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불면의이쑤신
<여름, 블루 레몬 셔벗> 카피북 수록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 상반된 것, 이질적인 것이 아무렇지 않게 늘어서 있고, 아무도 그 사실에 관해 관심이 없는 곳. 세계적인 대도시 중에서도 특히 뉴욕이 그렇다. 절대로 교차할 일 없을 것 같은 인생, 예를 들면 백만장자와 거지가 모퉁이 하나를 끼고 나란히 서 있는 순간이 매일 무작위적으로 발생한다. 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는 사람이 없고 걷는 속도를 줄이는 사람도 없다.
노숙자가 골목 안쪽에서 어떤 빌딩의 빗물받이 파이프에 팔뚝까지 집어넣고 낑낑대는 모습 같은 건 전혀 이목을 끌 만한 광경이 아니다.
그는 제법 진심이다. 유산을 찾는 중이니까. 두 달 전쯤 나타났고 보름 전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는 녀석의 유산.
페이스리스. 그게 별명이었다. 사교적인 녀석은 아니었다. 하긴 요즘은 예전 같지 않다. 노숙자들 간의 미묘한 커뮤니티나 연대감은 자고 일어나면 다섯 명, 심할 땐 열 명씩도 늘어나는 최악의 불경기에는 유지가 쉽지 않다. 그래도 여전히 길에서 살기 위해서는 서로 말이나 주먹이나 마약 같은 걸 주고받든지 말든지 간에 머릿수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는 편이 좋다.
페이스리스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매우 일차원적이었다. 한파가 물러간 지 오래인데도 얼굴을 꽁꽁 싸매고 다녔기 때문이다. 주름 대책이라나 뭐라나. 널 뭐라고 부르지? 그렇게 물어도 어깨만 으쓱하길래. 좋아, 얼굴 없는 친구. 그게 다였다.
모자, 선글라스, 팔토시를 찢어서 만든 것 같은 후줄근한 마스크. 넝마를 덕지덕지 둘러서 누가 봐도 의심 없이 노숙자 패션. 피부가 드러나는 곳이 없어 인종조차 알 도리가 없었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다. 죽다 살아난 노숙자들 중에는 추위를 극도로 경계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으니 어쩌면 그 중 하나였는지 모른다. 그가 나타났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밤은 꽤 선선했으니까. 하여간 신원을 알 수 없는 차림에 덩치도 제법 커서 실수로 은행 근처 CCTV 앞이라도 돌아다니다간 경찰한테 끌려가기 딱 좋아 보였다. 하긴 노숙자들은 다들 어딘가 하나는 돌아있게 마련이니까.
친해졌다고까지 말할 순 없지만 어쨌든 가장 많이 말을 섞어 본 건 자신일 것이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어느 날의 비밀 얘기에 따르면 페이스리스는 저축을 하고 있다고 했다. 노숙자가 쥐고 있는 현금의 출처란 구걸 아니면 절도겠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저축이 모일 만큼 모이면 이 동네를 뜰 거라고 말했다. 경쟁이 너무 심하고 물이 안 좋다나 뭐라나. 자신도 두 달 전에 온 뜨내기인 주제에. 어딘가 오만한 녀석이었다.
이 동네에서 만난 유일한 친구에게 유산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결국 코웃음을 참지 못했다.
"유산은 죽을 때 남기는 거야. 무식하긴."
표정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페이스리스의 목소리에 그때만큼은 확실히 웃음이 묻어난 것 같았다.
"그럼 죽은 걸로 해 두지 뭐."
페이스리스는 유산을 두고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장소뿐만 아니라 정확히 날짜와 시간을 지정했다. 그전에도, 후에도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그건 몸값을 거래하는 방식인데. 인질 말이야."
"같은 이유지. 다른 놈들이 가져가는 건 싫어."
페이스리스가 선글라스 너머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도 않는 눈동자 색깔이 궁금했다.
