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암의 꽃 3
불면의이쑤신
서태웅은 윤대협의 나무위키 문서를 가장 처음 작성한 사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내용을 채운 사람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나치게 기초적인 팩트만 채워두어서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데뷔와 거의 겹치는 입덕일에 일단 문서부터 냅다 만들어 놓고 기초 프로필을 채운 후 활동을 따라다니면서 하나하나 추가하기 시작했는데, 서태웅은 글솜씨가 괴멸적이라서 몇 년 몇 월 며칠 무슨 무슨 방송 출연. 이따위 정보만 하염없이 늘어나고 입덕이나 앓이에 도움이 될 만한 맥락 있는 스토리텔링은 하나도 없었다. 그건 다른 오타쿠들이 알아서 추가해 줬다. 서태웅은 읽으면서 감탄이나 했다. 이렇게 쓰니까 멋지군...
사람은 각자 자신 있는 포지션을 조져야 하는 법. 그의 장기는 데이터 크롤링과 소스 링크였기 때문에,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지 싶은 사소한 TMI 정보나 따서 각주에 관련 기사며 영상 오백 개 링크해 가면서 잔뜩 채웠다. 비하인드, 인터뷰, 자컨 등등에서 지나가며 한 말에서 나온 정보까지 싹. 어차피 움짤 찌면서 세 자릿수는 기본으로 복습하는 클립이라 어려울 것도 없었다.
서태웅은 윤대협 문서에 변경내역이 뜨면 알림이 오는 매우 단순한 자동화 프로그램을 하나 코딩해서 덕질용 브라우저에 확장팩으로 상시 가동시켜두었다. 혹시라도 소스가 부족한 날조나 어그로가 뜨면 바로 수정하려고.
아육대 녹화 3일 뒤에 윤대협 나무위키 문서 변경내역봇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아육대 관련 내용은 방영 후에야 업데이트될 텐데 why...
추가된 건 딱 한 문장. 그리고 각주 하나.
남신팬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남팬이 있다.
[71] 20xx년 7월 11일 트위터 대한민국 실시간 트렌드에 '윤댑 남신팬'이 오른 적이 있다.
서태웅은 모니터 앞에서 얼음이 되었다.
그날 윤대협움짤봇 계정에는 업데이트가 없었다. 서태웅이 충격을 소화하지 못하고 그대로 컴퓨터를 껐기 때문에...
다음 날. 언제나처럼 5시 30분 기상. 서태웅은 낮엔 꾸벅꾸벅 조는 편이지만 아침엔 의외로 강하다. 6시에 직장 바로 앞 헬스장에서 유산소 30분 웨이트 30분 하고 샤워하고 7시 출근.
서태웅은 1금융권 은행 본사 개발조직에서 일한다. 군 생활하면서 서태웅을 예쁘게 본 선임이 특성화고 전형이 따로 있으니까 전역하면 한번 넣어보라고 추천해 줬고 그대로 붙었다. 경직되고 보수적이고 군대 같은 금융권 문화. 말수 적고 까라면 까고 의문 사항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 서태웅에겐 나쁘지 않았다. 개발자로서 실력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라 할 순 없지만 야망 없는 서태웅은 만족하며 다녔다.
최고의 장점은 빠른 퇴근. 정시 퇴근. 팬데믹 전후로 유행한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뒤로는 7시 출근 4시 퇴근까지 가능해졌다. 반차라도 내면 12시 퇴근. 덕질하긴 개꿀이다. 서태웅이 거의 모든 토요일 지방 스케 밤샘 대기줄 1빠를 차지하는 비결이 여기 있었다. 금요일 퇴근하고 출발하는 시간이 넘사벽이라서...
오늘도 계속되는 노잼 업무 속에서 마음이 차분해진 서태웅은 나무위키 사건(?)에 대해서도 이성을 되찾았다. 이미 윤대협에게 남팬이 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그건 서태웅이 통제할 수 없는 정보다. 서태웅의 존재가 기재되었을 뿐 신상이 털린 건 아니다. 남신팬이라는 별명도 이미 공공연했다. 그렇다면 나무위키에 실린다 한들 달라지는 게 없을지도... 아니 그렇지만 윤대협을 검색하면 맨 위에 바로 뜨는 페이지에 쓰여 있는 건 좀... 애초에 이건 윤대협에 대한 정보가 아닌데 why...
서태웅은 고민 끝에 퇴근길에 덕질용 갤탭을 꺼내서 나무위키 문서 수정 요청을 보냈다. 해당 문장을 아예 삭제했다.
다음 날 같은 내용이 또 올라와 있었다.
문서 수정 전쟁인가.
서태웅은 급격한 피곤함을 느꼈다. 이럴 시간이 없었다. 윤대협 인스타 라이브 움짤 올릴 게 아직도 남았는데. 최후의 수단은 자신이 언급된 남팬임을 알리고 정보 게재를 원치 않으니 해당 내용 삭제를 수정할 수 없게 해 달라고 나무위키 운영진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서태웅은 포기했다. '윤댑 남신팬'이라고 언급된 게 자신임을 누군가에게 밝히느니 그냥 이대로 모른 척하는 게 나았다. 그 문장을 이메일에 토독토독 치는 걸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래 뭐 별일 있겠어. 이 한 문장 가지고.
몇 달 뒤 서태웅은 이 선택을 영원히 후회하게 된다...
