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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3.09.15

Convenient Love

불면의이쑤신

미성년이 혼자 사는 건 깜짝 놀랄 일일뿐더러 자칫하면 학대가 될 수도 있다는 건 윤대협이 잘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 사회의 상식 중 하나였다. 왜 안 돼요?

어른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댔다. 위험하니까. 외로우니까. 집안일이 벅찰 테니까. 윤대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른이 되면 혼자 살아도 위험하지도, 외롭지도, 집안일이 벅차지도 않나요?

답하기 어려운 아이의 질문 앞에서 늘 그렇듯이 어른들은 비겁한 침묵을 택했다. 고요를 견디지 못하고 가장 먼저 둘러대는 말을 꺼낸 건 아마도 아버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취는 대학 가서 하거라. 윤대협은 그 생각은 못 했다는 듯이 눈썹을 올리면서 감탄했다. 오. 저는 재수하지 않으면 대학 가도 1학년 땐 미성년인데...

그건 그냥 당장 떠오른 사실을 입에 올린 것일 뿐, 딱히 반박도 반발도 아니었지만. 지칠 대로 지친 어른들에게는 효과적인 설득이 된 모양이었다. 원래 어른은 아이보다 쉽게 지친다. 아유, 그냥 그러라고 해. 어차피 당신도 나도 당장 쫓아갈 수가 없잖아! 먼저 백기를 들어 올린 건 아마도 어머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크흠. 그것도 방법이군. 가장의 권위를 귀엽게 지키면서도 아버지는 어느 때나 결코 어머니의 의견을 거스르지 않는다.

부모님은 이삿날에 유명호 감독을 대동하고 집주인을 만나서 윤대협은 아직 고등학생인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혼자 살게 되었지만 현지에서는 감독님이 보호자나 다름없으니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며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저희에게도 연락 주십사 하는 당부를 남겼다. 집주인은 윤대협을 한참 올려다보면서 당연히 다 큰 총각인 줄 알았다고 허허 웃었다. 윤대협도 같이 웃었다.

그렇게 윤대협은 자유를 손에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타지에 전학 갈 동기는 충분했다. 남들에겐 쉽게 주어지지 않는 십 대의 자유. 누구나 당연한 듯이 누리는 이십 대의 자유나 삼십 대의 자유와는 다를 것이다. 아마도.


미성년이 혼자 사는 건 생각보다 위험할 일은 없었고 외롭기보다는 홀가분했으며 가사도 대충 하면 할 만했다.

무엇보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손목시계의 바늘이 오늘의 두 번째 9시 45분을 지나고 있는 까만 밤. 윤대협은 방파제에 나와 앉아 칠흑 같은 바다를 마주 보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서부터 바다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겨냥한 듯이 반짝이는 고깃배의 환한 불빛 몇 개가 간신히 경계선에 점을 찍고 있었다. 지문 같이 촘촘한 물결이 그 점을 물수제비 뜨듯이 길게 늘여 반사해서 덩그러니 떠 있던 달빛과 섞어버렸다. 멈추지 않는 규칙적인 파도 소리만이 홀로 성실했다.

윤대협은 학교 갔다 온 뒤부터 계속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폼으로 걸어 놓은 낚싯대엔 손도 대지 않았다. 볕이 점점 진한 금빛으로 변하면서 하늘이 연보라색 분홍색 주황색 초록색 군청색으로 시시각각 바뀌더니 기어이 수평선 너머로 태양이 떨어지는 걸 봤고. 어둠이 바다 위에 빛깔이 반전된 눈처럼 내려앉아 모든 것을 까맣게 물들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별이 뜨고 달이 뜨고 고깃배 불빛이 뜨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만이 성실했다.

윤대협은 감정에 쉽게 휩쓸리는 편이 아니었다. 타지에서 자취를 시작하며 혼자 보내는 시간의 유용함을 알게 된 후로는 더욱 그랬다.

