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암의 꽃 9
불면의이쑤신
보송이 근데 갑자기 뭐지
그러게 수상하네 무슨 루머 있나?
그럴지도 저분 서치천재 아님? 중웹에서 이상한 소리 나왔나
근데뭐... 연애썰도 아니고 친구면 별일 아닐듯
ㅇㅇ 어그로 축에도 못낄듯
그럼 다행이고
팬에서 친구에서 연인으로? 갓직히 맛있는듯 보송 와꾸라면 쌉가능
진짜저언니저소리저기서할까봐내가얼마나심장이쫄렸는지아냐고요제발자제좀하라고요꼽주고싶어서그런게아니고나는진짜쫄보라서찐으로쫄린다고요
아 미안합니다 공식 사과 드림 기침과 감기와 알페스는 숨겨지질 않네
근데 너도 저 언니가 별말 안했는데 미리 단속하는 거 보면... 사실상의 뇌일치 아니야? 이미 자발적 댑보러가 된 거 같다
헐
미친 그러네
ㅅㅂ 반박하고싶다 댑보라이팅 제대로 당한듯
아군이 보내는 사랑의 매였던 거야? 나도 사랑해 댑보 영원해
사실 보송이가 드디어 순덕 집어치우고 친구드림이라도 시작했다든지
하 5년 순덕질 끝에 잡은 드림이 친구??? 그건 좀 귀엽다...
여기 이제 그냥 다 댑보러인거 같은데 인정하고 광명찾자
나 지금 감격해서 조금 눈물 나오는데 너무 씹덕같지
보송아 데뷔 루트를 잊지 마 우리를 합법적 알페서로 만들어주라
그래 시야 가리지 말고 무대로 꺼진 다음 윤대협이랑 친구를 하든 애인을 하든 노오력을 해봐
그럼그럼 데뷔전부터 친구면 계속 친구먹어도 괜찮은거 잊지말고! 악법도법이고 덕친도친구다
악연도 연이다...
쉿
윤대협 최애 8인에서 어느새 어둠의 댑보단 8인이 되어버린 단톡방 멤버들의 행복회로와 정반대로. 서태웅은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윤대협의 친구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강경하게 나갈수록 위험 요소가 크다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윤대협은 물러설 줄 모르는 초 공격형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올라운더다. 전화번호를 차단하면 인스타 디엠을 하고 인스타도 씹으면 인스타 라이브를 갈긴다. 인스타 라이브까지 안 들어가면 무슨 짓을 하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 서태웅은 소름이 돋았다.
애초에 서태웅은 이 정도로 시뮬레이션을 돌려 가며 타인의 반응을 예측하려 애써 본 적이 없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런 걸로. 타인의 선택은 타인의 몫. 서태웅은 본인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만 하면 그만이었다. 다른 것엔 관심 일체가 없었다.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다. 좋은 사람은 많다. 그렇다고 좋은 사람을 모두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서태웅이 좋아하는 사람은 이전에도 지금도 윤대협 뿐이다. 그래서 윤대협은 모든 상황의 예외가 되어버렸다.
직진밖에 모르는 서태웅. 그런데 윤대협을 상대로는 엑셀이 안 먹힌다. 더 강한 충돌이 예정될 뿐이다.
그럼 차에서 내리는 수밖에 없다.
서태웅은 오랫동안 고민했고... 한 가지 결론밖에 상상하지 못했다.
윤대협의 꽃길에 방해되는 것은 무엇이든 치운다. 할 수 있는 한. 그게 자기 자신이라고 해도.
서태웅의 사랑은 그런 식이었다. 그런 방법밖에 몰랐다.
서태웅은 공개적으로 사담하는 계정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이런 결심을 말할 대상은 이 세상에 8명이 전부였다. 윤대협만큼이나 이들에게 상처 주기 싫어서 내린 결론이기도 했다. 그들이 기꺼이 대가 없이 나누어 준 우정을 원수로 갚지 않을 방법이 그 외에 떠오르지 않았다.
