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위기의 사랑
불면의이쑤신
결혼하니까 좋냐?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윤대협은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보일 듯 말 듯한 약간의 쑥스러움. 물어본 사람이 손해였다.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서태웅은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좋아.”
뭐라 덧붙일 여지도 없는 확고함. 백이면 백 물어본 사람이 손해였다.
그래, 니 남편도 좋다더라. 굳이 서로의 반응을 전해 주면. 윤대협은 귀엽다는 듯이 웃기 스킬을 시전했고. 말은 없었지만 제법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서태웅은 대놓고 코웃음 쳤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결혼했지. 서태웅에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놀리는 맛이 별로 없는 신혼부부였다.
전 국민이 말려드는 상당한 소동을 겪은 데다 직접 결혼식을 목격했음에도 동료들은 윤대협과 서태웅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곤 했다.
물론 따끈따끈한 신혼 첫 시즌은 예외였지만. 기억력 문제가 아니고 자유투 방해 소재로 하도 자주 봐서 잊어버릴 틈이 없었다. 시즌 중은 물론이요 피크를 찍은 올스타전까지. 놀리는 보람도 없는 것들인데 실시간 염장질까지 봐야 하는 동료들로서는 속이 더부룩하고 옆구리는 쓸쓸하고 피해가 막심했다. 팬들이 즐겁다면 어쩔 수 없지만.
어쨌든 신혼부부 떡밥의 자유투 방해 유통기한도 1년 정도였다. 두 번째 해부터는 응원단이 식상해져 접었다.
마찬가지로 MVP 인터뷰에서 집에서 보고 있을, 또는 다른 곳에서 경기를 마친 배우자이자 라이벌에게 전하고 싶은 한 마디를 묻는 예의상의 질문도 신혼 첫 시즌 정도였다.
그마저도 윤대협은 더없이 담담했다. 주로 정해진 대답을 했다.
“잘해라. 태웅아. 이따가 봐.”
그게 다였다. 마이크에 얼굴을 기울여 나직하게 내뱉는 그 짧은 음성을 다정하다고 생각하는 건 서태웅 정도였다. 재미없는 놈들. 지극히 방송적인 계산으로 화끈하고 오글거리는 멘트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기대했던 중계진은 내심 실망했다.
서태웅은 더 심했다. 배우자인 윤대협 선수와 득점왕 경쟁을 하고 있는데요. 남편에게 한 마디?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내가 이긴다.”
남편이라는 말은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거의 으르렁에 가까운 협박을 예나 지금이나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윤대협 정도였다.
카메라 앞이라고 일부러 자제한 것도 아니다. 동료들에게도 신혼부부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윤대협과 서태웅의 루틴은 결혼 전에나 후에나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맞붙는 경기에 함께 출퇴근하던 건 결혼 전에도 같았으니까. 돌아갈 집이 신혼집으로 바뀌었을 뿐. 동료들로선 알 바 없는 사소한 변화였다.
결혼하고 나서 공개적으로 달라진 루틴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라커룸에서 농구화에 반지를 끼웠다가 경기가 끝난 뒤 갈아 신으면서 빼는 것. 농구 잘하니까 별 유난한 짓거리를 해도 멋있게만 보여서 짜증 난다는 것이 리그의 중론이었다. 그마저도 모두들 금방 익숙해졌다. 당사자들이 아무렇지 않았으니까. 옷 갈아입고 신발 갈아 신는 것의 연장이었다.
그런 무덤덤한 부부였지만 가끔씩 생각지도 못할 때 무방비한 동료들을 기습하곤 했는데.
모이면 주로 운동 얘기, 먹는 얘기나 하는 재미없는 농구선수들이지만 가끔은 보통 사람 수준의 스몰토크도 한다. 반려동물 자랑도 자주 있는 레퍼토리. 신인 선수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고양이 얼굴 클로즈업이거나 아기 강아지를 새로 입양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거나.
제아무리 무뚝뚝한 남자 운동선수들일지라도 귀여운 동물들 앞에는 장사 없는 법. 당장 사진부터 내놓으라는 거센 요구가 빗발쳤고 거대한 농구선수들이 핸드폰 화면 하나를 향해 머리를 모으곤 했다. 반려동물 천만 시대인 만큼 꼭 선수들이 아니더라도 코치진이나 유튜브팀이나 구단 관계자들 등 주변 사람들 중에도 털 식구 모시고 사는 집사들이 많아서 자연히 천하제일 반려동물 자랑대회로 이어졌다.
윤대협은 대체로 리액션 담당이었다. 오. 귀엽다. 보송보송하네. 얌전할 것 같아. 나이가 좀 있나? 빠짐없이 적절한 관심을 기울여 자식 바보들의 무한한 과시욕을 맞춰 주었다.
신나서 일방적인 자랑을 떠들다가 약간 민망해진 동료들은 억지로 윤대협에게도 발언 기회를 돌렸다.
“형은 뭐 없어요? 자랑할 거? 귀여운 동물 사진 같은 거.”
“음… 글쎄.”
