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ower Dance 3
불면의이쑤신
2월이 다가온다. 불면은 고민에 빠졌다. 윤대협 생일도 다가오기 때문이다.
원래는 당연히 생일카페를 할 생각이었다. 지구는 돌고 물은 축축하고 불면은 윤대협 생일카페를 연다. 입덕 이래 한 해도 빠진 적이 없어 이제는 안 하는 게 불안한 지경이었다. 뭔가 중요한 걸 빼먹은 것 같고. 엄마 생일 안 챙기고 지나간 것 같고.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 같고. 트위터에서 암암리에 보이는 '올해도 당연히 불면님이 생카 하나 열어주겠지'라는 전제 하에 올라오는 언급도 좀... 부담스럽고 맡겨 놨나 싶으면서도 어쩐지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솔직히 이제는 어렵지도 않았다. 절대적인 작업량이 많아서 그렇지, 일의 순서는 눈 감고도 진행 가능이다.
이미 누구보다 빠르게 대관 문의를 넣어 둔 장소도 있었다. 대충 와꾸도 다 짜 놨다. 요즘 유행하는 뉴트로 8bit 컨셉으로 디자인 잡아서 지난번에 맡긴 단골 커미셔너한테 맡기고, 컵홀더나 포스터나 엑스배너는 솔로 콘서트며 연말 시상식 때 찍은 사진 위주로 하고, 역대 시그 쭉 전시하고, 당근에서 이쁜 실내조명 몇 개 사서 거울 뒤에 깔아 놓고, 흰 벽에는 빔 프로젝터로 영상도 틀고...
하 이제 완전 생카 달인이네. 이런 거 대행하는 사업이나 할까. 불면은 생카 준비할 때마다 그런 뻘생각을 하다가도, 이 과정 자체가 덕질의 알파이자 오메가인데 누가 남한테 돈 내고 시키겠냐는 진실을 깨닫고 고이 접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누워서 떡먹기라고. 늘 하던 거 하는 거라고. 12월 31일까지는.
정초부터 팬덤을 강타한 은퇴 기사. 아주 그냥 뒤통수가 얼얼했다.
다행히 소송이나 정산 따위의 개싸움이며 앙금이 남거나 뒷담이 오가는 그런 끝은 아니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끔찍한 엔딩 중에선 그나마 최상인지 모른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딩은 빼박 엔딩이라는 사실이지만. 상처라고 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허탈함이 남았다. 통보를 당한 입장에선 피할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다. 어쨌든 끝을 정한 건 팬이 아니라 아이돌이니까.
그러나 데뷔 입덕인 불면은... 남몰래 후련함을 느끼기도 했다. 섭섭한데 시원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입덕 4년 차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끔찍했을 것이다. 엄청난 박탈감, 상실감, 내가 제일 사랑하는 공간에서 내쫓긴 기분, 갑자기 심장 절반을 뜯어서 도둑맞은 듯한 아픔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입덕 8년 차인 지금은.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다.
그간 많은 친구들이 다른 장르 잡아 떠났다. 새로운 사람들과는 왠지 예전처럼 친해지진 않았다. 그 말은 곧 예전만큼 덕질이 재밌지는 않다는 뜻이다. 어쨌든 덕질도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것을 함께 즐기는 시너지와 공명과 증폭. 그건 대체 불가능한 즐거움이다.
점점 방금 나온 뉴 떡밥보다 옛날 얘기 곱씹는 게 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 멤버가 그 멤버일 수 있었던 예전의 수많은 사건과 모험들, 과거의 영광들,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무명 시절의 라떼 추억을 읊으며 홍대병 코스프레 하기, 서태웅의 등장 이후 목격했던 엄청난 장면들과 일반인 알페스라는 마약맛의 사약... 그런 것들이 어제의 브이라이브보다 비교할 수 없이 재미있고 자극적이었다.
그 모든 추억은 윤대협 덕분에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윤대협은 여전히 불면의 최애다. 가장 감사한 존재다. 하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 새로운 콘텐츠로서 윤대협이 불면에게 줄 수 있는 자극의 정도는 하락세였다. 어쩌면 오래 전에 이미 고점을 찍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면의 덕질 중에 애정보다 관성으로 이어지고 있는 행동의 비율이 점점 늘고 있었다. 생카도 '당연히 해야 한다'는 감각이 '하고 싶다'는 감각보다 컸다.
