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密花園 1
불면의이쑤신
전 윤대협 오타쿠 아홉 명의 단톡방에 빨간색 숫자 1이 떴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충격과 공포의 완덕 파티도 벌써 지난해의 사건이었으니.
올라온 건 사진 한 장. 보송이가 보냈다. 2호선 지하철역 번화가 출구 에스컬레이터 옆을 도배한 윤대협의 제1금융권 은행 광고였다. 반가워서 찍었는데 아무도 공감해 줄 사람이 없어서 이 얼굴을 반가워할 유일한 8명에게 보낸 거였다. 아무래도 본인에게 본인 얼굴을 보내는 건 좀 이상하니까. 의리 있는 전우들은 모두 긍정적인 반응으로 반겨주었다.
훠우 잘생겼다
대협이 오랜만~ 조던 님도 오랜만이요
잘 지내시죠 조던 님 ㅎㅎ
여기 생각나서 올려주셨나봐 ㅋㅋㅋ 귀여워
네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세요
친구 얼굴 발견했다고 자랑하시는 건가요? ㅋㅋㅋㅋㅋ
악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맞네 그러고보니까 ㅋㅋㅋ
대협이도 잘 지내죠? 유튜브 잘 보고 있다고 전해주쎄여
조던 님 대협이랑 아직 친구죠? 싸운 거 아니죠?
왜싸우겠냐곸ㅋㅋㅋ
어그로 좀 끌어봤어☆
네 같이 살아요
?
??
네?
...??????
서태웅이 변했다.
서 씨네 식구들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평생 집돌이였던 막내인데 요 1년간은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다. 한참 아이돌 좋아할 때보다도 심하다. 평일 저녁 식사조차 삼일에 한 번 같이 먹으면 다행이었고 주말에는 아예 통으로 외박을 했다. 가족 단톡방에 꼬박꼬박 성실하게 올라오는 사유 보고는 항상 같았다.
친구랑 놀다 올게요
그래, 언제 오니?
내일?
그래 알았다
부모님이 알고 있는 서태웅의 친구는 딱 한 명이다. 고등학교 동창 강백호. 작년까지만 해도 분명히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다. 뭐, 학교 다닐 때보다 사회생활 하다 보니 더 가까워지는 친구 사이도 있겠지. 드문 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게 좋겠네. 대부분은 또래 사이에 죽고 살고 한다는 사춘기 시절을 고독하게 보냈던 막내아들이기에 이제라도 친구와 어울리는 데에 푹 빠져 있다는 건 오히려 보기 좋았다. 딸들은 20대 초반에 다 겪었던 일이다. 마지막 남은 자식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건 '드디어'라는 감각이 컸고 반가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자주 신세 지는 게 아닌가. 우리 애가 어디서 민폐 끼칠까 항상 걱정인 부모님은 어느 날 오랜만에 다 같이 저녁 먹는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아들, 백호네 애기 생겼다고 하지 않았어? 임산부가 있는데 주말마다 자고 오는 건 좀..."
막내는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식탁을 둘러싼 모두가 깜짝 놀랐다.
"강백호 아니에요."
표현이 크지 않은 서태웅이 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소리였다. 정신을 차린 둘째 딸이 당장 응징의 발차기를 식탁 아래로 날렸다.
"어디 숟가락을. 버릇없게."
"미안."
"직장 친구니?"
밥 위에 반찬을 올려 작은 입 안에 야무지게 밀어 넣은 서태웅은 잠깐 대답을 못하고 눈을 굴리며 열심히 오물오물 턱을 놀린다. 꿀꺽. 삼킨 뒤에도 한참 말이 없었다. 아주 작은 소리로 대답한다.
"아니요..."
백호도 아니고 직장 친구도 아니고. 그럼 대체 누구지. 부모님은 궁금했지만 더 캐묻지는 않기로 한다. 친구는커녕 인간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던 막내아들이 이만큼 가까워진 사람이라면 어련히 괜찮은 애려니. 취미생활 하다가 만났을 수도 있고. 혹시 사이비 이런 것만 아니면 되겠지. 다행히 그런 낌새는 없었다. 부모님은 사려 깊게 말했다.
"그래, 너무 민폐 끼치지 말아라."
"네."
"언제 한 번 집에도 데려오고."