윤대협은 순순히 핸드폰을 꺼냈다. 거대한 농구선수들은 핸드폰 화면 위로 머리를 모으려 했으나. 윤대협이 날쌔게 본인 눈앞으로 화면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기웃거리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윤대협의 커다란 손가락이 갤러리 앱을 클릭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낮잠 자는 서태웅. 옆으로 넘긴다.
비슷한 사진이 몇 장 더 있다.
휴식일에 조깅하다 찍은 고관절 푸는 서태웅. 옆으로 넘긴다.
취침이 좀 늦어져 눈도 못 뜨고 양치하는 서태웅. 옆으로 넘긴다.
침대에 파묻힌 서태웅의 길쭉하고 하얀 발바닥. 섹시하네. 옆으로 넘긴다.
운전하는 서태웅의 집중한 옆모습. 옆으로 넘긴다.
여전히 운전하는 중에 연속으로 찍은 사진. 찍힌 걸 눈치챈 직후에 뭐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흘끗 돌아보는 서태웅. 옆으로 넘긴다.
윤대협은 다소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남편 사진밖에 없는데…”
“이 형 미쳤나?”
“와 잠깐 토하고 올게”
“실화야? 나 거기 포카리 좀 귀에다 부어 줘”
“서태웅 사진도 아니고 남편 사진…”
“아니 서태웅 사진이라고 하면 그것도 그거대로 좀…”
즉시 야유가 쏟아졌다. 보이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윤대협은 전혀 타격이 없었다. 기분이 좋았다.
흐뭇한 표정으로 열심히 갤러리를 스크롤한 끝에 윤대협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아, 찾았다. 고양이 사진.”
“형 고양이 키워요?”
“아니 길냥이. 귀엽지.”
윤대협이 내민 핸드폰 화면 위로 거대한 선수들이 머리를 모은다. 고등어 등을 닮은 줄무늬 코트에 배는 하얗고 눈매가 동그마니 예쁘장하게 생긴 고양이가 애교 있게 몸을 반쯤 뒤집고 누워 있었다. 보송보송한 발바닥을 둥글게 말아 얼굴 근처에 귀엽게 부비고 있는 앙큼한 자태. 좀 흔들렸고 화질도 약간 흐려져 있어 아주 멀리서 5배 줌 정도로 찍은 걸로 추정되는 사진이었다.
“오 귀엽다. 어디서 찍었어요?”
“몰라. 남편이 보내 줬는데.”
“아 진짜 실화냐”
“제발 형 소름 돋아요 으으으”
“맞네 이거 태웅이 형 카톡 프사네!!”
“서태웅이 대협이 형한테 이런 거 찍어서 보낸다고…? 서태웅이…?”
“아니 나는 알고 싶지 않아 진~심!”
“하하하. 미안.”
해맑게 웃는 윤대협에게 사과의 말을 들으니 한층 더 기분이 안 좋아진 동료들은 몸서리를 치며 해산했다. 운동이나 하자. 격렬한 운동으로 뇌를 마비시켜 방금 받은 정신적인 대미지를 깔끔하게 씻어 버리자.
물어봐서 대답한 것뿐인데. 코트에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야유를 실컷 먹고도 윤대협은 기분이 썩 좋았다.
이렇듯 먼저 나서서 언급하지 않아도 윤대협에게는 항상 배우자를 자랑할 기회가 주어졌다. 굳이 주어진 기회를 발로 차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 대화가 그렇게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동료들만 제 무덤을 파고 누워 얌전히 기습당했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에서 부부 중 한층 더 우수한 스나이퍼는 말할 필요도 없이 서태웅이었다. 선량한 동료들을 숫제 암살했다.
윤대협과 달리 결코 스몰토크 현장의 우수한 리액션 담당자라 할 수 없는 서태웅은 반려동물 화제에만 예외적으로 적극적인 대화의 방아쇠 역할을 했다. 그는 업로드가 1년에 다섯 번도 안 되는 유령 같은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동료들의 반려동물 포스트는 물론 스토리까지 전부 하트를 누르고 다녔다. 애초에 그러려고 만든 계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사자를 만나면 대뜸 삿대질을 했다.
“선배. 고양이.”
“어 태웅아. 왜 또. 손가락 왜 그래. 뭐.”
“고양이 이름 뭐예요.”
“오, 형 고양이 키워요?”
“어. 아내가 한 마리 입양했어. 보여 줄까?”
그렇게 서태웅의 팀에서도 천하제일 반려동물 자랑대회가 벌어졌다. 한 사람씩 나도 보여 주겠다며 핸드폰을 내민다.
서태웅은 제일 먼저 말을 꺼낸 주제에 대답은커녕 어떠한 음성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만큼은 남의 핸드폰 화면을 예리하게 놓치지 않았다. 누군가 사진을 내밀 때마다 빠짐없이 다른 거대한 농구선수들과 함께 머리를 모았다.
서로의 강아지와 고양이에 예쁘다, 귀엽다, 보고 싶겠다, 집에 빨리 가고 싶겠다, 그런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묵묵히 끼어만 있던 서태웅이 불쑥 핸드폰을 내밀었다.
뭐야. 얘도 동물 키웠던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적극 대화에 참여하는 서태웅이라니. 이건 귀하네요. 거대한 농구선수들이 얼른 머리를 모으고 바라본 화면 속에는.
