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ARD
Writing/Series
2024.02.19

Let the right one in 2

불면의이쑤신

카에데는 숲속에 서 있었다.

턱 아래가 전부 피투성이였다. 발 아래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남자도 피투성이다. 카에데는 두 손을 뻗었다. 남자의 머리 양쪽을 단단히 붙잡고, 180도로 꺾었다. 뚜두둑, 간단하게 경추가 박살 나는 소리가 났다. 피 흘리는 사냥감을 한 번에 보내주는 무덤덤하고 자비로운 손길.

카에데가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변한다. 짐승처럼 길고 단단하게 솟구친다. 크게 휘둘러 사체의 목덜미를 위에서 아래로 한 번 찢었다. 이빨 자국이 가려지길 바라며.

아니라면... 그것도 어쩔 수 없지.

카에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내린다. 하얀 숲 속에 뿌려진 피 위에 떨어져 붉게 물든다.

오랜만의 식사였다. 몇 주째 멈추지 않았던 꼬르륵 소리가 멈췄다. 땅 밑으로 자신을 잡아당기는 듯이 무겁고 지친 감각도 사라졌다. 몸이 가볍다. 그리고 역겹다.

카에데는 아키라의 웃는 얼굴을 생각했다.

너와 친구가 될 순 없다고 말해줬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너무 늦었다. 아키라가 패스를 가르쳐 주기로 했다.

두 손을 모아 내려다본다. 몸집에 맞지 않게 우락부락 부풀어오른 피투성이 오른손. 짐승의 엄니 같은 검지 손톱을 똑바로 세워 심장을 겨냥해 본다. 이대로 찔러도 카에데는 죽지 않는다. 회복을 위해 더 많은 피가 필요해질 뿐이다.

왜 자신과 같은 존재들 중 다수가 햇살 아래 스스로 불타오르기를 선택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에데는 살고 싶었다.

살아있어서 아키라를 만났고, 농구를 배웠다.

심호흡을 한번 크게 내뱉고, 카에데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나무에서 나무로 숲을 건너간다. 엄청난 속도로. 침엽수 위에 아슬아슬 얹혀 있던 눈 무더기가 추락했다. 피와 시체를 덮는다.

오늘은 씻어내릴 것이 많다.


"아키라."

헛간 안에서 슛을 쏘려던 찰나, 등 뒤에서 카에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키라는 돌아보기를 망설였다.

"들어가도 돼?"

아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에데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 줘."

"그래, 들어와. 네 마음대로 언제든지 여기 와도 돼."

할아버지가 있을 때만 빼고... 황급히 덧붙이는 아키라에게로 카에데가 다가선다. 오늘은 가까이 와도 그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안락사를 앞둔 개에게서 나던 비린내. 드디어 씻은 걸까.

냄새 말고도 카에데는 평소보다 상태가 좋아 보였다. 머리카락에 윤기가 보였고 눈 아래 움푹 들어간 부분도 사라졌다. 오동통한 볼선이 하얗게 드러났다. 여전히 혈색이 거의 없었다.

밤하늘처럼 깊은 눈동자가 아키라를 빤히 바라본다. 정확히는 아키라의 얼굴에 번진 붉은 멍을.

아키라는 뒤로 물러서며 농구공을 던졌다. 카에데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 허리를 숙이며 끌어안듯이. 아키라가 고개를 저으며 두 손을 삼각형 모양으로 가슴께에 모으고 자세를 낮췄다.

"이렇게 하는 거야. 패스."

나한테 던져 봐. 카에데는 좀 고민하다가 농구공을 아래에서 대포알을 쏘듯이 던졌다. 포물선의 각도가 제법 높았다. 아키라는 이마 위에서 그것을 잡아 멋진 손목 스냅으로 그대로 슛을 쐈다. 골인이었다.

둘은 밤이 깊도록 실컷 패스 연습을 했다. 드리블, 패스, 슛. 카에데는 이제 세 가지를 제법 섞을 줄 안다. 아키라는 점점 카에데와 하는 농구가 재미있었다. 무언가를 보여주면 바로 따라 한다. 쉽게 포기하지 않고 될 때까지 시도한다. 잘 기억해 뒀다가 한 방 먹이기까지. 슬슬 일 대 일 대결이라고 부를 만한 주고받기가 가능했다. 물론 아키라가 한참 봐 주고 있었지만.

