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불면의이쑤신
센도 아키라는 요즘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취미라기보다 습관? 반복적인 행동? 그것도 상당히 비밀스러운...
일부러 감추기 위해 특별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누군가 요즘 뭐 하느라 집에서 나올 생각이 없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센도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멋쩍게 웃으면서 입을 다물거나. 별거 아니라고 말꼬리를 흐리거나. 또 그놈의 낚시 때문이냐는 넘겨짚음을 딱히 정정하지 않고 넘어갔을 것이다.
센도 아키라의 새로운 취미는 남에게 당당히 공개하기엔 어딘가 많이 간지러웠기 때문이다. 센도조차도 깜짝 놀랐다. 자신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
매일 저녁 로맨스 영화 비디오를 보게 될 줄은.
처음은 얼떨결이었다. 모든 로맨스 영화의 시작이 그렇듯이.
센도는 자신의 자취방을 아지트라고 생각했다. 3년의 유통기한이 붙은 비밀기지. 도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센도는 숲속의 텅 빈 나무 밑동이나 수풀 사이의 동그란 공터 같은 전형적인 의미의 비밀기지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야 센도에게 자신만의 아지트가 생긴 것이다. 좋아하는 물건으로만 채워 놓고, 혼자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정말 좋아하는 사람만 초대받을 수 있는. 센도가 온전하고 유일한 주인인 공간.
그래서 센도는 자취방에서 항상 최선을 다해 즐겁게 놀았다. 좋아하는 장난감을 잔뜩 가져다 놓고, 하나를 가지고 놀다 질리면 바로 옆에 손을 뻗는 어린아이처럼. 끊임없이 좋아하는 일을 했다. 농구공을 손바닥에서 굴리거나, 잡지를 읽거나, 부실에서 빌려 온 NBA 비디오를 보거나, 낮잠을 늘어지게 자거나.
혼자라는 이유로 멍때리거나 생각에 잠기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 시간을 보낼 장소는 따로 있었다. 탁 트인 바다에게 사색이나 성찰이나 시간 죽이기 따위를 맡겼다. 자취방은 좀 달랐다. 여긴 센도만의 동굴이었다. 대체로 즐거운 일만 일어나는 엔터테인먼트 센터였다.
비밀기지의 첫 손님은 얼떨결에 들어왔다.
센도가 상상했던 과정과는 완전히 달랐다. 상대를 신중하게 관찰하고, 다른 곳이 아닌 센도만의 공간에서 함께 놀고 싶은 사람인지 진지하게 따져 본 다음, 최적의 타이밍을 선별하여 거절할 수 없는 초대를 정중하게 전달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애초에 그 녀석을 만난 것부터 센도의 계산 밖이었다. 그날은 아무것도 예정대로 되지 않았다. 다짜고짜 눈앞에 나타난 녀석을 본 순간. 왜 웃음이 나왔을까? 센도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아마 그때 이미 뭔가 잘못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여어..."
자신도 모르게 반가워하고 있는 센도를 향해 루카와는 침착하게 말했다.
"헤이. 승부하자."
그 녀석은 그곳에서 그때 나를 만날 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센도 본인도 그날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가게 될 줄은 그 순간까지 모르고 있었는데. 예정에 없던 늦잠을 잤으니까. 예정대로였다면 센도는 한참 전에 그 장소를 지나쳐서 학교 체육관에서 농구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던 모든 예정이 루카와를 센도의 비밀기지로 데려다 놓은 것이다.
운명 같은 로맨틱한 단어 말고 설명할 방법이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그랬다면 센도가 주구장창 로맨스 영화 비디오를 빌려다 볼 일도 없었을 텐데...
당연히 당일의 센도는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기꺼이 흘러갔다. 아무 생각 없이. 어떤 자각도 없이. 그날따라 침대가 달콤해서 늦잠을 좀 자 버렸고, 우연히 만난 루카와가 승부를 하자길래 신기해서 같이 어울려 줬고, 한참을 부딪치다 보니 해가 져 버렸고, 오랜 시간 상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을 말해줬고.
