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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3.06.01

은하수 다방 下

불면의이쑤신

꿀 같은 연차 날.

주머니에 핸드폰과 풀 충전된 보조배터리와 카드지갑 덜렁 넣고 단골 카페로 튄다. 손님으로 가는 건 오랜만이다. 아무것도 안 해야지. 전용석에 찌그러져 앉아 남이 내린 커피 마셔야지. 오늘만큼은 잘생긴 사장이 얼굴을 무기로 습관처럼 말 걸어도 절대 대답 안 하고 멀리서 와꾸나 구경하며 눈보신만 해야지.

익숙한 풍경을 지나 완만한 내리막길을 잰걸음으로 돌파해 통유리창 앞에 도착. 목재로 된 문을 어깨로 미는데 턱. 꿈쩍도 안 한다. 잉???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하얀 팻말 하나. 달각달각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는 글자는.

Closed.

뭐야???

눈알 튀어 나올 뻔했다. 황당하기 그지없네. 아무리 얼굴은 개 빡센데 반해 성격은 완전 널널한 사장이라지만. 장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한 적은 있어도 아무 이유 없이 문을 닫은 적은 없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 뇌세포가 인지를 거부한다. 통유리창으로 몸을 쑥 내밀고 안쪽을 확인해 본다.

불이 켜져 있다.

사장이 앉아 있다?

텅 빈 카페 안에 혼자서 4인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지구온난화와 자본주의 양극화를 혼자 해결해야 하는 사람처럼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고 얼굴을 손에 기대고 있다. 눈이 텅 비었다. 저렇게 착 가라앉은 건 이 카페에 드나들기 시작한 이후 처음 본다. 무슨 일이 있나. 모르겠고 나 좀 앉고 싶은데. 커피 마시고 싶은데. 주먹을 들어서 유리 문을 또렷한 소리가 나도록 두들긴다.

사장이 여기를 보더니 눈썹이 팔자로 올라간다. 얼굴이 쪼끔 밝아진다. 강아지야 뭐야. 얼른 일어나서 문을 열어준다. 혼자 있게 해 주세요 전파를 내뿜던 모습을 생각하면 왠지 좀 주춤거리게 된다.

"들어가도 돼요...?"

"물론. 얼른 들어와요."

단골 된 이후로 사장은 나한테 반존대를 쓴다. 열 살 가까이 많은 마당에 아직도 간혹 존대가 붙어 있는 게 신기하다. 뭐 먹을 거냐고 물어봐서 주말에 알바하며 테스트로 마셔 보고 제일 좋았던 원두를 댔다. 가벼운 손놀림으로 원두를 핸드 밀에 넣는다. 그나마 일어서서 움직이는 걸 보니 진짜로 조각상의 물성마냥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아까보단 훨씬 낫지만. 아직 얼굴이 어둡다. 쨍쨍한 가을 햇살에 비할만하던 평소의 해맑음은 안 보이고 축축한 장마 같은 먹구름이 잔뜩 껴 있다.

에이씨 오늘은 진짜 얼굴만 뜯어 먹을라 했는데. 그간의 정이 있어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며 말을 걸게 된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가 먼저 스몰 토크 건 적이 없건만.

"장사 접으신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요. 수신 씨 월급도 줘야 하는데."

"근데 왜 갑자기?"

"아..."

핸드드립 세팅을 끝내고 물 끓기를 기다리는 사장의 낯이 한층 더 어두워진다. 곤란한 듯한 입가에는 웃음기가 간신히 남아있긴 한데 미간에 계곡이 생겼다. 190cm는 족히 넘을 것 같은 사장에겐 카페 바도 낮다. 양 손바닥을 꾹 붙이고 팔을 쭉 펴서 체중을 싣자 상체가 숙여져 얼굴에 물리적인 그늘이 졌다. 드리퍼에 얌전히 올라간 커피 알갱이에 시선을 꽂은 채로 사장이 중얼거렸다.

"장사할 기분이 아니라서..."

웃기고 있네. 언제는 장사할 기분이셨나. 나도 모르게 비꼬는 말이 필터 없이 나갈 뻔했는데 꾹 참았다. 저렇게 축 처진 사람을 날선 말로 때리는 취미는 없다. 아무리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튀어나가는 말을 붙잡으려 꼬옥 모은 입술을 자연스럽게 감추려고 자못 진지하게 고개를 두어 번 크게 끄덕였다. 깊이 공감하는 척.

보통 혼자서 이런저런 말을 이어 가는 사장이 오늘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커피만 내린다. 향긋한 커피향이 침묵 속에 퍼진다. 그러고 보니 음악도 없네. 장사할 기분이 아니라 비쥐엠도 마다하고 고요 속에 잠겨 계셨나. 조용한 목재와 가죽과 식물 사이를 촉촉하게 채우는 커피향의 입자. 오히려 평소보다 차분하고 분위기는 좋다. 원하던 이상의 휴식을 얻을 수 있는 세팅 같지만.

"커피... 나왔습니다."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저 쓸쓸한 눈동자. 실내에 싱크홀이 패일 듯한 무거운 한숨.

이런 걸 무시하고 고요와 커피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매정하진 못하다. 이젠 정말 그 질문을 꺼내야겠군. 웬만하면 피해보려고 했지만... 각오를 다지고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무슨 일 있으세요?"

사장이 바 뒤에서 날렵하게 몸을 날려 기다렸다는 듯이 내 앞에 앉는다. 짜증 난다.

커다란 두 손으로 잘생긴 얼굴을 막 쓸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나... 망한 것 같아..."

"뭐가요."

"태웅이 꼬시는 거."

마시던 커피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놨다. 괜히 물어봤다. 진심으로.


사장이 맛이 가기 시작한 건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다.

한국 프로 농구의 전설, 서울특별시에서 가장 잘생기고 몸 좋은 카페 사장, 짙은 커피색 앞치마를 입고 내려 주는 핸드드립 커피 맛이 언제나 일정한 남자 윤대협은 열두 살 어린 대학 농구선수 서태웅에게 절찬리 짝사랑 중이다.

서태웅은 매주 토요일 하루 종일 카페에 와서 앉아 있는다. 언제나 같은 체육복. 같은 동그란 가방. 알고 보니 농구공 전용 가방이라고 한다. 별게 다 있네.

아무래도 주말에 얘 얼굴 보겠다고 오는 손님이 늘어난 것 같은데. 설문조사 돌려본 적은 없어도 나의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정황 증거가 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윤대협 상판대기만 죽어라고 쳐다보는 서태웅에게 전후좌우에서 날아드는 전화번호.

윤대협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걸 지켜보다가 급기야 단골손님인 나에게 주말 세 시간 단기 아르바이트를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주말 손님들의 주문을 내가 처리하는 사이에 지는 스무 살짜리 짝사랑 상대한테 한 마디라도 더 붙여 보겠다고.

처음에는 흔쾌하게 오케이 했다. 간단한 육체노동으로 머리도 비울 겸, 용돈도 벌 겸, 좋아하는 공간에서 시간도 보낼 겸. 빅 리그까지 다녀왔다는 윤대협은 명성만큼이나 돈이 많은지 일반적이라기엔 너무 많은 시급을 쳐 줬다. 나도 굳이 나서서 깎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았다.

수상한 딜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건데.

시간 개념이라곤 아예 없는 사장노므시키. 내가 일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점점 자리 비우는 시간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한 시간. 그러다가 두 시간. 어차피 알바하는 날엔 약속을 안 잡으니까 군말 없이 버텨 준 내 잘못도 있긴 있다. 그래도 그렇지.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그냥 오픈부터 마감까지 하게 됐다.

왜냐면 서태웅이 오픈부터 마감까지 안 나가니까...

미친놈들이...

그렇게 손님들은 나한테 다 떠넘겨 놓고. 매주 매주 둘이 마주 보고 앉아서 도대체 뭘 하나. 너무 궁금해서 어느 날은 맘 먹고 두 사람이 하는 말을 엿듣기로 했다. 질리지도 않는지 오픈런 1빠 손님으로 들어오는 서태웅을 다소 강제로 바 앞에 앉혔다.

서태웅은 그동안 하도 얼굴을 많이 봐서 나를 안다. 그냥 알바 누나 1 정도로.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정확한 사실이다. 딱히 통성명을 한 적은 없는데 자기 이름 자수로 박힌 체육복 입고 다니니깐 내가 이름을 불러도 그러려니 하는 것 같다. 난 그거 보고 알게 된 건 아니지만. 윤대협이 입만 열면 지 얘기를 하는데 모를 수가 있냐고.

"어 태웅이 왔어? 오늘은 여기 앉아."

서태웅은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담고도 순순히 시키는 대로 앉더라. 말 없는 편인데다 붓글씨처럼 일자로 낭창하게 솟아오른 눈썹 때문에 혼자 있으면 차가운 인상인데 막상 말 걸어보면 이유 없이 까칠하진 않다. 무엇보다 나는 얘가 윤대협 쳐다보는 얼굴밖에 몰라서. 덩치만 커다랗지 동경하는 사람 앞에 서면 몇 달째 긴장하는 스무 살짜리 애로만 보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좀 편하게 대한다.

