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암의 꽃 11
불면의이쑤신
상쾌한 주말 아침. 늘어지게 늦잠을 잔 서태웅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끔찍한 숙취의 고통에 습격당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강백호보다 7배 정도 완력이 센 누군가가 불쾌한 냄새 나는 겨드랑이를 활용해 미친 듯이 헤드락을 조이는 것 같았다. 속이 안 좋아서 변기도 붙잡아봤지만 물밖에 안 나왔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못 먹고 어머니가 타 준 꿀물만 먹었다. 작은누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젯밤에 선풍기 부순 거 너냐?"
"..."
그러고보니 안방과 서태웅 방 사이에서 돌아가던 선풍기가 넘어져 있었다. 프로펠러를 감싸는 동그란 부품이 두 동강 난 채로. 비틀비틀 방에 들어가던 발걸음에 뭔가 치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알고 보니 그 시각 모든 가족들이 선풍기가 박살 나는 요란한 소리를 듣고 뛰쳐나왔었다고 한다. 도둑이라도 든 줄 알고. 만취한 막내아들이 침대에 뺨만 대고 엎어져 있는 걸 보고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해산했지만. 서태웅은 머쓱하게 꿀물을 마저 삼켰다. 작은누나가 엉덩이를 걷어차도 오늘만큼은 묵묵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몇 시간 동안 속을 비우니 울렁거리던 위장이 대충 진정되었다.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서태웅은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워서 오후까지 쭉 잤다. 피 같은 주말이 그렇게 녹았다.
하도 오래 자서 서태웅은 어떤 게 꿈이고 어떤 게 진짜인지 헷갈렸다. 너무 취한 자신을 강백호가 택시에 태워주는 꿈이었던 것 같다. 강백호가 자신을 위해 택시비를 쓸 리 없으므로 이 부분은 꿈이 확실하다. 꿈 속의 택시 기사는 우습게도 윤대협이었다. 남들보다 다리가 훨씬 긴 서태웅은 한 번도 택시 조수석에 타 본 적이 없는데 꿈에서는 왠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택시 기사 윤대협이 자상한 얼굴로 웃으면서 어디까지 가시냐고 물어봤던 것 같다. 사실 소리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마 그러지 않았을까?
꿈인데 시각적으로는 기괴할 정도로 생생했다. 윤대협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단정하게 속눈썹을 깔고 눈을 감은 얼굴 가운데에 또렷하게 솟아오른 티존을 더듬더듬 만져봤던 것 같다. 제법 파렴치했다. 그야 꿈이니까.
꿈속의 윤대협은 아주 이상한 표정을 했다. 울음을 참는 것처럼 웃는 얼굴.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 꿈에 나온다니 희한하다. 왠지 그 꿈을 기억하면 가슴이 꽉 조여들어 뜨겁게 녹아내리는 것처럼 아팠다.
컴백한 윤대협은 바쁘다. 스케줄이 줄줄이다. 그러나 서태웅은 한가했다. 하나도 안 따라다녔으니까. 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서태웅은 남아도는 시간이 주체가 안 됐다.
일단 다짜고짜 운동부터 늘렸다. 매일 아침 한 시간, 퇴근 후에 두 시간 헬스장에 처박혔다. 윤대협 덕질하느라 건강을 소홀히 하고 20대 초반에 벌어 놓은 근육으로 버텨내던 서태웅은 죽었다. 미친 듯이 근육이 붙었고 제발 바디 프로필 한 번만 찍자는 트레이너의 읍소가 점점 끈질겨졌다. 한 번만 더 징징대면 헬스장 옮긴다고 하니까 그제야 닥쳤다. 귀찮아 죽겠다.
일은 여전히 재미없었다. 딴짓할 게 없어서 집중했더니 더 빨리 끝났다. 그렇다고 딱히 열심히 하고 싶진 않았다. 서태웅은 여전히 정시퇴근 요정이었다. 그래도 가뭄에 콩 나듯 잡히는 개발팀 저녁 회식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게 됐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어차피 다른 일정도 없으니까.