윤대협 그룹 공식 유튜브에 자컨으로 나무위키 읽기가 올라왔을 때...
윤대협은 낭랑한 목소리로 서태웅이 지워버리려 애쓰다가 포기했던 그 문장을 읽었다.
"남신팬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남팬이 있다. 앗 이분 나무위키에까지. 하하 반가워요~"
나무위키 읽기 자컨은 멤버를 두 명, 세 명으로 끊어서 서로 리액션을 해 주면서 진행됐다. 윤대협과 페어가 된 멤버가 물었다.
"보통 팬이 이런... 나무위키에 나오나? 나는 없는데."
"남신팬이라서 그래. 나보다 잘생겼어."
"헐. 대박."
"앗 근데 우리가 너무 팬분 얘기를 하면 좀 그러니까."
"아무튼 윤대협. 팬까지 잘생김. 진짜 다 가졌죠? 완전 짜증 나죠? 다음!!!"
미친 소속사. 이걸 편집을 안 해? 제정신 아니군. 서태웅은 입덕하고 처음으로 소속사에 한이라는 것을 품게 되었다. 윤대협한테 어떤 헤메를 시켜도 중소 티가 풀풀 나는 의상을 입혀도 어차피 완성은 윤대협이 한다! 라서 그다지 불만을 가져 본 적 없는 서태웅. 다른 아이돌 덕질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소속사의 뭐가 부족하고 뭐가 아쉬운지도 모르고 그냥 오로지 윤대협만 보러 다닌 시야 좁은 미친 순덕 서태웅.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소속사에 항의 메일을 보내고 싶었다... 안 보이는 첨부파일에 바이러스도 좀 실어서...
윤댑 남신팬은 한 번 더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떴고 윤대협 나무위키에는 각주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72] '나무위키 읽기' 자컨에서 이 부분이 언급되면서 한 번 더 실트에 갔다.
그러나 서태웅은 강해졌다. 이번엔 콧방귀 한 번 흥 뀌고 극복했다. 그래 맘대로 해라. 어차피 내 이름 나이 사는 곳 직장 전화번호 이메일 트위터 인스타 아무도 모르니까. 온라인에서 뭐라고 떠들든 상관없었다. 오프라인에 존재하는 자연인 서태웅과 실시간 트렌드의 윤댑 남신팬을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아육대와 인스타 라이브 이후로 윤대협 팬덤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새로 유입된 남팬이 은근히 늘어난 것이다. 사녹에 슬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여름 페스티벌과 지방 축제에도 띄엄띄엄 나타났다.
고인물 오픈채팅방은 또다시 살벌해졌다...
보송이 때문에 팬덤 물 다 흐렸다
보송이 때문은 아니지 눈치없는 관종한남들이 좌표 찍은 거지
미친 자지 색기들이 지들도 윤댑 파기만 하면 남신취급 해줄 줄 아나 거울도 없냐? 손 안 씻어서 거울이 뭔지도 모르는듯 눈앞에 보송이가 있는데 어딜 비벼 진짜 여기 아직 보송이 와꾸조차 시야방해하면 개같이 까는 동네야
근데 걔네 친목 좆망한거 아시죠 오프 트면 다음날 바로 비계에서 블락좌표 돌잖아요 남신팬 대접 받고 싶어서 기웃거린 거 존나 티나서... 오히려 역대급 남팬 박해 팬덤이 됨
남신팬 대접이 가당키나 하겠냐고 우린 일반인 보는 눈조차 보송이에 익숙해졌는데 1급수 벗어나면 뒤지는 쉬리가 되어버렸다고
원년빠돌이 보송이조차 걸리셔스 통과한지 얼마 안됐는데 진심 눈치 재기한 듯
팬들에게 따가운 눈총과 블락 좌표를 처먹은 뉴비 한국 남자 팬들은 삽시간에 겉돌게 되었다. 그들은 눈치껏 자기들끼리 모이거나... 은근히 서태웅 근처를 기웃거렸다. 후빨과 아부를 통해 유명한 형님 곁에 붙어서 네임드가 되어 보려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제보다 젯밥에 관심을 갖고 온 삿된 뉴비들이 서태웅의 등장 시간을 따라올 수 있을 리가. 바로 뒤에 서야 말이라도 걸어 볼 텐데 그 자리는 오늘도 1빠를 뺏겨서 부들거리는 고인물들 차지였다.
결국 뉴비 한국 남자 팬들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기회는 남자 화장실뿐이었다. 하지만 서태웅이 그런 데서 친목을 할 캐릭터인가. 친목하라고 만들어 둔 SNS에서조차 아무런 소통이 없는데. 어설프게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하려던 시도는 모두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대인 커뮤니케이션에 훈련이 덜 되어 있는 서태웅은 안 그래도 사람 눈을 잘 안 쳐다보거나 너무 빤히 쳐다보거나 둘 중 하나다. 길 가던 모르는 사람이 자신에게 눈을 맞추려고 시도한다 따위의 고난도 사회적 시츄에이션은 인지 단계에서 실패였다.
그 외에도 줄 선 동안 물을 사 준다든지 담배 피시냐고 물어본다든지 많은 시도가 있었으나. 서태웅은 단답을 남기고 폰에 눈을 박거나 다시 잠들었다. 괜찮습니다. 물 있습니다. 안 피웁니다. 끝.