"그럼, 전국대회 잘 해라."
그렇게 돌아섰으면 아무 일도 없이 끝났을 텐데.
왜 뒤돌아봤을까?
그 때 루카와는 센도를 부르지 않았다. 돌아서서 전국대회 잘 하러 가 버리지도 않았다.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가쁜 숨을 서서히 진정시키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가려던 사람을 돌려세우는 게 가능한 걸까?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센도가 먼저 돌아본 곳에는 이런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국에... 너보다 나은 녀석이 있을까?"
센도는 최대한 침착하게 답변했다.
"글쎄... 모르겠는걸."
몇 마디를 더 주고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루카와의 목덜미와 가슴팍에 흐르는 땀방울이 보였다. 저녁 바람이 스치고 지나갈 때 팔뚝에 오소소 솟아난 소름도.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해가 쨍쨍한 낮에도 니트를 입고 있었지.
으음. 잠깐 고민한 뒤 센도는 말했다.
"땀이 많이 났네. 우리 집에서 씻고 갈래?"
그때는 그렇게 말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땀에 푹 젖어 살짝 떨고 있는 루카와를 굳이 놔두고 매정하게 돌아가는 게 더 이상한 태도인 것 같았다.
예정을 벗어나는 우연이 겹친 끝에 센도는 자신만의 아지트에 처음으로 누군가를 초대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어쩐지 찜찜한 기분은 한참 뒤에 깨달았다. 함께 현관을 통과하면서 루카와가 작은 목소리로 실례합니다, 라고 인사했을 때도 아니고. 화장실 문 너머로 루카와의 샤워 소리를 멍하니 들으며 이 방에서 다른 사람 때문에 샤워 순서를 기다려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곱씹고 있었을 때도 아니고.
제 차례에 씻고 나왔을 때. 침대 아래 바닥에 앉은 채로. 모서리에 간신히 뺨을 걸치고. 기다란 다리를 가지런히 접어 모로 쓰러뜨린 채. 아기처럼 정신없이 자고 있는 루카와를 보면서.
센도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찝찝함의 정체를.
루카와가 센도만의 동굴에서 잠들기까지. 그 모든 과정에서 센도가 주도적으로 루카와를 초대했다는 감각이 희박했다. 지금 이 순간을 만든 것은 센도보다 훨씬 큰 무언가였다. 조금씩 어긋나는 바람에 오히려 딱 맞게 된 타이밍. 잘못 쓰러진 도미노 한 개가 만들어 낸 새로운 그림. 나비의 날갯짓이 연달아 증폭되어 만들어 낸 태풍...
이것은 침입이다. 물리적으로나 관념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센도의 손에서 축축한 수건이 떨어졌다. 센도는 잠든 루카와 앞에 조용히 앉았다. 하얀 얼굴을 바라본다. 바다를 앞에 뒀을 때처럼. 생각에 잠기고야 만다. 비밀기지에서는 금기시된 일이었는데도.
운명 같은 로맨틱한 단어 말고 설명할 방법이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곱씹어 볼수록 그날의 흐름은 이상할 정도로 매끄럽게 예정 밖으로 굴러 나갔다. 아무리 반추해도 센도는 다른 언어를 찾지 못했다.
처음은 그렇게 얼떨결이었다. 두 번째부터는 초대조차 필요 없었다. 규칙성이 있다기엔 띄엄띄엄하게, 그렇다고 존재감을 잊어버리기엔 너무 자주, 루카와는 센도를 찾아왔다. 숨 쉬는 것처럼 승부를 걸었다.
센도는 거절한 적이 없다.
