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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5.11.08

주정뱅이의 사랑

불면의이쑤신

서태웅은 프로 데뷔 2년 차에 우승과 MVP와 결혼이라는 한 해 목표 그랜드슬램을 세웠다.

즉 당사자들은 잘 모르는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윤대협과 서태웅이 결국 이듬해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생각보다 사이즈도 커졌다. 인생의 대부분을 농구에 바친 두 사람이 고등학교, 대학교, 프로에서 맺은 인연만 초대해도 스몰 웨딩은 예전에 물 건너갔다. 어쨌든 혼주인 양가 부모님의 손님이나 친척들도 오시고.

어차피 가장 로맨틱한 순간은 프러포즈 겸 혼인신고 때였다고 생각한 윤대협은 최소한의 요식 행위를 원했다. 한편 서태웅은 결혼식을 선포식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올 사람만 다 오면 장소나 날짜 같은 건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한 끝에 무난한 서울 소재 고급 호텔 비공개 웨딩으로 결정됐다.

야외 가든에서 진행된 식 자체는 한 시간 이내로 짧았다. 다만 피로연이 길었다. 송아지만 한 농구선수들이 위장 봉인 해제를 선언하니 영원히 먹고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라이브 밴드가 익숙한 팝송을 듣기 좋은 재즈풍으로 잔잔하게 깔아 놓고 흥을 돋웠다. 적당히 취한 송태섭이 서태웅의 술잔에 샴페인을 따랐다.

“야 서태웅아 결혼 축하한다.”

“감삼다.”

“그래도 무사히 이날이 오네. 너 유튜브 그거만 생각하면 아직도 어후…”

“하하, 태섭아 너 그 얘기 스무 번째인 거 알아?”

제법 마셨는데 하나도 안 취한 권준호가 송태섭의 등을 토닥거리며 이어질 돌림노래를 막았다. 아까부터 정대만과 송태섭과 강백호가 반복 재생 중인 레퍼토리다. 서태웅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옆에서 윤대협이 얼른 송태섭의 샴페인 잔에 자기 것을 부딪쳐서 분위기를 맞춰 주었다. 정대만이 외쳤다.

“어이 윤대협이 서태웅이. 야외 결혼식 좋던데. 비 안 와서 다행이다.”

“누가 아니래요. 이 운 좋은 자식들.”

“비 와도 낭만 있잖아. <어바웃 타임>처럼. 태웅이 그 영화 봤어?”

“네. 봤어요.”

엥? 윤대협과 서태웅을 둘러싸고 있던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웅성거렸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대중문화 코드를 이해하는 서태웅이라니. 그들에겐 너무나 낯선 광경이었다.

“서태웅이가 영화도 봐?”

“금호타이어부터 잘 거 같은데.”

“누구랑 봤는데? 설마 혼자서?”

서태웅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예전에 남자친구랑…”

좌중이 얼어붙었다. 고요한 가운데 라이브 밴드가 익숙한 팝송을 듣기 좋은 재즈풍으로 잔잔하게 깔아 주었다. 잘 들어보면 이거 그 노래 아닌가. How long will I love you, as long as stars are above you…

조개처럼 입을 다문 주변인들의 시선이 슬금슬금 또 다른 새신랑을 향한다.

정작 윤대협은 빙그레 웃고만 있다. 서태웅의 입에서 ‘전 남친’ 폭탄 발언이 나오기 전과 다를 바 없이. 혼자 술이 깨 버린 정대만은 남몰래 몸서리쳤다. 뭐가 즐거운 거냐 도대체. 저거 저럴 때 나만 무섭나?

사회생활의 견본과도 같은 권준호조차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샴페인 병에 남은 술을 제 잔에 털고만 있던 정적 속에서.

윤대협이 서태웅 쪽으로 몸을 다정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극장에서 봤던가?”

서태웅은 고개를 저었다.

“너네 집. 넷플릭스.”

“맞다. 우리 집에서 봤지.”

정대만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모두가 그 정도로 티 내지는 않았지만 좌중의 긴장도 역시 눈에 띄게 풀어졌다. 이한나가 총대를 메고 서태웅의 등짝을 치며 분위기를 수습했다.

“얘 좀 봐, 남편이랑 봤으면 남편이랑 봤다고 해!”