"여기 친구들은 대부분 시간 감각이 없어. 넌 건전지 없이도 잘 돌아가는 옛날 시계를 갖고 있어. 그래서 너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로 한 거야. 넌 정확히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거야... 약속을 지킬 수 없는 녀석에겐 유산 같은 건 주고 싶지 않아."
그의 목소리에는 이상하게도 노숙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품격이 있었다. 목소리만큼은... 정상인 같았달까. 노숙자들은 대체로 치아가 상해 발음이 엉망인데 페이스리스는 그렇지 않았다. 잘 입을 열지 않아 처음에는 조금 잠긴 목소리. 나직하지만 신뢰감을 줄 만큼은 힘이 있었다. 어딘가 소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생각보다 어릴지도, 생각보다 최근에 노숙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들었다.
약속의 그날이 오늘이고, 그 시간은 3분 뒤고, 그 장소가 바로 여기, 리모델링 때문에 접근도 어려운 건물 구석의 빗물받이 파이프 속이었다.
"줄을 당겨. 세게. 끊어질 정도로. 그럼 될 거야."
유산을 남긴 친구의 흔적이 사라지고 나서 보름.
그동안 노숙자는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이란 걸 해 봤다. 시간은 많았으니까.
결론은 언제나 똑같았다. 최악으로 간 대봤자, 나쁠 게 있겠어? 노숙자는 잃을 게 없다. 이게 함정이라 할지라도. 그저 공치고 말겠지.
줄이 있다. 파이프 속에. 확실히 만져진다. 팽팽한 낚싯줄. 노숙자는 주머니에서 손가락 한마디만 한 돌조각을 꺼내 든다. 보름 동안 날카롭게 갈아 놓은 그 끝을 낚싯줄에 톱질하듯 문지른다. 탄력 때문에 잘 잘리지 않는다.
다섯 손가락을 따로따로 요령 있게 놀려서 아래쪽으로 줄을 당기는 동시에 엄지와 검지로 쥔 돌을 빠르게 움직여 본다. 손가락 사이에 쥐가 날 것 같다. 마음이 점점 급해진다. 왼 손목의 낡은 태엽 시계를 흘끗 확인한다. 30초 남았다.
탁, 하고 팽팽했던 탄력이 끊긴다.
정확히 약속한 시각이다. 10초도 어기지 않았다! 기쁨의 비명과 동시에 파이프 속에서 뭔가가 우수수 떨어져 오른손을 간질였다.
재빨리 손으로 파이프를 닥닥 긁어 떨어지는 것들을 꺼내 모은다. 노숙자는 전리품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후다닥 그 자리를 벗어났다.
모퉁이 너머에서 어떤 소란이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비명이었나? 고함이었나?
노숙자는 뉴욕에선 매일 그렇듯이 사이렌을 시끄럽게 울리며 지나가는 경찰차와 구급차와 반대 방향으로 빠른 걸음을 옮겨 지하철역으로 달린다.
자신의 구역인 승강장 구석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유산을 신중하게 헤아린다. 화폐가 아닌 것들, 정체 모를 은색 구슬이나 실 같은 것들은 전부 버렸다.
최종 결과는 1달러 27장. 5달러 14. 그리고 유난히 꼬깃꼬깃 접힌 지폐 한 장은... 100달러다! 꼬질꼬질해진 심장에서 기쁨과 흥분이 솟아오른다. 하지만 위조일 수도 있다. 받아주는 곳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갖고 있어 나쁠 건 없지.
노숙자는 수수께끼의 친구가 남긴 특별한 유산을 가슴팍의 주머니에 소중하게 감춘다. 100달러 지폐 한 장으로 벌써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길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생긴 것이다. 난 괜찮을 거라는 이상한 자신감과 뻔뻔함.
노숙자가 친구의 유산을 받아 간 시간, 모퉁이 너머에서는 한 남자가 살해당했다.
