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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4.02.14

14/2

불면의이쑤신

루카와 카에데의 누나는 신입생 때부터 친해져 작년부터 사귀기 시작한 연애 상대가 있다. 수요일은 연인이 된 이후 첫 발렌타인 데이. 루카와 가의 남매는 똑 닮아 추진력이 엄청나다. 해 보고 싶다고 마음먹은 건 반드시 한다. 장녀는 화요일 저녁부터 이것저것 사 와서 부엌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버터, 생크림, 카카오, 판 초콜릿, 아이싱 장식과 각양 각종의 은색 틀. 어머니는 내심 불안한 눈치였지만 단호하게 도움을 거절당하고 애써 모른 척하다가 아예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카에데가 귀가했을 땐 집안 전체가 달큰한 초콜릿 향기에 점령당한 지 오래였다. 땀에 젖어 살짝 가라앉은 까만 머리칼이 부엌으로 빼꼼 디밀어진다. 6인용 식탁 위에 온갖 재료와 도구를 늘어놓고 바쁘게 움직이는 누나의 동선에 겹치지 않도록, 카에데는 한동안 묵묵히 부엌 구석에 서 있었다.

평상시엔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막내 동생이 여기까지 와서 기웃거리다니. 이변을 눈치챈 누나가 중탕한 판 초콜릿 보울을 끌어안고 끊임없이 저으면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야. 먹을래?"

카에데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럼 비켜. 방해하지 말고."

카에데는 비키지 않았다. 계속 병풍처럼 서 있다가. 기다란 팔을 느릿하게 뻗어 식탁 위의 별 모양 쿠키 틀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 올려 만지작거렸다. 16년간 남동생의 비언어적 표현에 통달한 장녀는 그 동작이 담은 적극성의 의미를 순식간에 파악했다.

"뭐야. 너도 만들고 싶어?"

카에데가 슬쩍 눈동자만 들어 누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다시 빠르게 시선을 별 모양 쿠키 틀로 내렸다.

"아니... 나는 케이크..."

"케이크?"

카에데가 고개를 끄덕인다. 장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갑자기 케이크에 꽂혔지? 막내 동생은 나이와 덩치에 맞게 먹성이 좋은 편이고 딱히 가리는 건 없지만 특별히 단 걸 좋아하는 아이는 아니다. 사실 식탐 자체가 별로 없다. 배만 채우면 그만. 그마저도 졸음이 밀려오면 금방 우선순위가 밀린다. 부엌에 들어와서 뭐가 먹고 싶다고 리퀘스트하는 일 자체가 드물다. 지금처럼.

"알았으니까 그거 좀 잡고 있어 봐. 아니 그렇게 말고 쫙 당겨. 평평하게. 늘어나지 않게! 그래. 그렇게. 붓는다."

일단 지금은 제 코가 석 자였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카에데를 부려 먹으며, 잘 식힌 중탕 초콜릿을 준비해 둔 틀에 넣고, 윗면을 말끔하게 정리한 뒤, 랩핑해서 미리 비워 둔 냉장고에 넣었다.

후. 이제 한시름 덜었고. 앞으로 1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누나는 앞치마를 벗으며 남동생에게 명령했다.

"가서 자전거 꺼내."

"?"

"케이크 먹고 싶다며. 믹스 사러 가자고."

남동생의 리퀘스트를 들어주기엔 충분한 시간이지. 이러나저러나 루카와 가 사람들은 막내에게 약했다. 평소에 바라는 게 없어서 더 그럴지도. 카에데가 뭐가 먹고 싶다고 하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는 일 없이 산더미같이 만들어 주시는 어머니.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별수 없이 닮아 버린 것 같다고, 장녀는 카에데의 자전거 뒤에 앉아 마트로 향하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물론 지금부터 준비해서 내일까지 홀 케이크를 만드는 건 무리다. 장녀가 생각한 절충안은 컵케이크였다. 오븐을 예열해 두고 나왔으니 믹스를 사서 반죽만 만들면 간단하다. 식힐 시간도 충분하다.

카에데에게 실컷 먹이고 다른 가족들도 맛은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초코맛 컵케이크 믹스 대여섯 개를 카트 안에 툭, 툭 던지는 누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막내가 주섬주섬 박스들을 모으더니 도로 진열대에 올려놓는다.