정직한 막내는 또 한 번 눈을 좌우로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식탁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건 서태웅이었다. 방으로 가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이것도 변한 점이다. 컴퓨터 앞에 붙어있는 시간이 많긴 해도 집에서 핸드폰을 오래 보는 편은 아니었는데. 서태웅이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식탁에 남아 있던 둘째 딸이 중얼거렸다.
"애인 생겼나..."
부모님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애인? 태웅이가? 정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가능성이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오른손으로 턱을 붙잡고 가능성을 점쳤다(이 집 식구들의 공통적인 손버릇이었다). 전혀 상상이 안 가지만. 정말이라면... 백호와 헷갈렸던 건 대단한 실수였군.
서태웅의 부모님은 쉽게 들뜨는 성격이 아니었다. 인내심이 많은 그들은 막내아들이 스스로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는 '친구'를 소개해 주기 전까지 차분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이후 서태웅이 꼬박꼬박 성실하게 외박 사유 보고를 할 때마다 부모님은 딱 한 개씩만 상대방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언뜻 보기엔 자연스러웠으나 자세히 보면 무의식에 던졌다기엔 꼭 한 개씩인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그 친구는 혼자 사니? 그 친구는 몇 살이니? 그 친구도 개발자니? 서태웅은 그때마다 간결하게 진실만을 대답했다. 네. 저보다 어려요. 아니요. 부모님은 더 이상 캐묻지 못했다. 그렇구나...
그렇게 미세하게 정보 수집을 계속하다가. 어느 날 부모님은 결국 승부수를 던졌다.
"태웅이는 독립할 생각 없니?"
두 자녀가 모두 놀란 얼굴을 들었다. 부모님이 은퇴한 후에도 이 집에 남은 두 명의 캥거루 자녀들을 향해 한 번도 건넨 적 없는 제안이었다.
"태진이는 대학생 때 해 봤고. 태인이는 결혼해서 나가 살고. 태웅이만 안 해 봤잖니."
"우린 네가 워낙 집돌이라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요즘처럼 나가 노는 데 재미 들면 한 번쯤 혼자 살아 봐도 괜찮다. 특히 남자애들은 혼자 살아 봐야 나중에 결혼해도 가사 몫을 하지."
서태웅과 서태진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태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듣자 하니 내 일은 아니라는 무책임한 신호였다.
"생각해 보렴."
다정한 부모님의 말씀이 겨냥한 건 서태웅 하나였다. 고개를 끄덕끄덕. 그리고 정말로 성실하게 고민했다. 밥을 먹으며, 자기 전까지, 다음 날 운동하면서도 곰곰 생각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서태웅이라도 부모님의 노골적인 의중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은퇴하고 부쩍 사이가 좋아진 두 분. 일시적이어도 상관없으니 더 나이 먹기 전에 혼자서 살아보라는 제안. 어쩌면 내가 귀찮았을지도...
서태웅 입장에서도 별로 나쁠 것은 없었다. 윤대협 덕질을 그만둔 이후 서태웅은 돈 쓸 일이 없었다. 윤대협이 아이돌을 그만 둔 이후에는 더더욱. 허구한 날 윤대협 만나서 노는 것도 팔 할은 윤대협 작업실에 처박혀서 뒹굴거릴 뿐이었다. 이 할 정도 먹부림을 하거나 드라이브를 할 때도 있지만 둘 다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요 굳이 비싼 곳을 찾는 것도 아니다. 자취는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부담스러운 선택지가 아니었다. 외박 보고도 할 필요 없고. 혹시 늦게 들어오다 부모님 깨실까 걱정 안 해도 되고.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서태웅도 윤대협을 자신의 공간에 편안하게 초대해 보고 싶었다. 처음에 한 번 이후 윤대협은 서태웅의 집에 놀러 온 적이 없다. 그땐 너무 긴장해서 제대로 대접도 못 했던 것 같은데.
서태웅은 부모님께 올해 안에 자취방을 마련해 보겠다고 선언했다. 부모님은 밝게 웃으며 필요할 경우 보증금도 지원해 주실 수 있노라 등을 밀어주었다.
그들은 훨씬 큰 그림을 보고 있었다. 만약 막내아들이 일주일의 대부분 시간을 함께 보내는 그 사람이 정말 친구가 아니고 애인이라면... 자취는 그들의 관계를 확 진전시킬 것이고... 곧 좋은 소식이 들리지 않을까 하는 전략이었다.
물론 서태웅은 곧바로 '그 사람'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물었다. 자취방 구하는 법을. 서태웅의 친구 중에 혼자 사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윤대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취하려고?"