바로 뒤에 줄 서 있던 고인물들은 뉴비 한국 남자 팬들의 개수작을 칼날 같은 눈빛으로 째려보며 오픈채팅방에 두두두두 상황을 공유했다. 서태웅의 쌀쌀맞은 리액션은 낭보가 되어 동지들에게 전해졌다.
서태웅은 딱히 같팬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그저 새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보다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클 뿐. 특히 이 시기의 서태웅은 최근 사건 때문에 은은한 남혐이 돋아 있어서 낯선 남성을 더더욱 경계했다. 존잘남 옆에서 사이드킥으로라도 관심을 나눠 먹으려던 뉴비 한국 남자 팬들에겐 나쁜 타이밍이었다.
결국 그들은 서태웅의 차디찬 반응을 여초팬덤에서 지 혼자만 청일점으로 잘 나가려는 견제질이라고 멋대로 받아들인 뒤 트위터에서 윤댑 남신팬 직접 봤더니 싸가지 없더라는 자적자를 공계로 시전했다가 7.11K 싸불을 당하고 계폭 엔딩을 맞았다...
이 과정에서 뉴비 한국 남자 팬들을 두들겨 팼던 주요 논리 중 하나가 같은 팬의 신상정보를 트위터에 올리는 건 선 넘었다는 지적이었다. 이후 윤댑 남신팬이 공계에서 언급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서태웅은 마음속으로 자적자 뉴비들에게 감사했다. 나이스 어시스트.
남팬 증가와 자적자 사건(?)을 지켜보며 고인물들은 어떤 선택을 하기로 했다.
이대로 보송이를 야생에 풀어 놓으면 안 될 것 같다.
윤대협은 부동의 1군 아이돌이고 그중에서도 인기다. 오프 뛰는 뉴비들은 언제고 늘어난다. 그중에는 쎄하거나 꺼림칙한 무리도 분명히 있다. 이상한 놈들이 도태 한국 남자 팬들처럼 보송이를 먹이로 삼는다면... 끔찍한 미래밖에 보이지 않았다. 보송이는 눈에 너무 띈다. 윤대협도 보송이를 알고 있다. 이걸 이용하려는 무리가 생기면 팬덤 시궁창 급행열차다.
단속을 해야 한다.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 했다. 데뷔 때부터 윤대협 원픽이었던 진성 고인물 8인 중에서는 한 사람이 적당했다.
그의 닉네임을 불면이라고 하자... 지어내기 귀찮으니까...
불면은 윤대협의 네임드 찍덕이다. 네임드 정도가 아니고 탑시드. 가장 오래 활동했고 안 가는 데가 없으며 실력도 출중하다. 당연한 일이다. 프로였으니까. 비열하게 밥벌이 가능한 재주로 아마추어 생태계를 교란하는 중이었다.
불면은 오랜 돌덕후였고 어느 판에서나 적당히 네임드 찍덕이었으나 윤대협 정도로 코어팬질을 한 건 처음이었다. 그는 보송이가 에브리행사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라고 무서워했으나 잘 생각해 보면 그걸 다 안다는 사실은 그 자리에 불면도 있었다는 뜻이니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형국이었다. 물론 불면이 똥 묻은 개인 이유는 팬싸도 가기 때문이다.
불면이 머리 풀고 윤대협 덕질을 달릴 수 있는 환경적인 조건은 세 가지였다. 첫째. 유부녀고 딩크족이었다. 어떻게든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하는 독립생활자에 비해 안정적인 생활 조건이었다. 아이를 먹여 살려야 하는 입장과는 물론 비교도 할 수 없다.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여유로웠다. 둘째. 프리랜서였다. 직장인에 비하면 워킹 데이 조절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물론 언제 보릿고개가 올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과로하는 시기도 종종 왔지만. 배우자의 존재 덕분에 그런 불안도 덜했다. 셋째. 배우자가 보살이었다. 그냥 덕질을 존중하는 정도가 아니고 내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 윤대협에게 감사하는 수준이었다. 예비 배터리와 메모리를 두고 가서 울상 짓는 불면을 위해 집에서 배 긁다 말고 차 끌고 나와서 셔틀을 했다. 웃는 얼굴로. 생일 선물로 해외 투어 비행기표를 사 주고 정해진 저축 목표와 생활비를 분담하는 한 불면이 번 돈을 어떻게 쓰든 전혀 무관심했다. 불면과 어울리는 덕친들은 늘 생각했다. 이 정도면 한국 남자와 결혼이라는 것도 할 수 있구나.
아무튼 불면은 팬덤에서의 비공식적인 권위(?)로 보나 이미 현생에 최애가 따로 있어 사심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점으로 보나 보송이에게 접근하기에 가장 적합하고 뒤탈이 없을 인물이었다.
마침 접근할 기회도 있었다.
윤대협 그룹의 데뷔 기념일. 전후로 많은 행사가 열리는 시점에 불면은 지금까지 찍은 사진을 모아 작은 전시회를 열었다.
당연히 보송이도 왔다.
180은 분명히 넘을 훌쩍한 남성이 뿔테 안경과 마스크를 쓴 채로 갤러리에 들어서자 장내가 1초 정도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불면은 생각했다. 오늘도 보송 헤어는 보송보송하군...
