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Ultimate Trick
불면의이쑤신
라스베가스. 법 위에 쇼 비즈니스가 군림하는 도시. 재밌으면 무죄. 시시하면 유죄. 폭력도 화려하면 엔터테인먼트. 차가운 사랑, 뜨거운 원한, 인스턴트 결혼, 휘발성 복수. 수많은 경범죄와 로맨스가 거울로 만든 사슬처럼 혼란하게 뒤섞인 와중에도, 새까만 하늘을 여백 없이 뒤덮는 네온사인만큼이나 흔한 외침이 있었으니.
"이 새끼 사기꾼이라고! 내 돈 내놔!"
바로 도박에서 잃은 자들의 진상이었다.
루카와 카에데가 출동한 곳은 다운타운의 흔한 싸구려 카지노였다. 휴가철인 요즘에는 하루에도 수백 명씩 관광객이 오가는 장소고 그만큼 사건 사고도 많다. 영리하게도 그 집 주인은 갬블러들에겐 술을 공짜로 퍼줬다. 덕분에 얼마를 잃는지도 모르고 흥청망청 지갑이 열린다.
경찰을 부른 건 종업원이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문턱을 넘자마자 알았다. 100m 밖에서도 술 냄새가 느껴지는 땅딸막한 백인 사내가 자신보다 20cm는 큰 동양인 남성의 멱살을 잡고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루카와는 털투성이 손목을 턱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붙들었다. 모래색 제복의 왼쪽 가슴 주머니 바로 위에 붙어 있는 경찰 배지를 까딱 눈짓하며 인사했다.
"경찰입니다. 일단 놓으시죠."
담배연기 가득한 어두침침 바에서도 분명하게 반짝이는 카우보이풍의 금색 칠각별. 어깨에는 무전기와 바디캠. 허리에는 묵직한 글록 45가 꽂힌 건벨트. 진지한 무표정으로 시비가 붙어 있던 두 남자 사이를 가르고 선다.
땅딸막한 남성은 출동한 경찰관이 두터운 총부리에서 결코 오른손을 떼지 않는 걸 힐끔힐끔 쳐다본다. 자연히 기세가 수그러드는 풍경이다.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양손을 들어 항복 표시를 했다. 덕분에 멱살이 풀린 키 큰 남성은 구겨진 셔츠 자락을 쓰다듬으며 혀를 내두르고 있다. 은근슬쩍 뒤로 물러서는 그를 루카와가 저지했다. 자초지종을 파악하기 전까지 사라져선 곤란하다.
두 사람을 조용히 출입구 쪽으로 끌고 오자 카지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돌아갔다. 신고자는 벌써 관심도 없다. 이쯤에서 대충 경고만 주고 보낼 수도 있지만. 루카와는 성실하게 뒷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는 융통성이 없기로 메트로 전체에서 유명했다.
"이름이 뭐죠."
"들어 봐, 이 자식이 사기 포커로 내 돈을 다 가져갔어. 완전 타짜라니까?"
"이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분을 이기지 못하고 루카와를 향해 팔을 휘두른다. 루카와는 재빠른 몸짓으로 그의 팔을 뒤로 꺾어 상체를 벽에 처박고 수갑을 채웠다. 진상의 비명은 무시. 라스베가스 경찰은 주취 폭력 제압에 익숙하다. 루카와도 시끄러운 카지노보다는 조용한 구치소가 익숙하다. 빨리 경찰차에 처넣어야지.
한편 시비가 붙었던 정신이 멀쩡한 놈은 얌전하기 때문에 체포 동행할 명분이 없다. 여기서 사정 청취가 끝나야 한다. 휘파람을 불고 있는 남자를 힐끔 쳐다보며 부탁한다.
"차까지 함께 와 주시겠습니까?"
남자는 긍정도 부정도 없이 어깨를 으쓱했지만, 진상을 질질 끌고 가는 루카와를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뒷좌석에 진상을 밀어 넣고 텅 소리를 내며 경찰차 문을 닫은 루카와가 남자를 향해 똑바로 섰다.
"이름은?"
"센도 아키라."
센도 아키라는 루카와보다도 체격이 컸다. 애초에 왜 시비가 털렸는지 궁금할 정도다. 저 정도 진상은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린 듯한 쌍커풀이 드리운 예쁘장한 눈이 어둠 속에서 까맣게 반짝인다. 뒷좌석에서 살짝 열린 창문 틈에 필사적으로 주둥이를 내밀고 진상이 소리친다.
"아까 다 들었어! 그 자식 유명한 사기꾼이라고! 내 돈 내놔, 이 자식아!!!"
허슬러였나. 기술로 먹고사는 프로 도박꾼들. 베가스에는 사막의 별보다 흔하다. 루카와는 사무적으로 물었다.
"사기도박을 하셨습니까?"
"설마요."
센도는 생긋 웃으며 간발의 차도 없이 부정했다. 딱히 정보값은 없었다. 맞아요 저 사기 쳤어요, 라고 대답하는 놈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못 봤다. 여전히 경찰차 안에서 기세 좋게 날뛰는 소리가 들린다. 행색을 보아하니 몇백 달러 이상으로 뜯겼을 것 같진 않다. 그 정도 돈이 없어 보인다. 신체 포기 각서를 쓰거나 집문서를 털린 것도 아닌 다음에야, 손장난으로 현금이나 좀 털어먹고 사는 사람들까지 하나하나 잡아 가두면 클럭 카운티 교도소는 열 명이서 한방을 써도 수용 인원이 모자랄 거다.
수첩을 보며 생각하는 루카와의 눈앞에 뭐가 불쑥 들어왔다. 아까 그 예쁘장한 눈이다. 허리를 약간 숙여서 자신을 올려다본다. 강제로 눈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루카와의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킨 센도가 해맑게, 하지만 제법 진지하게 물었다.
"저 몰라요?"
널 무슨 수로 알지. 밥 먹듯이 구치소를 들락거리는 범죄자가 아닌 다음에야. 루카와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서히 고개를 흔들었다. 센도는 한숨을 쉬었다.
"아, 실망인데. 오프 때 전혀 다운타운에 안 오세요? 호텔에도 클럽에도 카지노에도. 그래도 나름 뜨는 중인데 전혀 모르시다니."
무슨 소리지. 루카와는 촉을 곤두세웠다. 단순한 허슬러가 아니라는 뜻인가? 즉석 마킹, 밑장 빼기, 특수 셔플. 카드 만지는 기술이 특출나게 좋은 녀석들 중 몇몇 놈들은 카지노를 탈탈 털어먹는 걸론 만족을 못 하는지 조직적인 범죄에 가담하기도 했다. 멍청한 부자 하나 찍어서 거액을 털어먹는 사기도박은 오히려 간단하다. 죄다 잡아넣으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훨씬 더 복잡하고 심각한 폭력을 수반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기도박은 최종적으로 피해자에게 빚을 지운다. 빚을 갚을 수단, 거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범죄 시나리오가 허다하다. 그러니까 도박은 더 큰 범죄에 발을 들이게 만드는 미끼이자 덫인 셈이다. 무기, 장물, 마약, 장기 거래나 탈세 범죄가 겉으로는 포커판의 탈을 쓰고 벌어지는 현장에서 딜러로 서는 공범자도 본 적 있다. 그런 경우 사기 도박꾼은 범죄에서 차지한 역할은 적지만 중요한 목격 증인이 될 수 있다. 놓쳐서는 안 된다.
