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암의 꽃 4
불면의이쑤신
서태웅은 이메일 커뮤니케이션이 능숙하진 않았다. 젬병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나 연차를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서태웅은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나 대체로 핵심만 전하려 들면 지나치게 간결함에 집중하여 싸가지가 부족해졌고, 예의를 차리려 들면 또 지나치게 정석의 예의를 풀코스로 갖추는 바람에 다소 횡설수설이 됐다. 평범한 업무 메일에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까지 운운하는 건 아무래도 모양새가 좀 우습기 마련이다.
다행히 저연차 때는 빌드보다는 버그 때려잡기에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팀의 경계를 벗어난 커뮤니케이션을 할 일이 거의 없었고, 어느 정도 연차가 찼을 때는 숨은 참조로 읽어 본 레퍼런스가 제법 쌓인 상태였다. 서태웅은 그냥 다른 사람의 이메일 구조를 고대로 베꼈다. 그러면 중간은 갔다. 철저히 양식과 레퍼런스에 기댄다. 그게 서태웅이 모든 문서 작업을 대하는 자세였다.
하지만 인생에 이런 쪽지를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며칠을 고민한 끝에 서태웅은 문서 작업에 한해 지극히 형식주의자다운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쪽지. 그러니 쪽지라는 형식에 걸맞게 답장하는 것으로.
단 세 글자의 답장을 보고 R엔터테인먼트 유명호 대표이사는 이마의 깊은 주름을 짚었다. 제길...
유명호는 눈이 좋았다. 쟤는 분명 크게 된다. 그런 감이 좋았다. 그걸 믿고 연예기획사를 시작했다. 분명히 대박을 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지도고 뭐고 없는 중소연예기획사로 오디션을 보러 오는 원석이 있을 리 없었다. 신인 발굴 루트는 필연적으로 학연, 지연, 혈연 그리고 발로 뛰는 노가다밖에 남지 않았다.
유명호 인생 최고의 스카우트는 당연히 윤대협이다. 윤대협은 갓 중학생이 되었을 때부터 이미 키가 180을 넘었고 지금보다 앳되고도 남자답고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내로라하는 기획사들이 전부 명함을 들이대며 오디션 한 번만 보자고 졸라댔으나 윤대협은 웃으면서 다 거절했다. 농구하고 싶다고.
윤대협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춘계연맹 결승전에서 십자인대를 끊어먹었다. 유명호는 그 대회를 관중석에서 봤다. 윤대협에게 미련을 못 버리고 그의 눈부신 활약을 관람하던 중이었다. 코트를 대충 무대라고 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미래의 스타가 분명한 소년이 춤추듯이 코트를 누비다가 추락하는 걸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윤대협은 속상해하긴 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며칠은 시무룩했으나 곧 어깨를 으쓱했다. 농구 재밌었는데. 아쉽다. 오히려 같이 뛰던 농구부원들이 서럽게 울었다. 윤대협은 머쓱한 표정으로 그들을 위로했다. 난 괜찮아. 최선을 다했고. 잘했으니까. 재활은 안 하려고. 또 다치면 무섭잖아. 아픈 건 싫어.
유명호는 그런 윤대협에게 가수 하자는 소리를 꺼내는 자신이 못난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못했지만.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한 비장한 제안에 돌아온 답변은 의외로 순순했다.
"그럴까요?"
유명호의 벙찐 얼굴을 보고 해사하게 웃는 190cm의 고삐리. 십자인대가 망가져 더 자라지 않아도 누구나 탐낼 만큼 차고 넘치는 신장의 윤대협. 이때도 전국 대형 연예기획사의 신인발굴팀장 명함을 전부 가지고 있었던 윤대협. 그런데도 어디에도 전화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유명호를 선택한 윤대협. 왜?
엔터계의 누구나 윤대협은 속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모를 선택을 했다고.
유명호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유명호는 절대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윤대협에게 뱉은 말이 있었다. 스타로 만들어주겠다고. 너 혼자가 아니고 멋진 팀을 꾸리겠다고. 최선을 다해서 연예계를 제패할 거라고. 한치 거짓 없는 진심이었으며 열심히 사업을 준비한 만큼 믿는 구석도 있었다.
