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암의 꽃 7
불면의이쑤신
뮤비 티저가 떴다. 진짜로 컴백이다.
서태웅은 실로 오랜만에 자정까지 깨어 있었다. 서씨 집안 식구들은 모두 일찍 잠든다. 고요한 집안에서 왠지 불까지 꺼놓은 채 서태웅은 빛나는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30초짜리 티저 속에 윤대협 원샷만 5초였고, 단체인데 윤대협이 센터인 프레임만 5초여서 도합 10초가 윤대협이 주인공이었다.
그중에서도 서태웅을 미쳐버리게 만든 카메라 워크가 있었는데 바로 윤대협의 손가락 끝에서 시작돼서 얼굴 클로즈업으로 이어지는 원샷이었다. 서태웅은 원래 윤대협의 손가락을 좋아했다. 춤 좀 추는 아이돌 중에 팔을 잘 쓰는 사람은 많았지만 손가락 끝까지 잘 쓰는 사람은 드물었고 윤대협이 그랬다. 타고난 피지컬을 제대로 쓰는 효율적인 움직임이 스케일 큰 안무를 만나면 센터를 안 주고는 배길 수 없도록 사람의 시선을 훔쳐 가기 마련이었지만. 한 번 훔쳐 간 시선을 다시 돌려주지 않는 건 디테일이었다.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드는 작은 움직임들. 손끝까지 힘이 들어갔거나 그렇지 않거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오거나. 안광이 반짝 돋보이거나 그렇지 않은 순간들. 퍼포머로서 윤대협의 진짜 무기는 거기 있다고 서태웅은 항상 생각했다.
서태웅은 움짤을 하나만 쪄놓고 거기서 못 나가는 중이었다. 덕친들은 착하게도 서태웅이 있는 단톡방에서 세상의 모든 눈물 이모티콘과 짤을 쏟아 놓는 중이었다... 서태웅은 그 모든 말에 공감했다. 어떤 포인트는 손끝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자신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라서 감탄하기도 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15초를 돌려 보면 과연 그런 매력이 숨어있었다. 서태웅은 그냥 세 글자만 겨우 쳤다.
손끝이...
제대로 말을 끝내지도 못한 서태웅의 말풍선은 순식간에 카톡방에 들이치는 눈물바다에 밀려 위로 올라 가 버렸다. 어떤 영상러가 저 손끝이랑 비슷한 동작이 나오는 안무를 몇 개 읊었고 서태웅은 그 예리함에 신선한 충격을 받아 용솟음치는 도파민에 머리가 마비되어 버렸다. 얼른 자신이 만든 해당 곡의 움짤을 뒤졌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손끝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폴더가 있었다... 그래서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영상러 덕친이 언급한 안무의 손끝만 모은 교차편집 영상을 찍어내서 단톡방에 공유했다. 8인의 소리 없는 비명이 단톡방을 채웠고 해당 영상러는 실제로 오밤중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서태웅은 흥분해서 덕친들에게 본인 계정을 까는 행위라는 것도 잊고 그 영상을 그대로 윤대협움짤봇에 올렸고 순식간에 알림창은 폭발했다.
덕질은 입자가속기 없이도 일반 상대성 이론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는 특수한 물리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무슨 소리냐면 시간이 동일하게 관측되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겁나 빨리 지나간다는 뜻이다. 별것 하지도 않았는데 평소 취침 시간을 훌쩍 넘겨 버리고도 도파민 과다로 기이하게 생생한 각성 상태에 빠진 서태웅이 물을 한 잔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서태웅이 일부러 저장하지 않은 전화번호 열한 자리가 떴다.
윤대협이었다.
서태웅은 환히 빛나는 핸드폰을 쳐다보다 마음을 굳게 먹고 손가락을 뻗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밀었다. 수신 거부.
미안하지만 지금은 바쁘다. 덕질해야 한다. 연예인도 자기 스케줄이 있듯이 오타쿠에게도 놓칠 수 없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만사를 다 제쳐놓고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개무시하고 내일 출근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집중해야 하는 크리티컬 타이밍이 있단 말이다. 친구였어도 지금은 안 받았을 것이다. 물론 유일한 친구인 강백호가 이런 시간에 서태웅에게 무려 전화를 한다면 뭔가 엄청난 비상 상황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받기는 했겠지만... 윤대협은 그냥 티저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을 확률이 99%이므로 괜찮을 것이다.
