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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5.11.08

유사과학적 사랑

불면의이쑤신

농구선수 서태웅의 퇴근길은 아이돌 뺨치게 붐빈다. 아이돌 뺨치는 얼굴에 팀의 명운을 짊어진 에이스니까 당연한 결과다. 팀이 이기면 오늘의 영웅에게 멀리서라도 환호 한 번 더 해 주고 싶고 팀이 지면 에이씨 이렇게 된 거 서태웅 얼굴이나 보고 가자는 게 직관 온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내 팀이든 네 팀이든. 무릇 인간의 본성이란 잘생긴 걸 보면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

친위대를 자칭하는 팬들이 준 선물은 경호가 한꺼번에 모아서 거대한 봉투에 넣어 구단 버스 또는 서태웅 자가용 트렁크에 실어 줬다. 감삼다. 꾸벅 인사하고 진짜로 퇴근.

서태웅의 집은 방이 네 개다. 침실. 옷방. 피트니스 룸. 그리고 오직 선물 보관만을 위한 방. 전부 다 간직할 순 없지만 모든 걸 실사용할 수도 없으니 대체로 쌓아 둘 수밖에.

집에 오자마자 선물부터 펼친다. 혹시나 먹을 게 있으면 버려야 하기에. 너무 피곤해서 선물 더미를 통째로 방치했다가 있는 줄도 몰랐던 고급 슈크림으로부터 하나의 생태계가 창조된 걸 목격한 후로는 절대 거르지 않는 루틴이 됐다. 물론 데뷔 초에나 그랬지 요즘엔 식품 선물은 거의 없다. 서태웅은 식단이 빡센 선수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타고난 체중이 무겁지 않아 더 찌우고 싶은 타입일수록 식단은 엄격해야 하는 법.

쇼핑백은 한쪽에 착착 개어 놓고, 뜯어낸 포장은 다른 한쪽에 쌓아 놓고, 색색의 선물들은 대충 종류에 따라 분류하다가. 독특한 걸 발견했다. 상자에는 커다랗게 이런 글씨가 쓰여 있었다.

농구잘하게해주는팔찌♤♣

화려한 특수문자. 볼드, 이탤릭, 밑줄 효과. 눈을 쑤시는 듯했다. 보노보노 프레젠테이션만큼 분명한 추구미. 진한 개그 욕심이 묻어나오는 디자인이었지만 동료들 반려동물 사진에 좋아요 누르는 용도의 인스타 말고는 SNS 계정이 하나도 없어서 인터넷 밈에 전격 소외된 서태웅의 눈에는 그저 흉측할 뿐이었다.

서태웅은 왠지 더러운 것을 만지는 것처럼 (팬: 너무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꺼냈다. 넓적한 사슬 모양의 은색 금속 팔찌였다.

서태웅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게 농구 잘하게 해 주는 팔찌라고?

당연히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선물의 정체는 통칭 게르마늄 팔찌. 한때 음이온이 나온다는 둥, 면역력을 강화한다는 둥, 수상하고 비과학적인 수식어는 몽땅 가져다 수십만원을 호가하며 건강보조식품처럼 유행한 아이템. 물론 사기다. 금속이 피부 외부에 착용하는 것만으로 인체에 영향을 끼칠 리가. 몸에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다. 그냥 장삿속이다.

포장 디자인부터 그럴듯한 인증서 형식의 편지까지, 선물의 의도는 명백히 농담이었다. 은근하거나 맥락이 필요한 것도 아닌 대놓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태웅에게는 사회적으로 흔히 통용되는 유머를 캐치할 만한 SNS 눈팅 짬바와 과학적인 상식이 전혀 없었다. 편지라도 바로 읽었으면 좋았을 텐데 서태웅은 또 그건 아껴 놓는 편이었다. 비시즌 때 심심하거나 멘탈 흔들릴 때 몰아서 보는 게 가장 효과가 좋아서.

그래서 그냥 콧방귀를 한 번 흥, 뱉으며 생각했다.

난 그런 팔찌 같은 거 없어도 농구 잘해.

그렇게 한 친위대의 귀여운 농담은 완전히 실패했다. 게르마늄 팔찌는 선물 방의 선반에 처박힌 채로 영원히 잊힐 운명이었다.