약속한 적 없는 상대에게 휴일의 대부분을 빼앗기듯이, 청한 적 없는 손님이 비밀기지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한 건 센도가 웃는 얼굴로 그 녀석을 막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럴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명백한 침입인데도. 물리적으로나 관념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그 녀석의 침입은 요란하지 않아서,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고, 그러니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 착각했던 것 같다고. 이제 와서 센도는 복기해 본다.
다 소용없는 일이지만.
루카와는 샤워만 하고 나면 센도의 침대 모서리에 뺨을 박은 채 잠들어 버렸다. 거의 루틴이나 마찬가지였다. 센도는 잠든 루카와를 좀 쳐다보다가. 어디까지 하면 깨나 이곳저곳 만져 보고 찔러 본 적도 있었고. 대체로는 옆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거나 잡지를 읽거나 부실에서 빌려 온 농구 비디오를 보았다. 다른 학교 시합일 때도 있고 NBA 녹화일 때도 있었다.
볼을 양쪽으로 잡아당겼을 때도 눈썹만 구겼지 일어나는 일 없었던 루카와는 농구공 소리만 들리면 반짝 눈을 떴다. 일어난 줄도 몰랐는데 어느새 조용히 화면에 집중하고 있거나. 낮은 목소리로 추임새를 붙였다. 파울. 나이스 패스. 아깝다. 무의식으로 반응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몰입해서 보고 있다는 건지. 센도는 몇 번이고 돌려 본 비디오보다 루카와의 반응이 훨씬 재미있었다.
한 달에 못 해도 세 번 이상은 그런 날이 있었다. 자신만의 비밀기지를 루카와와 공유하는 시간.
센도는 그 시간을...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건 돌이킬 수 없이 겨울에 들어선 날이었다. 항상 만나던 공원에서 더 이상은 농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워지고 나서야. 그 녀석이 한참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습관처럼 찾아간 공원에서 텅 빈 농구코트를 보며 내뱉은 한숨이 새하얗게 형태화되는 걸 보고 나서야.
아무도 실례한다고 인사하지 않는 현관에 홀로 들어서고 나서야. 신발을 벗고 누구도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샤워할 수 있을 때에야.
수건으로 머리칼을 털며 나왔을 때. 침대 모서리에. 딱 한 뼘에 모든 체중을 실어 기댄 채 세상모르고 잠든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 그 광경을 본 지 너무 오래됐다는 걸 깨달았을 때.
아무리 조용한 침입이라도 사라지고 나면 분명한 흔적이 남는 것이다. 이미 익숙해져 버려서. 햇빛이나 공기나 의식주나 농구처럼.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이제는 없이 살 수 없게 되어서. 아픔도 가려움도 대수로움도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윈터컵이 끝났을 때. 센도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루카와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루카와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봄이 왔을 때 센도가 루카와를 먼저 찾아갔다. 우연이 아닌 의도였다. 센도는 루카와를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는 시간에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장소로 찾아갔다. 등교 시간의 쇼호쿠 정문 앞이었다.
루카와는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자전거에 내려서 센도를 꿈뻑이며 바라보았다. 왜 이 녀석이 여기 있지? 이거 꿈인가? 그런 문장이 쓰여있는 것 같아 센도는 웃어버렸다.
센도는 간단히 볼일을 마치고 천천히 걸어서 료난으로 돌아갔다. 방과 후 루카와와 농구할 약속을 잡았다. 그뿐이었다.
센도는 이제 루카와가 부활을 하지 않는 저녁 시간을 알게 됐고. 자신이 부활을 하지 않는 시간과 겹칠 때를 지정해서 약속을 했다. 만날 수 있는 시간엔 전부 만났다. 실컷 농구를 하고 그때마다 자신의 비밀기지로 데려갔다.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침대 모서리에 기대어 있는 루카와를 보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 짓을 여름까지 계속했다.
딱 두 번. 루카와에 의해 이 루틴이 깨진 적이 있었다.
그날. 샤워를 하고 나온 센도는 머리칼을 털던 손을 멈추고 그 자리에 굳었다. 언제나 루카와가 침대 모서리에 기대어 누워있던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루카와는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전신을 편안히 늘어놓은 채로.