N그룹 은퇴는 신이 주신 완덕 타이밍인지도 모른다. 불면은 점점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완덕이라는 두 글자에 딱히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탈덕보다 천배 억배 나은 거 아닌가? 나쁜 감정 없을 때 자연스럽게. 나도 효자 최애 덕분에 오타쿠로서 하고 싶은 거 다 해봤으니까. 좋은 친구들도 사귀고. 이제 덕질 좀 쉬면서 돈도 아끼고 현생도 돌보고. 어차피 윤대협보다 나은 최애로 갈아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그건 전적으로 불면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아이돌은 은퇴했지만, 사실 윤대협은 일반인이 된 것도 아니다. K팝과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떠나지도 않았다. 엄밀히 말해 계속 덕질하려면 할 수는 있다. 실제로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히려 아이돌 시절보다 안방 덕질하기엔 편한 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공식 스케줄이 없다는 건 단점이기도 하지만 장점이기도 했다. 무언가 챙겨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 떡밥 공급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을 강타한 은퇴 선언 이후 인터뷰 프로그램에 여러 번 나갔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예능도 나갔다. 오히려 볼 건 많아졌다. 윤대협은 아이돌에서 그냥 유명인이 됐다. 셀럽 인터뷰를 주로 하는 유명한 유튜브 예능에서 윤대협을 두고 연반인을 뒤집어서 '반연인', 반쯤 연예인이라고 놀림처럼 부르기도 했다.
은퇴 기사가 뜨고 나서 한바탕 홍역을 겪은 뒤, 팬덤이 싹 정리된 것도 홀가분했다. 유난스러운 과몰입러들은 대부분 떨어져 나갔다. 사생도 의미가 없어졌다. 보통 사생들은 사무실에서 매니저 차를 스토킹하는데 윤대협은 이제 매니저 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다. 집도 이사했는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혼자 사는 예능에 나온 건 빌린 원룸이었다. 신상을 캘 만한 스케줄이 없다.
자유로운 개인이 된 윤대협은 인스타그램 계정을 새로 만들었다. 더 이상 누구의 관리도 받지 않는다. 아무런 일상이나 스토리가 내키는 대로 올라온다. 예전처럼 빡센 메이크업을 한 얼빡 셀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윤대협을 한층 가깝게 관음할 수는 있었다. 제철생선 붕어빵을 머리부터 먹었는지 꼬리부터 먹었는지, 작업하다 친해진 외국인들과의 홈 파티에서 어떤 와인을 마셨는지, 작업실을 어떻게 꾸며놓고 사는지, 어떤 악기를 새로 사서 자랑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돌일 때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인간 윤대협의 진짜 단편이었다.
게다가 윤대협은 유튜브 계정을 만들었다. 심지어 제법 꾸준히 영상을 업로드 했다! 대협아, 팬들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자컨을 생산하는 거야? 감동적인 일이었다.
정기 컨텐츠는 무려 기타 연습 로그. 1월 한 달 동안엔 거르지 않고 일주일에 세 개씩 올라왔다. 커버곡이 대부분이었고 가뭄에 콩나듯 자작곡도 있었다. 노래는 내키면 흥얼거렸다. 열심히 연습해서 부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편집도 거의 없었다. 정말 지맘대로 영상이었다.
윤대협의 영상에는 첫 인사도 끝 인사도 없었다. 카메라를 켜고, 튜닝을 하고, 기타를 치고, 신나면 노래도 흥얼거리고, 시계를 보고, 카메라를 껐다. 정말 기록만이 목적인 것 같았다.
처음으로 '시청자'를 향해 말을 걸었던 건 세 번째 영상이었다. 카메라를 켜고 앉은 윤대협이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그러더니 화면을 향해 말을 걸었다.
"오늘은 손님이 왔어요. 친한 형인데요. 지금 여기 맞은편에 있어요. 보여 드릴까요?"
카메라 뒤쪽에서 흰 양말을 신은 발이 불쑥 날아와 윤대협의 종아리를 가격했다. 윤대협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아픈 시늉을 했다.