처음에는 고요함이 좋고. 아무런 자극이 없는 상태가 편안하고. 그게 다 지나갈 때까지 하염없이 멍때리고 있으면 슬슬 지루함이 바톤 터치. 심심함이 지나치다 싶을 땐 끝내 외면해 왔던 자신의 가장 밑바닥에 쌓인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허무함. 불쾌함. 억울함. 패배감. 윤대협은 그런 것을 어떤 타인에게도 부딪히지 않으려고 애썼기 때문에. 윤대협의 그런 것을 받아 줄 수 있는 상대는 결국 윤대협뿐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다행히 윤대협은 윤대협에게 꽤 괜찮은 리스너였다. 인내심 있게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끄집어낼 때까지 기다려 주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낱낱이 들어 주고. 시간이 걸릴지언정 다 받아들여 주고. 그럼 이제 괜찮은 거지? 한 번 확인한 다음엔 읏차 무릎을 짚고 일어설 수 있었다. 패배조차도 그럴 수 있었다.

오늘은 아니었다.

조금 진정됐다 싶을 때쯤 어김없이 까만 창공을 깜빡이며 가르는 빨간 비행기 불빛.

다시 마음이 술렁인다. 또 누군가가 태평양을 건너 이별하려나.

그러면 지금껏 자신이 바라보던 바다 너머에 어떤 대륙이 있는지 떠오르고 마는 것이다. 그곳에 닿기까지 물리적인 거리가 얼마나 먼지도. 저 수평선, 결코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별처럼 작아진 고깃배 불빛, 그것보다 더 멀리, 두 배, 세 배, 열 배, 백 배. 셀 수 없는 파도 너머에. 만 어쩌구 킬로미터 따위의 숫자로는 실감할 수 없는 아득함이 바다에 실려 피부로 와닿는 것이다.

또 실패다. 윤대협은 이마를 진득하게 문질렀다.

온통 까만 밤바다 풍경에서 흰 것은 눈에 띈다. 별빛, 달빛, 고깃배 불빛, 그리고 흩어지는 파도의 윤곽을 수놓는 고운 거품. 해변에 닿는 파도와 방파제에 치는 파도는 완전히 다르다. 부딪힐 벽이 높을수록 화려하게 부서진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보내 줄 수 없는 것이다. 나보다 높은 벽을 찾아 1만 킬로미터의 바다를 건널 연인을.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윤대협은 농구부 주장으로는 시야가 넓고 경기 전체의 흐름을 예측하는 플레이어였지만. 그 외의 인생에선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애초에 시합에서 시야가 넓어진 것도 2학년 들어와서 얘기다. 그 전엔 그냥 골대만 봤다. 그저 슛을 성공시키는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하나씩 다 다른 패턴으로 시도하는 게 재미있었다. 말 눈가리개를 씌운 듯한 시야였다. 경험이 쌓이고 그 바깥의 영역을 알게 되면서 훨씬 더 재미있어졌을 뿐이다. 보이는 만큼 즐길 수 있었다.

그래봤자 인생에선 아직도 열여덟 해 학교 다닌 경험밖에 모르는 평범한 아이였다. 자취를 하면서 배우게 된, 혼자 있는 시간을 자신답게 운영하는 요령이라든가, 자유에 압도되지 않는 방법 같은 건 또래보다 조금 더 능숙할지 몰라도. 다른 건 오히려 둔한 편이었다. 약속을 기억한다거나, 계획된 일정을 깔끔하게 지킨다거나, 자신의 행동이 남들의 감정에 끼칠 영향을 가늠한다거나.

앞일을 예측하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시도조차 한 적 없다. 지금 이 결정이 어디로 이어질까. 그런 생각은 안 했다. 그럴까? 그래 그래. 그러지 뭐. 이딴 식으로 충동에 몸을 맡겼다. 재밌어 보이는 길로 한참 걷다 보면 왜 이 방향을 골랐는지 기억이 안 났다. 그냥 즐거웠으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끝에 이런 장면이 있을 줄도 모르고.