"예쁜 알바 누나 태웅이 괴롭히지 마세요."

"제가 언제요."

물론 그러면 바로 택도 없는 견제가 들어오지만. 저한테는 앉으라는 말도 안 했는데 냉큼 서태웅 옆 의자를 빼서 앉는 윤대협. 입가는 싱글벙글 웃는데 눈이 안 웃는다. 무서워. 나는 얼른 그럴듯한 변명을 주워섬겼다.

"아니 맨날 둘이 창가에 앉아 있으니까 구경한다고 손님 겁나 많이 와서 제가 힘들잖아요. 몰랐어요?"

"처음 듣는데."

윤대협이 왼쪽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동시에 서태웅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다 부딪히겠다. 아주 앙드레김 패션쇼 피날레처럼 손끝도 마주 대고 바라보지 그래.

아예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니다. 보기 드물게 고운 얼굴에 강력한 피지컬을 갖춘 두 사람이 매주 맞선인지 소개팅인지 알 수 없는 세팅으로 창가에 앉아 있는 바람에 이 카페는 알음알음 명물 아닌 명물이 되고 있었다. 분명히 토요일에만 현저하게 손님이 많았다. 당연히 여성 손님만. 자리가 꽉 차면 테이크아웃이라도 해서 두 사람이 앉은 창가를 꼭 지나간다. 무슨 전시관 작품 앞을 줄 서서 이동하듯이... 흘끗 쳐다보면서 빠른 걸음으로 지나친 다음 길가에서 꺄르륵 웃으면서 서로를 퍽퍽 때린다. 그 마음 압니다. 잘생긴 걸 실물로 보면 텐션이 상승하죠. 게이들이지만. 신경 안 쓰시겠죠. 어차피 눈요기만 하고 싶으신 거죠. 그 마음도 압니다.

덕분에 나는 엄청 바빴고. 알 바 아닌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세상에 빠져 있고. 시간 개념 없어서 교대를 안 해 주는 사장 놈 때문에 근무시간은 점점 더 늘어나고.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서 위치 지정이라도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거기 두 사람 당장 내 앞으로. 뭐라고 꽁냥거리는지 들어나 보자.

매주 창가에 은밀한 갤러리를 줄 세워가며 속삭이던 밀담의 실체는.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는 쑥맥 열전이었다.

"경기는 어땠어?"

"이겼어요."

"지난번에도 말했는데... 반말해도 돼."

구부정하게 앉은 서태웅이 눈을 살짝 내리깔고 고개를 젓는다. 척 봐도 아무 생각 없는 표정인데 속눈썹이 착 깔리면서 그림이 된다. 진짜 부럽다. 나는 가짜 속눈썹을 붙여도 저렇게는 안 될 듯. 윤대협은 넋을 놓고 그 옆모습을 보고 있다. 어이 아저씨 침 나온다. 입 좀 다물어 봐.

그리고 또 영원한 침묵.

세 마디 이상 주고받지를 않는다. 딱 봐도 원래 말 없어 보이는 서태웅은 그렇다고 치자. 처음부터 철벽 각오하고 와 있던 낡고 지친 직장인에게 싱글벙글 웃으면서 아무 말이나 잘만 주워섬기던 스몰 토크의 황제는 어디 갔지. 평소에도 카페 오픈부터 마감까지 서로 마주 보고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얼굴이나 뜯어먹고 있었던 거냐?!

언제나처럼 마주 앉은 게 아니고 바로 옆에 붙어 앉은 윤대협이 턱까지 괴고 본격적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니 서태웅은 좀 부담스러웠나 보다. 평소의 그 저돌적인 시선을 옆으로 돌리지 못하고 정면만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

살짝 시선을 옆으로 돌리려다가. 윤대협의 얼굴에 상큼한 미소가 서서히 번지는 걸 보고 도로 앞을 본다. 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긴장했나 봐. 귀엽네. 내가 이렇게 생각할 정도니 윤대협은... 그래. 표정 관리는 열심히 하고 있지만 속 입술 깨물고 있는 게 다 보인다. 굵고 기다란 손가락도 초조하게 무릎 바로 위를 때리고 있다. 눈이 마주치면 뭐라고 말이라도 걸어 보려고 했던 거 같은데 죽어도 안 쳐다보니까 애간장이 타나 보지. 아마 살면서 대다수의 인류가 자기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경험만 있었으리라. 슬쩍 보기만 해도 닳을 것처럼 꿋꿋하게 앞만 보는 순수한 마음은 처음일지도.

죽어도 시선이 맞지 않는 그 꼬락서니를 빤히 관람하다가 윤대협이랑 눈이 마주쳤다.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봐요. 대충 고갯짓을 했더니 알아먹은 모양이다. 좀 생각하는 거 같더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서태웅의 볼 백으로 손을 뻗는다. 농구공을 빌미로 운을 떼어 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공을 꽉 잡고 있던 서태웅의 손끝에 윤대협의 손이 닿았다.

거짓말 안 하고 둘 다 감전된 줄 알았다.

저렇게까지 화들짝 놀랄 일인가? 커피 쏟을까 봐 얼른 행주부터 움켜쥐었을 정도다. 손끝에 손끝이 닿은 게 아니고 불똥이 튀긴 사람들인 줄.

서태웅의 무릎에서 튕겨나간 농구공이 와당탕 카페 바닥을 굴러 간다. 윤대협이 벌떡 일어나서 주워 왔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받는다. 다시 무릎 위에 고이 올려놓고 두 손으로 꼬옥 잡는다. 국보인 줄 알겠어 누가 보면.

지독한 밤고구마처럼 뻑뻑한 공기를 애써 밀고 나가는 윤대협의 목소리.

"... 미안."

"아닙니다."

군기 잡힌 거 보소. 체대가 빡세긴 한가 봐.

"항상 가지고 다니네. 그거."

윤대협이 아마도 공을 만지면서 자연스레 건네려고 했던 말을 뒤늦게 내려놓는다. 제법 딱딱하고 어색하고 뜬금없다. 어쩔 수 없지. 힘내쇼. 뚝딱대는 모습이 안쓰러워 내심 응원을 보내 본다.

서태웅은 아랫입술을 한 번 꾹 깨물더니. 예민한 길고양이랑 눈 마주치듯 조심스럽게. 살살 고개를 돌려서 윤대협을 곁눈질하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사인볼이라..."

윤대협의 사인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받았던.

나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가렸다. 뭐지 이 귀여운 생물은. 진짜 윤대협 좋아하네...

인생의 우상을 앞둔 얼굴치고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에 화난 듯이 박력 있는 눈썹이지만 새까만 두 눈만큼은 은하수보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자기도 모르게 공을 잡은 손에 꼭 힘을 주어 손끝이 하얗다. 야 아무도 안 뺏어간다 작작해라.

나와 동시에 윤대협도 입을 손으로 가렸다. 지가 생각해도 민망한지 손가락 등으로 코를 쓱 훔치더니. 손등에 입술을 처박고 한참 미동이 없다. 그러시겠죠. 막 감동을 받으시고. 가슴이 찡해지시고. 아주 깨가 쏟아지시네요. 네네. 듣고 싶은 건 다 들은 것 같고 이제 다시 두 사람을 쫓아내서 창가 갤러리에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죽을 만큼 어색한 공기 속을 내가 끼어들기로 했다.

"태웅이는 윤대협 사장님 엄청 좋아하나 봐."

"네엑?!"

"아 깜짝이야."

서태웅이 확 뒤집어진 목소리를 엄청 크게 냈다. 이렇게 큰 목소리를 낸 건 처음이었다. 나는 물론 근처에서 주문받고 대기하던 손님들까지 다 깜짝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태웅은 턱 빠진 고양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옆에 있는 윤대협도 날 쳐다보고 있다. 큰 눈이 더 커져서 눈알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얼굴로 완전 돌처럼 굳어 있다.

하. 이 자식들 김칫국 마시는 거 봐라. 난 그런 의미로 한 말 아닌데. 일부러 경쾌하게 덧붙인다.

"아무래도 농구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농구선수라고 했지?"

"아... 네."

'아...' 이러고 자빠졌다. 진짜 어이가 없다. 그건 무슨 반응이야. 대체 무슨 뜻인 줄 알았는데? 뭐 엄청 좋아해서 고백도 못 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나 봐 이런 뜻인 줄 알았어? 가서 연애를 하려면 하든가 오늘부터 1일을 하든가 내 거 하자 내가 널 사랑해를 하든가 짜증 나 죽겠구만.

막상 윤대협은 아직도 메두사의 눈을 똑바로 본 사람처럼 돌이 되어 있다. '좋아하나 봐'에 '네'가 나왔다는 사실 말고는 대가리에 안 들어가는 거 같은데. 아무래도 당분간은 저 상태일 것 같다. 무시하고 계속 나불댔다.

"사장님 완전 전설이라며. 난 잘 모르는데. 언제부터 좋아했어?"

일부러 마지막 단어를 힘주어 말하자 윤대협 석상이 젓가락에 찔린 산낙지처럼 꿈틀댔다. 재밌다.

