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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3.07.11

서른 Last shot

불면의이쑤신

월요일. 마케팅 부서에서 센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새 광고 기획을 맡을 대행사 경쟁 PT가 끝났고.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이 예산을 좀 세게 불러서 재무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긴급한 건이었다.

숫자만으로 판단할 수도 있었지만. 센도는 잠깐 고민한 뒤에 기획안을 요약해서 비교해 달라고 했다. 수익 대비 적절한 마케팅 예산은 어차피 정해져 있고 전담 부서가 그걸 모를 리 없다. 따로 부탁해서까지 예외를 만들고 싶은 가치가 있나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금방 미팅이 꾸려졌다. 역시 마케팅. 재빠르다. 핵심 비주얼을 중심으로 기획의 차이를 알려 주는데.

레퍼런스 사진을 보고 숨이 멎었다.

"유명한 농구선수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이라고 해요. 14년 전 날짜가 찍힌 사진을 같은 장소에서 디지털로 다시 찍은 건데. 사진 속엔 본인이 있고 실제 풍경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누군가 찍어 준 사진을 가져가서 본인이 다시 찍고 있는 것 같아요. 미스터리하면서도 아련하죠. 추억을 암시하고요.

아날로그와 스마트폰이 만나는 지점을 강조하기에 딱이에요. 돌이킬 수 없는 혁신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도 잘 붙고. 지금 카메라 달린 휴대폰 판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중이라 곧 유행할 것 같다는 감이 와요. 아직 기사가 나올 정도로 유명하진 않은데. 빨리 선점할수록 효과가 커질 거예요."

침묵으로 사진들을 응시하는 센도를 보고 마케팅 팀장은 됐다 싶었는지 밝게 덧붙인다.

"사진 느낌 있죠? 이 선수 페이스북에 딱 이 사진 네 장만 있대요. 솔직히 비주얼에서 이만한 퀄리티를 뽑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에요. 뭐 원본만큼은 못하더라도 워낙 컨셉이 좋으니까. 선점이 우선일 것 같고. 돈 들이면 괜찮지 않을까 싶고."

사실 센도는 하나도 안 듣고 있었다.

혹시 그게 첫사랑이었나 싶었던 순간들이 거기 다 있었다.

한참 뒤에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디테일. 캡처 속 하트 숫자가 몇백 단위다. 매너 위반 아닌가. 찍은 사람 허락도 안 받고. 센도는 피식 웃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자 마케팅 팀장이 깜짝 놀랐다. 센도는 보통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상대방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190cm가 갑자기 눈앞에 서면 대부분 위축되기 때문이다. 그런 센도가 아무 말 없이 갑자기 기립하는 기세에 그 장소의 모든 사람이 흠칫했다.

그걸 눈치채지도 못하고 센도는 팀장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것도 드문 일이다. 센도는 퍼스널 스페이스가 아주 넓다.

"진행하세요. 마케팅 판단에 맡길게요."

센도는 그대로 나왔다. 등 뒤의 회의실에서 다급하고 우렁찬 대답이 들렸다. 어쩌면 센도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좋았다.

다음에 올라올 사진이 어딘지 안다.

센도는 그 길로 대표실로 갔다. 다짜고짜 일주일 휴가를 쓰겠다고 말했다. 센도는 회사에서 연차가 가장 많이 쌓인 사람 중 하나다. 대표는 센도의 기세에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금방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주 바쁜 거 없으면 뭐. 어디 여행이라도 가게? 낚시? 캠핑?"

센도가 장난꾸러기처럼 씨익 웃었다.

"고향에 가 보려고요."

대표는 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즉시 부서 인수인계를 가다듬고 반차를 쓴 뒤 회사를 뒤로했다. 나는 듯이 빠져나가는 센도의 뒷모습에는 아무리 대표라도 당황했다. 더 놀란 부하 직원들에게 집안에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으니 캐묻지 말라고 수습했다.

거짓말이다. 센도는 도쿄 출신이다. 사람들이 그리운 것을 두고 온 장소에 갈 때 으레 하는 말을 따라 해 봤을 뿐이다.

운전대를 잡고 그 길로 카나가와로 향한다.

센도는 다음에 올라올 사진이 어딘지 안다.

그리고 루카와는 센도가 그걸 안다는 사실을 모른다.

깜찍한 서프라이즈를 갚아 줄 때다.


루카와 카에데는 사진 한 장을 들고 열여섯 살 때 좋아했던 사람이 살던 집 앞에 섰다.

평범한 맨션이다. 그때보다는 훨씬 낡았다. 당연하다. 중학생 나이만큼 축년 수가 더 붙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하얗고. 깔끔하고. 딱 한 번밖에 안 와 봤는데 기억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본다. 이불 위에 누워 있는 옆얼굴. 감은 눈에 드리워진 속눈썹 위로 얌전하게 그늘을 씌우는 짙은 눈썹 뼈. 베개와 이마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앞머리. 평소처럼 바짝 서 있지 않아서 낯설고 편안하다. 잘생긴 광대가 뻗어 있고. 그 아래 약간 눌려서 벌어진 모양 좋은 입술.