서태웅은 억울해서 아랫입술을 삐죽 내민 채 중얼거렸다.

“그땐 남자친구였는데요…”

“뭐어? 너 은근히 선 긋는 거 장난 아니구나?”

예리한 지적에 다 같이 웃음이 터졌다. 샴페인 병이 돌고 누군가 제법 우스꽝스러운 건배를 했다. 전 남자친구, 현 남편을 위하여!

윤대협은 경쾌하게 샴페인 잔을 부딪치고 원샷했다. 전 남자친구이자 현 남편의 기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법 좋았다. 아니 사실은 아까부터 상당히 좋았다. 오랜 기간 만났지만 서태웅의 목소리로 ‘남자친구’라는 말을 들어 본 건 손에 꼽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당연히 처음이다. 딱히 숨기려고 한 건 아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해서 자동 비밀 연애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윤대협의 눈치를 보는 게 조금 재미있었다. 그런 면에서 눈치가 젬병일 것 같은 서태웅이 아무렇지 않게 다른 남자친구 얘기를 꺼냈을까 봐. 일부는 조마조마함 속에 내심 윤대협의 질투로 인한 사랑싸움 비슷한 걸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아주 약간은.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윤대협만큼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서태웅의 입에서 나오는 ‘남자친구’는 전부 자신을 뜻한다는 걸. 첫사랑이라 하든 애인이라 하든 그때 만나던 사람이라 애매하게 표현할지라도 어차피 그건 다 윤대협이라는 걸. 서태웅은 인생에 딱 한 사람만 사랑해 봐서 그걸 뭐라고 부르든 다 같은 놈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고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그 사실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남들도 다 그렇게 알아들을 줄로 안다. 오해 살 가능성을 생각조차 못 한다.

그게 좋았다. 그래서 윤대협은 서태웅의 발언을 재빨리 정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을까. 윤대협은 결혼식 날 너무 많이 마셨다. 주량을 넘겨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제법 잘 마신다고 생각했는데. 운동하느라 술 마실 일이 없어서 줄어든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서태웅은 사귀고 나서 처음으로 윤대협의 술버릇을 눈앞에서 관람하게 되었다.

윤대협은 설거지를 하려고 했다.

“뭐 해?”

싱크대에 선 윤대협이 뭐라고 중얼거린다. 물소리 때문에 잘 안 들린다. 자세히 들어 보면 몇 마디 정도 귀에 걸린다. 기다려 태웅아 이거만 하고 어쩌고저쩌고. 서태웅이 목을 쭉 빼서 어깨 너머로 들여다본 싱크대 안에는 컵 세 개 빼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꾸벅꾸벅 조는 윤대협이 수세미 쥔 손으로 잡으려다 미끄덩. 미끄덩. 실패하고 있었다.

이건 안 돼. 재워야 한다.

서태웅은 쏟아지는 물줄기를 꺼 버리고 윤대협을 강제로 침실로 잡아끌었다. 순순히 끌려가는 듯했던 윤대협은 갑자기 끼이익 급브레이크를 걸더니 방향을 틀어 빨래 바구니를 향해 우당탕탕 거구를 쏟았다. 체인지 오브 페이스 미쳤네. 왜 취한 와중에도 막기가 어려운 건데. 서태웅은 살짝 빡쳤다.

그렇다고 뭘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뭐 빨래를 개는 건지 흩어 놓는 건지. 사실 윤대협은 빨래에 손 댈 필요조차 없다. 어차피 내일 저녁에 신혼여행 갈 예정이라 가사 전문가를 미리 고용해 두었으므로. 윤대협이 노리다가 실패한 건 그분의 일거리다.

그렇게 서태웅은 결혼 1일 차에 윤대협의 술버릇을 알았다.

집안일.

밖에서 같이 마신 사람들은 아무도 윤대협이 취한 줄 모른다. 그만큼 티가 안 난다. 잘 웃고 분위기 잘 맞춰 주는 건 평소에도 그러니까. 눈에 띄게 텐션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조용히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신다.