한 편 센도는 지금 루카와가 자기를 모른다고 우는소리를 하고 있다. 경찰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투덜대는 범죄자? 명성을 자랑할 정도로 허세 가득한 놈이라면 호구를 잡아먹는 단순한 사기도박 범죄 기획은 어렵다. 최소 본인이 직접 손을 쓸 순 없고 바람잡이로 판을 짜는 정도겠지. 루카와는 센도의 시무룩한 낯짝을 빤히 바라본다. 얼굴로 타겟을 모으는 역할인가?
센도는 루카와의 집요한 시선을 관심으로 잘못 해석했다.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오른손을 뻗는다. 흠칫 뒤로 물러나는 루카와의 귀 뒤쪽을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는다. 손목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시야에 불쑥 튀어나왔다. 기다란 손가락 끝에는 조커 카드가 한 장 걸려 있었다. 아니, 조커 카드 모양의 명함이었다. JOKER라고 쓰여있어야 할 세로 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전 마법사예요."
루카와는 대번에 인상을 썼다. 느끼한 미소, 달콤한 목소리, 유려한 수작. 정말 그린 듯한 사기꾼 냄새가 풀풀 난다.
허리에 찬 건 벨트로 루카와의 오른손이 슬그머니 이동하는 걸 보고 센도가 허겁지겁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경계할 것까지야. 마법은 불법이 아닌데요?"
그건 아니다. 루카와가 얌전히 건 핸들을 놓고 허리에 손을 짚었다. 휴우, 센도는 요란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윙크를 날렸다.
"제가 관심 있는 범죄는 하나밖에 없어요. 당신의 마음을 훔치는 것."
루카와의 눈이 가늘어진다. 지독하게 딱딱한 무표정은 의심으로 물 샐 틈 없다.
센도가 작게 중얼거렸다. 안 먹히네. 대체로 이 정도 근본 없는 플러팅이면 웃음이 터지거나 얼굴이 빨개지거나 둘 중 하나인데. 그러면 분위기가 싹 풀리고 웬만한 갈등은 해결되며 적당히 웃으면서 집에 갈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친근한 인상을 남겨 나중에 어디서라도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게 센도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유머와 로맨스는 그 어떤 속임수보다 강력한 마법이다. 폭력보다 훨씬 힘이 세다. 틀린 말도 아니다. 관객의 마음을 훔치지 않고 펼칠 수 있는 마술은 하나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 꼬장꼬장한 경찰관님한테는 택도 없었다.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는다. 센도는 의아하게 턱을 긁적인다. 내 미남계가 안 통한 건 처음인데. 그런 뻔뻔한 생각을 했다.
센도가 자존감에 스크래치를 입거나 말거나. 루카와는 일련의 상호작용으로 한 가지 결론밖에 내리지 못했다. 수상함. 사건성은 없지만 존재 자체가 더없이 신경 쓰인다. 일단은 이 자의 거주지를 파악하고 요주의 인물로 지켜보는 것이 적절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주소가 어떻게 되시죠."
"어라. 이거 그린 라이트인가요? 하지만 술 한 잔도 안 마시고 첫 데이트가 집인 건 조금..."
"자꾸 헛소리하시면 공무집행 방해로 체포합니다."
하, 안 먹히네. 두 번째로 중얼거린 센도가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굵직한 눈썹을 팔자로 내리면서 사정한다.
"주소를 말씀드리기는 정말 곤란해요."
"왜죠."
"음... 꼭 이유를 말씀드려야 하나요?"
"네."
"으음... 그럼 경찰관 선생님부터 알려주시면 안 되나요? 왜 제가 사는 곳을 알고 싶으신 건지."
"루카와 카에데입니다. 사기 용의에 대한 추가 질문을 하러 방문할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센도 씨가 괜찮은 시간에."
"예의 바르시네요, 루카와 경찰관님. 저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다 알려주셔도 되나요?"
"전 함정수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센도는 루카와의 단단한 무표정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하얀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과 네온사인. 베가스의 그 어떤 화려함도 일절 물들이지 못한 새하얀 정직함. 총천연색 불빛이 겹치고 겹치다 못해 끝내 새까만 어둠이 되어 버린 도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재미있는 캐릭터다.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는 종류.
센도는 오늘이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박을 해 보기로 했다.
"내일의 거주지는 말씀드릴 수 있어요. 크루즈를 탈 예정입니다. 공연이 있거든요."
공연? 루카와가 다시 눈썹을 치켜올렸다. 공연이라고 쓰고 사기 도박판이라고 읽는 건 아니겠지?
"여행은 며칠이죠."
"정말 끈질기시네요, 경찰관님. 베가스에서 3박, 샌프란시스코에서 2박, 그다음은 15박 하와이. 돈 떨어지면 내릴 생각이었지. 하지만 루카와가 원한다면 적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돌아올게. 콜?"
또 윙크를 날린다. 루카와는 무시했다. 은근히 말투도 편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루카와의 머릿속은 한 번에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최소 3박 최대 20박의 호화 크루즈. 타겟이 될 만한 부자들이 가득한 장소다. 육지가 아니라서 공권력이 닿기도 힘들다. 더한 범죄가 벌어진다 한들 통제가 쉽지 않다. 이런 수상한 인물이 그런 수상한 세팅에 올라탄다? 잘 다녀오시라고 묵과하기에는 불안 요소뿐이다.
마침 루카와에게는 오프가 쌓여 있었다. 휴가철 야간, 새벽 근무를 진저리 치게 싫어하는 동료들의 부탁으로 바꿔 준 덕분이다. 넘쳐나는 오프를 요주의 인물 감시에 3일 정도 몰아 쓰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투자다.
루카와는 결정을 내렸다.
"크루즈 이름과 출발 시각은?"
센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씨익 웃으면서 왼쪽 가슴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들겼다.
루카와는 자신도 모르게 따라서 손을 왼쪽 가슴으로 가져갔다. 금색 칠각별 배지 아래 주머니에 어느새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꺼내 보니 아까 그 명함이다.
그런데 달라진 점이 있었다. 조커 그림 위에 정중한 필체로 루카와가 원하는 모든 정보가 쓰여 있었다. 크루즈 회사 이름, 선명, 출발 시각과 주소까지.
언제 여기 넣었지...? 루카와는 고개를 갸웃했다. 센도는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그럼 내일 봐. 루카와."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는 라스베가스 항구. 호화 크루즈를 타려고 모인 승객들이 줄줄이 늘어선 고급 차에서 내리는 동안 새까만 스포츠 바이크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행렬을 지나친다.
루카와는 항구 끝에 바이크를 세우고 헬멧을 벗었다. 블랙 라이더 재킷. 짙은 색 청바지. 보스턴백에 헬멧을 던져 넣고 어깨에 걸친다. 빠르게 주변을 관찰한다. 대낮부터 선상 파티에 걸맞은 화려한 복장을 한 부자들. 가족 단위의 승객들. 오직 선상 카지노에만 목적이 있는 눈이 벌건 도박꾼들. 만나기로 한 얼굴이 없었다.