벽을 등지고 모로 누워 무릎과 팔꿈치를 약간 굽힌 아기 같은 자세였다. 아무래도 앉은 채로 구겨져 있을 때보다는 훨씬 편안해 보였다.
센도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뭉클했다. 멀리 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곁을 따르지 않던 고양이가 무릎 위에 드러누운 것처럼. 루카와가 센도의 아지트에서 이 정도로 힘을 빼고 잠든 것은 처음이었다. 정말 자신의 공간처럼 드러누운 것은 처음이었다.
센도는 허리를 굽혀 조심스럽게 루카와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조심스럽게 얇은 이불을 배까지만 덮어 주었다.
그날은 아무런 비디오도 보지 않았다. 루카와의 잠든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센도가 침대 모서리에 뺨을 기댄 채로 같이 잠들어 버렸다. 둘 다 눈을 떴을 때는 다음 날 아침이었다.
침입 이래 가장 행복한 하루였다.
또 다른 날. 루카와가 센도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센도는 늦은 시간에 가족이 있는 집에 가는 것은 어떨까 했지만. 친구가 저녁을 먹으러 올 거라고 미리 이야기를 해놨다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와서 거절하는 것이 더한 실례였다. 루카와에게 선수를 당해 버린 것이다.
"머리를 잘 썼네."
"?"
막상 본인은 뭐가 문제냐는 투였다. 사람을 초대할 땐 원래 가족에게 미리 얘기하는 거 아니냐고. 사심이 있는 건 이쪽뿐이니까 당연한 반응인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루카와 옆에 씁쓸한 미소로 따라붙어 걸었다.
센도는 그날 루카와의 가족들 전부와 인사를 나눴다. 식사를 하며 루카와에 대해 많은 것을 새로 알았다. 농구는 초등학생 때부터. 자전거는 중학생 때부터. 료난의 스카우트를 거절하고 쇼호쿠에 입학한 건 가까우니까. 매운 걸 잘 못 먹고. 잠이 엄청나게 많고. 그런데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매일 운동하러 가고. 항상 듣고 있는 음악은 프린스.
센도는 루카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제일 좋았던 건 역시 그거다. 집에 친구를 초대한 건 오늘이 처음.
부모님은 이 시간까지 집에 있었으니 당연히 자고 갈 거라는 전제로 이야기를 계속하셨다. 센도는 거절하지 않았다. 부끄럽다거나 쑥스럽다거나 갑작스럽다는 이유로 우연이 가져다준 찬스를 억지로 놓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었다.
처음으로 루카와의 공간에서 함께 잠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잘 준비를 갖춰 나란히 누운 것도 처음이었다. 센도는 바닥에. 루카와는 침대에.
루카와는 언제나처럼 머리를 대자마자 3초 안에 잠들었다. 센도한테 뭐라고 말을 걸어 놓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온다. 센도는 조용히 일어나서 루카와의 자는 얼굴을 구경했다.
감히 할 수 없었던 일을 한다. 충동적으로.
여기는 다시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니까...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침입한 적이 없으니까. 지금 이 공간에 오기까지. 단계마다 정중하고 의도적인 초대를 받았으니까.
딱 한 번의 침입은 허락되길 바랐다.
루카와의 입술은 말랑하고 따끈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후였다. 센도가 로맨스 영화 비디오를 닥치는 대로 빌려 오기 시작한 게.
언제나 농구 비디오를 보던 시간에 생전 본 적 없는 장르의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40분이면 끝나는 농구 경기와 달리 영화는 한 시간 반이 기본이었다. 중간에 지루해지면 잠든 적도 많았다.
