면 걱정하시니까. 부모님은 인생을 지나치게 반듯하게만 살던 아들이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수줍게 말하는 게 그저 귀엽고 사랑스럽고 기특했다. 얘가 집 밖에 나가서 쫓아다니고 싶은 게 생겼다니. 부모님은 무조건 지지해 주기로 했다.
해외에 나간다고 했을 때는 과연 놀랐지만 매일 빠짐없이 연락하기로 약속한 거 말고는 딱히 반대까진 안 했다. 이 기회에 해외여행으로 견문을 넓히고 오라고 격려하며 용돈을 보태주시기까지 했다. 물론 서태웅도 평일 연차 내고 가는 모든 공방과 스케줄을 이실직고하진 않았다. 그거는 정말 걱정하실 일이므로. 대충 회사 끝나고 저녁에 들렀다 온 척하거나 야근하고 온 척했다.
사실 회사 사람들과 가족을 제외하면 서태웅에겐 일코를 할 만한 사람도 딱히 없었다. 서태웅의 교우 관계는 고등학교 시절에 멈춰 있다.
딱 한 명. 이 덕질을 오픈할 수밖에 없었던 녀석이 있다.
간만에 스케줄 없는 휴일. 윤대협이 스케줄이 없으면 서태웅도 없다.
밀린 떡밥 복습하며 움짤을 따는데 익숙한 이름이 휴대폰에 떴다. 서태웅은 혀를 한 번 차고 전화를 받았다.
"왜."
"어허. 여우 자식 말버릇하고는. 내가 뭐 좋다고 너한테 전화했겠냐?"
서태웅이 의자 위에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뭐 떴어."
"뭐라고~? 말투가 재수 없어서 안 들려~"
하... 서태웅은 깊은 한숨을 쉬고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책 읽듯이 말했다.
"천재 강백호 님. 멍청한 저를 위해 제발 윤대협 비공개 스케줄을 알려주세요."
핸드폰 너머로 캬하하 낄낄낄 하는 비열하고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서태웅은 주먹을 꾹 쥐었다. 패고 싶다. 만나면 꼭 인사해야지. 발차기로.
"스케치북 확정이래. 방청 신청해라. 내일부터랜다."
"ㅇㅇ ㄱㅅ"
"싸가지 없는 여우 자식... 끊어!!"
안 그래도 끊으려고 했던 서태웅은 '끊'까지 듣고 냉큼 통화 종료 버튼을 연타했다. 먼저 끊었다고 그새 열받은 강백호가 카톡으로 ㅗㅗㅗㅗㅗ를 잔뜩 보냈다. 서태웅은 안읽씹했다.
강백호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별로 친하지는 않았다. 악연이라고 봐야 맞다.
강백호와 서태웅은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 없다. 노는 그룹이 겹치지도 않았다. 서태웅은 노는 그룹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강백호는 일진도 아니고 그렇다고 범생이도 아닌 묘한 무리랑 어울렸는데 고색창연하지만 '양아치'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놈들이었다. 그러니까 발랑 까진 일진들처럼 삥을 뜯거나 여자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술이나 담배는 예사로 달고 다니고 땡땡이도 밥 먹듯이 쳤다. 피씨방보다 오락실에 죽치기를 좋아했다. 사실 일진들보다 이쪽이 물리적으로는 훨씬 무서웠다. 그런 것치고는 점심시간에 축구도 하고 평범한 고딩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반면 서태웅은 외모가 눈에 띌 뿐 얌전하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강백호와 서태웅의 공통점은 입학 직후 일진의 눈에 띄어 시비가 털렸다는 거고 둘 다 주먹으로 침묵시켰다는 점이다. 일진들은 그 후 강백호를 철저하게 피해 다녔고 서태웅에게는... 동네 여고 일진들과 놀러 갈 때 껴달라고 부탁했다. 서태웅은 당연히 무시했다. 게임하기도 바빴다.
강백호는 1학년 때 옆학교 공학 다니는 여자애랑 우연히 만나서 같이 운동하며 썸을 타기 시작했는데 그 여자애가 교문 앞에서 강백호를 기다리다 하굣길에 피씨방에 가는 서태웅 얼굴을 보고 저 잘생긴 애는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댄다. 분노한 강백호는 피씨방까지 쫓아와서 서태웅한테 다짜고짜 주먹으로 결판을 내자고 했고 서태웅은 종목을 바꾸자고 했다. 게임으로.