회의를 마치고 나와 자신을 데리러 온 리무진에 타려던 경제계의 거물이 관자놀이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대동했던 경호원 둘은 당황하는 것 외에 거의 쓸모가 없었다. 경찰조차 리무진 운전자가 불렀다.
백주대낮에 맨해튼 한가운데서 발생한 총격 사건! SNS가 불타올랐고 뉴욕타임스 최고의 기자들이 다 달라붙었다. 군중의 관심사는 테러냐 아니냐 쪽으로 흘러갔고 사건은 연방으로 넘어갔다. 피해자가 경호원을 대동했던 이유는 막대한 자본의 사이드 프로젝트로 운영하던 마약 사업이 꼬이면서 특정 갱단과의 마찰이 발생했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그가 방지하고자 했던 것은 보복 폭행이나 납치였다. 암살은 아니었다.
살인 무기는 쉽게 발견됐다. 호텔에서 대각선 건너편, 골목 끝 모퉁이에 있는 건물은 리모델링 중이었다. 반동에도 꿈쩍 않도록 잘 세팅돼 소음기까지 장착된 저격총이 옥상에 마련되어 있었다. 총과 소음기와 고정장치까지 싹 다 3D 프린터로 개인 제작한 물건이라 추적이 불가능했다. 방아쇠에는 끊어진 낚싯줄이 감겨 있었다. FBI는 원격 발포를 의심해 범죄 시각의 주변 네트워크 전체를 조사하였으나 유의미한 단서는 없었다.
동기 측면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피해자가 경계하던 갱단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날 그 시각에 갱단은 다른 갱단과 브루클린에서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다른 살인을 저지르느라 해당 살인을 저지를 틈이 없었던 것이다.
이 범죄에는 독특한 점이 있었다. 백주대낮의 헤드샷.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계획 살인. 어찌 보면 공개 처형에 가까운 방식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갱단의 보복을 의심할 만했다. 하지만 동시에 갱단과는 영 성격이 맞지 않는 방식이기도 했다. 용의주도하고, 조용하고, 단독 범행으로 보이며, 갱단에게 가장 중요한 '시그니처', 그러니까 내가 했노라는 표식이 전혀 없다. 전반적으로 고도의 지능이 느껴진다. 사실 살인 현장만을 두고 생각했을 때는 전문적인 히트맨의 그림자가 보였다.
FBI는 문제가 된 갱단이 최근 거금을 송금한 수상쩍은 계좌의 목록만 알 수 있다면 수수께끼는 다 밝힌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지만 암호화폐 세상에서는 무엇을 압수해야 하는지도 애매했다. 거래소? 지갑? 국경을 넘나들며 감춰졌을 것이 분명한 연결계좌?
어쨌든 수상할 정도로 알리바이가 탄탄한 갱단의 보복이라면 테러로 번질 가능성은 없었다. 수사 당국은 찝찝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정을 고려할 때 조사는 이쯤에서 접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유력한 용의선상에 있는 갱단에서 거금을 송금받은 전문적인 살인청부업자 센도 아키라는 남의 이름으로 개통한 스마트폰을 통해 이런저런 휴양지를 검색 중이었다. 시밀란, 마우이, 그레이트 배리어. 잔뜩 보정을 입혀 색색깔의 보석 같은 바다 사진이 스크롤을 따라 쭉쭉 스쳐 지나간다. 실제로 보면 이보다 낫다는 걸 센도는 이미 알고 있다.
두 건이나 잘 끝냈으니 쉴 자격이 있지.
센도는 자신의 직업을 고소득 전문직으로 여겼다. 바짝 일하고, 펑펑 쓰며 오래 쉬고. 언젠가 일이 떨어질까 두려워 자꾸만 자발적 과로로 내몰리는 저소득 프리랜서의 함정에 걸려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센도는 골라서 일했다. 쉬운데 보수가 좋은 걸로. 어쩔 수 없이 주로 급한 건수가 많았다.