보고 싶은 부분은 언제나 같았다. 시작. 고백.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
옛날 영화일수록, 유명한 영화일수록 그 순간의 모습은 다 비슷비슷했다. 우선 주인공들이 반짝거릴 정도로 예쁜 양복과 드레스를 입고 있다. 배경은 무조건 조명이 은은하고 서정적인 풍경이다. 달빛이 내리는 테라스나 노을 지는 바닷가나 촛불을 켜 놓은 저녁 식사 자리나. 잘 빠진 샴페인 잔이나 화려한 음식을 늘어놓고 있다. 고백하려는 사람은 무언가 선물을 준비한다. 꽃다발이라거나 목걸이라거나 반지 같은 것을.
남자가 여자의 손을 붙잡고 말한다. 어떨 때는 무릎을 꿇고 말한다. 꽉 껴안거나 뺨에 손바닥을 붙이고 있을 때도 있다.
아이. 러브. 유.
여자는 빨려 들어가듯이 남자에게 키스한다. 언제나 그렇다. 뻔하디 뻔하다.
그럼에도 센도는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워 가슴을 벅벅 긁었다. 쿵 소리가 나도록 침대 매트리스에 뒤통수를 떨궜다. 아아... 막을 수 없는 긴 한숨에 목소리까지 섞여 나온다. 어느새 얼굴이 빨개졌다.
자신도 모르게 그 장면에 아는 얼굴을 넣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뻔하고 유치하고 촌스러운 장면의 색깔이 완전히 달라진다. 가슴이 벅차고, 숨이 가빠지고, 열이 오르고, 눈을 꾹 감게 된다. 전신이 간지러워 벌떡 일어나게 된다. 천 시간을 바다만 쳐다본대도 아무것도 정리할 수 없을 것 같은 엉망진창인 마음이 된다.
센도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로맨스 영화와 달리 센도와 루카와는 둘 다 남자고. 둘 다 고등학생이고. 농구하고 서로의 집에 가서 밥 먹고 씻고 같이 또 농구 보다 잔 거 외엔 아무것도 한 적이 없고. 로맨틱한 공간에서 예쁜 옷을 입고 은은한 조명 아래 고급스러운 식사를 할 일은 더더욱 없고.
그런 걸 다 떠나서. 센도는 지금까지 루카와와 보낸 시간이 다 좋았다. 너무 좋았다. 계속되길 바랐다. 그래서 더 이상 지금까지처럼 보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지금까지의 관계를 영원히 바꿔 버릴 어떤 행동을 하기가 두려웠다. 한 달에 세 번 이상 함께 농구하는 같은 지역 라이벌. 그렇게 정해진 틀을 우연도 운명도 아닌 센도의 의도로 벗어나는 것, 벗어나자고 제안하는 것. 수락도 거절도 두려웠다. 센도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하염없이 로맨스 영화의 고백 장면을 돌려 보고 또 봤다. 반쯤은 대리 만족. 반쯤은 선행 학습.
선행 학습인 거면 정말 좋을 텐데. 센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일도 루카와와 농구하는 날이다.
모든 것이 평소 같은 날이었다.
딱 하나만 빼고.
언제나처럼 센도의 비밀기지에서 잘 자고 일어난 루카와가 집에 가기 전에 말했다.
"센도."
"응?"
드문 일이었다. 루카와는 센도의 이름을 거의 부르지 않는다.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뜬 센도에게 루카와는 잠깐 뜸을 들인 뒤.
"안녕."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돌아섰다. 센도는 뭐라 대꾸조차 할 틈이 없었다.
지금까지 루카와가 나에게 작별을 말하고 간 적이 있던가?
가슴이 일렁였다.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 만난 이후로 언제나 한결같았던 루카와의 태도에 조금이나마 변화가 생긴 것이다. 센도의 침대를 다 차지하고 누웠을 때처럼, 자신의 집에 초대해 줬을 때처럼, 이제는 작별 인사를 말하고 떠나는 루카와.
센도는 아무것도 바란 적이 없고, 간직한 마음을 드러낸 적도 없고, 루카와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루카와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루카와 역시 센도와 함께 보내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센도와 같은 의미일까.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역시 하나뿐인가.