서태웅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모님이 독립해 보면 어떠냐고 하셔서."
윤대협은 침묵했다. 서태웅은 그가 머릿속으로 부동산 초보를 위한 기초 조언을 정리하고 있겠거니 기다렸다.
전혀 아니었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나랑 살래?"
서태웅의 눈썹이 물음표 모양이 됐다. 윤대협은 손에 힘을 꾹 주고 열심히 떠들기 시작한다.
"집 안 구해도 되잖아. 우리 집으로 들어오면. 나 방도 남아. 악기 작업실로 다 옮기면 돼. 원래 옮기려고 했어. 집세랑 공과금도 아끼고."
서태웅은 손가락 두 개로 턱을 붙잡고 서서히 윤대협의 논리에 빠져들었다. 호오. 과연 따지니 제법 이득이 많았다. 듣다 보면 저 집에 안 사는 게 바보가 되는 느낌이다.
윤대협은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뜸을 들였다. 서태웅을 상대로 자주 쓰는 전략이었고 실제로 잘 먹혔다. 서태웅의 손목을 잡았던 뜨끈한 손을 스윽 아래로 미끄러뜨려 손깍지를 꼈다. 서태웅의 어깨에 이마를 쿵 기대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 집에 두면 집에 안 보내도 되잖아. 난 너무 좋은데."
서태웅은 윤대협의 따끈한 손바닥을 마주 댄 채 그 말의 의미에 대해 천천히 곱씹었다. 다만 목적어는 반대였다. 윤대협을 집에 둔다. 더는 만나러 가지 않아도 된다. 눈을 뜨고 방문을 열면 윤대협이 있다. 하루의 끝이나 주말의 마지막에 헤어질 필요도 없다. 같은 집으로 돌아가니까.
심장박동이 아주 조금 빨라지는 것 같았다. 서태웅은 부모님의 독립 제안을 이득이 조금 더 많은 새로운 모험이라고 생각해 받아들였다. 이득은 제곱이 되고 모험은 윤대협과 함께 할 수 있다.
함께.
깍지 낀 손에 꼬옥 힘을 주었다.
"나도 좋아."
서태웅은 이런 말을 할 때 반드시 두 눈을 마주 본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그런 점을 정말 좋아했다.
다음 날 서태웅은 가족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독립하면 같이 살 사람이 있어요. 다음 주에 인사드리러 온대요."
부모님의 큰 그림은 생각보다 초스피드로 완성되고 말았다. 그들은 살짝 졸도하고 싶은 기분을 어른의 노련함으로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태진만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그렇게 윤대협은 서태웅의 집에 두 번째로 방문하게 되었다. 윤대협을 집안으로 안내한 뒤 서태웅은 손날로 손님을 정중하게 가리키며 말했다.
"같이 살 사람입니다."
거실에 일렬로 늘어선 서태웅의 가족들을 향해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인 뒤, 윤대협은 비장의 미소를 멋지게 선보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윤대협이라고 합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서태진만 작게 반응했다. 헐...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으나 이 집 식구 나름대로는 이런 전개를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영혼이 담긴 경악이었다.
다음으로 정신을 차린 건 서태웅의 어머니였다. 두 손으로 소녀처럼 입을 가리면서 말했다. 어머나.
"태웅이가 좋아하는 윤대협?"
윤대협은 해바라기가 개화하듯 활짝 웃으면서 노래하듯 대답했다.
"맞아요!"
"어머머! 웬일이야. 어떻게 둘이 친해졌어요?"
"그게요. 태웅이 형이 너무 잘생겨서 저희 회사에서 스카우트가 갔었어요."
어느새 윤대협 옆에 바짝 붙은 어머니가 재잘재잘 떠들면서 자연스럽게 식탁으로 손님을 안내한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서태웅은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서태웅의 아버지는 뭔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조용히 아내의 뒤를 따랐다.
그날의 윤대협은 백 점 만점에 백만 점이었다. 부모님은 TV 속에서만 보던 사람이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조곤조곤 떠들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유쾌한지 평소보다 자주 웃었다. 서태웅도 손님의 입장을 고려하여 열심히 대화에 참여했다. 가장 말이 없는 사람은 서태진이었다. 그는 윤대협에게 딱 두 번 질문했을 때를 제외하곤 입을 열지 않았다. 술 좋아해요? 연예인 친구 많아요? 윤대협의 대답은 둘 다 노였다. 서태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집으로 갈 시간. 윤대협을 바래다주려고 외투를 가지러 간 서태웅을 쫓아간 서태진은 동생의 팔꿈치에 툭 부딪히더니 한마디만 했다.
