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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3.07.11

서른 Thrid shot

불면의이쑤신

센도 아키라는 점심시간에 컴퓨터 스크린세이버를 노려 보며 열여덟 살을 회상한다.

모니터 성능을 과시하는 듯 알록달록 총천연색 바닷속 풍경 사진이 네모난 모니터를 위아래 대각선으로 둥둥 떠다닌다. 가끔 프레임에 부딪히면 느리게 튕겨 나온다. 센도는 스쿠버 다이빙을 해 본 적이 있다. 실제 바닷속은 이것보다도 더 색채가 다양하고 선명했다. 육지에서 본 적도 없는 낯선 질감과 패턴이 가득했다. 바다는 언제나 사진보다 실물이 낫다.

가령 열여덟 살의 어느 여름날.

그때도 바다를 봐야만 했다.

센도는 진로 상담을 마치고 집에 가려는 루카와를 납치했다. 루카와의 첫 마디는 오늘 농구공 없는데. 였다. 센도에게 가지 않고 집에 가려고 했으니까. 주머니에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를 도로 집어넣으며 센도가 어깨를 으쓱였다.

"농구하자고 온 거 아닌데."

오늘의 일정을 혼자서 알고 있는 센도에게도 농구공은 없었다. 루카와는 좋다 싫다 말도 없이,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얼굴로 담담하게 센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센도는 오른손 주먹을 자신도 모르게 꾹 쥐면서 그 말을 꺼냈다.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이번에는 루카와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눈이 약간 커지고. 직선의 속눈썹이 평소보다 훨씬 높은 각도로 솟는다. 잠깐 그렇게 센도를 보다가. 입술을 일자로 꾹 물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루카와는 자전거를 두고 걸어서 교문이 없는 담장 사이를 지나쳐 센도의 옆에 나란히 선다.

함께 걸었다. 바닷가로.

바다를 향해 골목을 걸을 때. 센도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루카와도 재촉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 말없이 옆을 걸었다. 나란히 흔들리는 손등이 닿을지도 몰라서 센도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면 누구나 일단 걸음을 멈추게 된다. 크게 한 번 숨을 들이키고. 다시 내려놓게 된다. 언제든 그렇다. 매일매일 바다를 보던 고등학생 때에도. 한 호흡을 너른 바다와 공유하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안녕. 나 왔어.

옆에서도 조용히 빠져나가는 날숨이 느껴진다. 바닷바람이 루카와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긴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지만. 한숨 내려놓은 듯이 편안해져 있다. 루카와도 바다에게 인사를 하고 있을까. 안녕. 나 왔어.

바다가 가진 무한한 습기 때문에 밀도가 진해진 바람이 제법 무시할 수 없는 속도로 몸을 감싼다. 파도 소리가 들린다. 시원하다.

한참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가 센도가 모래사장을 걸어 나간다. 다섯 발자국 뒤에서 루카와도 따라왔다. 모래사장은 저절로 걸음을 느리게 한다. 바다로 가려면 언제나 그렇다. 서두르지 말고 오라는 듯이.

파도에 발이 젖지 않을 지점에 멈춰 섰다. 솨아아 철썩하는 물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가까이서 들린다. 그런데도 아직 멀리에서 들린다. 대다수의 파도는 이리로 오다가 흩어지고 딱 한 개씩만 모래사장에 도착해 발 앞에 부서지고 다시 부서진다.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단일 물질의 가장자리에서 망설임 없이 흩어지는 조그마한 물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바라본다. 투명한 바닷물을 조각조각 퍼즐처럼 나누는 하얀 거품.

이런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깨끗해진다. 그러면 명료한 무언가가 떠오르고. 대다수의 꼬인 것은 정리된다. 그래서 여기로 온 건데.

오늘은 아니구나. 센도는 착잡한 한숨을 쉬었다. 바다를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는 루카와를 흘끗 곁눈질한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기도 하고 깊은 상념에 잠긴 듯도 한 담담한 무표정. 발 앞의 파도보다는 멀리 수평선을 보고 있다. 낮아진 햇살이 물결에 반사되어 눈부신지 약간 찡그리고 있다. 그래도 눈을 감거나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본다...

갑자기 루카와가 허리를 숙였다. 신발과 양말을 벗는다. 신발 끈을 서로 묶어 맨 팔뚝에 감는다. 교복 바지를 둥둥 걷어 올리고. 가방끈을 확 조이더니 센도를 쳐다본다.

"좀 뛸까."

