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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5.07.27

페어 플레이 5

불면의이쑤신

윤대협의 은퇴 경기는 시즌 마지막 홈 경기였다. 힘들어서 적당히 중간쯤에 잡아주길 바랬는데. 한 경기라도 더 보고싶다는 여론은 강경하기 그지없었다. 호들갑스러운 스포츠 기자들은 원성 내지 절규라는 어휘를 택했다.

그래도 윤대협에겐 미련이 없었다. 부상과 에이징 커브를 여러 번 이겨냈고 다시 코트로 돌아왔다. 미련이 없는 일을 견디며 반복할 수 있는 종류의 무던한 성격은 아니었다.

심지어 라이벌팀과의 혈전. 드라마를 원하는 팬들의 기대는 충족되었다. 이제 후배들에게 넘어간 싸움을 바라보는 입장에 가까웠지만. 오랜만에 스타팅. 자주 교체됐지만. 매 쿼터 뛰었다. 버저가 울리는 순간에는 코트에 서 있기를 허락받았다.

인생 마지막 버저비트.

윤대협은 두 무릎에 팔뚝을 기대고 고개를 숙였다. 한순간 음소거가 되듯이 사라지는 함성. 이마선을 따라서 미지근한 땀방울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윤대협의 그림자 때문에 짙게 얼룩진 눈부신 코트 위로 흩어진다. 끝이구나. 윤대협은 가만히 자신의 심장박동을 느꼈다. 기분 좋았다.

또 다른 짙은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무릎을 펴기도 전에.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건. 서태웅이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이었다. 가시지 않은 경기의 여운을 심호흡으로 진정시키느라 서태웅의 널찍한 가슴팍이 들썩거린다. 이것도 마지막으로 보는 풍경일까. 그렇다면 윤대협은 그 여운을 충분히 느끼고 싶었다.

윤대협은 허리를 일으키며 유니폼을 끌어올려 턱 아래 땀을 닦아냈다.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온 서태웅은. 원래 그러려고 왔다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15년 동안 한 번도 한 적 없는 행동을 했다.

서태웅이 윤대협에게 오른손을 내민다.

슬로우모션처럼 다가오는 하얀 손바닥을 보면서 윤대협은 잠깐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시간은 흐른다. 아주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내밀고 선 서태웅의 담담한 얼굴이 보인다. 윤대협에게 미소를 되찾아준다. 윤대협은 그 순간을 최대한 즐기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짝! 얼얼할 정도로 경쾌한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손이 맞붙는다.

서태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맞붙은 오른손을 끌어당겨, 가까이 다가온 윤대협의 어깨를 왼팔로 감싸듯이 툭툭 토닥인다. 무려 수고했다는 듯이. 제법 다정하게. 윤대협과 서태웅이 코트에서 이런 포옹 비슷한 스킨십을 한 건 난생 처음이다. 국제대회에서 역전 버저비터를 꽂아 넣는 순간에도 이런 적 없는데. 윤대협은 얼떨떨한 채로 서태웅에게 끌려갔다.

서태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꾹 붙든 윤대협의 오른손을 드높이 치켜올리며 관중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보라 여기 챔피언을. 그렇게 선언하듯이.

불길처럼 치솟는 환호와 기립박수가 코트를 뒤흔든다. 윤대협은 웃음이 터졌다. 동시에 왠지 그 광경을 보기가 쑥쓰러워 자기 손에 두 눈을 묻었다. 커다란 웃음소리와 울컥 고인 눈물을 땀과 함께 닦아내렸다. 너무 웃었나 보다.

"집에서 봐."

윤대협의 뜨거운 손가락에 얽혀 있던 서태웅의 축축한 손가락이 그런 목소리를 남기고 허공에서 떨어져 나간다.