기이하게 각성한 신체에서 이미 고혈압에 가까웠던 심장이 좀 더 크게 뛰기 시작했다. 하여튼 윤대협. 타이밍 진짜. 찬물 세수를 하려고 벌떡 일어났을 때 문자 알림이 떴다.
차단 풀었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안내를 분명히 들었을 텐데. 신호가 한 여섯 번 울렸다는 사실만으로 이런 긍정적인 반응이라니. 상큼하면서도 다소 능구렁이 같은 특유의 미소가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짜증 난다. 씹을까 하다가 계속 생각하게 될 것 같아 서태웅은 간단한 답장을 갈겼다.
ㅇㅇ
왜 전화 안했어
5초 만에 답장이 온다. 할 일도 없나 연예인은. 오타쿠는 지금 바빠 죽겠는데. 3분 안 봤다고 오픈채팅방 카톡이 100개 넘게 쌓였단 말이다. 나 빼고 재밌게 놀면 책임질 건가.
바쁘잖아
그렇게만 보내 놓고 서태웅은 얼른 카톡방 복습에 빠졌다.
움짤봇의 정체가 조던 님인 것을 알게 된 덕친들이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레전드 움짤 링크를 가져오며 최애 포인트 토크를 시작하고 있었다. 서태웅은 광대가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랫동안 움짤봇을 운영했지만 이런 직접적인 긍정 피드백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알림창 관리가 불가능해서 모든 것을 뮤트했고 디엠도 막아놨기 때문에 그냥 알티 마음 수가 잘 나오면 잘 됐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실제로 신체 주변이 조금 따스해진 것처럼 긴장이 풀렸다.
입꼬리가 약간 움찔거릴 정도로 (서태웅 기준으로는 싱글벙글에 가깝다) 텐션이 높아졌는데 카톡 창 위로 자꾸 문자 알림이 쌓여서 방해가 된다. 서태웅의 눈썹이 다시 딱딱해졌다.
사실 바로 못 받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부재중 남겨놓으면 되잖아 나 기다렸는데... 너무행 태웅이 형 바빠요?
이 애교 많고 구질구질한 아이돌은 뭐지. 서태웅은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지금 이게 연락 가지고 귀찮게 구는 애인 같은 짓거리라는 것도 모르고 그냥 당황하기만 했다.
어쨌든 지금은 윤대협을 상대할 때가 아니었다. 윤대협을 덕질할 때였다. 윤대협의 이런 행동은 윤대협을 덕질하는 데에 매우 방해가 됐다.
서태웅에게 있어 두 윤대협은 아주 다르게 느껴졌다. 저 좋을 때만 문자 상대해 달라고, 통화해 달라고 귀찮게 하는 연하의 윤대협. 뮤비 티저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며 손끝 움직임 하나로 서태웅을 홀려버린 아이돌 윤대협. 지금은 후자에 백 퍼센트 집중하고 싶었다.
서태웅은 냉정하게 답장했다. 그렇다고 또 씹지는 못하는 게 순덕의 마음이었다.
ㅇㅇ
뭐하는데? 티저 봤어요?
티저 보느라 바빠
30초인데?
이 자식... 이 덕알못 자식... 핸드폰을 꾹 쥔 서태웅의 손등에 빡친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서태웅은 부들부들 떨면서 5분간 답장을 못 했다.
그 사이에도 덕친들은 꿀잼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예전 행사에서 있었던 에피소드까지 막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서태웅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대기 중엔 잠만 자고 행사 중엔 윤대협 보느라 전혀 몰랐던 각종 에피소드들이었다. 자신들보다 늦게 온 주제에 새치기하려던 대기 알바 썰어버린 무용담. 콘서트 플미 제보했더니 진짜로 소속사가 취소 때려줘서 보상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던 레전드썰. 대기가 너무 길어져서 정신력만으로 버티지 못해 맥주를 사 왔는데 과음하는 바람에 익명으로 저격 먹은 흑역사.