서태웅은 첫 공방 사녹 전날에 다시 한번 9인 단톡방에 선톡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조던님 ㅎㅇ
ㅎㅇㅎㅇ
안녕하쎄용
드릴 말씀이 있어요
네네
[귀를 기울이는 이모티콘]
[귀에손갖다댄윤대협짤.jpg]
내일 사녹은 못 가게 되었어요...
헐 ㅠㅠ
헐 진짜요 ㅠㅠ 아쉽다
오랜만에 조던 님 오프였는데 힝구
바뿌신가보다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네 회사일이 조금 바빠져서... 당분간 오프가 어려울 것 같아요
허걱
아 내일만이 아니구나 아이고
하 조던 님 없는 오프...? 너무 낯설어요 이럴수가
진짜로요 윤대협도 허전할듯 ㅠㅠ
선량한 덕친들이 눈물 흘리는 각종 이모티콘과 ㅠ로 채팅방을 빠르게 올리는 것을 보며 서태웅은 더더욱 양심에 찔리고 가슴이 아팠다. 서태웅이 그들의 최애와 불공평한 사적 소통을 몰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도 이렇게 친절할 수 있을까.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움짤봇도 업데이트 뜸해질 수도 있어요 탈덕은 절대 아니에요 그거 말씀 드리려고 했어요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하 그럼요 어딜 가요 못 보냄
ㅇㅇ 조던님도 이제 한 배를 탄 겁니다 탈출할 생각 마세요
[네? 탈덕이요? 윤대협ㅊㅈㅃ짤.jpg]
짤선정적절
따봉
나 지금 들어왔는데 이게 무슨 일?? 조던 님 바쁜 거 진정되실 때 언제든 편하게 돌아오세요 잠시 휴덕해야 더 오래 가기도 함 레알로요
맞아요 여기다 언제든 앓이하셔도 되는 거 아시죠
ㅇㅇ 안하면 저희 섭섭합니다 진짜로 삐짐
헉 알겠습니다
ㅋ ㅋ ㅋㅋㅋ 농담아닙니다. 진짜로 삐짐
ㅇㅇ 절대 농담 아님 윤대협 앓으실 때마다 여기 쓰세요
제발요 움짤 만들 시간 없으실 때 여기다 입으로 쪄주세요 제가 쪄옴
앗싸개이득
님 캡쳐했음 한입두말 허위사실유포로 고소할거임
아 조던 님이 원하신다면 당연이 할 수 있지~!!
대체 나에게 왜 이렇게 친절한 것일까? 같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서태웅은 점점 더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는 낯선 감각이 당황스러웠다. 이런 무조건적인 다정함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지금도 거짓말만 하고 있는데. 전혀 바쁜 일 없는 회사 일이나 팔아먹고.
서태웅은 한참 동안 물리적인 따스함이 느껴지는 채팅창 스크롤을 위아래로 옮기면서 메시지를 여러 번 읽었다. 어떤 구간은 캡처까지 해 놨다. 마음을 꾹꾹 담아서 천천히 네 글자를 썼다.
고마워요
그리고 채팅방 알람을 껐다. 실은 나가려고 했었는데... 덕친들의 반응을 보고 나서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냥 눈팅만 하지 뭐. 어차피 서태웅이 오프에 안 나가면 활성화될 일도 없는 카톡방이니까.
서태웅이 오프를 포기한 건 불가항력이었다. 결코 원했던 결말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프에 나가는 순간 서태웅은 눈에 띈다. 너무 띈다. 무대에서 보이지 않는 구석에만 박혀 있을 수도 있지만. 분명 다니다 보면 또 욕심이 생기고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을 것이다. 5년간 덕질 짬이 찬 서태웅은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새우젓이 되기엔 물리적으로 지나치게 크다는 점까지도.
