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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5.07.27

페어 플레이 1

불면의이쑤신

인생에서 어떤 장면은 여러 번 반복된다. 변주라고 부르는 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런 장면은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였어도 이상하지 않고.


열아홉의 봄이었다.

윤대협의 대학 입학은 스카우트로 정해졌다. 고등학교 때처럼. 한 번 경험해 봐서 그런지 그때처럼 설레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느꼈다.

유턴하는 고등학생. 부모님과 형제들이 사는 도시로 돌아왔다. 고등학교 시절의 짧은 자취 생활은 막을 내렸다. 어차피 주말엔 훈련만 없으면 부모님 댁에 갔으니 절반의 자취였는지도. 어쨌든 최소 주에 5일은 혼자 산다는 건 주변 또래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특권이자 책임이자 자유였다. 분명히 특별했다. 힘들었던 날도 심지어 외로웠던 날도 있었던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는 기억나지 않았다.

반면 큰 사고만 일으키지 않으면 아슬아슬하게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았었던, 학교를 제외하면 그 누구와도 약속된 일정이 없었던, 언제든지 훌쩍 파도 소리를 들으러 갈 수 있었던 온전한 자유는 강렬하게 몸에 새겨졌다. 윤대협은 덕분에 확실하게 알았다. 자신은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타입이라는 걸.

이제 다 과거다.

집 밖을 나서면 새로운 생활. 새로운 사람들. 대학은 고등학교와 완전히 다른 사회다. 규칙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 입는 옷부터 집을 나서는 시간이며 만나는 얼굴과 생활 반경까지. 달라지지 않은 건 농구뿐이었다. 윤대협의 하루는 주로 농구를 위해서 시작되고 끝났다. 그것만은 여전했다. 그것만 생각하면 적응이 어려울 이유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 레코드를 보고 스카우트해 온 만큼, 윤대협은 언제나 그랬듯이 코트에서 환영받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마련된 자리에서 빛나는 일, 기대를 충족하다 못해 심지어 능가하는 것, 그렇게 결국 대체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 해 본 일이었고 또 자신 있는 일이었다.

집에 들어오면 가족들이 있다. 새로울 것 없는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금… 낯설었다. 3년간 혼자 살았던 경험이 너무 강렬했던 것일까. 농구가 태양처럼 중심에 있고, 의식주가 행성처럼 규칙적인 궤도를 도는 생활. 돌이켜 보면 윤대협은 고등학생 때도 그렇게 살았다. 누가 그러라고 한 게 아니라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 그렇게 살다가도 틈이 생기고. 예전엔 그 틈에서만큼은 혼자였지만.

지금은 어딜 가도 다른 사람들이 있다. 집 안에도.

그러니까 가족과의 생활도 엄밀히 말하면 단체 생활인 것이다. 식사는 집에서 할 것인지, 몇 시까지 연습하고 귀가할 것인지, 합숙 훈련은 언제인지 매번 공유해야 하는 귀찮음. 윤대협은 잘 까먹었고 그러고 나면 또 죄송해졌다. 땀에 전 운동복을 버릇처럼 세탁 통에 던져 놓으면 어느새 저 혼자 깨끗해져 서랍 안에 들어간다. 편리하긴 했지만 역시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부모님으로서는 운동과 학업에만 집중하길 바라는 마음이 크고, 그 정도는 서포트라 하기도 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다 알면서도 윤대협은 아무래도 조금 어색했다. 다시 어린아이가 된 것 같다고 느꼈다. 동시에 모두가 이제 대학생이니 어른이 된 것처럼 취급하기 때문에 은은한 위화감이 있었다.

현관문을 연 순간에 누군가 다녀왔니, 인사해 주는 것. 그것만 순수하게 좋았다.

혼자가 되고 싶을 때. 고등학교 앞에는 바다가 있었다. 지금은 그조차 없다. 윤대협은 새로운 취미의 필요성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적극 찾아 나설 정도로 간절하진 않았다. 생활이 바뀌어 적응하는 과정이겠지. 마음만은 느긋했다. 온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었던 시절과는 조금씩 어긋남을 느끼면서도.