한층 원만해진 사회생활과 바디라인 개선의 부작용. 잊을만하면 한 번씩 들어오던 소개팅 제안이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슬픈 현주소. 서태웅 나이대에 솔로인데 그 정도로 잘생겼고 키 크고 애초에 과묵해서 이상한 언행이 없는 성격 멀쩡한 남자는 매우 드물다. 얼굴과 피지컬의 탁월함을 고려하면 두 명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돌로 캐스팅될 뻔한 몸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 초까지는 학력을 이유로 금융권 속물들의 눈높이엔 안 맞는 모양인지 줄 서는 지경까진 아니었다. 허나 사회생활 짬이 찰 대로 차고 다 같이 늙어가는 나이가 된 지금에야 연봉만 맞으면 10여 년 전 학력 따위 문제가 되진 않았다. 어차피 서태웅은 입을 열지 않으니 무식하고 유식하고 딱히 티가 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이를 먹어도 바래지 않는 서태웅의 미모. 그 정도면 초졸이어도 수요가 있을 법했다. 서태웅을 탐내는 소개팅 주선자는 갈수록 늘었다. 당장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사내에서 연결 짓겠다는 제안만도 수두룩했다.
서태웅은 전부 거절했다. 오프덕질을 끊었기로서니 연애 같은 불확실하고 폭탄 같은 시도로 도파민을 채울 생각은 없었다. 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무리 예쁘다고 사진을 들이밀어도. 네. 예쁘시네요. 좋겠네요. 그게 다였다.
지나치게 담담했던 탓일까. 어떤 회식에선 끈질기게 뚜쟁이를 자처하던 한 상사가 혹시 게이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런 거에 편견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까지. 서태웅은 회사 들어와 10년 만에 처음으로 대놓고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편견은 얘가 있는데? 한국 남자 개발자들이 왁자지껄 웃었다. 얼렁뚱땅 건배하며 그 순간은 지나갔다.
전혀 취하지 않은 서태웅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생각했다. 능숙하게 감추지 못했던 혐오감은 성 지향성 같은 예민한 문제를 농담처럼 까발리길 종용하는 분위기 때문이었지 다른 뜻은 아니었다. 서태웅은 어떤 타인에게도 성적인 욕망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연애는 자꾸만 강요받아 부담스럽고 내키지 않는 무언가, 정말 나 빼고 다 하고 있는 것인지 신기하고 낯선 무언가에 가까웠다. 서태웅은 친구조차 딱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좋아하는 마음이라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태어나서 마음을 다해 좋아해 본 사람은 윤대협밖에 없다. 그럼 난 게이인가?
서태웅은 턱을 붙잡고 흠.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딱히 이렇다 할 깨달음은 없었다. 그냥 그게 다였다. 윤대협은 좋아한다. 타인은 관심 없다. 친구는 한 명이다. 친근감을 느끼는 지인은 조금 늘어났다... 8명 정도...
어쨌든 윤대협은 여전히 좋아했다. 꿈에 나올 정도로. 택시 기사였지만.
서태웅은 오프덕질을 끊고도 결코 덕질 자체는 끊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국내 콘서트가 뜨면 갈 생각이었다. 그 넓은 콘서트장에서는 제아무리 윤대협이라도 자신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전광판 볼 각오를 하고 스탠딩 후반대를 잡거나 2층 좌석으로 날면 그만이다. 해외콘은 비행기까지 타고 가서 구석 자리 처박히는 건 가성비가 심각하게 나빠서 포기했다.
