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스와 건달 下
불면의이쑤신
박경태는 서태웅과 같은 반이다.
입학 당시 서태웅은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그냥 평범하게 걷기만 해도 그랬을 텐데, 서태웅은 무려 차를 타고 교정으로 들어왔다.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던 다른 모든 학생들은 세단에서 내린 거대한 미남자의 졸음 가득한 얼굴이라는 드라마틱한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더 놀라운 건 운전자도 함께 학교로 들어갔다는 점이다.
논리적 설명을 갈구하다 못해 지어내기 시작한 신입생들의 머리에서 나온 첫 번째 가설. 교사 아버지의 차를 타고 출근한 학생 서태웅 설. 운전자의 얼굴이 널리 확인된 직후 자연 폐기되었다. 전혀 안 닮았다. 두 번째 가설. 역시 운전기사를 동행하여 등교하는... 도련님? 갑부? 야쿠자? 웅성웅성.
진실은 농구부 활동이 시작되고 나서 밝혀졌다. 매일 아침 서태웅을 태우고 오는 중년 남성은 대대로 서가 집안을 모시는 운전기사 겸 집사가 아니고 농구부 유명호 감독님이셨다. 정정보도는 박경태를 통해 능남 1학년 전체에 빠르게 퍼졌다.
1학년 1학기 자리 배치는 이름순이라는 민족의 전통에 따라 박경태는 서태웅의 옆자리가 되었다. 박경태는 신이 났다. 농구부 영웅과 옆자리가 되다니! 1학년인데도 레귤러는 물론 명실상부한 에이스. 아마도 득점력만으로는 도내 최고!
박경태는 서태웅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틈만 나면 질문을 퍼부었다. 서태웅은 무뚝뚝한 단답으로 전부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자는 중에는 질문 금지! 시끄럽다고 맞을 수도 있다! 서태웅은 농구뿐 아니라 주먹도 강하다! 중요 체크!
서태웅은 잠이 많다. 수업 시간부터 졸기 시작해 아예 엎드리더니 쉬는 시간을 통으로 날리고 다음 교시까지도 쭉 자는 건 비일비재. 이동수업 시간에는 박경태가 총대 메고 깨워야 했다. 특히 식곤증에 약했다. 점심 먹고 남는 시간에는 날이 좋으면 옥상에 가서 잠을 잤다. 박경태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음~ 점심시간 교실은 시끄러워서?"
"아니."
"그럼 왜?"
"눕고 싶어서."
"아하..."
"책상은 좁아."
반 친구들이 귀찮아서는 아니구나. 다행이다. 박경태는 안심했다. 그러나 5교시 시작종이 울려도 서태웅이 돌아오지 않는 날이 3회 연속 발생하자 자체적으로 경보를 울렸다. 우리 에이스가 수업 태도 불량으로 찍혀선 안 돼! 그날 이후 박경태는 점심시간마다 제 책상과 서태웅의 책상을 딱 붙이고 도시락을 함께 먹게 되었다. 의외로 서태웅은 박경태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었다. 먼저 책상을 붙여오진 않았지만...
밥을 다 먹고 나면 축구하러 뛰쳐 나가 부재중인 친구들의 의자를 두 줄로 길게 붙여 서태웅 전용 침대를 만들어 주었다. 서태웅은 싫지 않은 눈치였다. 옥상까지 가는 길이 제법 귀찮았던 모양이다. 옆으로 누워서 잘도 잤다. 세상모르고 잠든 하얀 얼굴에는 서태웅 책상에 있던 노트나 농구부 저지를 덮어주곤 했다. 왠지 가려놔야 할 것 같았다.
그날도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박경태는 책상부터 딱 붙였다. 도시락을 꺼내서 늘어놓으며 반찬 자랑을 시작하려는데.
"우와. 저것 좀 봐."
"헐. 끝내 준다. 엄청 비싸 보이는데? 누구야?"