서태웅이 눈을 꿈뻑꿈뻑거리면서 생각에 잠긴다. 햇수를 세는 것처럼 아득한 눈빛. 느릿하게 대답한다.

"초등학교 때..."

"아하. 하긴 너 초등학교 때 사장님은 이미 프로에서 날렸겠네."

"자전거를 타고 길을 가고 있었어요. 농구하러."

말수 적은 서태웅의 평균 발화 시간을 고려해 당연히 말이 끝난 줄 알고 끼어들었는데 놀랍게도 아니었다. 서태웅은 가만가만 나직한 목소리로 단어를 내려놓는다. 드문 일이라 나도 모르게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손에 잡고 하던 일을 다 멈추고 전신으로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나도 윤대협도.

"가는 길에 커다란 마트가 있는데. TV를 창가에 늘어놓고 파는 전자기기 매장이 있었어요.

거기서... 윤대협 선수가 계속 나왔어요. 농구하는 거.

그날 시합 하이라이트였던 것 같은데. 나중에 커서 날짜를 찾아보니까 프로 데뷔전이었어요. 트리플 더블이었어요. 득점하고 어시스트하고 스틸. 덩크슛하는 장면도 나왔어요."

과거를 보는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아니 얼굴 전체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 원래도 광이 나는 얼굴인데 숫제 후광을 쓴 것처럼 환해진다.

사랑에 빠진 얼굴.

그대로 휙 고개를 돌려서 옆에 앉은 현재의 윤대협을 본다. 세상에 이보다 멋진 건 없다고 확신하는 곧은 눈빛이 윤대협을 보고 있다. 또렷한 목소리가 선언한다.

"저도 그렇게 될 거예요."

윤대협은 목까지 새빨개졌다.


그 날 분명히 두 사람은 바쁜 와중에도 적절한 개입과 간섭을 멈추지 않았던 나의 등떠밈과 감시 아래 무사히 전화번호를 교환했을 터였다.

물론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린 윤대협은 고맙다든가 나도 후배로서 너를 응원하고 있다든가 그런 말을 어찌저찌 주워섬겼다. 헛기침을 다섯 번쯤 해 가면서. 서태웅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귓가는 윤대협 목덜미랑 똑같은 색깔을 해 가지고. 듣자 듣자 하니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또 끼어들었다.

"아 고마우면 밥 한 번 사요. 대선배가 되어가지고. 애가 이렇게 우러러 보는데."

"그럴까?"

기다렸다는 듯이 전광석화처럼 주워 가는 스피드. 득점왕이었다더니 어시스트 잘 받네. 아직 안 죽었네. 물론 이 정도로 숟가락에 떠서 호호 불어서 입가에 들이밀었는데도 못 받아먹으면 말이 안 되는 거지만. 꼬실 생각이 없으면 또 몰라.

서태웅은 무표정을 고수한 채로 윤대협의 핸드폰에 순순히 전화번호를 찍었다. 하루에 최소 3회 최대 7회까지 수많은 헤녀들의 타겟이 되었던 그 전화번호. 솔직히 내가 윤대협이었으면 좀 뿌듯했을 것 같다. 됐다 싶은 마음도 들었을 듯. 적어도 난 걱정이 되지는 않았는데.

근데 왜 이렇게 죽상이냔 말이다. 카페 문까지 닫아 놓고.

나는 의문을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내어 윤대협을 질책했다.

"그래서 밥을 샀어요 안 샀어요?"

"샀지..."

"어디서?"

윤대협이 세숫대야만 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안 들린다. 슬슬 진짜로 짜증이 난다.

"어이. 대답."

윤대협이 목구멍에서 물 풍선이 터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나는 기겁했다.

"울어요?"

윤대협은 거의 흐느끼듯이 말했다.

"김밥천국..."

나는 마시던 커피를 뿜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면 전부 윤대협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윤대협은 서태웅과 카톡을 주고받으며 신중하게 날짜와 시간을 골랐다. 서태웅이 토요일에만 카페에 오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일주일 중 하루를 통으로 비울 수 있는 건 그때뿐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날은 수업도 있고 훈련도 있고 경기도 있다고 했다.

가끔 토요일에도 경기가 잡히거나 다른 지역 대학으로 어웨이를 갈 때는 못 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윤대협은 비 오는 날 산책 못 간 대형견처럼 우울해져서 커다란 몸을 소파 위에 쪼그리고 궁상을 떨곤 했었다. 이제 카톡 하면 되니까 그럴 일도 없겠지. 정 뭣하면 경기 보러 가도 되고. 대학 농구 리그 지역 경기 관중석에 전설 윤대협의 등장이라. 상당한 소란일 것 같지만 내 알 바는 아니고.

아무튼 이제 그들은 토요일만 오매불망 기다리지 않고도 알아서 약속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내 덕분에. 감사한 줄 알고 빨리 들러붙으라고... 버벅버벅 고구마 먹고 있는 꼴 보기 싫으니까... 어쩔 줄 모르는 윤대협은 좀 재밌긴 하지만...

그래서 윤대협은 토요일 저녁에 끝내주게 로맨틱한 특급호텔 프렌치 레스토랑에 디너 예약을 잡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참을 수가 없어서 빽 소리를 질렀다.

"아주 작정을 했구만?!"

"왜? 좋은 데 데려가고 싶잖아."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니에요?"

"그래...? 내가 오바한 거야?"

"일단 계속해 봐요."

윤대협은 강아지 귀가 달려 있었다면 축 처졌을 것이 분명한 표정으로 망한 데이트 썰을 계속 읊었다.

윤대협은 평소엔 본 적도 없는 세미 정장을 위아래로 빼입고 전날 깨끗하게 내외부 세차를 마친 쌔끈한 블랙 랜드로버 디스커버리를 몰아 서태웅을 데리러 갔다. 서태웅은 저녁에 약속을 했으니 카페에서 죽칠 필요가 없어 오랜만에 토요일 개인 훈련을 한다고 학교 체육관에 처박혀 있었다.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무향의 계면활성제가 맨살과 섞여 은은하고 따끈한 체향을 풍기는 서태웅. 항상 입던 저지가 아니라 예쁜 색깔 나이키 후드티에 운동화. 하의는 무릎 위에서 잘린 스포티한 하프 팬츠. 그 나이 또래다운 힙한 스포츠룩. 상처 하나 없이 하얀 대퇴사두근은 쩍 갈라졌는데 무릎이 날씬해서 위아래로 라인이 아주...

"어허. 씁. 경고 1회."

"왜? 진짠데... 수신 씨는 모르지. 카페엔 맨날 긴 바지만 입고 왔잖아."

"그런 데를 막 쳐다보고 있었던 거예요? 스무 살짜리 애 다리를 막?!"

"반대로 기를 쓰고 안 보는 게 더 수상하지 않아?"

"그렇게 제정신인 척 이성적인 척 신고당할 소리 하지 말고요. 계속해 보쇼."

윤대협은 입술을 삐죽이다가 망한 데이트 썰을 계속 읊었다. 귀여운 척하지 마 아저씨.

윤대협과 서태웅은 차를 몰고 특급호텔 주차장으로 가면서 거의 한 마디도 안 했다. 윤대협은 평소에 운전하면서 노래를 듣지도 않는 주제에 오늘을 위하여 요즘 20대가 좋아할 만한 플레이리스트를 미리 만들어 놨는데. 막상 차 안에 단둘이 남자 서태웅이 혹시나 조그마한 목소리로 뭐라고 하는 걸 놓칠까 봐 아예 틀지도 못했다. 잘들 노는 짓이다. 물론 서태웅은 숨소리도 안 내고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딱 세 마디 서로 주고받은 건 또 사인볼 덕분이었다. 그날은 그놈의 볼 백을 안 들고나왔다고 한다. 신기해서 윤대협이 한 마디 걸었다고.

"오늘은 안 가져왔네. 농구공."

"네..."

"훈련할 때는 그거 안 쓰나 봐? 지워지면 또 해줄게. 사인."

"농구하려고 들고 다닌 거 아닌데."

"그럼?"

서태웅은 윤대협이 대답 듣는 걸 거의 포기할 만큼 오랫동안 침묵했다가. 목적지에 거의 다 왔을 때에야 이렇게 대답했다.

"부적이에요. 용기가 나는 부적."

윤대협은 심장이 터진 채로 한 번에 후진 주차를 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자신은 이 세상에 다시없을 진짜 주차의 신인 것 같다며. 예 그러시겠죠.

근데 그 정도면 한 번 물어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윤대협 만나러 올 때마다 용기가 나는 부적을 양손에 꼭 쥐고 오는지. 매주 이 카페를 찾을 때마다 무엇을 위한 용기를 내고 있었던 건지. 물론 심장이 멀쩡한 나는 안 물어봐도 이유를 알 것 같긴 한데.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사실에만 벌써 심장 아작난 이 아저씨는 눈치를 못 챈 것 같아서.

아무튼 계속 하쇼.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윤대협이 예약한 특급호텔 프렌치 레스토랑은 지나치게 급이 높았다. 어느 정도냐면 아무리 대중들과 언론들에게 욕을 먹어도 21세기에 꿋꿋하게 드레스코드 정책을 고집할 정도로...