서태웅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그러나 너무나 알기 쉽고 생생하게 상상 가능한 현실 드라마였다. 그 어떤 막장 드라마보다 재밌고 리얼리티 프로그램보다 짜릿했다. 최애 본인의 시시껄렁한 잡담을 상대하느라 이런 걸 놓칠 수는 없지.
다행히 덕친들은 워낙 조던 님이 말이 없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1이 하나 사라지기만 하면 잘 읽고 계시려니 짐작하며 끝없이 수다를 떨었다. 이미 그들끼리는 다 아는 얘기인데도. 원래 라떼 스토리는 몇 번을 우려먹어도 재미있는 법이니까.
카톡방의 세헤라자데 8인에게 정신이 팔린 서태웅이 한참 대답이 없자 그걸 어떤 대답으로 받아들였는지 다시 문자 알림이 액정 상단에 쌓이기 시작했다.
진짜 바쁜가 보네 그럼 나도 방법이 있지 이따 봐
이게 뭔 소리지. 서태웅이 얼굴에 물음표를 채 띄우기도 전에. 이번에는 다른 알림이 떴다.
인스타그램이었다.
@ydh.nn7 님이 라이브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런 미친. 서태웅과 8인의 덕친은 동시에 육성으로 욕을 뱉었다. 카톡방에는 짧은 문장부호와 오타투성이 단말마만 쌓였다.
?
?
?
아및ㅣㄴ
ㅁㅊ
일ㄹ나
ㅁㅊ
인라
서태웅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단축키를 눌러 컴퓨터 브라우저에 인스타그램 웹 버전을 띄우고 라이브를 누른 다음 녹화를 뜨기 시작했다. 모니터를 가득 채운 최애의 미소가 오늘따라 얄밉다.
"이 시간에 안 자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요?"
너 때문이잖아.
"저요? 저는 티저 모니터링하고... 설레서 잠이 깨버렸어요."
우리만 하겠냐고...
서태웅이 하고 싶은 말은 8개의 버전으로 변주되어 단톡방에 쌓였다. 서태웅보다는 조금 더 원색적인 표현을 사용했지만 격한 애정이 눈에 다 보이는 발언이라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오히려 흥분한 덕친들이 전에 비해 벽 없는 날것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뿌듯하기까지 했다. 이런 새벽을 쌓으면서 얼굴도 몰랐던 사람들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것이구나... 서태웅은 조금 감동했다.
댓글창이 너무 빨리 올라가서 블러 처리가 필요 없을 정도다. 물론 어디 올리려면 가려야겠지만. 대충 보이는 단어들은 죄다 티저 앓는 소리고 문장 끝마다 ㅠㅠ나 ㅜㅜ가 여럿 붙어있다. 윤대협은 별로 말도 안 하고 턱을 괸 채로 댓글을 눈으로 열심히 읽었다. 헤헤하고 바보 같이 웃는다.
"다 좋은 말만 해 주시니깐 이제 좀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댓글 올라가는 속도가 두 배로 빨라졌다. 오호. 아~ 이런 소리를 내면서 눈동자를 굴리는 윤대협. 새벽의 충동에 휩싸인 서태웅도 아까 단톡방에 올렸던 두 글자를 쳐 본다. 어차피 묻히겠지.
yh7_0101 손 끝...
30초 후에 윤대협이 그걸 그대로 읽었다.
"손끝."
씩 웃는다.
"그거 좋았어?"
갑작스런 반말에 댓글 창의 흥분도가 300% 증가했다. 카톡방에도 물음표가 쌓이기 시작했다.
지금 제가 잘못 들었나요
아니 반말했음
말이 짧은 윤대협????? 팬한테 반말하는 윤대협????? 최초공개 아니에요?????
미쳤다 오늘 무슨 날이지 새벽이라 대협이도 넹글돌았나
이 새벽에 레전드 갱신 너무 힘들다
와 5년 존버 끝에 드디어 ㅠㅠ 대협이 반말 ㅠㅠ 죽어도 여한X
저 아침에 회사에 코로나 같다고 연락하고 검사하러 가려고요...
천재다 나도 그래야지...