안타깝게도 윤대협 그룹은 6개월간 해외투어를 하고 나서야 국내 콘서트를 했다... 떡밥이 씨가 마른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완덕이며 탈덕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8인의 고인물 중에서도 찍덕 한 명이 2.5D 영화배우로 갈아탔고 알페스 글러 두 명이 2D판으로 빠졌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리버스 타컾을 잡는 바람에 딱히 상부상조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8인 카톡방은 건재했다. 이미 그들은 실친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대망의 서울 콘서트 첫날. 오랜만에 아홉 명이 다 모였다. 서태웅까지. 올림픽공원 입구부터 응원봉 들고 지나가던 팬들이 서태웅을 힐끔거렸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타인의 시선은 간만이라 서태웅도 새삼스럽게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콘서트 3일만 나오고 말 거라 뿔테 안경도 마스크도 안 썼기 때문에 더더욱. 처음에는 뭔가 입어야 할 옷을 안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민망스럽기까지 했다.
상관없었다. 이제 와서 누가 자신을 알아본다고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서태웅은 오로지 안방 덕질만 하니까.
덕친들을 위해 잡아 준 스탠딩 앞번호 표를 수령해서 나눠 주고 서태웅은 2층 1열에 앉았다. 콘서트용 망원경은 굳이 사지 않았다. 클로즈업은 전광판이 제일 잘 해줬고 현장감은 맨눈이 가장 나았다. 어차피 직캠 다 뜰 텐데. 서태웅은 맨눈으로 보기를 가장 선호했다. 그래서 한 번도 콘서트에 카메라를 가져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보다 훨씬 잘 찍는 사람들만 믿었다. 서태웅은 언제나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덕질했다. 양쪽 2.0을 자랑하는 서태웅의 망막을 통해 기억 속에 윤대협을 새기는 건 오직 서태웅만 할 수 있었다.
윤대협은 여전히 완벽했다. 서태웅이 좋아하던 윤대협 그 자체였다.
서태웅은 자신이 왜 윤대협에게 사로잡혔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짐작건대 시각과 청각 정보가 가장 주요했을 것이다. 무대를 휘어잡는 윤대협을 보면 언제나 비슷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뜨거운데 청량한 빛의 에너지가 온몸을 채우고 순환하는 느낌. 왜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하는지 깨닫는 순간. 가슴이 물리적으로 이동하고 움직이는 것 같은 감동. 진짜로 파도에 휩쓸린 듯한 감격. 예능도 귀엽고 인터뷰도 너무 잘하고 성격도 다정하고 매력 있고 병크 없고 그런 점도 좋지만.
서태웅에게 있어 윤대협 최고의 콘텐츠는 언제나 무대였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서태웅은 오랜만에 실시간으로 직접 즐기는 윤대협의 무대에 눈가가 약간 촉촉해질 정도로 감동했다. 그동안 본의 아닌 오프 디톡스를 하는 바람에 청순해진 뇌에 들이붓는 도파민... 더더욱 심각했다.
클라이맥스는 윤대협의 솔로 무대였다.
윤대협은 일렉기타를 하나 들고 무대 한가운데 혼자 섰다. 환성이 거대한 체육관을 빈틈없이 채웠다. 생수병을 따서 목을 가다듬은 윤대협이 검지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삽시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스탠딩 마이크에 얼굴을 가까이 댄 윤대협이 나직하게 말했다.
"저 요즘 악기를 열심히 배우거든요. 그래서 연습을 진짜 많이 했어요. 이 노래를."
목소리를 한 번 더 가다듬는 기침을 한다. 윤대협이 무대 전에 이렇게 긴장하는 건 드물다. 서태웅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에 힘을 주고 제 손바닥을 만지작거렸다.
"뒤에 가사도 나올 거니깐... 들어주세요."
기도하는 것처럼 윤대협이 눈을 감는 동시에 무대가 암전됐다.
When you try your best, but you don't succeed
최선을 다했는데도 성공하지 못할 때
When you get what you want, but not what you need
원하는 걸 얻었지만 필요한 걸 놓쳤을 때
When you feel so tired, but you can't sleep
너무 피곤함에도 잠들지 못할 때
Stuck in reverse
모든 게 뒤집혔을 때
윤대협은 원곡자의 능숙한 가성을 흉내내는 대신 옥타브를 낮춰 듣기 좋은 중저음으로 노래했다. 여전히 기도하듯 눈을 감은 채로. 한 손은 스탠드에 꽂힌 마이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스탠드를 부드럽게 감쌌다. 기타에는 아직 손대지 않았다.
