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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3.10.10

에이스와 건달 上

불면의이쑤신

북산고등학교 정문 앞에 스쿠터 한 대가 섰다. 1교시는 애진작에 끝났고 2교시가 한창일 시간. 이럴 거면 그냥 점심 먹고 올 걸 그랬나? 양호열은 정지한 스쿠터에서 한 발을 삐딱하게 땅에 짚은 채 옆머리를 쓸어올렸다.

등 뒤에서 부드럽고 경쾌한 배기음이 다가온다. 양호열은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바로 알았다. 아마 돌아볼 필요도 없겠지.

날렵한 모터사이클이 예상 그대로의 경로를 따라 양호열의 스쿠터 옆에 바짝 붙어 선다. 야마하 비라고 1100. 바다와 하늘을 겹친 것처럼 새파란 도색은 커스텀이다. 짧은 앞 범퍼와 커다란 앞바퀴 사이에 길쭉한 파이프가 날씬하게 뻗어 있다. 한눈에 스쳐 지나가도 잘 빠졌다는 느낌. 외모만 잘난 게 아니다. 1069cc의 무지막지한 배기량. 잔고장이 적고 내구성도 튼튼한 대신 더럽게 비싼 샤프트 드라이브.

그 위에 올라탄 녀석과 여러모로 겹친다. 제법 얄밉다. 윤대협은 모터사이클 위에서 긴 다리 두 개를 다 뻗어 흔들림도 없이 가볍게 땅을 짚고 허리를 세운다.

"안녕, 호일아."

"소협이 형 오셨슴까~"

"하하. 그래그래."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생글생글 웃는다. 양호열은 윤대협이 자신의 이름을 잘못 부를 때마다 넉살 좋게 소협이 형이라고 받아치곤 했다. 하지만 윤대협은 언제고 그다지 타격이 없다. 어라, 혹시 나만 바보 되고 있나? 양호열은 오늘도 입맛만 쩍 다셨다.

최고 시속 177km에 일본 일주를 해도 멀쩡할 내구성과 세단급 안정성을 자랑하는 크루저 모터사이클을 가지고 집 앞에 있는 학교나 왔다 갔다 한다. 가끔 무지막지한 속도로 해안도로를 폭주한다는 소문도 듣긴 했지만.

그 어떤 소문 속에서도 윤대협이 헬멧을 썼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오늘도 하늘을 향해 매끈하게 올라간 삐죽머리에는 방해물이 없다. 양호열은 교문을 통과할 생각이 아예 없나 싶은 자세로 핸들에 두 팔꿈치를 기댄 채 하품을 하는 선배에게 물었다.

"일찍 오셨네요."

시간을 고려하면 엉뚱한 소리지만 사람을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윤대협은 졸업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학교를 막 다니기로 유명했다. 거의 농구부 하러 등교한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러고도 1학년 종업식 때 다 세어 보니까 기가 막히게 최소 출석 일수를 채워 유급을 면했다고 하던데. 무슨 기술인지 알 수가 없다. 양호열도 비결을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배울 수 있는 거라면.

"하하, 그런가."

윤대협이 싱글벙글 웃는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양호열은 감이 좋은 편이다. 해동중 시절에도 귀가 아프도록 윤대협의 전설을 듣긴 했지만 막상 자주 보게 된 건 강백호가 농구부에 들어가면서다. 실물을 마주하고서야 처음 알았다. 이 유명한 선배는 저렇게 사심 없이 활짝 웃을 때 이상하게 오싹해진다. 다른 때는 위협적인 느낌이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인데...

"학교, 들어가실 거예요?"

나란히 선 바이크 두 대에는 여전히 시동이 켜져 있다. 둘 다 빠른 시간 안에 내릴 예정은 없어 보인다. 윤대협은 뺨을 긁적인다.

"가긴 갈 건데... 너는?"

"고민 중임다. 시간이 애매해서. 점심 먹고 다시 올까 싶기도 하고..."

"아, 그래. 점심."