윤대협이 있었다.
키 195cm. 몸무게 97kg. 수컷. 농구선수. 윤대협.
객관적으로 잘 나온 사진이기는 했다. 초점도 잘 맞고. 배경도 예쁘고. 표정도 좋고. 어디 놀러 가서 찍은 건지 뭔지 화창한 날씨에 푸른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 통유리창 바깥으로 시선을 향한 옆모습이었다. 평상시처럼 재수 없을 정도로 잘생겼지만. 동료들 입장에선 왠지 좀 느끼해 보였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고.
여전히 윤대협의 사진을 내밀고 있는 사이보그처럼 무뚝뚝한 서태웅의 얼굴을 앞에 두고 동료들은 멀뚱멀뚱 서로를 바라보았다.
평생 운동만 하며 남초 사회생활에 잔뼈가 굵은 그들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또 처음이었다. 남의 집 강아지, 고양이 사진까지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압박을 잠깐 내려놓고 마음껏 귀여워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남의 남편 사진은…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게다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아는 사람이기까지. 그냥 아는 사람도 아니고 윤대협. 사석에서도 자주 만나는 윤대협. 코트에서 만났을 땐 탱크나 다름없는 윤대협…
뭐… 뭐 어쩌라고. 뭐라고 해야 돼.
서태웅은 털끝만큼도 변함없는 무표정으로 추격타를 가했다.
“귀엽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진심으로 할 말이 곤란해서였다. 윤대협(195cm, 97kg, 수컷)이 귀엽냐고. 서태웅 말고 다른 사람이 물어봤다면 대답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절대 NO였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와 결혼한 배우자가 저렇게 진지하게 물어보는데. 그것도 서태웅이… 이 말 없고 애교 없고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겠는, 쿨 시크가 옷을 입고 농구만 하는 듯한 놈이, 키우는 고양이 자랑하는 말투로 자기 남편 귀엽냐고 물어보는데…
존나 뭐라고 해야 되냐고…
주변의 과도한 조용함에도 어떠한 사회적 사인도 읽지 못한 서태웅이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사진을 옆으로 넘겼다.
“이건 애교 부리는 건데요.”
누가 그만하라고 좀 해 봐. 선배들이 후배들의 발이나 옆구리를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아까랑 똑같은 배경 속의 윤대협이 한 손에 턱을 괴고 아마도 사진을 찍는 중인 서태웅을 향해 눈웃음을 치고 있는 사진이었다. 동료들 입장에선 이전 사진보다도 한층 더 느끼하기만 했다. 분위기는 점점 더 어색해졌다.
안타깝게도 서태웅은 분위기를 전혀 읽지 않았다. 혼자서 반려동물 자랑 모드에 푹 빠진 모양새였다. 표정만 사이보그처럼 무뚝뚝했지 영락없이 기르는 강아지, 고양이 사진 내밀던 동료들의 모습이었다. 뿐이랴 평소 서태웅의 태도와는 비견할 바 없는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
바로 그 적극성이 동료들로서는 가장 두려운 지점이었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더욱 끔찍… 아니 깜찍한 윤대협(190cm, 97kg, 수컷)의 사진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일.
결국 한 명이 총대를 메고 서태웅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태웅이 형, 저 누나가 옹심이(30cm, 1.4kg, 수컷) 스티커 만들었다고 줬는데.”
“볼래.”
“라커에 있어요. 형도 하나 줘요?”
“콜.”
태어난 지 5개월 된 턱시도 아기 고양이를 앞세운 막내가 죽도록 어색한 서태웅 남편 자랑 타임을 강제 종료시키는 사이, 나머지 동료들은 눈도 안 마주치고 재빨리 해산했다.
동료들은 가급적이면 윤대협과 서태웅의 결혼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지금까지처럼 그들 각자를 훌륭한 운동선수, 드럽게 잘생긴 것들, 싹싹하고 인기 많지만 어딘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녀석과 조용하고 무뚝뚝한데 은근히 단체생활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녀석 정도로 인지하고 싶었다. 둘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고 귀여워하는지는 정말로 알고 싶지가 않았다.
이유랄 건 없었다. 그냥 민망해서. 부끄러워서. 당사자들은 아무렇지 않은데 괜히 자기들이 쑥스러워서. 익숙하지가 않았고 적응이 안 됐다.
아무리 운동선수들의 결혼 시기가 일반인들보다는 빠른 경우가 많다곤 해도 윤대협과 서태웅은 너무 어릴 때 결혼했다. 동기나 후배들은 대부분 또래 결혼식에 처음 가 본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둘 다 동료. 결혼 행진곡 끝나고 버진 로드 끝에서 키스하는 사진을 찍을 때 어쩔 줄 모르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딱히 순진해서라기보다는 반응이 곤란해서였다.
물론 한참 선배인 유부남들도 반응이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윤대협, 서태웅 정도면 다른 후배들에 비해 어른스럽고 조용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하다가, 가끔씩 뒤통수를 거하게 맞았다.
