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불면의이쑤신
루카와 카에데는 미국에서도 틈날 때마다 바닷가를 뛰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해안도로에는 언제나 조거들이 많았다. 홈구장인 체이스 센터에서 가장 가까운 요트 선착장인 피어 52부터 40분 정도 뛰면 바다사자 수백 마리가 한가로이 뒹굴고 있는 피어 39. 그들의 매끈매끈한 곡선과 웃고 있는 듯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20분의 쉬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시 40분 정도 뛰면 골든 게이트였다. 포트 포인트 주차장에서 바다를 좀 더 구경했다. 미션 베이로 돌아갈 땐 처음에는 체력이 부족해서 버스를 갈아탔다. 지금은 온 길을 거슬러 뛰어갈 때가 많다.
닥쳐오는 하루하루를 몰두하며 살다 보면 어느새 먼 땅에서도 익숙한 풍경들이 늘었다. 친근한 얼굴들이 생겼다. 일상적인 언어생활이 그럭저럭 굴러갔다. 다행히 복잡한 언어보다는 몸으로 한 번 보여주고 따라 해 보는 걸로 충분히 원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루카와도 행운이 따를 땐 남기고 온 것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주로 구질구질하거나 답답하거나 허전할 때 고국이 떠올랐다. 맛대가리 없는 차디찬 맨밥과 비린 김에 생선쪼가리 하나 말아 놓고 스시라면서 비싼 돈을 받아먹는 레스토랑에서. 경기 중 소음 때문에 코치의 흥분한 빠른 말투를 잘 따라갈 수 없을 때. 눈이 내리긴커녕 반소매를 입고 다니는 어느 누구의 옷장에도 털목도리 같은 건 없는 겨울날. 입학 명단에서 제 이름을 찾아도. 드래프트에서 제 이름이 불린다 해도. 스타팅에 제 이름이 있다고 해도. 자리를 받았고, 허락을 구했지만. 그럼에도 존재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질 때.
루카와는 두고 온 바다를 생각했다. 매일 자전거로 달리던 그늘이 없는 길. 햇살이 별처럼 부서지던 곳을. 조깅 코스를 해안으로 잡은 건 조금이라도 바다에 가까이 있고 싶어서였다. 이대로 태평양을 건너가면 닿을 곳에.
가끔은 외롭지 않을 때도 과거를 생각했다. 친해진 사람들이 루카와에 대해 물을 때. 어떻게 자랐는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예전에는 어떤 농구를 했는지...
고향이 그립지는 않은지.
그때마다 루카와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가장 소중했던 시간이라고 하면, 가장 성장했던 시간이라고 하면, 가장 생각나는 사람이라고 하면.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했던 얼굴이 있었다.
어떻게 생겼더라. 어떤 목소리였지. 나를 보면 활짝 펴지던 얼굴. 나에게 말을 거는 말투. 농구를 하다 보면 흐트러지던 숨. 약간 더 큰 키. 절대로 밀리지 않는 팔다리. 그때는 그에 대해 그런 사소하고 디테일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숨 쉬는 법에 대해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듯이. 고향에는 바다가 있었고, 농구가 있었고, 학교에 다녔고, 그 녀석이 있었다.
더위도 잊고 미친 듯이 농구를 하다가 주저앉아 숨을 몰아쉴 때면 그는 벽에 기대거나 벤치에 걸터앉거나 루카와처럼 바닥에 주저앉는 대신에 미묘한 위치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루카와도 어느 날엔 불현듯이 깨닫게 되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는 걸. 자신을 위해.
센도 아키라는 그런 사람이었다. 잘 웃고, 늘 여유롭고, 친절하고. 그 너머가 있는지 궁금하게 만들었던.
루카와는 센도가 왜 자신을 상대해 주는지 끝까지 알지 못했다. 왜 더울 때마다 그늘을 만들어 주고. 선배랍시고 음료수를 사 주는지. 그냥 그런 사람이라서? 잘 웃고, 늘 여유롭고, 친절하고. 모두에게. 단순히 루카와가 그 누구보다 눈치 없이 사양 없이 팍팍 다가갔을 뿐.
센도의 친절함, 자상함, 여유, 농구 실력, 미소. 루카와는 그런 것에 매일 새롭게 감탄했다. 그건 고향의 바다만큼이나 눈부셨다. 그래서 가끔 그리웠다.
정작 센도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하고 와서 다행이다.