When the tears come streaming down your face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
When you lose something you can't replace
대신할 수 없는 무언가를 잃었을 때
When you love someone, but it goes to waste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아무 소용 없을 때
Could it be worse?
이보다 더 나쁠 수 있을까?
무대 양쪽의 전광판에는 윤대협의 떨리는 속눈썹까지 클로즈업되어 보였다. 무대 가운데의 윤대협은 미동도 하지 않고 노래에 집중했다. 그 뒤로 한 줄 한 줄, 영어와 번역 가사가 지나갔다.
서태웅은 왠지 가사에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심장에 이상한 박자로 단어들이 꽂혀 들었다.
팬들은 하나둘씩 핸드폰 플래시를 켜서 흔들기 시작했다. 2층 가운데부터 빠르게 퍼졌고 이내 스탠딩 구역에서도 눈치 빠르게 합류했다.
Lights will guide you home
빛이 너를 집으로 안내해 줄 거야
And ignite your bone
너를 따스하게 밝혀 줄 거야
And I will try to fix you
그리고 내가 널 낫게 해 볼게
윤대협은 고개를 젖히고 콘서트장 전체를 구석구석 바라보았다. 별처럼 동그란 빛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광경을 커다란 눈동자에 반사하면서 윤대협은 눈썹을 내리고 웃었다.
서태웅의 꿈에서처럼 울음을 참는 듯이 웃었다.
And high up above, or down below
저 위의 높은 곳이든, 저 아래 땅 밑이든
When you're too in love to let it go
너무 사랑해서 보낼 수 없을 때
But if you never try, you'll never know
하지만 시도하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지
Just what you're worth
네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원곡의 고음을 따라잡은 윤대협의 미성이 강렬하게 공기를 갈랐다. 평소보다는 훨씬 높은 음역이었다. 그런데도 윤대협은 물러서지 않고 샤우팅 하듯이 처절하게 불렀다. 그렇게 감정적인 무대는 처음이라고. 데뷔 때부터 모든 무대를 봤던 서태웅이 생각했을 정도로.
Lights will guide you home
빛이 너를 집으로 안내해 줄 거야
And ignite your bone
너를 따스하게 밝혀 줄 거야
And I will try to fix you
그리고 내가 널 낫게 해 볼게
간주에서 윤대협이 뒤로 물러서면서 기타를 양손으로 휘감듯이 붙잡았다. 유명한 기타 리프를 온 힘을 다해 연주한다. 전신에서 뿜어내는 집중력이 엄청났다.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지판을 향해 기울인 옆얼굴과 목빗근에서 땀이 후두둑 떨어졌다.
기타 연주를 멈추지 않은 채로 윤대협이 스탠딩 마이크로 다가가 노래한다.
Tears stream down your face
눈물이 너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When you lose something you cannot replace
네가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잃었을 때
Tears stream down your face, and I
눈물이 너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그리고 나는...
반복적인 후렴구를 부르는 동안 윤대협의 얼굴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아주 고통스럽게 찡그렸다가 정말 간절하게 아련해졌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부르고 있었다.
누구에게 부르는 것일까.
핸드폰을 흔들던 소녀팬들 중 감성이 풍부한 사람부터 하나둘씩 입을 막고 흐느끼거나 눈물을 훔쳐내기 시작했다. 서태웅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핸드폰도 들지 못했다. 머리를 세게 맞은 사람처럼, 심장이 이상해진 사람처럼, 전신을 움직일 줄 모르는 사람처럼 못 박힌 채로 윤대협의 무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마주했다.
모르는 새에 얼굴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노래 가사 그대로 눈물이 뺨 위로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서태웅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후렴구와 함께 기타 리프가 끝나면서 윤대협은 다시 두 손으로 스탠딩 마이크를 소중하게 감쌌다. 눈을 꼭 감고 마지막 구절을 부른다.