"초상권... 허락을 얻지 못했습니다. 아깝네요. 잘생겼는데. 그럼 이제 형에게 연습의 성과를 보여주겠습니다. 라이브 관객이 있으니까 떨리네요. 실수해도 봐 주세요."
진짜로 떨리는 것처럼 목을 가다듬으며 어깨를 두어 번 들썩여 힘을 뺀다.
그 날은 곡 하나가 끝날 때마다 카메라 바깥에서 아주 작은 박수소리가 들렸다. 그 때마다 윤대협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좋았어?"
영상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윤대협의 표정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 '형'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을 거라고.
정체불명의 '형'은 심심하기 짝이 없는 윤대협 영상의 유일한 변수였다. 지인을 초대해 놓고 아무렇지 않게 콘텐츠를 찍거나 연습에 몰두하다니. 역시 윤대협은 범상치 않다. 의외로 유튜버의 자질을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형'은 한 번도 목소리도 얼굴도 머리카락 끝조차도 나온 적이 없다. 유일하게 등장한 건 흰 양말을 신은 발. 지금 '형'이 카메라 뒤에서 손짓 발짓을 하고 있는데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윤대협이 킥킥 웃었을 때라든지. 작업실 구석 침대 위 이불을 뒤집어 쓴 커다란 형체 끝에서 삐죽 튀어나온 발바닥을 촬영했다가 아웃포커싱하면서 이렇게 속삭였을 때라든지.
"오늘은 형이 작업실에 놀러와 놓고 잠들었어요. 웃기죠. 지금 저기서 자고 있습니다. 저는 자장가를 연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틀리면 깨겠죠? 잘해야겠다."
아주 조용하고 소리 없고 촬영에 방해가 되지 않는 절친과 놀면서 야무지게 기타 연습을 하고 있는 윤대협. 그러나 '형'을 언급하는 걸 제외하면 영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직하게 기타 연습 뿐이었다. 오로지. 그것만. 처음에는 신선해서 열심히 챙겨 보던 불면도 다섯 번째 영상부터는 굳이 클릭하지 않게 됐다. 정말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 때만 배경음악으로 틀어 놓고 작업하는 정도.
그러니까 음악하는 윤대협, 윤대협이 하는 음악, 연주에 집중한 잘생긴 얼굴, 기타줄을 뜯는 기다란 손가락 같은 것도 이제는 불면에게 콘텐츠로서의 재미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4년 전이었다면, 아니 3년 전까지만 해도 눈물을 흘리면서 나노 단위로 움짤 쪼개고 캡쳐했을 장면이건만...
인스타와 유튜브를 중심으로 국정원 직원처럼 온라인 스토킹을 하며, 타인의 계정에 태그된 사진이나 가끔 게스트로 나오는 예능이나 R엔터 자컨에 배경인물로 지나가는 컷을 매의 눈으로 캡쳐하는 안방 덕질. 꽤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옛정을 은은하게 남겨 놓은 채로 고자극의 새로운 최애를 점지 받길 기다리는 루트...
불면은 그 길을 걷지는 않기로 했다. 질질 끄는 건 별로였다. 최애가 준 완벽한 완덕의 타이밍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아이돌과 팬은 어디까지나 애정으로 잠시 엮였을 뿐, 서로 빚진 관계는 아니다. 그렇다면 대상을 향해 불꽃처럼 타오르던 에너지가 물처럼 잔잔히 허공으로 스며드는 이 순간까지도 사랑하기로.
불면은 가장 자신다운 방법을 정했다. 마지막으로 윤대협 생카를 열기로 했다. 단 프라이빗 비공개 생카. 오로지 윤대협 데뷔팬 고인물 오프대장 8인을 위한 이벤트. 전원 시간이 맞는 날짜를 1박 2일로 빼고 호텔방을 하나 잡았다. 가진 윤대협 굿즈를 싹다 털어 와서 끝장나게 꾸며 보기로 했다. 블루톤으로 풍선도 주문하고 창고며 베란다에 처박아놨던 엑스배너, 등신대, 현수막, 역대 컵홀더가 다 나왔다. 심지어 출판 팬픽도 싹 모았다. 독서 시간도 일정표에 못박았다. 완덕 이후 굿즈의 처분에 대해서도 서로 고견을 나누고자 했다.