서태웅을 좋아해 버렸다.

더 최악인 건 서태웅도 윤대협을 좋아한다는 거다.

생각해 보면 그 자식이 먼저 시작했다.

윤대협은 평소에는 타인의 감정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항상 친절하지만. 거기까지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일일이 따지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필요하면 얘길 하겠지. 그때 가서 위로할 일 있으면 하고. 사과할 일 있으면 하고. 이런 식이니까 전 주장 은퇴식에도 안 나타난 놈이 차기 주장으로 낙점된대도 아무런 악의가 없고 앗 그렇게 됐나요? 정도의 반응이라 남몰래 속 터지는 몇몇만 손해였다. 윤대협은 손해를 보는 법이 없었다.

윤대협이 타인의 감정을 예민하게 캐치하고 시의적절하게 배려하는 건 언제나 농구할 때뿐이었다. 공만 잡으면 동료들의 마음은 물론 상대의 기분도 빤히 보였다. 감정도 플레이의 일부인지라 집중해서 관찰하다 보니 자연스레 인지에 들어와 버렸다는 표현이 가장 정확하리라. 농구할 때만큼은 윤대협의 관찰과 판단은 언제나 옳았다.

뭘 믿고 그런 윤대협에게 그렇게 죽자고 농구하자며 덤벼댄 걸까. 서태웅은.

감출 마음이 없었고 오히려 알아채 주길 바랐다면 좋은 전략이었을지도 모른다.

서태웅이 쉴 틈 없이 들이댈수록, 시작해 버린 승부에 또 넋을 놓고 빠져들 때마다, 공을 사이에 두고 마주친 눈빛 속에 자신밖에 없다는 걸 윤대협은 점차 확신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감정도 플레이의 일부였다. 집중해서 관찰하다 보면 자연스레 인지에 들어와 버리는 것이다.

윤대협은 알 수 있었다. 전국대회를 먼저 경험하고 온 서태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대협 뒤에 누구의 그림자도 보고 있지 않았다. 농구가 우선이라면 그럴 이유가 없다. 자신의 실력에 취하거나 스스로의 성장에만 집착하고 있지도 않았다. 서태웅은 언제나 똑바로 윤대협을 보고 있었다. 윤대협만 보고 있었다.

가슴이 벅찼다. 윤대협은 왜 그와 승부를 시작했는지 결코 기억하지 못했지만. 왜 한번 시작한 승부를 쉽게 끝낼 수 없는지 알아버렸다. 머릿속에 '윤대협' 이외에 다른 감정이 남지 않은 서태웅을 마주하는 게. 참을 수 없이 좋았다. 해가 지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거기까지였다면 좋은 승부 후에 깔끔하게 뒤돌아설 수 있었을 텐데.

더 미치겠는 건 서태웅이 농구공을 내려놓은 순간부터 윤대협의 눈을 피한다는 점이었다.

윤대협은 기가 차서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뱃속이 술렁거리는 이 감정은 뭘까. 놀랍게도 배신감이 엄청났다. 방금 전까지 팔 빠져라 낚시대를 흔들면서 놀아줄 땐 신명 나게 벼룩처럼 뛰어놀더니, 딱 내려놓는 순간 고개를 싸악 돌리고 매몰차게 거리를 두는 얄미운 고양이 그 자체다. 좀 쓰다듬어 볼까 하면 한 발 더 물러난다. 약 올리는 것처럼.

어느 날 윤대협은 심술을 부려 보기로 했다. 퍼스널 스페이스치고는 미묘하게 널찍한 거리를 둔 채로 땀을 닦고 티셔츠를 갈아입는 서태웅을 불렀다.

"어이."