무엇보다 윤대협이 유명호를 믿었다. 아무도 모른다 해도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유명호만은 윤대협이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알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유명호는 연습생을 모으고 키우면서 더 확실하게 알게 됐다. 윤대협은 날 때부터 스타였다. 재능충임은 물론이요 무엇보다 노력도 할 줄 알았다. 방법을 알고 태어난 것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것만큼이나 강력한 무기였고 윤대협은 둘 다 갖췄다. 유명호는 최선을 다했다. 이 정도의 에이스가 자신을 선택했는데 썩힐 수는 없었다. 정신없이 뛰어다닌 결과 그는 3년 만에 윤대협을 넣은 5인조 그룹을 데뷔시킬 수 있었다.
데뷔 첫 해 성적은 실망스러웠다. 다행히 유명호는 실패에서 교훈을 배울 줄 아는 리더였고 2년 차 활동 때는 모든 프로듀싱에서 물러났다. 외부 전문가들에게 다 맡겼다. 유명호는 아쉽게도 기획과 전략에는 그다지 탁월하지 않았다. 선입견이 많은 편이라 창조적이고도 디테일한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눈이 좋았다. 그러니 직접 나서기보다 훌륭한 전문가를 알아보고 스카우트하는 것이 제격이었다. 잘 만든다고 반드시 터지리란 법이 없는 연예계에서 결국 유명호와 윤대협은 대박을 쳤다. 윤대협과 그 그룹이 벌어 온 돈으로 유명호는 서울 한복판 숲세권에 사옥을 샀다. 사세는 일취월장했다.
그러나 유명호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윤대협 그룹은 벌써 5년 차다. 슬슬 후속을 준비해야 한다.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유명호가 수장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인 발굴이 만만치 않았다. 윤대협 그룹의 성공 이후로 오디션 인원은 훨씬 늘었으나 유명호가 보기에는 한끝이 아쉬웠다. 괜찮은 재능도 있었고 몇몇은 연습생 계약을 맺어 킵해두고 키우기도 했지만. 윤대협만한 화룡점정은 없었다.
무엇보다 얼굴이 문제였다. 인정해야 한다. 한국 남성의 평균 외모는 뚜렷한 하향평준세였다... 윤대협을 등에 업고 사세를 일으켰으나 아직 거한 실패를 감당할 정도의 자본력을 갖췄다고 자신하긴 어려웠다. 유명호는 킬러 에이스를 원했다. 그 포지션이 빈 상태로는 후속 그룹의 데뷔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연락한 것이다.
소문의 남신팬에게.
남신팬은 유명했다. 굳이 트위터를 샅샅이 모니터링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자컨에도 등장했으니 말 다 했지.
소속사가 알 정도니 팬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미 대중성이 증명된 외모라는 뜻이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콘서트장이나 팬 미팅 장소에서 팬들은 카톡 또는 SNS로 이런 대화를 했다.
어디야? 표 찾았어?
ㅇㅇ 여기 자판기 옆에 남신팬 앞
ㅇㅋ 화장실 들렀다 갈게
이미 남신팬은 윤대협 그룹 팬덤의 랜드마크나 다름없었다. 거의 건물만 한 존재감. 그리고 물리적인 크기도...
팬들은 방송사 근처에서 밥을 먹을 때 우연히 식당에서 좋아하는 연예인을 마주치는 망상을 한다. 물론 그런 일은 거의 없다. 특히나 스케줄이 있는 날에 아이돌이 밖에서 식사할 리가 없다. 보다 현실적인 윤대협 그룹 팬들은 좀 다른 계열의 그러나 한없이 유사한 구조의 계 타기를 꿈꿨다. 바로 남신팬과 같은 식당에서 밥 먹기.
남신팬은 무한 대기를 해야 하는 사녹이나 무료 지방 공연 같은 스케줄에선 과감하게 굶거나 편의점에서 미리 사 온 차가운 김밥을 우적우적 씹었다.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늦은 저녁을 해결할 때는 KBS미디어센터 뒤쪽의 써브웨이 상암점에서 테이크아웃을 애용했다.
그러나 단독콘서트나 팬 미팅은 일찍 와서 MD 사고 티켓 찾고 남은 시간에 끼니를 때우는 것이 합리적이며 올림픽공원 근처에는 식당다운 식당도 몇 없다. 필연적으로 운이 좋은 팬들은 남신팬과 한 공간에서 밥을 먹게 됐다.
