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아신스 3
불면의이쑤신
루카와는 도착할 때까지 깨지 않았다. 센도는 굳이 깨우지 않았다. 단 하나 딸린 상가 전용 주차 공간에 하얀 픽업트럭을 예쁘게 대 놓고, 혼자서 짐칸을 가득 채운 사입품을 내리고 있자니, 조수석에서 프리지아 꽃다발 열 단이 길고 시커먼 다리로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다리 달린 프리지아 꽃다발이 유리문에 부딪힐까 봐 센도는 얼른 달려가서 가게 문을 열어주었다.
어찌저찌 가게 안까지는 들어 온 프리지아 꽃다발은 그 다음엔 뭘 해야 할지 전혀 짐작이 없다는 듯 그 자리에 고장 난 게임 캐릭터처럼 멀뚱히 서 있었다. 센도는 소리 없이 웃으면서 루카와가 정중하게 안고 있는 프리지아 열 단을 받아 안았다.
"고마워."
그 말은 왠지 자연스럽게 나왔다. 전날 저녁의 고난도, 야쿠자 싸움에 휘말린 불안도 모두 잊고. 루카와는 센도의 미소를 바라보며 두 눈을 아주 천천히 두 번 꿈뻑거렸다. 까만 길고양이와 눈을 마주쳤을 때 같다. 센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양이랑 계속 놀 시간은 없었다. 남은 짐을 정리하고 최소한의 컨디셔닝을 해놔야 한다. 센도는 바삐 움직였다. 작업 책상에 시트를 깔고, 신문지째로 꽃을 한 단씩 종류별로 펼쳐 모은다. 우선 비싼 것부터. 장미 컨디셔닝은 눈 감고도 할 수 있다. 위아래로 한 번씩만 훑어도 잎과 가시가 후두둑 떨어진다. 종류와 색깔별로 모아서 넣는다. 프리지아와 튤립은 아래만 잘라서 물에 꽂는다.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하얀색, 보라색. 노란색과 주황색이 묘하게 그라데이션으로 어우러진 캔디 튤립. 하얀 바탕에 테두리만 불꽃처럼 새빨간 수입 품종. 얼룩무늬의 겹튤립. 벨벳처럼 묵직한 보라색의 블랙 다이아몬드 튤립. 선물 포장을 여는 것처럼 신문지를 하나씩 벗길 때마다 멋진 튤립이 나온다. 센도는 자신도 모르게 또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스토크나 캐모마일이나 카네이션 같은 필러 플라워는 나중에. 금어초나 유칼립투스 같은 라인 플라워는 아래쪽 잎과 봉오리만 정리해서. 한바탕 냉장고를 가득 채워둔 뒤, 책상 위와 바닥의 난장판을 싹싹 치운다. 신문지 채로 감싸듯이 치워 나가면 대부분의 잘려 나간 잎이며 줄기는 정리되고 남은 것만 살짝 쓸어주면 끝.
다 됐다. 상쾌한 마음으로 뒤돌았다가 센도는 또 움찔 놀랐다. 가게 구석에 시커먼 그림자가 있어서.
그림자가 아니었다. 루카와였다. 코트를 둘둘 만 채로 무릎을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하얀 볼이 까만 정장으로 감싸인 무릎뼈에 꾹 눌려있다. 은은하게 구석으로부터 프리지아 향기가 흩어진다. 아까 차 안에서 제대로 배었나 보다. 하얀색 프리지아도 예쁜데. 센도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나도 잘 때가 된 것 같군. 아무리 그래도 여기 둘 수는 없으니까. 루카와의 어깨를 흔들어 깨워본다.
"어이. 루카와. 여기서 그러지 말고..."
갑자기 전광석화 같은 발차기가 날아왔다. 센도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피했다. 그걸 맞지 않은 건 순전히 센도가 운 좋게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었다. 만약 오른쪽이었다면 뇌진탕이었다. 페널티 킥 같은 운명. 루카와는 언제 발차기를 날렸냐는 듯이 아까랑 완전히 똑같은 자세로 쪼그려 앉은 채 뭔가 중얼거리고 있다.