윤대협이 좋은 걸 알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인다. 또 살짝 쎄한 느낌이...

"그럼 난 능남 가서 먹어야겠다."

"네...?"

"반가웠어, 호일아. 또 보자!"

상큼하게 인사하고 핸들을 꺾는다. 부드러운 말발굽 소리 같은 배기음이 순식간에 멀어져 간다. 스쿠터와는 비교조차 우스울 속력 때문에 맞바람이 장난이 아닐 텐데, 어떻게 저렇게 머리카락이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지? 양호열은 두어 가닥 내려온 리젠트를 쓸어 올리며 감탄했다. 다음엔 왁스 뭐 쓰냐고 물어봐야지.

아직 등교 안 한 친구 놈이 있을 것도 같은데... 누구를 끌고 패스트푸드점에 가면 좋을까... 머릿속으로 익숙한 얼굴 몇몇을 떠올리던 양호열이 불현듯 위화감을 깨닫는다.

그런데 대협이 형은 왜 능남 가서 점심을 먹지?

능남은 근처의 농구 강호교다. 도 대표를 두고 북산과 라이벌이다. 송태섭도 정대만도 복귀하기 전이었던 지난번 연습 경기에서 윤대협마저 전반전을 통으로 지각하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졌다. 활약이 굉장했던 능남의 1학년 에이스를 이기겠다고 백호가 펄펄 뛰었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어쨌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북산고 농구부 에이스 윤대협이 밥 먹으러 갈 곳은 아니다.

양호열이 구레나룻을 긁적이고 있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느긋하게 다가온다. 용팔이잖아. 양호열이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크게 흔들었다. 여어~ 금방 대답이 돌아온다. 오늘 점심은 용팔이랑 먹으면 되겠다.

수상한 선배의 행방은 금방 머릿속에서 잊혔다.


능남은 윤대협이 진학할 예정이었던 학교다.

윤대협이 평범하거나 멀쩡하거나 예측 가능하기라도 한 놈이었다면...

안타깝게도 윤대협은 셋 다 아니었다.

윤대협은 다 가진 놈이었다. 도쿄 부촌에서 태어난 가난한 적 없는 집안의 막내아들로 키 크고 잘생기고 농구 잘하고 성격도 좋았다. 키만 큰 게 아니라 눈코입 손발은 물론이요 심지어 벗겨 봐도 구석구석 다 컸다. 걸어가면 모두가 따라오고 일어서면 모두가 집중하고 웃으면 모두가 사랑했다.

남녀노소 평등하게 윤대협을 좋아했다. 원래 이 정도로 다 가진 놈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뭐 비슷해야 질투라도 나지. 오히려 미워하는 놈이 미움받기 마련이다. 윤대협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순진한 성격이면 윤대협의 관심을 갈구하며 맴돌았고 계산적인 편이라면 콩고물을 바라면서 서성였다.

반면 윤대협의 단점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건 날 때부터 다 가진 윤대협의 환경으로부터 비롯한 특징이었다.

윤대협은 지루한 걸 참지 못했다.

오해 마시길. 윤대협이 견딜 수 없는 건 고요라든가, 정지된 풍경이라든가, 말랑하고 연약한 것들이 아니었다. 요란한 허세로 가득한 도시에서는 차라리 그런 것들이 귀하고 짜릿했다. 윤대협은 흔한 것에 관심이 없었다. 예측 가능한 것이 지겨웠다. 생각대로 움직여주는 사람들에 질렸다.

슬프게도 이 세상의 디폴트는 지루함이었다. 모든 욕망은 결핍에서 나온다. 윤대협은 새로운, 예상할 수 없는, 동등한, 자기 자신만큼이나 흥미로운 하루를, 공간을, 사람을 원했다.