지금도 가만한 숨소리가 들릴 것 같다.

루카와 카에데는 사진을 찍던 순간을 회상한다.

낚시에는 정해진 끝이 없었다. 그러니까 농구 시합보다는 일 대 일에 가까운 취미였다. 루카와의 하품 주기가 짧아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잠깐 잠들었다가 일어났을 때.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배에서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센도는 킥킥 웃었고 기어이 루카와한테 한 대 맞았다. 아픈 척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제안을 했다.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을래?"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없는 종류의.

짝사랑하는 사람의 집에 가는 건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가망이 없다면 후자일지도. 아니 오히려 지금 이렇게 사진 한 장이라도 손에 남은 건 결과적으로 전자인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열여섯의 루카와는 아직 센도가 자신에게 무엇인지 잘 몰랐다.

다만 미국으로 떠난다는 말이 자랑도 아니고 공치사도 감사도 아니고 마치 이별처럼 제 귀에 들리기 시작했을 때. 그 이후로 센도가 끝이 다가오는 경기에서 지고 있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자신을 찾아오고. 바라보고. 최선을 다해 웃고. 잊지 않고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를 가져와서 사진을 찍을 때. 그 모든 것을 특별함의 범주에 넣고 의식하게 됐을 때...

아무리 루카와라도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저 이름을 붙일 줄 몰랐을 뿐이다.

서른이 되고서야 알았다. 첫사랑이었다는걸.

가망도 없는 짝사랑.

그날 센도는 집에서 무려 손 요리를 해 줬다. 딱히 준비한 건 없었는지 냉장고 안을 보고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장을 보러 가야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장을 봤다. 같이 사는 사람처럼. 지금 생각하면 정말 낯부끄러운 짓이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자연스러웠을까.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되는 고로케를 산더미처럼 샀고. 반찬 코너에서 루카와가 좋아하는 걸 몇 가지 고르고. 결국 센도가 만든 건 두부하고 우엉이 들어 간 된장국과 샐러드뿐이었다. 밥은 냉동실에 얼려 둔 걸 데웠다. 주말에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 둔다고 했다. 매번 하기 귀찮다고.

배를 채우고 나니 언제나처럼 잠이 왔다. 그렇지만 애써 쫓아내며 설거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밥을 얻어먹은 자로서 최소한의 예의였다. 열받게도 센도는 드러내 놓고 못 미더워했다. 오기가 생겨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비누 칠만 해 줘. 내가 헹궈서 넣을게. 너는 위치를 모르니까...

단신자용 맨션의 좁은 주방에서 거구의 청년 둘이서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설거지를 했다. 쌓인 게 없는 싱크대엔 방금 먹은 그릇 몇 개뿐이라서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는데. 흐르는 물속에 있어서 차가워진 센도의 손등과 닿았을 때. 자신의 손등이 너무 뜨겁게 느껴져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해야 할 일을 다 해내자 뿌듯함과 함께 미뤄뒀던 잠이 몰려왔다. 루카와의 눈에 졸음이 가득 찬 걸 보고 센도는 다정하게 웃었다.

센도는 루카와에게 여분의 칫솔과 잘 때 입을 편한 옷, 수건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욕실로 보내줬다. 혼자 사는 센도의 화장실에는 생각보다 물건이 많았다. 적어도 루카와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누나들만큼은 아닌 것 같지만. 쉐이빙 크림. 면도기. 헤어 왁스. 샤워 코롱 같은 낯선 것이 늘어선 세면대를 보면 왠지 센도가 어른처럼 느껴졌다.

머리를 말리기 귀찮아하는 루카와를 선풍기 앞에 붙잡아 놓은 것도 센도였다. 어릴 때 엄마가 해 주던 것처럼 머리카락의 물기를 수건으로 털어줬다. 물론 힘은 훨씬 셌다. 아프잖아. 툴툴거리자 그럼 얌전히 드라이어로 말리라고 손에 쥐여줬다. 틀어 놓고 졸았더니 그러다 머리카락 다 탄다고 결국 손수 말려줬다. 지금 와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짝사랑 상대 앞에서 엄청난 추태였다. 멋진 모습을 보여줘도 모자란데 효도를 받고 말았다. 이러니까 가망이 없었던 거겠지. 놀랍지가 않다.

축축함이 사라져 개운해지자 더 이상은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센도의 침대 위였다. 새벽이었다. 시계가 보이지 않는다. 낯선 집이라 위치를 잘 모르겠다. 창밖이 어스름히 밝아지고 있었다. 여름 해는 일찍 뜬다. 센도가 보이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서 두리번거리다가.

바닥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센도를 발견했다.

이쪽을 향한 옆얼굴이 바보 같았고.

아주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두고 가기 아까울 만큼.

루카와는 그때도 그 감정이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한참 동안 센도의 옆얼굴과 흐트러진 앞머리가 아무렇게나 가로지르는 곧은 콧대 같은 것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이대로는 잠들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리고...