"누구든... 내 잠을 깨우는 녀석은... 용서 못 해..."
아니, 지켜준다면서요. 알고 보니 이 녀석이 제일 위험하잖아. 센도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 자든가 말든가. 그래도 그대로 둘 순 없어서 센도가 접이식 침대에서 잘 때 쓰는 이불을 가져다 덮어준다. 루카와는 침까지 흘리면서 자고 있다. 야쿠자의 위엄은 어디로.
센도는 접이식 침대에 몸을 던졌다. 탄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낡은 매트리스가 항의하듯 푹 꺼졌다. 오픈 시간은 열 시. 깜짝 놀라는 걸 정말 싫어하는 센도의 뇌가 제때 깨워줄 거라 믿으며 알람은 확인하지 않았다.
정확히 아홉 시 이십 분에 센도는 눈을 떴다.
늘어져라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센도가 이 시간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은 의외로 거울 보기다. 자고 일어난 꼬라지가 썩 괜찮으면 바로 장사 준비를 한다. 이거 안 되겠는데 싶으면 집에 가서 세수도 하고 면도도 하고 머리도 만지고 온다. 오늘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다크서클이 좀 생겼나. 그 부분만 약간 신경 쓰인다.
카운터로 나온 센도는 착잡한 마음으로 한쪽 구석을 바라보았다.
루카와는 아직도 죽은 사람처럼 잘 자고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안정적인 자세는 완전히 옆으로 무너졌다. 센도가 덮어 주고 갔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추웠나? 안됐네. 하지만 길에 서서도 잘 자던 친구니까... 일단 여긴 실내고 누워있기도 하니까 괜찮겠지...
센도는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하는 이불 더미와 그 아래 쑥 튀어나온 긴 다리를 무시하려 애쓰면서 오픈 준비를 했다.
센도의 아침은 언제나 가게 전면부의 유리창을 닦으면서 시작된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채광이 잘 들어와 꽃들이 좋아하도록. 누군가의 동그란 머리통이 기대어져 만든 자국까지 싹 지운다. 가게 내부를 한 번 더 청소하고, 외부 매대를 세워 꽃을 늘어놓는다. 규정상 차양 아래를 넘어가는 부분까지 보도를 침범해선 안 된다. 센도는 직접 짜맞춘 선반에 높이를 활용해서 최대한 다양한 크기의 꽃다발을 늘어놓는다. 가장 해를 잘 받는 곳은 일부러 비웠다. 어제 산 프리지아 중에 가장 만개한, 즉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한 것들을 모아 향기가 끝내주는 새 다발을 만들어서 늘어놔야지.
오전의 햇살이 들어차며 가게 안의 찬 공기가 누그러진다. 벽에 커다란 롤 채로 붙어있는 포장지와 유산지를 차례로 당겨 커다란 가위로 한번 슥 지나가면 깨끗하게 잘린다. 그 위에 컨디셔닝한 프리지아만 가득 채워 심플한 미니 다발을 만든다. 줄기 끝에는 물을 채운 플라스틱 관을 끼워 화훼용 테이프로 한 번 감는다. 색깔별로 만들어 걸어놓는다. 정확히 열 시가 된 길거리는 한산하다. 지금은 길을 가다 꽃을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장사가 시작되어도 가게 구석의 이불 더미와 그 아래 쑥 튀어나온 긴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건 아니겠지? 센도는 꿋꿋하게 모른 척했다. 인내심은 많은 편이다.
슬슬 저녁에 꽃이 필요한 사람들은 전화로 주문할 시간이다. 센도는 두 통을 받았다. 하나는 일주일 뒤에 개업 축하 화분을 하나 배달해 달라는 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화이트데이 프로포즈용 장미 백 송이였다. 백 송이! 벌써 신이 난 센도의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달콤해졌다. 손가락 관절을 공중에서 몇 번 꺾으며 그날을 기다린다. 미리 단골 장미 농장에 전화해야지.
