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서답
불면의이쑤신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할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글쎄'였다. '모르겠는걸'이라고도 했다. 진짜로 몰라서 그런 게 아닌 것 같았다. 농구로 붙어 보면 알 수 있었다. 서태웅이 본 윤대협은 자신이든 타인이든 개인의 역량 파악이 빨랐고, 정확했다. 그건 정직한 대답이 아니었다. 도망친 거다. 아니면 페이크. 일 대 일에서 자주 보여준 것처럼.
윤대협은 입 열면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서태웅이 일 대 일을 할 때나 시합을 할 때나 비슷하다는 건 윤대협을 이기고 못 이기고와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로 들렸다. 잘 정돈되지 않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나직하고 깨끗한 목소리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수록 서태웅은 점점 더 미궁에 빠졌다.
전국에 일 대 일로 나를 이길 놈이 몇 명 없는데, 왜 시합에서도 그렇게 플레이하면 안 된다는 거지? 내가 제일 잘하는 걸 제일 잘해야지. 그래야 우리 팀이 이기는 거 아니야?
곱씹을수록 알쏭달쏭했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윤대협은 타고난 피지컬, 지금까지의 경험, 천재적인 센스, 그런 걸로만 서태웅을 압도하는 게 아니다. 윤대협은 서태웅을 확실하게 이길 방법을 알고 있다. 서태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서태웅 자신보다도.
그래서 당할 수가 없는 거다. 서태웅은 윤대협을 이길 확실한 방법 같은 건 모른다. 전반전을 버리는 건 두 번 쓸 순 없는 작전이다. 그저 후반부에 뻗는 것만 방지하고 싶었을 뿐이지 딱히 뾰족한 수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죽어라 덤비기. 계속 덤비기. 오직 윤대협 생각만 하면서 최선을 다하기. 그냥 언제나 하고 있는 일이다. 윤대협을 만난 그 순간부터.
윤대협이 위다. 인정하기 싫어도 방법이 없다. 명백한 사실이다. 이 상태로 미국에 가면 도망이라고 해도...
윤대협은 묻지도 않은 말은 잔뜩 늘어놓더니 묻는 말에는 한 번에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그 입에서 답을 안 듣고는 발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아 묵묵하게 서 있었다. 마지못해 생각난 듯이 하나 있다면서. 어떤 이름을 말해줬다. 정성우. 서태웅은 머릿속으로 한 번 더 곱씹어 봤다. 윤대협, 그 너머에 정성우. 무한대 같았던 서태웅의 농구코트에 선이 그어지고 조금씩 높아지는 골대가 턱턱 들어서고 림 위의 전광판에 이름이 붙는다. 윤대협, 그 너머에 정성우.
이름이 붙은 목표를 곱씹는 동안 윤대협은 담백하게 돌아섰다. 조심해서 들어가. 다정한 듯한 인사였지만 노을 속으로 걸어가는 뒤통수는 한 번도 돌아보진 않았다. 서태웅은 아쉬워서가 아니라 얼떨떨해서 잠시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완전 지멋대로네. 다짜고짜 승부하자며 찾아온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긴 긴 여름 해가 다 떨어지고 어두웠다. 바닷바람이 땀에 젖은 등골을 스치고 지나가면 제법 추웠다. 윤대협이 빌려준 민소매 위에 긴팔 니트를 덮어 쓰고 터벅터벅 기차역을 향했다. 혼자 걷는 길에 밤바다가 같이 있어 주었다. 그러고 보면 철 들고 이렇게 골똘히 밤바다를 바라본 건 처음일지도. 평생 바닷가에 살았지만 이 시간에는 주로 잘 준비를 하거나 이미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과 바다가 합쳐진 것 같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컴컴한 바다, 은밀한 건지 따뜻한 건지 알 수 없는 밤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서태웅은 윤대협이 했던 말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융단같이 잘게 일렁이는 파도 사이에 새겨지는 글자. 불규칙한 초침 소리처럼 하루를 보내 버린 드리블 소리. 아니, 파도 소리? 윤대협과 밤바다를 구분하기 어려워졌을 때 서태웅은 졸다가 내릴 역을 지나쳤다.
답을 모르는 질문을 오래 붙들고 지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납득의 무게로 꾹 눌러 주지 못한 의문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툭 불거져 나왔다.
예를 들면 훈련하다가 갑자기.
예를 들면 자다가 꿈속에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나와서 입을 뻐끔거린다. 넌 네 재능을 반도 살리지 못하고 있어. 허공을 발로 차듯이 경련하면서 깬다. 불행히도 수업 중이었다. 다행히도 서태웅이었기에 오래 주목받진 않았다.