조심히 손을 뻗어 센도가 책상 위에 던져둔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를 잡았다.

센도가 했던 것처럼 사각형의 플라스틱에 눈을 맞대고. 네 모서리만 표시된 사각형 안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광경을 한가득 맞춘 뒤에. 한밤중에 보석을 훔치러 온 도둑처럼 살금살금 셔터를 눌렀다.

찰칵.

생각보다 소리가 너무 컸다.

센도가 움찔거렸다. 루카와는 카메라를 한 손에 꼭 쥔 채로 얼른 침대에 누웠다. 끝내주게 자는 연기를 하다가 그대로 자 버렸다.

그게 끝이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로맨틱한 밤일 수도 있었는데... 어른이 된 루카와는 어설프고 서툴렀던 열여섯 살의 자신이 우습다. 이제 와서는 불쌍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귀엽기도 하고. 어쨌든 잘 모르는 아이처럼 느껴진다.

루카와는 다음 날 아침 손에 쥐고 있던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를 들키지 않으려고 냅다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대로 집에 왔고.

그게 정말 끝이었다. 센도와는 그 해 인터하이 카나가와 예선 료난 대 쇼호쿠 경기에서 만난 게 마지막이다. 쇼호쿠가 승리했고 골 득실로 카이난을 누르고 료난과 나란히 본선에 진출했다. 료난에게는 첫 전국 대회 진출이었다.

정신없는 인터하이 일정 속에서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는 금방 잊혔다. 14년 뒤 책상 서랍 구석에서 발견될 때까지.


맨션 앞에서 한참 사진을 바라보며 추억하고 있었더니 보안으로 잠긴 공동 현관문 안쪽에서 사람이 나왔다. 허둥지둥 길을 비켜주다 얼떨결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루카와는 조금 망설이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현관문 앞까지만 가 볼 생각이었다. 센도라고 쓰여 있던 문패가 이제는 무엇으로 바뀌어 있을지 조금은 관음증에 가까운 호기심이 들었다. 부디 주민을 마주쳐서 수상한 사람으로 여겨지기 않기를 바라면서.

층수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알던 문 앞에 섰다.

놀랍게도 문패가 그대로였다.

루카와는 몇 번 눈을 깜빡거렸다. 괜히 아무런 관계가 없는 손안의 사진과 문패를 번갈아 보게 된다. 바꾸는 걸 깜빡했나? 그 후에 아무도 이사를 오지 않았나?

하긴 카나가와가 그렇게 인구가 증가하는 현이라고 볼 순 없지. 거기다 이런 조그마한 바닷가 마을이라면. 루카와는 혼자서 금방 납득했다.

손끝으로 문패를 쓸어 본다. 센 도. 오랜만에 활자로 된 이름을 보는 것 같다. 자신의 마음이나 기억 속이 아니라 외부에 물성으로 존재하는 이름이 감격적이기까지 하다.

하얀 문에는 외시경이 하나 덜렁 있다. 루카와의 키보다 훨씬 낮은 위치다. 이 문패가 여기 그대로 있다는 건 이 집에 아무도 안 산다는 거의 확실한 증거다.

그러면 잠깐 안을 봐도 되지 않을까?

루카와는 손안의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과연 이 사진은 기억 속의 현장과 겹쳐 찍거나 그걸 어딘가에 올릴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어차피 들어가 볼 수도 없고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겠지만. 야외 농구장이 주차장이 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변화겠지만. 혹시라도 그때의 모습을 흐릿하게나마 파편이라도 볼 수 있다면...

루카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마음을 정했다.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아. 나쁜 짓이 아니야. 이런 다짐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나쁜 짓 같지만.

언젠가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에 눈을 맞댔던 것처럼.

가만히 눈동자를 외시경에 가져다 댄다.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있었다.

루카와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바닥을 치고 올라왔는지 가슴팍의 티셔츠 자락이 들썩일 정도로 크게 뛰고 있다. 귓가에서 엄청나게 시끄럽게 울린다. 달칵. 문고리가 돌아간다.

루카와는 머릿속으로 필사적인 사과부터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수상한 사람이나 범죄자가 아닙니다. 저는...

문을 열고 나온 건...

센도 아키라였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마주한 두 얼굴 사이에 찬란한 여름이 멈춰 있다.

먼저 입을 연 건 루카와였다.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을 틈도 없었다. 14년의 세월을 넘어서 만난 사람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사람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결국 하나다.

"다녀왔어."

오랫동안 멈춰 있던 여름이 다시 흐른다.

센도가 그리움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눈썹 끝은 아래로, 입꼬리는 위로. 파도같이 일렁이는 곡선을 그린다.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을 틈도 없었다. 14년의 세월을 넘어서 만난 사람이라도. 기다렸던 사람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결국 하나다.

"어서 와."

안에서 자꾸자꾸 끓어오르는 이상한 감정을 도저히 누를 수가 없어서 루카와는 웃었다.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서른이 가기 전에.

여름이 끝나면 무엇을 해야 하나.

루카와는 이제 알 것 같다.

다음 여름을 기다린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