랜드마크급으로 자주 목격되며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남신팬을 식당에서 만나는 게 각별한 이벤트인 이유가 있다. 장소의 특성상 마스크를 벗어야 한다. 국물이 있거나 더운 요리라면 안경도 벗는다. 가림 없는 풀스크린 8K UHD 남신팬 용안 공개. 바로 앞 테이블에라도 앉으면 소녀들은 한 테이블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꼭 다물고 손가락만 바삐 놀려 카톡 대화를 했다.
오늘 남신팬세권 찢었다 가문의 영광
ㅅㅂ 나 왜 등지고 있냐고 억울함
뷰가 맛있고 음식이 아름다워요
이따 자리 바꿔
셀카로 거울 보는 척 ㄱㄱ
천잰가
미남 앞에 지능 급상승
보통은 이런 식으로 뒤에서 공공연히 주목받던 남신팬이 팬덤 내외로 주목받았던 순간이 몇 번 있다. 팬데믹 이후 돌아온 워터밤도 그중 하나였다.
그건 서태웅의 잘못이 맞았다.
서태웅은 윤대협이 두 번 나오지 않은 페스티벌은 모두 처음이었다. 워터밤은 평범한 뮤직 페스티벌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긴장했으나 다행히 이제는 같이 다닐 덕친들이 있었다.
덕친들은 말 그대로 물가에 아이를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급기야 서태웅이 포함된 오픈카톡방이 생성됐다. 덕친들은 서태웅에게 워터밤의 물총 싸움 컨셉과 발생 가능한 위험과 주의 사항을 다 설명해주고 물총과 고글과 방수 가방을 살 수 있는 링크를 추천하고 배송비를 나누고 미리 예약한 라커를 같이 써 줬다.
팬들에게 워터밤은 티켓팅이 문제가 아니고 입장이 문제다. 음식조차 반입할 수 없는 곳인데도 오직 펜스를 잡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시간에 들어갔다. 남들은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찍고 핫한 비키니로 갈아입고 물총싸움을 하는 동안 오매불망 오빠들만 기다렸다. 직캠러들은 예외. 처음부터 적당히 뒤로 빠졌다. 물에다가 이리저리 치고 부딪히는 사람들까지. 우비를 뒤집어쓰고 모노 포드 잘 감춰서 세우고 망원 잡는 게 답이었다. 물론 DSLR 이상의 전문가용 카메라는 반입금지라고 하지만 생각보다 소지품 검사가 꼼꼼하진 않았고 철저하다 한들 이들은 이미 못 뚫어 본 곳이 없는 전문가들이었다. 그렇다고 덜 힘든 건 아니다. 스탠딩 자리를 사수하려면 화장실도 갈 수 없어 물 한 방울 마실 수가 없었다.
윤대협 그룹은 다행히 해 있을 때 나왔다... 헤드라이너일까봐 개쫄았지만 춤을 춰야 하는 아이돌은 아무리 대형이라도 워터밤에선 대부분 앞 순서다. 밤엔 힙합이나 디제잉이 메인이다.
서태웅은 물총을 들고 묵묵히 서 있을 때부터 주변 반경 10m 남녀노소의 주목을 받았다. 항상 쓰고 다니던 뿔테안경 대신 투명한 고글. 새파란 무지 티셔츠와 방수 기능이 있는 파타고니아 하프팬츠.
이 패션에는 숨겨진 썰이 있는데 오픈카톡방에서 누군가가 워터밤은 흰색 옷 입는 거라고 했다가 지탄을 먹고 아니라고 짙은 색 입으라고 번복했었다. 7인의 유교걸들은 보송이가 남들 앞에서 AV를 찍길 바라지 않았다. 서태웅은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결론을 잘 이해했고 N그룹 공식 컬러를 택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마스크를 꼈다. 엄마나 다름없는 고인물들이 그거 젖으면 힘들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서태웅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높아서 괜찮을 거라고.
남다른 용량과 발사 거리를 자랑하는 바주카포 닮은 물총을 떡 벌어진 어깨에 걸친 늠름한 모습. N그룹 팬이 아니고 그냥 워터밤 즐기러 온 인스타그램 좋아하는 여성들의 노골적인 곁눈질과 웅성거림. 연예인? 모델? 인플루언서? 누구예요 저 사람?