라이벌 대학에서 원정 친선 경기를 마친 날. 윤대협은 원래 루틴대로 자교 체육관에서 마무리 훈련을 하고 들어갈 예정이었다. 보통은 단체 버스를 타는데 그날은 왠지 걷고 싶었다. 윤대협의 걸음으로 3~40분 정도 거리. 적당한 쿨다운 유산소도 되고.

터벅터벅 길을 걷다가. 윤대협의 시선이 문득 멈췄다.

대로변을 향한 전면 유리창에 꼭대기부터 열을 맞춰 붙어 있는 새하얀 A4용지 속 숫자들. 갖춘 듯이 일정한 형식은 이랬다. 몇 평, 방 몇 개, 보증금 얼마, 전세 월세 매매 얼마, 역에서 몇 분.

그러니까 부동산에 붙은 광고들이었다.

윤대협은 물끄러미 그 숫자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드물게 시선이 맞는 꼭대기에 있는 것부터 쪼그려 앉아야 할 정도로 맨 아래에 붙은 것까지. 종이 한 장 위 간결한 숫자를 본 것만으로 특정한 공간이 마음대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넓은 집, 좁은 집, 원룸, 투룸, 스리룸, 가격이 비싸면 왠지 고급스럽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걸음을 옮겨 다시 터벅터벅. 학교를 향하는 내내 머릿속엔 특정한 공간이 마음대로 그려졌다. 윤대협은 즐거이 여러 가지 빈집을 상상하며 걸었다.

혼자가 될 수 있는 그 모든 집을.

그 이후로 윤대협은 부동산이 보일 때마다 조용히 눈을 반짝거리며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부동산이 그렇게 많았다니. 도시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평소에는 너무 자연스럽게 배경에 녹아 있다. 찾는 사람에게만 눈에 보이는 마법의 가게 같았다.

특히 등하굣길은 대학 근처라 유난히 부동산이 많다. 개중에는 건물 안에만 광고를 붙여 놓은 곳도 종종 있었다. 윤대협은 스스럼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키가 큰 윤대협이 살짝 고개를 숙여 유리문 안쪽으로 얼굴을 넣으면, 차임 소리를 듣고 나온 중개사들은 하나같이 어우… 하면서 감탄사 같은 걸 내뱉곤 했다. 아무래도 덩치 때문이겠지? 윤대협은 그렇게 짐작해서 위협이 되지 않기 위해 특별히 공들인 미소를 지으며 벽을 빽빽이 뒤덮은 A4용지들을 가리켰다.

“안녕하세요. 이것 좀 구경해도 되나요?”

거절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새로운 관심사는 새로운 취미로 진화했다. 운동과 학업만으로도 바쁜 대학 농구선수지만, 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 그럼에도 틈틈이 비는 시간은 있다. 누군가는 혼자서 휴대폰에 집중하고 누군가는 부지런히 친목을 다지고 심지어 누군가는 각별히 튼튼한 신체를 앞세워 음주가무에 전념한다.

윤대협은 부동산에 다녔다. 가 본 적 없는 신선한 지역을 원하면 조금 긴 산책에 나섰고, 익숙한 곳에 가는 건 마실에 가까웠다. 지금은 부모님 댁에 있지만 언젠가 나와 살고 싶다는 훤칠한 대학 농구선수를 유망한 잠재 고객으로 생각했을까. 누구도 문전박대하지 않았다.

더러 열정적인 중개사가 자발적으로 집을 보여줄 때도 있었다. 윤대협은 냉큼 따라가서 아슬아슬하게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이 집 저 집 구경하다 훈련 시간이 다 된 걸 뒤늦게 눈치채고 거듭 사죄하며 중개사를 둔 채로 학교 체육관으로 복귀했다. 죄송했던 마음은 진짜라서 다음에 찾아갈 때 음료수나 과자라도 하나 사 가면 대체로 뭘 이런 걸 가져오냐면서 웃어 넘겨주었다.