"아 왜?! 케이크 먹고 싶다며!"

"초코는 안 돼."

장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늘어선 컵케이크 믹스들을 손가락질하면서 따진다.

"뭔 소리야. 발렌타인이잖아. 봐라, 진열대 전체에 초코맛이랑 아닌 게 9대 1이지."

카에데가 고개를 서서히 저었다. 이 고집불통 변덕쟁이 자식이 또. 다혈질인 장녀가 스팀이 뻗쳐서 아무거나 처먹으라고 소리를 지르기 직전에, 카에데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초코는... 지겨울 거야."

"허어?"

"너무 많이 받아서..."

"누가? 네가?"

막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도 슬쩍 돌려 버린다. 드러난 한쪽 귀 끝이 빨갛다...?

컵케이크 믹스가 종류별로 늘어선 진열대를 부모의 원수처럼 노려보더니, 맨 구석에 딱 하나 남은 걸 집어서 카트에 스르륵 미끄러뜨린다. 샛노랗게 번쩍거리는 커다란 패키지 타이틀이 장녀의 눈에 쏙 들어왔다.

[진짜 생레몬 제스트 함유!] 이지 컵케이크 믹스 [상큼한 레몬 맛]


"캡틴."

"아 깜짝이야. 소리 좀 내고 다녀라, 이 자식아."

"죄송..."

3학년 복도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거구의 후배 때문에 기겁한 미야기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 2학년 콤비는 한 놈은 너무 시끄럽고, 한 놈은 너무 조용해서 탈이라니까. 너무 조용해서 탈을 맡고 있는 루카와는 잠시 동안 미야기의 심장 소리가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등장할 때처럼 불쑥 용건을 들이민다.

"저 오늘 부활 못 감다."

"에엥? 진짜?"

미야기의 짝짝이 눈썹이 다 함께 있는 힘껏 위로 상승했다. 솔직히 미야기는 루카와가 어둠 속의 그림자처럼 등 뒤에 불쑥 나타났을 때보다도 훨씬 더 놀랐다. 농구를 빠진다고? 이 농구에 미친 놈, 농구 바보, 밥보다 잠보다 농구를 더 좋아하는 농구 귀신이? 미야기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푼수 같은 반응을 보였다.

"어디 아픈 거 아니지?"

"네. 멀쩡해용."

"집에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지? 너 혹시라도 그런 거 있으면 꼭 말해라."

"네. 멀쩡해용."

"그런데 부활을 빠진다고? 네가?"

"네."

미야기는 할 말을 잃었다. 도저히 이유가 가늠조차 되지 않았지만, 루카와의 평소처럼 살짝 멍청해 보이는 담담한 얼굴을 보니 진짜로 심각한 일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 반면 단호한 대답에서는 확고한 의지를 알 수 있었다. 미야기는 뒤통수를 북북 긁다가 고민을 중단하기로 했다. 에라 모르겠다. 알아서 하겠지. 애도 아니고.

"그래, 뭐 피치 못할 사정이면 어쩔 수 없지. 너 자율 훈련하지?"

"네. 아침마다 함다."

"뭐 니가 하루 부활 빠진다고 이제 와서 퇴보할 실력도 아니고... 미리 말해줘서 고맙다. 내일 보자."

"네. 감삼다."

루카와가 고개를 꾸벅 숙인다. 휘적휘적 돌아가는 그를 구경하려는 3학년 친위대들이 복도로 다닥다닥 머리를 내밀었다. 미야기는 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농구부 루카와다!"

"꺅! 지금이 기회 아니야? 빨리 초콜릿 들고 가 봐!"

"야, 내가 먼저야. 줄 서!"

아, 맞다. 오늘 발렌타인 데이였지...


루카와는 종례 종이 마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하교했다. 수요일인데 이 시간에 농구를 하지 않으니 이상했다. 어쩔 수 없었다. 루카와도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절대로 농구부를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입학 이후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열이 나는 날도 부모님 생신날도 루카와는 꼬박꼬박 농구하러 갔었으니까.

