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암의 꽃 2
불면의이쑤신
서태웅은 한참 동안 모니터 속의 글자를 바라보았다.
서*웅 0711
영통팬싸 당첨 공지 속의 두 글자와 네 숫자. 서태웅은 공개된 웹에 이 정도로 신상이 드러난 적이 없다. 불안함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 이 정도 정보로 서태웅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윤대협 남신팬은 유명하지만 그가 서*웅 0711이라는 걸 연결할 방법이 없다.
오프라인 팬싸였다면 조금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고인물들은 레이더를 바짝 세웠을 것이다. 이런 흐름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보송이 왔네. 웬일이야. 가만있자 명단 중에 아는 이름 싹 빼고 나면 남자 이름이. '웅' 자는 여자 이름에 들어가기 빡세지 않나? 아냐 혹시 모르잖아 우리 모두는 웅녀의 자손이니까... 그래 중국인 이름일 수도 있고... 보송이 본명이 마스킹하면 엄청 여자 같을지도 모르잖아. 김재현이라든지 이성빈이라든지 그런 이름이라면. 신중한 고인물들은 억측으로 신상을 예측했다가 좆될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에 집단지성을 활용하여 판단 보류로 수렴했을 것이다.
걱정과 달리 서태웅의 신상은 안전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윤대협 오타쿠가 되기 전 서태웅의 전문 분야는 IT였다. 그만큼 정보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서태웅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SNS를 통틀어서 계정이 딱 다섯 개였다. 인스타그램 윤대협 구독용 알계 한 개. 트위터 거래계, 윤대협 움짤봇, 윤대협 인스타그램 RT봇, 윤대협 급식봇. 중학교 때는 귀찮아서 안 만들었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정보고를 다니면서 보안 의식이 투철해져서 일부러 안 만들었다. 오로지 이메일과 카카오톡.
서태웅은 인터넷 브라우저도 무조건 시크릿 모드로 썼고 심지어 용도별로 다 따로 썼다. 일할 때 쓰는 브라우저. 윤대협 덕질하는 브라우저. 생활용품 쇼핑하는 브라우저. 클릭과 검색 결과로 쌓이는 정보가 섞이지 않도록. 서태웅이라는 한 사람을 구성하지 않도록. 그래서 일할 때 쓰는 브라우저는 서태웅한테 주니어 개발자 커리어 관련 광고를 추천했고. 윤대협 덕질하는 브라우저는 서태웅이 1020 여성인 줄 알고 인스타 릴스에 화장품 광고를 띄웠으며. 생활용품 쇼핑하는 브라우저는 무신사 신상과 할인 정보를 주구장창 보여줬다.
오프라인의 서태웅과 온라인의 서태웅을 연결하지 않는다. 이것이 서태웅이 자신의 정보를 보호하는 철칙이었다. 윤대협을 덕질하면서도 그건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철저해야 했다. 오프라인에서 서태웅은 지나치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누구나 서태웅을 알아보고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윤대협의 남팬. 도 아니고 남신팬. 조금 더 평범하거나 왜소한 체구였다면 나았을까. 서태웅은 그런 가정까지 붙여 가며 어쩔 수 없는 사실을 한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냥 철저하게 오프라인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체격, 인상착의, 성별, 위치 정보와 참여 행사를 온라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인격과도 연결되지 않도록 차단했다.
서태웅이 덕친은 언감생심, 소통은 물론이요, 사담은커녕 핸드폰으로 직접 찍은 윤대협의 영상이나 사진조차도 혼자서만 간직하는 이유였다. 신상이 털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위치나 네일이나 문신이나 헤어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는 사진이며 영상을 올려 주는 팬들에게 서태웅은 속으로만 무한히 감사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멋진 윤대협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서태웅은 그렇게 하지 않기를 택했다.