뻔한 것을 새롭다고 우격다짐해 최대한의 가격표를 붙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도쿄에서 그나마 윤대협을 가장 즐겁게 하는 건 농구뿐이었다. 농구만큼은 어떻게 해도 모든 것을 예측할 순 없었다. 어제 이겼다고 오늘 이기란 법이 없고, 실력이 더 낫다고 무조건 승리하는 것도 아니다. 맞불 전략에 따라, 몰랐던 변수에 따라, 설명하기 어려운 흐름에 따라 매번 경기의 질감이 달라졌다.

윤대협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농구에 몰두했다. 그게 가장 재미있어서. 다른 이유는 없었다.

청소년 스포츠의 격전지 도쿄에서 농구로 이름을 꽤 날린 윤대협을 스카우트하려는 고등학교는 많았다. 윤대협은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어 보이는 곳을 하나 골랐다. 충분히 재미있어 보이는 지역에 있으며, 동시에 고지식하고 예측 가능한, 즉 지루한 부모님이 흔쾌히 허락해 줄 것 같은 학교이기도 했다. 사립학교였고, 진학교였고, 농구도 지역에선 곧잘 하고, 감독이 열성적이고, 올드스쿨로 성실함과 훈련량을 강조하면서도 윤대협의 쓰임새나 대입 전략까지 어필하는 스마트함이 있었다.

윤대협의 부모님과 유명호 감독 앞에서 윤대협은 고분고분 웃으면서 능남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서를 고의로 누락했다.

예측대로 되는 건 질색이었다.

이미 능남고 앞 자취방에 잔금까지 싹 들어간 뒤였다. 도쿄에서 윤대협을 스카우트하려던 모든 학교의 원서 제출 기한도 끝났다. 윤대협은 황당해하는 부모님께 실수를 사과하며 고분고분 고개를 숙였다. 한술 더 떠 짐짓 불안하다는 듯이 입술을 뜯고 손톱을 매만졌다. 부모님은 갑자기 소속될 곳을 잃어버린 다감한 청소년을 더 몰아붙이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쉬었다.

윤대협에게 날카로운 현실 감각을 물려주신 어머니가 가장 먼저 이성을 되찾았다.

"아직 공립은 지원 기간 남았지. 통학할 만한 거리에 농구부가 있는 고등학교가 있던가?"

윤대협은 냉큼 대답했다.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윤대협은 도립 북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처음부터 여길 노리고 한 짓은 아니었다. 어른들이 보기 좋은 방향으로 건설이 완료된 활주로를 시원하게 이탈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목적지는 탈주하고 나서야 동전 던져 결정했고 그게 북산이었다.

막상 들어와 보니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윤대협은 어느 사회에서나 그랬듯이 북산 고등학교 농구부의 본질을 금방 꿰뚫었다.

제멋대로인 놈들이구만.

고삐를 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안한수 감독은 덕망으로 사람이 모이는 것치고는 마음이 지나치게 약해 보였다. 야생동물 같은 고등학생을 엄하게 다스리기보다는 금방 포기하고 은거했다. 차라리 더 날뛰면 그 시너지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윤대협은 적응력이 좋은 편이다. 적당히 밑바닥이라 아무도 기대를 갖지 않아 자유와 개성이 허락되는 느슨한 학교. 몸에 맞는 옷처럼 순식간에 윤대협의 무대가 되었다.

윤대협의 북산 농구부 합류는 작은 센세이션이었다. 정대만이 엇나가지 않았다면 명실상부한 황금 멤버다. 2학년에 채치수와 정대만. 1학년에 송태섭과 윤대협. 감히 상양의 아성에 도전해 볼 만한 전력이었다.

그러나 북산은 윤대협이 선택한 학교답게 예측대로 풀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정대만은 농구를 버렸고 송태섭까지 진창에 끌어들였다. 윤대협은 휘파람을 불었다. 진짜 개판이다.

어쨌든 지루한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윤대협은 북산이 능남 앞에 잘못 구한 자취방에서 제법 멀다는 핑계를 대고 아버지가 준 생활비 카드로 자전거를 사겠다고 한 다음 바이크를 긁었다. 자취방 앞 바다를 닮은 새파란 도색까지 깔끔하게.