딱히 비싼 식당을 자주 다니는 것도 아니라서 전혀 그 사실을 몰랐던 윤대협.

사시사철 저지만 입고 다니는 데다가 그날따라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던 서태웅.

특급호텔 프렌치 레스토랑 지배인은 아주 예의 바르고 공손한 태도로 곤란해하면서 예약 시에 드레스코드가 서면으로 안내되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건 사실이었다. 윤대협이 다가오는 데이트가 너무 떨려서 제대로 안 읽어봤을 뿐이다.

"그래놓고 지 혼자 정장 입었네. 완전 멕였네."

"수신 씨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난 그냥 잘 보이고 싶어서 차려입은 거고..."

"아무튼 태웅이는 자기 때문에 기껏 예약했는데 못 들어가게 됐다고 생각했을 거 아니에요."

여기서 윤대협은 또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기요 그런다고 이 세상에서 사장님의 거대한 몸이 사라지지가 않아요. 타조야 뭐야.

고개만 처박으면 세상이 사라졌다고 믿는 타조 같은 자세로 윤대협이 망한 데이트 썰을 계속 이었다.

내 예상대로 서태웅은 얼굴이 새하얘져서 윤대협에게 계속 사과를 했다. 윤대협은 안 그래도 자신이 제대로 체크하지 않아서 일이 꼬였는데 적반하장으로 서태웅에게 사과를 받자 패닉했다. 패닉과 윤대협. 정말 안 어울리지만. 코트의 지배자라는 별명으로 봐도. 밖에서 굉음이 들려도 하하 어디서 한문철TV를 찍나 하고 말던 느긋하기 짝이 없는 카페 사장의 모습으로 봐도. 상상이 전혀 안 가지만. 어쨌든 본인이 패닉 했다니까 그렇게 믿어주기로.

특급호텔 프렌치 레스토랑의 예의 바른 지배인은 상의는 윤대협이 입은 자켓을 서태웅이 걸쳐서 어떻게 해결하더라도 짧은 바지만큼은 조금 곤란하기 때문에 특급호텔 지하에 있는 특급 비싼 부티크에서 적절한 하의를 쇼핑 또는 자신의 소개를 통해 일정한 금액을 내고 잠시 대여하는 것까지 제안했으나 서태웅이 강경하게 거절했다.

"저 돈 없어요."

그럴 만도 하다. 나도 친구들이랑 애플망고 빙수 먹으러 갔다가 심심해서 그 부티크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거기서 파는 옷은 웬만한 가격이 하나도 없었다. 코트 하나 예뻐서 호기심에 가격표를 뒤집어 봤더니 천팔백만 원이었다. 천팔백만 원. 바지라고 절대로 백만 원 이하일 것 같진 않다.

윤대협은 당연히 자신이 지불하겠다고 했지만. 서태웅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지배인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서 작별한 뒤 그대로 돌아 나왔다. 단호하기 그지없다. 가격을 알고 그랬는지 그냥 윤대협한테 돈을 더 쓰게 하기 싫었던 건지.

차에 돌아와서 윤대협한테 이런 말을 했다는 걸 보면 후자인 것 같기도.

"이렇게 비싼 곳인 줄 알았으면 안 왔을 거예요."

윤대협은 격침했다. 그럴만하다. 그건 지금까지 두어 달 동안 서태웅이 윤대협한테 했던 몇 마디 안 되는 말 중 유일하게 부정적이고 거절의 의미를 담은 말이었다.

그러나 좌절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어쨌든 애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전에 빨리 다음 대안을 내야 했다. 윤대협은 열심히 검색을 돌렸다. 평소에 맛집 좀 많이 찍어둘 걸 후회하면서. 사실 윤대협은 밖에서 잘 안 사 먹고 집에서 대충 해 먹는 편이라고 한다. 의외네. 게다가 특급호텔은 번화가에서도 뚝 떨어져 있고 평소 잘 가는 동네도 아니었다고.

다른 프렌치 레스토랑. 이탈리안 레스토랑. 토요일 저녁인데 예약을 못해서 불안하다. 운동부는 역시 고깃집인가. 시끄러워서 이야기를 제대로 못 할 것 같다. 프랜차이즈 패밀리 레스토랑. 웨이팅도 걱정이고 게다가 시끄러울 것 같다.

살면서 이 정도의 스피드로 머리를 굴려 본 적이 없었던 윤대협이 너무 많은 선택지와 하나도 없는 정답지에 고통받고 있을 때.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있던 서태웅이 불쑥 말했다.

"저 가고 싶은 데 있어요."

"그래? 어디?"

"걸어갈 수 있는 곳인데..."

윤대협은 반색을 하며 시동을 끄고 튀어나왔다. 조수석 문을 열고 손까지 잡아줬다고 한다. 진짜 놀구들 있네. 걔도 윤대협보다야 조금 말랐지만 어깨가 태평양이고 거의 190cm 되어 보이던데.

아무튼 저녁 바람 맞으면서 핸드폰 지도를 보고 앞장서는 서태웅의 손을 잡고 걸어간 곳이...

가장 가까운 김밥천국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태웅이가 골랐다는 거죠?"

"내가 골랐을 리가 없잖아..."

"하긴. 첫 데이트에 호텔 프렌치 레스토랑 예약하는 아저씨인데... 이중인격도 아니고..."

"지금 생각하니까 그냥 호텔 라운지 뷔페로 바로 갈걸. 거긴 드레스코드 없는데. 패닉 해서..."

"아 변명하지 마시고요."

윤대협은 울상을 지어도 잘생겼다. 짜증 나서 더 쏘아붙였다.

"그래서. 지가 가고 싶다더니. 잘 먹던가요?"

"엄청..."

윤대협은 울상을 거두고 갑자기 엄청 귀여운 게 생각난 사람처럼 살풋 웃음을 뱉으면서 망한 데이트 썰을 이었다. 진짜 개짜증 난다.

서태웅은 침착하게 메뉴판을 훑었다. 눈이 아니라 볼펜으로. 김밥을 종류별로 5줄, 라볶이, 치즈 라면, 오뎅, 김치볶음밥, 갈비 만두. 주루룩 1자를 긋더니 메뉴판과 볼펜을 가지런히 모아서 윤대협에게 내밀었다.

"저는 이거면 돼요. 주문하세요."

자라나는 청년 운동선수의 먹성은 엄청났다. 윤대협도 대충 시켰다. 테이블이 모자랄 지경으로 음식이 깔렸다. 4인 테이블이라 다행이었다. 음식을 날라 주던 아주머니가 서태웅과 윤대협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며 물었다.

"운동하지?"

"네."

서태웅은 자신 있게 대답한 뒤 식사를 시작했다.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끊임없이 먹었다. 윤대협은 그걸 구경하느라 김밥을 입에 넣었는지 코에 넣었는지 자신이 좀 없다고 했다. 다람쥐 같기도 하고 햄스터 같기도 했다고. 김밥을 한 입에 못 먹고 두 입으로 나눠 먹었다고 했다. 두 번째는 당연히 다 터졌는데 처음부터 숟가락에 올려놔서 우엉 한 조각 안 떨구고 야무지게 라볶이 국물까지 찍어 먹더라고. 이 지점에서 서태웅에 대한 나의 호감도가 수직 상승했다. 아 짜식 먹을 줄 아네. 치즈 라면을 호로록 먹을 때는 살짝 매운지 입술 주변이 빨개져서 오뎅국물과 김밥을 꼭 번갈아 먹었다고. 살짝 부어올라서 아주 섹시했...

"어허 이 아저씨가. 경고 2회."

"아니 왜. 사실인데. 우리 이런 것도 말 못 하는 사이인가."

"네. 아무래도."

"냉정하네."

"됐고요. 김밥천국 아저씨. 아무튼 태웅이가 잘 먹어서. 그래서 만회한 거예요?"

윤대협은 오물오물 볼 주머니와 위장을 채우는 서태웅을 보면서 점차 마음이 침착해졌고. 이성을 되찾았고. 그날 최악의 실수는 자신답지 않게 여유를 잃고 정도를 모르고 기를 써서 오바했다는 지점이라는 걸 깨달았고. 어깨에 힘을 좀 빼고 솔직해지기로 했다. 항상 그런 것처럼. 느긋함이 윤대협이 가진 최고의 무기니까.

"미안해. 나 사실은 그런 데 많이 안 가 봤어. 그냥 너랑 밥 먹는 거니까 좋은 데 가고 싶었어."

턱을 괴고 평온하게 이야기하는 윤대협을 바라보며 서태웅이 참치김밥을 꿀꺽 삼켰다. 입가심으로 오뎅 국물을 후루룩 맛깔나게 마신다. 할 말을 조금 고르고. 조그마한 입을 벌렸다.

"저도... 죄송해요. 나름... 옷 고른 건데."

"그런 것 같았어. 잘 어울려. 태웅이는 옷도 잘 입네."

"근데 저 때문에 못 들어가서."

"아니야. 나 때문이지."

"못 들어간 건 저 때문이니까."

"내가 얘기를 안 했잖아."

"그래도..."

"이 얘기 그만할까?"