정체를 알고 있는 고인물들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웅성거렸다. 아니 이 보송이가 대체 누구를 조지려고 저런 흉기를. 분명히 무대로 쏘면 안 된다고 사전에 주의했건만.
룰을 잘 지키는 서태웅의 저격 대상은 분명했다. 서태웅은 사격 만점으로 포상 휴가를 따던 실력을 십분 발휘해 윤대협이 등장한 뒤 물 폭탄 타임에 무대로 물총을 쏘는 불순분자들의 헤드샷을 날렸다. 미친 순덕 보송이... 덕친들은 전율했다.
서태웅은 덕심만큼 의리도 투철했다. 몰찍을 하고 있는 찍덕들을 자신의 널찍한 등짝 뒤에 숨겨놓고 상대 진영으로 하여금 그쪽은 얼씬도 못 하도록 정확한 일 점 사격을 조져댔다. 남들보다 타점이 최대 30cm 최소 10cm는 높아서 아무도 개길 수가 없었다. 우리 편 되니까 정말 든든하다고 고인물들은 생각했다.
윤대협은 등장하자마자 첫 소절 부르면서 상의를 훌렁 벗고 양팔을 쫙 벌렸다. 종합운동장이 환성으로 끓어올랐다. 쇼생크 탈출에서 비 맞는 주인공처럼 윤대협은 물 맞기를 좋아했다.
N그룹은 아예 허리춤에 물총을 꽂고 나와서 물 폭탄 타임에는 안무를 다 바꿔가면서까지 서로에게 물총을 쏴댔다. 관객들만 재밌는 꼴을 볼 순 없다며. 멘트 타임에 따르면 목 위로 쏘면 반칙이라고 합의했다고 한다.
객석도 무대도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물줄기로 띄엄띄엄 가려지는 광란의 타임. 윤대협은 두 곡 부르고 땀이 났는지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와 생수병을 하나 깠다. 그러더니 입에는 안 넣고 그대로 머리 꼭대기에 부으면서 보더콜리처럼 머리카락을 좌우로 털었다. 객석에서 여성들의 거친 함성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삐죽삐죽 왁스로 세웠던 앞머리가 물 무게를 머금고 휘어져 커다란 눈웃음을 가닥가닥 가렸다.
종합운동장을 가득 채운 모든 사람이 윤대협을 보고 있을 때...
원래 파던 알페스를 내팽개치고 댑x보라는 금지된 마약에 푹 빠져 있던 한 고인물만이 자석이 이끌리듯 시선을 돌려 보송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마스크 위로 입틀막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쿨하고 냉정 차분한 보송이답지 않은 격한 리액션에 댑x보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 씨발 짜릿해... 섹시한 최애의 시각적 자극이 천 배로 제곱 되는 돌아버린 관계성의 달콤함... 이 맛에 알페스 한다. 호모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충성충성
푹 젖은 제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아무렇게나 털면서 물방울을 튀기던 윤대협이 무언가 발견했다. 씨익 웃는다. 서태웅은 그 미소가 왠지 낯익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소름이 돋았다...
윤대협이 물총을 든 채로 무대 앞으로 뽀로록 다가와 쪼그리고 앉았다.
서태웅 코 앞에.
갑자기 들이닥친 최애의 용안에 얼어붙은 서태웅. 옆에서 우비를 뒤집어쓰고 몰찍을 하던 불면의 카메라에서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는 대포 소리가 촤촤촤촤 연속으로 발사됐다.
윤대협이 핸드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거기 잘생긴 오빠. 마스크는 벗어야지."
서태웅은 자기도 모르게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윤대협이 환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내가 벗게 해 줄게."
윤대협이 서태웅의 얼굴에 물총을 연달아 갈겼다. 하하하! 윤대협의 맑은 웃음소리를 사람들의 환호가 집어삼켰다.
서태웅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물줄기를 막았다. 소용없었다. 삽시간에 마스크가 젖어 코와 입에 달라붙었다. 열받은 서태웅이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그렇지 그렇지. 윤대협이 까르르 웃었다.
