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추럴 시크릿
불면의이쑤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7월이었다. 울릉도 앞바다는 차갑고 맑았다. 동해바다 특유의 가파르게 깎인 모래톱 때문에 해변에서 다섯 발자국 들어가면 187cm 서태웅의 가슴팍까지 깊어졌다. 부모님과 휴가를 온 아이들은 발 안 닿는 깊은 곳이 무서워 거품이 백사장에 부서지는 경계선에서만 놀았다. 제법 거센 파도가 아이들을 데굴데굴 굴리면 꺄르륵 높은 웃음소리와 즐거운 비명소리가 화음처럼 터졌다.
그러다 갑자기 수심이 낮아졌다.
서태웅은 가만히 물속에 서 있었다. 그런데 바다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파도보다는 느리지만 조수 간만보다는 빠르게. 거대한 물의 흐름이 수평선 쪽으로 빠져나가며 서태웅의 다리를 뭉근하게 잡아당겼다. 발바닥을 땅에 딛고 있던 서태웅은 그 힘을 못 이기고 무릎을 꿇었다. 해저의 돌에 부딪혀서 무릎이 까졌다.
누군가 아이 이름을 불렀다. 튜브를 낀 어린아이가 쓸려 내려가고 있는 게 보였다. 서태웅은 땡볕 아래 드러난 해저에 무릎 꿇은 채 생각했다. 목소리 없이 강하게 외쳤다.
안 돼.
돌아와.
누구한테 말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본능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아이가 속수무책 떠내려가고 있었다.
안 돼. 돌아와.
놀랍게도 아이는 정말 돌아왔다.
딱 튜브만 한 한 줄기 파도에 실려 서태웅 앞으로 배달됐다. 눈을 꿈뻑이며 얼떨결에 아이를 안아 들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등을 토닥여 백사장 쪽으로 내려놓아 준다. 곧 바닥을 구를 듯한 스피드로 튀어나온 부모가 아이를 받아 갔다.
파도는 어느새 저 멀리 멀어졌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물이 빠졌다. 시꺼먼 동해바다의 뱃속이 몇 km는 족히 드러났다. 은빛 멸치 떼가 돌과 모래가 섞인 바닥에서 햇살처럼 튀고 있다. 이런 건 처음 본다. 서태웅은 묵묵히 초현실적인 풍경을 바라본다.
뒤쪽에서 간절하게 부르는 외침이 들린다. 학생, 청년, 빨리 이쪽으로 와! 누가 봐도 이상 현상인지라 모두 영문을 모르고 대피 중인 것 같았다. 차마 위험을 무릅쓰고 서태웅이 있는 곳까지 오는 사람은 다행히도 없었다. 익숙한 가족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잘 피했군. 그럼 됐어.
사이렌이 울린다.
멀리 물의 벽이 보인다.
바다가 후퇴한 거리만큼 수직으로 솟아서 다가오고 있다.
시퍼런 물의 장벽이 해를 가리며 머리 위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서태웅은 어둠 속에서 일어섰다. 백사장보다는 한층 거친 모래바닥이 밟혀 발바닥이 따끔따끔했다.
절대 안 돼.
해일에 맞선 서태웅이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조금이라도 깜박이면 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승부를 시작해 버렸다. 하지 않는 선택지가 없다. 주먹을 꾹 쥐고 강하게, 간절하게, 전심전력으로... 명령했다.
멈춰.
서태웅의 전신에서 발생한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고자기장이 빠르게 공간을 가로지른다. 피부 표면의 솜털 사이에 미세한 정전기가 튀듯이 따끔거리고 머리털이 일어선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뇌부터 꼬리뼈까지 맑음으로 가득 찬 듯한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아주 깨끗해진 머릿속에 선명하게 멈춰 서 있는 파도의 모습을 그린다.
해일이 천천히 멈췄다. 서태웅은 한 번 더 이를 꽉 물었다.
돌아가.
10층 건물만큼 높은 파도 꼭대기를 눈알이 빠지도록 노려보며 거기서부터 반대쪽 방향으로 서서히 넘어가는 모습을 리얼하게 상상한다. 마치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아니 보인다. 점점. 진짜로. 파도의 방향이 바뀐다...