서태웅은 그제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인상과 다르게 순둥이인 줄 알았더니 인상 못지않게 고집 있는 놈이었다. 윤대협도 그렇게 봐 주는 아저씨는 아니라서 그냥 단칼에 잘라버린 모양이다. 임자 만났네 서로.

서태웅이 다음 김밥을 입에 안 넣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불쑥 말했다.

"뭐 하세요?"

"응?"

"아... 그러니까 평소에. 카페에서 일 안 하실 때..."

"아 쉴 때 뭐 하냐고?"

끄덕끄덕. 다짜고짜 앞뒤 생략하고 지금 뭐 하고 자빠진 거냐고 추궁한 줄 알았더니 지극히 평범한 질문이었다. 아무래도 서태웅은 나보다도 스몰 토크에 재능이 없는 인간인가 보다. 아니면 그냥 저에겐 살아있는 마이클 조던인 (마이클 조던도 살아있지만...) 윤대협에게 먼저 말을 건다는 게 쉽지 않았는지도... 그런 것치고 낯간지러운 말은 나 있을 때도 잘만 하더니...

"그냥. TV 보고. 요즘은 대학 농구 찾아서 봐."

윤대협이 여시 같이 눈웃음치면서 말하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안 봐도 유튜브. 윙크나 안 했으면 다행이다. 비록 세팅은 김밥천국까지 밀려났어도 포기하는 법이 없는 불굴의 의지. 바짓가랑이를 붙들어서라도 꼬시겠다는...

그런데 서태웅은 엄청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물어봤다는 거다.

"농구는 안 하세요?"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요?"

어느새 나도 모르게 꽃받침을 하고 열심히 듣고 있었다. 서태웅이 먼저 질문을 하다니. 비록 장소는 최악이지만 내용은 예상보다 잘 풀린 데이트인 것 같다. 걔도 사인 말고 얼굴 말고 윤대협 자체에 관심이 있긴 있었구나. 쉴 때 뭐 하는지 이런 평범한 것들.

그렇지만 윤대협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냥 잘 기억 안 나. 이제 팀도 없고 혼자 하는 건 재미없어서 딱히 할 일이 없다고 했지. 그렇다고 내가 대학생들한테 같이 하자고 끼워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동호회도 선출은 코치 아니면 안 받아 주고."

"하긴."

"근데 태웅이 표정이 안 좋더라고..."

"그래요?"

"응... 그러고 나서는 먼저 한 마디도 안 했어... 내가 물어보는 건 대답했지만."

김밥천국 데이트에서 도란도란 말 나누며 윤대협은 서태웅에 대해서 꽤 많은 사실을 알아냈다. 2녀 1남 중 막내. 고등학생 때 전국 대회 우승을 이끈 주장. 지금도 에이스. 다가오는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최연소 선발. 귀중한 데이트 시간에 그런 검색하면 바로 나올 농구 정보를 물어봤다는 걸 믿을 수가 없지만. 다행히 아닌 것도 알아내긴 했다. 대학 생활은 대체로 솔플. 친구는 고등학교 때 농구부원들과 대학 팀 동료들이 전부. 좋아하는 가수는 프린스. 좋아하는 동물은 고양이. 좋아하는 과일은...

"죄송한데 백문 백답 하고 오셨어요?"

"그건 아닌데. 내가 너무 꼬치꼬치 캐물었나?"

"좀 그런 듯."

"열심히 대답해 주는 게 귀여워서..."

이 사람 연애 잘 할 거 같이 생겼는데 전혀 아니네. 하긴 이렇게 생겼으면 달리 스킬을 쓸 이유가 없었겠지. 가만히만 있어도 되니까 대화를 이끌어 갈 노력을 전혀 할 필요가 없었을 듯. 진짜 재수 없다. 잘 걸렸다. 아주 고생 한 번 제대로 해 보시길. 인생엔 그런 경험도 필요한 법이니까. 물론 나보다 나이 많으시지만...

윤대협이 다시 한번 한숨을 푸욱 쉰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울망울망한 눈을 하고서.

"나 망한 거 맞지?"

"음... 애매까리한데."

"태웅이는 먼저 연락도 안 해. 나만 잘 들어갔는지 일어났는지 밥 먹었는지 잘 잤는지 물어보고."

"거 열두 살 어린 애 꼬시려면 그 정도는 하쇼. 읽씹은 아니죠?"

"응. 대답은 잘 해. 바로 오지는 않지만."

"그럼 됐네."

"다음 데이트는 어떻게 해야 해? 또 김밥천국 가긴 싫은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요."

윤대협이 답답하다는 듯이 다리를 흔들거린다. 키 190cm의 엄청 긴 다리. 있는 복 없는 복 새해 복까지 제대로 나갈 것 같다. 정신머리 없어서 발등을 꾹 밟아줬다. 아야야 하면서 순순히 멈췄다. 짧게 민 뒷머리를 긁적거린다. 경험상 저런 수줍은 표정을 하고 나면 뭔가 복장 터지는 소리를 하던데...

"나 먼저 데이트 신청해 본 적이 없어."

"예. 그러시겠죠."

"연하도 처음이고. 나이 차도... 그전에 태웅이는 이게 데이트라고 생각은 할까?"

"원래 헤테로한테 반하면 복잡하잖아요."

"그래?"

"서태웅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가정하는 게 안전하니까."

윤대협은 남자답고 강인한 제 턱 끝을 엄지손가락으로 슬 만지작거리더니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가정해 본 적이 없네. 내가 먼저 꼬셔 본 적이 없어서."

"아 알겠다고요."

"헤테로면 날 안 꼬시겠지. 그러니까 생각할 필요가..."

"아 알았다고!"

"왜 화를 내구 그래."

또 또 또 주둥이 튀어나오네. 툭하면 애교로 넘어가려고. 재수 없어.

놀라운 사실은 하나도 없다. 윤대협은 척 봐도 디나이얼 게이들이 회개하며 프라이드 깃발에 몸을 던질 와꾸와 피지컬을 갖추었다. 심지어 뼈헤남들조차도 온전한 부러움과 선망만을 던질 남성성. 극도로 가부장적인 헤테로 남성의 호모 소셜 소사이어티는 따지고 보면 게이랑 크게 다르지도 않으니까. 3차 정도 고깃집에서 불콰하게 취한 아재들의 스킨십은 종로3가와 이태원이 부럽지 않은 법.

그리고 윤대협은 끼게이부터 그런 아재들까지 모든 남자의 사랑과 존경을 받도록 조형되어 있다. 네가 뭘 알겠니. 수신이가 남자였으면 진짜로 사귈 텐데 같은 해맑은 헤녀 공격을 들어봤어야 헤테로의 잔인함을 뼈에 새기지. 역시 게이와 레즈는 서로 연애 상담이 불가능하구나. 오로지 바이들은 전부 다 디나이얼 헤테로라는 한 처먹은 음해공작으로만 뭉칠 수 있는가.

공감에는 실패했으나 해결책은 또 다른 문제다. 나는 다 가졌는데 서태웅 마음만 감 못 잡고 있는 윤대협과 감정적인 교류를 포기하고 실용을 잡기로 했다. 툴툴거리고는 있어도 어쨌든 윤대협과 서태웅의 헛발질과 쌍방 삽질의 유일하고도 최측근의 목격자로서 내게는 어떤 책임감이 싹터버린 모양이다. 솔직히 한국 사람 빨리빨리 그 자체인 내 성질머리 같아서는 온 세상에 꿀릴 것 없는 리소스를 가지고서 바보 멍텅구리같이 굴고 있는 답답스런 두 사람의 주둥아리를 모아다가 억지로 붙여 놓고 명령을 하달하고 싶다. 자 따라 해 봐. 오늘부터 1일.

최소한 그것보다는 조금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그림을 위해서 머리를 굴려 보자. 음... 농구는 좋은 공통점이다. 서태웅은 어쨌든 윤대협을 따라서 농구를 시작했고. 요즘 농구는 안 하냐고 물어보기도 했고...

"농구 가르쳐 주면 어때요? 태웅이한테."

"농구를?"

윤대협은 생각도 못 해봤다는 듯이 목덜미를 긁적인다. 좀 생각하더니 어깨를 으쓱.

"태웅이가 현역이고 나는 은퇴한 퇴물인데. 내가 배워야 되는 거 아닐까?"

"뭐가 됐든. 둘이 농구나 한 판 해 봐요. 제일 큰 공통점이잖아요."

윤대협이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신음한다. 뭐가 문제람.

"아니 꼬시고 싶다면서요. 어필을 해야 될 거 아니야."

"어필..."

"멋있는 모습을 보여줘야죠. 제일 잘 하는 거 아니에요? 농구."

윤대협은 커다란 손바닥으로 남자다운 턱 선을 한 번 쓰다듬더니 핫 하고 웃었다. 남자들이 반할 것 같은 종류의 미소였다.

"농구... 좀 하지."

자신만만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어쩐지 서태웅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윤대협과 서태웅은 순조롭게 데이트를 이어가고 있을 터였다.

아마도.