해외 투어를 쫓아다니면서도 서태웅의 신상은 무사했다. 철저한 솔플 덕분이었다. 맨날 보던 얼굴을 맨날 보긴 했으나. 공연이 끝나면 서태웅은 퇴근길을 맨 뒤에서 구경하다 혼자 숙소로 갔다. 덩치 큰 남성이니까 그렇게까지 좋고 안전한 숙소에 머물 필요가 없었고 적당히 저렴한 유스호스텔이나 에어비앤비로도 충분했다.
서태웅은 항상 맨 뒷줄에 혼자 서 있다가 재빨리 사라졌다.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공연을 보고 혼자서 공연의 여운에 잠겨 맥주를 한 캔 따고 혼자서 가져간 노트북으로 움짤 따서 올렸다. 남는 시간에는 혼자서 여행도 하고. 서태웅은 윤대협 덕분에 일본도 가 보고 중국도 가 보고 미국도 가 봤다. 집돌이인 서태웅으로서는 결코 자발적으로 갈 일 없는 곳이었다. 효자 최애였다. 감사합니다.
다만 이제 투어 일정을 따라다니다 보니 얼마 없는 해외 국내선 일정이 겹칠 수밖에 없었다. 윤대협 그룹과 그 팬들이 전세 낸 거나 다름없는 같비에서 고인물들의 오픈카톡방이 시끄러워졌다.
미 친 보송이 비즈니스 줄섰음
미친 드디어 사생 데뷔?
아니지 윤대협은 퍼클이지
그럼 뭐야
그냥 키 커서 그런 거 아니에요? 이건 ㅇㅈ해야돼 내 혈육이 183인데도 이코노미를 못탐
그래 나라도 남팬이면 사생 못해 한방에 나가리야 블랙리스트 등재 난이도 최하
옆자리 앉으면 여권이나 구경하고 싶었는데 아쉽네
무서워요 언니
보송이 사생뛰기만 해봐 알페스로 인권 조져줄게 비행기 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난 최애와 xx.avi
업계포상 아니냐고요
저 그 포타 살게요 댑x보 다 내꺼
저언니 또시작이네
이륙과 동시에 비행기 모드에 들어 간 그들의 오픈카톡방은 잠잠해졌고. 이런 난리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서태웅은 쾌적한 비즈니스 좌석에 다리 뻗고 누워서 비행 내내 잘 잤다.
그렇지만. 팬데믹의 농간으로 인해 영통팬싸에 참가해 버린 이상... 서태웅의 철저한 개인정보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잃고 말았다.
윤대협이 서태웅의 이름을 알아버린 것이다.
윤대협은 사람 이름을 못 외우기로 유명했다. 팬들 사이에서만 유명한 게 아니고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예능에 나갈 때마다 한 번씩 진행자나 레귤러 출연자 이름을 헷갈렸다. 윤대협도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라서 나름대로 머리에 힘을 주고 대본을 열심히 읽고 들어갔다. 그러나 리얼리티를 살리려고 노력하며 녹화 시간이 오래 가는 방송일수록 쉽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름표를 떼려고 뛴다든지. 반말로 퀴즈를 계속한다든지. 꽤 긴 시간 인터뷰를 한다든지. 입 열기 전에 자연스럽게 프롬프트를 곁눈질할 수 없거나 다른 행동에 집중하느라고 뇌에 힘이 풀리면 금방 틀렸다. 그래서 강동호라든지 유진석이라든지 전무현 같은 피해자가 속출했다. 나중에는 이름을 틀린다는 자체가 예능 캐릭터가 돼서 숫제 챌린지가 열렸다. 기습 공격을 하려는 예능인들 vs 기를 쓰고 안 틀리려는... 차라리 이름을 생략하려는 윤대협.
예능까지 윤대협이 한다. 역시 에이스 오브 에이스...
그래서 빠수니들도 오빠가 내 이름 못 외운다고 서운해하거나 한 처먹는 일은 없었다. 이름 외워 주길 바라면서 윤대협을 잡는다고? 마조세요? 그거는 마늘 알레르기인데 한국으로 칠박 팔일 여행 오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윤대협이 천년돌이라서 정말 다행이지. 우리 애는 취준하러 TOEIC을 보러 가도 TOEFL 시험장을 잘못 가서 하하 망했네 하고 허탕 치고 올 애라고...