오늘은 안 된다. 반드시 준비를 마치고, 센도보다 먼저 도착해야 한다. 루카와는 힘주어 페달을 밟았다. 금방 가속도가 붙었다.

평소엔 갈 일 없는 번화가에 도착했다. 루카와는 미리 봐 둔 꽃집 앞에 자전거를 세웠다. 날이 날인 만큼 장미 모양 초콜릿이 듬성듬성 함께 꽂혀 있는 다발이 많았다. 전부 예뻐서 망설이고 있는 사이 친절한 주인이 말을 걸어 왔다.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루카와가 특별히 찾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머쓱하게 대가리만 긁적이고 있었더니 한 번 더 능숙한 접객 질문이 들어온다.

"어느 분께 드리려고 하시나요? 발렌타인 기념인가요?"

이건 루카와가 답을 아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어제부터 자꾸만 사람들이 착각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루카와는 항상 그랬듯이 확실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생일이에요."


루카와는 한 손으로 몰던 자전거를 신중하게 세우고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내렸다. 평소의 절반도 되지 않는 속도로 서서히 굴러가던 자전거가 멈춘 곳은 센도의 자취방 앞이었다. 센도가 알려 준 비밀 장소에서 무사히 열쇠를 발견했다. 아직 집에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연하다. 오늘은 료난도 부활이 있는 날이니까. 루카와는 괜히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리고 현관 안으로 쏘옥 사라졌다.

자전거를 천천히 몰았던 첫 번째 이유. 루카와는 품에 안으면 시야가 살짝 가릴 정도로 커다란 캐모마일 꽃다발을 식탁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조그마한 태양 같은 샛노란 원형 꽃술을 빽빽하게 둘러싼 흰 꽃잎들. 한 송이, 한 송이는 작은 편이었지만 백 송이는 우습게 넘을 만큼 모아 놓으니 전체적으로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귀여운 동시에 스케일이 컸다.

캐모마일은 꽃집 주인이 추천해 주었다. 2월 14일의 탄생화라고 했다. 루카와는 꽃말이 마음에 들었다.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 꽃다발을 받을 사람에게 딱 어울렸다.

꽃집에서는 캐모마일이 주로 다른 꽃다발을 만들 때 한두 줄기씩 넣어 주는 꽃이라고 했다. 그래서 제법 많은 수량이 남아 있었다. 루카와는 그 꽃집에 남아 있는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을 죄다 쓸어 왔다. 한 양동이에 가득 꽂혀 있던 것을 다발 하나로 묶어 달라고 했다. 너무 커도 무거워도 상관없다고. 더 큰 녀석에게 줄 거니까.

루카와는 센도의 자취방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렸다. 이 집에... 꽃병 같은 게 있나?

그럴 리가 없었다. 루카와는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1.5리터 생수병 하나를 찾았다. 물이 조금 남아 있길래 입안에 털어 넣고, 센도의 책상을 뒤져 커터 칼로 윗부분을 잘라냈다. 삐뚤빼뚤 하지만 물을 채우니 그럭저럭 구실은 할 것 같았다. 꽃다발은 어떻게 해체해야 할지 몰라 그냥 포장지째로 줄기만 꽂았다. 묶어 준 모양을 유지할 수 있어 밸런스도 나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센도의 식탁 위에 웅장한 꽃다발이 서 있게 됐다. 엄청나게 화려해졌다. 캐모마일은 나름 소박한 꽃인데도 그랬다. 루카와는 만족스러웠다. 생일 분위기가 났다.

가방을 열어 오늘 하루 종일 조심스럽게 자전거를 운전한 두 번째 이유를 꺼냈다. 길쭉한 분홍색 상자를 정중하게 열자 동그란 구멍이 뚫린 종이에 반듯하게 고정된 레몬색 컵케이크 세 개가 등장했다. 누나와 어제 늦게까지 만든 역작. 그중에서도 가장 모양이 예쁘게 뽑힌 영광의 1위, 2위, 3위였다.