사람이 거의 없는 요일과 시간대였다. 불면은 보름간의 전시 내내 상주하며 외주 일과 윤대협 보정을 쳐내고 있었고 8인의 덕친 멤버들은 가능한 시간에 한 번씩 들러서 옆자리 상대를 해줬다. 불면은 이 기간에 걸린 행사는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덕친들이 데이터를 나눠줬다. 8인 멤버 중 불면을 포함한 4명은 찍덕이고 2명은 직캠러고 2명은 알페스 글러였다.
마침내 타겟이 등장했다. 불면과 덕친들은 이미 짜 둔 시나리오가 있었고 실행에 옮겼다.
거진 세 시간을 들여서 사진 하나하나를 잡아먹을 듯이 구경하던 보송이가 드디어 마지막 사진에서 눈을 뗐을 때. 평소 스케줄 끝나면 집에 가는 스피드로 쌩하니 사라질까 봐 걱정하던 불면이 재빠르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보송이가 눈깔에 물음표를 두 개씩 달고 쳐다본다.
"저요?"
너 말고 누가 있니.
불면은 손에 든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보송이에게 내밀었다.
"아까 사진을 집중해서 보시는 게 너무 인상적이라... 제가 허락도 없이 한 장 찍었어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원치 않으시면 지금 이 자리에서 삭제할게요. 혹시 괜찮으시면 살짝 보정해서 보내드리고 싶은데 트위터 계정 있으신가요?"
보송이가 허리를 한참 숙여서 뷰파인더를 들여다본다. 눈이 조금 커졌다. 내가 사진은 좀 찍지.
전시회장에서 가장 큰 액자 앞에 서 있는 보송이의 옆모습. 거의 등신대 사이즈로 뽑힌 윤대협의 전신사진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보송이도 그날 있었다. 심지어 펜스였다. 잘 보면 사진 구석에 핀 날아가서 흐릿한 검은색이 보이는데 그게 아무리 해도 지울 수 없었던 보송이 대가리의 보송보송한 흔적이다. 시발.
어쨌든 보송이는 마치 시간을 되돌려서 콘서트장으로 돌아간 사람처럼 넋을 놓고 있었다. 항상 쓰고 있던 안경까지 가지런히 다리를 접어 체크 셔츠 주머니에 꽂은 채로. 반짝이는 눈동자에 푸른빛의 액자가 살짝 비쳤다. 힘이 살짝 빠진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집중력. 마스크에 가려져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좋은 사진이었다.
불면은 자신이 있었다. 이 미끼로 보송이를 낚을 자신.
미끼를 마주한 서태웅은 인생 최대의 고민에 빠졌다.
존잘님이 나와 윤대협(의 사진)을 찍어주셨다...
서태웅은 불면을 알았다. 당연하다. 윤대협을 파는 이상 모를 수가 없다. 겹치는 행사와 사진 각도를 보면 얼굴도 금방 익힌다. 팬에게 개인정보를 넘겨야 하는 그 어떤 비공식 굿즈도 구매하지 않는 서태웅이 유일하게 구매한 게 불면의 화보와 시즌 그리팅이다.
사실 불면이 50부를 찍을까 말까 했던 데뷔 1년차 시그 구매 명단을 잘 봤다면 서태웅을 특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좀 남자 같은 이름의 여성일 수도 있으니 확신할 방법 같은 건 없어도. 그러나 당시 불면은 입금 확인하고 배송 준비하며 덕질 계속하기 빡세고 정신없어서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어쨌든 불면은 서태웅의 이름 석 자와 연락처와 주소를 가진 유일한 윤대협 같팬이다. 그게 보송이인 줄 몰라서 그렇지.
서태웅은 결심했다. 새 계정을 만들자. 존잘님께 사진 받을 용도의 계정.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알계를 팠다. 아이디를 뭐라고 하지. 임기응변에 강하지 않은 서태웅의 멍뎅한 시야에 오늘 제가 신고 온 운동화가 보였다.
불면은 미끼를 문 보송이의 알계를 확인했다.
@yoon.jordan101
사담계로 디엠을 하나 보냈다.
"그럼 여기로 보내 드릴게요. 다짜고짜 사진 찍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잘 보고 있어요. 전시회도 열어주셔서 감사해요."
"다 같은 덕후 좋자고 하는 일인데요 뭐. 공방 때 뵈면 종종 인사해요."
보송이는 어설프게 허리를 푹 숙여 인사하더니 전시회장의 비공식 포카 나눔을 야무지게 챙겨서 떠났다.
불면은 멀리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덕친에게 당당하게 브이를 내밀었다. 오픈카톡방 중계는 이미 덕친이 전부 끝낸 뒤였다.
집에 가는 버스에서 서태웅은 문득 생각했다.
그냥 이메일 주소 알려드릴걸...
존잘의 카리스마에 홀려서 시키는 대로 해 버렸다. 뭐 상관없나. 그 계정은 존잘님과의 디엠 이외엔 아무것도 안 하면 되지. 계실만 안 하면 된다. 계정 네 개를 굴리며 한 번도 계실을 한 적 없는 서태웅은 자신만만했다.
그날 존잘님이 보내 준 사진은 두 장이었다. 윤대협의 사진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뒷모습이 나온 사진. 투 샷처럼 보여서 감격적이었다. 윤대협의 사진을 바라보는 자신의 옆모습이 나온 사진. 윤대협이 전혀 안 보이기 때문에 일코용으로 최고였다. 서태웅은 회사 컴퓨터 바탕화면을 교체했다.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서태웅은 존잘님에게 뭐라도 보답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빠졌다. 용기를 내서 디엠을 보냈다.