하지만 범죄란, 그중에서도 살인은 재촉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센도는 가격을 협상하지 않는 대신 기간을 협상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편이 깔끔하게 정리된다고 설득하면 마다하는 고객은 많지 않았다. 물론 질질 끈다고 꼭 유리한 건 아니다. 필요한 만큼의 준비 기간을 확보하면 된다.
센도는 가끔 그런 상상을 했다. 직업을 묻는 설문지. 제조업, 건설업, 유통업, 1차 산업, 공무직과 같은 세상의 모든 직업군이 다 나열된 다음 마지막에 남은 '기타' 옆의 조그마한 박스에 체크표시를 넣고. 진실을 실토하라는 듯이 반듯하게 그어진 밑줄 위에 또박또박 적는다. 살인청부업자.
하지만 '암살자'라고 쓸 생각은 없었다. 그건 왠지 결이 다른 것 같았다. 위아래로 검은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직접 방아쇠를 당긴 다음 경찰들의 눈을 피해 재빨리 빠져나오는 액션 영화 속의 악역. 암살자가 그런 거라면 센도 아키라는 해당이 없었다.
그가 일하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우선 고객이 원하는 '세팅'이 있을 것이다. 그의 직업은 말하자면 개인 맞춤형 서비스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 이번 거래처럼. 명백한 타살이어야 한다든지.
그렇게 흔한 경우는 아니다. 대체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사람들은 그의 생명만 끝장난다면 방식은 따지지 않는다. 오히려 살인으로 보이지 않는 결과를 선호한다. 사고, 질병, 자살, 자연사가 가장 좋다. 갱단 같은 미친놈들이 아니고서야.
센도 아키라는 범죄 현장에 없는 편을 선호했다. 눈에 띄는 외모라는 자각이 있어서다. 목격자의 기억에 남는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물론 얼굴 외의 모든 것은 가짜일 것이고, 기억해도 추적해도 별 소용은 없겠지만. 어쨌든 평생 먹고살 돈을 모을 때까지는 계속해야 하는 일인데.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았다.
직접 방아쇠를 당길 필요가 없었다. 센도는 여러 방법을 개발했다.
예를 들면 잠재력이 있는 사람을 격려하는 것. 프라임 서스펙트 선발전. 지극히 자연스럽게도, 누군가에게 살인 청부를 당할 만한 짓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 중 50% 정도는 이미 적이 많았다. 인간관계를 조사하다 보면 한발 앞서 살인 청부를 할 기회가 없어 속상했을 법한 주변 인물을 하나 이상 발견할 수 있었다. 순조롭게 미래의 용의자를 모은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싶을 만한 사람과 실제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쓸만한 후보가 있다면 그럴듯한 신분으로 그에게 접근한다. 프라임 서스펙트. 너무 친해질 필요는 없다. 우연히 같은 여행길에 오르거나 지인의 지인의 지인 같은 걸로 파티나 모임에서 말을 좀 주고받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의 성격에 따라서 조심스럽게 탐욕을 부추기거나, 잘 숨겨진 암시를 주거나, 이미 갖고 있던 두려움을 의미심장하게 부채질하거나, 범죄 같은 건 절대 못 할 성격이라고 놀리고 도발하거나. 그리고 기회를 만든다.
지금까지 센도가 고른 예비 범죄자들은 모두 제 몫을 했다. 누가 봐도 동기, 수단, 기회를 가진 사람이 센도 대신 범행을 저질렀다.
의뢰인들은 누가 방아쇠를 당겼는지까지는 관심이 없었다. 정해진 기한 안에 정해진 사람이 정해진 대로 죽었다. 그러면 거래는 지켜졌다. 센도는 일용할 돈을 얻었고 긴 휴가에 들어갔다.
또 다른 방법은 도미노. 이 방법은 많은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타겟을 가운데 두고 그 시간, 그 장소를 향해 정교하고도 단순한 도미노를 쌓는다. 센도는 맨 끝에 있는 도미노를 건드리기만 하면 된다. 물리법칙이 나머지를 해결해 주듯이, 심리적인 연쇄반응과 여러 사람들이 행동이 쌓여 마지막 도미노가 타겟을 건드리고, 그렇게 거래는 완성된다.