센도는 드디어 결심했다.
내일이다. 내일은 고백이다.
센도는 루카와의 집으로 가는 길에 전철역에서 꽃다발을 샀다. 처음이었다. 장미 외에는 아는 이름도 없었다. 천천히 구경해도 된다는 말만 믿고 한참 동안 유리로 된 냉장고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중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닮은 꽃을 가리켰다. 하얀 카라라고 했다. 다섯 송이를 포장해 달라고 했다.
서두를 생각이 들지 않아 천천히 걸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싶은데 자꾸만 두근거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꽃다발을 먼저 줘야 할까? 아니면 말을 하면서. 그러면 이상하지 않나? 최대한 차분하게 시뮬레이션을 해 보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농구와는 달랐다.
딱 한 번 와 봤던 루카와의 집 앞에 섰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번 눌렀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길게 목을 빼서 담장 안을 본다. 정원에 루카와의 자전거가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센도가 계속 서성이고 있을 때, 옆집 문이 열렸다. 체구가 작고 상냥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카에데의 친구?"
"네... 안녕하세요."
센도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교복을 입고 있는 걸 보고 루카와의 친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런. 날짜를 헷갈렸나요? 루카와 댁은 어제 떠났는데..."
센도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꽃다발만은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꾹 잡았다. 그게 한계였다.
센도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혹시 어디로..."
"그게 어디였더라. 아무튼 먼 곳이었는데. 영국? 미국?"
상냥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기이하다는 얼굴을 했다.
"정말 못 들었나요?"
센도는 정말 들은 바가 없었다.
감사하다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주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를 향해 떠났다. 작은 뒷모습이 모퉁이를 돌고 나서.
센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카라 꽃다발을 쥔 주먹에 이마를 기댔다.
시간이 멈췄다.
움직일 수 없는 동안 센도는 많은 생각을 했다. 많은 기억이 머릿속에 마음대로 재생되었다. 같은 장소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낮이거나 해가 지는 노을 속이거나 별이 떠오른 초저녁이거나. 농구공과 땀방울과 솜털과 하얀 피부. 살짝 벌어진 입술과 새까맣고 촘촘한 속눈썹과 하늘을 향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떠오르는 얇은 머리카락.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여어. 승부하자. 전국에. 너보다 나은 녀석이 있을까? 사와키타잖아. 멍청아. 이번에도 이겨주마. 오늘은 우리 집에 가. 센도. 안녕.
안녕.
그때 왜 말하지 못했지?
놓쳐 버린 모든 기회들. 손끝에서 미끄러진 농구공처럼. 단 한 점도 넣지 못한 채로 울려버린 버저비터가 이명처럼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토록 완벽한 패배를 당한 적이 있었던가.
다시... 다시 한번만.
센도는 꽃다발을 꾹 쥐고 담벼락을 짚은 채로 일어섰다. 대문 앞에 선다. 센도의 눈높이보다 조금 낮다.
손을 높이 들어 올려 담벼락 위에 하얀 카라 다섯 송이로 된 꽃다발을 정중히 눕혔다.
꽃다발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
들을 사람이 없을 때는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어떤 로맨스 영화보다도 완벽한 조건을 만들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 다시 말할 것이다. 오늘 할 수 없었던 말을. 결코 외면할 수 없도록 네 귀에 정확하게 꽂아 줄 것이다. 그때까지 쌓인 나의 시간, 나의 기다림, 나의 후회까지도.
다시 돌아온다면.
다시 돌아올 거야.
너는 나한테 다시 돌아올 거야.
주문처럼 외우면서 센도는 뒤돌아섰다. 그대로 바다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오늘은 비밀기지로 돌아갈 수 없다. 사실은 혼자만의 아지트가 아닌지도 오래였다는 진실을 뼈아프게 깨닫는다.
바다 건너에 루카와가 있다.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다시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