일단 두 사람은 토요일마다 카페에 오지 않게 됐다. 단지 주말이라 사람이 많다기엔 일요일에 비해서도 뚜렷하게 붐비던 걸로 보아 두 존잘남의 소문 듣고 온 갤러리가 분명한 여성 손님들은 처음 몇 번의 허탕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두 달째 목표한 그림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당황하는 눈치였다. 자주 와서 얼굴이 익어버린 사람들도 꽤 있는 참이라 내 입장에선 조금 안타깝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은 윤대협이 이 카페 사장인 걸 몰랐고. 그냥 단골 남자 손님들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차마 그들의 행방을 일개 알바인 나에게 물어보는 유난을 떨지는 못했다. 대한민국 여성들은 대체로 양식과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명백하게 누군가를 찾는 듯이 매장을 구석구석 둘러보거나 한참을 앉아서 기다려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놓고 그들의 개인정보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주문받고 계산하고 커피 만들어서 실망스러운 표정을 애써 감추는 잘 사회화된 손님들의 손에 한 잔씩 쥐여주는 모든 노동을 나 혼자 감당하고 있는 그 시각.

윤대협과 서태웅은 농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디까지나 윤대협의 보고에 따르면 그렇다. 날씨 좋으면 야외. 너무 더우면 실내 체육관을 빌려서. 절대로 서태웅네 학교에는 가지 않았다. 윤대협을 알아볼 사람이 너무 많다고 했다. 귀찮다고. 이제 서태웅 말고는 농구공에 사인해 주고 싶지 않다고. 참나. 하긴 뭐 은퇴했으니까 팬 서비스가 의무도 아니지. 연애 수작질에만 쓰겠다는 다짐은 좀 아니꼽지만.

근데 이렇게 더운 날에도 밖에서 농구를 하나. 나는 에어컨이 없는 곳에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은데. 윤대협 돈으로 에어컨 틀어 놓고 커피 내리는 게 짜릿해서 아직 주말 알바하는 건데. 은근슬쩍 오픈부터 마감까지로 고정되어 버린 데에 항의도 제대로 안 하고.

문득 무서운 사실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은 오픈부터 마감까지 계속 단둘이서 농구를 하고 있는 건가...?

에이 설마. 마감 시간보다는 일찍 집에 가겠지. 아니면 오픈 시간보다 늦게 시작했겠지...

아니었다.

그들은 오픈 시간보다 일찍 시작해서 마감 시간보다 늦게까지 농구를 했다. 한여름에. 독한 놈들.

어느 날은 땀에 쩔어선 굳이 한창 마감 중인 카페에 들렀다. 윤대협은 기분이 끝내주게 좋아 보였다.

"예쁜 수신 언니. 저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만 주세요. 태웅이는 레모네이드."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매우 딱딱하고 정중하게 답변했다.

"저 스물세 살인데요. 태웅이라면 모를까 사장님은 양심 좀."

내 주둥이에서 튀어나온 차가운 현실을 처맞고 나서야 윤대협은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미안. 부탁해요. 머신 닦았으면 내가 내리고. 설거지도 할게."

"아직 안 닦았으니 뽑을게요. 설거지는 안 말립니다."

"태웅아. 잠깐 바에 앉아있어. 나 설거지하고 올게."

섬세해 보이진 않는 커다란 손으로 도자기로 만든 인형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서태웅의 땀에 쩔은 앞머리를 살살 넘겨주더니 두 발자국을 성큼 뛰어서 싱크대 앞에 선다. 방금까지 운동해서 핏줄이 시퍼렇게 솟아 오른 우람한 팔뚝을 파고드는 핫핑크 색 고무장갑이 엄청 그로테스크하고 웃겼다.

서태웅한테 레모네이드를 한 잔 만들어서 빨대까지 꽂아 주고. 윤대협 아메리카노 뽑고 있는데. 바에서 레모네이드를 홀짝거리던 서태웅이 별안간 말을 건다.

"알바 누나 고마워요."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형이 일 대 일 해주는 거... 누나가 권한 거라고."

"아 뭐 권했다기보단. 그냥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와서..."

뭐 이런 얘기까지 다 했어. 나는 속으로 윤대협을 저주했다. 바보 아니야? 그냥 본인이 떠올린 척했어야지! 내가 둘이 이어주려고 수작 부리는 걸 티내서 지한테 좋을 게 뭐지? 진짜 연애 고자 멍청이 천치 얼굴만 믿고 생각이 없는 쭉정이...

"감사합니다."

서태웅은 앉은 자리에서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정갈한 무표정으로 레모네이드를 쪼로록 마시더니. 살짝 웃었다.

"꿈이 이루어진 것 같아요."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평상시엔 지독하게 무표정하고 센 인상의 미남의 얼굴에 찰나 떠오른 모나리자의 미소. 부드러운 파괴력이 굉장했다. 그러니까 나는 윤대협만큼이나 서태웅도 기분이 좋아져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거다.

이걸 못 보다니. 불쌍한 윤대협...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월감이 속에서 자꾸자꾸 치밀어 올랐다. 나도 모르게 내 얼굴 근육이 히죽히죽 웃는 상을 만들고 있었다. 몰랐는데 서태웅은 예상 못 한 장면에서 여운이 오래가는 결정타를 날리는 재주가 있는 녀석이었다.

뒤늦게 설거지를 끝내고 나온 윤대협만 머리꼭지에 물음표를 달고 나와 서태웅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테이크아웃해 줬다. 빨리 꺼지라고. 둘이 땀에 쩔었던데 그대로 윤대협 집에라도 가서 씻든가. 남자답게 사우나라도 가든가. 알아서 나의 지도 없이 진도 좀 빼 봐.

깨끗하게 정리한 카페 문을 잠그고 나서야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 형이라고 부르는구나...


윤대협은 나름대로 힘냈던 것 같다.

어느 날 마감하는데 쳐들어와서 두 번째 데이트를 잡았다고 자랑을 하러 온 걸 보면. 굳이 일 대 일 농구 끝나고 서태웅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왔댄다. 자랑하려고.

이번에야말로 괜찮은 곳을 예약했다고 한다. 가볍게 호텔 뷔페에서 (가볍게?) 요기를 하고.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칵테일 바에 데려갈 거라고. 알고 보니 서태웅이 체대라서 제대로 술을 마셔 본 적이 없단다. 군기는 빡세다 해도 지들 경기 하드캐리 해 줄 신입생 에이스 강제로 술 먹이는 분위기는 아니라서. 술은 처음부터 좋은 어른이랑 맛있는 거 먹으면서 배우는 게 최고라고.

나는 딴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좋은 어른?"

"응."

저 선량함을 가득 담은 예쁘장한 눈. 정말 그 누구보다 제일 위험한 어른이다.

"잡아먹을 생각 아니고요? 양심에 손을 얹고."

그렇게까지 아주 뻔뻔하지는 못한 윤대협은 잠깐 침묵했다. 나는 놓치지 않고 물어뜯었다.

"와 대답 못 해. 이거 봐. 늑대 아저씨 주제에 좋은 어른이 뭐가 어쩌고."

"아니... 아니야. 그런 거는 다 순서를 지켜서."

"이제 갓 스물된 애를."

"심지어 아직 스물 아니래... 빠른이래..."

핸드폰을 꺼내서 112를 눌렀다. 윤대협이 커다란 손으로 액정을 덮었다.

"나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진짜로. 미성년은 안 건드려. 맹세할게."

"저한테 맹세해서 뭐 하냐고요."

"그래도. 누군가한테는 맹세해야 할 것 같애."

이거 저도 저를 못 믿겠다는 소리 아니야? 위기에 처한 미풍양속 앞에 나는 속절없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볼살만 아기 같은 게 아니고 진짜로 사회적 약속에 의해 아기였던 서태웅. 겉보기엔 상큼해 보여도 은근히 능글맞은 윤대협 아저씨의 마수에 그가 잘못 걸리는 날에는 반드시 공권력을 빌어서라도 철퇴를 내리겠노라 다짐했다.

윤대협은 자신의 결백을 자세한 후기로 밝히겠다며 날짜까지 잡았다. 그날은 평일이지만 나는 오후 반차를 내기로 했고 윤대협은 카페 문을 닫기로 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뭘 얼마나 자세히 썰 풀겠다는 빌드업인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도 궁금하긴 했으니까 순순히 오케이 했다.


약속의 날. 윤대협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술 사 와요?"

윤대협은 손등에 이마를 처박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해는 쨍쨍하지만. 뭣하면 쾌청한 오전이지만. 이미 소주 한 병을 까고 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나라도 술을 좀 마셔서 분위기를 따라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의무감이 들 정도였다. 일단 앞에 앉아서 묵묵히 좀 기다려줬다. 아 이럴 때 딱 소주 한 잔 자작을 때려야 되는데...

한숨도 안 나오는 창백한 얼굴로 윤대협이 데이트 썰을 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완벽했다.

서태웅은 이전의 실패를 만회하겠다는 듯이 깊게 파인 브이넥 니트에 얇은 자켓을 하나 걸치고 왔다. 상상만 해도 땀나는데? 덥지도 않았는지. 하긴 어차피 에어컨이 빵빵한 윤대협의 차와 호텔 라운지 뷔페. 윤대협 역시 이전의 실패를 만회할 생각이 만만이라. 이번에 고른 뷔페에는 아무런 복장의 제약이 없었고. 잘 조리된 고급 식재료가 무한대로 펼쳐진 곳에서 현역 대학 농구선수 서태웅의 식성은 값비싼 디너 가격의 뽕을 뽑고도 남았다. 시간제한도 없어서 오물오물 천천히 먹고 싶은 거 다 먹었다. 윤대협은 싱글벙글 그런 서태웅의 볼록한 양 뺨을 눈으로 씹어 먹었다.