오히려 팬싸를 자주 가는 대협프사들은 갈 때마다 택도 없이 다른 이름으로 사인을 받아도 그 때마다 자연스럽게 받아 주는 윤대협.gif를 즐겼다. 이 놀이가 웃긴 건 윤대협이 얼굴은 또 귀신같이 기억한다는 점이었다. 같은 사람한테 영미 씨 반가워요. 세미 씨 또 보네요. 경미 씨 오랜만이에요. 혜미 씨 우리 구면이죠. 이걸 다 했다. 기억력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여러 방면에서 유죄남이었다.
그렇지만 윤대협은 서태웅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
이름을 모르고 얼굴만 알았던 세월이 너무 길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아니면 영통팬싸가 끝난 다음에도 여러 번 얼굴과 이름을 되뇌어 그랬는지도. 서태웅 씨였구나. 서태웅.
윤대협은 철벽을 치면서 동시에 유사를 먹인다는 모순된 재주를 가진 아이돌이었다. 예를 들어 윤대협은 절대로 팬들에게 반말을 안 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꼬박꼬박 존댓말을 했다. 언제나 그랬다. 퇴근길에서도 팬싸에서도 버블에서도 팬클럽에 글을 올려도.
물론 팬들은 항상 반말을 갈구했다. 윤대협의 반말. 오빠라는 신분이 찰떡인 와꾸와 피지컬과 실력을 갖춘 윤대협의 반말. 너라고 불러줘 뭐라고 하든지 남자로 느끼도록. 그게 윤대협을 최애로 둔 팬들의 공통된 소원이었다.
"대협아 누나 반말 한 번만 해 주면 안 돼요?"
윤대협은 그런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하하. 그럴까요?"
이따위로 대답해서 문제지.
"아니 반말... 반말로 해주라 진짜 딱 한 마디만..."
"음~ 뭐라고 해야 돼요? 감기 조심해. 이렇게?"
"(하시발미친...) 응응 그렇게 반말해 줘 ㅠㅠ"
"하하 진짜로 조심해야 돼요."
이딴 식으로 1분 30초가 훅 지나갔다. 이건 뭐 반말을 해 주는 것도 아니고 안 해 주는 것도 아니고. 윤대협은 해맑은 얼굴로 그럴 의도 없이 팬들 조련의 마스터로 등극했다. 반말하기 싫은 게 아니고 그냥 존댓말이 하도 입에 붙어서 반말해야 한다는 걸 계속 까먹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영통팬싸에서 서태웅을 처음 만났을 땐 자기도 모르게 평서문을 외쳤다.
"드디어 만났다."
그건 상대방을 향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진심에서 우러나온 기쁨의 표현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사람을 만나면 누구나 뇌를 거치지 않고 입에서 바로 튀어나올 감탄사였다.
윤대협은 자기가 첫마디에 반말을 한 줄도 몰랐다.
서태웅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대한 위화감을 모르면서도 서태웅은 녹화한 영상을 71138237874319번 반복해서 봤다. 일어나서 잠 덜 깼을 때 보고. 점심시간에도 보고. 자기 전에도 보고. 음성만 따서 출퇴근 시간에 이어폰으로 반복 재생했다. 종알종알 감사하다는 말을 1분에 걸쳐서 이야기하는 윤대협의 감격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가슴이 뛰었다.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이름도 나이도 전화번호 뒤 네 자리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서태웅은 팬들 사이에서 유명인이었다. 물론 좋은 의미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꼭 적대적이지만도 않았다. 서태웅은 고인물 찍덕 사이에서는 윤대협 못지않게 흥미로운 콘텐츠에 가까웠다.