한 번 방향을 바꾼 해일은 밀려올 때처럼 천천한 듯이 실제로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물이 빠졌던 속도대로 다시 스멀스멀 돌아온다. 태평양으로 밀려 간 수량이 너무 많아 서태웅이 있는 곳까지 물이 차진 않았다.
전신에서 긴장과 힘이 일시에 사라졌다. 서서히 빠지는 게 아니라 툭 끊어진다. 서태웅은 그 자리에 얼굴부터 쓰러졌다.
몇 시간이 지났다고 느꼈는데 실제로는 10분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고. 나중에 윤대협이 알려줬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7월이었다. 윤대협은 연날리기처럼 생긴 플라스틱 릴 낚싯대에 돌돌 말린 낚싯줄을 울릉도 바닷가 바위 틈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길고 튼튼한 낚싯대가 아니라서 바로 손맛을 느낄 수 있는 방식이다. 크진 않아도 재미있는 고기들을 제법 만났다. 삼십 분 전에는 쪼그마한 우럭 새끼를 잡았다가 놔줬다.
릴을 손에 쥔 채로 너른 바위 위에 엎드렸다 누웠다 하면서 바다에서 노는 아이들을 구경했다. 날씨도 좋고 바다도 예쁘고 고기도 잘 잡히고. 최고의 휴가였다.
그러다 갑자기 낚싯바늘이 훅 하고 허공에 떴다.
윤대협은 낚싯줄을 거두지 않았다. 그런데 바다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윤대협이 엎드려 있던 바위 앞부터 멀리 해수욕장 끝까지 한꺼번에. 위에서 내려다보니 속도감이 생각보다 빨랐다. 고요하게 역류하는 파도. 소름 돋을 정도로 부자연스럽고 기괴했다. 벌떡 일어나서 해수욕장을 살펴보니 모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바다 반대 방향으로 피하고 있었다.
한 남자만 빼고.
그 남자는 홀로 바다를 마주 보며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노란색 튜브를 허리에 낀 아이 한 명이 그 앞으로 떠밀려온다. 바다 전체가 후퇴하고 있는데. 그 아이만. 이성이 현상의 기이함을 파악하는 동시에 본능이 진상을 눈치챘다.
센티넬이다.
아이가 대피한 후에도 그 남자는 자리를 지켰다. 윤대협은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갯바위를 내려갔다. 바다가 후퇴하는 바람에 수면 아래까지 다 드러나서 지면까지 거리가 한참 높아졌다. 한참 하강하는 중간중간 목을 쭉 빼고 남자의 기행을 확인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그늘이 윤대협의 머리 위로 드리웠을 때 남자가 벌떡 일어서서 바다에 맞선다. 정면 승부.
무심하고 고요하게 다가오는 해일 앞에 남자는 상대적으로 개미처럼 작아 보였다. 그러나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는 꼿꼿한 등허리는 바다에 지지 않을 만큼 넓어 보였다.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았다. 영웅적인 뒷모습이었다.
윤대협이 드디어 지상에 발을 디뎠을 때. 해일은 작아지고 있었다. 10층 건물만큼 높이 일어선 바다가 눈에 띄게 내려오고 있었다. 아니 뒤로 돌아가는 거구나. 무너지듯 방향을 바꾸며 새파랗고 투명한 물의 장벽이 멀어진다. 올 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윤대협이 모래사장을 박차고 달려가는 동안 남자는 제자리에 얼굴부터 쓰러졌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시체처럼 엎어진 남자를 조심스럽게 정면으로 돌려 눕혀 상체를 무릎 위에 안았다. 긴 앞머리가 뒤로 넘어가 도자기 인형처럼 동그란 이마를 드러낸 얼굴에 기다란 속눈썹이 아무렇게나 뻗어 있다. 힘없이 풀린 입술에서 모래를 털어냈다. 손끝이 말랑말랑.
혼자서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한 영웅이 품에 안겨 있다. 그 어떤 파괴적인 힘에도 겁 없이 맞설 듯 든든했던 등짝이 허벅지 위에 얌전히 놓여 있다. 윤대협은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전율을 느꼈다.
지구상에서 이 영웅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가이드라서 보람찼던 순간이 지금껏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태어나길 잘했다. 환희의 충동이 윤대협의 뒤통수를 밀었다.