출발 시간이 다 되어서야 센도는 휘적휘적 나타났다. 걸어서. 여어. 반갑게 손을 들어 올렸다. 루카와도 따라 했다. 여어. 말없이 크루즈까지 연결된 레드카펫을 밟으며 앞서 나간다. 루카와는 조용히 뒤따랐다.
크루즈 입구엔 공항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금속탐지기 문이 있었다. 센도는 커다란 캐리어를 가드에게 건네고 작은 가방만 든 채로 익숙하게 통과했다. 탐지기는 조용했다.
루카와는 걸어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아까부터 손에 쥐고 있던 경찰수첩과 배지를 들어서 보여줬다. 짧은 라이더 자켓 안쪽 주머니의 불룩한 실루엣은 총이 분명하다. 무장 경비들은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경찰이 무슨 일로..."
"근무 중은 아닙니다. 비공식적으로 수사에 협조를 받고 있습니다."
무슨 짓을 한 거냐는 눈빛이 센도에게 쏟아졌다. 센도는 익살스럽게 양 눈썹을 으쓱 들어 올리며 난감하다는 듯이 웃었다. 어쨌든 티켓을 갖고 있는 오프 듀티 경찰관의 출입을 금지할 수 있는 규정 같은 건 없었다. 그의 총을 빼앗을 수도 없다. 좋은 시간 보내라는 떨떠름한 인사를 뒤로하고, 루카와는 천 명이 넘는 탑승객 중 유일하게 금속탐지기 문을 통과하지 않고 크루즈에 탑승했다.
베가스 식으로 꾸며진 호화 크루즈는 거대한 호텔이나 다름없었다. 로비부터 휘황찬란했다. 센도는 체크인 직원에게 손짓해 자신과 루카와의 짐을 객실로 옮겨 달라고 했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직원들 중 절반은 승객의 짐을, 절반은 파티의 술을 나르고 있었다.
빨간 융단이 이끄는 대로 갑판으로 나가자 벌써 술판이었다. 디제잉 박스에서 쏟아지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 바다처럼 반짝이는 샴페인. 흥분한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센도는 고향에 돌아온 사람처럼 크게 숨을 들이켰다. 루카와는 반 발 뒤에서 묵묵히 센도를 관찰했다.
누군가 포트사이드에서 큰 소리로 센도를 부른다. 세련되게 차려입은 거대한 흑인 남성이었다. 활짝 웃으면서 다가오더니 센도의 어깨를 친근하게 덮쳤다.
"헤이, 아키라. 결국 왔구나. 공연 취소되는 줄 알았잖아. 대타 고마워."
센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는 루카와를 흘끔 보더니 딱히 볼륨을 줄이지는 않고 센도의 귀에 속삭이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저건 누구야? 보디가드를 구한 거야? 아니면... 파트너?"
농담 따먹기가 분명한 태도로 은근하게 팔꿈치로 센도를 찌른다. 루카와는 부동자세로 선 채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화려하고 과시적인 명품 장신구. 나는 쇼 비즈니스에서 일한다고 외치는 듯한 패션. 친근하고 커다란 제스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인사하는 사교성. 그리고 아까 센도에게 한 말. 아마도 선상 파티와 공연의 기획 쪽을 맡은 관계자 같다. 조금도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무표정하게 남자를 관찰하는 루카와를 잠시 바라보던 센도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걸."
내심 소개를 기다리던 루카와가 사납게 센도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남자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것처럼, 축하한다는 둥, 루카와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통성명도 없이 가 버렸다. 무례한 사람들 같으니.
센도가 지나가던 웨이터의 쟁반에서 샴페인 잔을 두 개 가져왔다. 그러나 루카와는 받지 않았다. 어찌 됐든 루카와는 완전한 휴가 중은 아니었다.
앞으로 3일간, 센도 아키라를 감시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상관에게 보고를 마쳤다. 루카와의 직속상관 한나 리. LVMPD에서는 유일한 동양계 여성 경위다. 신참 때부터 루카와의 사수였다. 한나는 이미 센도 아키라를 알고 있었다.
"그 자식 좀 뺀질거리긴 하지만 아직 사고 친 적은 없는데."
그것도 제법 정보가 많았다.
"실력은 유명해. 비슷한 나이대에선 견줄 놈이 없어. 인기가 많던데? 앙코르하고 MGM에서 딜러로 스카우트하려고 거의 인간 경매 수준으로 달려들었다는 전설이야. 그런데 다 거절했대."
"왜죠?"
"난 모르지."
한나가 웃었다.
"그런 점이 수상하다는 거지? 우리 슈퍼 루키는."
루카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슈퍼 루키는 루카와의 별명이다. 루카와는 촉이 좋다. 똑같이 잠복수사에 나서도 가장 중요한 장면을 최적의 타이밍에 목격했고, 평범한 단속을 나갔다가도 강력 범죄의 실마리를 물어왔으며, 다 같이 갱단 소탕에 나서도 한눈에 핵심 인물을 찍어냈다. 오로지 본능으로.
그러나 증거가 생길 때까지 입 꾹 다물고 혼자 움직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보고하는 편이었다. 한나는 그 부분이 불만이었다. 위험하다고도 생각했다. 근거가 없어도 좋으니 수상쩍은 단계에서부터 공유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
그 결과 루카와는 센도 아키라를 3일간 감시하기 위해 연속 휴가를 쓰겠다고 상관에게 보고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난 센도는 화이트라고 봐. 그 실력을 나쁘게 쓸 의지가 있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나는 루카와를 막지 않았다. 어깨를 토닥이면서 이렇게 격려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어차피 오프를 어떻게 쓰든 네 자유고."
한나는 루카와의 무표정을 향해 익살스럽게 윙크했다.
"넌 거물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으니까."
루카와는 '거물'일지도 모르는 인물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녁놀이 반사된 바다의 윤슬은 샹들리에보다 화려하다. 찬란한 빛 조각 사이를 가른 또렷한 실루엣이 루카와가 거절한 두 번째 샴페인을 홀짝였다. 선상 파티에 디너 테이블과 케이터링이 깔리기 시작했다. 갑판 난간에 기대어 선 채로 두 사람은 분주한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센도가 그랬고 루카와는 센도를 계속 감시했다.
센도는 루카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생긋 웃었다. 잘 웃는 사람이 전부 사기꾼은 아니지만 모든 사기꾼은 웃음이 헤프다. 루카와는 아무 근거 없이 이 남자가 카지노에서도 웃는 얼굴을 포커페이스로 쓸 것이라고 추측했다.
루카와는 먼저 침묵을 깼다. 한 가지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다음부터는 정직하게 소개해. 경찰이라고."
"싫은데. 나도 평판이라는 게 중요해서."
"마법은 불법이 아니라면서."
하핫, 센도가 이번에는 소리 내서 웃었다.
"그건 아니지만. 경찰이 따라다니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나쁜 놈 취급을 받잖아."
"왜 카지노에 있었지?"
"어제 말이야? 술 마시러 간 건데."
"거짓말. 게임을 했으니 시비가 붙었겠지."