고양이는 부른다고 대답하지 않는다. 돌아봐 준 것만으로 다행이다. 윤대협은 시험하듯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좋은 시합을 끝낸 매너 있는 상대처럼 상냥하게 웃었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손을 가만 내려다봤다. 딱딱한 볼이 고민하듯 씰룩인다. 힐끗 눈을 들어 윤대협을 본다. 오랜만에 마주친 눈. 스파크가 튄 것처럼 얼른 다시 내리깐다. 하.

윤대협이 방심했을 때 성큼성큼 걸어 와 툭, 손바닥을 마주쳤다. 예전보다 훨씬 힘이 빠진 하이 파이브였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속도도 느릿했기 때문에.

윤대협은 순식간에 그 손을 낚아채서 꾹 잡았다. 서태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일단 눈이 마주치면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승부할 때처럼.

서태웅이 잡힌 손을 빼내려고 팔을 휘둘렀지만 윤대협은 놔주지 않았다. 어어, 하면서 배에 힘을 딱 주고 버텼다. 살짝 휘청일 정도로 붙들린 서태웅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금방 분한 표정을 한다. 그런 점이 귀엽다.

서태웅이 윤대협을 뿌리치려고 잡힌 손을 확 잡아당겼을 때, 윤대협은 일부러 다리에 힘을 풀고 그대로 딸려 갔다. 어이쿠.

서태웅은 갑자기 제 앞에 뛰어든 윤대협을 엉거주춤 끌어안듯이 받아냈다. 당황해서 다시 눈썹에 힘이 풀려 표정이 동그래졌다. 서태웅의 시야를 갑자기 독차지한 윤대협의 선 굵은 이목구비가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서태웅의 까만 눈동자에 비친 윤대협이 입을 열었다.

"내일도 할까?"

서태웅은 대답 없이 윤대협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이 거리에서는 피할 수 없다.

아주 서서히. 서태웅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코에서 나오는 숨소리도 씨근거린다. 놀려지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분해서 그러는지. 아니면...

서태웅이 매우 마지못한 태도로 고개를 세 번 끄덕이고 나서야 윤대협은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두 걸음 뒤로 빠르게 물러선 서태웅의 하얀 손날에 그새 빨간 자국이 올라와 있었다. 윤대협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너무 세게 잡았나?"

서태웅은 가만히 자기 손날을 내려다봤다. 사실 윤대협은 한 대 맞을 각오를 했다.

그러나 서태웅은 윤대협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반대 손을 들어서 윤대협의 손자국에 자기 손가락을 부드럽게 겹쳤다. 발간 자국이 다 가려지는 걸 묵묵히 쳐다보다가. 심지어 잠깐 눈을 감았다. 마치 거기 남은 윤대협의 온기를 붙잡은 것처럼.

그리고는 간다는 인사도 없이 돌아서서 자전거와 함께 바람 같이 사라졌다.

공원에 덩그러니 남은 윤대협의 심장만 박살 나고 말았다. 두근두근 발버둥 치는 심장 조각 사이에서 이번에는 윤대협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코에서 씨근거리는 날숨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그러니까 이건 다 서태웅이 먼저 시작한 거다. 서태웅이 먼저 윤대협을 좋아해 버렸다. 감출 생각도 요령도 없는 안타까울 정도의 순수함을 성실하게 부딪혀왔다.

더 최악인 건 윤대협도 서태웅을 좋아한다는 거다. 그런 장면을 보지 않았다면. 그런 마음을 느끼지 못했다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받은 만큼 주고 싶다는 욕심을 모를 수 있었을까.

누가 그럴 수 있을까? 윤대협은 아무리 돌이켜봐도 자신이 없었다.


윤대협은 서태웅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후에 제법 변했다. 고 나름대로 생각했다.