윤대협에게서 서태웅을 완전히 차단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자연히 잊힐 것이다. 아이돌은 바쁜 직업이니까. 수많은 팬들의 찬사와 격려와 피드백 속에 금방 파묻힐 것이다. 친구가 없어도 외롭지 않게 될 것이다. 윤대협이 서태웅을 모를 때도 윤대협은 잘살았다. 실력과 매력으로 최고의 아이돌이 되었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된다. 쉬운 일이다. 서태웅만 윤대협의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서태웅은 데뷔 1년 차부터 윤대협이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또 포기해야 하는 게 있다. 윤대협에게 털려 버린 인스타 계정이다. 서태웅은 한숨 한 번 푹 쉬고 그 계정을 영구 삭제했다. 지난날의 덕질 흔적을 날리기엔 가슴이 아파 플텍 돌리고 아카이브로 쓸까 생각도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미련을 남겨서 좋을 일이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그 계정으로는 윤대협 팔로우, 윤대협 게시물 좋아요, 공식 계정 이벤트 참여밖에 안 하긴 했다. 그런 것조차 소중한 추억으로 생각하는 게 오타쿠 특징이라 문제였지만.
어쨌든 윤대협 인스타는 계속 볼 수 있다. 알계 하나 파도 되고 정 걱정되면 로그인 안 하고 웹으로 눈팅만 해도 그만이다. 서태웅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러기엔 아직 사랑이 너무 많이 남아서...
마지막으로 처리해야 하는 가장 큰 관문.
이 과제는 타이밍이 관건이었다. 금요일 밤. 서태웅은 퇴근길에 맥주를 한 캔 샀다. 바로 집에 들어오지 않고 아파트 놀이터 그네에 주저앉아 원샷했다. 그 정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핸드폰 화면 가득히 한 번도 걸었던 적 없는 번호를 띄우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간다.
받지 않는다.
그렇겠지. 바쁠 거라고 생각은 했다. 꺼져 있지 않으니 부재중은 남겠지. 술까지 마신 건 어떻게 무를 수가 없어서 잠시 우레탄을 디딘 발을 까딱거리면서 그네를 흔든다. 서태웅의 기다란 다리는 예각으로 꺾여 있어 결코 편한 자세는 아니었지만. 이토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는 시점에는 조금 불편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한 30분 있다가 다시 걸면 되려나... 1시간...? 술을 더 사 올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진동이 울렸다. 콜백이었다.
서태웅은 술맛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나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
짧은 인사에 눈에 띄게 반가움이 실려 있어 가슴이 아팠다.
"웬일이야. 먼저 전화를 하고."
"지금 통화돼?"
"잠깐은 괜찮아. 연습 중. 쉬는 시간."
그러고 보니 배경음에 삐빅, 삐빅 운동화 문대지는 소리가 들린다. 거울방 특유의 에코 섞인 목소리들도. 잠깐만. 윤대협이 그렇게 말한 뒤로는 소리들이 멀어졌다. 조용한 곳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서태웅이 바라던 바였다.
"뭐 하고 있어? 퇴근했어?"
"어."
"외로워서 전화했어?"
장난꾸러기처럼 킥킥 웃는다. 내가 지 같은 줄 아나. 서태웅은 외롭다 한들 감히 최애한테 먼저 연락할 자격은 없다. 아이돌은 팬에게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입장이라 그런 안하무인 태도를 도저히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고 자연스럽게 갑질이 되리라. 서태웅은 팬이 을이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돌이 팬에게 을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서비스 정신 투철하고 한없이 받아 줄 줄만 아는 제 최애는 그런 마음으로 일하는 것 같다고 마음대로 짐작했다.
"할 말 있어서... 전화했어."
차가운 그넷줄을 붙잡은 오른손을 꾹 쥔다. 이 순간을 위해 맥주 한 캔을 원샷했다. 여기서 물러서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오직 돌파만이 남았다.