서태웅은 등골에 식은땀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까까진 카톡방만 읽으면 따스한 기운을 느꼈는데 지금은 정반대다. 최초 공개. 그래 공개는 최초가 맞지. 물론 비공개도 어쩌면 서태웅이 최초가 아닐 수도 있다. 아무도 자랑을 안 했을 뿐 언젠가의 팬싸에서 반말을 들은 팬이 이미 존재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심호흡을 하고 진정하자. 냉정을 되찾자.
라이브 시청자가 300K를 돌파했다. 윤대협은 그 이후로는 반말을 안 했다. 그냥 댓글 몇 개에 반응하고 뮤비 촬영 비하인드를 좀 풀어줬다. 물론 티저에 나오는 부분과 관련된 얘기만. 30분 정도 지나서 라이브가 끝났다. 새벽 두 시 반이었다.
카톡방의 덕친들은 하나둘씩 눈물을 흘리며 자러 갔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이 6명. 퇴사해서 자유로운 사람이 1명. 프리랜서가 1명. 한참 굿나잇 인사를 주고받은 뒤에야 카카오톡에 빨간 숫자가 사라졌다.
서태웅은 곧바로 자러 가지 못했다.
음성적으로나 텍스트적으로나 조용해진 모니터를 한참 동안 묵묵히 바라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습관적으로 움짤을 찌려고 프로그램을 열었는데. 왠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윤대협이 라이브에서 하던 얘기는 재미있었다. 덕친들과 함께 흥분하기도 하고. 이 파트는 이따 움짤 쪄야지. 저 정보는 내일 나무위키에 올려야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쉽게 몰입했다. 최애와 새벽을 공유한다는 감각에 충만해졌다.
한 가지 질문만. 서태웅의 마음에 걸려 있었다. 삼켜지지 않는 가시처럼.
윤대협은 전화로도 같은 얘기를 하려고 했을까?
서태웅이 그때 전화를 받았다면 인스타 라이브는 없었을까?
레전드라고. 오늘 기념일이라고. 비번 바꾼다고. 기뻐하던 덕친들의 반응을 생각했다.
서태웅은 한참을 생각했다.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어느 새벽의 두 가지 가능성.
친구가 없어 외롭다는 응석쟁이 연하와의 전화 통화.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팬에게는 엄청난 정보들. 혹은 공개적으로는 얘기할 수 없지만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에겐 쉽게 털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들. 수화기와 수화기 사이에 의리인지 감사인지 지지인지 응원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쌓이는 시간.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아이돌 오타쿠를 위한 돌발성 페스티벌이 있다. 준비되지 않은 팬들에게 성큼 다가온 최애의 티저 리뷰 인스타 라이브. 일 대 삼천 활발한 소통의 장. 잠을 못 자서 살짝 부은 듯한 쌩얼의 최애가 조근조근 잠긴 목소리로 풀어 주는 비하인드. 아마도 이렇게 얘기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범위의 에피소드. 이후로 움짤이 되고 캡처가 되고 영상이 되어 영원히 회자할 선물 같은 떡밥.
두 가지 가능성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어느 하나를 택해야만 하며 그건 서태웅과 윤대협의 연속적인 행동이 결정하는 문제였다. 물론 둘 다 없을 수도 있다. 차라리 서태웅은 그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역시 차단이 맞는 거 같은데...
모니터 앞의 서태웅이 이제서야 뻑뻑해진 눈을 주먹으로 문질렀다. 결국 물 가지러 갈 틈도 없었다. 목이 마르다. 세수할 틈도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땀이 약간 났다. 잠시 존재를 잊고 있었던 신진대사가 동시에 아우성치는 기분이었다.
서태웅은 일어나서 가족들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냉수를 한 잔 마시고 찬물 세수를 했다. 그리고 잠이 완전히 깨버려서 그날 밤을 통째로 샜다.
다음 날 회사에선 헤드뱅잉 무형문화재 전수 받는 사람처럼 일했다.
윤대협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있다. 보여주는 모습만 볼 수 있는 팬이나 대중들뿐 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나 업계 사람들도 눈치채기 어려운 본질적인 특성 중의 하나.
윤대협은 상당히 제멋대로다.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었다. 마음이 동하는 곳에 최선을 다해 집중했고. 그 시간이 끝나면 미련 없이 또 딴짓을 하거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집중력을 확 풀어버렸다.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제멋대로인 것까지 간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집중할 때는 철저하게 집중했고 풀어졌다 해도 결정적으로 선을 넘진 않았기 때문이다.