말 돌리기가 통하지 않자 센도가 시선을 돌린다. 웨이터에게 손짓해 은쟁반에 빈 샴페인 두 잔을 실어 보낸다. 술기운이 올라 발그레해진 채로 갑판에 단단한 두 팔을 편안히 기댔다. 바닷바람이 부드러운 저녁놀을 싣고 그의 머리칼을 헝클었다.
그림 같은 광경에도 루카와는 넋을 놓지 않았다. 또렷한 목소리로 한 번 더 질문했다.
"생계는 공연인가?"
"두 번째 데이트엔 너무 프라이빗한 질문인데..."
"공연이야, 도박이야? 이걸로 잡아 가두지는 않으니까 대답해."
"말했잖아."
손을 뻗어 온다. 기시감을 느낀 루카와가 얼른 그 손목을 잡아챘다. 항복하듯이 펼친 커다란 손엔 아무것도 없다.
센도가 자유로운 반대쪽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흠칫 돌아본 그 손에는 조커 카드가 있었다.
"마법사라니까."
얄미운 눈웃음. 루카와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놀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떤 작은 경범죄라도 연루되는 순간 가만두지 않겠다. 즉시 체포다. 구치소 밥을 먹여주고 말겠다. 관찰과 탐문만으로 쉽게 알아낼 수 없는 수상쩍은 인물에 대한 루카와의 투쟁심이 타올랐다.
"내가 하는 일이 궁금해?"
순 농담 따먹기로 철벽을 치다가도 이런 식으로 떠본다. 루카와는 딱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센도는 손가락 두 개로 자신의 눈을 한 번 가리키고 루카와를 한 번 가리켜 잘 보라는 손짓을 하고 군중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느새 저녁 식사를 하러 대다수의 일등석 손님들이 갑판으로 나와 있었다. 대여섯의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가다 센도의 무릎께에 부딪혔다. 어이쿠. 센도가 자상하게 그들을 멈춰 세웠다.
"신사 숙녀 여러분. 뛰면 안 되죠."
"죄송합니다아."
"괜찮아요. 더 이상 뛰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선물을 줄게요."
"약속할게요! 선물 주세요!"
센도가 가방에서 금색 노끈이 달린 빨간 공단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손바닥만 한 주머니에 손목까지 넣고 혓바닥까지 내밀며 이리저리 뒤지는 시늉을 하더니, 도저히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을 듯한 색색깔의 기다란 풍선을 연속으로 뽑아냈다. 아이들이 환성을 질렀다.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센도는 루카와에게 손짓했다.
"풍선으로 테디베어 만들 줄 알아?"
루카와가 고개를 저었다. 센도가 과장스럽게 한심하다는 제스처를 하자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이 자식이.
루카와가 성큼성큼 걸어 와 센도의 손에서 풍선 하나를 홱 빼앗았다. 꽃이라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오우. 센도가 뒤로 물러섰다. 루카와의 손안에서 풍선이 뽀드득 불안한 소리를 내며 비틀렸다. 1초. 2초. 3초. 펑!
"꺄악!"
풍선 터지는 소리에 놀란 몇몇 아이들이 귀를 막으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센도가 나서서 진정하라는 듯이 손을 아래로 향했다.
"괜찮아요, 꼬마 숙녀. 아직은 당황할 시간이 아니야."
루카와의 손에서 터진 풍선을 가져다가 꾸깃꾸깃 손안에서 구겼다. 그리고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와앙! 크게 벌린 입에서 완성된 풍선 테디베어가 튀어나왔다. 아이들이 벌떡 일어나서 점프를 하며 기뻐했다. 테이블에서 어른들도 박수를 보냈다. 센도는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루카와만 얼떨떨했다. 텅 빈 손과 센도의 입술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어떻게 한 거지?"
센도는 입을 가리고 킥킥 웃다가 윙크했다.
"안 가르쳐 주지."
선상의 모든 아이들이 센도를 둘러쌌다. 나머지 풍선들은 평범하게 손으로 꼬아서 아이들의 주문대로 만들어 주었다. 꽃, 칼, 강아지, 나비가 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센도와 뛰지 않기로 굳게 약속한 아이들이 재빠른 걸음걸이로 키득거리면서 흩어졌다.
센도는 루카와에게 말했다.
"난 이런 일을 해."
"공연이군."
"도박일지도 모르지. 사람들이 웃으면 내가 승리, 시시하면 나의 패배."
루카와는 흥 코웃음 쳤다. 센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진짠데.
정장을 빼입은 남자가 센도에게 다가와 자신이 선상 레스토랑의 지배인이라고 밝힌 뒤 그들을 2인 테이블로 안내했다. 선상에서 센도에게는 언제나 2인분의 무언가가 주어졌다. 이상하게도 루카와에게는 자신의 몫을 주장해야 하는 순간이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감시자와 사기꾼이 함께 하기엔 지나치게 로맨틱한 호화로운 식사를 마치고, 센도는 공연을 준비해야 한다며 일어섰다. 루카와는 그림자처럼 백스테이지까지 따라붙었다. 센도는 내키지 않은 눈치였지만 루카와를 막거나 방해하지는 않았다.
공연은 카지노 한가운데 스테이지에서 펼쳐졌다. 슬롯을 신나게 치던 사람들의 시선까지 사로잡는 화려한 마술이었다. 물 흐르는 듯한 스토리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 지나갔다. 다수가 한꺼번에 숨을 들이마시는 경탄의 소리에 이어 우레와 같은 박수.
그러나 센도는 아이들 앞에서 풍선을 만질 때처럼 활기차 보이지는 않았다.
쇼가 끝나고 두 사람은 객실로 향했다. 센도는 조명 때문에 이마에 맺힌 땀을 손목으로 문지르며 앞장섰다. 그는 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루카와도 조용히 뒤따랐다.
루카와는 설마 객실마저 2인용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배가 그렇듯이, 호화 크루즈의 특실과 일등실을 포함한 모든 객실은 침대가 두 개였다. 이등실은 이 층 침대가 두 개, 삼등실에는 침대가 없었다. 좁은 방의 입구에 선 센도가 루카와를 돌아보았다.
"이 층 침대네. 어디 쓸래? 설마 같이?"
루카와는 도발임이 분명한 개수작에 올라타지 않았다. 2층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네가 올라가."
"루카와는 침대에서 적극적인 스타일은 아니구나."
"몰래 도망가면 안 되니까."
센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디로 도망간다는 거야? 우린 바다 위에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센도가 마법사라도 크루즈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긴 어렵다.
루카와는 순순히 아래층 침대에 앉았다. 오늘은 별 수확이 없었다. 센도에 대한 미스터리만 깊어졌다. 확인한바 그는 마술 공연만으로 넘칠 정도로 풍족하게 살아갈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루카와는 센도의 이름으로 된 쇼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오늘 쇼도 대타라고 했었다. 공연을 기피하는 이유가 뭘까?
루카와는 센도가 샤워를 하고 편한 옷을 입은 뒤 카지노에 갈 거라고 생각했다. 24시간 파티를 멈추지 않는 베가스 사람들 기준으로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러나 센도는 그대로 이 층 침대로 올라가 드러누워 버렸다. 침대 난간 옆으로 빼꼼, 삐죽 머리와 예쁘장한 눈이 튀어나온다. 형광등이 역광이 되어 어두컴컴한 얼굴이 말한다.