불면님
네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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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사진 정말 감사합니다 보답이라기엔 그렇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소장하던 영상을 보내드리고 싶어요 이런 내용이에요 메일 주소를 하나만 보내 주시면 고맙겠어요
헉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이런 미공개영상을 헉 으어 제가 맘대로 찍은 건데;;;
아닙니다 제가 감사해서요
nosleepkeepgoing@naver.com 이메일은 여기고요! 혹시;; 좋은 마음으로 보여주시는 건데 좀 뻔뻔하지만 ㅠㅠ 괜찮으시면 이거 전시회장에서 틀어도 될까요...? 정말 너무 예뻐가지고 ㅠㅠ 원치 않으시면 당연히 절대로 개인소장만 하겠습니다!
너무 흔들리고 폰카라서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일단 최고화질로 보내겠습니다 제공자를 밝히지 않으시면 어떻게 사용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보통은 출처를 밝혀야 사용 가능인데 ㅎㅎ;; ^^
네 저는 안 밝혀주시면 고맙겠어요
그건 서태웅이 펜스 잡고 앵콜 찍던 날 윤대협이 핸드폰 스틸해서 찍은 셀프 영상이었다.
서태웅은 사실 죽어도 쌩눈으로 보는 파라서 폰을 턱 근처에 대강 들어 올리고 윤대협 얼굴이 다 잘리는지 어떤지조차 확인도 안 한 채 아무렇게나 흔들리고 있었는데 무대 위의 윤대협이 기다란 팔을 뻗어 쑉 뺏어가더니 야무지게 레전드를 찍어 왔다. 당연히 이걸 까면 그 계정은 서태웅이라는 것이 투어 현장의 모든 팬에게 알려지는 셈이므로 어디에서도 공개한 적이 없다.
그러나 존잘님이 공개하면 아무 문제 없다. 모두가 제공자를 알더라도 제공자의 계정은 모른다. 서태웅은 머리 굴려 생각해 낸 보은이 만족스러웠다.
갑자기 레전드 미공개 영상이 추가된 불면의 전시회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날부터 서태웅은 인생 최초로 덕친 비슷한 게 생기고 말았다.
공방 줄 설 때 존잘님이 다가와서 인사를 한다. 보통은 모르는 사람의 인사는 나한테 하는 게 아니려니 싶어서 무시하는데, 이제 존잘님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씹을 수가 없다. 이전에도 콘서트장이나 행사장에서 주변 사람들이 뭔가 나눠주면 감사히 받기는 했으나.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는 처음이었다. 인사 외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존잘님과 함께 다니는 분들과도 자연스레 얼굴과 인사를 트게 됐다. 인사 외엔 아무것도 안 했지만. 사람이니까 조금씩은 호의를 주고받게 됐다. 서로 물을 챙기거나 짐과 자리를 맡아주거나. 보조배터리를 빌려주거나 지금 몇 시냐고 물어보거나.
오프라인에선 다소 서먹한 교류였지만 온라인에선 제법 훈훈했다. 덕질 내내 사진을 앓던 존잘님과의 소통 창구가 생긴 서태웅은 가끔 오늘 사진 중에 이건 정말 최고라며 디엠 창에 간결하게 (그렇게 안 보이지만 수줍은) 감상을 남겼고 불면은 보답으로 해당 사진의 폰 배경 화면용으로 편집된 버전이나 고화질을 줬다.
그러면 서태웅은 얼굴이나 디엠으로 티 내지는 않아도 마음속으로는 그 친절에 대단히 감읍하며 잘 기억해 뒀다가 콘서트나 시상식 티팅을 찢은 날에 좀 덜 좋은 자리가 몇 개 남으면 불면에게 넘겼다. 클릭이 미끄러져서 두 개 잡거나 쿨에 줍거나 한 것들이었다.
불면과 덕친들은 이 시점에서 보송이가 신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신이 내린 소중한 티켓은 공정한 사다리 타기를 통해 8인 중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 점점 행사 정보도 공유하고 자리도 맡아 주는 사이가 됐다. 이제 피슈마라홍탕 상암점에서 예절 샷만 찍으면 덕친이라 불러도 무방했다.
언제나 굳건하게 솔플을 고수하던 서태웅이 고인물 무리와 함께 다니는 모습이 연출되면서 서태웅에게 접근하는 팬은 거의 없어졌다. 그전에도 서태웅이 소금 대응을 하긴 했지만 이젠 시도 자체가 사라졌다. 고인물 8인은 딱히 완장질을 하고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오프를 좀 뛴 윤대협 팬이라면 누구나 그 무리가 팬덤을 주도하는 코어라는 걸 알았다. 윤대협은 너무 거물이 돼서 라이트팬까지 합치면 누가 뭘 주도할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빠짐없이 오프를 뛰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결국 오프에서 온라인으로 떡밥을 길어 오는 건 코어 팬이었다. 그들이 가진 세월과 경력과 능력은 견제할수록 손해고, 받아먹을수록 이득이었다. 딱히 뉴비 배척을 하는 것도 아니라 현명한 팬들은 존중을 택했다.