"우리 학교 교복이 아닌데?"
반 친구들이 창문가에 하나둘씩 모이더니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뭔데 뭔데 달려간 여학우들은 비명에 가깝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잘생겼어! 남자들도 부인하지 않았다. 진짜네. 겁나 잘생겼다. 헤어스타일도 멋있어.
특종인가? 새로운 소식에 민감한 박경태가 빠질 수 없다. 쪼르르 달려가서 학우들의 틈바구니를 파고들어 바깥을 내다본다.
"어?"
박경태가 아는 얼굴이었다.
"북산의 윤대협 선수!"
서태웅이 야생동물처럼 기민하게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윤대협은 잡지에 나오는 것처럼 화려하게 생긴 새파란 바이크를 타고 능남의 운동장을 유유히 가로질렀다. 바이크가 교사에 충분히 가까워진 다음부터는 사각에 가려져 교실 창문에선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창문에 붙어 있던 갤러리가 삼삼오오 흩어진다. 박경태에게 저 사람 누군지 아느냐, 북산 학생이 왜 온 거냐, 농구부냐, 이것저것 물어보는 친구들도 있었다. 주로 여자들.
"라이벌 학교 농구부 에이스야. 적이라구, 적!"
박경태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번 연습시합 때 서태웅을 다리에 쥐가 나도록 몰아붙여 물리적으로 쓰러뜨린 라이벌에게 남녀불문 몰려가 꺅꺅 멋있다고 환호하는 건 왠지 배신감이 들었다. 물론 멋있는 건 사실이지만...! 농구할 땐 심지어 더 멋있지만...! 그래도 일단은 적...!
"정말? 근데 왜 왔지?"
"농구부를 찾아온 걸까?"
"그건 나도 잘..."
박경태가 취재의 한계에 부딪혀 머리를 긁적일 때까지도 서태웅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생각에 잠긴 채 도시락을 한 술씩 입에 넣고 있었다.
드르륵. 교실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교실 문보다 더 큰 사람이 유유히 들어온다.
박경태가 윤대협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아앗!"
박경태의 단말마를 신호로 삽시간에 조용해진 교실도, 자신에게 꽂히는 모든 이들의 시선도, 윤대협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상의가 긴 가쿠란 자락 사이로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능남 고등학교 1학년 10반 교실을 여유롭게 둘러보았고. 금방 타겟을 찾아냈다.
터벅터벅 걸어가 서태웅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윤대협의 입꼬리가 예쁜 호선을 그렸다. 눈동자가 반짝였다.
"안녕, 서태웅."
서태웅은 음식을 씹고 있었다. 그래서 대답하지 못했다. 윤대협은 너그러운 얼굴로 기다려주었다. 조그마한 입안을 가득 채운 점심식사를 꿀꺽 삼키고 나서, 물병에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교복 소매로 입가를 스윽 닦고 나서야 서태웅은 말했다.
"뭐야, 너."
서태웅의 퉁명스러운 대응에 박경태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잘한다 태웅이! 역시 우리 능남의 에이스! 교실 전체가 윤대협과 서태웅을 실시간 드라마 보듯 흥미진진하게 구경 중이었다. 고등학교 점심시간엔 소란보다도 드문 침묵에 옆 반에서까지 원정 갤러리가 방문하여 교실 문에 겹겹이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침입자가 고개를 쭉 내밀어 서태웅의 도시락을 관찰한다.
"도시락, 맛있겠다. 직접 싼 거야?"
서태웅은 고개를 흔들었다.
"난 점심 아직인데. 조금만 나눠주면 안 돼?"
윤대협이 커다란 두 손바닥 위에 자신의 턱을 예쁘게 올렸다. 갤러리가 숨을 들이켰다. 막상 서태웅은 무표정했다. 한심하다는 듯이 콧바람을 흥, 불었다. 윤대협은 아랑곳 않고 입을 아 벌렸다. 결코 오해할 수 없는 사인. 갤러리가 더 크게 술렁였다.