이럴 거면 찾아가서 재차 다그쳐 묻는 게 나았을까? 들이닥치는 거라면 이제 경력자인데. 그렇지만 농구도 아니고 말꼬리 붙잡으러 만나기엔 왠지 내키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고 들어가는 느낌이기도 했다. 승부가 아니고 부탁이니까. 그때 그건 무슨 뜻이야. 잘 못 알아들었는데. 다시 한 번 알려 줘. 서태웅은 이런 말을 속으로만 읊어도 목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흥. 필요 없어. 혼자서 알아낼 거야. 어차피 그렇게까지 몰두하거나 고민되거나 궁금해서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주 가끔 방심하면 떠오르는 정도였다. 잊어버릴 듯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눈으로 확인하게 되겠지. 윤대협 너머의 정성우는. 1회전 패배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죽어도 그런 일은 없도록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알쏭달쏭한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있을까? 일 대 일도 공격 루트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그걸 깨닫기 전엔 네게 지지 않아. 하지만 나는 그 당연한 소리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는 건가. 윤대협은 아는데 서태웅은 모르는 서태웅. 그게 대체 뭐지. 서태웅은 적의 비디오라면 모를까 제가 플레이하는 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걸 본다고 윤대협의 시선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괜찮아. 방법을 아는 게임만 승리했던 건 아니다. 서태웅은 자기 자신을 믿었다. 이제 누구에게도 질 생각은 없어. 포기하지 않으면 길은 보인다. 바늘 끝을 통과하는 듯이, 찰나를 앞당겨 손목을 채고, 반 발짝 빠르게 회전하고, 너무 높아 보였던 벽을 뚫고 끝내 성공시킨 골인의 감각을 서태웅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느껴왔다.
일 대 일은 공격 루트의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어차피 마지막 순간 골대와 나는 일 대 일이다. 서태웅이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었다. 모두를 제치고 골대와 일 대 일로 마주 볼 때. 그저 그 순간을 사랑했다. 똑같은 2점이어도.
그래도 윤대협을 이기기 위해서라면 제치는 게 아니라 후퇴라도 할 생각이었다. 누구에게도 질 생각이 없다는 건 그런 각오다. 그 너머의 정성우도 마찬가지. 서태웅은 모르는 새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윤대협은 결정적인 순간에 상황을 제삼자처럼 파악하는 습관이 있었다. 세계가 뾰족해지는 감각, 시간이 밀도 있게 졸아드는 느낌, 여기를 건너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알 수 없는 위기감이 몰려들 때, 한 마디로 정념장이다 싶을 때 객관성을 잃지 않는 건 최선의 방어 수단이었다. 계산해서 하는 행동이라기보다 타고 난 성정에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그 덕분에 냉정함과 침착함을 유지하면서도 집중력 있게 상황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때도 그랬다.
전국에 너보다 나은 녀석이 있을까?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윤대협도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서태웅은 윤대협을 전국 최고라고 생각하는구나, 그렇게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없이 진지한 질문자의 표정이, 똑바로 마주 바라본 눈빛이, 세계를 뾰족하게 모으고, 시간을 밀도 있게 졸이고,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켜, 윤대협이 1초 동안 아주 많은 생각을 하도록 시공간을 왜곡했다.
그 눈빛에 경외감은 조금도 없었다. 허무함이나 감탄이나 심지어 들뜬 것 같은 에너지도 없었다. 서태웅의 눈동자는 미래를 보고 있었다. 전국대회. 윤대협을 지나쳐 그 뒤에 더 강한 사람들이 있는지 묻고 있었다. 이미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 열에너지는 현재의 것이다. 사람은 미래의 온도를 느낄 수 없다. 서태웅의 열기는 현재를 향하고, 윤대협을 향하고, 그것을 기준 삼아, 결국 미래로 나아갈 선언을 한다.
승부하자고 찾아온 건, 승부가 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거지. 서태웅은 져 본 적이 많지 않아서 패배를 쉽게 인정할 줄 몰랐다. 해가 질 때까지 일 대 일로 붙고 나서야 납득한 모양이었다. 알에서 막 깨어난 아기 오리는 최초의 패배를 이 세상의 유일한 강함으로 각인해 버린 것일까. 마치 처음 만난 세계가 윤대협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 세계 너머엔 무엇이 있냐고, 현재의 세계를 향해 묻고 있었다.
그냥 정확한 대답만으로도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나보다 강한 녀석이라면 당연히 많지. 카나가와에도 있잖아. 윤대협도 곧 지금의 윤대협보다는 강한 녀석이 될걸. 너는 앞으로도 수없이 패배할 거야. 전국 빡세다. 힘내라.
왜 그런 식으로 깔끔하게 대답할 수 없었을까? 그저 있는 사실만을 담담하게... 결정적인 순간일수록 객관적으로.