카에데가 멋진 레이업을 성공시키고 돌아섰다. 공이 림을 통과하기 전부터 골인임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미련 없었다. 제법 멋있는 선수가 되어가는데. 왠지 뿌듯한 감상에 젖어있는 아키라를 향해 카에데가 걸어온다.

손가락을 뻗어 아키라의 입가에 박힌 피멍을 건드린다. 따끔했다. 그보다 먼저 느껴진 감각은 차가움.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손끝이었다.

화제로 삼고 싶지 않아 애써 무시하던 것을 건드리며 카에데는 아키라를 똑바로 쳐다봤다.

"왜 너는 한 대도 안 때렸어?"

아키라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지? 벌써 소문이 난 것일까? 폐가나 다름없는 오두막에 하루 종일 갇혀서 학교조차 안 다니는 카에데가 다른 사람에게 아키라의 이야기를 듣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카에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아무런 정보를 알 수 없었다. 이미 전말을 아는 것 같은 눈치에 무엇부터 얘기해야 할지 망설여져 아키라는 괜히 바닥만 봤다.

아키라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 건 하교 시간이었다. 한발 빨리 교문을 나섰어야 했는데 종례 시간에 조는 바람에 피해 오던 놈을 딱 마주쳤다.

그 녀석도 어딘가 몰려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키라가 꼴 보기 싫다고 떠든 적은 많지만 직접 부딪힌 적은 없다. 더 이상 아키라에게 고백했던 여자애의 감정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대로는 같이 다니던 무리에게 허풍이 될까 두려웠을 것이다. 두려움에 몰린 짐승은 뭐라도 문다.

아키라는 두려움에 몰린 짐승이 이를 꽉 물고 다가오는 순간의 긴장이 싫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잡아당겨진다. 최악이었다. 할아버지가 딱 한 번 데려가 줬던 여름 사냥이 자꾸 떠올랐다. 총구 너머로 지켜보던 사슴이 이쪽을 눈치채기 직전의 날카로운 숨 막힘.

차라리 한 대 맞아주면 긴장이 풀릴 것 같았다.

아키라는 반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번째 주먹을 피한 후엔 무조건 달렸다. 도망치는 아키라의 등 뒤로 뭐라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렸지만 그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카에데가 다시 물었다. 딱히 따지거나 훈계하는 어투는 아니었다. 순수하게 궁금한 것 같았다.

"네가 훨씬 더 크고 강한데, 왜 반격하지 않지?"

정말 보고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 주변에는 분명 아무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카에데는 무심한 얼굴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무서워?"

암흑처럼 깊고 까만 눈동자. 아키라는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카에데는 처음부터 그 장면을 목격했던 게 아니라, 마치 아키라의 마음속을 읽어서 알고 있는 것 같다.

"네가 맞는 게 아니라..."

카에데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아키라의 심장이 요란을 떨었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비밀이 폭로 당할 것만 같다. 조그마한 입술을 두 손으로 우악스럽게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오른다. 제발 말하지 마. 아키라는 카에데가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면서 간절하게 빌었다.

"네가 제압하는 게."

아키라는 그 순간 자신의 공포를 완전히 이해했다.

아키라는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키와 함께 몸무게도 쑥쑥 늘었다. 평범하게 농구를 해도 공중에서 부딪히면 동기들은 물론 가끔은 선배들까지도 나가떨어졌다. 낯설었다. 거리끼지 않으면 모두가 쉽게 나동그라진다. 그런 일을 편리하게 느낀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

긴장이 싫었던 게 아니다. 사냥이 싫었다. 자신 안의 사냥 본능이 재미를 느낄까 봐 무서웠다. 스스로 궁지에 몰린 짐승이 이빨을 드러낼 때 그 모가지를 잡아 비트는 일이 손쉬울 뿐 아니라 거리낌 없어질까 봐. 한 번만 선을 넘어도 그렇게 되리란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폭력이 싫었던 게 아니다. 폭력을 휘두르고 싶지 않았다.