오늘도 보송이한테 1빠 뺏김
포기하셈 보송이 이기려면 이틀 전에 가야됨 어제 와도 짐
미친쉑기 아니냐고 이 패배감 어떻게 하면 좋나요
받아들여 그래도 보송이 요즘은 펜스 잡으면 무릎 굽혀 주잖아 철들었어 무조건 펜스로 보내야
맞음 2열 서면 공멸이야
어떻게 저렇게 빨리 오지 직업이 없나 봐
보송이 아스팔트에서 잠자기 태양신임 그거 믿고 존나 빨리 오는듯... 한수원의 전설 기억하시죠 거의 22시간 대기했는데 20시간을 쳐잤음 우리집 고양이보다 많이 자는듯 우리끼리 야식먹고 소주까고 보드게임하고 일어나서 노가리까고 트위터하고 지쳐서 나가 떨어지는 동안 보송이 꿀잠잤음 중간에 화장실 안 갔으면 죽은줄 알고 신고했을듯
그래도 고대 축제 때 보송이가 맨뒤에서 여돌 남덕들 존나미는거 등빨로 다 막아줘서 개꿀이었음 보송이 덩치값좀하던데? 힘존나세요 팔뚝으로 한쪽당 3명씩 막음 개쾌적
보송이 옆에서 펜스 잡으면 개꿀이잖아요 윤대협이 존나쳐다봄 무조건 레전영상뜸 남팬이 좋긴 좋다 아주 거리낌없이 끼떨고 지랄이야 미친놈 고소해버려(급발진)
그래도 남팬한테 끼떠는게 백배 낫지 대협이가 효자여
보송이 좌석행사 땐 뒷열도 나쁘지않아요 몰찍은 포기해야 되는데 대신 앵콜때 무조건 레전직캠임 그땐 들고 찍으면 되니까... 무슨 강친에서 보낸 스파이 같음 시발 정의구현 오졋다리
보송이라는 이름도 모에화가 심한듯 그게 5열 뒤쯤에서 봐야 보송보송 대가리라도 보이지 바로 뒤에 서봐요 그냥 희멀건 목덜미만 보인다고 등짝에 코박고 목덜미만 존나보는거라고 흰둥이로 서방명 바꿔야된다고
"희멀건 목덜미" 미쳤나 누가 글러 아니랄까봐 음란한 묘사 보소 님 이런 거 쓰면 댑X보 파는 언니가 말벌아저씨처럼 쫓아와
저부르셨나요 댑x보 포타주신다고요
님 키워드 알람 걸었냐고요 존나웃겨진짜로
아니 난 진심으로 개빡쳤다고 해투얘기 또 해야 돼? 두시간 동안 흰둥이 등짝만 쳐다보기 vs 거북목 역C자로 치유될 지경으로 고개 존나 쳐들고 보기 진심으로 좆같단 말이야악
좆이 달리긴 했지 아무래도...
아이씨 웃겨서 자존심 상해 내 고통을 해학으로 승화하지 말아줘 미친 여자들아
윤대협도 서태웅이 모두의 눈에 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무대 위의 자신이 알아볼 수 있다면 관객석에 함께 있는 팬들은 더 할 것이다. 눈에 띄면 무조건 이득이었던 아이돌로서만 살아봐서 잘 실감이 나진 않았지만. 어쨌든 다른 팬들이 서태웅을 힐끔힐끔 보는 눈빛은 언제나 환대와 긍정만이 담겨있지는 않았다. 윤대협도 여러 번 보다 보면 눈치챌 수 있었다.
대한민국 탑 아이돌만 나온다는 술 마시는 유튜브 예능에 윤대협이 나왔을 때 진행자가 기억에 남는 팬이 있냐고 물었다. 윤대협은 당연히 서태웅을 생각했지만 이렇게 대답했다.
"있죠. 그런데 제가 그분에 대해 이야기하면 혹시 부담스러울 수도 있잖아요. 눈에 띌 수도 있고요. 안 그래도 제 기억에 남는다는 거는 뭔가. 다른 팬분들 기억에도 남을 수 있으니까."