여름 해가 다 넘어간 어스름에 두 사람은 통유리창 너머로 노을이 펼쳐진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갔다.

은은한 조명이 깔린 블랙과 우드톤의 세련된 바. 윤대협과 서태웅은 창가 자리로 안내됐다. 아름다운 도시의 노을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저녁 햇살이 눈을 찌르지는 않는 절묘한 블라인드. 윤대협은 일단 샴페인을 한 잔씩 시켰다. 여름의 지는 햇살보다 살짝 연한 황금빛 술에 가늘고 고운 거품이 사르륵 올라왔다. 맑은 소리를 내며 매끄럽게 빠진 잔을 부딪혔다. 건배사 대신에 윤대협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서태웅은 가격을 결코 알 수 없을 샴페인에 살짝 혀끝을 대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생각보다 달달하고 깔끔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혓바닥에도 맛있을 수밖에 없는 술이라서. 홀짝홀짝 아름다운 액체를 넘기는 조그마한 입술을 바라보는 윤대협의 눈이 낚싯줄처럼 너그럽게 휘어졌다.

샴페인 다음에는 칵테일. 서태웅은 호기심이 많고 빼는 법이 없어서. 이건 뭐가 들어가냐 저건 뭐가 들어가냐고 꼬치꼬치 윤대협을 캐물었고. 달달하고 연한 걸로 추천하려는 윤대협의 말을 잘라가며 최대한 다양한 베이스를 먹어보고 싶어 했다. 모스코 뮬은 보드카. 더티 마티니는 진. 마가리타는 테킬라. 다이키리는 럼.

맛이 나쁘지 않았던 게 도리어 패착이었다. 서태웅은 생긴 것처럼 시원시원하게 꿀꺽꿀꺽 칵테일을 넘겼다. 처음 마시는 애한테 이 정도로 양주를 먹일 생각은 없었고 세 번째 잔부터는 맥주나 시켜 줄 생각이었던 윤대협은 생각처럼 주도권을 가져오지 못했다.

서태웅의 눈빛이 급격히 멍해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유순하게 아래로 내려온 눈꼬리에 졸린 것처럼 살짝 풀린 쌍꺼풀을 장착하고 서태웅은 아무런 맥락도 없이 배시시 웃기 시작했단다. 서태웅이. 나는 들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을 하는 윤대협의 표정이 여전히 심각하지만 않았어도 뻥치지 말라고 지금 당장 거짓말 탐지기 사 오는 수가 있다고 윽박질렀을 거다.

"윤대협 선수 형."

"그래 태웅아. 취했어?"

"모르겠어요. 그런데..."

"응. 기분 안 좋아? 토할 거 같아?"

"아니요. 입천장이... 두근거려요."

봐 봐요. 서태웅은 조그마한 입을 위아래로 벌려서 발개진 자기 입천장을 보여주려고 했단다. 이거는... 서태웅이 잘못했네. 나는 마음속의 112 신고를 잠시 접고 윤대협을 동정했다.

미성년 상대로 개수작은 접어 두기로 나와 굳게 맹세한 윤대협은 냉정을 잃지 않고 다정하게 서태웅을 달랬다.

"술 마시면 혈액순환이 빨라져서 그럴 수도 있어."

"그렇구나..."

하지만 서태웅은 냉정을 잃은 지 오래였기 때문에. 무려 두 손으로 윤대협의 커다란 손을 집어다가. 제 가슴 위에 올려놨다고 한다. 적당히 발달한 폭신한 대흉근. 발그레한 볼과 살짝 풀린 눈을 하고. 나직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의외로 발음만은 또렷하게.

"그래서 가슴도 두근거려요?"

윤대협은 이때를 회상하면서 여전히 손등에 이마를 처박은 채였기 때문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건 내가 대신했다. 세상아... 태웅아... 이러고도 꼬시는 게 아니라니 나는 요즘 미성년이 너무 무서워.

윤대협도 아마 비슷한 심경이었을 거다. 등골이 오싹했겠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냥 속 입술만 꾹 깨물고 애국가나 불렀겠지. 별로 자세하게 알고 싶진 않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술 취한 서태웅은 윤대협의 두터운 손아귀를 무슨 말랑이 슬라임 만지듯이 만지작거리면서 비밀 얘기처럼 소근소근에 가까운 볼륨으로 헛소리를 계속했다고 한다. 배시시 웃는 채로.

"제가요... 기분이 좋은 거 같은데요."

"하. 하. 그래그래. 그게 취한 기분이야."

"제가요... 제일 존경하는 농구선수가 있는데요."

"그래그래. 누군지 알 것 같아."

"어떻게 알아요?"

"지난번에 말해줬잖아."

그 와중에도 끝까지 다정을 놓지 않았던 윤대협을 존경하기로 했다. 짝녀가 술 마시고 나한테 저렇게 나왔다? 나 같으면 그냥 덮쳤음. 방 잡았음. 미안 나는 이런 놈이야. 멍석 깔면 일단 헤드스핀 돌리는 편.

그리고 서태웅은 술 마시면 아무 데서나 스스로 멍석을 활짝 펴는 놈이었다.

"벌써 말했구나... 그래도 한 번 더 말할래요. 중요한 거니깐..."

서태웅은 테이블을 향해서 상체를 홱 숙이더니. 쓰러질까 봐 얼른 서태웅의 잘 발달된 양쪽 삼각근을 붙잡고 고개를 가까이 가져간 윤대협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윤. 대. 협.

이 시점에서도 키스하지 않은 윤대협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기로 했다.

"아니 뭐야 분위기 엄청 좋은데? 바로 고백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뭐가 문제?"

"전혀 아니지."

윤대협은 오늘 본 중에 가장 절망적인 표정을 했다.

난 이해가 잘 안 갔다.

"왜요. 조잘조잘 농구 얘기 열심히 하고 완전 귀엽구만. 사장님 좋다고 계속 말하고 있고."

"태웅이는..."

윤대협이 또 마른 세수를 했다. 지금 피부 결 좋다고 자랑하는 건가. 그러다 얼굴 까지면 어떡할라고. 국보인데 조심 좀. 절망으로 공허해진 목소리로 윤대협이 뇌까린다.

"태웅이는 농구선수 윤대협을 동경하는 거야."

"그래서요?"

"그건 이제 없잖아. 농구선수 윤대협."

바닥을 기어가는 낮은 목소리.

아하. 그게 문제였구만. 이 세상에 연적이라곤 없을 듯한 외모와 성격을 하고서도 자신 없는 상대가 있었던 거다. 찬란했던 과거의 윤대협. 서태웅의 은하수 같은 눈빛을 독차지했던 그 사람. 시간을 되돌리지 않으면 결코 이길 수 없을 존재.

그렇지만 또 생각해 보면.

서태웅이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던 건 지금의 윤대협인데.

그 눈빛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건 농구 안 하고 커피 안 내리고 서태웅만 쳐다보던 윤대협을 향해 있었다.

나는 남의 연애인데도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돈을 걸라면 지금 윤대협한테 올인."

윤대협이 오늘 만나고 처음으로 이마빡을 손등에서 떼고 나를 쳐다본다. 잘생긴 이마에 시뻘건 자국이 나 있다. 약간 간절한 눈빛을 보니 스무 살짜리 예쁜이 홀랑 잡아먹을 생각만은 아니고 이 아저씨도 사랑을 하고 있긴 하구나 실감이 났다.

"그냥 제가 본 게 그래요."

"수신 씨가 나 위로해 주는 건 처음이네."

"저는 위로를 할 줄 모르는데요."

"응. 그래 보여."

이 자식이 진짜.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서 그냥 어깨나 툭툭 쳐 줬다. 뭘 그렇게 무겁게 생각하나. 내가 볼 땐 둘 다 도찐개찐이다. 서태웅도 윤대협 앞에만 오면 빡 긴장하잖아. 처음에는 평생을 추앙해 온 상대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커서 도저히 동등한 존재로 볼 수가 없었겠지.

근데 지금 하는 짓을 들어보면 오로지 동경과 환상이라기엔 거리가 많이 줄었는걸. 무려 형이라고 부른다 하지 않았나. 자각했는지 아닌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애진작에 뿅 간 건 확실해 보이고.

하나는 다 걸고 장담할 수 있다. 목격자로서 정보를 종합해 본 바 서태웅에게 윤대협은 유일한 존재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거 믿고 나는 가볍게 아무 말이나 던져 봤다. 약간은 기운을 차리길 바라면서.

"뭐 정 안되겠으면 다시 프로 선수하든가요. 아저씨 농구팬들 좋아하겠네."

갑자기 윤대협의 눈동자가 반짝일 줄은 모르고.

"그럴까?'