센도를 떠올릴 때마다 루카와의 결론은 그랬다. 그를 이기고 싶어서 깨어 있는 모든 시간에 머리를 싸매고 작전을 연구하던 1학년 1학기 때 이후로, 루카와가 센도 때문에 고민했던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어떻게 작별하면 좋을지.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센도가 루카와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아니 애초에 전해야 할지...
루카와는 말하지 않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떠날 거니까. 마음마저 남겨 두고 오고 싶진 않았다. 짐이 될까 봐 무섭다기보다는 돌아보기 싫었던 이기심에 가까웠다. 어느 쪽이든 루카와는 순간적인 감각을 언어로 붙잡지는 못했다. 깔끔하게 등 돌리고 싶었던.
그럼에도 루카와는 카나가와 마지막 밤을 센도의 방에서 보냈다.
그런 기억이 있어서 좋았다. 결국 타지에서 버팀목이 되어 준 건 마음속에 간직한 보석들. 그때는 당연했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찬란하기 그지없는. 제일 익숙했던 것. 제일 편안했던 것.
제일 좋아했던 것.
센도 아키라가 다니는 회사는 매년 시무식을 12월 25일에 했다. 표면적으로는 악취미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었지만 사실은 대표 이하 전원 점심 회식 후 해산이다. 남들보다 일과를 일찍 끝내고 느긋하게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낮술 좋아하는 임원진 덕분이라고 사원들은 출근부터 싱글벙글이었다. 원래는 다섯 시부터 영업 시작인 단골 술집을 열두 시부터 전체 대관했다.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센도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고만 있어도 끝없이 누군가 말을 건다. 인사하고, 덕담 듣고, 술을 주고받고. 앞에 앉은 얼굴이 계속 달라진다. 그때마다 싱긋 웃어주었다. 잔을 들고 여기저기 테이블을 돌 정도로 사교에 힘쓰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센도는 사내에서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테이블엔 후배들만 남았다. 평소 센도를 좋게 보며 따르는 편한 녀석들이다. 그렇다고 딱히 친한 건 아니지만. 두런두런 떠드는 소리를 배경 삼아 맥주잔을 홀짝인다. 벌써 적당히 마신 동기 하나가 비어있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잔을 기울이길래 마주 대줬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여어, 인기남. 건배하자고.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끝나면 그녀와 러브러브 시간이냐? 부러워 죽겠다."
센도가 맥주잔을 다 비우고 어깨를 으쓱했다.
"헤어졌는데."
"엥? 벌써?"
"진짜요?"
"또?"
물어본 당사자뿐 아니라 테이블 전체의 요란스러운 리액션에 센도는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눈치 좋은 누군가가 생맥을 두 잔 더 시켰다. 날 잡았다는 듯이 캐묻는다.
"그... 긴 생머리. 맞지? 회사 앞까지 찾아왔던..."
센도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그다음 주에 헤어졌어. 다른 사람."
"와... 그거 두 달 전이죠? 역시 센도 주임님..."
"몰라. 기억 안 나."
"크... 나도 이런 대사 해 보고 싶다. 몰라. 기억 안 나. 너무 많이 만나서 누구랑 언제 헤어졌는지!"
왁자지껄 웃음이 터진다. 센도도 따라 하하 웃었다.
"그냥 시간이 너무 빨리 가네."
"그러게요. 벌써 연말이에요."
"센도조차도 크리스마스에 솔로라니 아직 희망이 있다."
"미혼 여성들에게나 희망이 있는 거지 선배가 왜요?"
"시끄러~"
"이거 또 소문 퍼지면 센도 주임님이랑 다리 놔 달라는 여사원들 줄 서겠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드는 육식녀들 분명히 있을걸..."
"부러워..."
센도가 맥주를 마시면서 손을 내저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으면 먼저 거절해 줘."
"엥? 진짜요?"
"응. 당분간은 혼자 지낼래."
"원래 거절 안 하시잖아요...?"
"웬일이냐. 너 오는 사람 안 막는 거 다 알고 덤비는 건데 이제 와서?"
"그런 거 아니야. 안 막는 게 아니고..."
센도는 곤란할 때 그런 것처럼 습관적으로 웃었다. 기운 빠진 웃음소리가 엉망이 된 술자리 테이블에 퍼진다.
"그냥... 불쌍하잖아."
잠시 테이블에 침묵이 돈다. 마른안주를 씹던 동기가 신랄하게 손가락질을 했다.
"알고 보면 얘가 제일 나쁜 새끼다. 여자들 순정을 불쌍하다고 다 받아주고 버리고."
"과연 순정이었을까..."
"육탄공세 아니었나..."
"부러워..."