그러다 집에만 오면 가사 퍼레이드 시작으로 사실 자신이 취했음을 알린다. 오직 서태웅에게만. 얼굴조차 현관문 닫힌 다음부터 빨개지기 시작한다. 안심해서 그런가. 두 사람만의 공간에 들어오고 나서야. 그렇게 생각하면 서태웅은 뭐라 할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여전히 가사는 윤대협의 일이 아니다. 사실 그의 인생에서 가사를 도맡아 한 건 고등학교 자취방 시절이 전부다. 대학생 때부턴 본격적으로 농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어머니가 일시 귀국하셨고 프로 데뷔 후에도 사정이 비슷했다. 비시즌이라면 모를까 시즌 중엔 도저히 할 시간이 없다. 결혼 후에는 당연히 분가했지만 개막과 함께 모든 가사는 전문가에게 맡긴다.

그런 주제에. 취하기만 하면 그렇게 설거지를 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양말을 접어 놓고, 선풍기와 제습기를 싹싹 닦는다. 묘하게 갈수록 제대로 해내는 게 어이없었다. 그래도 결혼 첫날보단 익숙해진 건지. 양말 짝맞추기만 빼고. 그건 언제 시도해도 절망적이었다.

삼십 대 이후로는 조금씩 필름이 끊겼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집에 들어온 시점까진 기억하는데 그 후로는 애매하다고. 정확히 집안일을 하는 순간부터.

자신이 했던 말이나 행동을 기억할 수 없다는 건 상당히 위협적인 일이다. 윤대협은 기억의 공백에 다소 예민하게 신경 쓰는 편이었다. 다음 날 인상 팍 쓰고 있는 이유도 숙취가 아니고 혹시 취해서 서태웅에게 불쾌한 말이나 행동을 한 건 아닌지, 그러면서 자신은 기억조차 못하는 건 아닌지, 그런 일말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윤대협은 저답지 않게 곧바로는 말도 못 꺼내고 있다가 며칠 지나고 나서야 은근히 물어보곤 했다.

“지난번에 나 취했을 때… 뭐 했어?”

서태웅은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비밀.”

물론 서태웅은 전부 기억했다.

기억할 뿐 아니라 녹화했다. 윤대협의 술주정을.

꼭 필요한 순간을 위해 간직한 귀중한 자료였다. 운동선수로서 피할 수 없는 슬럼프 시기라든지. 그날 시합의 좋지 못한 내용으로 비롯하여 아직 소화하지 못한 분한 감정이 남았다든지. 비매너 관중 때문에 눈살을 찌푸린 날이었다든지. 하여간 기분이 처져서 텐션을 올릴 필요가 있을 때마다. 서태웅은 소파에 길게 누워 농구 팬들이 퇴근길에 건네 준 편지를 펼치거나.

이어폰을 꽂고 핸드폰에 간직해 둔 영상을 틀었다.

화면 속에서는 윤대협이 거대한 어깨를 화장실 문틀에 부딪혀 가며 무언가를 옮기고 있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거 가습기 내일 해. 빨리 자.”

제법 엄격한 어조.

윤대협이 구부정한 등 너머에서 훨씬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아냐… 안 돼… 지금 해야 돼…”

“그럼 내가 물 넣을게. 이리 줘.”

홱 돌아선 윤대협은 목덜미부터 벌겋게 달아올랐다. 한 손에 1.5리터 페트병 두 개씩 총 네 개를 들고 항의한다.

“안 된다고 태웅아. 너는 그냥 수돗물 바로 넣잖아 태웅아. 그러면 안 된다고 태웅아. 내가 미리 받아서 염소 빼 놓고 소독한 물로 넣어야 된다고. 하 이래서 서태웅. 아무것도 모르면서 진짜. 너 나 없으면 어떻게 할래? 가습기도 못 틀고 진짜.”

주정뱅이로부터 폭풍 잔소리가 쏟아진다. 진지한 표정인데 완벽한 술톤이다. 불그죽죽하다. 영상을 보던 서태웅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말았다. 분명 촬영 중이던 자신도 그랬을 것이다.

취한 윤대협의 술주정 집안일 방식은 아마도 윤대협의 고등학교 시절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인생에 가사를 도맡았던 시절이 그때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양말을 형편없이 짝맞춰 접어 두는 버릇이나, 수건을 세 번 만에 접는 순서, 가습기에 넣는 물에서 염소를 제거하는 습관은 모두 고등학생 윤대협이 결정한 룰인 것이다.