윤대협은 서태웅이 자신을 소개해 준 관중들을 향해 돌아서며 두 팔을 들어올렸다. 한층 더 커지는 환호. 오직 윤대협만을 위한 환호. 충분한 감격에 푹 빠져 본다. 반짝이는 눈동자로 웃는다. 장내 아나운서가 은퇴식의 시작을 알린다. 상대팀은 모두 퇴장했다.

서태웅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윤대협과 서태웅의 라이벌 관계가 한창 떠오르던 프로 초반에는 두 사람의 동거가 제법 화제였지만 끝까지 회자된 건 결국 라이벌 관계였다. 호기심이 사그라들고 나면 같이 산다는 건 그저 기정 사실에 불과했다. 사람들의 호기심은 동거의 해소, 즉 연애나 결혼 여부로 옮겨갔고, 그마저도 오랫동안 물어 뜯을 만한 거리가 전혀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엔 다른 사람들의 보다 흥미로운 사생활을 찾아 이동했다.

타인의 눈앞에서 윤대협은 서태웅과 더없이 데면데면했다. 경기장에서 만나도 인사도 나누지 않는 걸 보고 싸웠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미 아침에 눈 뜨자마자 인사하고 나왔으니까. 어쨌든 우승을 다투는 시즌 중에는 누군가 한 쪽이 약올라 있을 확률이 높기도 하고.

하지만 가령 국가대표로 함께 뽑혔을 때도. 룸메이트인 건 변함 없었지만. 최연소 국가대표이던 서태웅이 함께 스트레칭을 하거나, 공 주우러 다니면서 티격태격거리는 건 윤대협이 아니라 같은 대학 출신 선배였다. 주장 윤대협이 내기에 져서 후배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게 된다면, 짐꾼으로 달고 가는 건 서태웅이 아니라 같은 팀 출신 막내였다.

그러니까 문이 닫힌 후에 서태웅이 얼마나 귀여운지 아는 건 윤대협 뿐이다.

은퇴식이 끝나고. 뒷풀이도 끝나고. 이제 자제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윤대협은 술을 아주 많이 마셨다. 많이 웃었고. 너무 많이 웃어서 목이 아프고. 많은 사람들을 포옹해 준 따스한 기억. 바래다 줄 필요는 없다고 대리를 불렀고 주차장에서 한숨 잠들었다가 어떻게든 집까지 기어 올라온 기억은 있는데.

눈을 떴을 때 윤대협은 모르는 침대에 있었다.

서태웅의 침대였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체감상 열 시간은 잔 것 같은데 핸드폰을 눌러 보니 마지막으로 주차장에서 확인한 숫자로부터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아직 자고 있는 서태웅의 얼굴이 매우 가까웠다. 침대 끝에 밀려나, 크게 드러누운 윤대협을 바라보는 자세로 잠든 서태웅.

술이 덜 깬 머리로 윤대협은 서태웅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스스한 앞머리 아래에 단정하게 숨을 쉬는 서태웅의 얼굴. 열일곱 해를. 서태웅을 처음 만났을 때 윤대협의 나이만큼을. 서태웅과 같이 살았다. 그런데 서태웅의 자는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 본 건 처음이었다.

열일곱해를 같이 살았다. 그게 가장 편해서. 둘 다 농구하니까. 어느 한 쪽이 양보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조건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윤대협은 농구를 하지 않는다.

열일곱해를 같이 살았다. 윤대협에게 서태웅은 농구, 나 다름없이. 농구만큼이나...

그리고 윤대협의 농구가 끝났다.

이것도 끝일까?

심장박동이 관자놀이에서 뛰고 있다. 아직 술이 덜 깬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윤대협은 천근만근 같은 몸을 최대한 조용히 일으켜 자신의 침대로 미끄러져 들어갈 정도로는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잔뜩 구겨진 외출복이 침대 커버에 뭉개지는 게 느껴졌다. 윤대협은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벗어낸 옷을 죄다 침대 밖으로 집어 던졌다. 맨몸으로 이불을 뒤집어쓰자 스스로의 심장박동이 더 크게 느껴졌다. 윤대협이 싫어하는, 명치 한 가운데를 작은 돌망치로 두들기는 듯한, 단단한 아픔. 그걸 무시하려고 애쓰는 사이에 잠들어 버렸다. 그대로 저녁까지 쭉 기절했다.