농구를 잘 몰라서 또 잊고 있었던 거다. 득점왕은 어시스트를 놓치지 않는다는걸.


어느 토요일. 윤대협은 가게 문 앞에 Closed를 걸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주말 알바 이수신과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또 무슨 엄청난 연애썰을 풀려고 저러나 싶어서 나는 제법 긴장했다.

연애썰이 아니었다. 더 미친 소리였다.

윤대협은 카페를 나한테 넘기겠다고 했다.

"고용 사장인 걸로 괜찮아. 소유는 아무래도 귀찮지. 세금도 처리해야 하고. 나는 세무사 있으니까 상관없어. 월세, 공과금, 발주에 드는 돈 지금처럼 내가 계속 낼게. 수신 씨는 순수익만 가져가. 그게 불안하면 월급제도 괜찮아. 좋은 회사 다녀서 많이 버는 거 알지만 지금까지 받던 기본급 정도는 챙겨 줄게. 야근 수당이나 초과 수당으로 받던 것까지는 솔직히 어려울 것 같아."

미친 사람인가?

"미쳤어요?"

"인생 최고로 제정신이야."

큰일 났다. 진짜로 그런 것 같아 보인다. 윤대협의 짙은 눈썹과 그 아래 커다란 두 눈에 총기가 이글이글하다. 나조차도 이 광기에 물들어 버린 것일까. 심지어 이 제안이 나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아니야. 세차게 고개를 내젓는다. 이 카페에 드나든 이후로 몇 번이나 경험했다. 너무 좋은 딜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윤대협이 갑자기 정신 나간 제안을 하는 진짜 이유를 속속들이 파헤치기 전까지는 무엇에도 사인하지 않으리라.

"왜 그러는데요 갑자기?"

윤대협이 갑자기 씨익 웃었다. 뜨거운 아스팔트에도 청량한 냉기를 부을 듯한 만 점짜리 미소. 뭐든지 해낼 듯한 자신만만 그 자체. 윤대협은 이럴 때 포커페이스가 없다.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원하게 자기 패를 뒤집어 깐다.

"나 복귀할 거야."

농구선수로.

태웅이를 위해서.

그랬구나. 사랑에 미친 거였구나...

나는 일주일간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윤대협은 흔쾌히 승낙하더니 일주일간 깔끔하게 카페 문을 닫아 버렸다. 하루라도 빨리 몸 만들어야 해서 시간이 없다고.

진짜 제정신 아니다.

"그럼 내가 오케이 안 하면 어떡할 건데요? 복귀 못하는 거예요?"

"그땐 다른 사람 알아봐야지. 나는 이 카페가 소중해서 넘기고 싶지 않지만."

서태웅이랑 처음 만난 장소라서 절대로 티끌 하나도 바꾸고 싶지가 않댄다. 뭣하면 건물 매입까지 알아보고 있다고. 경제관념이 별로 없는 부자가 사랑에 눈이 돌면 이렇게나 위험하구나. 애초에 나를 점찍은 이유도 이 카페를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하나도 안 바꾸고 계속 이어줄 것 같다고. 너무 정확하게 파악 당해서 오히려 반발심이 들었다.

일시적인 기분은 접어두고 진짜 중요한 계산을 해 보자.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이건 다시없을 기회다. 남의 돈을 깔고 자영업을 시작하기...? 심지어 내 본업은 기술직에 가까워서 언제든 다시 공부해서 따라잡으면 복귀할 자신이 있다. 정 불안하면 프리랜서로 몇 가지 작업을 맡거나 남는 시간에 사이드 프로젝트라도 하면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 풀타임은 자영업에 올인하고? 그게 내가 원하는 삶인가?

의외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해 본 적도 없고 투자금도 많이 들고 리스크도 크다는 이유로 뛰어들 엄두도 못 냈던 F&B 자영업. 그 모든 장애물이 지금 다 사라졌다. 일주일에 하루이긴 해도 오픈부터 마감까지 책임졌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였고. 덕분에 운영 프로세스는 적당히 몸에 익혔으며. 투자금은 사랑에 눈깔이 먼 부자 사장께서 해결해 주시고. 그러다 보니 리스크도 거의 없고...

정말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되어 버렸잖아.

그럼에도 나는 한 번 더 리스크 헷징을 시도했다. 소셜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내가 가진 최고의 사회적 안전망이었다. 망할 때 망하더라도 혼자 망할 순 없지. 그건 너무 외롭잖아.

퇴사하고 탱자 탱자 놀고 있는 친구 한 명과 번아웃이 너무 심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대책이 없어서 퇴사를 못 하고 있다는 또 다른 친구 하나를 더 끌어들였다. 물론 실질적 고용주는 윤대협이기에 허가도 받았고 제대로 계약서도 썼다. 카페에서는 각각 주 2일 일해주기로 하고 나머지 3일은 매장 운영 이외의 업무를 맡기로. 마케팅과 디자인 감각이 탁월한 친구한테 인스타그램과 포털 리뷰 관리를 맡겼고. 트렌드에 밝고 디저트를 좋아하는 친구와 머리를 맞대고 커피에 잘 맞는 간식 납품 라인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진 없었던 빈별 테이스팅 노트도 만들고. 윤대협을 졸라서 스팀 기계를 겁나 좋은 독일제로 바꿔 라떼 퀄리티를 높여 보기로 했다. 수지 타산을 계산해서 가격도 조정하고 매출 목표도 잡아 본다. 덕분에 나는 당분간 주 7일 근무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윤대협과의 고용 계약은 연봉제 대신 수익 쉐어로 했다. 내가 끌어들인 애들 연봉을 주고 남는 게 내 돈이다. 모자라다 싶으면 언제든지 외주 프로젝트 맡지 뭐. 일단은 재밌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게 중요하다. 많은 돈을 벌면서 죽을 때 아무 기억도 나지 않을 다량의 업무에 치이던 나날은 안녕. 이제는 하루하루가 즐겁다. 마지막 순간에 눈 감으며 그때 윤대협 카페 이어받고 우당탕탕 달렸을 때 정말 재밌었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새로운 일의 즐거움에 눈을 뜨는 동안.

윤대협은 과거의 일로 돌아가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었다.

계절이 지나 오랜만에 가게를 찾은 윤대협은... 엄청났다. 무엇이. 피지컬이.

거기서 몸이 더 좋아질 수 있구나. 체지방은 싹 빠진 게 눈으로 보이는데 근육 때깔이 달라져서 전반적으로는 벌크업 느낌이다. 본인 말로는 무게를 늘리지는 않았다는데 부피감은 엄청나다. 어깨만 스쳐도 골절될 것 같다. 덤프트럭이 따로 없다.

"젊은 애들한테 안 밀리려고 애 좀 썼어."

싱글싱글 웃으면서 너스레를 떤다. 한 번 은퇴를 선언한 윤대협은 정식 입단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수련선수로 입단 시험을 치를 예정이라고 한다. 정식 드래프트를 못 받아서 입단 시험에 도전했는데 이런 끔찍한 상대와 경쟁해야 하는 이름 모를 농구선수 지망생들이 정말 불쌍하다.

"태웅이는 뭐래요?"

"아직 얘기 안 했지."

뭐라고.

이런 미친. 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지금 앙큼하게 윙크할 때가 아니고요. 오직 서태웅 때문에 이 모든 개난리를 쳐대면서 뭐? 아직 얘기를 안 해? 가끔 이 자식의 느긋함은 도가 지나쳐서 호통을 질러서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마냥 호락호락한 사람도 아니지만.

"연말에 태웅이가 드래프트될 거야. 어딘지 봐 뒀다가 같은 데 입단하면 좋잖아."

윤대협은 다 계획이 있구나.

"선배라고 불러야지."

아주 신이 났구나. 사내 연애... 아니 팀 내 연애할 생각에.


고용 사장으로 카페를 시작한 지 2년 차.

낯설었던 자영업도 이제는 자리를 잡고. 윤대협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마케팅이나 기획을 벼른 결과. 아무것도 없는 주택가임에도 불구하고 주말에는 어느 정도 웨이팅이 생길 정도로 궤도에 올랐다. 우리 카페 들르는 김에 주변 시장에서 밥 먹고 온다는 리뷰가 늘어나면 그렇게 뿌듯하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나서부턴 농구 시즌이 되면 그럭저럭 챙겨 본다. 한 팀 경기만.

신인왕 후보인 주전 포워드와 은퇴를 번복한 포인트가드가 골 하나 넣을 때마다 손바닥을 부딪히고 가슴팍을 문대고 어깨를 끌어안는 걸 혀를 끌끌 차면서 지켜본다.

저러면서 아직도 안 사귀겠지...

서로밖에 없는 주제에. 서로밖에 없어서 차마 고백을 못 하는. 끝도 없는 맞짝사랑의 굴레.

드라마 왜 보냐. 난 농구가 제일 재밌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청첩장이 날아오기 전까진...

서태웅이 만으로 스물두 살이 되던 해였다.

"윤대협 이 미친 새끼 손 안 댄다며!!!"

열받아서 결혼 선물은 중고로 했다. 윤대협의 손때가 탄 핸드 밀.

서태웅 이제 어른이니까 레모네이드 말고 커피 마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