서태웅은 차가운 겨울 공기를 뚫고 윤대협의 자취방에 찾아가던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쯤에 아무래도 이건 연애인 것 같다는 자각이 어렴풋이 생겼던 것 같다. 확실하진 않지만.

의식하기 시작하면 난감해졌던 농구 이외에 몸과 몸이 닿는 경험도 기온이 내려가면서부터 한층 수월해졌다. 추위를 많이 타는 서태웅에게는 그랬다. 윤대협은 서태웅을 만질 때 한 번도 차가운 적이 없었다. 서태웅은 하자는 대로 솔직하게 따르는 편이었다. 윤대협은 다소 긴장할지언정 실망시킨 적은 없었다. 그런 게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같이 뜨거워지기 좋은 계절이었다.

서태웅은 어느 날부턴가 윤대협이 침대 옆에 틀어 놓던 조그마한 원룸용 가습기를 기억한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 동그란 가습기에는 언제나 물이 가득했다. 윤대협은 그걸 안 틀면 서태웅이 자면서 마른기침을 한다고 했다. 튼튼하다 자부하는 서태웅은 그런 적 없다고 우겼지만 윤대협은 꿋꿋했다. 본인도 건조한 건 싫다면서. 바다와 멀지 않던 그 동네는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건조하지도 않았을 텐데. 가습기를 틀면 자연스럽게 실내 온도가 조금 올라가 서태웅의 살결과 맞닿은 윤대협의 가슴팍에 물기가 촉촉하게 올라오곤 했다.

윤대협에게 가습기는 처음부터 서태웅을 위한 가전이었다. 그래서 거기 넣는 물은 최소한 하루 이상 공기에 노출해 잔류 염소를 제거해야만 한다.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만취한 순간에조차 너무나 당연하게 그랬다.

다음 영상은 침대에 엎어진 윤대협의 뒤통수로부터 시작된다. 결국 원하는 대로 잔류 염소를 충분히 빼낸 물로 가습기를 꽉 채우고 만족스럽게 쓰러진 만취 남편의 모습. 베개에 처박힌 모양 좋은 뒤통수가 중얼거린다.

“테웅아…”

“어.”

“사랑해…”

“어.”

사랑한다는지 사난한다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테웅이 사랑하는데…”

이번에는 영상 속의 서태웅이 대답하지 않는다. 서태웅의 기억으론 딱히 웃음을 참느라 그랬던 건 아니다. 면피용 반응조차 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뿐. 어차피 윤대협은 기억도 못 하는데. 성대 낭비다.

하지만 만취 윤대협은 무반응이 서러웠는지 곧바로 목소리에 울컥 물기가 어린다.

“테웅이는… 나 사랑한다고도 안 해 주고…”

여기서부터는 웃음을 참았던 게 맞다. 손 떨림 방지에도 불구하고 영상의 가장자리가 조금씩 떨렸다. 그 오랜 시간을 사귀면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소리. 윤대협이 울먹이는 목소리. 이건 귀중하다. 들을 때마다 서태웅은 그렇게 생각했다. 녹화하길 잘했다.

그다음 15분 정도는 다 새는 발음으로 서태웅 이름 한 번, 사랑한다고 한 번, 태웅이는 나 사랑하는 거 맞냐고 한 번. 도합 세 마디를 한 세트로 백 세트 정도 중얼거리는 윤대협의 모습이 무편집으로 기록되었다. 원하는 대답을 못 들으면 분을 못 이기고 침대에 엎드린 채로 수영하듯 발장구를 친다. 쿵쾅거리는 무시무시한 소리. 매트리스가 진심으로 걱정된다. 그래도 서태웅은 한 번도 말리지 않았다. 귀여워서.

그렇게 서태웅은 윤대협의 두 번째 술버릇을 알게 되었다.

진상 애교.

서태웅은 윤대협과 달리 원래부터 술을 그렇게 즐기진 않았다. 이걸 무슨 맛으로 먹냐는 게 솔직한 심경이었다. 결혼 후에는 일부러 안 마셨다. 특히 윤대협이 마시는 날엔 절대로 마시지 않았다. 혹시라도 취해서 진상 애교 플로어석 관람을 놓치면 손해 막심이니까.