핸드폰 너머의 윤대협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잠깐 대답을 멈췄다. 그 틈을 타서 얼른 본론을 뱉는다.
"이제 연락 못 할 거야."
"... 무슨 소리지?"
"계정 다 없앴어. 번호도 내일 바꾼다."
"왜?"
윤대협은 아주 간결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딱딱했다.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서태웅은 왠지 더 마음이 이상했다. 뭐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사실만을 제대로 전달하기로 다짐한다.
"원래 연락하면 안 되는 거니까."
"누가 그래?"
"다."
"그러니까 누구."
"내 생각에도 안 될 것 같다."
그제야 윤대협이 반박을 멈췄다. 침묵을 틈타 서태웅은 열심히 설명했다.
"이런... 수단이 있으면 안 돼. 지금도 내가 전화하면 너는 거절을 못해. 그래서 연습 시간에 방해가 되고 있다. 이게 안 돼."
윤대협이 짧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쉽게 수긍해 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기에 서태웅은 조금도 타격을 입지 않았다.
"내가 부담스러워?"
그렇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 데에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지만 다행히 전화 통화로는 전해지지 않았을 터. 서태웅은 입술을 꾹 물고 애써 해야 하는 말을 한다.
"친구... 못해줘서 미안해."
윤대협은 대답하지 않았다.
"좋은 팬도 못 되어서 미안해."
이번에는 아까보다 두 배 정도 긴 헛웃음이 들렸다. 약간 물기가 섞인 듯도 했다.
"그래도 탈덕은 아니니까... 계속 응원하고 있으니까."
"친구로서 응원해 줘요."
서태웅은 무심코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헛하고 정신을 차렸다. 전화 통화였지.
"미안해."
"미안하면 내 말대로 해 주면 되는데."
"그렇게 못 해줘서 미안."
다시 침묵. 아마 이 정도면 질렸을 거다. 서태웅도 고집으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다. 특히 최애를 위한 결정이라면 물러설 생각이 없다. 어차피 멀쩡한 속내로 하는 짓이 아니라면 더더욱 어중간하게 흐지부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을 꺼낼 때는 천하의 서태웅도 목소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지금까지 고마웠어. 진심으로."
"서태웅 씨."
"안녕."
서태웅은 전화를 끊었다.
바로 다시 전화가 울렸다. 그대로 수신 거부를 하고 번호를 차단했다.
서태웅은 비웠던 맥주캔을 집어 올려 한 주먹에 종잇장처럼 구긴 다음 쓰레기통을 향해 내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골인. 농구였다면 3점을 먹고도 남을 멋진 슛이었다.
다음 날 서태웅은 진짜로 덕질용 핸드폰을 정지시켰다. 다행히 투 폰을 쓰고 있고 소속사에 털린 건 갤럭시라 이 번호만 끊으면 됐다. 앱이나 웹 접속 자체는 개통하지 않고도 와이파이 잡아 쓸 수 있으니 덕질에는 계속 사용할 생각이었다. 저장한 적도 없는 단 한 개의 번호로부터 오는 연락을 막기 위해 차단도 아니고 아예 정지시키는 건 오바인가 싶은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한 번 차단을 풀었다면 두 번도 풀 수 있다. 서태웅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윤대협이 차단된 번호에 계속 전화를 걸어 보며 해제를 기다리는 건 생각만 해도 정말 싫었다. 아예 연락 수단이 없어지는 편이 나았다.
서태웅의 입장에선 그랬다.
최애와 덕친에게 했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서태웅은 탈덕을 할 위인은 못 됐다. 인생에 즐거움이라고는 윤대협 덕질 뿐인데. 그걸 완전히 끊고 살아갈 수 있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오프를 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다. 도파민 자극 중독은 정도가 세지면 세질수록 그 이하의 자극으로는 더 이상 채워지지 않는 법인데.