비계와 오픈카톡방에서 서태웅에 대한 고인물들의 대화는 훨씬 부드러워졌다. 아니 좀 지나치게 호의적인지도 모른다.
갓보송... 선착잘서고 티팅찢고 윤댑파고 키187존잘남... 완벽한 거 아니야? 슬슬 진심으로 사귀고 싶다
님이 이겨야 하는 와꾸 보고 가세요 [윤대협레전드직찍.jpg]
포기하겠습니다^^7 넵넵
그러고 보니 보송이 눈 존나 높네 하긴 인생이 거울 보거나 윤댑 보거나라면 우리는 인간으로도 안 보일듯 호빗만한 심해생물로 보이겠지
누가 내여자 얼굴 욕해? 아무리 본인이라지만 용서할수없네요 피드백요구합니다
나가서 연애해 더러운 트친페스충들아
전번 주는 사람 분명히 있을 거 같은데 저언니라거나 저언니같은 또는저언니
아 저는 그런 시간낭비 안합니다 누울 자리 보고 뻗는 편
불면언니랑 지난번에 받는 거 봄 누가 슬로건 나눔에 끼워서 준 모양인데 바로 갈기갈기 찢어서 버림; 뭐였냐고 물어보니까 타인의 개인정보 라고 대답함
타인의 개인정보
로봇이야?
윤댑빠는 어쩔 수 없어 눈이 하늘 꼭대기다
그거 그냥 팩트잖아... 187이면 물리적으로 눈이 하늘 꼭대기에 달렸잖아...
ㅇㅈ합니다
역시 보송이에게 어울리는 건 "그 남자" 뿐인가? 댑x보만이 살길
본받고싶다 이 여자의 꾸준함...
취미가 같고 보기에 아름다운 남성이라면 헤테로 여성 입장에서 들이대 볼 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불면처럼 이미 조신한 짝이 있는 경우도 있고. 연애에 별 흥미가 없는 사람도 많다. 비연애주의까진 아니지만 덕질에 쏟는 에너지를 나누는 것 자체가 끌리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특히 덕질에 뽕이 차고 떡밥이 끊이지 않는 시기에는 더더욱.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재미있어서. 이미 현생과 덕질만으로 시간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보송이에 대한 진지한 연애적 관심은 복수의 덕친에게 발생할 수 있다는 포텐셜 때문에 필연적으로 기존 덕친 관계의 긴장감을 부른다. 몇 년간 같은 연예인을 좋아하며 전국 팔도 아스팔트 위를 뒹굴어 온 전우와도 같은 8인의 결속을 심하게 반반한 남팬 하나 때문에 위협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8인이 전부 모인 어느 공방 날엔 불면이 진짜로 서태웅을 뒷풀이에 데려갔다. 망원동의 유명한 중국집. 인원이 9명이라 무려 룸을 잡을 수 있었다.
모두 서태웅을 향해 통성명...이 아니고 닉을 트는 와중에 당사자가 입을 다물고 어색하게 고개만 꾸벅이자, 불면이 그냥 눈치껏 호칭을 붙여버렸다. 그야 본인 눈앞에서 보송이라고 부를 순 없으니까.
"이분은 조던 님이야. 전시회 때 영상 보내주신 분"
"알지 알지. 백상 표 남은 거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그 때 사다리 타기로 제가 타서 갔어요."
"아니요. 그냥 남은 거라..."
서태웅은 왜 자기가 조던 님인지 한참 생각하다가 알계 아이디를 기억했다. 조던 님... 기분 좋다. 왠지 모르지만 상당히.
서태웅은 이날 처음 포카 예절 샷이라는 것을 찍어 봤다. 아무것도 없는 투명 탑꾸를 안타까워한 8인 중 한 명이 즉석에서 예비 탑로더를 하나 선물했다. 서태웅은 생각했다. 덕친은 좋은 거구나.
서태웅은 하나도 안 맵고 달짝지근한 칠리새우를 호호 불어 먹으면서 새로 사귄 덕친들이 끊임없이 덕후 토크를 늘어놓는 걸 라디오처럼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아무 말도 없는 서태웅에게 누군가 질문했다.
"조던 님은 엄청 말이 없으시네요."
서태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대협 어디가 제일 좋으세요?"
서태웅은 말없이 칠리새우를 씹었다. 착한 덕친들은 그가 입안의 먹거리를 다 삼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서태웅은 반짝이는 16개의 눈이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 대답이 마땅치가 않았다.
어디가 제일 좋냐고...
한참을 고민하던 서태웅이 낮은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그냥 다요."
누군가에겐 성의 없게 들리겠지만, 8인의 윤대협 최애 고인물에겐 충분히 통하는 진심이었다.
"아 맞죠. 진짜로 뭐 하나를 꼽을 수가 없음. 이게 맞다."
"우문현답이다 완전. 나도 그냥 다 좋음. 뭐부터 얘기해야 될 지 모르겠어!"
"진짜 와꾸면 와꾸 피지컬이면 피지컬 실력이면 실력 빠지는 게 없으니깐."
"제가 자랑은 아닌데 K팝 너무 오래 파가지고 구남친들이 좀 많은데 역대 최애 중에서도 탑클래스잖아요. 솔직히 다 모으면 전최애는 걍 오징어일 듯."