그 경기까지는.


정규 시즌 54경기 중 져도 되는 경기 같은 건 없다. 하지만 그중에도 특별히 절대로 죽어도 지면 안 되는 경기 같은 건 분명히 있다.

예를 들면 오늘처럼. 라이벌팀과의 10라운드 1차전. 게임 차가 너무 적다. 남은 경기는 더 적다. 플레이오프는 확정이지만 정규 리그 우승이 걸려 있다. 사실상 미리 보는 챔피언 결정전. 져도 되는 경기 같은 건 없지만 오늘 이기면 하위권 팀과의 남은 경기는 마음이 편한 것이 사실이다. 서태웅 같은 경우엔 쉴 확률이 높다.

그런 현실적인 계산은 다 집어치우고.

서태웅은 오늘만큼은 진짜 이기고 싶었다. 작년에 이 팀한테 간발의 차로 우승을 뺏겼다. 올해는 어림없다. 반드시 이길 것이다. 무승부 그런 거 없다. 딱 1점 차이라도 좋으니까.

특히 상대방 에이스를 잡아야 한다. 서태웅의 영원한 맞수. 자존심이 걸려 있다. 작년의 서태웅까지 2인분. 시합은 일 대 일과는 다르다고, 나도 알아. 그래도 어쨌든 무조건 오늘은 서태웅이 그 자식을 이겨야만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태웅은 어두컴컴한 선물 방의 문을 활짝 열었다. 선반을 뒤지며 무언가를 찾는다. 결연한 표정으로 서태웅이 들어 올린 것은.

게르마늄 팔찌였다.

농구는 신체 접촉이 많은 스포츠다. 당연히 반지, 팔찌, 목걸이 등 자칫 잘못 휘둘러 상대를 다치게 할 수 있는 모든 금속 액세서리는 금지다. 규정에 맞는 크기와 색상의 헤어밴드, 스웨트밴드, 팔 토시나 손가락 토시, 손목이나 발목 보호대만 착용 가능하다.

서태웅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경기장을 향해 운전대를 잡은 그의 왼쪽 손목에는 은색 팔찌가 빛나고 있었다.

라커 룸을 나설 때까지도. 재킷을 걸친 채 웜업을 할 때까지도. 심지어 경기 직전 재킷을 벗을 때까지도. 서태웅을 원샷으로 잡고 있던 카메라가 신기하다는 듯이 손목을 줌인했다.

플레이 볼 직전에야 서태웅은 묵묵히 팔찌를 풀어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남아 있는 손목을 툴툴 털며 코트로 향한다. 포지션에 서서 자세를 낮춘다. 맞은편에 같은 자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숙명의 라이벌과 눈이 마주쳤다.

윤대협은 웃고 있었다.

그린 듯이 시원한 입술의 한쪽 가장자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천천히. 억지로. 아주 기묘하게. 그의 오른쪽 이마빡에는 시퍼런 핏줄이 불거졌다. 누가 봐도 웃고 있는 표정이지만 서태웅은 생각했다.

윤대협… 왜 열받았지?

곧 밟아 줄 테니 그때 빡쳐라. 태평하게 생각하며 서태웅은 다가올 점프볼에 대비해 몸을 좌우로 슬슬 흔들었다. 사냥을 앞둔 고양이 같은 움직임. 그만큼의 집중력으로 빛나는 눈동자.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니 평소보다 더 좋아 보이는 컨디션이었다.

서태웅의 몸짓을 가만히 관찰하던 윤대협은 흘끗 건너편의 카메라 하나를 살핀다. 정확히 붉은 불빛이 보인다. 자신의 얼굴과 서태웅 얼굴이 번갈아 클로즈업되어 나올 중계 화면을 생각하며 윤대협은 서태웅에게 하고 싶은 말을 입 모양으로라도 전하는 건 관두기로 결정했다. 목이 떨릴 정도로 깊이 숨을 들이켰다가 내쉰다. 안간힘을 다해 분노를 참으며 윤대협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태웅아. 장난해?

사실 윤대협도 금속 액세서리를 하나 달고 있다. 그의 왼발등 위를 엇갈리며 지나가는 농구화 끈 맨 아래에 매달린 영롱하게 빛나는 반지 하나.