윤대협은 해가 지고 나서야 침대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배가 고파서였다.

문을 열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났다. 놀랍게도 서태웅이 주방에 서 있었다. 뭘 끓이고 있어서 긴장부터 했는데. 다행히 윤대협과 서태웅이 둘 다 좋아하는 근처 오뎅집에서 포장해 온 국물이었다. 윤대협은 자동반사적으로 식기를 꺼내서 늘어놓았다. 서태웅이 냄비를 옮기고 솥에서 윤기 나는 흰쌀밥을 꺼내고 반찬을 꺼냈다.

다행히 서태웅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 같은 건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동안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 이어졌다. 하도 푹 자서 그런가. 그렇게 마셨는데 숙취는 없었다. 따끈한 국물이 식도를 적시니 오히려 한 잔 더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실 나 주당이었나? 서른일곱 살 먹을 때까지 몰랐는데. 윤대협은 그럭저럭 정갈하게 차려진 저녁 밥상 앞에서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그 미소를 묵묵히 바라보던 서태웅이 입을 열었다.

"이제 뭐할 거야."

윤대협의 은퇴에 대한 서태웅의 첫 번째 반응이었다. 질문이라기엔 조금 무뚝뚝하게 끝났지만, 분명히 대답을 바라고 말을 걸었다. 어쩌면 조심스럽게. 이런 점이 귀여운데. 사람들은 잘 모른다. 윤대협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연수 보내줄 테니까 감독해달라는데."

"잘 어울려."

"그래?"

윤대협은 의외라고 생각해서 조금 놀랐지만. 서태웅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흰 쌀밥을 수저 가득 퍼먹는다. 한참 우물우물. 입에 있는 음식이 다 없어지고 나서야 다시 말한다.

"좋아하잖아.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

"그런가..."

서태웅이 갑자기 좋은 말 해주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윤대협은 마음이 놓였다. 서태웅은 사실 윤대협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걸 싫어하지 않는다. 조언을 귀담아 듣고 열심히 연구하고 적극 피드백을 구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저렇게 꼭 한 번씩 투덜거린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애처럼. 윤대협은 싱긋 웃으면서 농담을 던졌다.

"서태웅 사주면 한다고 할까?"

서태웅은 입에 남은 오뎅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고개를 위아래로 천천히 흔들었다. 지금 내 말에 끄덕이고 있는 건가? 윤대협이 눈을 의심하는 사이에 입에 있는 걸 다 먹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내년엔 뭐..."

'내년엔 계약 끝나니까 그럴 수도 있지.' 정도가 함축된 긍정어. 윤대협은 이번에야말로 깜짝 놀랐다.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해도 괜찮아?"

서태웅은 어깨를 으쓱했다.

"헛소리 안 하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상관없어. 그런 투로 서태웅은 다시 한 입 쌀밥을 입으로 넣는다.

윤대협은 기분이 묘했다. 단 한 번도 같은 팀이었던 적 없는 서태웅. 아마 팀에서 간절히 붙잡았기 때문이겠지만. 윤대협 역시 일부러라도 서태웅과 한 팀이 될 생각은 없었다. 그와는 맞붙는 편이 늘 즐거웠다.

하지만 감독과 선수라면 또 다를까. 일단 서태웅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가...

국물이 잘 배어든 달달한 무를 입에서 녹이며 생각에 잠긴 윤대협을 가만히 바라보던 서태웅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윤대협이 준비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눈을 맞춘다. 그렇게 공을 들여 시간을 주기 때문에. 윤대협은 서태웅의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난 너보다 더 오래 할 거야. 농구."

"그럴 거 같아."