센도는 못 들은 척 어깨를 으쓱했다.
"버린 적 없어. 항상 차였지."
"불쌍해서 만나 준 거면 그렇게 되겠지. 너 여자들 촉 무시하지 마라."
"그런가 봐."
센도는 마른안주를 하나 집어서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입 안을 맴도는 말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그냥 잘 안돼. 진심을 거절하는 게. 불쌍하잖아. 눈앞에서 원하는 걸 놓쳐버린 마음이. 혼자 집에 돌아갈 발걸음이. 불쌍해서라도 만나줬으면 하는 간절하고 순진한 사람도 세상에는 있어.
열두 시에 시작된 회식은 세 시가 넘어서 끝났다. 센도는 집에 가지 않았다. JR 개찰구로 발걸음을 돌렸다. 가마쿠라행 쇼난신주쿠라인 쾌속 급행. 애매한 시간대라 앉을 자리가 있었다. 머리를 창문에 기대고 덜컹이는 박자에 맞춰 아무렇게나 흔들린다. 요코하마까지는 쭉 한산할 것 같았다.
갈 곳을 잃어버린 좋아하는 마음은 어디로 갈까? 가끔씩 그런 답도 없는 질문이 들 때, 센도는 전철을 타고 바다를 보러 갔다. 다행히 도쿄에서 당일치기로 갈 수 있는 곳에 아는 바다가 있었다.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다운 바다가.
센도는 항상 연애가 쉬웠다. 즐겁지는 않았다. 사랑과는 다르다. 그 점에선 확신이 있었다. 본인은 하고 싶은 게 거의 없는 만큼 상대가 하자는 대로 거의 맞춰 주는 편이었지만. 딱 한 가지. 절대로 로맨스 영화를 같이 보진 않았다. 진부해. 그렇게 딱 잘라서 거절했다. 반응은 다양했다. 서운해하는 사람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도 다소 상처받는 사람까지도 있었다.
너는 아마 진짜 사랑은 절대로 못 하겠다. 전 애인 중 한 사람이 저주하듯 토해 놓고 간 그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진짜 사랑을 하기엔 센도는 나이를 먹어서 닳았고, 세상의 뻔함에 찌들었고, 지쳤다.
후지사와에서 가마쿠라행 에노덴을 탔다. 첫째 칸 전광판에 귀여운 크리스마스 조명이 들어와 있다. 작은 전차를 타고 가로등조차 띄엄띄엄한 골목길을 굽이굽이 지난다. 오랜만이다. 어둠이 없는 도쿄와 비교하면 정취가 있다.
차창 너머가 금방 새까매진다. 바다다.
에노시마에서 내려 한산한 내리막길을 걷는다. 편의점 두 개, 자판기 세 개, 아무도 없는 술집 두 개. 어둠 사이로 띄엄띄엄 지나가는 불빛은 그 정도. 에노시마로 건너가는 다리가 보인다. 일차선짜리 해안도로를 건너 계단을 내려간다. 항구 특유의 비린내가 코끝을 확 찔렀다.
바다는 캄캄하다. 에노시마 등대의 허연 불빛이 회전하며 검은 허공을 비춘다. 낚시터 쪽에 가 볼까 하다가 예전에 다니던 고등학교 방향으로 모래사장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왼쪽엔 일자로 늘어선 해안도로 가로등. 오른쪽엔 새카맣게 넘실대는... 태평양. 에노시마 너머의 수평선에 조금씩 반짝이는 고깃배.
칠흑 같은 밤바다. 보이는 건 규칙적으로 다가오는 파도의 하얀 끝자락뿐. 사아아, 사아아.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바람이 차갑다. 속이 뚫리는 동시에 어딘가 묘하게 막혀 드는 것 같기도 하다. 밤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파도보다 가슴 속이 훨씬 더 일렁인다. 왜일까. 술이 깬 지는 오래인데.
사실 바다를 찾을 땐 언제고 그다지 기분이 좋은 날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센도는 바다에겐 조금 치사하게 구는 면이 있었다. 말없이 무엇이든 받아준다는 점에 내놓고 응석을 부리곤 했다. 아직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잘 설명할 수 없는 어렴풋한 가슴 얹힘도 어쩌면 센도 자신보다 바다가 더 빠르게 눈치채고 있어서.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는 것 자체가 무언가의 징후인지 모른다.
좀 내려볼까. 센도는 모래사장에 멈춰 서서 담뱃불을 붙였다. 바닷바람에 라이터 끝의 연약한 불꽃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둠 속에 잠깐 센도의 얼굴이 환해졌다가 사라진다. 새빨간 점 하나로 타들어 간다. 깊이 들이마셨다가 코로 내뿜는다. 어깨에서 저도 모르게 힘이 빠졌다.