서태웅과의 결혼반지다.

농구는 신체 접촉이 많은 스포츠다. 당연히 반지, 팔찌, 목걸이 등 자칫 잘못 휘둘러 상대를 다치게 할 수 있는 모든 금속 액세서리는 금지다. 규정에 맞는 크기와 색상의 헤어밴드, 스웨트밴드, 팔이나 손가락 토시, 손목이나 발목 보호대만 착용 가능하다.

윤대협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경기마다 왼쪽 신발 끈을 다시 묶었다.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서 빼낸 반지를 농구화로 옮겼다. 사랑의 증표를 지니고 코트를 뛰기 위해서.

물론 농구화에 매달아도 금속은 금속. 언제 어떻게 신체가 겹치고 밀리고 눌릴지 모르는 농구를 하다 보면 상대 팀원은 물론 자신의 팀원에게도 부상을 입힐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다. 다행히 윤대협과 서태웅의 결혼반지 디자인은 미끈하고 심플해서 겨우 리그의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 이 바퀴벌레커플염장짓거리를 하기 위하여 윤대협은 무려 리그 사무국의 허가를 받았다. 오직 서태웅과의 사랑의 증표를 지니고 코트를 뛰기 위해서. 가능성이 있다면 다소 체면을 잃는 것 따위는 윤대협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사무국의 오케이가 떨어진 날. 윤대협은 신이 나서 곧바로 서태웅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태웅아, 우리 반지 된대. 농구화는 괜찮대.”

그토록 한시도 빠짐없이 연결되고 싶었던 사랑스러운 반려자의 답변은 무엇이었던가.

“그래? 희한하네.”

결코 강요할 생각은 없었지만, 윤대협은 서태웅의 농구화에도 반지를 달아 놓을 생각이었다. 그야 이건 내 반지가 아니고 ‘우리 반지’니까. 세트여야 의미가 있으니까. 연결되고 싶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랑의 증표니까.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리그 사무국에 사상 초유의 사랑꾼 빌런 문의를 넣으면서도 유난이라는 자각조차 없었던 윤대협으로서는 그 외의 결론은 있을 수 없었다.

“너는?”

솔직히 살짝 의미심장한 어조로 이렇게 묻기만 해도 서태웅이 알아서 끄덕여 주리라는 기대를 윤대협이 안 한 건 아니다.

그러나 서태웅의 비협조는 단단했다. 남의 의견에 휘둘려 본 적 없는 전국구 마이 페이스.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 어깨를 으쓱, 한 마디로 일축.

“불편해.”

“신발인데 뭐가 불편해.”

서태웅은 아주 싫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신발 끈 다시 묶기 귀찮아. 반지에 스크래치 나는 것도 싫고. 그러다 잃어버리면 어떡할 건데.”

그러니까 생각은 해 봤다는 거네. 그 사실 때문에 윤대협은 애써 만족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윤대협이 결혼반지 끼고 경기 나갈 방법은 없을까, 신발 끈에 매다는 건 어떨까, 사무국에 한번 물어봐야겠다, 혼잣말을 늘어놓을 때는 (물론 상대의 귓바퀴에 대고 늘어놓는 말을 혼잣말이라 부르긴 무리가 있다)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사실 서태웅도 속으로는 그 옵션을 진지하게 고려해 봤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끝내 부정이었던 것은 아쉽지만. 또 거절의 사유를 굳이 뜯어보면 전부 반지를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였으니까. 애초에 웜업이랑 조는 거 말고는 루틴도 없는 애한테 너무 큰 걸 바랬는지도. 그래서 윤대협도 최종적으로는 이해했다. 아쉬움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서 갑자기 반려자의 손목을 떡하니 차지하고 나타난 넓적한 사슬 모양의 은색 금속 팔찌를 본 순간.

더할 수 없는 분노가 순식간에 머리 꼭대기까지 치고 올라간 것이다.

집에서부터 하고 나왔을 때는 그냥 멋을 부리고 싶어졌나 했다. 서로의 팀이 맞붙으면 드물게 함께 출근할 수 있는 날. 오늘은 홈 경기인 서태웅이 운전했다. 윤대협이 할 말 많은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은 그의 왼쪽 손목을 묵묵히 바라보아도 서태웅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니 애써 윤대협의 시선을 무시하는 눈치였다.