"아 새우젓이 될 그런 익명성을. 하긴 익명성이 인권이거든요 요즘은."
"맞아요. 나중에 20년 뒤에는 괜찮죠. 제가 막 대선배 아이돌이 되어서. 예~전에 이런 팬이 계셨는데 하고 얘기하면... 하하."
"아 하긴 그때는 탈덕하셨을 수도 있고..."
"네? 탈덕이요?"
"아 죄송"
윤대협의 얼굴 옆에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울상 짓는 이모지가 합성되어 방영됐다. 자막과 함께 캡처된 화면은 두고두고 온갖 장르에서 탈덕문 막아서는 짤.jpg 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물론 윤대협은 서태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기억에 남는 키 크고 잘생긴 남성 팬분. 모든 무대를 다 보신 분. 영통팬싸를 딱 한 번 와 주셨는데 고맙다, 아이돌 계속 해 달라, 그 말만 남긴 분. 그리고 이름 석 자. 그게 다다. 나이도 모른다. 윤대협은 와꾸만 보고 자기보다 어리다고 무작정 짐작했는데 본인이 스무 살에 데뷔한 걸 생각하면 그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정황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귀여우면 다 자기보다 어린 줄 알았다.
영통팬싸는 서태웅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서태웅은 2년 넘게 윤대협을 덕질했지만. 윤대협과 자신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윤대협은 아이돌이고. TV에 나오는 사람이고. 무대를 보러 가면 같은 하늘 아래 숨 쉬는 사람이라는 게 실감이 나서 좋지만. 때로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스타였다. 별과 인간의 관계처럼 일방적인 시선으로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게 좋아서 하는 덕질이었다. 윤대협에게 서태웅은 우주를 가득 채운 다크매터처럼 측정할 수도, 특정할 수도 없는 배경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영통팬싸가 그 대전제를 깨 버렸다. 안락한 덕질이 잠깐 흔들렸다.
다행히 서태웅은 유사를 먹기에는 자의식이 한없이 흐릿했다. 압도적인 다수 대 스타 한 명의 관계가 일 대 일이 되어버린 찰나의 순간에 충격을 받긴 했는데 정확히 어떤 점이 충격인지 언어화하는 데에 실패했다. 그냥... 충격적으로 좋은 경험인가 보다. 좋으냐 싫으냐 하면 좋은 게 맞으니까. 감동적이었고. 고맙다고 해 줬고. 웃어줬고. 언제나처럼 애교 있고. 예쁜 말도 잔뜩 했고.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한 윤대협의 말...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윤대협의 표정.
이 지점에서 서태웅은 왜 그렇게 사람들이 돈을 쏟아부어서 팬싸에 가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그렇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윤대협과 나눈 대화를 트위터에 공유해 주기도 했다. 그 점은 이해가 안 됐다. 왜 그렇게 소중한 걸 모두와 나눠주는 걸까? 천사일까? 아낌없이 주는 팬들에게 서태웅은 다시 한번 감사했다.
하지만 서태웅은 그렇게 하지 않기를 택했다. 진짜 소중한 건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 거라고. 서태웅은 그렇게 믿었다.
서태웅이 영통팬싸의 충격에서 서서히 회복하여 원래의 덕질 페이스를 되찾을 때쯤에 엔데믹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그때 윤대협 팬덤의 서태웅 취급이 획기적으로 바뀐 사건이 발생했다.
사람들이 슬슬 해외여행을 시작하고 행사와 콘서트가 다시 열리기 시작하는 분위기 속에서. 정말로 오랜만에 팬클럽에 공식 스케줄 방청 신청이 떴다.
공지를 본 빠수니들은 다 함께 쌍욕을 외쳤다.
[추석특집 아이돌스타 육상 선수권대회 방청 신청 안내]
올 것이 왔다.