평소에 전혀 티를 안 내서 방심을 시키는 게 더욱 질이 나빴다. 아예 만날 때마다 딱 달라붙어 뽀뽀하고 만지고 혀 짧은 소리를 냈으면 대놓고 규탄하고 핍박하고 멀리하고 경계를 단단히 할 텐데.
그들은 달랐다. 어른스럽고 조용하게 결혼한 듯 안 한 듯 서먹서먹하다가 누가 실수로 기회를 한 번 주는 순간엔 전혀 본색을 감추지 않았다. 아예 감출 생각이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윤대협과 서태웅은 어른스럽고 조용하고 당당하고 화끈하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숨기는 것도 없고 총체적으로 대단히 염병이었다.
결혼하고 한참 지난 어느 시즌 쫑파티. 고생한 팀 전체가 머리 풀고 달리는 날. 코치진, 트레이닝 파트, 심지어 응원단까지 알차게 모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테이블 몇 번 섞인 시점에. 구석 자리에 적당히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모였다. 그중 한 명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 그러고 보니. 지금 여기 다 유부남이네?”
“응? 아니 대협이… 아 맞다. 얘가 제일… 유부남이지.”
“제일 유부남이 뭔데…”
“제일 시끄러운… 유명한… 암튼 알잖아.”
“그렇네. 맨날 까먹네 대협이 결혼한 거.”
“하하. 축의금 한 번 더 주시게요?”
적당히 취한 분위기. 입도 풀리고 목소리 커지고 웃음이 많아지고.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무리수에도 체통 내려놓고 몸을 던진다. 인터넷 제일 많이 하는 마케팅팀 부장님이 떡밥을 던졌다.
“너네 그거 봤냐. 배우자한테 카톡으로 ‘사랑해’ 보내는 거.”
두 명은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한 명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몸서리를 친다. 윤대협은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게 뭐예요?”
“동시에 카톡으로 ‘사랑해’ 보내고. 누가 먼저 답장 오나.”
“제일 먼저 오는 사람이 이겨요?”
“근데 답장 내용이 중요한 거 아니야?”
“그럼 첫 번째는 금메달이 누군지 보고. 그 다음엔 내용을 보자.”
“아 안 돼요. 꽐라 된 줄 알고 혼나요.”
“우리 와이프는 무슨 병 걸렸냐고 할지도 모르는데…”
“아 욕할 거 같은데…”
“야 보내고. 알람 켜고. 여기 가운데에다 핸드폰 모아 놔.”
“아 웃겨. 내일까지 답장 안 오면 나 핸드폰 못 가져가?”
“어어. 내일 가져가는 거야.”
에잇! 으악! 그 카톡 한마디가 뭐라고 아저씨들이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눈 질끈 감고 핸드폰을 두들긴다. 순식간에 핸드폰 여섯 개가 모였다. 윤대협도 구석에서 조용히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런데 핸드폰이 채 식탁에 닿기도 전에 하나가 붕 울렸다.
윤대협이었다.
“뭐냐? 벌써 답장 왔어?”
“미친 서태웅. 이런 것도 빠르냐. 독한 새끼.”
“태웅아 제발 잠 좀 자라.”
“진짜네요. 잘 시간인데.”
“뭔데? 뭐라고 왔는데?”
“야 뺏어. 뺏어서 읽어.”
“보자~ 아니 근데 이거 진동 계속 오는데요? 전화 왔나?”
진짜로 전화였다. 윤대협의 핸드폰을 뺏어갔던 트레이너 코치가 얼떨결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서태웅이. 나 알아? 어 그래그래 알겠다 마 좀 있어 봐라”
대답은 안 들렸다. 윤대협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곧 핸드폰이 주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어, 태웅아.”
[언제 끝나?]
“모르겠어.”
[나도 사랑해.]
“응. 나도.”
[벌써 말했잖아. 멍청아.]
“또 말하고 싶은데.”
[빨리 와. 멍청아.]
“알았어.”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서 고요하게 귀를 기울이던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썩어 가기 시작했다. 윤대협의 표정과 대사만으로도 서태웅의 대답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갑자기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들어 소주를 추가로 시킨다. 짧은 통화를 하는 사이 윤대협 앞에 맥주잔이 한 줄로 늘어섰다. 그러나 아무도 맥주를 따라 주지 않았다. 모든 잔이 투명하게 차올랐다.
윤대협은 아랑곳하지 않고 통화를 계속했다.
[윤대협. 지금 기분 좋아?]
“그렇지. 목소리 들었으니까.”
아저씨들의 토하는 시늉이 격렬해졌다. 슬쩍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한 뒤 아직 답장이 없어 쓸쓸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몇 있었다.
서태웅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
[나 안 자.]
“그래.”
[오면 같이 샤워해.]
“그럴까.”
그렇게 시작된 음담패설.
스피커폰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
윤대협이 귀가하면 함께 하고 싶은 것과 해 줬으면 하는 것과 해 줄 예정인 것과 그 장소에 대한 짧고 담담하고 강력한 서술이 이어졌다.
음. 과연. 윤대협은 뒷골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태웅이… 오늘 기분 좋구나. 문장은 뚝뚝 끊어질지언정 평소보다 확연하게 말의 총량이 많은 것이 또 귀엽다. 일찍 가야겠네.