센도는 그대로 한참 바다를 보며 담배 하나를 다 피웠다.
두 번째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을 때.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에 무언가 새로운 패턴이 섞였다. 파도와 달리 점점 커진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처럼. 탁, 탁, 탁, 탁...
누군가가 모래사장을 박차며 달리는 소리였다. 이쪽을 향해 점점 가까워진다. 키가 훤칠하다. 너무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데...
"센도?"
루카와 카에데였다.
센도는 입에 문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밤의 장막 속에서 걸어 나온 센도의 첫사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센도는 자신이 지어야 할 표정을 빼앗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담배 한 개비로 간신히 힘을 빼놓았던 심장 주변이 다시 긴장으로 삐걱거린다.
이상하게 짜증부터 치밀었다. 다시는 만나지 않는 편이 아름다웠을 텐데. 특별히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었던 것도 아닌 주제에 센도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안녕. 오랜만이다."
그런데 너는 아직도.
"잘 지내?"
전히...
센도는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꼈다. 시간이 왜곡된 것 같았다. 10년 뒤로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루카와 카에데가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 온다. 어제 만났던 사이처럼. 당장이라도 이 근처 어딘가의 농구 코트에서 신나게 일대일을 붙을 듯이. 그런 반면 입에 담는 단어는 다른 사람들처럼 너무나도 평범하게. 붙여오는 말조차도.
순수하고 철없고 어린 센도 아키라가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
발밑이 갑자기 사라지는 듯한 착각에 센도가 휘청였다. 장초를 쥔 손 뿌리로 눈두덩이를 꾹 누른다. 구역질이 치민다. 그대로 센도는 잠시간 평형감각을 찾으려고 애썼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데. 그렇다면 만나지 않는 편이 아름다웠을 텐데.
"괜찮아?"
걱정스러운 중저음이 생각보다 너무 가까이서 들렸다. 센도는 다가오는 루카와의 손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쳐내버렸다. 그 때문에 상기하고 싶지 않았던 체온까지 선명하게 닿아버렸다.
허공에 어설프게 손을 든 채로 루카와가 정지했다. 센도는 무심코라도 속입술을 깨물지 않기 위해 억지로 입술을 펼쳐 미소를 지었다. 굽혔던 허리를 펴면서 목을 가볍게 흔들어 스트레칭한다. 몰래 목청을 작게 다듬고. 할 수 있는 한 매끄럽게. 웃음을 섞어가며 말했다.
"괜찮아. 잠깐 누군가 했어. 유령이라도 본 줄 알았네."
루카와가 얼굴을 말끄러미 찌푸렸다.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센도는 긴장을 거두지 못했다. 초조함을 감춘다. 평온함을 가장한다. 루카와의 무반응을 틈타 들키지 않는 선에서 가만가만 심호흡을 한다. 지금은 타임아웃이 필요하다.
루카와가 입을 열었다. 놀라울 정도로 서투르게 더듬더듬 설명을 늘어 놓는다.
"나... 루카와 카에데. 쇼호쿠 고등학교 농구부였고..."
"알아."
센도는 끝까지 듣지 않고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또다시 짜증이 울컥 솟아서. 센도는 뱃속에서 술렁이기 시작한 뜨거운 무언가를 가라앉히기 위해 주먹을 꾹 쥐었다. 제 손바닥에 느껴지는 손끝이 퍽 차가웠다. 기억을 못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너를. 기억을 못할 거라고...
루카와는 말을 끊었다며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한 표정이었다. 잔인할 정도로 무구하다. 어깨를 작게 돌려 버릇처럼 스트레칭을 한다. 윈드재킷과 레깅스로 피부가 드러나지 않도록 잘 감싸인 팔다리에서 솟아오르는 러닝 후의 하얀 열기가 까만 밤 속으로 퍼져 나간다.
"잘 지내?"
두 번 건네진 인사가 이상할 정도로 정중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도 깍듯하게 작별을 말했었지. 그런 걸 기억하는 건 나뿐이겠지만. 센도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무장한다. 있는 힘껏 여상한 태도를 갖춘다. 혼신을 다해 무의미한 대답을 찾는다. 엄청나게 기운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그럭저럭."
그 따위 대답에도 루카와는 눈에 띄게 안심하는 표정을 짓는다. 센도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릴 수도 없는 것이 더없이 피곤했다.