윤대협은 태양 아래 드러난 바다의 밑바닥에 무릎 꿇고 기적 같은 센티넬에게 입을 맞췄다. 반쯤은 경외를 담아서.
서태웅의 능력에 관한 안영수의 페이퍼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본인도 잘 몰랐던 많은 사실이 밝혀졌다.
서태웅은 물 분자를 물리적으로 조종할 수 있다. 분자 구조를 바꿀 수는 없다. 개수를 바꿀 수도 없다. 수증기를 물로 바꾸거나 물을 얼음으로 바꾸거나 반대로 수증기화하는 것은 가능하다. 빠르게 과부하를 부르기는 했지만.
당연한 일이다. 서태웅에게 주변의 온도를 바꿀 능력은 없다. 다만 물 분자의 이동 속도와 분자 사이 거리를 강제로 조정해 기체, 액체, 고체화했다. 상온에서 매 순간 액체 상태로 돌아가려는 얼음 분자의 속도와 간격을 그대로 유지하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공기 중의 수증기를 모아서 액체를 만드는 건 그보다는 쉬웠다. 단 충분히 습도가 높다면. 건조할 때는 마른 빨래 쥐어짜는 거나 마찬가지로 힘겨웠다.
안영수는 아직 서태웅의 작동 원리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늘 본질부터 꿰뚫고자 달려들었던 천재로서는 고통스럽지만 피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일단 인지와 신경의 영역이라는 것까지는 파악했다. 그런데 그 영향이 신체 내 생리현상에서 그치지 않고 세포벽을 넘어 무생물에게 영향을 끼치는 원리는 파악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가이드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자기장을 발생시켜 반자성체인 물을 조종하는 것 같은데... 그럼 분자 단위의 조종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증명하지 못한 가설이 많았으나 목 빠지게 기다리는 대통령 이하 공무원들 때문에 일단은 현재 알아낸 사실만이라도 빠르게 발표해야 했다.
초록까지 다 쓰고 학술지에 페이퍼를 넘기기 직전. 안영수는 뒷목을 엄습하는 쎄한 기운에 전송 버튼을 클릭하려다 멈췄다. 번개처럼 천재의 두뇌를 스쳐 지나가는 끔찍한 발상...
"어이 서태웅."
"응."
"너... 눈에 안 보이는 물도 조종할 수 있냐?"
서태웅이 눈을 꿈뻑거렸다. 여상한 태도로 맨날 하던 대답을 한다.
"안 해 봐서 모르는데."
지금 해 볼까? 서태웅이 물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걸 안영수가 재빨리 막아섰다. 의아함이 동그마니 떠오른 얼굴을 양손으로 딱 붙잡고 단호하게 경고한다.
"하지 마. 아니 너 그거 못 해. 눈에 안 보이는 건 못 한다고."
"그래?"
양 볼이 찌그러진 서태웅이 오물오물 반문한다. 안 해 봤는데 어떻게 아냐는 순수한 의문을 담아.
"사실 니 뇌 속 보면서 다 알고 있었어. 그냥 한 번 심심해서 물어봤는데 역시 넌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말했지. 센티넬 능력 발달은 비자율신경계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아무리 외부 물질을 조종하는 너라고 해도 시각적 인지 범위에 들어오지 않는 것까진..."
서태웅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간다. 중요한 말씀하시는데 졸고 지랄이네. 안영수의 이마빡에 힘줄이 솟는다.
"하여간 못하니까 그런 줄 알아. 따라 해. 눈에 안 보이는 물은 조종을 못 합니다."
"눈에 안 보이는 물은 조종을 못 합니다..."
"잘했다."
매끄러운 볼을 손바닥으로 톡톡 쳐 주고 해방한다. 서태웅은 머리는 나쁘지만 말은 잘 듣는다. 그거면 됐다. 태도가 경쟁력이다. 지능은 안영수한테 있으니 괜찮다.
"영수 뭐해?"
"아 씨발 깜짝이야."
갑자기 등 뒤에 드리우는 190cm 그림자. 윤대협이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 만지작거렸다고 공포 분위기 조성하는 것 좀 봐. 데려가라 데려가. 무서워서 숭늉도 못 마신다고. 안영수가 양 손바닥을 보여주며 항복한다. 서태웅이 먼저 윤대협 손모가지를 끌고 간다. 농구하자. 윤대협은 금세 싱글벙글거리면서 끌려 간다.