서태웅이 손을 뻗었다. 뭐야? 뭔가 줬어? 박경태 뒤에 서 있던 친구들이 고개를 쭉 빼고 까치발을 든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입에 여분의 젓가락 한 벌을 꽂았다.
"먹든가."
윤대협은 젓가락이 아래턱에 맘모스 송곳니처럼 아무렇게나 꽂힌 웃기지도 않는 꼬락서니로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정신없이 웃었다.
능남고 1학년 거의 전체가 구경하는 가운데, 윤대협과 서태웅은 마주 보고 앉아서 서태웅의 도시락 두 개를 다 까먹었다.
박경태는 그 초현실적인 광경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나 했다. 나는 서태웅이 왜 젓가락 두 벌을 가지고 다니는지 알아. 양은 많은데 속도는 느린 서태웅은 먹다가도 조는 사태가 종종 발생했다. 손에 힘이 풀리면서 젓가락이 땅바닥을 구르는 일도 흔했다. 사려 깊은 서태웅의 어머니는 예비 젓가락을 한 벌 더 챙겨 주셨다.
절대 라이벌 학교 에이스 밥 먹이라고 준 게 아닐 텐데!!!
윤대협은 도란도란 일방적인 대화까지 나누며 서태웅의 도시락 절반을 뺏어 먹었다. 이미 태웅이보다 키도 크고! 몸무게도 훨씬 더 나가면서! 너무한 것 아닌가요! 박경태는 데이터를 근거로 항의했다. 속으로만.
서태웅은 물병에 남은 차까지 모두 마시고, 윤대협이 쪽쪽 빨고 있는 젓가락을 회수하더니, 잠시 윗배를 짚고 곰곰 생각하다가. 벌떡 일어섰다.
여전히 앞자리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윤대협에게 선언한다.
"가자."
"응? 나?"
윤대협은 지가 찾아온 주제에 어벙하게 반문한다. 박경태도 깜짝 놀랐다. 태웅이 너, 무슨 생각이야?!
"매점."
서태웅만 지극히 담담했다.
"배고파."
양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래. 형이 사줄게. 능남 매점은 뭐가 맛있어?"
윤대협은 냉큼 일어나 왠지 서태웅의 허리를 감고 갤러리 사이를 저벅저벅 빠져나간다. 등장도 퇴장도 지나치게 자연스럽다. 혼자 다른 교복을 입고 있다는 점만 빼면. 엄청나게 눈에 띈다는 점도 빼고. 아니 사실은 이 공간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럽다는 것도...
박경태는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는 두 남자의 거대한 뒷모습을 끝까지 눈으로 쫓았다. 괜찮을까, 태웅이? 역시... 따라가봐야겠지? 누군가는 기록의 사명을 맡아야만! 중요 체크다!
박경태는 잔걸음으로 재빠르게 윤대협과 서태웅을 뒤쫓았다. 지나가며 아는 척하는 친구들에게 호들갑스럽게 조용히 하라는 수신호를 들이대면서.
10분 후 박경태는 2학년 8반 교실에 우당탕탕 들어가며 외쳤다.
"영수 선배! 큰일 났어요!!!"
능남고 농구부 2학년 안영수가 눈을 찌푸렸다.
"박경태? 뭐야?"
"태웅이가, 태웅이가!"
"서태웅?"
숨을 고르느라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박경태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외쳤다.
"북산 윤대협 선수한테 납치당했어요!"
"뭔 소리야, 이게?!"
창가에 서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오, 저건가? 안영수와 박경태도 재빨리 창문에 찰싹 붙었다.
새파란 오토바이가 유유히 능남고 정문을 빠져나간다. 두 사람을 싣고.
안영수는 경악했다.
"이런 미친? 야 경태야, 가서 감독님 찾아봐. 난 주장한테 얘기할게. 이게 무슨... 이런 미친?"