놀랍게도 팔찌는 계속 서태웅의 손목을 떠나지 않았다. 윤대협의 시선은 경기장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계속 서태웅을 쫓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았다. 라커 룸을 나설 때도. 재킷을 걸친 채 웜업을 할 때도. 심지어 경기 직전 재킷을 벗을 때까지도. 플레이 볼 직전에야 서태웅은 묵묵히 팔찌를 풀어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귀찮다며?

윤대협은 정말이지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스크래치 나는 것도 싫다며. 팔찌는 반지보다 긁힐 면적도 넓지 않나?

심지어 서태웅은 잠깐 교체되는 동안에도 벤치에 서자마자 재킷 주머니에서 팔찌부터 꺼냈다. 아주 성실하게 손목에 채웠다. 하프타임은 말할 것도 없고 1쿼터와 2쿼터 사이 그 짧은 휴식 시간에도 손목부터 만지작거렸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윤대협은 맞은편 벤치에 서서 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 감독이 뭐라고 작전 사항을 외치는 소리를 전혀 듣지 않은 채로 이글이글 그 모습을 째려보고 있었다.

태웅아, 장난해?

윤대협은 화를 잘 안 낸다. 성격이 그렇다. 특히 농구처럼 즐거운 걸 할 때는 더더욱 화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알았다. 분노가 마르지 않는 에너지원이라는 걸. 머릿속을 떠도는 수많은 의문 중에서 가장 뜨거워지는 질문 중 하나는.

도대체 누가 준 건데?

직접 산 건 아니다. 서태웅은 쇼핑에 신중하다. 애초에 새 걸 잘 사지 않고 중고거래앱 당근을 애용하다 여자한테 번호 따여서 금지당했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최근 쇼핑 목록을 완벽하게 꿰고 있고 그 중 정체불명의 금속 팔찌는 없었다.

안 그래도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난 집중력이 날카로울 정도로 벼려졌다. 평소처럼 한 발 뒤에서 느긋하게 생각하기보다, 앞뒤 안 가리고 반의 반 박 빠르게 달려들었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짓밟기 위해 몸을 던졌다.

그날의 경기는 엎치락뒤치락 엄청난 혈투였다. 양팀 에이스인 윤대협과 서태웅이 둘 다 40점대 득점. 다만 경기 초반부 오버페이스일 정도로 적극적인 윤대협의 플레이에 상대 팀 디펜스가 당황하는 바람에 다소 말렸다. 지난 라운드의 윤대협을 정밀 분석해서 잔뜩 대비하고 나온 탓에 더 그랬다. 결국 승리는 윤대협에게 돌아갔다.

서태웅은 사인할 기분이 도저히 아니었다. 그래서 데뷔하고 처음으로 팬 서비스를 전부 거부하고 바로 차에 탔다.

운전석을 열었더니 의외로 윤대협이 먼저 타 있었다. 윤대협의 퇴근길 인파도 서태웅 못지않아 오늘은 더 늦을 줄 알았는데.

이 자식 얼굴은 경기 끝나고 보면 이상하게 화가 풀린다. 깨지고 난 날도 그렇다. 서태웅은 좀 누그러진 티를 전혀 안 내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비켜.”

경기가 겹칠 땐 홈 경기인 사람이 운전한다. 오늘은 서태웅이다. 그게 부부의 규칙이었다. 하지만 윤대협은 물러나지 않았다.

“내가 할게.”

서태웅은 납득할 수 없었지만 그냥 얌전히 문을 닫았다. 아직 소화가 안 된 패배의 쓴맛으로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채 조수석에 앉는다. 열 받는다. 오늘은 꼭 이길 생각이었는데. 이런 때야말로 멘탈 방어가 필요하다. 가득 쌓인 팬레터를 펼칠 때다. 아니면 윤대협 취한 영상.

서태웅이 안전벨트를 채우기도 전에 윤대협이 그의 왼쪽 손목을 가로챘다. 운전석을 먼저 차지하고 있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왼손 잡도리하려고.