따지고 보면 윤대협에게 묻기에는 이상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런 점을 지적할 수도 있었다. 너 능남이 아직 전국 진출한 적 없는 건 알고 있는 거지? 네가 다녀와서 나한테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혀끝에 정반대의 대답이 매달려 있었다. 알 수 없는 힘에 빨려 들어가듯이 윤대협은 답지 않은 선택을 했다. 어쩌면 조금쯤 책임감을 느껴버렸을지도 모른다. 맹랑하게도 내 세계의 강함은 전국대회가 아니고 네가 기준이라고 담담하게 선언하는 그 말에.
윤대협은 제 대답이 귀띔이 될지도 아닐지도 알 수 없었다. 윤대협이 정성우를 상대한 건 중학교 때 일이다. 현재의 윤대협은 중학생 윤대협을 가볍게 이길 수 있고 정성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서태웅도 어쨌거나 중학교는 졸업했다. 그거라도 하나 알려주는 게 제대로 된 대답일지 아닐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윤대협은 입에 담았다. 그저 알려줄 수 있는 게 그 이름밖에 없어서. 어디서 뭐 하는지 몰라도 그 정도 실력이면 확실히 전국에 있겠거니 대충 틀리지 않을 짐작에 기대서. 호각으로 붙었어도 지금 누구누구 때문에 전국대회에 가지 못한 저 같은 사람도 있긴 했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짝 놀란 고양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서태웅을 내버려두고 서둘러 돌아섰다. 오늘은 나답지 않게 잔소리가 많았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뱉었던 말을 다 주워 담고 싶기도 했다.
네 플레이가 어쩌고저쩌고할 때도 서태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짝 놀란 고양이 같은 표정을 했다. 사실을 말해줬을 뿐인데. 나를 이기고 싶어서 안달하길래. 그렇게 하다간 평생 못 이긴다고. 이런 종류의 말도 지금에서야 할 수 있는 거니까. 윤대협 나름대로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섭게 성장하는 슈퍼루키에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가 본 너는 이렇고 눈부시게 잘하지만 마지막엔 결국 내가 이기는 이유가 있다고, 속으로 내내 생각해 왔던 것을 정리하여 비밀처럼 살짝 건넬 수 있는 황금 같은 타이밍을.
그런데 그 표정은 뭐였을까.
아무도 이런 말은 해 준 적이 없었나? 너무 뭐나 되는 것처럼 얘기했나? 나는 코치도 아니고 감독도 아니고 심지어 부활 선배도 아닌데...
모르겠다. 어깨를 으쓱 털면 얼굴이 좀 덜 화끈거릴까. 들킬까 봐 절대로 돌아보지 않았다.
윤대협은 서태웅이 자신이 한 말을 절대 잊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서태웅은 표정이 별로 없으면서도 감정을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애라서. 앞으로 윤대협을 상대할 때, 또 윤대협보다 더 강한 누군가를 상대할 때, 언제고 지금의 서태웅을 미래의 서태웅이 넘기 전까진, 서태웅은 윤대협이 한 말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씹어 삼켜 피와 살에 녹아든다면 몰라도.
하지만 윤대협도 서태웅이 한 말을 잊지 못할 줄은 몰랐다.
살면서 누구에게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농구를 계속하다 보면 생각보다 그럴 기회가 많을지도 모른다. 이름만 알거나 그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준이나 넘어야 할 벽이나 우상이나 심지어 롤모델 같은 것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지만 얼굴을 보고 선언한 건 서태웅이 처음이다. 서태웅에게도 처음일 것이 분명했다. 그건 확실히 잊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세월이 흘러 농구를 아주 오래 하고 지금처럼 꾸준히 잘 한다면 그런 것은 자연스러울 정도로 익숙해질지도 모르지만... 아직 열일곱의 여름에는 낯선 일이라서. 윤대협은 앞으로도 오래 그 순간을 기억할 것 같았다.
처음을 뺏긴 건 나인가?
빠른 시일 내에 전국대회에 진출해야겠다. 윤대협은 다짐했다. 능남의 전국대회가 결정된 다음 날쯤에, 북산으로 무조건 쳐들어가서, 걔네는 전국대회에 갔거나 말거나, 서태웅을 붙잡아서 어디서든 죽어라 농구를 하고, 어디 얼마나 성장했는지 한 번 봐주고. 마지막에는 비슷한 질문을 갚아줘야지.
그래서, 전국에는 너보다 재밌는 녀석이 있을까?
딱히 서태웅의 답변이 필요한 질문도 아니다. 서태웅은 서태웅이 얼마나 재밌는지 잘 모르니까. 그래도 윤대협은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뭐라고 대답할지 너무 궁금하다. 윈터컵 카나가와 대표는 무조건 능남이다. 윤대협은 주먹을 꼭 쥐고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