"네, 영수 선배! 완전 특종이다!"
능남고 농구부에 윤대협 경계령이 발동한 날이었다.
사실 납치라는 단어는... 정확하진 않았다. 황색 언론발 날조와 선동의 피해자 윤대협의 새파란 오토바이가 멈춘 곳은 능남고 앞 바닷가를 마주한 길거리 농구장. 가는 길을 안내한 건 서태웅이었다.
15분 전.
능남고 매점의 최고 인기 아이템 메론빵을 라이벌에게 삥 뜯어내 우물거리던 서태웅을 보고 윤대협이 물었다.
"점심시간엔 뭐 해?"
"자."
"그럼 이제 잘 거야?"
서태웅은 대답 없이 메론빵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한참을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키고. 빵가루가 묻은 손을 탁탁 털면서 말한다.
"아니. 농구할 거야."
윤대협의 눈을 똑바로 보며 덧붙인다.
"너랑."
윤대협은 짧게 웃었다. 생각보다 적극적이네, 능남의 슈퍼 루키.
"그렇지만 말이야."
윤대협은 민다고 밀어지고 당긴다고 당겨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개구리에 가깝다. 목탄으로 그린 듯이 예쁘게 흩어지는 눈썹 끝을 한쪽만 은근하게 들어 올린다.
"너무 뻔하지 않아? 너랑 내가 만나서 농구하는 거."
꿈틀, 서태웅의 이마가 움직였다. 죽일 듯이 노려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하게 생각에 잠긴다. 호오. 흥미가 동한 윤대협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 본다.
서태웅을 도발하려는 빈말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농구밖에 없는 도내 최고의 신예. 그의 도전에 응수하는 라이벌팀 에이스. 둘이 만나 일 대 일의 승부를 한다. 지나치게 예상 가능한 전개다. 그런 찍어낸 듯한 청춘만화 장면에서 주인공의 들러리를 굳이 자처할 생각은 없었다.
서태웅은 윤대협이 운동장에 세워 둔 바이크를 힐끗 쳐다보았다. 성큼성큼 운동장 쪽으로 걸어간다. 윤대협은 일단 따라갔다.
서태웅은 바이크를 지나쳤다. 운동장 구석에 누군가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낡은 농구공을 집어 든다. 툭툭 모래를 털고 바닥에 세 번 튕겨본다. 짱짱한 소리가 난다.
서태웅이 윤대협을 향해 농구공을 휙 던졌다. 찰싹,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윤대협의 손바닥에 달라붙는다. 제법 강한 패스였다.
서태웅이 질문한다.
"뻔한 농구를 할 건가?"
사자처럼 오만한 눈빛. 윤대협의 목덜미를 타고 짜릿함이 역류한다. 윤대협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 말했다.
"재미있군..."
서태웅은 고개만 까딱여 윤대협의 바이크를 가리켰다. 윤대협은 참을 수 없이 유쾌해졌다. 우아하게 오른팔을 뻗어 서태웅의 왼손을 받쳐 들고 바이크로 에스코트했다. 서태웅은 윤대협이 이끄는 대로 시트 앞쪽에 가랑이를 걸치자마자 윤대협의 손에서 농구공을 빼앗아 갔다. 제 것처럼 품에 꼭 끌어안는다. 그런 서태웅을 뒤에서 끌어안는 자세로 윤대협은 두 팔을 길게 뻗어 핸들을 잡았다.
"발은 거기 올려. 그래, 그렇게."
친절하게 자세를 잡아 준 다음, 신호도 없이 바로 출발했다.
바닷바람에 속력이 더해지자 귓가에는 깃발이 천 개쯤 맹렬하게 펄럭이는 듯한 소리밖에 안 들렸다. 서태웅은 길을 알려주기 위해 윤대협의 귓속에 대고 직접 말해야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윤대협이 서태웅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있었으므로. 서태웅이 윤대협의 옆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릴 때마다 강력한 맞바람에 속절없이 나부끼는 두터운 속눈썹이 윤대협의 광대뼈를 간지럽혔다.