윤대협이 새로 산 바이크를 타고 학교도 농구부도 제끼고 바닷가를 달려 도착하는 곳은 아무도 없는 방파제 끝이었다. 윤대협은 거기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도쿄에는 없는 고요. 정적. 가만한 듯 끊임없이 움직이는 수면. 처음 만난 바다는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근처 포인트 죽돌이 아저씨들에게 어슬렁 다가가서 낚시도 배웠다. 추천받은 낚싯대도 쌔끈한 걸로 하나 뽑았다. 크루저 뒤에 짐을 싣고 내키는 포인트까지 달렸다. 언제 입질이 올지 절대로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낚시는 최고로 짜릿한 스포츠였다.

농구를 해도, 농구를 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1년은 그랬다.

다음 해도 이렇게 보내는 건가?

윤대협을 항상 곤경에 빠뜨리는, 그러나 결코 피할 수 없는 결말이 슬며시 찾아오고 있었다. 익숙함. 이것이 계속되면 바로 지겨워지고, 지루해진다. 그럼 또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걸까...

서태웅을 만난 건 그런 계절이었다.


북산은 서태웅이 진학할 예정이었던 학교다. 가까우니까.

윤대협이 평범하거나 멀쩡하거나 예측 가능하기라도 한 놈이었다면, 그래서 유명호 감독이 계획대로 그를 능남 농구부로 스카우트했다면, 서태웅은 아마 별일 없이 북산 농구부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윤대협은 셋 다 아니었다. 유명호 감독은 다잡은 월척을 완전히 놓쳤다. 그는 정대만을 놓쳤을 때보다, 송태섭을 놓쳤을 때보다 훨씬 더 절망했다. 그 애들은 적어도 처음부터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이유였다. 유명호가 안한수가 될 방법은 없으니까.

그런데 윤대협 이 자식은 원서까지 받아 가 놓고 내는 걸 깜빡해서 못 온다고?!!?!!?!!

유명호는 도저히 쿨하기가 어려웠다. 뒤끝이 오래 갔다. 빨간 북산 유니폼을 입고 뛰는 윤대협을 볼 때마다 속에서 울컥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1년 내내 신경성 위장염에 시달렸다.

유명호는 독기가 올랐다. 다음 해 스카우트만큼은 실패할 수 없었다. 비록 전년도엔 송태섭과 윤대협을 모두 북산에 빼앗겼지만. 진짜 대박이 온다. 이번에는 놓쳐서는 안 된다.

서태웅을 능남에 데려와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명호는 인터미들이 끝나자마자 서태웅과 접촉했다. 아직 고등학교 진학 얘기를 꺼내기엔 한참 이른 타이밍이었다. 개의치 않았다. 같은 실수를 두 번 할 생각은 없었다. 원서? 이번엔 눈앞에서 채운 다음 손수 챙겨 갈 생각이었다.

서태웅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북산이었다. 또. 북산. 그놈의. 북산!!!

유명호는 애써 정상적이고 침착한 어른의 목소리를 가다듬어 정중하게 물었다.

"아직 진학처를 결정할 만한 시기는 아닌데. 왜 북산인지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서태웅의 대답은 간결했다.

"가까우니까."

유명호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호오? 그렇다면 아직 나에게도...

"서태웅 군은 통학의 편리성을 가장 중시하나 보군."

기회가 있을지도...

"그럼 하나 제안하지."

유명호는 자신 있게 제 가슴팍을 엄지손가락으로 푹 찔렀다.

"서태웅 군이 능남 농구부에 있는 한, 통학길은 이 유명호가 책임지겠네."

서태웅은 끝이 날렵해도 아직 젖살이 남아 있어 동그란 턱선을 손끝으로 살짝 잡고 흥미롭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호오...

"어떻게요?"

"데려다준다는 소리지. 대신 시간은 엄수해야 하네."

"전 다섯 시에 일어나요."

유명호는 움찔했다. 요즘 애들은 엄청 일찍 일어나네. 유명호도 나이 먹고 아침잠이 부쩍 줄어들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다행히 서태웅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혼자서 농구 두 시간 하고 나서 등교해요."