8인의 멤버 중 한 명이 커스텀 케이크를 주문했다. 다소 장엄한데 추한 그 케이크의 디자인은 윤대협 얼굴을 가운데 놓고 주변을 빙 둘러싸는 것처럼 나머지 7명이 새로 잡은 최애들의 이름을 레터링으로 적었다. 한중일에 양키 이름까지 다 있구나. 글로벌하고 좋네. 얘네도 다 윤대협 생일 축하해 준다고 치지 뭐. 내친 김에 서로의 최애를 브리핑할 발표 시간도 주기로 했다. 7인의 전 댑프들은 신나서 정성껏 못생긴 ppt를 준비했다.
1박 2일 스케줄을 꽉 채우고 나니 평범한 오타쿠 파티 일정이었다. 어쨌거나 불면에게는 마지막 윤대협 생일카페이자 셀프 완덕 이벤트였다.
불면은 고민 끝에 파티 사흘 전에 서태웅에게도 연락을 했다. 시간이 되면 잠깐 들러서 차 한잔 하고 가라고.
데뷔부터 은퇴까지 함께 했던 불면의 윤대협 덕질 역사가 총망라될 자리. 남신팬은 거기 초대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불면은 그렇게 생각했고 7인도 동의했다. 물론 팬픽 독서회라든가 커스텀 케이크 절단식이라든가 뉴 최애 브리핑 같은 브라 풀고 임해야 할 레이디 온리 이벤트는 심야 일정으로 따로 빼놓았지만... 아무리 데뷔팬이라도 그런 비계의 비계의 비계를 나눈 사이에서만 함께 할 수 있는 이벤트에 남신팬을 끼워줄 순 없는 노릇이므로... 그들이 기억하는 보송이는 뼛속까지 순덕이기 때문에 더더욱...
은퇴 기사 이후 첫 연락에도 서태웅은 9인 단톡방에 재깍 대답을 올렸다.
갈 수 있어요
그런데 잠시 후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한 명 더 가도 되나요?
불면과 7인의 전 윤대협 오타쿠들은 당황했다. 보송이에게... 모임에 데려갈 지인이 있다니? 일단 거기서부터 충격이었다. 게다가 같은 댑프? 근데 우리가 모르는? 보송아 우리가 널 그렇게 키웠더냐! 서태웅이 없는 8인 단톡방이 웅성거렸다. 혼란스런 마음이 알 수 없는 배신감까지 치닫기 전에 그들은 앞다투어 누구를 데려 올 생각인지 캐물었다.
친구인데 꼭 가고 싶다고 해서...
8명 중 5명은 카톡창에 '친구가 있었어요?'라고 쓰다가 지웠다. 누군가 이성을 붙잡고 꼭 필요한 질문을 했다.
그 친구도 윤대협 좋아해요?
답장은 아주 빨랐다.
네
그리고 보송이는 의외의 문장을 덧붙였다.
제 생각에는 여러분이 분명 좋아하실 것 같아요
물음표가 난무하는 와중에 불면은 파티의 주최자로서 보송이의 동행인을 허락했다. 어차피 차만 마시고 갈 건데 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공유한 오타쿠로서 서태웅은 절대 동지를 실망시킬 사람이 아니라고, 불면은 그렇게 판단했다.
8인의 전 윤대협 오타쿠들은 오전 11시부터 부지런히 얼리 체크인을 해서 신명나게 호텔방을 꾸몄다. 드레스코드도 파란색으로 맞춰 입었다. 다같이 윤대협 포카 들고 배달 점심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벌써부터 웃느라 광대가 아프고 얼굴 근육이 당겼다.
세팅이 끝나고 정리도 끝나고 한바탕 이 각도 저 각도 사진과 영상 찍기도 끝났을 무렵,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배달시킨 커피와 디저트가 도착한 줄 알고 두어 명이 뛰어 나갔다.
방문 뒤에 서 있던 건 서태웅이었다.
그리고 서태웅의 뒤에 서 있던 건 윤대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