서태웅은 양 팔꿈치를 몸에 딱 붙인 완벽한 장총 사격 자세로 물총을 들어 올려 눈 옆에 갖다 댔다. 딱 한 곳만 노렸다. 무대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있는 유리한 위치를 점했기에 조준 가능한 부위다.
윤대협 콧구멍이었다.
윤대협은 거하게 기침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거진 나동그라졌다. 낙오자다! 죽여! 나머지 네 명의 멤버가 우르르 달려들어서 시원한 물줄기로 윤대협을 다구리했다. 관객들은 깔깔 웃으면서 좋아했다.
뒤쪽에 빠져 있던 캠러 두 명과 서태웅의 양옆에서 몰찍하던 네 명의 찍덕은 이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찍었다. 물론 최고의 승자는 서태웅 한 줄 뒤에서 이걸 생눈으로 다 감상한 두 명의 글러였다. 그중에서도 댑x보러.
문제는 윤대협 그룹이 안녕 안녕 퇴장한 다음에 발생했다. 볼일 다 본 윤대협 팬들은 이제 슬슬 뒤로 빠져서 물도 마시고 맥주도 마시고 음식도 먹고 페스티벌다운 페스티벌을 즐기려고 했는데. 서태웅이 운동장 중간쯤에서 갑자기 멈춰서더니.
티셔츠 자락을 가슴께로 야무지게 모아쥐고 쭉 짜 버린 것이다. 인증샷 찍느라고 사람이 제일 많은 스프라이트 포토존 근처에서.
파란 티셔츠 아래 푹 젖은 새하얀 등줄기와 화이트초콜릿이나 다름없는 빨래판과 날렵한 허리 라인이 공중의 눈앞에 드러나는 순간, 불면은 자기 목청에서 훈장님이 낼 법한 소리가 튀어 나가려는 것을 꾹 참아야 했다. 서태웅의 손아귀에서 주르륵 떨어진 투명한 물줄기가 샌들을 신은 핏줄 솟은 발등 위로 하강한다.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일행 중 누군가가 서태웅에게 여긴 너무 정신없으니까 일단 뒤로 좀 빠지자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서태웅은 구겨진 티셔츠를 탁탁 털며 얌전하게 뒤를 따라왔다.
고인물들은 분노의 손가락으로 방수팩 안의 핸드폰을 두들겼다.
보송아 이 누나는 유교걸이라 야노는 용납못한다 여며
우리 주변 반경 5m 여성들의 숨소리가 1분 30초간 매우 거칠어짐을 난 느꼈숴
아니 저거저거 말만한 게 아무데서나 배를 훌렁 까는데 딸내미 단속좀 해야되는 거 아니에여 불면엄마?!
이래서 내가 애를 안낳아 무자식이 상팔자여
아들램도 아니고 딸내미?
왠지 보송이는 곱게 키운 영애 느낌이...
ㅇㅈ
윤대협이 사위라면 상견례 프리패스
1인장르언니가또
오늘 댑x보 떡밥 터져버림 할렐루야 지난 4년 간 윤대협으로 착즙한 그 어떤 알페스보다 풍족하다
아그건ㅇㅈ이죠
수요 없는 덕친 드림 알아서 말아주는 건 이 세상에 언니밖에 없을 거야...
아니 보송이 드림은 알 바 아니고 그냥 내 식량이야 이건...
잘났다 진짜
서태웅의 첫 워터밤 감상은 언제나처럼 간결했다. 재밌었다. 덕친들과 함께라서 훨씬 편하고 즐거웠다. 도움을 받은 만큼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그건 잘 모르겠다. 어쨌든 모두 행복해 보였다. 윤대협 콧구멍에 물총을 명중했다. 살면서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 볼 수 있을까. 역대급 행사였다. 사진도 영상도 많이 남았다. 허락받고 직캠 움짤 쪄야지. 서태웅은 라커에서 마른 옷을 꺼내 종합운동장역 화장실에서 갈아 입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가했다.
그러나 워터밤에 있던 윤대협과 N그룹 팬은 고인물 8인과 서태웅이 전부가 아니었다. 펜스를 잡고 있었기에 서태웅의 얼굴을 본 사람은 윤대협밖에 없었지만, 남들보다 머리 하나 훌쩍 큰 그의 촉촉한 모습은 모든 관중이 다 구경했다. 사실 희귀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으니 명실상부 구경거리가 맞았다. 트위터 공계는 윤대협과 그룹 멤버들의 이미지로 도배되었으나 비계에는 또 다른 주인공이 있었다...