Lights will guide you home
빛이 너를 집으로 안내해 줄 거야
And ignite your bone
너를 따스하게 밝혀 줄 거야
And I will try to fix you
그리고 내가 널 낫게 해 볼게
마지막 단어는 정말 우는 것처럼 약간 떨렸다. 잠긴 듯한 목소리가 그대로 노출됐다. 그 여운과 함께 무대가 암전됐다.
서태웅은 다음 무대가 두 개 정도 지나갈 때까지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사실 앵콜까지 다 보고 나서도. 덕친들과 카톡으로 조심히 들어가라고 인사를 하면서도. 집에 가는 길에도 머릿속에는 그 무대뿐이었다.
서태웅은 윤대협이 울고 있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자신도 갑자기 눈물이 난 것 같다고.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렇지만 무대에서 윤대협은 여전히 행복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울 수 없다. 더 이상 보러 갈 무대가 남지 않은 서태웅은 그 콘서트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특히 윤대협의 솔로 무대를 자주 떠올렸다.
그 외에도 서태웅에게는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기억나는 순간이 아주 많았다. 5년간 윤대협과 함께 한 시간들. 한 번도 빠짐없이 반짝거리던 모습. 오랜 시간 대기하며 쌓였던 피로감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던 감각.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되살릴 수 있다. 다시 그 장소에 있는 것처럼.
서태웅은 가진 게 많았다. 모두 윤대협이 만들어 준 추억이었다.
그래서 괜찮았다. 견딜 수 있었다.
시간이 많아진 서태웅은 닥치는 대로 외주 제안을 받았다. 업무와 헷갈리지 않도록 중요한 마감 스케줄은 반드시 알람을 설정하고, 잊어서는 안 되는 협의 사항은 나와의 카톡에 기록했다.
그런데 맨 위에 못 보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한참 전에 보내 놓은 카톡이었다. 딱 세 줄.
잊지 말고 윤대협을 계속 좋아하기 고마워요 항상 내가 더 고마웠어요.
서태웅은 버릇처럼 아래턱을 붙들었다. 흠. 무슨 뜻이지? 날짜를 보니 강백호랑 고기 먹다 만취해서 집에 기어들어 오며 선풍기를 박살 낼 뻔했던 흑역사와 정확히 겹친다. 강제 오프 탈덕의 우울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술김에 써 놓았던 걸까. 윤대협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남몰래 적어 놓았던 걸까. 민망하다. 쪽팔린다. 그래도 취한 와중에도 참을 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왠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어 내버려 두기로 한다. 어차피 서태웅 빼고는 아무도 못 볼 테니까.
이렇게 써 놓지 않아도 어차피 계속 좋아할 건데... 잊어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건데. 술 취하면 정말 사람이 바보가 되나 보다.
서태웅은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그 후로 2년간 서태웅은 공식 콘서트 이외에 윤대협의 무대를 보러 가지 않았다. 사녹, 공방은 물론 규모가 작은 팬 미팅이나 앨범 프리뷰 행사나 소극장 콘서트 이벤트도 당연히 안 갔다. 강백호가 부탁하지도 않았고 천재라고 부르지도 않는데 굳이 굳이 정보를 전해 주는 스케치북류 프로그램 일반방청에 당첨된다면 눈에 띄지 않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굳이 연연하진 않았다. 작은누나한테 넌지시 가고 싶냐고 물어봤다가 남자 친구랑 가고 싶다길래 두 장 받아다 넘겨준 적만 있다.
눈에서 멀어져도 마음에서 멀어지지 않는데, 눈에 자꾸 붙여 놓는 것도 못 할 짓이었기 때문이다.
윤대협은 그룹 공백기 때 한 번 솔로 앨범을 냈다. 오랫동안 아이돌로 성장하며 개인적인 공부도 계속했다는 본인의 음악적 성숙함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노래 열한 곡으로 꽉 찬 정규 앨범이었다. 디지털 싱글 시대에 인트로부터 아웃트로까지 마음먹고 챙긴 보기 드문 작품이었다.