가장 큰 변화는 윤대협이 먼저 서태웅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여름 전국대회를 앞둔 주장으로서는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서태웅은 처음엔 좀 놀란 눈치였고 나중엔 좀 신난 것 같았다. 하지만 농구 말고 다른 걸 하자고 하면 급격히 차분해졌다. 싫은 티는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태웅이 오직 농구에만 눈에 불을 켜고 윤대협을 찾아오듯이 윤대협도 딱히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서태웅을 불러내는 건 아니었다. 밥 먹으러 갔다가 아이스크림 하나씩 물고 그냥 좀 걷기도 하고. 어떨 땐 바닷가로 가서 다짜고짜 달리기 시합을 하거나. 그냥 멍때리고 파도나 셀 때도 있었고. 낚시터에 데려가기도 했다. 물론 농구도 실컷 했다.

서태웅은 무엇 하나 거절하지 않았다. 더 이상 억지로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남들보다 빤히 쳐다보는 편이었다. 농구할 때처럼. 퍼스널 스페이스치고는 미묘하게 넓던 거리도 점차 좁아졌다.

벤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윤대협은 일부러 왼손으로 아이스크림을 잡았다. 그러면 오른손을 자연스럽게 벤치 위에 놓인 서태웅의 왼손 바로 옆에 둘 수 있었다.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서태웅은 의외로 곧바로 눈치챘다. 정직하게, 슬금슬금, 시선이 자석처럼 손끝이 모인 위치를 향하는 게 재미있었다. 윤대협은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남은 막대기로 혓바닥을 꾸욱 눌렀다.

서태웅은 닿을 듯 닿지 않은 두 손을 쳐다보다가. 슬슬 왼손을 제 허벅지로 회수해 갔다. 그 의외성을 참을 수 없었던 윤대협이 결국 손을 낚아챘다. 꾹 붙잡힌 하얀 손은 이제 윤대협의 허벅지 위에 있다. 서태웅은 윤대협한테 한 손을 붙들린 채로 다 녹아서 질질 흐르는 아이스크림을 끝까지 먹었다. 차가운 걸 실컷 먹었는데 뺨에는 분홍색 열기가 물들어 있었다.

윤대협은 좋아한다는 말이 튀어나올까 봐 얼른 서태웅의 입술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었다. 첫 키스는 소다 맛이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다. 세 번째부터는 습관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서태웅의 입술을 물고 있지 않을 때가 허전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윤대협은 이제 꽤 자주 서태웅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혹시 키스하고 싶어서 그런 거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대답이 궁색해졌을 것이다. 다행히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냥 농구에 미친 놈들끼리 잘 논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전히 농구에 미쳐 있기도 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라면 대충 땀을 닦고 티셔츠를 갈아입으려는 서태웅을 제지하고. 윤대협의 자취방에 데려가서 씻겼다는 것 정도. 직접.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 윤대협이 그런 종류의 자유를 상상한 건 아니었지만, 그런 일을 하기에도 자유로운 공간은 매우 유용했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곧은 눈빛과, 발개진 두 뺨과, 다시 흐르는 땀방울과 거칠어진 숨결, 그런 것을 자신만의 공간에 가져다 놓았다는 사실이 벅차도록 기뻤다.

서태웅은 전화로 부모님의 허락만 받으면 언제든지 자고 갔다. 서태웅의 부모님은 한 번도 그 선배란 놈 바꿔 보란 말 없이 아들을 믿었다. 약간의 죄책감이 더해지면 나쁜 짓은 더 달아오르기 마련이었다.

주말 아침에 느지막이 돌아가는 서태웅을 배웅하고 둘이었던 침대에 혼자 퍼질러 누울 때. 윤대협은 처음으로 자신의 침대가 엄청나게 크다고 생각했다. 서태웅이 좋아하는 자세를 따라 옆으로 돌아누워 태아처럼 웅크리면 붙잡히는 건 이불뿐이다. 온기가 남은 허공을 멍하니 더듬다가. 윤대협은 벌떡 일어나 옷가지를 꿰어 입고 뛰쳐 나가 저만치 간 서태웅의 손목을 붙잡고 다시 집에 끌어들였다. 그걸 몇 번이나 반복했다.