"엥?"

"승부하자."

그러더니 냅다 모래사장을 박차고 뛰어간다.

센도는 소리 내어 웃으며 그 뒤를 전속력으로 쫓아갔다.

운동화가 모래에 푹푹 빠진다. 앞서가는 루카와의 맨발은 날렵하게 모래를 차올리며 발자국을 찍고 있다. 치사하네. 그래도 스태미나는 내가 아직 위일걸.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귀 뒤쪽부터 관자놀이 둘레쯤이 화악 각성한다. 심장이 거칠게 펌프질한 피가 사지로 빠르게 퍼져 나가고 광배와 대퇴의 큰 근육이 활성화된다. 센도는 가장 익숙한 감각에 둘러싸인다. 문자 그대로 피가 서서히 뜨거워지는 기분. 루카와의 불타는 두 눈을 코트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던.

이렇게 뛰고 있으면 머릿속에 어떤 말도 쌓일 수가 없다.

있잖아 루카와. 아무래도 말이야...

결승선을 정해 놓지 않은 달리기였던 점이 결정적이었다. 루카와는 결국 센도에게 따라잡혔다.

한참을 제치고 달려가던 센도가 멈춰 섰다. 루카와도 그제야 멈췄다. 무릎을 짚고 헉헉거린다.

센도는 가던 길을 돌아왔다. 엉망이 된 호흡을 후우 한 번 크게 내쉬면서 고른다. 루카와가 무릎을 모래사장에 꿇고 캑캑 기침을 한다. 이런.

"괜찮아?" 센도가 루카와의 등을 가만히 쓸었다. 루카와가 그 손을 탁 쳐냈다. 져서 열받았구나. 솔직한 반응을 보니 괜찮은 것 같다. 센도의 표정이 밝아졌다.

한참 모래사장에 두 손을 짚고 숨을 고르는 루카와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센도도 힘들다. 이렇게까지 전력으로 달린 건 오랜만이다. 루카와는 항상 100%를 쏟게 만든다.

앉아서 보는 바다는 더 예쁘다. 그새 해가 많이 낮아졌다. 부드럽고 눅진한 황금빛이 바다 위로 쏟아져서 물결친다. 빛으로 그린 그림 같다. 넋을 놓고 보게 된다.

옆에서 루카와도 자세를 바꾼다. 엉덩이를 깔고 한 쪽 무릎을 올려 팔꿈치를 걸친다. 그새 숨이 잦아든 턱을 가만히 괴고 있다.

센도는 어느 틈엔가 빛이 일렁이는 아름다운 바다 대신 루카와를 보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곳 없이 매끈한 옆얼굴이 황금색 햇빛에 싸여 윤광을 낸다. 전력 질주의 여파로 아직 살짝 달아 오른뺨이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콧대 옆으로 짙은 그늘이 진다. 눈이 부신지 살짝 찡그린 미간에도 조그맣게 그늘이 졌다.

센도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그걸 들킬까 봐 주머니에서 초록색 일회용 카메라를 꺼냈다.

찰칵.

루카와가 항의하듯이 이쪽을 바라본다.

"뭐야. 어제부터."

센도는 진짜 기분을 감추고 싶어서 미소를 지었다.

"그냥. 가끔은... 좋잖아."

이제 마지막이잖아.

그런 단어는 차마 꺼낼 수 없었다. 이상하게 감성적이 되어 버린 자신을 더욱 주체할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너무 강력하다.

잠깐 지나가는 아름다운 별똥별이나 희미하게 반짝이는 반딧불. 찰나에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존재. 무심코 소원을 빌고 싶어질 정도로. 그런 빛을 어떻게든 남기고 싶고. 무언가에 새겨서라도. 조각이나마 붙잡고 싶은... 어리석은 충동을 들킬 것 같았다.

"신발에 모래 다 들어갔네. 이것 좀 봐."

운동화를 벗어서 뒤집었더니 솨아아 모래가 떨어진다. 옆에 앉아 있는 루카와는 의기양양하게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보란 듯이 맨 발가락을 모래 속에 파묻고 꼼지락거린다. 얄미운 녀석. 본인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뛰었다. 그래도 내가 이겼지만.

짭짤하고 습한 바다 냄새에 섞여 있는 달콤한 냄새는 루카와의 땀 냄새일까?