"축하해."
서태웅은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독립 축하? 윤대협과 친해진 걸 축하? 오늘 소개가 무사히 끝난 걸 축하? 모두 다인가? 누나와 동생은 딱히 그런 걸 따져 묻는 사이는 아니었다. 서태웅은 그냥 평범하게 대답했다.
"고마워."
배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까지도 부모님은 흥분이 가시지 않은 눈치였다. 번갈아 가며 윤대협을 칭찬하고 서태웅을 응원했다.
"같이 살 사람이 아주 괜찮더구나. 연예인인데도 사람이 가볍지 않고 진국이야."
"태웅이가 같이 살면서 배울 점이 많겠어. 정말 잘됐다."
"너와 잘 맞는다니 무엇보다 다행이다. 재미있게 잘 지내겠어."
서태웅의 뺨이 풀어졌다. 한 번 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서태웅은 오늘 윤대협을 소개할 단어를 아주 신중하게 골랐다. 더 이상 친구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끼리는 입 맞추지 않는다. 아무리 친구가 적은 서태웅이라도 그 정도는 알았다. 같이 살 사람. 고심 끝에 서태웅이 고른 말이었다. 태양 표면에서 폭발하는 열과 빛의 에너지처럼 찬란한 윤대협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어느새 부모님도 자연스럽게 그 단어를 쓰고 있었다. 태웅이 친구가 아니고, 태웅이랑 같이 살 사람이라고.
새로운 호칭을 고르는 건 서태웅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윤대협에게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같이 살게 된 이후, 서태웅은 윤대협의 일정에 동행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윤대협이 비즈니스 미팅만 아니라면 어디에 가든 서태웅에게도 같이 갈 생각이 있는지 묻기 시작한 것이다. 한결같이 윤대협 이외엔 일정이 없는 서태웅은 웬만하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서태웅은 윤대협이 작업하다 만난 마음 맞는 동료들의 술자리나 홈 파티에 함께 다니게 되었다. 윤대협은 언제나 서태웅의 등을 가로질러 반대편 팔뚝을 감싸면서 그를 소개했다.
"나랑 같이 사는 태웅이 형이야. 서태웅."
윤대협이 편하게 여기는 사람들답게 그들은 서태웅에게 무언가를 캐물어 보지는 않았다. 다만 윤대협에게는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가 누군가를 모임에 데려온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가까이 붙어있는 모습도 드물었다. 사실은 촌스럽게 물어볼 것도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몇 번째인가의 모임에서는 딱히 편견은 없는 대신 눈치도 같이 없는 누군가가 대놓고 묻는 불상사가 결국엔 발생하고 말았다.
"둘은 사귀는 사이?"
서태웅은 머릿속으로 그 말을 한 번 더 곱씹었다. 사귀는 사이. 아주 흔한 말인데도 낯설었다. 깜빡이는 눈동자 뒤에서 사, 귄, 다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덜그럭거렸다. 세간의 쓰임새를 알면서도 서태웅에게는 '친구를 사귄다'는 예문이 훨씬 와닿는 편이었다. 그조차 인생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윤대협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충분한 대답이었다. 머리가 나쁘지 않은 사람들은 알아서 해석했다. 물론 애초에 물어볼 필요가 있었을 정도로 머리 나쁜 사람도 있었다. 술이 제법 들어간 상황이었다.
"아니면 내가 들이대 보려고. 잘생겼잖아."
서태웅은 한층 더 무표정해졌다. 어느 날의 직장 회식이 떠올랐다. 이런 식의 허튼소리는 즐거웠던 적이 없다. 혼자만 노잼이면 괜찮은데 오늘은 윤대협이 타겟이다. 그의 기분이 걱정된다. 흘끗 서태웅의 눈길이 닿기도 전에. 윤대협은 여전히 미소 짓는 얼굴로 명확하게 대답했다.
"안돼. 내 거야."
서태웅의 눈동자가 커졌다. 일순 사람들이 왁자지껄해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전신이 충격으로 잠시 어딘가에 날아갔다 돌아오는 듯한 기분 속에 강렬한 심장박동만 또렷하게 느껴졌다. 윤대협이 눈을 살짝 내리깔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 취기가 약간 올랐는지 발그레한 볼이 유난하게 눈에 띄는 와중에 그의 또렷한 이목구비가 김 서린 창문처럼 살짝 윤곽이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진다.