윤대협에게는 농구하던 시절의 버릇이 남아있었다. 궁극적으로 윤대협은 승리를 위해 움직이는 종류의 인간이다. 왜냐하면 이기는 게 가장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지지 않을 수 없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승리하길 원했고. 그걸 위해서라면 다소 감내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최선의 루트를 찾아내서 최대한의 속도로 달렸다.
물론 K팝 엔터테인먼트는 농구와는 달랐다. 완전히 달랐다. 일 대 일의 토너먼트는커녕 팀 대 팀의 대결조차 아니었다. 이겨야 하는 상대가 모호했다. 재능을 바탕으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모든 부문에서 퍼포먼스를 찢는다고 꼭 인기가 따라오란 법은 없었다. 대중의 관심은 제로섬 게임이라 이미 인지도를 넘사벽으로 쌓아 둔 그룹이랑 동시에 등장하면 곧바로 묻혀버렸다. 그런가 하면 오히려 무대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이 역주행을 할 수도 있는 세계였다. 처음에는 그런 점이 가장 혼란스러웠다.
다행히 윤대협은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마지막에 이기면 된다. 마지막이 언제인지는 종목마다 다르고 승부마다 다르다. 60년대 이후 NBA 리거를 배출한 적이 없는 무명 대학 출신으로 명예의 전당에 간 선수도 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으면 된다. 또는 기회를 만드는 데 적극적이면 된다. 게다가 끔찍한 실패도 가슴 아픈 무대도 스토리로 반전되어 감동을 줄 수 있는 세계라면. 오히려 좌절보다 인내가 쉬웠다. 어쨌든 40분이나 한 시즌 안에 승부가 나는 게임은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아이돌 윤대협의 두 번째 시즌은 농구로 따지면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해 내내 최고의 화제였고 온갖 1위와 대상을 씹어 먹고 인지도도 팬도 늘었다.
이 시기에 윤대협이 깨달은 건 팬들의 사랑은 정말 맹목적이라는 점이었다. 무엇이든 입덕 포인트가 될 수 있고 치명적인 매력으로 확대해석 될 수 있었다. 윤대협은 인터넷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팬싸에서 듣는 얘기나 인스타그램 댓글이나 버블을 통해서 팬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매력을 적당히 파악할 수는 있었다. 윤대협은 그런 파악이 빠른 편이었다. 이런 걸 좋아하시는구나. 생각보다 정말 다양하다는 점이 놀라웠다.
무엇이든 좋아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면 윤대협에게는 유리한 환경이다. 윤대협은 그냥 되는 대로 살기로 했다. 어차피 어떤 캐릭터를 정해 놓고 연기하는 걸 잘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런 시도를 한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기강이 바짝 들어있었던 데뷔 때보다는 느슨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나인 게 싫으면... 그럼 어쩔 수 없지. 근데 그럼 이미 내 팬은 아니지 않을까? 타인의 감정에 관심을 끊고 이치만 따지면 어려울 게 별로 없었다.
아이돌이 아닐 때도 윤대협은 사람 앞에서 너그럽고 잘 웃고 평화주의자였다. 딱히 자기 의견을 감추거나 굽혀 주진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웬만하면 둥글게 둥글게 잘 넘어가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중학교 시절에도 2학년부터 농구부 주장이었다.
이렇다 보니 아이돌이 아닐 때부터 윤대협은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것에 익숙했다. 그래서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들뜨거나 고장 나는 서투름이 없었고 그렇다 해서 팬들의 애정만 믿고 해야 하는 일을 등한시하거나 우쭐거리는 초짜 짓도 안 했다. 윤대협에게 사랑받는 건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숨을 쉬는 것과 같았다.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해 선하게 살면 사람들은 나에게 잘해준다. 윤대협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이 때문에 누울 자리를 기막히게 재면서 제멋대로 구는 성격이 되어버린 것이다.