윤대협은 겉으로 보기엔 흔들림 없는 다정한 미소로 서태웅의 나직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눈앞에 쌓인 술잔의 압박으로 쉽게 테이블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답변은 신중하게 선택했다. 대체로 긍정어의 나열이었다. 그래. 좋아. 알았어. 한 번만? 오케이.
윤대협은 전화를 끊자마자 나무랄 데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먼저 가 볼게요.”
폭풍 같은 야유가 쏟아졌다.
“응 그래 대협아 잘 가. 꺼져.”
“다시는 나오지 말고.”
“쟤는 이제부터 회식 출입금지 시켜.”
“이거 누가 하자고 한 거야?”
“부장님이요.”
“정말 완전 꿀잼이었슴다. 사모님은 답변 뭐라고 왔어요?”
“안 왔어 새끼야. 마셔.”
“야 대협아 대리 불렀냐?”
“이제 부르려고요.”
“고생했고 조심히 들어가고.”
“네. 다음 주에 뵈어요.”
“대협아! 가냐?”
그 후로도 줄줄이 이어진 인사며 격려며 2차 권유로 한참을 붙잡혀 있다가 겨우 빠져나온 윤대협은 발걸음 가볍게 귀가했다. 한사코 먼저 집에 갈 정도로 재미없는 술자리는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다. 집에 더 재밌는 게 기다리고 있으니까. 손윗사람이 주는 술은 웬만하면 다 마시는 편이지만 오늘은 싹 다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만큼은 절대로 필름 끊기면 안 된다. 아까워서 안 되지.
서태웅은 윤대협의 갑작스러운 애정표현이 싫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싫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도.
귀엽게도 현관까지 마중 나와 열렬한 키스로 윤대협을 환영해 주었다. 살짝 취했을 뿐 컨디션 매우 양호한 윤대협은 서태웅이 귓가에 속삭였던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다 실천했다. 알코올이 들어간 섹스는 좀처럼 없는 이벤트라 둘 다 한층 반응이 좋았다.
너무 불이 붙었나. 완전히 뻗었을 때쯤엔 해가 떠 버렸다. 윤대협은 멋없는 줄 알면서도 스스로에게 약간 감탄해 버렸다. 와. 십대 이후 처음 아닌가. 아직 이런 체력이 남아 있었네. 우리 둘 다. 오히려 꾸준히 운동하면서 체력이 더 늘어난 건지. 막판에는 약간 러너스 하이 온 것 같은데. 한계를 넘어선 유산소 운동으로 인한 과도한 엔돌핀 분비. 풀타임 출전보다 힘들었다. 그만큼 쾌락도 터졌지만.
배가 너무 고팠다. 술기운은커녕 안주까지 진작에 소화되고 분해되어 운동 에너지로 싹 날아간 것 같았다. 참지 못하고 서태웅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잠깐 엉금엉금 기어가다가 문틀을 잡고 천천히 후들거리는 몸을 세운다. 태웅이가 저 정도로 지치는 건 흔치 않은데. 아직 잠을 못 자서 그런가. 그 와중에도 관찰력 좋은 윤대협은 네 발로 엎드렸다가 일어날 때 꺾인 서태웅의 허리 각도가 제법 섹시하다는 생각을 했다. 음. 여기서 한 번 더 하자고 하면 진짜로 맞겠지…
윤대협은 아직 허기보다 귀찮음이 앞섰다.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서태웅이 부엌 뒤지는 소리를 듣는다. 먹을 게 있던가. 아무 생각이 안 든다. 아까 서태웅이 엎드려 있던 뒷모습과 울긋불긋한 허리 각도만 떠오른다. 음. 귀찮아도 지금 뭔가 먹어야 한 번 더 할 수 있을까?
시커먼 마음으로 섹스 각을 재기 시작한 윤대협의 가슴팍으로 뭔가 날아든다. 단백질 바 두 개였다. 서태웅은 이미 입에 하나 물고 비틀비틀 걸어와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우물우물 단백질 바를 먹는다.
“너는 하나 가지고 되겠어?”
서태웅이 손가락을 두 개 펴서 보였다. 이미 주방에서 한 개를 삼키고 온 모양이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주제에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만 걸치고 불편하게 앉아서 묵묵히 단백질 바를 씹는다.
서태웅의 습성을 잘 아는 윤대협은 그 이유도 잘 알았다. 서태웅은 침대를 신성시하는 내향인이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가루가 떨어질 것 같은 건 침대 위에서 먹지 않았다. 그나마 엉덩이라도 걸치고 앉았다는 것 자체가 지금 무지하게 힘들다는 증거였다. 그러면서 침대에 드러누운 윤대협한테는 별말 없이 단백질 바를 두 개나 던져 줬다. 윤대협은 사랑을 느꼈다.
침대와 하나 된 듯한 몸을 느릿하게 일으켜 서태웅의 옆에 따라서 걸터앉아 단백질 바를 깠다. 일어나고 싶은 기분이 전혀 아님에도 침대를 아끼는 서태웅을 위해 맞춰 주는 건 윤대협 나름의 사랑이었다.