"루카와가 자고 싶을 때 불 꺼줄래? 난 그냥도 잘 자니까."
"일찍 자네."
"피곤해서."
흐아암, 커다란 입이 늘어져라 하품을 한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이. 눈꼬리에 맺힌 눈물방울을 훔쳐낸 센도의 반듯한 이마를 향해 루카와가 물었다.
"공연을 피하는 이유가 뭐지?"
센도는 눈썹 옆을 긁적거렸다. 별로 대답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루카와가 한 마디 덧붙였다.
"너 정도면 단독 쇼가 있어도 놀랍지 않아. 없는 편이 더 놀라운데."
무뚝뚝한 찬사에 센도가 생긋 웃었다. 하지만 고맙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건 루카와가 알아내야지. 그러려고 따라온 거잖아?"
되려 불을 붙인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인데. 루카와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센도는 하하 웃었다. 개운한 표정으로 다정하게 인사한다.
"내일 봐, 루카와."
삐죽머리가 쏙 사라졌다. 10초 뒤에 피유우, 잠 숨소리가 들려왔다. 루카와는 15분 정도 기다리다 불을 끄고 누웠다. 잔잔한 바다가 크루즈를 요람처럼 흔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멀미가 날 틈도 없이 눈 깜빡할 사이에 잠들었다.
다음날. 크루즈의 안팎은 여전히 화려했다. 놀랍게도 카지노는 오전에 칵테일이 공짜다. 3일 정도는 알코올 홀릭이 되어도 좋다는 마음의 휴가자들이 조식 뷔페에 딸린 바로 몰려들었다. 갑판에선 한술 더 떠 풀 파티가 열렸다. 수영복을 입은 승객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비치볼이 뙤약볕 아래를 오간다.
센도는 오전 내내 잠만 잤다. 루카와는 먼저 일어나 동그란 창가에 앉아 출렁이는 파란 파도와 왁자지껄한 갑판 파티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아침은 거하게 먹었다. 룸서비스로.
센도는 태양이 크루즈 꼭대기에 올라왔을 때야 비척비척 일어났다.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이 이 층 침대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안 도망갔네?"
"내가 할 소리다."
센도가 시원하게 웃었다. 하품을 쩌억 하면서 씻으러 간다. 루카와는 묵묵히 센도를 기다렸다. 가운만 걸친 채로 루카와의 맞은편에 털썩 앉은 센도가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물었다.
"둘째 날은 풀 파티일텐데. 수영복 입고 나가 놀지 그랬어."
"수영복 없는데."
"크루즈에 수영복을 안 가져왔어? 크루즈 처음이야?"
루카와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센도는 엄청나게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듯이 키득키득 웃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루카와가 딱딱하게 굴수록 왠지 기뻐했다. 점심은 뷔페에서 먹었다. 루카와는 아침을 먹은 적이 없는 사람처럼 잘 먹었다.
센도는 수영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편한 라운지웨어 차림으로 갑판의 선베드 하나를 차지하고 누웠다. 그러는 너는 크루즈가 처음도 아니면서 수영복이 없냐는 루카와의 퉁명스러운 지적에는 유유히 대답했다.
"수영복은 마법사에게 안 어울리잖아. 비밀이 없어서."
선글라스를 쓰고 거대한 피나콜라다를 쪽쪽 빨아 먹는다. 루카와는 몸에 딱 붙는 까만 반소매 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팔짱을 낀 채 바로 옆의 선베드에 앉아 있었다. 재킷만 벗었지 어제 차림과 딱히 다르지 않았다.
점심을 잔뜩 먹고 칵테일까지 들이킨 센도의 일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광욕에서 낮잠으로 옮겨갔다. 루카와도 팔짱 끼고 앉은 채로 깜빡 졸 뻔했지만... 잠들지는 않았다. 아마도.
오후 네 시에 누군가 센도를 찾아왔다. 한 남자가 공손한 태도로 센도의 이름을 확인한 뒤, 귓속말을 했다. 센도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선베드에서 일어났다.
"쇼타임이네."
그는 객실로 가서 턱시도로 갈아입었다. 아까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손목에 메탈 시계를 끼고 카지노로 갔다. 루카와도 쫓았다.
센도는 카지노 가장 안쪽에 있는 포커 룸으로 들어갔다. 엔트리 피가 워낙 높아서 플레이어가 충분치 않았던 방이다. 방 안에는 딜러가 없었다. 플레이어가 직접 셔플하는 듯했다.
센도가 들어오자 의자에 다섯 명이 앉았다. 가장 안쪽에 시가를 입에 물고 앉아 있던 턱시도 차림의 남성이 벌떡 일어나 센도에게 악수를 청했다.
"센도 아키라! 영광입니다. 제가 게임을 청한 사람입니다. 당신과 꼭 한 번 포커를 해 보고 싶었어요."
"돈이 많으신가 보군요."
의미심장한 센도의 대꾸에 그는 와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반갑게 통성명이 오간다. 팬과 연예인이 만나는 자리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제법 부호인 듯했다. 루카와가 벽에 선 경호원마다 옆에 둔 서류 가방을 흘끗 쳐다본다. 저 사이즈를 100달러 지폐로 채우면 약 200만 달러가 들어간다. 나머지도 그 정도를 준비하고 있다면 여긴 천만 달러 판이다.
놀랍게도 그는 가방을 열어 100달러 지폐가 100장 모인 뭉치 4개를 센도에게 건넸다. 4만 달러. 센도는 그것을 지배인에게 건넸고 엔트리 피를 제한 뒤 칩으로 바꿨다.
"남의 돈으로 도박하려니 민망하네요."
"괜찮습니다. 잃은 돈은 갚지 않아도 좋아요. 대신 당신이 번 돈도 내 겁니다."
"그런 걸 자본주의에선 투자라고 하죠. 저에게 더 투자하실 분이 있나요?"
센도가 좌중을 둘러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중년 여성이 호기심을 보이며 지폐 다발을 센도 쪽으로 밀었다. 만 달러였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만 달러를 주다니. 부자들의 호사를 따라가기 어려운 루카와가 팔짱을 꼈다. 카지노 지배인이 루카와를 향해 물었다.
"들어오실 건가요?"
루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테이블에 앉은 센도 뒤에 뒷짐을 지고 섰다. 정말 경호원 같군. 상당한 현금을 가진 부호들은 저마다 경호원을 뒤에 세우고 있다. 센도에게도 루카와가 있으니 균형이 맞는다.
센도가 5만 달러를 칩으로 바꿨기 때문에 25만 달러짜리 판이 벌어졌다. 텍사스 홀덤.
루카와가 틀렸다. 센도의 포커페이스는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루카와는 포커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기본적인 룰은 알았다. 또한 센도의 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센도의 패를 전부 볼 수 있었다.
패가 돌아갈수록 루카와는 소름이 돋았다. 센도가 딜러를 잡았을 때, 그는 아무 패나 원하는 패를 잡을 수 있었다.