남자 중개사 중에 젊고 외향적인 타입은 자기들이 나서서 형이라고 부르라는 둥 친밀하게 굴기도 했다. 윤대협으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취미는 나날이 발전했다.

운동부는 기본적으로 단체 생활이다. 하지만 선배들이라면 모를까 동기나 후배가 밥을 먹자, 술을 마시자, 어디 같이 놀러 가자고 할 때 윤대협은 그리 적극적으로 끼지 않았다. 아는 형과 약속이 있다고 하면 대체로 이해해 줬다. 가끔 어떤 사이냐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이 앞에 부동산 집 형이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면 아 원래 알던 동네 형이구나 하고 납득. 집 구경하러 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윤대협의 취미는 본의 아니게 비밀에 부쳐졌다.

실물을 보고 나면 당일이든 다음 날이든 중개사가 반드시 계약 의사를 물었다. 심판을 기다리는 어린양처럼 간절한 태도의 중개사를 앞에 두고. 윤대협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처음에는 보는 눈이 없어서 선뜻 뭐라 말할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보는 눈이 너무 생겨서 이거다 싶은 곳이 없었다. 아무래도 부모님 댁에서 멀쩡히 통학 중인 상태이다 보니. 기존의 생활을 흔들고 추가로 돈을 지불할 만한 훌륭한 집이 아니라면 굳이. 교통, 채광, 상수도, 집의 구조, 특별히 큰 신체 조건에도 충분한 면적. 예산이 아주 많다면 불가능한 조건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부모님께 의존해야 하는 만큼 합리적인 가격 역시 양보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그런 꿈의 집은 존재하지 않았다. 도시, 그것도 대학가의 부동산은 만만치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몇몇 부동산은 윤대협을 무해한 아이쇼퍼 취급하며 굳이 실물을 보여주겠다는 제안 없이 광고만 보고 가도록 방치하기 시작했다. 몇몇 머리 좋은 중개사는 긴가민가 고민하는 손님들을 현장으로 데려갈 때 마침 윤대협이 있으면 미리 약속된 것처럼 달고 갔다. 윤대협은 눈치껏 관심 있는 척 이런저런 질문을 했고 그 장소가 제법 마음에 든 손님들은 경쟁자가 채갈까 봐 계약을 서둘렀다. 돈 한 푼 안 내고 구경만 다니는 게 좀 민망하기도 했던 윤대협으로서는 기꺼운 일이었고 중개사로선 드디어 이 훤칠하고 돈 안 되는 명물 손님의 쓸모를 찾아내어 기뻤다.

이미 친밀해진 젊은 남자 중개사들이나 도전 의식이 강렬한 중개사는 지치지 않고 좋은 매물이 나오면 누구보다 먼저 윤대협을 데려갔다. 제아무리 까다로운 고객이라도 굴복시킬 만한 ‘애장품’을 자랑하는 태도였을까.

하지만 윤대협은 한 번도 고개를 끄덕인 적 없었다. 뭔가 하나 부족했다. 부동산 보는 눈만 점점 높아졌다.

윤대협은 누가 봐도 비범한 농구선수였다. 지역의 한계를 깨고 전국적 인지도를 얻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고등학생 때와는 달랐다. 처음부터 스타였다. 코트에선 그랬다.

하지만 대학생으로서 윤대협은 아주 평범했다. 선배들은 든든해했고 후배들은 동경했다.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그건 고등학교 때도 그랬으니까.

남다른 취미 생활 하나만 빼고.


서태웅은 열여섯의 가을부터 열일곱의 여름까지,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와 3학년 1학기를 미국에서 보냈다. 유학이라기보다 교환학생 개념이었다. NCAA 디비전 Ⅰ에 소속된 강호였다. 당연히 경기 대부분은 벤치였고 출전 시간은 짧았다. 그러나 친선 경기나 정규 훈련, 심지어 내부 청백전만으로도 고등학교 시절 전국대회에 나갔을 때만큼이나, 어쩌면 그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욱 치열한 농구를 경험할 수 있었다.