서태웅은 그 이후로 술자리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본인이 한 마디도 안 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윤대협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윤대협과 서태웅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집까지 오게 됐다. 윤대협이 현관문을 닫고, 천천히 외투를 벗어서 걸고, 멍하니 생각에 잠긴 서태웅의 외투도 벗겨 제 것 옆에 걸 때까지도. 둘 다 씻고 옷 갈아입고 잘 준비를 마칠 때까지도. 서태웅은 아무 말도 없었다.
잘 시간이 됐을 때. 서태웅은 자기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윤대협의 방문 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어두운 가운데 등 뒤의 풍경보다 더욱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서태웅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윤대협은 침대 한쪽으로 물러나 옆자리의 이불을 젖혔다.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서태웅은 제자리를 찾듯이 자연스럽게 비워진 침대 켠에 비집고 들어가 모로 누웠다. 베개가 없다는 이유로 윤대협의 팔을 대신 베고서.
한 침대에서 자는 건 처음은 아니었다.
시작은 윤대협이었다. 서태웅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러 와서는 머리맡의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턱을 괸 채로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나갈 생각이 아예 없는 사람처럼. 그럴 거면 그냥 여기서 자라고 서태웅이 제안했고 윤대협은 절대로 마다하지 않았다. 두 명은 조금 비좁지 않을까 싶었던 침대도 붙어있으면 그럭저럭 잘만 했다. 어차피 서태웅은 혼자 잘 때도 옆으로 누워서 자니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나는 윤대협과 같이 살고 있구나, 가장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다음부터는 서태웅도 종종 윤대협의 방문 가에 서 있곤 했다. 윤대협은 언제나 조용히 침대 한 켠으로 물러나 이불을 젖혔다. 그러면 서태웅이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달그림자처럼 스르르 윤대협이 비워 둔 자리를 찾아 들어가곤 했다.
윤대협의 이불은 언제든 낯설다. 공기처럼 익숙해진 자신의 침대와는 감촉도 향기도 온기도 다르다. 도톰한 이불 아래 포근하게 겹친 체온 속에 있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착각이 든다. 완전히 둘만 남은 순간에야 서태웅은 물어볼 수 있었다.
"윤대협."
"응."
아주 작게 속삭여도 반드시 가 닿는 거리에서.
"내가 네 거야?"
윤대협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팔베개로 내어 준 손으로 서태웅의 보송보송한 뒷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다른 쪽 손을 더듬어서 서태웅의 손을 찾아 잡았다.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면서 속삭였다.
"아니야?"
어둠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보다 더 검은 눈동자가 보인다. 반사할 빛이 없어 푸른 공간처럼 보인다. 턱을 바짝 끌어당겨 아래에서 위를 보듯 바라보는 눈동자. 윤대협은 서태웅보다 키가 큰 주제에 가끔 그런 행동을 했다. 바짝 다가와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깊은 쌍꺼풀을 더 접으면서 올려다보기. 서태웅은 가만히 그 눈을 바라보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 질문으로 돌아온 대답에는 질문밖에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태웅은 그걸 말했다.
"그럼 너도 내 거야?"
"응."
간발의 차이도 없는 대답이었다. 윤대협이 만지작거리던 서태웅의 손을 천천히 가져다가 제 입술에 갖다 댔다. 보드랍고 따스했다. 서태웅은 약간 멍한 머리로 나직하게 확인했다.
"그래."
서태웅은 윤대협에게 잡힌 손을 끌어당겼다. 윤대협은 순순히 놔주려고 했다가. 거꾸로 서태웅에게 붙잡혀서 끌려갔다. 서태웅도 윤대협의 손가락 끝에 조심스럽게 제 입술을 갖다 댔다. 보드랍고 따스했다. 윤대협은 한순간 심장이 사라진 사람처럼 온몸이 떨리지 않도록 발끝까지 힘을 꾹 주어야 했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양손을 뻗어 서태웅의 얼굴 윤곽을 더듬는다. 어둠 속에 가지런히 내려앉은 속눈썹이 보인다.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그 얼굴에 바짝 다가가 입술에 입술을 맞댔다. 거기서는 떨림을 숨길 수가 없었다. 맞닿은 한 조각의 연약한 피부. 가장 보드랍고, 가장 따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