윤대협은 데뷔 때부터 아육대 상플에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인물이었다. 당연하다. 몸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게다가 운동신경도 좋다. 막상 본인은 십자인대 부상 때문에 재활 운동을 열심히 한 것뿐이라고 손을 저었다. 무릎에 하중이 실리지 않도록 하려고 허벅지와 둔근과 코어를 단련했고 그렇게 그리스 조각상이 되었다. 하지만 군 면제를 받을 정도의 부상이었던 건 사실이라 지금도 앉았다 일어나는 안무는 거의 없다.
데뷔 해에는 인기가 없어서 아육대에 못 나왔다. 2년 차엔 하반기에 떠서 설 아육대가 지난 뒤였다. 3년 차엔 코로나가 터졌다.
그리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피할 수 없는 스케줄...
서태웅은 새벽 4시에 고양체육관에 도착했다...
선착순 행사에서 서태웅은 대체로 1빠를 놓치지 않았다. 그냥 항상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먼저 가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버릇과도 같았다. 스피드와 돌파력은 서태웅의 강점이었다. 너무 빨리 가서 심심하면 자면서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괴로울 게 없었다. 서태웅은 길바닥에서도 제 집 침대인 양 꿀잠을 잤다.
먼저 도착하면 자리를 선택할 수 있다. 앞자리든 끝자리든 뒷자리든. 언제나 위치 때문에 욕을 먹는 입장에서는 꽤 중요한 특권이다. 아육대는 특성상 윤대협이 잘 보이는 자리가 어디가 될 지 알 수 없는 랜덤게임이다. 서태웅은 얌전하게 팬석 맨 뒷줄 맨 끝 쪽에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어디 앉아도 서태웅은 시야 방해가 없었으니까. 뒷좌석에서 서태웅의 핸드폰 화면이 보일 가능성이 더 신경 쓰였다.
점심을 먹을 때까지는 평화로웠다.
하지만 기어이 사건은 발생했다. 서태웅은 오후 방청을 통으로 날렸다.
그 사건은 트위터 실트를 탔다.
[RT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아육대 녹화 때 N그룹 팬석에서 저를 도와주셨던 남성분께 사례를 하고 싶습니다.
인접한 타그룹 팬 중에 대포 카메라를 가져 온 또 다른 남성이 저를 비롯한 8명의 여성 팬들의 특정 신체부위를 불법촬영했고 N그룹 팬석 남성분이 적발 후 도망치지 못하도록 제압해 주셨습니다.
저를 촬영하는 도중에 적발되어 즉시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서에 저와 함께 동행해 목격자 조서까지 써 주셨습니다... 목격자와 피해자는 따로 조서를 썼기 때문에 저는 연락처를 받지 못했고 조서를 쓰고 나니 귀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고소 진행 중입니다. 꼭 사례를 하고 싶습니다.
덧붙여 해당일에 N그룹 팬석 1~4열 오른쪽 끝자리 주변에 앉았던 여성분들은 불안하시면 언제든지 디엠 주세요. 제가 피해 사진에서 확인 가능한 의상을 꼼꼼하게 적어 왔기 때문에 피해 대상이신지 확인 가능합니다. 메모리는 경찰이 즉시 압수했기 때문에 고소 원하지 않으시면 영구 삭제 가능합니다. 함께 고소와 피해 배상을 원하시는 경우 저와 진행도 가능합니다. 저는 변호사 선임했고 합의 안 합니다.]
윤대협 팬덤 고인물들의 비계 여론은 삽시간에 들끓었다.