거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보다 월등히 수준 높은 팀에 속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열등감이 찾아오기 좋은 조건인데 서태웅의 유달리 단순한 사고회로는 거기까지 가지도 못했다. 독기 가득한 경쟁 특유의 찌릿찌릿한 전류가 온몸을 감쌀 때마다 서태웅은 오직 이렇게 생각했다. 역시 국내 최고만이 올 수 있는 자리로구나. 나는 제자리에 있구나. 강한 확신이 전신을 지배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모두를 이기지 못했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농구가 너무 즐거워서일까?

서태웅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실 그는 매일 승리하고 있었다. 어제의 자신을 상대로.

도약할 준비로 잔뜩 부풀어 있던 서태웅의 성장은 눈부셨다. 자는 순간과 먹는 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농구만 생각하고 농구만 추구하고 농구에 대해 질문하고 농구에 대해 실험하며 자신의 농구를 벼려 나갔다.

순간이 지나가면 과거로 남아버릴 그 모든 시간들.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은 퇴적하는 물질이었다. 퇴적은 서태웅의 신체를 통해 성과로서 그 존재를 증명했다. 처음에는 그야말로 벤치에도 들어가지 못할 전력 외였으나 막판엔 전교에서 열세 명만 출전할 수 있는 마치 매드니스 로스터에 단 두 명뿐인 1학년 중 한 명으로 포함되는 기염을 토했다. 아무리 다양성에 적극적이고 진보적인 학풍의 대학이라지만 교환학생 1학년이 거기까지 가는 건 전무후무한 이례였다. 파이널까지 진출한 토너먼트에선 부상이 많은 막바지에 교체 출전하여 짧은 시간이나마 임팩트 있는 득점 장면을 선보였다.

팀원들도 서태웅을 좋아했다. 동양인 스테레오 타입에 그린 듯이 꼭 맞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 그러나 농구에서만큼은 피드백을 즉각 받아들일 뿐 아니라 나서서 내놓으라고 요구하기까지 하는 적극성. 전 세계에서 가장 농구에 미친 인간들로 가득한 곳에서조차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집요함과 성실함. 코트 위에서는 승부에 미쳐 있지만 경기가 끝나고 나면 어떤 일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쿨함. 어떤 포지션을 주문해도 원래 그것만 해왔다는 듯이 선뜻 받아들이는 기묘한 자신감.

미국에서의 농구는 지금까지 해왔던 중 가장 어렵고 힘든 농구였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즐겁고 행복한 농구였다. 서태웅은 그렇게 생각했다. 1년을 더, 2년을 더, 계속 버텨본다면 점점 더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서태웅은 비자 연장을 도모하는 대신 예정대로 귀국을 선택했다.

국내 대학의 영입 경쟁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서태웅은 수많은 어른들의 간절한 설득을 들으며 그들의 말처럼 코트에서 활약하는 자신을 떠올렸다. 모든 경기에 풀타임으로 뛰는 모습을. 그 감각을. 마치 지금 당장 목덜미에 경기장의 강한 조명이 떨어지고, 발바닥에서 끼긱 마찰음이 울리고, 손바닥에 뜨거운 농구공이 달라붙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시 코트에서 뛰고 싶었다. 사는 동안 1초라도 더 오래.

그래서 서태웅은 예정대로 귀국을 선택했다. 유턴하는 고등학생. 본국 농구계의 기대는 엄청났다. 심지어 고교 신분으로 얼리 드래프트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던진 프로 구단까지 있었다. 그러나 전 세계 최고의 리그를 경험한 서태웅은 이제 앞서 나가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걸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았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예전처럼 또래들과 같은 리그의 충분한 출전 기회 속에서 그 누구의 평가도 아닌 자기 자신의 신체로 느끼고 싶었다.

서태웅은 대학 농구 리그에 참가하는 모든 대학의 구애를 받았다. 그중에서는 학창 시절 라이벌인 윤대협과 같은 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운 곳도 있었다. 실제로 손꼽히는 명문 강호 학교라 유력 후보 중 한 곳이었다.