그가 사기를 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센도는 절대로 자신이 잡았을 때 크게 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누구를 이기게 해줄지 결정하는 것 같았다. 정작 본인은 공개한 카드는 강해 보이지만 사실 쥐고 있는 카드는 별것 아닌 조합을 택했다.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배팅을 키워 놓고 자신에게 투자한 사람들이 번갈아 이기도록 했다. 네 명 중 두 명이니 겉보기에는 돌아가며 판을 먹는 것으로 보였다. 투자자들은 싱글벙글이었다. 센도의 칩은 줄었지만 자신들의 칩은 늘어났기 때문이다.
센도가 승부를 거는 건 자신이 셔플하지 않을 때였다. 그럴 때 센도는 확실한 패로 이겼다. 2등 패가 기묘하게도 자신에게 투자하지 않은 사람들 중 한 명에게 어김없이 돌아갔다. 그들의 칩이 서서히 말랐다. 마음이 급해져 블러핑으로 레이즈를 불러도 센도가 매번 확실한 패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콜 한 마디로 밟혔다.
루카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센도는 원하는 패를 계속 갖고 있는 거지?
결과는 센도에게 4만 달러를 투자한 남자가 1등. 만 달러를 투자한 여자가 2등. 센도가 3등. 나머지가 한 판 차이로 올인 당했다. 센도는 투자받은 돈에서 간신히 몇십 달러를 더 남겼다. 이미 충분히 기분이 좋아진 투자자들은 수익 분배를 할 필요도 없이 전부 그 돈을 센도에게 줬다. 센도는 세 시간 만에 현금 5만 달러를 벌었다.
이걸 사기라고 해야 할까? 루카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5만 달러를 탈탈 털린 사람들마저도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일어서서 굿 게임이었다고 매너 있는 악수를 나눴다. 그들에게 그 정도 금액은 하룻밤의 즐거운 여흥으로 털어 버릴 수 있는 돈이었다. 게임 중에 그들도 한두 번쯤은 짜릿한 승리를 맛봤다. 판을 뒤집을 정도의 기세는 아니었지만. 선택과 판단은 본인의 몫이었기에 쿨하게 일어서는 것이다. 사실 센도가 패를 조종할 수는 있어도 배팅을 조종할 순 없기 때문에 이 모든 돈을 센도 때문에 잃었다고 보기에도 애매했다.
루카와는 답답했다. 머리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부조리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이 옳지 않은지 정확하게 짚어내기 어려웠다. 센도가 너무 잘한다. 그게 문제였다.
그게 죄인가?
답을 찾지 못한 루카와가 고요하게 골머리를 앓는 사이, 센도는 칩을 현금으로 바꿨다. 묵직한 가방을 루카와에게 툭 넘긴다. 루카와는 얼떨결에 5만 달러가 들어있는 가방을 품에 안았다.
"이런 건 보디가드가 들어주는 거니까."
루카와는 잠자코 가방을 들고 센도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야 무뚝뚝하게 반격했다.
"언제는 파트너라더니."
하핫, 센도가 소리 내서 웃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것처럼. 도저히 긴장한 사람이 할 수 있는 플레이가 아니었는데도 루카와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루카와의 추측과 달리 센도의 포커페이스는 웃는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에, 루카와는 아주 오랜만에 센도의 웃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센도는 객실 안의 금고에 돈다발을 툭툭 집어넣고 무성의하게 잠갔다.
"배고프다. 저녁 먹자. 내가 쏠게."
센도는 루카와를 데리고 갑판으로 나왔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사뭇 우아한 분위기였다. 감시자와 사기꾼이 먹기에는 지나치게 로맨틱한 파이브 코스요리가 또다시 펼쳐진다. 루카와는 묵묵히 먹었다.
메인 디쉬가 나왔을 때, 웨이터가 센도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저 구석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키면서. 센도의 눈이 점점 반짝거린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벌떡 일어나 냅킨을 테이블에 올렸다.
"잠시 실례."
루카와는 센도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감시자의 날카로운 시선 끝에서 센도가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센도는 그 테이블에 계속 존재하던 여분의 컵과 냅킨을 집었다. 센도가 무어라 말하자 두 사람의 시선이 센도가 손에 들고 있는 컵에 홀린 듯이 고정되었다. 센도는 컵을 이리저리 비틀어 아무런 장치가 없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냅킨을 살살 흔들며 컵 위로 덮었다. 양 손목을 한 번 흔들자, 냅킨이 평평하게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공중에서 컵이 사라졌다. 커플 중 한 사람이 깜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이내 감탄의 박수를 쳤다.
센도는 또 한 번 주의를 냅킨으로 돌렸다. 이번에는 무언가 공간을 빚는 것 같은 손동작으로 냅킨 가운데를 뾰족하게 잡아서 살살 들어 올리더니, 홱 뒤로 치웠다. 냅킨 아래에 숨겨져 있던 센도의 손에 어느새 빨간 장미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센도가 커플 중 한 사람에게 그것을 건넸다. 그는 활짝 웃으며 감동했다.
센도가 이번에는 다른 한 사람에게 오른손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손 위에 냅킨을 올리고, 살살 흔들며 가운데를 뾰족하게 잡아 올리더니, 화려한 동작으로 홱 들어 올렸다.
그의 손 위에는 벨벳 반지 상자가 올라와 있었다. 상대방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반지 상자를 든 사람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곁눈질로 센도의 마술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꽃다발과 반지를 받은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승낙을 외쳤다. 두 사람이 뜨겁게 키스를 나눴다. 구경꾼들이 환호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멋진 프로포즈였다.
센도는 키스신쯤에는 루카와의 테이블로 돌아와 있었다. 능청스럽게 군중의 한 사람이 되어 박수를 쳤다.
루카와는 지금까지 센도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래서 그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잘 알 수 있었다. 센도는 크루즈에 탄 이래 가장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무대에서 기립박수를 받을 때보다도. 5만 달러를 벌었을 때보다도.
루카와는 그제야 센도의 말을 이해했다. 센도는 정말로 도박을 하고 있었다. 돈을 따면 승리하고 돈을 잃으면 패배하는 종목이 아니라. 사람들이 웃으면 승리하고, 행복하면 우승하는.
그게 센도가 하는 일이었다. 센도의 삶이었다.
센도가 범죄에 연루될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루카와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이번 휴가 프로젝트는 실패인지도 모른다.
센도는 그날 밤늦게까지 라운지에서 벌어진 포커판에 끼어들었다. 엔트리 피 같은 건 없고, 1달러 지폐와 동전이 오가는 조촐한 현금 게임이었다.
센도는 낮처럼 세밀하게 판을 조종하지 않았다. 평범하게 돈을 잃기도 하고 따기도 하면서 본전을 채웠다. 포커페이스도 없었다. 술 취한 플레이어들의 수다에 빠져들어 타인의 실수를 야유하고 대박을 부러워했다. 왁자지껄한 판이었다.
그날도 자기 전에 센도가 이 층 침대에서 눈을 빼꼼 내밀고 루카와에게 물었다.
"루카와가 자고 싶을 때 불 꺼줄래?"
루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센도가 싱긋 웃었다.
"오늘은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
루카와는 조금 생각하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답해 주지도 않을 거잖아."
"맞아. 비밀이니까."