잘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카에데가 아키라의 양쪽 뺨을 콱 붙들었다. 겨울 냉기처럼 차가운 손바닥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칠흑 같은 눈동자가 담담하게 진실을 말한다.

"맞서 싸워. 아키라. 그건 괜찮아."

"하지만..."

"방어를 해. 정당한 거니까. 물론 기분은 더러워.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다. 아키라는 카에데의 마지막 말을 따라 했다. 이렇게 길게 말한 거, 처음 아닌가?

카에데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한다. 가소로울 정도로 약한 자들의 악의에 손대야 하는 순간이 얼마나 내키지 않는지. 이토록 작고 연약하고 소녀인지 소년인지도 알 수 없는 아이가...

"쉽게 용서하지 마. 용서로 달아나지 마. 너를 지켜. 상대를 지키기 전에."

세상 그 무엇보다 나를 가장 우선하라고 말해준다.

"그래도 안 될 때는 내가 지켜줄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아키라는 웃었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눈물 속에서 하하하 소리 내어 웃는 아키라를 바라보는 카에데의 표정은 정말 이상했다.

아키라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외로움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구나. 아무것도 없어서 비어 있는 줄도 몰랐던 게 꽉 차오르는 거구나. 아키라는 처음으로 알았다. 동시에 이것을 잃으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텅 비게 되리라는 것도.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감각이었다.


다음 날, 아키라는 수업을 거의 듣지 못했다. 밤마다 카에데와 농구하느라 수면이 부족했다. 꾸벅꾸벅 졸다가 정신이 들면 도서관에서 빌려 온 두꺼운 책을 펼쳐 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종이에 베껴 썼다. 농구부 동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몰래.

아키라에게 주먹을 휘두른 놈은 조용했다. 상처를 달고 있는 동안은 놈이 더 이상 덤비지 않을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복도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흘끗, 아키라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 우월감에 살짝 도취된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지나갔다. 이렇게 쉽다니. 웃음이 날 정도였다. 역시 맞서기보다는 한 대 맞아주는 게 부담이 적은 것 같기도 했다.

하교 후에는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면 카에데가 나온다. 오늘은 카에데에게 멋진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거 봐. 요즘 연습하는 거야."

아키라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집중에 빠진다. 카에데를 제칠 듯이 달려들었다가, 멋진 드리블 스킬과 함께 뒤로 한 번 빠진 후, 휙 돌아서서 골밑슛.

카에데를 돌아보며 아키라가 웃었다.

"어때? 멋있어?"

카에데는 대답 대신 공을 주워 왔다. 드리블을 시작한다.

"나도 할 수 있어."

"쉽지 않을걸?"

흥, 대놓고 비웃더니 아키라를 향해 돌진한다. 아까 보여준 걸 똑같이 따라 할 걸 알고 있으니 동작이 읽힌다. 아키라는 쉽게 공을 쳐 냈다. 카에데는 순간 당황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쫓아가 공을 다시 손에 넣었다. 차분히 드리블하며 뚫을 곳을 살핀다. 그러다 돌파, 아니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드리블, 아까 아키라처럼 돌아서서...

앗! 반대 방향이었어. 카에데가 날아오른다. 아키라가 알려 준 슛이다. 멋지게 성공.

"했다!"

카에데가 한쪽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세리머니치고는 소박했다. 숨을 몰아쉬는 카에데의 두 뺨이 드물게도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키라는 처음으로 카에데도 심장이 뛰고 피가 도는 인간이라고 느꼈다. 조금만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이면 서로의 심장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아서, 아키라는 얼른 소리 내어 칭찬했다.

"제법인데?"

"얼마든지."

"내가 제대로 수비하지 않아서겠지만."

하, 카에데가 짧게 내뱉었다. 다시 덤벼온다. 아키라는 이번엔 안 봐주고 전심전력으로 수비했다.

할아버지가 큰 소리로 아키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키라는 화들짝 놀랐다. 벌써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지금 가요! 황급히 대답하고 주머니에서 잘 접어 둔 종이를 꺼냈다.