직알 진짜임? 간 분들 썰좀 풀어봐
레알임 보송이 내 옆옆자리였음
타래 기다립니다
점심시간 지난 직후에 옆에 여돌팬덤에서 미친 남덕씨발새끼 중에 한 명이 불촬하고 뭐라 지들끼리 떠들면서 웃었나봄 근데 보송이가 앉은키가 좀 크냐? 뒷자리에서 소근거린답시고 했는데 보송이 입장에선 자기 귀에 대고 소근거린 거지... 위치상...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카메라를 확 뺏는거야 나는 보송이가 미친 줄 알았는데 그 남덕새끼가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카메라 두고 튀려고 하대? 근데 보송이가 팔목 꽉 붙잡고 안 놔줌 와 존나 멋있었음 개째려보는데 남덕새끼 오줌싸는 줄 알았음 보송이 맨날 잠만 처자더니 힘쓰니까 박력있더라
미친 보송이가 남자로 보입니다
정신차려 언니는 댑x보였잖아 알페스에 이은 나페스라뇨
아무튼 보송이가 남덕새끼 팔목 꽉 쥔 채로 피해자분한테 카메라 보여줬음 당연히 사색되시고... 주변에서 어떡해 이런 분위기였음 다들 남덕새끼 개째려보고 미친새끼아니야 경찰신고해 이런 말 나오고... 보송이가 피해자분한테 경찰 부를까요 물어보고 피해자분이 오케이하셔서 스태프 부르고 경찰 부르고 남덕새끼 피해자분 보송이 셋이 나갔음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따 끗
지금 이 순간부터 보송이에 대한 적대를 철회하고 보송이를 아군으로 간주한다
보송이 그럼 오후 방청 날린 거임?
그래도 농구는 오전에 끝나서 윤대협 메달 따는 건 봤겠네
걱정마라 보송아 오후 녹화 개노잼이었다 윤대협 개싸한건지 아무생각없는건지 모를 멍대협 표정으로 계속 앉아만 있었다... 사람이 말 걸면 그제서야 웃고... 레몬 쪽쪽 빠는 영상은 내 너를 위해 지금부터 존나 편집해서 올려줄테니 잘 봐라...
외모와 싹수를 갖춘 보기 드문 한남일세 보송이에게 윤대협을 허락하노라
미친 댑x보 이제 한 명만 더 붙으면 메이저임
공개 계정들은 조금 더 적나라하게 서태웅을 칭찬했다. 이거 남신팬 얘기야? N그룹 남팬이 또 있어? 이런 식으로 동시다발적인 트윗이 창궐하면서 '윤댑 남신팬' 다섯 글자가 대한민국 트렌드에 떠 버렸다.
서태웅은 창백한 얼굴로 트위터에서 로그아웃했다...
그래도 나섰던 것을 후회할 수는 없었다. 서태웅에게는 누나가 두 명 있었다. 아마 없었다면 여성들이 사는 세상을 상상하기 조금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누나들은 공공장소 여자 화장실의 문에만 나 있는 구멍들에 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지하철로 출근할 때마다 출입문 위에 붙은 불법 촬영에 대한 경고 캠페인이 눈앞에 들이대어졌다. 서태웅은 남들은 눈높이가 닿지 않을 그 광고판을 묵묵히 읽으면서 매일 아침 지옥철을 견디곤 했다. 듣지 않았다면 모를까 들었다면 다음 행동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태웅은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렇지만 어쨌든 피해자는 같은 팬이었고... 재판에 나간다면 이름과 나이와 신상을 공개하는 수밖에 없는데... 서태웅은 법정에서 증언하는 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지만, 같은 팬덤 안에 자기 신상이 까이는 건 정말로 부담스러웠다.
불미스러운 일로 첫 덕친이 생길 위기에 처한 서태웅. 첫 오프는 상암동도 등촌동도 여의도도 아닌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이 될 지도 모른다...
조마조마한 마음은 다행히 경찰에서 피해자가 합의를 선택했다는 연락이 오며 해방되었다. 합의는 없다던 의견을 뒤집은 것은 이상한 일도 부정의한 일도 아니다. 합의 여부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의 권리고 선택이니까. 불법 촬영은 형사 고소이기 때문에 합의해도 재판이 진행된다. 어차피 합의하지 않아도 초범일 경우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그칠 확률이 높다면 어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합의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민사적 손해배상과 형사적 엄벌이 함께 떨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으나 그런 제도가 없는 조건에서라면.
서태웅은 피해자의 바람대로 잘 처리됐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신상을 공개하지 않아서 더욱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윤대협은 매니저로부터 이 얘기를 다 들었다.