윤대협 데뷔 후 처음으로 사녹을 안 간 날. 서태웅은 더없이 무기력했다. 도파민을 빼앗긴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허망함. 이제 이런 것에 익숙해져야겠지.
그렇지만 어리석은 K팝 중독자는 자극 없음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뭐라도 대체제를 찾아 인터넷을 뒤진다... 서태웅은 덕친들의 트위터 계정을 무한 새로고침해서 기어이 미니 팬 미팅 프리뷰를 영접하고야 말았다. 가뭄의 단비처럼 아름다운 사진 몇 장.
참지 못하고 단톡방에 감상도 남겼다. 아량 넓은 덕친들은 프리뷰가 아닌 무보정 본이며 편집 전 유튜브 일부공개 링크로 올려 둔 영상을 바로 전송해 줬다. 서태웅은 감격했다. 나만의 존잘님들과 관계가 유지되는 한 안방 덕질도 할 만할지도... 그런 행복회로까지 돌렸다. 극구 피해 왔던 덕질 소사이어티가 주는 안온한 종류의 자극과 행복이 윤대협 실물을 차단당한 서태웅의 황망한 마음을 따스하게 보듬었다.
덕질 자체가 끝장난 건 아니었다. 윤대협움짤봇은 건재했다. 컴백 주에 쏟아지는 본방을 실시간으로 따라잡아 직캠이 뜨면 영상을 따고 움짤을 쪘고 교차편집을 했다. 방송사 공식 계정이 올려 주는 고화질도 꼬박꼬박 다운받았다. 화면 속의 윤대협은 여전히 빛났다. 충분히 아름다웠다. 좋아하는 마음을 멈추지 않기를 잘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할까?
서태웅은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 주말. 그저 윤대협 실물 직관을 좀 빼앗겼을 뿐이고. 인스타그램 계정이 없어졌을 뿐이고. 핸드폰을 정지시킨 건 진짜로 아무런 실감도 안 났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하는 주말 내내 서태웅은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서 인생 최고로 안 하던 짓을 하고 말았다.
바로 강백호에게 전화 걸기.
"뭐여? 이거 여우냐? 폰 번호 저장했는지 검사하냐?"
"멍청하긴..."
"아니 이건 뭘 잘못 먹었나 왜 갑자기 전화해서 시비야! 죽을래?!"
"됐고... 고기 먹을래?"
"엥?"
"고기 먹자고."
"니가 삼?"
"응."
"콜."
서태웅은 거기까지 듣고 전화를 뚝 끊었다. 강백호는 싸가지 없다고 욕을 욕을 하면서도 1분 안에 단골 고깃집 주소를 보냈다. 하필이면 상암동이다... 맞다 이 자식 약혼자 직장 따라 상암동으로 자취방 옮겼지. 깜빡하고 있었다. 투덜거리면서 나갈 채비를 한 서태웅은 지나치게 익숙한 지하철 루트를 따라 이동한다.
"너 살 빠졌냐?"
보자마자 대뜸 하는 소리다. 물론 서태웅이 다이어트를 한 건 아니다. 그냥 오프 덕질 끊으니까 할 일이 너무 없고 잡생각은 많아져서 건강하게 이겨내 보고자 아침저녁으로 운동 루틴을 부활시켰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매일매일. 먹는 양은 특별히 변화는 없다. 딱히 입맛이 좋은 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체지방은 쑥쑥 빠지고 근육이 더 단단하게 올라붙었다. 살이 빠졌나...? 무게는 아마 늘어났을 것이다. 서태웅은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 씹었다.
"고기나 시켜."
"하 여우 자식이 잔소리 안 해도 시킨다 시켜~ 오늘 통장 거덜 날 준비 단단히 하라고"
강백호는 우렁차게 누나 여기 삼겹살 5인분 목살 5인분을 외친다. 대체 어디서 배운 넉살인지 들어가는 식당마다 누나부터 찾는다. 서태웅은 진저리를 쳤다. 옆에서 얼른 작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거랑 참이슬 빨간 뚜껑 세 병 카스 네 병이요."