안영수는 운동화 끈을 조여 묶는 거대한 열여섯과 열여덟의 뒷모습을 잠시 감상했다.
서태웅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일반적인 센티넬 능력은 비자율신경계에 가깝다. 그러니까 센티넬은 위장을 맘대로 움직여서 소화를 했다가 멈췄다가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멈췄다 하는 방법은 안다. 정확히 어떻게 하는 건지 잘 설명하진 못해도.
과부하, 소위 폭주라는 현상 자체가 센티넬 능력으로 증폭되는 신경이 비자율신경계라는 증거다. 자율신경계였다면 교감 부교감이 알아서 균형을 맞추었을 거다. 아무리 열심히 숨을 참아도 죽을 때까지 의지로만 폐를 멈출 순 없듯이.
물론 처음 발달하는 순간에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전개되는 경우가 흔하지만 그것도 자율신경이라고 볼 순 없다. 말하자면 인간이 매분 매초 숨 쉬는 방법을 하나하나 의식하진 않지만, 그래도 의식에 따라서 호흡을 조절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생명현상에 국한되는 일반적인 센티넬 능력은 당연히 자신의 체내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그러나 서태웅은 다르다. 능력의 범위를 파악하는 건 중요한 이슈였다. 일단 물리적으로 자기장(추정)이 닿는 범위여야 한다는 건 알았다. 그러니까 연구소에 앉아서 보라카이 앞바다를 얼릴 수는 없다.
당연히 물리적으로 멀고 넓을수록 힘들고 과부하가 걸린다. 최대 한계치는 작은 범위에서 실험하고 계산을 통해 추정했다. 기절하거나 죽기 전까지 범위를 넓혀 보라고 할 순 없으니. 처음 폭주했을 때 일어난 해일 규모가 매우 도움이 됐다.
중요한 건 가까이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물을 조종할 수 있는지다. 이건 아직 페이퍼 내용에 없다.
사실 서태웅에게 거짓말을 했다. 이 부분은 아직 실험한 적도 진단한 적도 없다. 서태웅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물을 조종하려고 한 적이 없는데 가만히 있는 뇌 속을 들여다본다고 관련 내용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만약 서태웅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물을 조종할 수 있다면.
서태웅은 대인 살상 무기다.
인간의 몸은 60~70%가 물이다. 10%만 빠져나와도 사망하며 뇌수가 끓으면 즉사다. 5분간 심장을 지나가는 물 분자를 멈춰 세우기만 해도 된다.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서태웅이 조종했던 킬로미터 단위의 해일. 그 부피만큼의 사람들을 눈앞에서 한 번에 죽일 수 있다.
전 세계 정보기관이 서태웅을 없애려고 할 거다.
존재 자체로 위험하고 분쟁거리다. 백 년 전처럼 분단국가였어 봐라. 또는 신냉전이 지속됐다면. 지금처럼 안영수가 연구 결과 내놓기를 얌전히 기다리지도 않았을 거다. 물을 조종한다는 말만 듣고서도 혹시 모를 1%의 가능성을 삭제하려 들었으리라.
안영수는 아예 가능성을 뿌리 뽑기로 했다.
가설 자체는 그럴듯하다. 실제로 서태웅은 물을 조종할 때 시각적 인지와 머릿속 이미지에 많이 의존한다.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그릴수록 영향이 세지고 그릴 수 없는 건 잘 못한다.
애초에 동물의 세계는 인지를 벗어나기 어렵다. 시신경을 통해 들어온 '서태웅 얼굴'이라는 정보를 뇌가 '하얗다'라고 인지하기 때문에 하얀 것이다. 실존하는 서태웅 얼굴이 하얀지 빨간지는 알 방법이 없다. 적어도 뇌 과학의 영역에서는 인지가 곧 존재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인지할 수 있다. 안영수는 핏줄 속을 흐르는 피가 물과 적혈구와 백혈구와 혈소판과 다른 기타 물질들로 이루어졌다는 걸 안다. 만약 서태웅도 이걸 안다면, 눈에 보이는 듯이 상상할 수 있다면, 남의 몸을 흐르는 피 속에서 물만 분리해서 거꾸로 흐르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서태웅은 과학 상식이 거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잘 모른다. 상상력도 뛰어나진 않다. 물을 얼리거나 수증기를 물로 바꾸는 것도 그냥 요기 구석부터 천천히 얼어라, 공중에 떠다니는 수증기 내 손바닥 위로 모여라, 같은 초딩 상식 수준의 감각으로 하는 일이었다. 분자 간의 거리가 어쩌고는 안영수가 관찰한 사실이지 서태웅의 인지 속에서 의도된 게 아니다.