기묘한 동승은 5분 만에 끝났다. 오 대 오로 갈라진 서태웅의 앞머리를 보며 윤대협은 킥킥킥 웃었다. 서태웅은 열받은 표정으로 제 머리칼을 뒤섞어버렸다. 윤대협의 가슴팍이 내내 붙어있었던 서태웅의 등짝에는 아직 뜨끈한 체온이 남아있었다.
기장이 짧아 정사각에 가까운 청록색 능남 가쿠란과 품이 크고 코트처럼 긴 검은 북산 가쿠란이 벤치에 함께 얽혀 던져졌다. 그리 멀지 않은 능남고에서 5교시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윤대협과 서태웅은 쉬지 않고 승부했다.
다음 날.
능남 농구부는 엄청나게 동요했다. 전날 점심시간을 마지막으로 실종됐던 에이스가 입가와 목덜미에 덕지덕지 밴드를 붙인 채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유명호 감독은 오늘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습 합류가 늦어질 예정이었다. 주장 변덕규가 이끄는 자율훈련 워밍업으로 체육관을 돌고 있던 안영수는 기겁했다.
"야, 서태웅! 너 이거 어디서 그랬어?!"
서태웅 주변으로 농구부원들이 모여든다. 누구야, 우리 에이스를 건드린 놈이!
"윤대협이..."
윤대협이구나. 모두가 납득했다. 해산이다, 해산. 특이 사항 없음. 박경태조차 수첩을 꺼내 들지 않았다. 어제 서태웅 납치해 갔다더니 결국 주먹으로 한 판 붙은 모양이야. 문제가 되지 말아야 할 텐데. 태웅이도 어쩌다 그런 놈한테 걸려서.
서태웅은 주변 반응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변덕규 앞에 조용히 뒷짐을 지고 섰다.
"캡틴."
"으, 으응."
"농구에는 지장 없습니다"
어안이 벙벙하던 변덕규도 금방 침착을 되찾았다. 큼큼, 목을 가다듬고 제법 선배답게 말한다.
"어쨌든 무단 조퇴는 교칙 위반이다. 그런 행동 자체가 결과적으로 농구부 활동에 지장이야."
"웃쓰."
"상처는... 이번엔 캐묻지 않겠어. 다음은 없으니까."
"웃쓰."
"감독님 걱정하신다. 맞고 다니지 말고 패고 다녀라."
"웃쓰."
변덕규는 만족스럽게 일어났다. 크게 손뼉을 쳐 좌중을 정리하고 워밍업을 재개한다. 부원들과 섞여 슬슬 뛰기 시작한 서태웅 옆에 안영수가 바싹 붙어 속삭였다.
"야, 서태웅."
"네, 선배."
"이겼냐?"
안영수의 입꼬리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서태웅은 진지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한 바퀴를 다 돌 때까지도 아무 대답이 없다. 곧 손가락으로 턱 끝을 붙잡은 채로 고민하면서 뛴다. 그래도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니 이게 세 바퀴 뛰는 동안 답을 못할 정도로 어려운 질문이야?! 안영수 속이 터지기 직전에야 서태웅은 흐릿하게 말했다.
"아마도..."
"승패에 '아마도'가 어딨어?"
흐음. 맞는 말이라는 듯 조금 더 생각하던 서태웅이 안영수를 쳐다보며 반문했다.
"먼저 가면 진 거죠?"
안영수는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
서태웅이 보다 또박또박 힘주어 말한다.
"먼저 싼 놈이 지는 거잖아요."
안영수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걸음이 서서히 느려진다. 아니. 이게. 무슨. 미친...
"그럼 제가 이겼어요."
서태웅은 안영수를 뒤돌아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한 뒤 막판 스퍼트를 올리며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