강백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술 마시게?"
서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백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흠. 묵묵히 입술을 쭉 내밀고 빈 불판을 노려본다. 그래도 고기가 오면 잘 굽는 놈이다. 서태웅은 오늘 손 하나 까딱할 생각이 없었다. 강백호는 능숙하게 소맥을 말아서 서태웅 앞에 내려놨다. 서태웅은 건배도 안 하고 쭉 들이켰다. 당연히 강백호는 쌍욕 했다.
하지만 세 잔 연속 원샷했을 때는 아무리 서태웅 앞 강백호라도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물잔을 내밀었다.
서태웅은 강백호에게 아무 말도 안 했다. 설명해봤자 알아들을 놈이 아니었다. 무익한 노력에 기울일 에너지가 없었다. 다만 짠도 없이 세 잔을 연거푸 원샷했더니 강백호가 그때부턴 건배 없이 술 마시지 말라며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기에 묵묵히 불판 위로 잔을 내밀었다. 강백호는 세 번에 한 번만 잔을 부딪쳐줬다. 서태웅은 얌전히 건배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한 번 부딪히면 여지없이 원샷을 했다. 그걸 멈출 방법까진 생각나지 않았던 강백호는 저거 저거... 하는 표정으로 안타깝게 쳐다보기만 했다.
강백호는 자초지종을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말해줄 놈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진실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지긋지긋한 우정을 이어 가는 두 사람은 서로를 제법 잘 알았다.
서태웅은 혼자 폭주하고 혼자 취했다. 내버려두면 바닥을 기다란 전신으로 다 쓸고 다닐 것 같은 핵폭탄급 진상 만취였다. 강백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하얀 귓전에 이 새끼 저 새끼 여우 새끼 욕을 퍼부으면서도 차마 버리고 가진 못하고 서태웅을 들쳐 업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강백호는 그렇게 안 보여도 잔머리를 미친 듯이 굴리고 있었다... 이 여우 자식이 이렇게 술 퍼마시는 건 태어나서 처음 보는데. 생각해 보니 먼저 고기를 산다고 한 것부터 수상하다. 그 때 의심해야 했는데. 이런 진상 뒤치다꺼리에 쓰일 거라고!!!
여우 자식 남들보단 좀 크다고 해도 이 천재보단 작다. 거기다 허약하게 살까지 빠져서 아주 깃털처럼 가벼...우면 얼마나 좋았을까. 젠장. 팔다리는 또 쓸데없이 길어 가지고 겁나 거치적거리네! 투덜투덜거리면서도 강백호는 착실하게 지하철을 탔다. 아무 말 없이 빠르게 마시고 빠르게 취한 덕에 아직 대중교통이 멀쩡히 다니는 시간이었다. 택시비 따위로 여우 녀석한테 고기 뜯은 값에 물타기를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서태웅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고깃값을 뒤집어씌운 복수를 단단히 했다. 강백호 앞에서 먹은 걸 다 보여주는 방식으로...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두 번 토한 서태웅한테 그것도 친구라고 편의점에서 산 헛개수까지 반병 정도 물려 놓은 강백호는 기진맥진했다. 이젠 업을 힘이 없어서 대충 어깨만 걸치고 간다. 서태웅도 게워 내고 나니 정신이 좀 돌아오는지 아까보다는 제 발로 걷는 편에 가까웠다.
하 너무 멀어. 그냥 자취방에 던져 놓을걸. 아니야 그러다 밤에 야근 끝난 소연 씨라도 오면...! 강백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본인 집에 떨구는 게 최적의 전략이었다. 역시 천재.
익숙한 아파트 입구가 다가온다. 끝이 보이는 환희에 강백호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현관문 앞에서 비번이 뭐였더라 그냥 초인종 누를까 부모님이 놀라시려나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서 이상하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태웅이 형."
윤대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