솔직히 워터밤 무대에 남신팬 올렸어야 함 아무것도 안해도 됨 서서 물총만 쏘면 됨
그냥 아방하게 앉아있기만 해도 ㅇㅋ임
그냥 젖기만 해도... 미안합니다 고소하지마세요 피뎁따지마세요 트친들 의리테스트 드간다
우리판 외모순위 윤대협>남신팬>>>>내최애 이게 ㄹㅇ이지
3위에 니최애도 쪼끔 빠깍지 아니신지?
의문의 치열한 3위쟁탈전
원래 동메달 딴 선수가 만족도가 제일 높대
그럴만하지 사실상 3등이 인간계최강 아니냐
ㅇㅈ합니다
물론 윤대협 그룹의 모든 스태프도 남신팬의 촉촉한 모습을 다 봤다. 그래서 더더욱 놓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장 매니저나 팬 매니저 같은 최전방 실무자부터 대표이사 유명호까지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일단 시도는 해 봐야 한다.
나무위키 읽기 콘텐츠나 역생카 영상에서 서태웅의 분량을 굳이 들어내지 않은 것도 다 빌드업이었다. 엔터계 사람들은 치밀했다. 나중에 언제 어떤 떡밥으로 사용될지 모른다. 위험하다 싶으면 그때 삭제해도 늦지 않다.
이미 회사는 온갖 공방 신청과 팬 이벤트 신청으로 서태웅의 생년월일 전화번호 주소까지 싹 가지고 있었다. 서태웅이 단 하나 개인정보를 감출 수 없었던 대상. 그게 바로 소속사였다. 설마 소속사가 자신에게 연락할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단 하나 걸리는 건 서태웅의 나이였다. 만 28세. 아이돌 하는 게 불가능은 아니지만. 일단 이 나이에 데뷔한 아이돌의 전례는 없다... 그러나 서태웅의 외모 역시 전례는 없다...
이 딜레마 때문에 서태웅 영입 시도에 오래 걸렸다. 그러나 어쨌든 유명호는 결심을 했고 주사위 아니 쪽지를 던졌다.
이딴 대답이나 받았지만.
서태웅은 주말 아침에 늦잠을 잔다. 8시까지. 평일 5시 30분에 비하면 매우 늦은 기상 시간이다. 예전에는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운동도 가고 했는데 윤대협 덕질 6개월 차부터는 그냥 누워서 체력을 충전하기로 했다. 덕질 이전에는 주 5회 운동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두 번 하면 갓생이고 한 번만 해도 본전이다.
비몽사몽인 중에 전화가 왔다. 알람인 줄 알고 받아버렸더니 사람 목소리가 나온다. 놀라서 저도 모르게 귀에 댔다. 모르는 번호는 안 받는데.
"여보세요. 서태웅 씨 핸드폰 아닌가요?"
"맞는데요. 어디시죠."
"안녕하세요 서태웅 씨. 저는 R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유명호라고 합니다."
서태웅의 머릿속에 보이스피싱이라는 다섯 글자가 떠올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서태웅은 유명호의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가끔 자컨에 나와서 아이스크림이나 밥을 쏘기 때문에... 보이스피싱 범죄집단이 최첨단의 목소리 합성 기술을 손에 넣은 게 아니라면 가짜일 것 같진 않았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편하신 시간에 저와 한 번 만나주실 수 있을까요?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오디션 안 볼 건데요."
서태웅이 말을 잘랐다.
지겨웠다. 왜 다들 쉽게 프로의 길을 권하는 걸까. 서태웅은 어릴 때부터 의문이었다.
길을 걸으면 모델이 되지 않겠냐고 한다. 그냥 키 크고 걷기만 한다고 직업이 될 수 있겠냐고. 연예인 하자는 그 많은 명함들은 족족 모아서 어머니에게 갖다줬다. 어머니는 태웅이가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했고. 어린 태웅이는 그냥 게임을 하고 싶었다. 컴퓨터는 말보다 더 간결한 숫자와 코드를 썼기 때문에 규칙만 잘 지키면 하자는 대로 해주는 게 편했다.