윤대협 최애 8인 단톡방은 난리가 났다. 장르 떠났던 고인물마저 헐레벌떡 돌아와서 팬싸 노리고 앨범 사재기를 했다. 서태웅은 덕친들 이름으로 한 장씩 공평하게 보태 주고 여덟 장을 얻었다.
아홉 명은 여전히 오픈카톡방을 통해 심심하면 연락을 주고받았다. 핸드폰 번호도 나이도 진짜 이름도 잘 몰랐지만 (물론 서태웅의 이름은 모두가 알았다. 양도 표 때문에...) 이 정도면 서태웅도 당당하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누군가가 단톡방에서 생일 축하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메시지와 기프티콘을 주고받게 됐다. 윤대협 그룹 활동 얘기가 아니어도 명절 인사나 공짜 이모티콘 증정 이벤트 소식을 알렸다. 재난 문자가 오거나 흉흉한 뉴스가 퍼질 때 서로의 안위를 묻기도 했다. 서태웅은 이제 그들에게 개인정보를 밝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깊게 윤대협을 덕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연결되면 곤란한 온라인 자아도 별로 없었다.
윤대협의 솔로 앨범은 댄스곡이 아니라 미디엄 템포의 밴드 곡이나 얼터너티브 락 발라드라고 부를 만한 스타일이었다. 서태웅은 한 곡 한 곡이 어쩐지 윤대협의 색깔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세련되고 트렌디하게 흐르다가도 거칠 정도로 날 것의 느낌을 주는 부분이 섞여 있었다. 청량하고 가슴이 탁 트이는데 어딘가 멀리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바다 같은 노래들이었다. 서태웅은 한동안 그 앨범의 노래를 정말 많이 들었다. 아무것도 듣지 않을 때 자동으로 머릿속에 들려 올 정도로.
데뷔 만 7년을 채우는 연말 콘서트 때 윤대협은 또 한 번 솔로무대로 레전드를 갱신했다. 선곡은 들국화의 <걱정말아요 그대>였다. 통기타를 들고나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제법 능숙하게 연주하며 노래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윤대협은 노래의 첫 번째 음부터 마지막 음까지 예쁘게 웃고 있었다. 심플한 가사와 멜로디를 묵직하게 전달하는 특징적인 음색이 가슴을 쳤다.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마지막 가사를 뜸들여 내뱉는 입술이 살짝 떨렸다. 그래도 끝까지 윤대협은 웃고 있었다.
전광판을 통해 그 모습을 보면서 서태웅은 어쩐지 예전에 <Fix you> 무대를 봤을 때만큼 가슴이 아렸다. 그 무대와 이번 무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인데도. 그때가 자꾸 생각이 났다.
서태웅의 서른한 번째 생일.
대대로 서가네 식구들은 연말과 신정에 연휴를 붙여서 다 함께 여행을 가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돌에 빠져 버린 막내아들이 집안 대소사를 내팽개치고 연말 시상식을 챙긴답시고 불참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개인플레이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자신의 가정이 생긴 장녀는 애초부터 바빴고. 둘째 딸은 잘됐다고 본인도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둘이서만 오붓하게 놀러 다니기 시작한 부모님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래서 서태웅은 이번 생일에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은퇴한 후로 부쩍 사이가 가까워진 부모님은 이번에도 튀르키예인가 체코인가로 여행을 떠났다. 카톡방에 멋진 불꽃놀이 사진을 보내시며 아들 생일 축하하고 해피 뉴 이어라고 말씀하셨다. 서태웅은 귀여운 이모티콘을 하나 엄선해서 보냈다.
제야의 종소리는 큰누나네 집에서 조카와 함께 들었다. 아이돌이 잔뜩 모인 시상식장에는 어김없이 윤대협도 있었다. 그러나 집중해서 보지는 못했다. 열두 시가 지났는데도 흥분해서 잠들지 못하는 조카를 재우는 데 동원됐기 때문이다.