서태웅은 윤대협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걸 미국에서 처음 알았다. 새벽에 일어나 러닝 한 시간, 농구 한 시간 하고 한 판 씻으면 아침 일곱시 반. 열세 시간 느린 고국은 저녁 여덟시 반. 저녁 시합도 훈련도 대충 끝났을 시간이었다. 서태웅이 윤대협에게 전화를 건다면 항상 그때였다. 윤대협은 한 번도 통화음 세 번을 넘긴 적이 없었다.

서태웅이 선호한 건 영상 통화 쪽이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화면 가득한 윤대협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윤대협은 언제고 음성 통화를 할 때와 다름없이 받았다.

“헤이.”

뒤따라 잔잔히 퍼지는 미소를 보면 안심이 되었다. 서태웅도 똑같이 대답했다. 헤이.

그런 안심감은 윤대협을 두고 온 과거나 고향이라 여기는 데에 기인하지 않았다. 서태웅이 알고 싶은 건 윤대협의 현재였다. 지나가지도 미정이지도 않은, 바로 지금의 윤대협. 만날 수 없어서, 눈앞에 둘 수 없어서, 손에 쥐어서 확인할 수 없어서 가슴이 철렁한 건 언제나 윤대협의 현재였고 그것을 마주할 때에야 서태웅은 비로소 가슴 속에 따스한 안심감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서태웅은 영상 통화를 좋아했다. 윤대협은 한 번도 통화음 세 번을 넘기지 않고 받았다. 언제 어디서나 카메라 앞에 얼굴을 보여주었다. 가끔은 어두컴컴한 술집이기도 했다. 윤대협 앞에 있는 맥주잔과 맥주병들. 그렇게 서태웅은 윤대협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걸 알았다. 조금은 낯선 윤대협의 현재.

서태웅은 통화가 끝난 다음에도 며칠 정도 그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잘 모르는, 그러니까 화면 밖의 풍경이 서태웅의 머릿속에 곧바로 떠오르지는 않는 낯선 공간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편안히 앉아 언제나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윤대협의 느긋한 미소. 새로운 장면은 종종 서태웅의 머릿속에 갑작스럽게 튀어나오곤 했다. 그러면서 되새김질처럼 소화되었다.

결론적으로 싫지는 않았다. 새로운 윤대협의 모습은 대체로 결론이 그랬다.

서태웅은 보통 자기 얼굴이 화면에 어떻게 나오는지 몰랐다. 신경을 안 썼다. 화면 속의 윤대협에 시선 고정. 그걸 최대한 잘 보려고 하다 보면 아무래도 서태웅 본인은 눈코입이 화면에 꽉 차도록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곤 했다. 윤대협은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하도 서태웅이 아무 말 없이 윤대협 얼굴만 구경하니까. 재미있게 여겼던 윤대협이 처음에는 그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태웅아, 뭘 그렇게 봐?”

“보고 싶어서.”

그 이후로 다시 물어보진 않았다.

서로 얼굴만 봐도 재밌다고 느끼는 바보 커플의 문제점. 말없이 십칠 분이고 이십구 분이고 삼십이 분이고 계속 화면만 쳐다본다. 물론 생각나는 대로 시시껄렁한 대화나 근황 캐치업도 하긴 하지만.

보통은 침묵 속에 윤대협이 먼저 툭 던졌다.

“나도 보고 싶어.”

서태웅이 먼저 보고 싶다고. 십칠분 간 열렬한 눈빛으로 말없이도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서. 윤대협은 침묵 끝에 소리 내서 대답했다.

서태웅은 끄덕이듯이 찬찬히 눈을 깜빡이곤 했다.

“내일 봐.”

그렇게 인사를 하면.

“그래. 오늘 하루도 힘내.”

전화를 끊기 전에 윤대협은 항상 핸드폰 마이크를 입술 앞으로 기울여 쪽! 소리를 냈다. 그러면 서태웅도 따라서 입술을 모아 쪽 소리를 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윤대협만큼 큰 소리는 잘 나지 않았다.