어제의 누나는 좀... 무서웠다. 만들다 말고 냉장고 속에서 차갑게 굳은 지 오래인 본인의 초콜릿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루카와의 컵케이크 만들기와 연애사 캐내기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너 이거 누구 주려고 이래? 발렌타인에 초코 쓸어 모으는 놈이야? 여자 후리고 다녀? 언제부터 좋아했어? 고백도 할 거야? 쏟아지는 질문을 다 기억할 수 없었던 루카와는 간신히 첫 번째 질문에만 대답했다. 누나도 아는 사람이야. 센도 아키라.

누나는 즉시 분노의 머랭치기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표출했다. 역시 친구는 개뿔이었다는 둥, 크리스마스고 생일이고 가족들 다 버리고 홀랑 채가더니 알아봤다는 둥, 멀끔하게 생겨가지고 여자고 남자고 다 홀리고 다녔다는 둥, 잘 모르겠지만 나쁜 말을 하는 것 같아서 루카와는 즉시 반박했다. 센도는 나만 좋아해. 그냥 인기가 많은 거야.

분노의 머랭치기가 더욱 빨라졌다. 남동생 키워 봤자 다 소용없다(언제 키웠지?), 얌전한 고양이 16살에 부뚜막에 홀랑 살림 차렸다(난 사람인데), 내가 그 나이 땐 연애고 뭐고 공부하고 부활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아닌 걸로 아는데). 그때부턴 욕의 대상이 주로 루카와 본인이었기 때문에 그냥 묵묵히 들어줬다. 누나는 금방 제풀에 지쳤다.

루카와는 누나에게 센도가 챙겨 준 본인의 생일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미리 사다 놓고 짠 보여줬던 꽃다발과 딸기 케이크, 정성껏 준비해 준 선물, 새해 첫눈을 뽀득뽀득 밟으면서 바닷가를 따라 걸었던 긴 산책.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나름대로 간직해 왔던 보물 같은 추억이었다.

누나는 루카와의 담담한 이야기를 웬일로 태클 없이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레몬 크림 컵케이크를 만드는 법을 전수해 주었다. 루카와는 숱한 실패 끝에 혼자 힘으로 제법 모양을 갖춘 컵케이크를 세 개 건질 수 있었다. 실패작은 모두 루카와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남동생 연애 조력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누나는 그때부터 본인 연애 프로젝트를 위해 초콜릿을 완성하느라 밤을 새웠다. 미안 누나.

루카와는 문구점에서 산 금색 초 하나를 세 개의 컵케이크 중 가운데에 신중하게 꽂았다. 컵케이크 셋에 초 열일곱 개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서 포기하고 하나만 샀다. 열심히 포장한 선물 상자도 꺼내 늘어선 컵케이크 옆에 놓았다. 뭔가 빠진 것 같은데... 턱을 손가락 사이에 괴고 고민하다가, 센도의 부엌 찬장을 열었다. 주섬주섬 마음대로 안을 뒤져서 조그마한 앞접시 두 개와 포크 두 개, 그리고 유리잔 두 개를 꺼냈다. 스포츠 드링크라도 따라야 하나? 센도의 집에는 주스도 없고 탄산수도 없다. 물이라도 마시지 뭐. 아니면 이따 나가면서 사 오든가. 루카와는 괘념치 않았다. 힐끗 시계를 본다. 료난의 부 활동이 한창일 시간이었다. 아직 충분했다.

거대한 꽃다발, 세 개의 레몬색 컵케이크, 유리잔과 앞접시와 포크. 주인 없는 식탁 위에 두 사람분의 생일상이 완벽하게 차려졌다. 루카와는 뿌듯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모두 센도가 가르쳐 준 로맨틱이었다.

이제 센도를 데리러 가야지. 루카와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덜컥, 현관문 손잡이가 돌아갔다.

"어라?"

예상보다 훨씬 일찍 귀가한 센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카와를 바라보았다.

"루카와?"

쳇. 마무리는 실패였다. 멋지게 데리러 가고 싶었는데. 루카와는 짧게 혀를 찼다. 아직도 얼떨떨하게 현관 앞에 서 있는 센도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손을 잡고 재촉해, 식탁 앞으로 데려갔다.

센도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서프라이즈 대성공. 루카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생일 축하해, 센도."

달콤한 사랑이 꽉 찬 식탁 위에 초콜릿은 단 한 조각도 없었다.

센도 아키라, 17년 인생 최고의 발렌타인 데이이자 생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