모든 충동이 허락되는 자유란 무서운 일이었다. 서태웅이 점점 더 좋아졌다.

더 최악인 건 윤대협의 모든 충동을 허락하는 서태웅이었다. 휘둘릴 성격도 아닌 주제에 흐르는 듯이 감겨 온다. 말 한마디 없이. 행동으로 마음을 보여준다. 언제나 곁에 있다. 벗어날 수가 없었다.


윤대협이 생각하는 미래는 짧았다. 일단 여름 전국대회. 그 다음은 추계대회. 그다음은 겨울 전국대회... 그런 식이었다. 가끔 중간고사라든가 기말고사가 끼어 있긴 하겠지만. 앞날을 내다보기엔 윤대협은 너무 젊었다. 미래는 수평선처럼 멀었다.

서태웅에게는 수평선도 멀지 않았던 것일까.

윤대협이 서태웅의 마음을 눈치채기 전부터, 그러니까 1학년 겨울에 서태웅은 이미 미국 원정을 다녀왔다. 그때는 그랬구나, 좋았겠다 이외에 아무 생각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실제로 좋은 경험이었고 덕분에 꽤 오래 걸렸지만 유학이 결정됐다는 걸 들었을 때는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최악이었다. 윤대협은 갑자기 팔을 잘라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서태웅은 이미 자신의 일부였다. 현재의 일부였다. 모르는 미래 때문에 서태웅을 빼앗길 위기였다.

서태웅은 제법 먼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갈 준비가 된 사람처럼 굴면서도 현재의 윤대협을 어떻게 그 미래로 데려갈 것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미국에 가는 게..."

그런 말로 윤대협의 마음을 산산조각 냈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좋아했던 얼굴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윤대협이 눈을 피했다. 도저히 계속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파란 바다를 마주해도 까만 바다를 마주해도 결국 그 하얀 얼굴만 떠오르는 것이다.

윤대협은 아주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보며 별생각을 다 했다.

서태웅한테는 지금까지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좋아해, 사랑해, 사귀자, 그런 말을 한 번도 안 한 게 문제였을까. 하지만 서태웅도 그런 말은 한마디도 안 했는데. 오히려 그걸 불안하게 여겼어야 했나. 표정이라든가 행동 같은 것에서 확신을 얻은 것이 나빴나. 그러나 지나가면 잊힐 음성 몇 어절보다는 그편이 훨씬 더 감정의 실체에 가깝지 않았나.

돌이켜 보면 서태웅은 얼마나 편했을까. 그냥 먼저 좋아한 것뿐이지 아무것도 안 하고. 말려든 윤대협만 신나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물론 좋아서 그런 건데. 그게 안 좋았던 걸까. 어느 순간부터는 서태웅은 그저 윤대협에게 장단만 맞췄나. 윤대협이 혼자서 달려갔던 거라면 지나치게 비참한데.

아니지. 아직 그렇게까지 생각할 근거는 없다. 윤대협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식으로 서태웅을 무작정 나쁜 놈 만든다고 마음이 편해질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윤대협이 너무 쉽게 실망한 것일까. 아무리 많이 컸다지만 서태웅도 아직 어린데. 윤대협이 먼저 연상답게 이런저런 방안을 내놓아야 했을까.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도 계속 마음을 주고받을 방법을.

문제는 윤대협도 그런 방법을 모른다는 점이다. 서태웅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단 미국에 간다는 결정만을 통보했을 때 몰려온 거대한 실망은 어쩌면 그런 약점을 찔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윤대협은 답을 모른다. 윤대협은 할 수 없다. 서태웅에게 기대한 것이다. 자신보다 어린 서태웅에게. 말도 없고 서툴고 성격도 불같은 서태웅에게.

윤대협을 혼자 두고 미래로 달려 나가기로 한 서태웅에게.