물론 옆에 앉는 게 좋기도 하고.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구부정히 앉아 있는 새하얀 뒷모습도 절경이었지만. 서태웅이 하얀 주먹으로 길쭉한 단백질 바를 쥔 채 끝을 베어 물 때마다 그 절묘한 각도 때문에 어젯밤의 어떤 장면이 자꾸 겹친다. 이런. 오늘 일상생활 가능할까? 윤대협은 냉정하게 음란 마귀 들린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묵묵히 속눈썹을 내리깔고 단백질 바에 집중하던 서태웅의 시선이 흘끗. 윤대협을 향한다. 눈이 마주치자 단백질 바를 우물거리던 윤대협의 얇은 입술의 양끝이 살짝 올라가며 예쁜 광대가 동그랗게 도드라진다. 자동 반사 같은 미소.
서태웅은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안의 단백질 바를 꿀꺽 삼키고. 툭 내뱉었다.
“닮았대.”
“응?”
“너랑 나랑. 닮았대. 사람들이.”
“그래?”
윤대협은 의문스럽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그새 까끌하게 올라온 수염이 만져진다. 서태웅이 먹다 만 단백질 바로 윤대협을 가리켰다.
“그거.”
“이거?”
“턱 만지는 거. 내 버릇인데. 너도 하잖아.”
“아. 그렇네.”
그러고 보면 생각에 잠겼을 때 손가락으로 턱을 잡는 건 서태웅의 손버릇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윤대협에겐 딱히 그런 버릇은 없었지만. 요즘은 왠지 몇 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방금 전까진 아무 생각 없고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는데 자각하고 보니 자신의 모습이 꽤 낯설다. 언제 이런 게 옮았지?
“행동은 비슷해질 수도 있지. 근데 생긴 건 너무 다르지 않나?”
서태웅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서로 흘끗흘끗 이목구비를 살핀다.
윤대협은 눈썹이 짙고 끝이 처졌다. 그래서 착한 인상이다. 시원하게 각진 이마 양옆과 단단하고 굵은 콧날이 남자답다. 얇은 입술이 가로로 시원하게 찢어져서 웃을 때 예쁘다. 적어도 서태웅은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르다.
내가 윤대협을 닮았다고?
서태웅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미국에 있을 때도 그런 말을 들었다. 파트너의 유무를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인들은 잘 모르는 사이에도 고국에 두고 온 남자친구가 있다고 하면 그렇게들 사진을 보여 달라고 했다. 막상 보여 줘 봤자 기억도 못 하고 다음에 만나면 또 ‘특별히 만나는 누군가’ 있냐고 물어볼 거면서.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친구 얼굴 자랑할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던 서태웅은 꼬박꼬박 윤대협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셀카보다 객관적인 잘생김이 더 잘 나왔다고 생각하는 대학 농구 프로필 사진으로.
둘이 비슷하게 생겼네.
그때도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 서태웅은 귓등으로 흘렸다. 이게 아시안 친구들이 항상 말하는 백인들의 멍청함인가 보다. 전혀 다르게 생긴 동양인도 피부색만 비슷하면 죄다 헷갈려 한다던. 농구하는 동북아시안은 서태웅뿐이라 잘 헷갈리지 않았지만. 윤대협도 농구하는 동양인이라 그런지 바로 구별을 못 하네. 서태웅은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한 이후엔 한국에서도 그런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너네 점점 닮아가는 것 같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말하면 역시 귓등으로 흘릴 텐데. 어릴 때부터 꾸준히 본 북산즈까지도 그랬다. 서태웅은 그런 말을 들으면 가만히 윤대협의 얼굴을 평소보다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결론은 항상 같았다. 뭐가 닮았다는 거야. 눈도 코도 입도 다른데. 눈썹도 진한 것만 비슷하지 각도가 다르잖아.
원래부터 비슷하게 생겼다는 게 아니고, 점점 닮아 간다는 거야.
그렇게 말한 건 누구였더라. 오랜만에 밥 사 준다고 불렀던 이한나 선배였나. 닮아갈 게 뭐가 있는지. 서태웅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중학교 때부터 이 얼굴인데.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 원래 그런 거라고. 선배들은 왠지 흐뭇하다는 듯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웃을 때 똑같더라.
그렇게 거든 건 분명 송태섭 선배였다. 이한나 선배를 편드는 거였을까. 서태웅은 잘 웃지도 않는데.
하지만 송태섭은 굉장히 구체적인 한 장면을 꼽았다.
결혼식 날. 부케 던질 때.
서태웅도 똑똑히 기억하는 순간이었다.
부케는 둘이 같이 던졌다. 농구선수 두 명이 한 손씩 내밀어 꼭 붙잡고 등 뒤로 힘차게 던진 부케는 쓸데없이 높은 포물선을 그리는 바람에 생화로 장식된 웨딩 아치 꼭대기를 맞고 튕겨 나왔고. 원숭이나 다름없는 강백호의 리바운드 본능을 건드리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익숙하지 않은 구두 때문에 촉촉한 잔디 위를 미끄덩. 아찔한 각도로 거구가 기울어지는 순간. 윤대협과 서태웅이 동시에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등 조심해!