그래서 안영수는 가설을 검증하지 않기를 택했다. 서태웅이 한 번 그 '감각'을 알아버리면 돌이킬 수 없다. 있는 능력을 숨기는 것보다 아예 능력을 잠재 가능성 속에 묻어 버리는 편이 안전했다. 인지 단계에서 차단이다. 서태웅에게도 세상에도. 안영수는 페이퍼에 추가적으로 몇 줄 더 적어 넣었다. 시각적 인지 범위를 벗어나는 물 분자에는 영향을 끼칠 수 없음.
검증하지 않은 가설을 증명됐다고 발표하자니 평생을 지켜 온 과학자로서의 양심이 찔렸다. 그렇다고 친구를 사지로 몰아넣을 순 없다. 안영수는 과학을 버리고 서태웅을 지키기로 했다.
천재의 검토 결과 서태웅에게 고등 교육은 위험한 선악과다. 너는 그냥 평생을 무지의 평화 속에 농구공이나 튕기도록 하여라. 아무도 이 결정에 불만이 없었다. 서태웅도 안영수도 윤대협도. 역시 천재.
하늘을 빽빽이 감춘 회색 비구름이 서서히 멀어진다. 빗줄기가 옅어진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 폭탄의 경계선이었던 광활한 언덕 꼭대기에는 윤대협과 서태웅 외엔 나무 몇 그루밖에 없다.
나뭇잎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그늘 아래서 서태웅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윤대협은 서태웅을 바라본다. 종아리에서 댕강 끊어져 딱히 도움이 안 되는 비옷을 입은 윤대협. 똑같이 투명 비옷 후드를 뒤집어쓴 서태웅. 뒤통수가 지쳐 보였다.
유럽의 한 도시에 이틀간 무시무시한 집중 폭우가 내렸다. 이미 집이 떠내려갈 지경인데 비가 안 멈춘다. 서태웅이 급파됐다. 비구름을 서서히 밀어내며 흩어 놓는다. 강수량도 많지만 지나치게 국지성 호우라서 피해가 커진 터라 뽀송한 옆 동네로 슬슬 옮겨 놓는 것만으로도 피해를 복구할 여유가 생긴다.
아무리 국지성이라도 성층권은 멀고 하늘은 광활하다. 윤대협은 차라리 비행기를 띄워서 그 안에서 조종하자고 제안해 봤는데 안영수가 파일럿 시야 조진 비구름 속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뒤지고 싶냐고 쏘아붙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안영수는 틀린 말을 할 줄 모른다.
비구름을 수십 킬로미터 옮기는 건 사 개월 전 같으면 시도도 못 했을 스케일이다. 다행히 서태웅은 능력을 쓸수록 터프해졌다. 스태미나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케파가 확장됐다. 작은 강의 범람을 막는 걸 여러 번 하면 다음엔 더 큰 강을 막는 것도 보다 쉽게 해냈다.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그래서 서태웅 손목에 이식된 작은 웨어러블 화면은 백분율로 최대치를 고정한 한계치를 표시하지 않고 그때그때 발생 중인 자기장의 강도를 테슬라 단위로 표시하고 현재까지의 연속 발생 시간을 옆에 표시한다. 위험 수위다 싶으면 수치가 빨간색으로 바뀌는데 이 수위는 안영수가 매번 조절하고 있다. 서태웅이 자진 신고도 한다. 이거 고쳐 줘. 나 지난번에 빨간색 떴는데 괜찮았어.
윤대협은 서태웅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강제로 입속에 레몬맛 사탕을 집어넣었다. 서태웅은 부루퉁하면서도 잘 빨아먹었다. 윤대협은 안 어울리게 진지한 얼굴로 잔소리를 했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 그건 그냥 편의상의 표시잖아. 너한테 무리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는지가 중요해."
"어디서부터 무리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누가 알아."