어쩌면 그걸 인정하기조차 싫었을지도.

너무 빠르다. 서태웅은 항상 너무 빠르다. 마음을 키우는 것도 부딪히는 것도 행동으로 연결 짓는 것도. 윤대협조차 따라잡기 힘든 돌파력만큼이나 빠르다. 어디 가서 느리단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윤대협이 자꾸만 서태웅의 등을 보게 된다.

농구에서는 절대적인 스피드로 모든 것이 결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빠른 상대라도 붙잡을 수 있는 순간이, 따돌릴 수 있는 순간이 온다. 바로 상대가 멈출 때다. 슛을 위해서든 방향 전환을 위해서든 패스를 위해서든. 눈 깜빡할 사이만큼만 멈칫해도 윤대협은 바로 따라잡을 수 있고 심지어 앞지르기도 한다.

서태웅은 그 잠깐을 멈춰 주질 않는다. 윤대협에게 시간을 준다면. 그깟 미래 따위 어떻게든 따라잡거나 잘하면 앞지를 수도 있는데. 나도 농구 잘하고. 서태웅보다 1년이나 더 했고. 같이 가는 방법도 없지는 않았을 텐데. 미리 말해줬더라면. 너무 늦기 전까지. 아니면 조금만 망설였다면. 뭔가 상의해 줬다면.

가정법의 문장이 길어질수록 비참함만 늘어난다. 존재하는 진실은 하나. 윤대협은 서태웅에게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멈출 정도의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혼자 돌파해도 충분히 행복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윤대협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눈 앞머리에서 콧망울까지 힘없이 흐르는 액체 때문에. 눈물이었다. 세상에. 더더욱 심란해졌다. 그제서야 상처를 받았음을 알게 됐다. 손끝으로 피곤과 함께 꾸욱 눌러 닦아냈다.

어차피 윤대협은 가지 말라는 말 같은 건 끝내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빛처럼 곧게 달려가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기라도 했다면. 그저 한 번만 돌아봐 줬으면 좋았을 거라는 원망을 소화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뿐이다. 나름 힘껏 사랑했던 마음만으론 부족했다는 패배감이 속상할 뿐이다.

결국 좋아하니까 괴롭다는 게 최악이었다. 그만 좋아하고 싶어졌다. 그러라고 떠나는 거라면 더욱 최악이지만.

눈물까지 쏙 빼고 나니 집에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윤대협은 다리를 펴고 일어나다가 다시 잠깐 주저앉았다. 저릿저릿해서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참 그 감각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끄응 허리를 세운다. 태평양에 뻐큐라도 날려 볼까 생각도 했지만 참기로 한다. 허무하고 모양만 빠진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 짐을 챙겨 까만 밤바다를 뒤로했다.

한 번 울고 멍해진 머릿속은 집에 가는 길 내내 놀랍도록 텅 비어 있었다. 한나절이 넘도록 해를 보내며 앉아있던 보람이 이제서야 오는지. 아니면 그놈의 비행기가 안 보여서 그런지. 윤대협은 하품을 쩌억 하면서 아까랑은 다른 눈물을 눈꼬리에 달고 집까지 터벅터벅 걸었다.

집 앞에 누가 있었다.

그림자를 본 순간부터 가슴이 뛰었다. 기대감으로.

윤대협의 기대감은 보답을 받았다. 서태웅으로.

센서 등이 노랗게 물들인 하얀 얼굴은 잠들어 있었다.

또 눈물이 날 것 같다. 윤대협은 침대에서 이 잠든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미국으로 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얼굴이다. 집에 계속 놔두고 싶었다. 이 자취방이 아니라도. 대학에 가도. 졸업을 해도. 취직을 해도. 농구선수가 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어떤 미래에도 윤대협은 집에 이 얼굴을 놔두고 싶다고. 이제서야 그런 욕망을 강하게 자각했다. 서태웅이 있는 미래를.