서태웅은 9월에 귀국해 끝까지 북산 고등학교 농구부로 활약했다. 최종적으로 입학을 결정한 학교는 윤대협이 들어간 명문대의 가장 큰 라이벌 대학이었다.

입학 전에도 후에도 윤대협을 기억하느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그게 열여덟의 봄이었다.


윤대협은 단골 부동산 중 한 곳에 들어섰다. 가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생각지 못한 아는 얼굴이 있었다. 벽면을 가득 메운 하얀 A4용지를 뚫어져라 노려보면서.

윤대협은 머릿속을 그대로 뱉었다.

“서태웅?”

아는 얼굴이 돌아본다. 서태웅이 맞는 것 같다.

“여어…”

확실히 서태웅이 맞았다. 윤대협은 웃으면서 마주 인사해 주었다.

“여어. 여긴 어쩐 일? 방 보러 왔어?”

자기 집처럼 응접실 한가운데 소파에 앉아 맞은편 자리를 턱짓하는 윤대협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서태웅이 툭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너네 부모님.”

“응?”

“부동산 해?”

윤대협은 파핫, 한숨이 터지듯이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아니. 그냥 자주 오는 곳이야.”

서태웅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아. 하고 짧게 알았다는 듯이 내뱉더니. 다시 A4용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너도 집 구하는 거구만. 뭐 그런 뜻이겠지? 윤대협은 알아서 짐작했다. 윤대협이 기억하는 서태웅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대체로 투명하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딱 한 번의 질문만 빼고.

서태웅의 귀국 소식은 알고 있었다. 기사가 났다. 심지어 스포츠 뉴스 마지막에 10초 정도 나왔던 것 같다. 미국에 진출했던 유망주가 대학 리그로 유턴했다던가. NCAA 토너먼트에서 수비를 따돌리고 덩크를 꽂아 넣는 플레이를 닫는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멋있던데. 10초만으로도 윤대협은 알 수 있었다. 많이 늘었다는 걸.

친한 중개사 형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화장실에라도 갔나. 윤대협은 부모의 원수처럼 하얀 종이들을 노려보는 (아까부터 한 개만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서태웅의 옆모습을 보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검열 없이 내뱉었다.

“집이 멀어? 자취하려고?”

서태웅의 옆모습이 눈만 힐끗. 윤대협을 보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체대생은 기숙사 아냐?”

“…놓쳤어.”

그 대답까지는 짧은 침묵이 있었다. 순수한 궁금증이 생기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윤대협은 굳이 물어보았다.

“어쩌다?”

이번에는 좀 더 침묵이 길었다. 서태웅의 눈동자는 윤대협 쪽으로 굴러가는 대신 바닥으로 한 번 내리깔렸다가 다시 정면을 노려보았다.

“까먹어서.”

“그랬구나…”

윤대협은 빙그레 웃었다. 퉁명스러운 태도지만 대답은 꼬박꼬박 한다. 피하면 지는 것처럼. 목 뒤쪽을 벅벅 긁으며 눈썹을 찡그리는 옆얼굴. 부동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

뭐, 알아서 하겠지.

그때 윤대협과 이젠 거의 친구처럼 호형호제하는 중개사 형이 화장실 문을 열고 등장했다. 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서태웅에겐 깍듯하고 적극적인 인사를, 윤대협에게 반갑고 격의 없는 인사를 건네느라 바빴다. 그는 윤대협에게 도전 의식을 불태우는 열정적인 중개사 중 하나였다. 이 일대 부동산업자 사이에서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그 윤대협과 언젠가 계약을 성사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일 것이라고 늘 큰소리를 쳤다.

정반대의 태도로 둘을 번갈아 상대하기 조금 어려웠는지, 중개사 형은 윤대협과 서태웅이 아는 사이인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인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눈빛이 변했다. 둘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결연히 제안하길.

“혹시 괜찮으시면 두 분께 좋은 매물 한 곳 보여드려도 될까요?”