카에데가 눈을 깜빡였다.

"모스 부호야. 바다에서 등대와 배가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방식이래."

아키라가 카에데의 손을 잡고 헛간 밖으로 나왔다. 불이 꺼져 있는 다락방의 동그란 창문을 가리킨다.

"이따 저 창문을 올려다봐. 내가 신호할게."

카에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꼭이야. 들어가자마자 봐."

"알겠어."

신신당부를 마치고 아키라는 달려서 집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카에데는 아키라가 쥐여주고 간 종이쪽지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코에 대고 크게 숨을 들이켜 본다. 연필의 흑연과 짭짤한 땀 냄새. 하루 종일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차가운 종이에서 온기가 전해질 것만 같았다.

카에데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창가로 다가가 가림막 역할을 하던 널빤지를 치웠다. 키 작은 중년 남성이 뒤쪽에서 그를 불안하게 바라본다. 가구 하나 없는 거실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박스들. 카에데가 그중 하나로 다가선다. 멀뚱히 서 있는 중년 남성에게 차갑게 말했다.

"비켜."

박스를 뒤적이자 손전등이 하나 나왔다. 달칵여보니 다행히 전지가 있다. 카에데는 그걸 들고 창문 앞으로 달려갔다.

다락방의 동그란 창문에서 불빛이 반짝인다. 짧은 것과 긴 것을 헤아려, 아키라가 준 쪽지에서 히라가나와 맞춰 본다.

카 에 데

모스 부호가 끝났음을 알리는 짧은 신호 두 번. 이번에는 카에데가 답장을 보냈다.

아 키 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신호가 다시 깜빡인다.

잘 자

카에데도 똑같이 돌려주려 했는데, 아키라가 무언가 덧붙인다.

내 일 봐

카에데는 작게 웃었다. 그 소리를 듣고 중년 남성은 소름을 쓸었다.

카에데가 웃었다. 중년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구차하게 물었다.

"내일도 그 애를 만날 거야?"

"응."

여전히 시선은 다락방 창문에 못 박은 채로 카에데가 단박에 답했다. 불꽃 같은 질투가 치솟아 차가운 카에데의 태도와 부딪히며 가슴 속부터 오한이 일어 이빨이 딱딱 떨렸다.

중년 남성은 인생에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들이 결정적인 연쇄작용을 일으켰을 때 드디어 삶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용기가 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카에데는 그런 때에 나타났다.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대신 너도 나를 도와 달라고.

중년은 카에데를 원하지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지금까지 아버지와 아이인 양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도시에서 시골로, 점점 외곽으로, 점점 북쪽으로.

카에데에게 필요한 건 아주 간단했다. 살아있는 인간의 피. 카에데가 혼자서 구할 수도 있지만, 너무 많은 증거가 남아 위험했다. 어린아이는 좋게도 나쁘게도 눈에 띄었고 기억에 잘 남았다. 오래 굶어 피로한 시기에는 더더욱 도움이 필요했다. 바로 지난주처럼...

그러나 중년은 용기도 없고 서툴기 그지없었다. 살인을 저지르고 피를 빼돌리고 그 모든 범행을 감추는 정교한 일 따위는 대체로 실패로 돌아갔다. 카에데는 언제나 실망했고, 점점 더 차가워졌다. 지난주도 결국 카에데는 기다리다 못해 홀로 사냥을 나갔고 간단하게 성공했다.

중년은 카에데와 있으면서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서 카에데를 만지고, 카에데를 사랑하고, 카에데에게 사랑받고 싶었지만... 쓸모 있는 존재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옆집 아이는 간단히 카에데를 웃게 만든다.

중년은 피멍이 맺히도록 손톱을 꽉 쥔 채 힘겹게 다짐을 뱉어냈다.

"나는 내일... 다시 시도해 볼게."

카에데가 휙 돌아본다. 오늘 들어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해 준 것이다.

"할 수 있겠어?"

카에데의 의심이 아프다. 중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더 오래 카에데의 곁에 있었다. 내가 더 카에데를 잘 안다. 내가 더 카에데를 원하고...