윤대협은 자고 있는 서태웅 앞에 쪼그려 앉았다. 조심스럽게 두 뺨을 감싼다. 차가웠다.

서태웅의 속눈썹이 팔락거린다. 밤하늘보다 까만 눈동자가 보인다. 꾹 찡그렸다가 하품을 한다. 자신의 뺨을 붙든 윤대협의 손을 넘어서 눈을 부빈다.

"늦었네..."

그런 말을 웅얼거린다. 윤대협은 웃어버렸다. 하루 종일 시끄럽고 심각했던 마음들을 바다에 다 버리고 온 사람처럼.

"차가워. 언제부터 있었어?"

"학교 끝나고..."

윤대협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바다를 마주했던 그 긴 시간 동안 서태웅은 차가운 복도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그래도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찾으러 왔어야지."

서태웅이 웅얼거린다.

"엇갈릴까 봐..."

윤대협은 더 이상 퉁명스러울 수 없었다. 혹시라도 엇갈릴까 봐 아무 데도 못 가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는 서태웅. 나도 이렇게 기다릴 수 있을까. 혹시라도 엇갈릴까 봐 어디 가지 않고서.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몇 년이고. 미국에서 돌아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서태웅을..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윤대협은 얼른 눈썹을 찌푸렸다. 무리다. 나는 못 해. 윤대협은 또 패배감이 들었다. 서태웅은 자꾸 윤대협한테 패배감을 가르친다. 농구 말고 다른 걸로.

찌푸린 윤대협의 굵은 눈썹 머리를 빤히 쳐다보던 서태웅이 말했다.

"내가 미국에 가면."

윤대협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가.

"나랑 헤어질 거야?"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풀렸다.

윤대협은 빠르게 서태웅이 하고픈 말을 간파해 냈다. 너는... 헤어진다는 가능성을 생각도 못 했던 거구나. 이전에 상처 준 말 뒤에 숨겨진 진짜 의미까지도 벼락처럼 깨닫는다. 상관없다는 건 그런 뜻이었나. 미국에 가는 게 무슨 상관이냐고...

쪼그려 앉은 윤대협을 바닥에 주저앉은 서태웅이 올려다본다. 초연한 것 같은 무표정이지만 윤대협은 알고 있다. 서태웅의 머릿속에 윤대협밖에 없다는 것을. 지금 서태웅은 윤대협의 뒤에 그 누구의 그림자도 보고 있지 않다. 자기 자신의 성장을 기준으로 방해냐 아니냐 따진 적도 없었다. 미국도 농구도 미래도 아니고. 오직 윤대협.

역시 마지막엔 내가 이기는 게 재밌는 거지...

윤대협은 서태웅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에 달라붙는 보드라운 머리칼. 이걸 저 멀리로 오랫동안 떠나보낸다고 생각하면 다시 마음이 술렁이기도 하지만.

"글쎄."

최대한 여유를 부려 본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선공을 준다고 이길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태웅이는 어떻게 생각해?"

서태웅은 윤대협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부디 원망하는 얼굴이기를 윤대협은 바랐다.

서태웅이 갑자기 두 팔을 뻗는다. 윤대협의 목을 붙들고 끌어당긴다. 윤대협은 순순히 끌려갔다. 서태웅의 귀 옆에 복도 벽을 짚고 간신히 몸을 지탱한다. 귓속에 대고 서태웅의 목소리와 숨결이 곧바로 꽂힌다.

"헤어지기 싫어..."

놀랍게도 떨리고 있었다.

"헤어지지 마..."

졸음기가 남아서만은 절대로 아니었다.

윤대협은 기꺼이 중심을 포기하고 서태웅을 마주 끌어안았다. 차가워진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숨을 들이켠다. 버저비터의 짜릿함. 이걸 기억하는 한 우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태평양을 이길 방법은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된다. 무적의 에이스 콤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