점심 전에 배달 건이 하나 있었다. 지하철로 한 구역 떨어진 곳에 오늘부터 장사를 시작하는 새 가게에 개업 축하 화환을 배달해야 한다. 어제 사 온 행운목 화분을 선물용으로 정중하게 포장해 리본을 단다. 화분 한 개는 픽업트럭보다 스쿠터가 낫다. 센도는 핑크색 스쿠터를 개량해서 만든 짐칸에 묵직한 행운목 화분을 제대로 묶었다.
흘끗 가게 안을 본다. 구석에서 삐져나온 구두 끝이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이 신고하진 않겠지...? 약간 불안하지만. 일단 별수 없다. 문을 잠그고 배달을 다녀올 수밖에. 헬멧을 꾹 눌러쓰고 평소보다 서둘러 스쿠터를 몰고 배달 장소로 향한다.
예정보다 삼십 분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귀가도 빨랐다. 다급하게 유리문에 매달린 종소리를 딸랑거리며 들어와 보니. 삐져나온 구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이건 안심을 해야 하는 건지?
슬쩍 근처로 다가가 허리를 숙여 동태를 살핀다. 살살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확인해 본다.
잘 자고 있다. 침을 잔뜩 흘려서 바닥에 작은 웅덩이가 생겼다... 더러워... 센도는 조금 질색했다. 이따 치워야겠다. 이거 뭐 보디가드인지 사고뭉치인지. 또 발차기를 할까 봐 깨우지는 않았다.
점심은 중국집으로 할까. 배달 주문 메뉴를 고민할 때쯤에 이불 더미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루카와는 코트를 입은 채로 자고 있었다. 머리 꼴이 가관이었다. 센도는 핀잔도 못 하고 웃어버렸다.
"잘 잤어?"
루카와는 대꾸 없이 머리칼 아래로 손을 집어넣고 마구 흔들었다. 신기하게도 부스스한 머리가 나름대로 정리가 됐다. 더 엉망이 되어야 할 것 같은 동작이었는데. 입가를 손끝으로 싸악 한 번 훔친다.
"밥 먹을래? 중국집 시킬 건데. 장수룡."
루카와가 이번에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새우볶음밥. 야끼 교자."
"거기 야끼 교자 맛있지..."
입안에 침이 고인다. 역시 야쿠자. 좀 먹을 줄 아네. 센도는 마파두부를 시켰다.
가까운 곳이라 배달은 금방이었다. 배달부가 안으로 들어와 카운터에 그릇을 놓다가 루카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루카와가 귀찮은 듯이 대충 손짓을 하자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아한 표정의 센도가 내민 밥값을 한사코 받지 않고 갔다.
"그냥 먹어. 살게."
과연 사는 건가...? 센도는 미심쩍었다. 지금 혹시 나 야쿠자의 공갈 협박이나 수금이나 그런 거에 휘말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위험한 방향으로 치닫는 상상력을 애써 억제하기로 한다. 정신 건강에 별로 좋지 않다. 나 내일도 장수룡에서 점심 시킬 수 있는 거 맞지...?
센도는 안쪽 방에 루카와를 데리고 들어갔다. 침대를 보자마자 루카와가 자연스럽게 거기 앉는다. 자기 집이네 아주. 센도는 식사할 때 쓰는 좌탁을 펼치고 방석에 앉았다. 새우볶음밥과 마파두부와 야끼 교자 두 개를 싹싹 비울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센도는 루카와의 고요함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니 자꾸 쳐다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꽃이 그런 것처럼. 이 시커먼 꽃도 센도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에 아무런 의문도 어색함도 위화감도 느끼지 않았다. 아무리 쳐다봐도 루카와는 센도와 시선이 잘 맞지 않았다. 먹을 때는 음식만 본다. 씹을 때는 약간 아래를 본다.