다음 날 저녁. 윤대협이 인스타 라이브를 켰다. 서태웅은 집에서 알새우칩에 맥주를 마시면서 아이패드로 윤대협을 감상했다.
윤대협은 평소에 비해 아주 차분했다. 팬들이 흥냐함이라고 표현하는 샤방샤방한 분위기가 없었다.
"오늘 하루 어땠어요?"
평일 밤 라디오 단독 DJ를 맡을 만한 나직한 목소리. 서태웅은 윤대협이 단독 DJ를 맡기 전에는 보라 공방도 제법 갔다. 라이브를 할 확률이 있으니까. 커버 곡이라도 부르면 놓칠 수 없으니까. 한 번은 DJ가 피아노를 잘 치는 음악 라디오 프로그램에 그룹이 나갔을 때 윤대협이 혼자서 신성우의 '서시'를 커버해서 부른 적이 있었다. 그 녹음파일은 서태웅의 최다 플레이 곡이 되었다.
단독 DJ를 맡고 나서는 유튜브 다시 듣기로 만족했다. 주로 귀 덕질을 하는 서태웅으로서는 들을 것이 매일매일 많아지는 혜자 덕질이었다. 서태웅은 말주변이 없듯이 글주변도 없어서 사연을 보내 채택되는 건 애저녁에 포기했고 아예 선곡표 단계에서 곡 신청을 노리든지 제 생일에나 문자를 보내는 게 전부였다. 가장 좋아하는 프린스의 노래를 윤대협이 국내파인 주제에 그럴듯한 발음으로 소개해 주면 한 달 치 도파민이 채워졌다.
그날 인스타 라이브에서도 윤대협은 노래를 틀어줬다. 마음이 잔잔해지는 팝송을 깔아 놓고. 오늘 하루 어땠냐는 질문에 이런저런 응답이 올라오는 댓글을 몇 개 골라서 읽었다. 라디오처럼. 가끔 후후 소리를 내며 가만히 웃기는 했지만, 평소처럼 큰 소리로 활짝 웃지 않았다. 서태웅은 약간 불안할 정도였다. 무슨 일이 있나...
한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윤대협은 많이 고민한 표정으로 카메라와 눈을 맞추면서 조근조근 말했다.
"저는 이 일을 하면서... 운이 좋아서 나쁜 경험을 거의 안 했어요. 사랑만 받았고. 스태프든 선배님들이든 팬분들이든. 너무 잘해주셨거든요.
그런데 세상은 좋은 사람들만 있지는 않잖아요. 운이 나쁘면 누구나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경험도 하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이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그게 절대로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가끔은 진짜 나쁜 사람들한테 잘못 걸리기도 하니까.
그게 어떤 일이든... 사소하거나 중요하거나... 어쨌든 절대로 여러분의 잘못은 아니라는 거.
그냥 그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마음에 조금은 좋은 영향이 되는 얘기나 음악을 들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갑작스러웠죠? 하하. 가끔 그런 밤도 있어야 하니까.
저는 뭔가 나쁜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해요. 그런 사람들을 본받아서 저도 할 수 있는 일을 해 봤어요. 작게나마.
여러분은 다 위로받아야 하고 소중하게 존중을 받아야 돼요. 잊어버리지 마세요."
라이브는 그렇게 끝났다. 모든 팬들이 윤대협이 어떤 사건에 관해 얘기하는지 알았다. 그가 존경하는 종류의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새우칩을 씹으며 맥주를 마시는 당사자만 빼고.
서태웅은 윤대협의 차분하고 깊고 다정한 눈빛을 정신없이 쳐다보다 라이브가 끝나자마자 녹화 뜬 걸 확인하고 움짤을 만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음원도 땄다. 정말 말을 잘한다. 어떻게 저런 예쁜 말만 할 수가. 이거 음원 딴 거 직장 일이 힘들 때마다 다시 들어야지...
나도 이렇게 남을 잘 위로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런 다짐이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