불행하게도 서태웅은 진짜 몰랐다. 눈앞의 승부에 최선을 다하는 데에 탁월했으나 안타깝게도 집중력이 과해서 다른 중요한 요소를 까먹기 십상이었다. 정말 못 일어날 때까지 뛰는 농구 선수처럼. 재능은 넘치지만 아직 완급 조절을 모르는 초보자는 위태롭다. 가이드 14년 경력자 윤대협은 최적 타이밍보다 반 박자 빠르게 레몬맛 사탕을 투척하곤 했다. 서태웅한테는 그게 맞는다고 판단했다.
서태웅에게 맡겨지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것들이었다. 과부하를 무릅쓰고 꼭 해결하고 싶어지는 중요한 문제들이기도 했다. 서태웅은 능력을 과시하고 싶거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싶은 게 아니고 그냥 사람을 잘 구하고 싶었다. 최선을 다해서. 한 명이라도 더. 1초라도 빠르게. 윤대협은 서태웅의 그런 점을 지극히 사랑하는 동시에 우려했다. 과보호만 심해진다.
특히 정화가 특기였다. 제일 쉬웠다. 물만 이동시키면 물 아닌 것이 남는다. 수질오염이 심각해 마실 물이 없는데 전염병이 창궐한 오지에 국제 구호가 도착할 때까지 먼저 가서 물 정화해 주기. 유조선 터진 바다에서 수면으로 기름 모아 놓기. 고래 연구자들의 의뢰로 배 타고 나가서 아이슬란드의 빙하 사이를 누비는 벨루가에 상처 하나 없이 태깅 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물로 둘러싼 채 갑판 허공에 잠시 올렸다가 돌려 놓는 일도 했다. 꿈처럼 아름다운 일이었다.
윤대협은 고국의 다른 센티넬들을 위한 레몬맛 사탕을 한 트럭 만들어 놓고 서태웅을 따라 전 세계의 물가를 다녔다. 혹시 모른다면서 언제나 낚싯대를 챙겼다. 가물거나 오염된 지역에 갈 때가 훨씬 많았는데도. 태웅이가 깨끗하게 해 줄 테니까 괜찮아. 물고기가 돌아왔나 한 번 볼까? 그런 태평한 소리나 해 댔다. 그냥 낚시가 하고 싶은 거면서. 서태웅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는 저도 어딜 가든 농구공을 들고 다녔다.
가끔 윤대협 얼굴에 태평함과 여유가 사라질 때도 있다. 서태웅이 레몬맛 사탕만으로 버틸 수 없을 때. 한계에 부딪혀 한 단계를 뛰어넘으며 성장통을 겪을 때.
마을을 뒤덮었던 비구름이 완전히 걷히고 언덕 위로 해가 떴을 때 서태웅의 한 쪽 무릎이 꺾였다.
윤대협이 서태웅 맞은편에 털퍼덕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았다. 진창이 서로의 바지를 더럽혔다. 파래진 입술이 바들바들 떨고 있다. 윤대협이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서태웅의 비옷을 잡아 뜯고 양손을 옷 속으로 집어넣는다. 차가운 피부 위를 미끄러지는 뜨거운 손바닥에 서태웅이 움찔거렸다. 경추부터 척추를 따라 진득하게 누르면서 쓸어내린다.
생물학적 치료의 필요성과 프라이빗 한 애정 표현이 섞이는 게 싫어서 자발적으로 금기해 둔 접촉 가이딩. 중추신경계에 곧바로 꽂힌 공명이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과부하 된 서태웅의 신경계를 바로잡는다. 승모근에 긴장이 풀린 서태웅의 고개가 윤대협의 어깨에 톡 떨어졌다. 윤대협의 귓불 아래 작은 한숨을 내려놓는다. 따뜻한 숨결.
센티넬은 가이드를 치료할 수 없지만 윤대협은 가끔 치유되는 건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비구름은 꺼졌지만 서태웅의 앞머리는 아직 축축하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예쁜 이마를 보고 싶었다.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을 묵묵히 속눈썹을 내리깔고 받아들인다. 아직 완전히 기운을 차리진 못한 것 같다. 서태웅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윤대협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겹쳤다.
서태웅은 놀라서 눈이 커졌다. 기억하는 한 키스를 통한 가이딩은 한 적이 없다. 그냥 키스는 엄청 많이 했지만.