윤대협의 영상 통화 루틴은 술 마시는 자리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헤이. 인사를 하고. 지금 어디 있다든가 무슨 모임이라고 몇 마디 말하고. 자리를 뜰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주로 농구부가 아닌 사람들과의 술자리나 저녁 약속에서, 그러니까 옆에 서태웅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때 더 공개적으로 통화를 하곤 했다. 서태웅은 주변에 인사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다고만 생각했다. 애인 있다고 노골적으로 티 내는 중이라고까지 생각하진 못했다.

그런 식으로 옆에 누가 있을 때에 윤대협이 평소처럼 작별을 하면 백 퍼센트 난리가 났다. 오늘 하루도 힘내. 쪽! 서태웅은 자기가 낸 소리가 잘 안 들릴까 봐 모은 입술 끝에 더 힘을 줬다. 속으로는 제법 불만이었다. 왜들 이렇게 시끄러운지. 조용히 해.

그런 불만이 전해진 것일까. 언제부턴가 윤대협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서태웅의 영상 통화를 받지 않았다. 반드시 자기 집이나 조용한 곳,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차라리 길거리에 나와서 받았다. 서태웅은 말하지 않았는데 불만이 해결된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고 곧 잊어버렸다.

윤대협은 진짜 이유를 서태웅에게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잘 모르는 교양 수업 동기가 서태웅과 통화 중인 화면을 등 뒤에서 보더니 자신도 모르게 신음처럼 내뱉은 적이 있었다. 헐. 미친. 존나 잘생겼어…

그게 싫었다. 연애하는 서태웅의 얼굴은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딱히 닳는 것은 아니나. 윤대협이 정당히 독점한 것이므로.

서태웅이 귀국한 후에는 오히려 매번 그렇게까지 애틋한 애정표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손 뻗는 곳에 있고, 정기적으로 같이 농구를 하고, 집에도 오고. 여유가 생겼달까. 애인 있다고 굳이 티 내야겠다는 생각도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실제로 애인이 있으니까. 곁에. 그래서 오히려 주변이 사귀는 줄 몰랐던 걸까.

프로 데뷔 이후로 윤대협이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우승 축하 파티나 친한 사람 결혼식 급의 중요한 회식이 아니고서야. 또는 자신의 결혼식 피로연 같은.

그래도 여전히 아예 빠지면 빠졌지 일단 참석한 술자리라면 반드시 첫 잔 정도는 받았고 분위기가 맘에 들거나 기분 좋은 날이면 적당히 마시기도 했다.

렇다 보니 어느 자리든 부르면 가지만 무조건 물로만 건배하는 서태웅과 달리 윤대협은 연례행사로 한 번이나 두 번 정도는 취할 때가 있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필름이 종종 끊기는 게 신경 쓰여서 술을 줄이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오히려 더 적은 양으로도 만취하는 부수적인 효과가 발생했다.

윤대협이 술을 마실 땐 대체로 서태웅이 곁에 있었다. 아무래도 같은 업계니까. 처음부터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막판엔 데리러 가기도 하고.

그렇다고 옆에 앉아 음주를 말렸느냐. 그럴 리가. 솔직히 서태웅은 더 따라 주는 편이었다. 정작 본인은 물만 마시면서.

뭇사람들의 오해처럼 남편이 맘껏 마시면 뒷수습을 챙겨 주려는 기특한 마음인 건 당연히 아니었다. 오직 한 가지. 윤대협 술주정 보려고. 영상도 꽤나 확보했지만 역시 직접 관람하는 건 남달랐다.

사실 최고였다.

서태웅의 비밀 영상은 한동안 무사했다. 서로의 핸드폰에 별 관심이 없는 부부라서.

하지만 삼십 대가 지난 시점의 어느 한가한 비시즌. 둘 다 거실에 여유롭게 누워서 쉬고 있던 상태에서 서태웅이 블루투스 이어폰 페어링이 풀린 걸 모르고 영상을 트는 바람에 윤대협의 술 취한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고…

그렇게 윤대협은 술을 완전히 끊었다.

서태웅은 내심 아쉬웠다. 그렇다고 금주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필름이 끊기는 증상이 있다면 음주를 권장할 일은 아니다. 평생을 같이 살 거니까 건강이 우선. 주정뱅이 애교 진상 남편에 대한 웃기고 귀여운 기억이라면 이미 충분히 확보했으니까.

물론 영상은 혹시 몰라 클라우드에 백업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