루카와가 쳇, 하고 혀를 찼다. 센도는 상큼하게 인사했다.
"내일 봐, 루카와."
그날도 루카와는 파도의 흔들림에 안겨 금세 잠들었다.
#Day3
센도는 다음 날도 늦잠을 잤다. 몇 시에 자도 항상 같은 시간에 눈을 뜨는 루카와는 새벽에 일어나 센도를 내버려두고 갑판을 스무 바퀴 정도 뛰었다. 깔끔하게 샤워를 하고 역시 센도를 내버려둔 채 조식 뷔페를 즐겼다.
루카와가 돌아왔을 때까지도 센도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루카와는 센도의 조그맣게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창밖의 일렁이는 수면을 보다가 깜빡 잠들어 버렸다.
눈을 떴을 때, 센도가 있었다. 턱을 괴고 루카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었다.
"일어났네."
밥을 먹으러 가자며 일어선다. 한 발짝 늦게 뒤를 쫓아가며 루카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 가슴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체했나? 잠이 덜 깼나? 루카와는 명치 주변을 문지르며 점심을 먹었다. 맛있었다. 소화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루 종일 소득 없이 센도를 쫓아다니며 그 이상한 기분은 계속되었다. 루카와는 나름대로 열심히 추측했다. 아마 자신은 센도가 생각보다 나쁜 놈이 아니라서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조금 허무함을 느끼고 있는지도. 그것도 아니면 촉이 빗나가서 좌절하고 있거나. 분하거나. 창피하거나...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그 어떤 감정의 단어도 루카와에게 해방감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센도는 그날 아무것도 안 하고 한량처럼 놀았다. 카지노에서 100달러 칩 다섯 개를 바꾸더니 관광객처럼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끝장나게 즐겼다. 룰렛판에 툭툭 던져 아무 데나 배팅하고 주사위를 쥔 주먹을 루카와의 입술 앞에 들이대며 행운의 블로우를 날려 달라고 했다. 이기면 소리를 지르면서 루카와를 껴안았고 지면 어깨 한 번 으쓱한 뒤 돌아섰다.
센도는 운이 나쁘지 않았다. 특히 블랙잭 테이블에서 밑천을 제법 많이 불렸다. 하지만 7에 연속 11번 걸고 나니 한 푼도 없어졌다. 빈털터리가 된 센도가 루카와에게 말했다.
"저녁은 얻어먹어야겠는걸."
루카와는 어제 5만 달러를 따지 않았냐고 지적하는 대신 잠자코 레스토랑 계산서를 챙겼다. 센도는 키득키득 웃었다.
센도는 그날도 식당에서 어린아이들을 만났다. 첫날 센도에게 푹 빠졌던 아이들은 3일간 크루즈를 타면서 제법 단짝이 된 모양이었다. 센도는 컵과 공만으로 아이들의 시선은 물론 어른들까지 사로잡았다. 순식간에 센도 주변에 동그랗게 갤러리가 늘어섰다. 식사하는 것도 잊고 무아지경으로 사람들을 놀래키고 웃기고 박수치게 만들었다.
루카와는 센도가 중독자라고 생각했다. 센도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중독되어 있었다.
센도는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야 하는 시간이 되어서야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센도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하품을 했다.
"오늘도 아무것도 안 물어보네."
루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센도는 시시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일 봐, 루카와."
언제나처럼 불을 끄는 건 루카와의 몫이었다.
한밤중에 루카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침대 난간을 조심스럽게 밟고 올라가, 센도의 침대 난간에 두 손을 올리고, 빼꼼 눈을 내밀었다.
어둠 속을 가만히 노려본다.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점차 센도의 윤곽이 보인다. 창문으로 겨우 새어 들어 온 바다에 반사된 달빛을 받아 어렴풋이 빛나는 콧대와 작게 벌린 입. 도톰한 눈밑과 의외로 긴 속눈썹. 단정한 이마와 남자다운 눈썹. 루카와는 그런 것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럼에도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 가슴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루카와는 심장이 진정될 때까지 센도를 관찰하려고 했다. 원인이 이 녀석이라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가늠할 수 있었다. 루카와는 촉이 좋았고, 거물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창밖이 하얗게 밝을 때까지 루카와의 이상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루카와는 동이 텄다고 울부짖는 갈매기 소리와 함께 잠들었다. 그리고 점심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루카와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숙취처럼 머리가 아팠다.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도. 잠을 설치는 건 루카와의 인생에 매우 드문 경험이다. 센도가 루카와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멀미약 가져다줄까?"
루카와는 잠깐 진지하게 이게 멀미인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금방 고개를 흔들었다. 뱃멀미로 속이 울렁거릴 수는 있지만 심장이 크게 뛰거나 잠이 오지 않거나 뒷덜미가 간지러울 이유는 없다. 루카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센도는 다소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방에서 쉴래? 나도 별로 할 일 없어."
거짓말이었다. 오후 세 시가 되자 쇼 책임자가 헐떡이며 방문을 두들겼다. 왜 리허설에 안 오냐고. 센도는 마지막 날 대미를 장식할 쇼의 주인공이었다. 루카와는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역시 사기꾼일 가능성이 아직 조금은 남은 거 아닐까?
센도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일어섰다. 루카와를 돌아보며 곤란하다는 듯이 말한다.
"남아서 쉬라고 해도 따라올 거지?"
루카와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센도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앞장섰다.
마지막 무대는 갑판이었다. 레스토랑 테이블 대신 객석을 깔고 단을 쌓았다.
센도는 노을이 지기 시작한 바다 전체를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았다. 마술보다도 그 마술 속의 스토리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정작 마술 자체는 너무나 익숙한 카드 트릭 위주였다. 정말 간단해 보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면서도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어느새 해가 넘어가 갑판 위가 어두워졌다. 마지막으로 센도가 크게 손짓하자 갑판 위 어둠 속으로 불꽃이 솟아올랐다.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마술쇼의 끝이자 크루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불꽃놀이의 시작이었다.
모두가 난간 쪽으로 달려 나갔다. 센도는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루카와를 향해 내려왔다. 지친 얼굴을 화려한 불꽃의 잔상이 두어 번 붉게 물들였다. 루카와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수고했어."
센도는 조금 놀란 얼굴로 루카와를 바라보았다. 루카와가 객실 쪽을 가리켰다.
"먼저 들어가서 씻고 쉬어. 너만 저녁을 못 먹었어. 룸서비스를 준비하라고 할게."
센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제 나 감시 안 해도 돼?"
루카와는 어깨를 으쓱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센도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 위로 쌓여 있던 피로가 전부 사라진 것 같은 맑은 웃음소리였다.
루카와는 방으로 들어가는 센도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다 룸서비스를 준비하기 위해 지배인을 찾으러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생각보다 간단치 않은 미션이었다. 첫째, 불꽃놀이를 잘 보기 위해 갑판의 조명은 최소한이었다. 너무 어두웠다. 둘째, 다들 마지막 밤이라고 비슷한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셋째, 지배인은 아주 바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순서대로 정해진 불꽃을 선보이는 동시에 저녁 식사까지 스무스하게 마무리하는 일은 오퍼레이션의 예술이나 다름없었다. 루카와는 지배인을 찾고 나서도 30분 정도는 말을 걸지도 못했다.