"나도... 할 수 있어."

카에데는 떨림을 쉽게 진정하지 못하는 중년 남성을 관찰하듯 빤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 오늘 아키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도발하듯 까딱 올라간 한쪽 눈썹과 예쁜 호선을 그린 입꼬리. 순수하고 악의 없는 말투. 머릿속의 아키라를 그대로 따라 해 본다.

"쉽지 않을걸."

이렇게 음울한 목소리는 아니었는데. 카에데는 입을 다물었다.

중년은 주춤주춤 다가섰다. 카에데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견디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껴안으려 했지만, 카에데가 팔을 붙잡아 저지했다. 카에데에게 팔을 붙잡힌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 중년이 절절하게 부탁했다.

"내가 만약 실패하면, 카에데, 꼭 나를 먹어 줘."

카에데는 중년 남성이 가여웠다. 그의 인생 전체를 지배하고 망쳐버린 맹목적인 욕망과 총체적인 무능이. 동정으로 할 수 있는 일. 사랑은 해당하지 않았지만 흡혈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카에데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중년 남성의 얼굴에 환희가 차올라 원래 나이보다 약간 어린 인상이 되었다. 카에데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그러나 감동한 그가 다시 껴안으려 하는 것은 확실하게 거절했다. 이 자는 늘 적당히 멈출 때를 모른다.


상처가 나아 버렸다.

다음 날 센도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공식적인 이유는 장염이었고, 진짜 이유는 놈이 말끔해진 아키라의 얼굴을 보면 다시 덤벼 올 것이 뻔한데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는 거였다. 오늘은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뒹굴이다.

카에데의 오두막을 내려다본다. 어젯밤 잠깐 내려갔던 가림막이 다시 올라가 있다. 날이 흐리다. 이 정도면 불빛이 보일 것 같다.

창문으로 신호를 보내 봤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집에 없는 걸까? 카에데는 낮에 뭘 할까? 학교를 가냐고 물어봤을 땐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오두막에서 키가 작고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성이 나왔다. 수상할 태도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는 짐이 많았다. 뭔가 잔뜩 들어있는 묵직한 손가방과 1갤런짜리 플라스틱 통을 한 손에 들고, 가슴 속에 투명한 액체가 담긴 잼 병을 꼭 안고 있었다. 정말 이상했다.

아키라는 찝찝한 기분이 들어서 창문 밖을 그만 내다보기로 했다. 왠지 잊고 싶은 광경이었다.

저녁 식사를 할 때쯤엔 그럭저럭 속이 괜찮아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배고팠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웬일로 석간신문을 읽고 있었다. 항상 조간만 읽으시던 분인데. 단골 식당에서 사 오신 것 같다.

아키라에게 헤드라인을 툭툭 손짓하며 보여준다.

"곰은 무슨 곰."

숲속 살인 사건의 범인은 결국 사람이었다. 그것도 연쇄살인! 기사에 따르면 그는 오늘 정오쯤에 두 번째 살인을 시도하다 현장에서 다수의 목격자가 발생해 큰 소리로 저지당했고 어이없이 실패했다. 훤한 대낮에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럼에도 아무도 이 어설픈 연쇄살인범의 신원을 모른다. 경찰이 오기 직전에 제 얼굴에 염산을 부었기 때문이다. 어찌나 끔찍한지 자극적인 소식을 사랑하는 석간신문조차도 연쇄살인범의 얼굴 사진은 싣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범.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이전처럼 두려워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어쨌든 경찰에 잡혔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아직 감옥은 아니고 병원에 있다고 한다.

감옥에 보내기 위해 치료를 받아야 하는구나. 절반 이상 녹아내린 모르는 얼굴을 막연히 상상하고 아키라는 몸을 떨었다.

그날 밤, 아키라는 할아버지 몰래 집을 빠져나가 헛간으로 달렸다. 물론 농구공을 들고. 장염 환자가 하기에는 지나치게 활발한 활동이기에 들키지 말아야 했다. 스릴이 엄청났다.

아무리 기다려도 카에데는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