윤대협은 흔쾌히 수긍했다. 거의 버릇이나 마찬가지였다. 서태웅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기양양하게 앞서 나가는 중개사 형의 등을 보며 윤대협은 천천히 걸었다. 뭐지. 평소와는 달리 미묘한 분위기. 평소에 형이 윤대협과 다른 손님을 함께 데리고 나간다는 건 넌지시 경쟁자 역할을 기대한다는 의미다. 그런 전략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다른 손님이라서가 아니고. 윤대협과 고등학교 때부터 아는 사이인 서태웅이라서. 그래서 함께 데리고 나온 것이다… 완전히 다른 전략… 대체 뭘 보여주려고?

가구 없는 텅 빈 마루에 신발을 신고 따라 들어간 순간 윤대협은 알았다.

윤대협이 느낀 바로 그 점을 입 밖으로 꺼낸 사람은 만면에 미소를 띤 중개사 형이었다.

“어때? 둘이 살기 딱이죠?”

확실히 그랬다. 채광 좋고 널찍한 거실에 방이 네 개. 두 개는 그럭저럭 넓은데 나머지 두 개는 다른 방의 부속처럼 작아서 성인이 쓰기엔 애매하고 아마도 아이들이 각각 쓰겠거니 상정한 것 같았다. 화장실이 딸린 욕실은 무려 두 개. 하나는 가장 큰 방 안쪽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거실에 붙어 있었다. 주방은 거실에 비해서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냉장고가 들어갈 공간이라든가 다용도실의 수납공간 확보가 매우 효율적이었다. 부동산이 있는 대로변보다는 조금 안쪽이라 조용하면서도 지하철역과 가깝다. 학교에선 걸어서 15분. 4인 가족이 산다면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기 전까진 적절할 것 같은 규격.

두 사람이 산다면, 굉장히 좋다.

사실 윤대협은 한창 중개사를 따라다닐 때 이런 매물을 몇 번 보았다. 특히 신혼부부들에게 자주 보여주던 매물이다. 마음에 드는 조건이었지만 당연히 혼자서 살 만한 집세가 아니었고 아무리 윤대협이 거대하대도 쓸데없이 빈방이 너무 많았다. 여기서 방 두 개만 없애고 그만큼 돈 빼주면 안 되나. 그런 실없는 가정은 무심결에 자주 해 본 것 같다.

지금 처음 알게 됐다. 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 룸메이트와 함께 살면.

하지만 애초에 집을 따로 구하고 싶은 이유가 혼자 살고 싶어서였는데. 가족조차 완전히 편하게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 얼굴이 좀 익었다지만 생판 타인과 함께 살기 위해 추가로 돈을 들일 이유는 없다. 비록 도배를 다시 하기 전인데도 깨끗한 벽지와 원한다면 장판을 깔아 주겠다는 기분 좋은 원목 바닥과 전 세입자가 이사 가기 전에 새로 갈았다는 훌륭한 창틀과 거슬리지 않고 심플한 몰딩 같은 보면 볼수록 완벽한 디테일이 윤대협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지만…

본래의 목적을 일부러 상기해야 할 정도로 그 집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윤대협은 편안한 가구 몇 가지만 놓으면 이 공간에서 이상적인 생활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무리 구석구석 뜯어봐도 하자를 찾기 어려웠다. 집주인이 어지간히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중개사 형이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결정적으로 윤대협의 마음속을 콕콕 찌른 디테일. 바로 단지 내에 있는 야외 농구 코트였다. 쓰는 사람도 거의 없고 한적했다. 성인 규격이라 그런지 어린이들은 놀이터나 근처 공원의 잔디밭을 더 선호하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대협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무엇보다 서태웅도 혼자 살 집을 구하러 오지 않았던가. 윤대협은 중개사 형의 입에서 청산유수처럼 쏟아지는 이 집의 장점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서태웅을 힐끗 바라보았다. 거의 2년 만에 우연히 만난 윤대협과 덥석 같이 살자고 할 리가…

아니… 그럴 수도 있나…

반짝거리는 서태웅의 눈을 본 순간, 윤대협은 알아서 의견을 철회했다. 자기가 제법 영리한 줄 알지만, 언변 좋은 잡상인에게 보기 좋게 넘어간 귀 얇은 소비자의 표정이다 저것은. 하지만 입만 번지르르한 잡상인과 달리, 실제로 이건 좋은 물건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 다시 없을 만큼 훌륭한 물건이다. 혼자 살긴 불가능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사실상 결정권을 쥔 사람은 자신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설명을 마친 중개사 형과 서태웅이 동시에 윤대협을 바라보았다.