나직한 목소리. 윤대협은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흔까진 할 거야."

"그래. 힘내라.'

언젠가 이 아일랜드 식탁에서 이런 서태웅과 마주한 적이 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침묵들을 적당히 건너가면서. 이 집에 침묵을 싫어하는 사람은 살지 않았으니까. 윤대협은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는 서태웅의 자귀나무꽃처럼 빽빽한 아래 속눈썹을 구경하고 있었고.

"그때까지... 네가 결혼하지 않으면."

조금 망설이는 듯. 자연스럽게 주먹을 쥐고 있던 서태웅의 손이 움찔거리고.

"혹시 그럴 사람이 없으면..."

평소와 달리 허락을 구하는 듯한 태도로. 평소의 퉁명스러운 어조 대신 느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나랑 같이 살래?"

눈이 마주친다. 동공과 동공이 정확히 같은 선상에서. 순간적으로 빠르게 흔들리는 서태웅의 올리브색 홍채. 자귀나무꽃 같은 아래 속눈썹. 확신이 없는 서태웅.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하면서 부탁을 들어주는 기분도 느낄 수 있다. 이 정도로 이득뿐인 기회는 아마 십칠 년에 한 번 정도...

윤대협은 웃어버렸다.

코 끝에서 피식피식 새던 웃음이 급하게 들이킨 숨과 함께 끅끅 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아하하, 하고 결국에는 커다랗게 공기를 가른다. 그대로 천장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이상하게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윤대협이 눈꼬리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바보 같다. 태웅아."

"바보?"

"지금도 같이 살고 있잖아."

윤대협은 서태웅을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조금 더 부루퉁해진 서태웅은. 일단 방금 전의 긴장과 불안은 사라진 듯하다.

"바보?"

하지만 바보라는 말에 꽂혔군. 윤대협은 또 웃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부드럽게 손을 내미는 제스처와 함께 제안한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 다정한 목소리가 나갔다.

"이렇게 하자. 혹시 네가 다른 집에 살고 싶어지면... 나랑 같이 찾아 보는 걸로."

서태웅이 윤대협을 빤히 바라본다. 무슨 뜻인지 잘 못 알아듣는 것 같다. 윤대협은 나긋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너희 홈에 더 가까운 곳도 좋고. 난 아직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같이 찾아서 같이 살 거지?"

추격의 질문. 윤대협은 또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걸 막지 못했다. 정말 왜 이렇게 귀엽지.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으름장을 놓아 본다.

"이번엔 내가 집주인 하려고. 나한테 월세 내는 거야. 할 수 있지?"

"콜."

그제야 눈에 띄게 마음이 놓인 서태웅이 쿨하게 한 마디 던지고 다시 밥에 집중한다.

윤대협은 배가 불렀다. 턱을 괴고 서태웅이 남은 음식을 묵묵히 해치우는 걸 바라본다. 질리지 않고.

그러다 툭 던진다.

"태웅아."

서태웅이 밥그릇에 처박혀 있던 눈만 들어 윤대협을 바라본다. 윤대협은 아무렇지 않게 남은 인생을 걸고 말했다.

"잘 부탁해."

서태웅은 입 안에 저녁 식사를 가득 담은 채로 짧게 뺨을 당겼다. 그 움찔거림이 서태웅이 참지 못한 미소라는 걸 윤대협만 알았다.

서태웅이 시선은 반찬그릇에 처박은 채로 고개를 세 번 정도 주억거렸다. 수저를 쥔 오른손이 아닌 왼손을 아일랜드 식탁 위로 쭉 뻗는다. 윤대협은 싱긋 웃으면서 마주 왼손을 뻗었다.

식탁 위에서 커다란 손바닥 두 개가 짝, 싱겁게 맞붙었다. 계약 성립. 새삼스레 적어야 할 룰은 없었다.

인생에서 어떤 장면은 여러 번 반복된다.

변주라고 부르는 게 정확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