윤대협이 좋아서 시작한 건 움짤 제작만이 아니다. 서태웅은 무언가를 좋아하면 지켜보기만 하지 않고 직접 해 보는 경향이 있었다. 스포츠 선수가 좋았다면 스포츠를 시작했을 것이다. 아이돌 윤대협이 좋아졌기 때문에 서태웅은 당연한 절차처럼 취미 댄스 학원에 등록하고 커버댄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오직 윤대협 그룹 노래만...
처음에는 당연히 뚝딱이였지만 성실하게 진도를 따라가니 제법 그럴듯한 모양이 나왔다. 원래도 반사신경과 운동신경은 나쁘지 않았다. 게임 잘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그런 걸 타고났다. 팔다리도 길어서 선이 좋다고. 선생님은 금방 또 권했다. 댄서 해 볼 생각 있냐는 거다. 지겨웠다. 스물넷에 시작해서 3년 깨작거린 걸로 직업이 될 리가 있겠냐고. 선생님은 뜬금없이 얼굴 얘기를 했다. 댄서랑 얼굴이랑 무슨 상관이람.
취미를 직업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끝없이 거절하며 살아온 인생. 서태웅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쉽게 직업을 결정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됐다. 부추겨놓고 잘 안 풀리면 네 노오력이 부족했다고 치부하는 사기꾼들일까? 프로의 길로 꼬드겨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 개인 레슨이며 진로 컨설팅의 단계로 이끌려는 수작일까? 그런 식으로 돈에 눈이 멀어 한 사람의 장래를 휘두르는 나 몰라라 심보가 시대정신이라면 안타까운 일이었다. 서태웅은 연예계를 자꾸만 권하는 자들이 제게 그러는 것만큼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뻐꾸기를 날리는 줄만 알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번에도 등장했다. 아이돌 덕질을 좀 열심히 했기로서니 갑자기 아이돌을 하자고. 서태웅의 전문성은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현 직장에서조차 이직할 생각이 없는데 전혀 다른 분야에 맨몸으로 뛰어들라니. 서태웅은 대가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누구도 이런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명호는 끈질겼다.
"오디션 안 보셔도 좋습니다. 그래도 한 번만 만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직접 뵙고 말씀드릴 기회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서태웅은 점점 마음이 약해졌다. 서태웅이 확실하게 아는바 유명호 대표이사는 사기꾼이 아니다. 윤대협을 데뷔시켜 주었으며 최근 역생카라는 K팝 역사에 길이 남을 팬 이벤트를 해 준 소속사의 수장인데... 이렇게 일개 팬에게 싹싹 빌도록 놔 둬도 되는 것일까...
유명호는 서태웅의 대답 없음을 긍정적인 사인으로 해석하고 숨겨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면담은 괜찮으시면 사옥에서 하고자 합니다."
사옥.
"물론 원하신다면 투어와 선물을 준비하겠습니다."
투어. 선물.
미사일처럼 무자비하게 낙하하는 초호화 미끼에 서태웅의 가슴이 갈등으로 떨렸다.
"제가 스케줄 보고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가서 거절만 하면 되겠지...
윤대협 스케줄이 없는 어떤 주말. 서태웅은 버릇처럼 덕질할 때 쓰던 뿔테안경과 마스크를 하고 R엔터테인먼트 사옥에 도착했다. 유명호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착했는데요."
"네. 제가 지금 급한 미팅으로 밖에 나와 있어서. 다른 분이 투어를 해 주실 겁니다. 로비에서 기다리시면 방문증 가지고 데리려 내려갈 거예요. 둘러보시고 잠깐만 기다리시면 제가 금방 가겠습니다. 아무쪼록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천천히 오세요."
서태웅은 여유로웠다. 몇 시에 오든 제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서태웅이 원하는 건 오로지 콩고물이었다. 투어와 선물. 못 구했던 포카나 브로마이드라도 있으면 어떡하지. 멤버 전원 몫이라면 윤대협 말고 나머지는 교환해도 되겠지. 혹시 비매품이라도 있으면. 그건 덕친들한테도 꼭 보여줘야지...
천장이 높은 깔끔하고 쾌적한 로비에서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투어를 맡은 대리자가 도착했다.
"안녕."
윤대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