입으로 트위터를 시작한 고인물들 앞에서 서태웅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굴에 잘 티가 나진 않지만 상당히 흐뭇한 마음이었다. 다들 말씀을 참 잘 하시네. 제 주둥이에선 네 글자만 겨우 나갔는데도, 일각 아래 빙산인 제 마음속을 모두가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태웅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질문을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곱씹는 성격이었다. 집으로 가면서도.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까지도. 운동을 하면서 일을 하면서 윤대협 영상 클립 움짤을 따면서 서태웅은 계속 생각했다.
나는 윤대협이 왜 좋을까.
말로 표현하기는 정말 어렵다. 서태웅은 하나만 알았다. 윤대협을 알기 전에도 인생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윤대협을 알고 나서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제야 서태웅은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이것이 사는 즐거움이구나. 살아있다는 거구나.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거구나.
불면이 준 사진에는 윤대협을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이 포착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낯설 정도로.
서태웅은 그 표정이 좋았다. 행복해 보였다.
2월 14일은 윤대협의 생일이다. 즉 2월은 윤대협 생일 카페의 달이다.
윤대협은 데뷔 후 첫 생일 때 존재하는 모든 생일 카페에 빠짐없이 다 갔던 미친놈이다...
물론 인증샷도 인스타에 싹 다 올렸다. 얼굴만 믿고 셀카 고자인 편인데 깔끔하게 매니저한테 핸드폰 맡겨서 아주 예쁘게도 잘 나왔다. 윤대협 최애들은 눈물을 흘리며 효행비를 세워주려 했다.
그러나 다음 해 생일은 팬데믹이었다. 윤대협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팬들은 눈물을 머금고 그 결정을 존중했다. 기대도 안 했다며 맘에도 없는 말로 서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올해. 그룹에서 가장 빨리 생일을 맞은 윤대협의 생일을 앞두고 소속사는 공식 팬클럽을 통해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역생카 이벤트였다.
공지 사항을 읽고 윤대협 팬들은 눈물을 흘리며 소속사를 찬양했다. 고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부터 저는 유씨로 창씨개명합니다 유명호 아빠 사랑해!
유대표 생일카페 열자고 난 진심이야
어버이날에 유대표 지하철 광고 하실 분 모집합니다 (1/nn)
카페 존나 넓다;; 과연 소속사가 컨택하니 다르구나 인테리어도 이쁘다 블루톤 ㅠㅠ
앨범보다 팬이벤트 기획력이 좋으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정말 감사합니다 충성충성
와 근데 이거 백퍼 윤대협 인증샷 찍으러 온다 언제 오느냐 그게 문제지
죽순이들 있을 것 같은데 쫓아내나?
ㅇㅇ 이용시간 최대 1시간이래요 주말엔 30분
서태웅은 달력을 보며 고심했다. 언제 가지... 이렇게 윤대협 팬으로 가득 차는 장소라면 반드시 사람이 가장 없는 시간대를 골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웅성웅성 수군수군을 견뎌야 한다. 한 시간이라도 마음 놓고 윤대협 덕질을 하고 싶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서태웅은 정말 아무도 없을 듯한 애매한 이벤트 한중간이자 생일과는 좀 떨어진 날짜이며 평일을 골라서 반차를 냈다. 물론 윤대협 스케줄이 없는 날로.
문제는 서태웅의 니즈가 윤대협과 정확히 일치했다는 데서 발생했다.
윤대협이 카페에 들어왔을 때 서태웅은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그 뒤통수만 보고도 딱 알아본 윤대협이 씨익 웃으면서 마스크를 벗었다. 장내에 스무 명도 안 되는 윤대협 팬들이 숨을 들이켜며 입을 틀어막았다. 윤대협은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대고 쉿~ 하면서 눈웃음을 쳤다. 팬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실제로 숨이 잠깐 멎은 사람도 많았다.
윤대협은 장난꾸러기처럼 히히 웃는 얼굴로 살금살금 서태웅 뒤로 다가갔다.
윤대협을 발견한 카페 직원들이 웃음을 참으려고 합죽이가 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뉴판에 집중하고 있었던 서태웅은 컵케이크를 종류별로 한 개 주문할지 두 개 주문할지 그것이 문제였다. 한 시간 안에 다 먹을 수 있을까. 포장도 될까. 그러면 누나랑 엄마 것까지...
윤대협이 서태웅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뭐 골랐어요?"
서태웅은 농구선수가 페이더웨이 슛을 하듯이 뒤로 펄쩍 물러났다.
"안녕~"
윤대협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서태웅은 웃지 못했다. 다리가 풀리지 않도록 힘을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잠깐 눈앞이 까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뭐가 맛있어요? 나도 사 주면 안 돼요?"
윤대협이 택도 없는 소리를 농담이랍시고 던진다. 서태웅은 그게 자신한테 하는 말인지도 몰랐다. 윤대협은 반응이 없는 서태웅을 놔두고 직원한테 바로 말을 걸었다.
"이분 주문하셨어요?"
"음료수만요. 디저트 고르고 계셨어요."
"그냥 종류별로 한 개씩 다 주세요. 제가 쏠게요."
윤대협이 뒤로 돌아서 장내의 스물 남짓한 사람들에게 외친다.
"디저트 하나씩 더 골라서 포장해 가세요. 제가 쏠게요. 생일 턱!"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에 서태웅의 정신이 약간 돌아왔다. 여전히 윤대협이 옆에 있다는 걸 잠깐 잊은 채 서태웅이 허겁지겁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디저트... 두 개씩 더 포장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그건 제가 결제를..."