기특한 자식! 유명호의 등줄기에 짜릿한 소름이 지나간다. 그 순간만큼은 서태웅을 4인 가족용 중형 세단 조수석이 아니라 등에 업고서라도 함께 등교하고 싶었다. 역시 내가 사람은 잘 봤어.

"그때 등교해도 된다면..."

늘어지는 말끝을 잡아채듯 유명호가 서태웅의 두 손을 모아 잡았다. 오늘 처음 만난 아저씨의 빛나는 눈동자가 바싹 다가온다.

"물론. 원한다면 새벽 훈련을 내가 봐줘도 좋아. 꼭 능남으로 와 주게!"

서태웅은 슬쩍 손을 잡아 뺐다. 부담스러워.

"웃쓰."

그래도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자전거보다 자동차가 훨씬 빠르다. 초등학생도 아는 사실이다. 자전거로 가까운 거리 가기 vs 자동차로 조금 덜 가까운 거리 가기. 능남은 딱히 먼 거리조차 아니다. 반드시 후자가 빠르다. 그만큼 확보한 아침 시간에는 잠을 더 잘 수도 있고 농구를 더 할 수도 있다. 서태웅으로서는 이득밖에 없었다. 농구는 어딜 가도 잘할 생각이었으니까.

유명호는 그 자리에서 서태웅의 집 연락처를 받아 갔고 신속하게 서태웅의 부모님과 삼자대면을 잡았다. 미리 준비해 간 원서의 빈칸을 그 자리에서 다 채우고 서류봉투에 야무지게 챙겨서 기밀처럼 소중하게 들고 갔다.

그렇게 서태웅은 능남에 입학했다. 아니 모셔졌다. 그 어떤 귀족 영애 못지않은 금지옥엽 에이스의 영입이었다.


과연 서태웅은 엄청났다. 능남은 날개를 달았다. 1학년 한 명의 존재로 이렇게까지 팀이 달라질 수 있다니. 유명호는 전율했다. 서태웅의 화려한 플레이와 무지막지한 득점력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터프한 정신력은 능남 농구부원들을 흥분시켰다. 학년과 포지션을 불문하고 서태웅은 이상적인 농구의 본보기 그 자체였다.

유명호의 지옥 같은 기초 훈련을 버텨낸 고학년 레귤러 멤버들에게 서태웅의 존재는 하농을 끝내고 찾아온 쇼팽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시합에 임하기 시작했다. 서태웅이 더 득점하려면 우린 어떤 플레이를 해야 할까? 물론 동기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자극이었다. 내년에 서태웅과 함께 레귤러가 되려면 뭘 해야 할까?

팀 전체에 새로운 활기가 돌았다. 서태웅은 빈말로도 커뮤니케이션에 강점이 있는 편은 아니었고 아직 1학년이라 뒷일을 생각지 않고 달려들 때도 많았으며 무한한 투지에 비해 유한한 스태미나가 가끔 발목을 잡았지만, 그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팀 능남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었다. 그저 농구를 끝내주게 잘하기 때문에.

또한 선후배 관계 같은 고리타분의 눈치를 보느라 제 실력을 숨기지 않았으므로. 훈련 시간 내내 서태웅은 다소 마이페이스이긴 해도 기본적으로 감독이나 선배의 지시를 잘 따르는 얌전하고 성실한 멤버였다. 그러나 농구공만 잡으면 위아래가 없었다. 농구 골대에 공을 넣는 것. 그 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선배든 동기든, 서태웅은 그 누구에게도 우월감도 열등감도 내비치는 일이 없었다.

서태웅과 농구와 승리. 그 사이엔 누구도 끼어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성스러울 정도로 집착적인 삼각관계였다. 부원들은 학년에 관계없이 본능적으로 서태웅에게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 모두 농구에 진심이었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었다. 서태웅 정도로 농구에 진심이긴 어렵다는 걸.