야외 가든 식장 전체에 메아리치는 서슬 퍼런 목소리에 깜짝 놀란 강백호는 거의 옆돌기를 시전하며 어떻게든 추락 없이 사뿐 무릎을 꿇었다. 마치 두 신랑의 외침이 일으킨 풍압의 도움을 받아 서커스를 마무리한 듯한 모습이었다. 짜… 짜잔. 세기에 길이 남을 슬랩스틱이었다.
얼떨떨한 강백호를 향해 모두가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때 윤대협과 서태웅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윤대협은 평소에도 잘 웃지만 정말 웃겨서 웃을 땐 표정이 약간 다르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거침없이 구기면서 도톰한 애굣살이 올라오고 미간과 콧등에 선 굵은 주름이 진다. 서태웅도 윤대협이 그렇게 크게 웃는 건 자주 보지 못했다.
내가 웃을 때 그런 얼굴이라고?
거울이 없는 서태웅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끔 웃음이 날 땐 오히려 한쪽 입술이 움찔거린다는 느낌인데.
아. 확실히 그건 날 따라 해.
윤대협은 종종 고등학교 땐 안 하던 표정을 짓는다. 웃을 때 한쪽 입꼬리만 씨익 웃는 얼굴. 평소의 해맑은 웃음이랑은 조금 다르다. 그렇다고 딱히 띠껍다는 표정은 아니고. 좀 생긴 남자들이 치명적인 척할 때의 비소도 아니고. 오히려 입술을 다물고 웃으니까 평소의 해맑은 웃음보다 더 멋있다.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지만 서태웅은 그 표정이 자신을 따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말한다고 해도 공감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무엇이 옮았을까. 스스로는 변한 데가 없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가 닳도록 듣는 단골 멘트가 있었다.
너도 결혼하니까 많이 둥글어졌다.
처음에는 살쪘다는 소리인가 했다. 매년 벌크업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피드백인 줄.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좀 덜 날카로워졌다고. 돌파가 밋밋해졌다는 소리인가 싶어 날을 세웠더니 그런 의미도 아니었다. 농구 테크닉 얘기가 아니고.
표정이나 인상 얘기였다. 예전의 졸음 가득한 얼굴과는 또 다르다고. 아무 생각 없을 때는 주로 뚱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었는데. 그런 순간에 윤대협의 여유롭고 느긋한 표정이 옮았는지도 모른다.
집중을 안 하고 멍때릴 때는 윤대협도 무표정이 된다. 그럴 때는 확실히… 제법 닮았는지도 모른다. 이목구비는 아니고 표정만.
한편 윤대협이 보기에도 서태웅과 자신은 닮은 점이 전혀 없었다.
서태웅의 손에서 다 먹은 단백질 바 껍데기를 빼앗아 자기 것과 함께 쓰레기통에 던진 다음. 윤대협은 남편의 벗은 어깨를 끌어안고 냅다 누웠다. 부스러기 떨어질 걱정이 없어진 서태웅은 순순히 쓰러져 주었다.
똑바로 눕힌 서태웅의 기다란 몸 옆에 팔을 괴고 모로 누운 윤대협은 무심히 천장을 바라보는 서태웅의 졸음 가득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나를 닮았다는 말을 들었단 말이지. 구석구석 뜯어본다.
태웅이는 눈매가 고양이처럼 올라갔고. 속쌍꺼풀 때문에 위쪽보다 아래쪽 속눈썹이 더 잘 보인다. 그래서 인상이 강렬하지만. 뜯어보면 동양화처럼 선이 수려하다. 모난 데 없이 동그란 이마와 날렵한 코끝도 그렇고. 도톰한 입술이 아주 가끔씩 조그맣게 벌어지는 게 귀엽다. 적어도 윤대협은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르다.
윤대협은 할아버지가 된 자신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지만. 노인 서태웅의 얼굴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표정 변화가 없어서 주름이 안 생기기 때문일까. 윤대협은 벌써 웃는 라인을 따라 조금씩 실주름이 붙고 있는데.
아니. 그런 선 몇 개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서태웅의 새까만 눈썹은. 지름이 큰 개암색 눈동자는. 탄력 있는 아래 속눈썹은. 동그랗게 젖살이 찬 양볼은. 집중하면 아래만 삐죽 불거지는 입술은.
처음 봤을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전체적으로 봤을 땐 중학생티를 갓 벗었던 시절의 풋내 나는 얼굴보단 조금 성숙해졌나 싶다가도. 이렇게 구석구석 자세히 뜯어보면. 그때나 조금도 다름없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다. 영원히 힘을 잃고 처지거나 늘어지는 일이 없을 것 같다.
서태웅에게 그런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강렬한 젊음의 에너지를 사양 없이 내뿜을 것만 같다. 냉정하게 말하면 요절이 어울리는 미모…
윤대협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손끝으로 서태웅의 얼굴 윤곽을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아무래도 눈으로 훑는 것만으론 모자랐던 모양이다.