한 번도 게임을 해 본 적 없는 생초짜 강백호는 서태웅에게 철저하게 발리고 열받아서 하는 법을 가르치라고 막무가내로 졸랐다. 그렇게 서태웅은 방과 후 강백호에게 롤, 와우, 오버워치, 메이플스토리, 마비노기를 가르쳤다. 강백호는 생각보다 재능이 있었다. 썸 타던 여자애도 마비노기를 잠깐 같이했다고 한다. 그래픽 귀엽다고.
게임할 때만 친한 강백호와 서태웅. 학교에서 만나면 또 으르렁거리고 티격태격 싸우고. 방과 후 서버에서 만나거나 아예 피씨방 가서 게임하고. 나란히 낙제하고. 그래도 서태웅은 전공인 컴공은 날라다녔는데. 강백호는 그냥 깔끔하게 다 낙제였다. 맨날 보충수업 듣느라고 게임 못 한다고 서태웅이 불평했다.
서태웅이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간 동안 강백호는 알바나 하면서 노닥거렸다. 그러는 동안 사귀던 여자애가 대학에 갔고 3학년 때부터 아나운서 준비를 시작했다. 서태웅이 취직해서 신입으로 구르는 동안 강백호는 방송계 진출을 마음먹었다. 힘쓰는 알바가 뭐가 있나 찾다가 현장에서 촬영 보조를 시작했는데. 의외로 금방 공중파 촬영감독 아저씨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다. 강백호 성격이라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인사성 밝고 시원시원하고 잘 웃고 칭찬 잘하고. 눈치 빠르고 관찰력 좋아서 촬영에 대한 지식이 1도 없는 주제에 잡일을 척척 해냈다. 일단 힘은 장사라서 남이 들고 가던 트라이포드까지 뺏어 가는 지경이니. 모두가 강백호를 예뻐했다.
결국 강백호는 한 PD의 눈에 들어 아르바이트 4개월 만에 잘 나가는 외주 스튜디오 정규직 FD가 된다는 기염을 토했다. 몇 년 뒤에는 공중파로 경력 이직했다. 서태웅이 윤대협 덕질을 시작한 시기였다.
그래서 서태웅은 윤대협이 복면을 쓰고 노래를 할 때도, 미리 라인업을 공개하지 않는 스케치북류의 음악방송에 나올 때도 강백호를 통해 확인하고 방청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정보만 알면 서태웅은 방청 신청이 잘 당첨되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남자 방청객은 귀하기 때문이다.
돈을 줘도 사기 힘든 계자 친구. 그게 강백호였다.
다만 정보를 줄 때마다 치욕스러운 대사를 강요했다...
강백호 여자 친구는 무사히 언론계에 진출해서 신문사들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한답시고 사이트 구축이나 인터랙티브 페이지를 만들고 싶어 할 때 서태웅에게 소중한 외주를 물어다 주는 고마운 역할을 했다. 강백호는 이것조차도 툴툴거렸기 때문에 무지막지한 양의 고기를 사 먹이며 달래야 했다. 귀찮은 자식.
서태웅은 알페스의 존재를 알긴 알았다.
당연하다. 서태웅은 웹 크롤링으로 윤대협에 대한 정보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그 덕분에 뭔 이름도 이상한 파일럿 프로그램 스튜디오 녹화 방청객으로 일부 대학교에서 커플만 쌍쌍이 모집한다는 공지 사항도 알아내서 작은누나랑 같이 신청해 윤대협 보러 가고 그랬다. 단순한 토크가 아니고 무려 커버 곡을 부르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파일럿만 방영되고 망했지만.
서태웅의 웹 크롤링 데이터에 가장 눈엣가시가 바로 postype.com이었다. 물론 알페서들은 제목에 윤대협이나 그룹명을 박아 놓진 않았지만, 본문에는 반드시 서치 방지 없는 이름이 한 번씩 나오기 마련이고 그건 크롤링 결과에 심각한 노이즈가 됐다. 서태웅은 열받아서 사이트 자체를 브라우저에서 차단해 버렸다.
그래서 한참은 알페스를 접하지도 않았다. 이건 서태웅이 생활 리듬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덕질을 하는 중요한 비결이기도 했다. 2차 창작과 소셜 활동을 하지 않으면 의외로 밤을 새울 일이 없다. 그러니까 오타쿠만 알아듣는 고맥락 토크에 날이 새거나 포타를 읽고 또 읽으며 과몰입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서태웅은 영상 재탕과 움짤 찌는 것만 자제가 가능하면 수면 시간을 사수할 수 있었다. 정 안 되면 공방 대기하면서 자면 되고. 서태웅은 이제 서서도 잘 잤다.