겨우 룸서비스를 주문하고 나서 객실 쪽으로 돌아섰을 때, 루카와는 엉뚱한 곳에서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불꽃이 보이지 않아 아무도 없는 선미 쪽 갑판이었다. 불꽃이 터질 때마다 잠깐씩 바닥에 길게 늘어서는 삐죽삐죽한 그림자. 분명히 센도였다. 루카와는 혀를 쯧, 차고 그쪽을 향했다. 아무튼 말을 안 들어.
가까이 갈수록 소음에 묻혀 있던 대화 소리가 조금씩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니, 대화라기에는 언성이 너무 높다. 마치 다투는 것처럼...
"그 기술이면 돈을 쓸어 담을 수 있다고, 못 알아듣겠어?"
"당신이야말로 못 알아듣고 있잖아. 난 돈이 부족하지 않다고."
"이 세상에 돈이 부족하지 않은 놈이 있어?"
"나인가 보지."
"헛소리하지 마, 이미 다른 놈이랑 손을 잡은 거냐? 계속 같이 다니던 그 반반하고 키 큰 녀석인가? 그 녀석 역할은 뭐야? 얼마를 떼어 주지? 내가 그보다 좋은 조건으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야. 그럼 이만."
센도가 두 손을 공중에 든 채로 돌아섰다.
루카와는 다음 순간 몸을 날렸다. 완전히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다투던 상대가 내민 손끝에서 잭나이프를 확인했다.
달려들고 보니 상대는 제법 덩치가 있는 남자였다. 루카와는 체중을 다 실어서 그의 손목을 철제 난간에 부딪혔다. 엄청난 소리가 났다. 힘이 풀려 떨어져 나온 잭나이프를 그대로 발로 차서 바닷속으로 날렸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그대로 그의 몸을 한 바퀴 우악스럽게 돌려 팔을 뒤로 꺾은 뒤 무릎 뒤를 걷어찼다. 무릎 꿇은 남자의 등짝을 꺾은 팔로 짓누른 뒤 재빠르게 주머니를 체크했다. 뒷주머니에 권총이 있었다. 이건 압수. 루카와는 총기를 라이더 자켓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대신 경찰 배지와 수첩을 꺼냈다. 신음하는 남성의 뒤통수에 고한다.
"경찰입니다. 상해 미수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뭐라고 변명을 외치는데 잘 알아듣기 어렵다. 루카와가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 상해미수범의 양손을 결박했다.
여전히 무릎으로 그의 꼬리뼈를 제압한 채 루카와가 긴 숨을 내쉬었다. 수백번도 더 해 본 익숙한 일인데 이상하게 오랫동안 가슴이 뛰었다. 약간 상기된 볼을 한 루카와가 상해미수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센도, 선장을 불러 줘."
센도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센도?"
루카와가 센도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퍼펑, 선두 쪽 간판에서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희미한 색색깔이 달빛과 섞여 은은하게 센도의 윤곽을 비춘다. 불꽃이 없을 때에도 센도의 얼굴은 조금 붉었다.
루카와는 얼빠진 센도를 내버려두고 남자를 발로 차서 일으켰다. 센도에게 다른 쪽 팔을 붙잡게 해서 선장실로 연행했다. 남는 방의 화장실에 상해미수범을 묶어두고 감시역을 돌아가며 세워 달라고 선장에게 부탁했다.
센도에게 칼을 들이댄 얼빠진 녀석은 평범한 도박 중독자로 크루즈에 탈 정도로는 그럭저럭 돈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과거형이지만. 모든 도박 중독자가 그렇듯이 더 큰 일확천금을 꿈꾸며 크루즈에 탔고, 이틀 만에 가진 돈을 전부 잃고 빚까지 졌다. 초조한 마음에 그만 무리수를 두려다가 칼까지 꺼내게 되었다고 술술 자백했다. 루카와는 종이와 펜을 구해 간이 형식이지만 진술서도 쓰게 했다.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항구에 닿는 즉시 구치소로 연행하기로 했다. 어차피 거기 가면 또 써야 하겠지만.
루카와가 모든 일이 끝마치고 한숨 돌렸을 때, 문득 옆에는 여전히 센도가 있었다. 크루즈에 탄 후로 항상 루카와가 센도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정작 센도의 존재를 잊을 정도로 바쁜 와중에는 센도가 루카와 옆에 계속 붙어있었다. 희한한 기분이었다.
불꽃놀이는 끝났다. 루카와는 밤바람을 조금 더 즐기고 싶어 선미 갑판에 나와 앉았다. 센도도 조용히 따라와 옆에 앉았다.
습기를 머금은 까만 바람이 바다를 스치고 센도의 머리칼을 건너 루카와의 뺨을 지나간다. 루카와는 잠시 속눈썹을 뺨에 앉힌 채 이마를 타고 넘어가는 바람을 느꼈다. 센도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센도가 어쩐지 수줍게 입을 열었다.
"고마워. 루카와. 구해줘서."
루카와는 어깨를 으쓱했다. 항상 센도가 하듯이. 센도에게 도박을 이기거나 지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루카와에게는 범죄를 막는 일이 그랬다. 센도가 커다란 손바닥에 턱을 괸 채로 루카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감사의 뜻으로 딱 하나만 내 마법의 비밀을 알려줄게. 무엇이든 물어봐."
원래는 절대로 가르쳐 주면 안 되는 건데. 센도가 비밀스럽게 웃었다.
마술의 비밀을 밝히는 건 금기다. 프로라면 더더욱. 루카와도 잘 알았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기회다. 센도 같은 천재 마법사를 만나고, 그의 마술을 눈으로 보고, 그러고도 그 비결을 들을 수 있는 건.
루카와가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을 꾹 쥐었다. 센도를 기세 좋게 마주 보며.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내 마음을 어떻게 훔쳤는지 알려 줘."
센도는 일시 정지를 누른 것처럼 완벽히 굳었다.
루카와는 눈치도 못 채고 센도의 양팔을 덥석 움켜쥔 채 계속 외쳤다. 살짝 상기된 얼굴. 표정만큼은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언제였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뭔가 한 건가? 무슨 마법이지? 대체 어떤 수로..."
센도는 참을 수가 없었다. 루카와의 보드라운 뒤통수를 붙잡고 시끄럽게 쫑알대는 사랑스러운 입술을 삼켜버렸다.
불꽃이 사라져 밤하늘을 되찾은 별빛 아래에서 두 개의 어둠이 하나로 겹친다.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번에는 루카와가 굳었다. 센도가 비슷하게 상기된 얼굴로 루카와의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쓸면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어딘가에 살짝 취한 듯이 반짝이는 센도의 눈동자를 보고 루카와의 뺨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이번에는 루카와가 센도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홀린 것 같은 키스. 두 사람 다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은은한 달빛만 스포트라이트로 달콤한 키스신을 비췄다.
호화 크루즈는 천천히 베가스 항으로 닻을 내리러 간다. 사막 위를 수놓은 화려한 네온사인이 가까워졌다. 사랑과 쇼와 술과 도박과 파티의 도시에 한 쌍의 커플이 늘었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고 흔한 마법에 빠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