해가 정말 지려나 보다. 바다색 하늘에 핑크색이 섞여 들어간다. 경계선은 보라색으로 물든다. 어디부터 무슨 색인지 말할 수 없이 혼란스럽다. 바다는 그런 것에 휩쓸리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투명하다. 강한 빛은 강하게 반사하며 아름답게 빛난다.

센도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루카와의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루카와는 쓰다듬을 좋아하는 고양이처럼 얌전히 눈을 감았다. 바닷바람이 촉촉해진 이마를 스치고 지나갈 땐 노을에 물든 뺨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이런 순간에는 정말 말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가슴이 꽉 조여드는 것처럼 아프다.

마음속으로도 구체적인 형태를 만들면 안 될 것 같다. 그러면 정말 입에 뱉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빌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끝내 토해 놓는 것이 서로에게 최선일까? 가지 말라거나, 좋아한다거나, 그런 말도 안 되는 고집이...

"내일은..."

센도가 퍼뜩 놀랐다. 루카와가 눈을 감은 채로 먼저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바닷바람에 아무렇게나 흔들리던 속눈썹이 천천히 올라간다. 노을을 담은 눈동자가 센도를 쳐다본다. 아직 발그레한 열기가 남은 건지 핑크색으로 물든 하늘이 내려온 건지 모를 빛의 뺨을 하고서.

"네가 좋아하는 걸 하자."

마치 오늘은 루카와가 좋아하는 걸 했던 것처럼.

그게 아니야. 루카와. 오늘도 내가 너를 데려온 건데. 할 말이 있다면서 한 마디도 못하고. 센도는 자기 자신이 바보 같아서 포기하듯 웃었다. 힘없는 한숨이 마구 섞여 나왔다.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 그러자."

내일도 함께 할 수 있다면.


루카와 카에데는 사진 한 장을 들고 열여섯 살 때 달리던 해변가를 찾았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면 누구나 일단 걸음을 멈추게 된다. 들고 있는 줄도 몰랐던 숨을 조용히 내려놓게 된다. 바닷바람이 루카와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긴다. 어느 때에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고 마음으로 속삭인다. 안녕. 나 왔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면 바다가 더 가까워진다. 언제든 그대로다. 14년이 지나도. 바다는 변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낡고. 닳고. 약해진다.

그래도 된다고 바다는 말해 준다.

이제 루카와는 모래사장을 달릴 수 없다. 그러기는커녕 오래 서 있기만 해도 돌아가는 길이 괴로울 것이다.

열여섯 때와는 달리 천천히 모래사장을 따라 걷는다. 거칠지 않은 초여름의 상쾌한 바닷바람이 함께 걸어준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외롭지 않게.

귀국 기자회견 때 아이다 히코이치가 있었다. 스포츠 기자가 된 건 알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몇 번 인터뷰를 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져서까지 기어코 제 입에서 그 이름을 꺼낸 건 얄미웠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이니까.

그 긴 세월 동안 농구하는 내내 14년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어떤 등을 보고 있었다. 7번 센도 아키라. 이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선수다.

처음은 너무 강력하다.

한 번도 넘었다는 느낌이 시원하게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꺼이 발을 대라고 두 손을 모아서 내밀었으니까... 그런 건 넘었다고 하지 않는다. 넘겨줬다고 한다. 그렇게 영원으로 남아 버렸다. 치사하게.

한계를 만날 때마다 그 등이 나타났다. 깨지거나 깨거나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게 보이면. 마치 혼자가 아닌 것처럼. 한 번도 잡아 본 적 없는 누군가의 손을 꼭 쥐고 에너지를 받은 것처럼. 망설임 없이 몸을 던져서. 이겨내 왔다.

강렬하고 흔들리지 않는 두 눈동자를 떠올리면. 언제라도 눈이 번쩍 뜨였다. 안개가 걷히고. 불꽃만 남았다.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처럼.

혼란이나 번뇌를 쩍 소리 내며 가르는 태양빛. 그의 기억은 한 번도 루카와에게 다그치는 채찍이었던 적이 없다. 인간에게 태양빛이 그런 것처럼. 그대로 따라가면 위로 상승시켜 줄 것 같은 강력한 믿음이었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선수인데도.

아이다 히코이치에게 물어봤다면... 분명히 근황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소재지나 연락처까지도. 그러나 루카와는 인터뷰가 끝나고 아이다를 따로 만나지 않았다.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마 조만간 밥은 한 번 사야겠지. 미국까지 인터뷰하러 와준 게 고마우니까. 그건 오직 아이다와의 관계를 돌보고 가꾸는 일이다. 다른 사람을 끼우지 않고.