서태웅이 처음 팬픽을 읽어 본 건 팬데믹 때였다. 모든 것이 이레귤러였던 시절. 공방 방청이 막히고. 잡아뒀던 페스티벌이 죄다 밀리고 연기되고 취소되고. 지방 축제가 다 망하고. 드러누워서 자컨, 브이랍, 인라 재탕하기도 지쳐버린 서태웅은 차단했던 포스타입 사이트를 잠시 풀었다. 너무 심심했기 때문이다.
윤대협은 알페스 계에서 씹탑 오브 씹탑 대접을 받았다. 심지어 타 그룹에서도 가끔 모셔가서 크로스오버를 할 정도였다. 씹탑이 아니면 차라리 바텐더. 물론 세상에는 다양한 취향이 존재하므로 리버스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쌉마이너였다. 윤대협 본인이 그룹에서 최고 인기인데 왼른 캐해 비율이 9:1 정도라는 건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정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바텐더 캐해도 많았던 것이... 윤대협은 비게퍼를 안 말아줬다. 아주 자린고비였다. 일단 퍼스널 스페이스가 너무 넓었다. 안무나 화보 촬영 같은 지정된 포즈가 아니면 사람 옆에 딱 붙지를 않았다. 누가 일정 이상 가까이 오면 항상 자연스럽게 한 발짝 옆으로 떨어졌다. 얼굴은 친절한 형처럼 싱글벙글 웃고 있어서 딱히 벽 치는 느낌이 아닌데 행동은 그랬다. 대기실에서도 맨날 혼자서 벽에 등 기대고 무릎 쭉 펴고 폼 잡고 앉아있었다. 옆에 누가 오면 한 걸음 엉덩이를 옆으로 이동하거나 일어서서 마주 본다. 진짜 자연스러우면서도 유난스러웠다. 물론 윤대협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대협 최애들이나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와꾸와 피지컬과 성격이 저러니까 알페서들은 눈 막고 귀 막고 몰라 몰라 난 윤대협도 리디광공으로 먹을 거야 외치면서 꼴리는 대로 열심히 창작했고 포스타입에 막대한 수수료를 가져다주었다.
서태웅은 가장 메이저 CP를 인기순으로 늘어놓고 딱 10개 읽어봤다. 감상은 간결했다. 음란물이구나. 서태웅은 항상 팩트가 감정에 우선하여 튀어나오는 편이었다.
남중 남고를 나온 서태웅에게 음란물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쾌하진 않았다. 또래들은 정신을 못 차렸지만, 서태웅은 굳이 감상을 붙이자면 비위생적인 영상이라고 생각했다. 서태웅은 심지어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보이는 키스신도 로맨틱하기보다는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재채기하다가 제 침이 튀긴 것만 봐도 드러워서 얼른 닦는데 남의 침을 먹는다? 상상만으로 얼굴이 찌푸려지고 고개를 흔들게 됐다. 뽀뽀 정도라면 괜찮은지도. 물론 경험이 없으니 다 가정일 뿐이지만.
윤대협이 등장하는 음란물은... 일단 영상이 아니라서 충격이 덜했고. 중고딩 때 같은 반 녀석들이 쪽팔린 줄 모르고 큰 소리로 틀어 놓고 보던 포르노와 다르게 배경과 서사와 감정선이 탄탄하여 퀄리티가 높았다. 그래서 몰입해서 보다 보면 제법 흥분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윤대협이 굉장히 실감 나서 기분이 이상했다.
서태웅은 가끔 성 충동이 쌓일 때 포스타입에서 마음에 들었던 알페스 소설을 여러 번 읽었다. 하체가 반응하면 그냥 잘 때도 있었고 가끔은 자위를 하기도 했지만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남자는 별걸로 다 서기도 하고 야한 걸 본 건 맞으니까. 야동 보고 자위했다는 게 꼭 거기 나오는 여자나 남자랑 섹스하고 싶다는 건 아니듯이.
서태웅은 몰랐다. 자신의 최애 소설을 쓴 알페스 글러가 댑x보의 창시자로서 8인의 단톡방에서 매일 1호선 광인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을... 가끔 미친 뽕빨 댑x보 꾸금씬을 500자씩 장문 카톡으로 갈겨서 지탄과 찬사를 처맞고 곧바로 삭제하는 광기를 남몰래 쏟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세상에는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인 것도 존재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