“각자 혼자 살 방 구하러 온 사람들인데 좀 갑작스럽지만…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아까 들은 거랑 분위기로는 사이가 나쁜 것 같진 않은데… 어떻게, 생각해 볼래?”

말투는 조심스럽지만 누가 봐도 흥분이 묻어나는 중개사 형과 달리 서태웅은 입을 열지 않는다. 중개사 형과 함께 집을 둘러볼 땐 반짝이던 눈도 평소처럼 차분했다.

평소처럼?

사실 윤대협은 농구하지 않을 때의 서태웅을 잘 모른다. 윤대협에게 서태웅은 항상 농구였다. 서태웅에게도 윤대협은 농구와 동의어겠지. 둘 다 농구와 뗄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농구가 한 인간의 전부를 알려주진 않는다. 윤대협이야말로 코트 안과 밖이 완전히 다르다는 후배들의 평가를 수도 없이 들었으니.

윤대협이 아는 서태웅은. 꾸밈없고. 집요하고. 열정적이고. 꼬인 곳 없이 단순하고. 행동이 먼저. 그다음에 말한다. 어쩌면 생각 자체가 행동 다음인지도 모른다. 그건 윤대협의 추측.

표현이 크진 않지만 머릿속이 다 보일 정도로 반응이 투명하다. 지금도 그렇다. 정직하게 중개사 형의 뒤쪽으로 반 발짝 물러서면서 윤대협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던 시선을 가슴께로 조금 내린다. 아마도 확실히 무의식일 몸의 언어로. 윤대협의 결정에 모든 것을 맡긴다. 코트에서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순종적인 반응. 윤대협의 기억 속에서 어떤 장면이 떠오른다.

그럼, 전국대회 잘해라.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기 직전에 본 서태웅.

그때도 서태웅은 제자리에 선 채로. 지금처럼 가만히 돌아서는 윤대협을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들끓지 않는 그 눈빛은 마치 자신의 질문에 대한 윤대협의 대답을 천천히 반복해서 곱씹는 것 같았다.

전국에… 너보다 나은 녀석이 있을까?

머릿속이 다 보일 만큼 투명한 녀석이지만 그 질문의 의도만큼은 윤대협도 곧바로 짐작하기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순수하게 그 사실 여부가 궁금했던 것 같다.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윤대협의 입에서 어떤 목소리가 빠져나갔다.

“넌 어때? 서태웅.”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논리가 아닌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서태웅이라면, 1년 정도는 시험해 볼 만하다.

생각보다 별로라서 다시 갈라서더라도 최소한 재밌는 장면 몇 개 정도는 남길 가능성이 높다. 아마 윤대협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뜬금없는 상황을 마주치게 될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살짝 내렸던 시선을 다시 올려 윤대협과 맞춘 서태웅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생각보다 눈이 되게 크네. 윤대협은 실없이 생각했다. 동시에 윤대협의 머릿속에선 계산이 끝났다. 서태웅과의 동거는 고자극을 보장하는 하이 리턴에 비해 로우 리스크였다. 같은 업계니까 최소한 돈을 먹고 나른다든가 하여간에 인구에 회자될 최악의 케이스로 발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긍정적인 쪽으로 마음이 기울면서 윤대협은 지금 자신이 굉장히 좋은 위치에 있다는 걸 빠르게 깨닫기 시작했다.

서태웅이 입을 열었다.

“콜.”

윤대협이 예상한 답변이었다. 그런데도 왠지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하면서 부탁을 들어주는 기분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이득뿐인 기회도 흔치 않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때가 윤대협이 스물, 서태웅이 열여덟인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