물론 아이다를 존중하는 마음 때문에 센도에 대해 묻지 못한 건 아니다.

그럼 왜였을까.

침묵과 함께 바닷가를 걸으며 루카와는 지금까지 마주하지 못했던 질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잡힐 듯 말 듯 도망치고 싶은 어렴풋한 마음. 너무 오래된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한 것 같기도 하고. 나와 내 마음의 술래잡기. 미국에서 이런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센도에 대해 차분히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한참 후에야 루카와는 결론 비슷한 것을 내렸다. 지금까지 센도 아키라를 찾지 않았던 이유는... 놀랍게도 무서워서인 것 같다고.

루카와는 태어나서 그 무엇도 무서워해 본 적이 없다. 특히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절은 거절하고 사양은 사양하고 저 자신의 한계를 찢어발겨 서고 싶은 위치에 섰고 갖고 싶은 걸 손에 넣었고 되고 싶었던 선수가 됐다.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도 끝내 한 걸음을 내딛고 한 번 더 점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거절한 적 없는 곧고 따스한 태양빛. 먼저 손을 뻗어 다시 만나는 게 왜 무서웠을까.

부드러운 파도 소리가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북한 질문에도 거리낌 없이 답할 수 있도록 응원해 준다.

아마도 피하고 싶은 건... 거절이겠지.

그리고 연락할 수단을 손에 넣으면 그때부터 끝없이 찾아올 망설임. 루카와는 망설이는 데 재능이 없었다. 수단이 있으면 저지를 게 분명하다. 그랬다가 아마도 마땅한 결론을 듣게 되겠지. 농구 선수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원년부터 프로 감독인 미츠이 선배나 2년 전에 국내 리그로 온 미야기 선배가 한 번도 그 이름을 입에 올린 적 없으니까. 그보다 한 발 더 사적인 걸 알게 되겠지. 결혼을 했다거나 아이가 있다거나. 자신과 농구가 없는 세상에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서른 살, 아니 서른두 살의 센도 아키라. 생각만 해도 온몸의 털이 쭈뼛 솟는다.

이런 것들은 대체 언제부터 느꼈던 두려움일까. 서른이 돼서일까. 아니면 열여섯, 아니 열다섯부터?

자문자답을 하며 외면해 왔던 스스로의 마음을 조금씩 깨닫는 사이. 목적지 근처에 온 것 같다. 루카와는 주변을 둘러보다 주머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 풍경과 맞춘다. 여기가 맞다. 아마도.

얌전히 모래사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무릎을 세워서 팔로 끌어안는다. 발가락으로 따뜻한 모래를 파고들던 감각이 그립지만. 양말까지 벗었다가 다시 신는 것도 귀찮으니까 그만두기로 할까. 이런 때 약간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마음이 너무 커져서 무서울 때는 다짜고짜 달릴 수 있었던 시절이 조금 그립다.

그때는 정말 무서운 줄 모를 수 있었다. 튼튼한 무릎을 믿고. 지금 생각하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 버린 하루하루에 휩쓸려.

그날 하려던 말은 뭐였을까.

루카와는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재촉하기보다 기다리기를 택했기 때문에. 그게 성미에 맞았다. 아무리 농구를 좋아해도 먼저 농구장을 차지한 사람이 있으면 묵묵하게 차례를 기다리듯이.

후회는 없다. 센도가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그 마음 역시 존중해야 한다. 그쪽에서 할 말이 있다면서 불러냈다 할지라도. 어차피 그날 루카와는 손해를 본 게 없다. 좋아하는 사람과 바다를 보고. 달리고. 바람을 맞고. 간직하고 싶은 시간이었다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그가 어떤 말을 했대도. 어떤 말을 참았대도.

루카와는 정면의 바다를 바라보지 않았다. 옆자리의 모래사장을 괜히 쓸어 본다. 첫사랑이 앉았던 위치라고 생각하면서. 겁쟁이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다. 지나간 흔적을 더듬는 수밖에. 어떤 좌표도 확실하게 특정하기 어려운 바닷가 모래사장을 걸어가다 대충 비슷한 곳에 주저앉을지라도. 마음이 여기라면 여기인 거다. 어차피 기억은 사진보다도 애매한걸. 지금 가진 가장 선명한 것인데도.

상체를 반대 방향으로 휙 돌린다. 사진을 눈앞으로 내밀어 풍경과 맞춘다. 휴대폰을 꺼낸다.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