주식과 도박의 공통점. 리스크 계산이 정확한 사람이 승리한다. 윤대협이 잘 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공통점은 리스크 계산에만 매달리면 대박은 어렵다는 것이다. 그건 농구도 마찬가지였다. 승부수가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던져야만 한다.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만 떠안는 바보짓이 아니라면. 타이밍을 놓치면 결국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윤대협에게 서태웅은 계산이 어려운 존재였다.
분명히 내 팬이다. 그것도 골수팬. 데뷔 팬. 유일한 남팬.
남팬이라는 건 윤대협에게 생각보다 의미가 컸다.
윤대협은 팬들을 좋아했다. 모든 아이돌이 그렇듯이. 그렇지만 팬들에겐 원하는 만큼 치댈 수가 없었다. 99.9% 여성이기 때문이다. 여성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건 연습생을 시작했을 때부터 세뇌 수준으로 머릿속에 들어앉은 규칙이다. 실제로 일부 미친 남성 연예인들이 여성 팬에게 함부로 성적 접근을 하다가 오히려 역고소를 먹이는 파렴치한 짓을 해서 사회면에 오르내리는 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자면 역시 팬들과는 적절한 거리와 예의와 존중이 살아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졌다.
대부분의 팬들이 아이돌에게 어느 정도는 연인 같은 다정함을 기대하는 걸 윤대협이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정하면서 예의를 갖추는 방법도 인간 사이에는 분명히 있었다. 그건 윤대협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팬들에게 항상 예의와 존중을 먼저 내미는 것. 친근감과 반가움보다도 먼저. 그렇다고 친근하지도 반갑지도 않은 건 아니니까. 감사할수록 그래야만 한다고 윤대협은 믿었다.
남팬이라는 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이라고 윤대협은 제멋대로 생각해 버렸다. 윤대협도 헤테로 지상주의인 대한민국에서 스무살까지 살아 온 평범한 남성이기 때문에... 게다가 중학교 내내 운동부. 윤대협은 항상 남자들이 편했다. 선배, 후배, 동기, 선생을 가리지 않고 남자들로부터 예쁨받고 사랑받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애매했다.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달라붙고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쌀쌀맞게 굴기도 했다. 좋아한다는 사람도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두 경우 다 딱히 그럴듯한 이유는 없었다. 여자 친구를 한 명 만들면 나머지는 갑자기 눈앞에서 싹 사라졌다. 여자 친구에게도 바라는 것만큼 맞춰주지 못해서 얼마 못 가 헤어졌다. 중학생들의 소꿉놀이 같은 연애였다. 사춘기 이후로 남자들처럼 담백하게 가까워지고 친해지고 우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여자는 아쉽게도 만난 적이 없었다.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맹목적으로 윤대협을 사랑해 주는 감사한 분들. 그렇다고 항상 긍정적인 감정만을 주고받는 건 아니다. 예의와 존중을 가지고 대한다고 반드시 예의와 존중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윤대협은 진상 팬을 받아주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게 100m 밖에서 봐도 티가 나는 편이라 개중에선 그런 사람들이 덜 붙는 편이었지만.
어떤 분들은 기대가 많은 게 눈에 보였다. 기가 세고 피드백이나 의견이 강하고 적극 표현하는 분들이 있었다. 모두 충족시킬 순 없다는 걸 윤대협은 잘 알았다. 인간 윤대협은 팬들이 원하는 아이돌 윤대협과 다른 점도 많았다. 언젠가는 실망시킬 수도 있고 그건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면 일단 마음은 홀가분했다.
낳아 준 부모도 이렇게까진 아니었던 듯한 아낌없는 사랑을 주는 분들이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감정적인 단절이 꼭 필요하기도 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윤대협은 아이돌로 살아가기 프로젝트 중에서 팬이 제일 어려웠다. 팬이 없으면 아이돌도 없는 건데도.
그래도 데이터와 경험치가 쌓일수록 계산 가능한 지점이 많아졌고. 어떤 전조를 민감하게 눈치채기도 했으며. 애초에 성격이 갈등이나 빌미를 주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발생한 적도 없었다. 물론 윤대협의 통제를 벗어난 곳에서 터지는 사건까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또 누가 봐도 제 잘못이 아니니 어깨 한 번 으쓱 털면 그만이었다.
남팬이라면 뭔가 다를 거라고 윤대협은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던 것이다.