서태웅의 왼쪽 약지엔 반지에 눌린 자국만 덜렁 남아 있다. 서태웅은 항상 집을 나서기 전에 현관 앞에 결혼반지를 빼 둔다. 잃어버려도 집 안에서 잃어버리면 문제없다는 나름대로 기특한 발상이었다.

서태웅의 왼쪽 손목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은색 팔찌가 붙어 있다. 윤대협은 그걸 거칠게 뜯어냈다. 스읍. 약간 아팠는지 서태웅이 혀를 차며 손목을 홱 물린다.

윤대협의 손안에서 굵직한 팔찌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도대체 왜 이딴 걸. 디자인도 촌스럽고. 불편해 보이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윤대협은 다시 한 번 복근 깊숙한 곳까지 호흡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분노를 삭이기 위해서였다. 가능한 한 침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설명해 봐.”

서태웅은 아직도 주둥이가 삐죽 나와 있다.

“뭘.”

“팔찌. 뭐야.”

서태웅은 벌겋게 자국이 남은 왼손으로 목덜미를 슬쩍 긁다가 툭 내뱉었다.

“농구 잘하게 해 주는 팔찌.”

“뭐?”

윤대협은 귀를 의심했다.

서태웅이 어깨를 으쓱인다.

“농구 잘하게 해 주는 팔찌라던데. 게르마늄 어쩌구.”

윤대협이 틀렸다. 더할 수 없는 분노가 아니었다. 하아아. 윤대협은 운전대에 엎드렸다. 제 손목에 들이받은 이마에서 툭 튀어나온 핏줄이 두 개 정도 느껴졌다. 게르마늄 팔찌 그거 배우자한테 효과 있네. 진짜 혈액순환이 너무 잘된다. 윤대협은 손에 피가 안 통하도록 게르마늄 팔찌를 꾹 쥔 채로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자식은 이겼는데 왜 이렇게 화가 났지?

윤대협은 화를 잘 안 낸다. 가끔, 정말 가끔, 가뭄에 콩 나듯 화가 나면 아무런 표정도 못 짓는다. 그런데 서태웅 앞에서는 화가 날수록 미소를 지으려고 애쓴다. 평소의 은은하고 자연스러운 웃음이 아니라. 어딘가 억지로 쥐어짜 낸 듯한 비틀린 미소. 그래서 서태웅은 언제나 윤대협이 화가 났다는 걸 누구보다 빨리 알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서태웅은 그 표정도 싫어하지 않았다. 끝내 다정하려는 윤대협의 욕심. 오직 서태웅만을 향한 욕심이었다. 서태웅은 싫지 않았다. 그저 납득이 되지 않을 뿐.

어딘가 억지로 쥐어짜 낸 듯한 비틀린 미소를 걸친 채로 윤대협이 입을 열었다.

“누가 줬어?”

“팬이.”

서태웅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윤대협은 납득했다. 그럼에도 그의 입술은 아직도 비틀려 있다.

“농구… 너 그걸 믿어?”

서태웅이 어깨를 으쓱인다.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그런데도 졌다는 게 열받지만. 서태웅은 주먹으로 눈을 비볐다. 몰려오는 피로에 뒤덮여 패배의 분노가 슬슬 연해지고 있다. 이제 집에 가서 씻고 팬레터나 좀 뒤적이며 머릿속을 정리한 뒤에 잠들고 싶다. 그리고 새벽부터 훈련하고. 패배 원인 분석은 팀이랑 해야지.

서서히 가물가물해지는 서태웅 눈앞에 윤대협이 갑자기 손을 불쑥 내밀었다. 서태웅은 턱 밑이 구겨지도록 얼굴을 당겨서 겨우 초점을 맞췄다.

그건 반지였다. 윤대협의 왼손 약지에서 빛나는 반지. 윤대협은 매번 경기 전에 이걸 왼쪽 신발 끈에 넣고 다시 묶는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면 신발 끈을 다시 풀어서 제자리에 끼운다. 그리고 다시 신발끈을 묶는다. 서태웅으로서는 죽었다 깨나도 할 수 없는 아주 귀찮은 짓이었다.

서태웅의 눈앞에 왼손 약지를 들이민 채로 윤대협이 담담하게 말했다.

“팔찌가 졌네.”