어째서인지 서태웅은 조카 재우기의 스페셜리스트 취급을 받았고 실제로 잘 재웠다. 처음에는 놀아주는 척하면서 무력 제압을 했고 체중을 실어 꼭 껴안은 채 서태웅이 먼저 졸기 시작하면 조카도 금방 새근새근 잠들었다.
결국 조그마한 아이와 거대한 성인의 잠자리 수발은 깨어있는 어른들의 몫이 되었지만. 큰누나는 너그럽게도 충분히 도우미 역할을 했다며 노고를 치하하고 아침에 미역국까지 거하게 챙겨줬다.
서태웅은 부른 배를 두들기며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다. 일기예보는 중부지방에 오전부터 눈이 내릴 거라고 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서태웅은 그 전에 안락한 실내로 들어가고 싶었다. 작은누나가 어제 미리 사서 냉장고에 넣어 놓고 부산으로 친구들이랑 놀러 갔다던 케이크나 꺼내 먹을 참이었다.
집 앞에 거의 다 왔을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서태웅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받지는 않았다. 늘 그랬듯이. 만약 꼭 필요한 전화라면 문자가 올 것이다.
전화기를 확인한 김에 무심코 열어 본 카카오톡에 새 알람이 300개가 넘었다. 덕친들이 축하 메시지와 기프티콘 보내다가 수다 삼매경에 빠졌겠거니 했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서태웅은 아파트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대화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소란의 원인은 디스패치 기사 링크였다.
[단독] "정상에서 뜨겁게 안녕" N그룹 윤대협, 전격 은퇴 선언
- 연습생 때부터 10년, 다른 멤버보다 한발 앞선 계약 종료
- 최고의 인기에도 N그룹 재계약 생각 없어, 해체는 아니다
- R엔터와 완전한 이별 아냐... 새로운 커리어 향방은?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전신의 핏줄을 누가 틀어쥐기라도 한 것처럼 쿵쾅댄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 것처럼 어지럽다.
이명이 들리려는 순간.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태웅이 형!"
기계적으로 돌아본 곳에 믿을 수 없는 얼굴이 있었다.
"생일 축하해."
환하게 웃는 윤대협이었다.
"나 오늘부터 아이돌 아닌데."
마주한 두 사람의 얼굴 사이에 하얀 입김이 뜨겁게 흩어졌다.
"이제 친구 해 줄 거야?"
발그레한 두 뺨을 가득 안고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서태웅은 숨을 잘 쉴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한 번 보고. 기사 제목을 읽고. 윤대협 얼굴을 보고. 다시 핸드폰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윤대협 얼굴을 본다.
대답을 기다리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 기대감으로 가득한 커다란 눈.
아이돌과 팬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한 건 서태웅이었다.
서태웅은 끝까지 팬일 수 있었다. 행복한 팬이었다.
윤대협은 최선을 다하는 아이돌이었다. 행복한 아이돌이었다.
어제까진.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서태웅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윤대협 앞으로 걸어갔다. 윤대협은 싱긋 웃으면서 악수를 청하듯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서태웅은 있는 힘껏 그 손을 후려쳤다.
아야야... 윤대협은 엄살 소리를 내면서 화끈거리는 손을 흔들었다. 진짜로 아팠다.
잠시간 숨을 고르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태웅은. 지금까지 어떤 친구한테도 해 본 적 없는 인사를 건넸다. 다분히 충동적으로.
두 팔을 있는 대로 뻗어서 윤대협의 상체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윤대협은 살짝 뒤로 밀려났다가 금방 중심을 잡고 꼭 그만큼의 힘으로 서태웅을 마주 안아주었다.
윤대협의 가슴팍에 고개를 처박느라 드러난 서태웅의 목덜미 위로 첫 번째 눈송이가 떨어졌다.
하도 크게 웃느라 두텁게 주름이 잡힌 윤대협의 미간으로 두 번째 눈송이가 떨어졌다.
순식간에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