센도는 루카와에게 마주 묻지 않았다. 잘 지내냐고. 다른 것도 묻지 않았다. 어디서 지내는지. 여전히 농구를 하는지. 연인은 있는지. 그땐 어디로 갔던 건지. 지금은 왜 돌아온 건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는지. 혹시 너도 나를 한 번쯤은...
바보 같은 질문들. 끝도 없이 꼬리를 문다. 파도처럼 쉬지 않고 밀려온다. 센도는 해일 같은 무의미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런 질문을 다시 꺼낼 수는 없다. 떠올린 것만으로도 소진될 지경이다. 이제 와서.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던. 그 집 앞을 우연히 지날 때마다 담벼락 위에서 아무도 모르게 시들어가는 하얀 카라 다섯 송이를 훔쳐보았던. 언젠가 그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순진한 기대와 간절한 기도 속에 버려진. 사랑을 할 줄 알았던. 고등학생 센도 아키라가 불쌍하기 때문에. 의미 없는 질문들로 어린 그의 마음을 파헤칠 수는 없다.
센도는 이제 고등학생이 아니다. 10년도 넘게 만나지 못한 루카와보다, 닿지 못할까 봐 혹은 원치 않을까 봐 두려워서 어디서 뭘 하는지 먼저 섣불리 알아보지도 못했던, 한때는 그 정도로 소중했던 루카와보다. 과거의 자신이 더 소중했다. 그쪽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쪽을 지켜주고 싶었다. 함부로 헤집어지지 않도록.
고요 속에 파도만이 쉴 새 없이 호흡하고 있었다. 센도는 정적을 깨기에 적합한 타이밍에서 입을 몇 번 열었지만. 이내 그대로 닫았다. 루카와는 묵묵히 센도를 바라보았다. 센도는 루카와를 보지 않았다. 서로의 발끝 사이에 어색하게 벌어진 모래사장에 시선을 못 박았다.
루카와가 갑자기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고마웠어."
센도는 손을 잡지 않고 바로 되물었다.
"뭐가?"
약간은 날카로운 어조였다. 드디어 정면으로 마주친 루카와의 얼굴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10년이 지났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대로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목과 어깨선이 굵어지고 키도 커졌다. 전반적으로 날씬하고 단단해진 루카와가 아직도 통통하게 남아있는 하얀 볼살을 우물거리며 두서없이 중얼거린다.
"전부 다. 농구... 같이 했던 거. 그냥... 같이. 그때..."
내밀었던 손을 거둬 여전히 뒤통수를 길게 덮는 머리칼을 긁적인다.
"타지에서 지내면서 계속 생각났어. 고마웠어."
루카와가 다시 오른손을 내밀었다.
"다시 만나면... 꼭 말하고 싶었어. 고맙다고."
사아아, 사아아, 사아아. 멈추지 않는 파도 소리가 들린다.
센도는 끝까지 그 손을 잡지 못했다. 바보 같은 두려움 때문에. 힘 있게 마주 잡아 올 것이 뻔한 그 따스한 손을 맞대면. 애써 옅어졌던 과거로 빨려 들어갈까 봐. 이미 두려움이라는 과거의 감정이 다시 오고 있듯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그 무엇도 그렇게 두렵지도 신경 쓰이지도 않았는데.
다 감추기 위해서 센도는 웃었다.
"뭐 그렇게까지. 서로 좋은 추억이지."
루카와는 허공에 덩그러니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센도도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도 잡아주지 않은 하얀 손. 어딘가 카라 꽃을 닮았다고 센도는 생각했다.
루카와가 텅 빈 오른손을 꾹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익숙한 모양으로 벌어지는 입술.
"안녕."
센도의 마음에서 무언가가 부서졌다.
완전히 같은 작별을 던지고 루카와는 돌아서서 뛰어간다. 모래를 박차며 까만 해변에 바느질하듯 발자국을 줄줄이 새긴다. 빠르게 작아진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갑자기 손가락이 따끔거린다. 담배가 손에 닿을 정도로 타들어 가 있었다. 내내 쥐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센도가 화들짝 놀라서 꽁초를 떨어뜨렸다. 두 번도 빨지 못한 담배가 허무하게 모래사장에 묻힌다. 발로 짓이길 힘조차 남지 않았다.
센도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칠흑 같은 허공을 펼쳐 놓은 밤바다를 응시했다. 전 애인 중 한 사람이 저주하듯 토해 놓고 갔던 말이 파도 소리에 섞여 환청처럼 들린다.
너는 아마 진짜 사랑은 절대로 못 하겠다.
다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