신경 다발이 몰려 있는 점막 접촉에 의한 가이딩은 빠르고 효율적인 공명을 발생시킨다. 서태웅의 센티넬 능력을 발생시키는 신경계는 지금 윤대협의 컨트롤 아래에 있다. 센티넬로서의 서태웅은 가이드로서의 윤대협에게 완전히 순종한다. 거부할 생각도 없지만. 센티넬과 가이드로서가 아니더라도.
그런데 뭔가 수상하다.
서태웅은 회복이 아닌 다른 감각을 느낀다. 뭐라고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얼굴이 빨개지고, 체온이 높아지고, 심장이 두근, 두근, 시끄럽게 뛰는 듯한 착각이 든다. 착각이 아닌가? 코 속에 뜨겁고 습기 찬 숨이 차올라 뇌까지 열이 오른다. 뭐지? 키스로 가이딩을 하면... 다 이런가? 서태웅은 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윤대협을 냅다 끌어안고 더듬는다. 비옷에 고여 있던 빗물이 찰박 손에 잡힌다.
윤대협은 등에 매달려 오는 서태웅을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며 계속 키스했고, 가이딩했다. 서태웅은 센티넬 능력 과부하는 진정됐으나 좀 다른 감각이 과부하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감이다.
잠시 입술을 떼자 서태웅이 윤대협의 가슴팍에 이마를 퍽 기댔다. 색색 몰아쉬는 숨결이 닿는다.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서로의 비옷을 벗겼다. 윤대협이 서태웅의 귀에 속삭였다.
"태웅아. 너 섰는데."
"응..."
"어떡할래?"
"모르겠어..."
"모르면 내 마음대로 해?"
"응..."
"알았어."
윤대협은 서태웅의 목덜미에 다정하게 키스했다.
그 이후로 가이딩은 필요 없었다.
서태웅은 랩으로 돌아오면 즉시 안영수를 찾을 의무가 있다. 안영수는 한계치와 관련된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웨어러블을 조정한다. 다음 실험 또는 작업 스케줄도 고지한다. 서태웅은 일부 질문에 대답하고 나면 대체로 고개 끄덕끄덕 로봇이다.
할 말 다 하고 바삐 연구실로 돌아가려는 안영수를 서태웅이 붙잡는다. 드문 일이다. 안영수는 미간부터 찌푸렸다.
"왜?"
"키스로 가이딩하면 원래 느낌이 이상해?"
"이런 씨발."
자기도 모르게 육성으로 욕을 해 버린 안영수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너네 접촉 가이딩 안 한다며?"
"비상 상황이라서..."
"이런 씨발? 아까는 그런 말 전혀 없더니?!"
"깜빡했다."
안영수가 서태웅을 한 대 패고 싶은 걸 꾹 참고 (어차피 고학력자의 주먹 따위 가렵지도 않을 것이다) 윤대협을 호출한다. 접촉 가이딩이 필요했던 비상 상황에 대해 자세히 묻고자 함이다. 상세한 현장 보고를 끌어 내기가 이 세상의 난이도가 아닌 두 사람이지만 그래도 유도 신문을 하기에 한 놈보단 두 놈이 낫지.
윤대협과 서태웅을 족쳐서 상황 파악이 거의 끝난 안영수가 이를 반영해 웨어러블의 한계치를 좀 더 조절했다. 윤대협 이 새끼 몇 주 전부터 숫자로 폭주를 관리할 생각을 버리라고 개똥철학 펼치더니 이 중요한 걸 아예 보고를 누락해?! 안영수는 분개했다. 언제나처럼.
어쨌든 서태웅의 질문에는 대답해 줘야겠지.
"가이딩이라는 게 신경계에 간섭하는 거라 그럴 가능성도 있어. 발기도 자율신경 반응이고 성감이나 오르가즘도 결국 신경 작용에 따른 호르몬 분비랑 연관되니까. 윤대협은 자기장이 무식하게 세니까 실수로 자율신경계까지 건드렸을 수도..."
안영수가 말을 하다 멈추고 윤대협의 미소 띤 얼굴을 쳐다본다. 재수 없게 잘생긴 얼굴.
"실수로 건드린 거 맞지?"
윤대협은 가만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