“뭐라고?”

“팔찌가 졌다고. 농구 잘하게 해 주는 반지에.”

서태웅은 두 눈을 부릅떴다. 윤대협의 얼굴은 이제 웃지 않는다. 죽은 듯한 무표정인 채 억양 없이 말을 잇는다.

“생각해 봐, 태웅아. 너랑 내가 우리나라에서 농구 제일 잘하잖아. 그렇지?”

“내가 아주 조금 더.”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 우리 둘이 결혼하면서 같이 맞춘 반지잖아. 그렇지?”

서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반지를 끼면 농구를 잘하게 되는 거야.”

서태웅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슬슬 넘어오고 있군. 윤대협은 제 입술에서 튀어 나가는 반지성적이고 비과학적인 아무 말 대잔치에 무덤덤한 표정으로 가속 페달을 밟았다. 순정을 바쳤더니 유사 과학 따위로 뒤통수를 처 맞은 윤대협에게 이제 남은 건 오기뿐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태웅과 나란히 결혼반지를 하고 출근하고 말 것이다.

“오늘도 내가 이겼잖아. 작년에도 내가 이겼고.”

서태웅의 눈에 레이저 같은 시퍼런 안광이 서린다. 흡사 귀기다. 세상에 단 한 사람 윤대협만이 사랑스럽게 여기는.

“그러니까 내가 맨날 반지 꼭 달고 시합 나가는 거지. 귀찮음을 꾹 참고.”

이 대목에선 조금 서글펐다. 윤대협이 귀찮음을 꾹 참고 리그 사무국에 유난을 떨어 가면서까지 이 반지를 몸에서 떼어 놓지 않는 건 결코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농구는 이런 거 없어도 충분히 잘한다.

윤대협의 궤변에 거의 다 넘어간 듯한 서태웅이 조수석에 등을 기댄 채로 심각한 생각에 빠진 사이 윤대협은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한다. 윤대협과 서태웅이 침실, 옷방, 피트니스 룸, 그리고 오직 선물 보관만을 위한 방을 죄다 공유하는 두 사람의 집.

가는 길에 서태웅이 툭 내뱉었다.

“난 너 반지…”

윤대협이 아니라면 놓칠 것 같은 작은 목소리였다.

“날 좋아해서 끼고 다니는 줄 알았지.”

핸들을 잡은 윤대협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알고 있었단 말이지. 알면서 이 자식은… 정말 서태웅이란 자식은… 속으로만 불평을 중얼거리는 윤대협의 양볼이 점점 발갛게 상기됐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그런 기습을 싫어하지 않았다. 남들은 안중에도 없는 마이 페이스로 오해를 사지만 (뭐 그렇게까지 오해는 또 아니긴 하지만) 서태웅은 언제나 주변을 조용히 관찰하고 있다. 그 관찰 결과를 묵묵히 쌓아 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툭 정답을 뱉는다. 지금처럼. 그런 서태웅의 묵묵한 관찰이 가장 오래 머무는 건 명백히 윤대협이다. 윤대협은 그 사실이 정말이지 싫지 않았다.

사실 위험할 정도로 우월감을 느꼈다. 승리했다는 기분. 경기보다 인생에서. 짜릿하고. 흥분된다.

집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윤대협은 서태웅의 안전벨트를 풀어 주었고. 차에서 내린 후엔 서태웅의 반지가 없는 왼손을 잡고 집까지 걸었다.

평상시로 돌아왔군. 서태웅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윤대협의 붉어진 목덜미와 살짝 체온이 올라간 손바닥까진 눈치채지 못해서, 현관문 닫히는 그 순간부터 평상시 시즌 중엔 하지 않는 딥한 애정행각까지 이어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10라운드 2차전이자 마지막 맞대결.

점프볼 직전.

윤대협을 마주 보고 코트에 선 서태웅의 왼쪽 농구화에는 반짝이는 결혼반지가 매달려 있었다.

윤대협은 자신도 모르게 헤벌쭉 웃었다. 그리고 지나친 기쁨은 뇌세포를 반쯤 풀어 놓을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그날은 서태웅의 완승이었다.

서태웅은 생각했다.

제법인데. 농구 잘하게 해 주는 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