졸고 있는 줄 알았던 서태웅의 개암색 눈동자는 윤대협의 집중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흐르던 침묵을 깬 건 서태웅의 목소리였다.
“하나도 안 변했네.”
윤대협은 웃음이 터졌다. 이 녀석. 누가 할 말을 하는 거지. 자신이 속으로 생각하던 걸 서태웅이 그대로 말했다. 턱선을 살살 쓰다듬던 손가락을 축축한 앞머리에 넣어 헤집는다.
“그건 내 대산데. 왜 태웅이가 뺏었지?”
“뭐래…”
귀찮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젖힌다. 이런 식으로 툭툭 튀어나오는 초등학생처럼 유치하고 순수한 날것의 반응이 좋다. 귀엽다. 나른함이 가득한 짜증. 아직도 몸에 힘이 없나 보다. 섹시하다.
참지 못하고 볼을 앙 깨물어 버렸다. 아직 샤워를 안 해서 축축하다. 달큰한 땀 냄새가 훅 난다. 아이씨. 깨물린 서태웅은 질겁을 하며 욕설이 되다 만 된소리를 중얼거린다. 그래도 나는 삼십대 초반에 입 안에 가득 찰 만큼 통통한 볼을 가진 태웅이가 나쁘다고 생각해.
싱글싱글 웃던 윤대협은 서태웅의 반격에 코끝을 깨물렸다. 이런 못된 입을 보았나. 결국 무기를 원천 봉쇄했다. 딥키스에 입술이 틀어 막힌 서태웅은 윤대협의 등짝을 퍽퍽 치다가 양팔로 목을 홱 감싸 쥐고 매달린다. 오. 힘이 남았네. 좋아. 윤대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정말 변하지 않았다.
서태웅은 진심으로 윤대협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
당시엔 다 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아주 어릴 때 윤대협을 만났다. 농구선수로서나 한 사람으로서나 중요한 것들이 만들어지는 그런 시기였다. 하루하루의 시간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밀도가 높았고 결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달라지지 않은 것들. 그건 조금씩 어른스러워진 외모나 몇 cm 정도는 더 자란 신장이나 단련된 근육과 같은 겉모습과는 아예 차원을 달리한다. 서태웅이 오랜 세월 경험해 온 윤대협의 일관성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윤대협이 중요한 것들을 가르치는 방식. 그 오랜 세월 동안 서태웅에게 일관되게 건넸던 선물과 같은.
일단 윤대협은 보여 준다. 자신을 보라는 식으로 손짓하거나 주의를 끄는 게 아니고. 그저 존재함으로써, 자신답게 최선을 다함으로써 서태웅에게 견본을 보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어차피 모두 그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특히 서태웅은 더욱 집요하게 눈을 떼지 못했고. 작게는 하나하나의 테크닉과 플레이부터. 크게는 어떤 선수가 될 것인지.
그리고 사랑하는 방식까지도.
일단 충분히 보여 준 다음. 약간은 설명해 준다. 그렇게 친절하지는 않다. 적어도 더 친절해질 수 있지만. 최선을 다해 구구절절 알려 주진 않는다. 다만 넌 아직 모르고 있다고. 그 정도만 확실하게 귀띔해 준다.
그래서 정확히 무슨 조언을 들었는지 희미해졌을 때조차 결코 잊어버릴 수는 없다. 무의식에 각인하는 방식. 어차피 생각하기 전에 몸을 던졌던, 부딪혀 가면서 성장했던, 그래서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그때의 서태웅은 구구절절 설명해줬대도 다 잊어버렸을 것이다. 윤대협은 효율적이다. 꼭 필요한 만큼만. 보여 주고, 그다음에 알려 준다. 넌 아직 너를 잘 모르고 있다고.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끝내 발견하게 된다. 내가 뭘 모르고 있었고. 그는 뭘 알고 있었는지. 윤대협이 알려 줘서가 아니라 서태웅이 떠올려서. 수동적인 배움이 아니라 자발적인 앎이 폭죽처럼 터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여 준 것들이, 집요하게 눈을 떼지 못했던 그 모든 윤대협이 내 것이 된다. 떠올리지 않아도 내 안에서 나온다. 작게는 하나하나의 테크닉과 플레이부터. 크게는 어떤 선수까지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실링이 그랬고.
평생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까지도.
그런 것은 시간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 피부나 머리칼이나 몸의 크기 같은 것은 끊임없이 변하겠지만. 농구선수로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서태웅은 계속 달라지겠지만.
윤대협이 가르친 것들은. 모르는 줄도 몰랐던 것들을 끝내 알아 버리는 과정은. 서태웅 고유의 것이 되어 버린 성장하는 방식과 사랑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는다.
그 모든 과정이 새파란 청춘이었음을. 청춘의 한가운데 있던 서태웅은 전혀 알지 못했다. 결국 언제나와 같은 방식으로 알게 되었다. 시간이 조금 흘러서야. 누군가의 눈동자를 가만히 집중해서 바라보는 순간에.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 벼락같이 떠오르면서.
윤대협이 곧 나의 청춘이었구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장면을 지극히 청춘의 방식으로 차지하고 있었구나. 지금도 변함없이 그렇고.
분명 앞으로도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