그러한 존재가 선배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다소 마음이 약한 캡틴 변덕규의 말을 충실하게 따르며, 감독의 지시에 예스 이외에 다른 대답을 하지 않으면 (마음에 들지 않는 지시엔 차라리 고집스럽게 입을 다무는 편이었다) 자연스럽게 팀 분위기도 정돈이 된다. 능남 농구부의 단합력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유명호는 서태웅의 체력을 걱정하지 않았다. 칼을 갈아 온 올해의 훈련 메뉴는 작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걸 견뎌내고 나면 서태웅은 몰라볼 만한 체력 괴물이 되어 있을 거다. 북산은 물론 상양, 나아가 해남까지 긴장해야 할 걸.

서태웅이 입학한 이후로 유명호는 혼자서도 히죽히죽 웃고 다녔다. 농구공을 붙잡은 서태웅을 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그리고 서태웅은 다섯 끼도 넘을 만큼 한시도 농구공을 떼어 놓질 않았다.

오히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따라다니자니 유명호의 체력이 위험했다. 입학 초기 열성적으로 지도했던 새벽 농구는 점차 서태웅 혼자만의 루틴으로 되돌아갔다. 유명호는 등교 시간에 맞춰 서태웅의 집 앞에 차를 대기시켰다.

능남 고등학교 교직원용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서태웅은 죽은 사람처럼 유리창에 이마를 콩콩 부딪치며 꿀잠 잤다. 유명호가 깨워 주면 비틀비틀 걸어 나와 힘없이 차 문을 닫고 꾸벅 인사를 한 뒤 졸면서 교실로 들어갔다. 농구부 시간에 날아다니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유명호는 3월 내내 다소 걱정스럽게 어딘가 위태로운 뒷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금지옥엽 에이스에 대한 유명호의 유사 부성애(?)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서태웅의 공식 연습 시합 데뷔가 결정됐다. 북산과의 대결이었다. 유명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서 자랑의 에이스를 모두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특히 작년, 재작년 유명호의 야심 찬 스카우트를 모두 물먹인 북산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유명호는 북산과의 연습 경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게 지옥의 서막인 줄도 모르고...


서태웅의 입학으로 환골탈태한 능남은 전반전 북산을 정신 못 차리도록 몰아붙였다. 하지만 유명호는 찜찜했다. 작년 정대만이 부상으로 이탈한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왜인지 송태섭도 보이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윤대협도 없었다. 오늘 경기는 서태웅에게 윤대협이라는 라이벌을 부딪쳐 줄 기회로서 마련한 것이기도 했는데...

어쨌든 승부는 냉정한 법. 점수 차가 20점을 넘었을 때 전반전이 끝났다. 하프타임이 시작되자마자 윤대협이 나타났다. 뭐 하다가 지금 오냐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채치수에게 머쓱하게 웃어 보인다.

"미안, 늦잠 잤어요."

윤대협이 유니폼을 갈아입으러 간 동안 유명호는 다급하게 서태웅을 불렀다.

"태웅아. 저 녀석이 윤대협이다. 오늘 네가 정신 바짝 차리고 마크해야 할 놈이야. 실력으로는 해남의 이정환과 맞붙을 정도다. 현시점에서 도내 최고라고 할 수 있지."

서태웅의 눈빛이 전에 없이 번뜩였다. 묵묵히 유명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인다.\

"경태에게 이전 기록 들었던 거 기억하지?"

끄덕끄덕.

"작년까진 너처럼 화려한 스코어러였다. 올해는 플레이스타일이 달라졌어. 송태섭이 없는 동안 포인트가드까지 보게 됐다. 시야가 넓고 다채로운 공격 루트를 만든다. 하여튼 직접 붙어 보는 게 많은 공부가 될 거다."

유명호는 뒷짐을 진 채 제 키에 맞춰 허리를 약간 숙인 서태웅의 어깨를 다독였다.

"언젠가 네가 뛰어넘을 선수다. 잊지 마라."