서태웅의 존재는 항상 반가웠다. 일단 헤테로 중심주의 사회에서 여성 팬들뿐 만 아니라 남성까지도 자신을 사랑해 준다는 건 충분히 우월감을 느낄 만한 요소였다. 외모든 노래든 춤이든 뭔가 윤대협이 특출나게 잘했다는 뜻이니까. 게임하고 술 마시고 연애하고 농구하고? 아무튼 윤대협이 잘 모르는 그 나이 또래 남성들이 할 만한 재밌는 일들을 다 제치고 윤대협만 보러 와 주는 남자가 있다는 것. 윤대협은 그게 기뻤다. 특별하게 기뻤다.
그리고 왠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어쨌든 팬은 일차적으로 윤대협에게 호감이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데뷔 때부터 지고지순하게 자신을 응원해 주는 사람이니까.
농구를 그만두고 연습생이 된 뒤로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귀지도 연을 이어가지도 못한 윤대협은 또래와의 친근한 관계에 목말랐다. 같은 남자라면 편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키도 커. 잘생겼어. 연예인 해도 될 정도로. 분명히 귀찮은 명함이나 전화도 많이 받아봤을 거야. 공통점이 많으면 통하는 것도 많을 것이다. 윤대협은 항상 서태웅과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오랫동안 갖지 못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
너랑 친구 하기 싫다는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서태웅은 리스크 계산이 불가능한 존재였던 것이다.
분명히 내 팬이다. 그것도 골수팬. 데뷔 팬. 유일한 남팬.
그런데 모든 팬들이 좋아하는 팬싸인회는 응모도 한 적 없다고 하고. 그런가 하면 영통팬싸는 갑자기 컷 1등으로 통과. 선물이라면 몰라도 편지는 전부 다 그때그때 확인해 보는데 한 번도 이름을 본 적이 없다. 다른 팬이라면 당연히 좋아할 것 같은 일을 해도 반응이 없을 때도 있고. 심지어 이제는 툭하면 차단하고 전화도 씹는다.
무슨 팬이 이래?
서태웅은 윤대협이 연예인이 되기로 한 이래 잊고 있던 무언가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승부욕이다. 디펜스가 단단할수록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파하고 싶어지는 본능이 되살아났다.
윤대협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서태웅과 친구가 될 작정이었다. 어쨌든 서태웅의 최애는 윤대협이다. 그것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서태웅은 거절할 때조차 윤대협 탈덕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건 솔직하게 기뻤다. 윤대협도 서태웅 같은 팬을 놓칠 생각은 없었으니까.
아이돌 입장에서도 유리한 무기가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팬이 떠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일지라도. 아직은 서태웅이 탈덕하지 않았으니까.
윤대협은 욕심이 많았다. 갖고 싶은 게 승리라면 점수도 따고 패스도 하고 리바운드도 낚아채고 어떤 포지션이든 집어삼켰다.
팬이면서 친구이면 왜 안 되는데?
윤대협은 아직 논리적인 반박을 듣지 못했다. 듣는다고 해도 격파할 작정이지만.
인스타 라이브를 끝내고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숫자 4 모양으로 겹쳐 놓은 다리를 까딱이면서 윤대협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직은 친구가 되지 못한 팬을 생각했다. 다음엔 언제 전화할까. 전화 말고 문자나 디엠이 답장은 잘 오긴 하는데. 자꾸 새벽에 해서 싫어하나? 직장인들은 언제 통화가 가능하지? 감독님한테 내일 물어봐야겠다.
실체가 없는 대중은 공략한다고 해서 공략되는 상대는 아니라 아이돌로서 최선을 다한다는 건 그냥 두루두루 모든 분야에 있어 치명적인 실수 없이 애를 쓰며 살다 보면 하늘의 뜻이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지면서 대세가 되는 그런 혼란스러운 과정이었다.
농구를 그만둔 이후로 윤대협은 실로 오랜만에 실체가 있는 목표를 만난 셈이다. 성공 여부를 측정 가능하며, 적극적인 전략을 실험할 수 있고, 조금씩 점수를 쌓아가면 마지막에 승리가 기다릴 그런 게임을 찾은 것이다.
윤대협은 오랜만에 진심으로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