다 먹으면 그릇을 겹친다. 루카와의 코트는 밥이 오기 전에 센도가 안쪽 방 벽에 걸어놨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명품 브랜드였고, 조금 아니 많이 구겨져 있었다.
센도가 다시 카운터로 나오자 놀랍게도 루카와는 따라 나왔다. 뭘 하려고? 집에 가려고? 제발 그런 것이기를. 센도는 잠시 루카와를 관찰했다. 앞머리 아래에서 시선이 좀 방황한다. 구석에 어색하게 선다. 팔짱을 척 끼더니 벽에 기댄다.
그리고 졸기 시작했다...
센도는 황당했다. 들인 적 없는 거대하고 시커먼 화분이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너무 신경 쓰인다. 분명히 영업 방해다. 하지만 쫓아낼 방법을 모르겠다. 저렇게 집 지키는 도베르만처럼 우뚝 서 있는데...
아... 지금 나름대로 지키고 있는 건가?
센도는 머리가 아팠다. 거기 서서 고생하지 말고 그냥 나를 이사시켜 주면 안 되냐고 물어보고 싶다. 깨우면 또 발차기 날아올 것 같아서 참는다. 그러고 보니 이 공간 안에 센도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 들어 온 건 처음이다. 그것도 이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감이 엄청나며 지나치게 눈에 띄는 인간이라니...
좁은 공간을 최대한 개방감 있게 사용하기 위해 모든 천장과 벽과 바닥을 새하얗게 칠해 놓은 실내 공간 속에서 새까만 루카와는 먹으로 그려 놓은 것처럼 튀었다. 그래서 센도의 시선이 자꾸 꽂히는가 보다. 센도는 주문 전화 받다 루카와를 보고, 부자재 정리하다 루카와를 보고, 어제 사입한 꽃 컨디셔닝하다 루카와를 보고, 난초 화분 이파리 닦아주다 루카와를 보았다.
루카와는 대체로 졸고 있었고 종종 눈을 뜨고 있었다. 시선이 잘 맞지는 않았다. 정면이나 바닥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유일하게 눈이 마주치는 순간은 센도가 꽃을 만지고 있을 때였다. 그때는 센도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굳이 루카와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따끔따끔할 정도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에. 작업하는 게 재밌나? 누가 이렇게 쳐다보는 건 학교 졸업한 이후론 처음이었다.
센도는 종종 확인하듯이 루카와의 표정을 살폈다. 정직하게 마주쳐 오는 눈빛에 부정적인 것은 섞이지 않은 것 같았다. 실은 무엇도 섞이지 않은 것 같았다. 순수한 집중력과 약간의 흥미. 그런 것만 부딪혀왔다. 느리게 눈을 깜빡일 때마다 엄청나게 인상 깊은 아랫속눈썹이 가려졌다가 다시 보였다. 그럴 때는 꼭 까만 고양이가 눈을 맞추는 것 같았다.
센도는 일곱 시쯤 장사를 접었다. 저녁은 집에 가서 대충 차려 먹을 생각이었다. 센도가 가게 문을 잠그는 동안 루카와는 가게 앞에 서서 천천히 담배를 한 개비 태웠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종일 루카와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툭, 버린 담배꽁초를 루카와가 구두 끝으로 비벼 껐다. 센도는 잠깐 고민하다 그걸 집어 들고 바닥에 남은 담뱃재를 쓸어내듯 발바닥으로 지웠다. 가게 앞이 더러운 건 싫었다. 집에 가다 쓰레기통 보이면 버려야지.
루카와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쯧, 하고 혀를 한 번 찼다. 그리고 센도가 움직이기도 전에 손끝에서 자기가 버린 담배꽁초를 채갔다.
어리둥절한 센도 앞에서 루카와는 새까만 코트를 한 바퀴 돌려 날개처럼 걸쳤다.
"그럼 내일 두 시에 이 앞에서."
어제와 정확히 똑같은 대사를 남기고 저벅저벅 걸어간다.
센도는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가게 앞에 서 있었다.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정말 기묘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