서태웅이 대답했다.

"웃쓰."

후반전은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윤대협이 합류한 북산은 전혀 다른 팀이었다. 마치 서태웅이 입학한 뒤 달라진 능남처럼. 하나하나 화려한 패스 플레이와 탄탄한 디펜스. 정확한 타이밍의 콜 사인과 모래알 같은 팀워크를 일순 집중시키는 묵직한 한마디. 채치수가 눈에 띄게 안심하는 게 보였다. 전반에도 센터 대결은 변덕규가 한 수 아래였다.

전반전은 서태웅의 독무대였지만 후반전은 그럴 수 없었다. 윤대협은 덤프트럭 한 대가 아니라 탱크 한 군단에 맞먹는 존재였다. 판 전체의 흐름을 몰고 들이닥치기 때문이다. 서태웅은 분전했다. 그러나 전반에만 혼자서 20득점을 넘었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심각했다. 안 그래도 윤대협을 상대하려면 능남 농구부원 한 명의 체력으론 역부족인 마당에.

그래도 역시 서태웅. 지지 않으려는 투지가 남달랐다. 코트를 종횡무진 질주하는 윤대협에게 그림자처럼 끝까지 따라붙었고, 윤대협의 슈퍼플레이가 터질 때마다 자신도 반드시 흉내 내듯 한 방을 보여주었다.

윤대협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전력에 비해 형편없는 성적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털레털레 뛰어다니던 작년의 여유롭고 가벼운 태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반대편 벤치에 앉은 안한수 감독이 흥미로워하는 것이 유명호의 눈에도 잘 보였다. 그야 유명호도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저렇게 재미있어하는 윤대협은 처음 보는군...

경기 결과는 1점 차로 능남의 신승이었다. 전반 20점 차가 순식간에 따라잡혔다. 그나마 서태웅이 다리에 쥐가 날 때까지 윤대협에게 달라붙었기 때문에 겨우겨우 이길 수 있었다. 벤치 멤버까지 모두 달려 나가 서태웅의 어깨를 두들겼다. 잘했어, 에이스. 대단해. 네 덕분에 이겼다.

그러나 서태웅의 눈동자엔 투지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 마치 승부가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그 시선은 윤대협에게 못 박혀 있었다. 윤대협 역시 마지막까지 서태웅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돌아갈 채비를 끝낸 북산고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호는 안한수 감독과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었다. 그 사이 각 팀 주장도 악수를 하며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모양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윤대협이 서태웅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손을 슥 내민다. 길고양이에게 하듯이. 서태웅은 꼿꼿이 서서 그걸 바라보다가. 척척 걸어가 윤대협의 손을 퍽 때렸다. 유명호는 속으로 외쳤다. 잘한다. 그런 건달 같은 녀석, 봐 주지 마라, 태웅아!

윤대협은 웃었다. 하하하 소리 내서.

서태웅은 새침하게 돌아섰다. 유명호 쪽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갑자기 윤대협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긴 다리로 두 걸음에 서태웅을 따라잡았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서태웅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서태웅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윤대협은 서태웅의 볼에 쪽! 소리를 내며 키스했다. 유명호의 눈앞에서.

모두의 경악한 얼굴 사이에서 윤대협만 생긋 눈웃음을 짓고 말했다.

"또 보자. 슈퍼 루키."

윤대협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웬 삐까번쩍한 바이크를 타고 부르릉 멀어져 간다. 유명호의 머릿속에 북산 팀 유니폼보다 새빨간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에이스 경보, 에이스 경보! 살짝 건달인 줄만 알았던 윤대협은 생각보다 더 이상한 놈이닷!!!

서태웅은 차마 볼을 감싸지도 못하고 멍해진 모습이었다. 에이스 경보! 서태웅이 혼란을 겪고 있다! 엄청난 정신계 데미지! 이게 다 윤대협 때문이닷!!!

그날부터 유명호의 가슴 속에서는 윤대협 세 글자가 한시도 사라지지 않았다. 경계 대상 0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