윤대협이 끼어들었다. 얼굴 좀 들이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서태웅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전신에서 땀이 확 났다.
"그것두 제가 할게요."
윤대협이 서태웅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눈이 마주칠 때까지 집요하게. 서태웅은 이렇게 눈높이가 맞는 사람은 처음이라 낯설었다. 물론 이렇게 잘생긴 사람도 처음이었지만.
"나 주려고 더 산 거예요?"
"... 아니요. 가족들 주려고."
"에엥. 나 생일인데. 나도 사주면 안 돼요?"
서태웅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직원에게 세 번째로 카드를 내밀었다.
"한 개씩 더 주세요."
윤대협은 하하하 소리 내서 웃었다.
그날 윤대협의 방문은 매니저가 캠코더를 들고 동행했다. 이 모든 장면이 적절한 블러로 편집되어 자컨으로 방영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애초 공지 사항에 카페 방문하신 분들은 촬영되어 콘텐츠로 나갈 수 있다는 경고가 있었다. 그 영상에 윤대협도 나온다는 말은 없었지만.
포스터와 배너에 사인도 하고 (나중에 팬클럽에서 추첨으로 나눠 줄 예정이다) 포스트잇 앞에서 한참 동안 읽기도 하고 셀카도 찍어 주고 사인도 해 주고. 서태웅은 아까의 충격으로 차마 셀카 찍자는 말도 못 하고 구석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윤대협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왜 나랑 사진을 안 찍어주냐고 하는 바람에 좀비 같은 손놀림으로 순순히 핸드폰을 바쳤다. 찾아가는 서비스도 윤대협이 한다.
눈이 번쩍 뜨이는 미남 둘이서 얼굴을 딱 붙이고 셀카를 찍는 장면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카메라에 담았다. 서태웅이 일개 팬인 걸 알면서도. 마치 천 제곱미터 튤립밭이나 수평선의 일출을 봤을 때처럼 미추를 아는 인간이라면 무심코 핸드폰을 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그런 아름다운 경치였다.
윤대협은 떠나기 전 팬들과 다 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다. 서태웅은 맨 뒷줄 구석에 뻘쭘하게 서 있었다. 매니저가 외쳤다.
"지금 너무 넓어가지고. 조금만 좁게 설게요."
윤대협이 좌우를 살피더니 잠깐 뒤로 빠진다. 서태웅의 손목을 끌고 가운데로 끌어온다. 서태웅은 또 돌이 됐다.
"큰 사람들이 가운데 서는 게 낫겠지?"
윤대협이 내 손목을 잡고 있다...
서태웅은 돌이 된 채로 사진을 찍었다. 윤대협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는 건 팬클럽에 얼굴이 블러되어 올라 온 사진을 보고 나서 알았다.
서태웅은 윤대협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 시간 동안 카페에 앉아있었다. 숨이 잘 안 쉬어져서 덕질 개시 후 처음으로 안경과 마스크를 둘 다 벗어놓고 한참 동안 이마를 짚고 엎드려 있었다. 직원이 와서 잠든 줄 알고 깨울 때까지...
계타지 못한 팬들에겐 탈덕 말리는 날이었으나 댑x보를 꾸준히 밀던 한 고인물에겐 축제의 날이었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필리버스터로 비계 탐라와 오픈카톡방을 도배했다.
윤대협 저 앙큼폭스게이남 저거저거 외간남자한테 매너손도 안하고 하이고
와 그렇네 윤대협 같그룹 멤버도 안 만지는데... 퍼스널 스페이스 태평양이잖아
아니 갑자기 나 언니가 선구자로 보이는데 댑x보 말린 건가요
환영합니다 어서오세요 레드카펫 깔았습니다
보송이 착하게 살더니 계탔네 부러워 죽겠다
야 지금 보송이가 셀카 원본 보냈어 시발 미쳤다 안구정화
불면느님 제발 공유좀 제발 사랑해요 우리사이 알잖아
[kakaoTalk_20xx02xx.jpg]
야... 이거는... 그래... 댑x보 ㅇㅈ합니다
무시하기엔 너무 엄청난 얼굴력 아니 설득력이었다
보송아 너는 이제 시야 가리지 말고 제발 무대 위로 꺼져 데뷔해
서태웅은 너무 엄청난 일을 겪은 나머지 도저히 물리적으로 견딜 수가 없어서 다음 날 병가를 제출하고 집에 드러누워 있었다. 마음의 병도 병가가 나온다면 꼭 거짓말은 아니었다.
포장해 온 컵케이크를 먹고 있는데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팬클럽으로부터 온 쪽지였다.
심장이 덜컥였다. 어제 일 때문에 뭔가 페널티라도 먹는 걸까. 서태웅은 어제보다 더한 일을 겪을 멘탈과 체력이 안 돼서 그날 하루 종일 쪽지를 씹었다.
다음 날 퇴근길에 용기를 내서 열어 본 쪽지 내용은 이랬다.
오디션?
서태웅은 어리둥절했다. 이메일로 왔으면 스팸 신고를 했을 텐데 팬클럽 쪽지로 왔기 때문에 발신처는 의심 없이 공식 소속사였다.
내가 오디션을 왜?
서태웅은 한참 동안 답장 내용을 생각했다.
어떻게 거절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