너무 많은 사람을 개입시키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다. 사람들은 비밀을 잘 지키지 못한다. 차라리 비밀이 아닌 척하거나, 비밀을 지키는 게 그들에게 이득인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센도가 두 달 전부터 맨해튼의 노숙자로 살기 시작했을 땐 아직 타겟의 회의 장소나 일시가 정해지기 전이었다. 언젠가는 기회가 올 법한 장소였고 센도는 위장 신분의 자연스러움에만 집중했다.
타겟의 적절한 일정과 동선을 확보했을 때부터 도미노를 쌓기 시작했다. 무기를 세팅하고 낚싯줄과 추를 사용해 '진짜' 도미노를 세팅한다. 끝을 자르면 적절하게 계산한 무게의 추가 서로를 쳐서 작용과 반작용으로 방아쇠가 당겨지고, 마지막에는 짧은 낚싯줄만 남는다.
물론 현장에서 도미노를 건드리는 건 인간 도미노, 즉 다른 사람이어야 했다. 현장에 있어도 수상할 이유가 없는 사람. 간단한 지시만으로도 자연스럽게 경찰을 피할 사람. 타인에게 죽을 정도로 무관심한, 범죄나 사망조차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다고 철석같이 믿을 그런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정확한 타이밍을 지킬 만한 사람. 발사각까지는 완벽하게 계산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빗나가서 허탕 치면 그래도 다행이지만 엉뚱한 사람이 죽으면 골치 아프다. 타겟의 경계만 더할 수도 있었다.
두 달 동안 센도는 적당한 인물을 물색했고 매수에 성공했다. 생각할 시간도 충분히 주었다. 약간의 수수께끼와 약간의 행운. 두려움을 줄 정도로 큰 건 아닌 보상. 목숨만 붙어 있는 지루한 나날 중의 모험.
센도에게도 그건 모험이었다. 플러스 마이너스 1~2분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5분이나 10분 늦거나 빠르면 그때는 증거 인멸을 위해 그 노숙자를 처리해야 할 수도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다. 엑싯 플랜은 쓸 일이 없었다. 노숙자에게는 다행이었다. 이름이 뭐였지?
인간 도미노를 움직일 방법은 많다. 매수, 협박, 때로 강박적인 루틴을 지키는 사람들의 습관을 이용할 때도 있었다. 그건 정말 편리했다. 하지만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만 쓸 수 있었다. 그때는 타겟을 그 장소로 이동시키는 것에 공들여야 했다.
한 사람을 협박해서 누군가를 지하철 선로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라고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협박을 당했다 해도 대부분은 마지막 순간에 못 하겠다고 울며불며 포기할 것이고 최악의 경우 자살하거나 경찰에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오전 8시 34분 31초에 지하철역 안 자판기 아래에서 튀어나온 어떤 줄을 있는 힘껏 당긴 다음, 그 줄을 수거해서 가까운 소각장에 넣으라는 정도는 무리 없이 해낼 것이다. 항상 출근길에 같은 시간 열차를 타는 타겟이 그날따라 3분 정도 늦는 바람에 계단을 뛰어서 내려가다 무언가에 발목이 걸려 추락해서 사망한다 해도 그것이 자신이 당긴 줄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사고조차 신문에는 실리지 않을 테니까. 구글맵에나 실리겠지. 역사 내 사고로 인해 열차 지연.
센도는 그런 식으로 일했다. 잠재력을 키우고, 도미노를 쌓는다. 사고, 의문사, 자살, 질병, 자연사, 가끔은 명백한 타살. 대부분의 과정은 계산과 산수, 나머지는 심리전이었다.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행동을 유도하는 것. 리스크를 예측해서 피해 가는 것. 한 번의 찬스만 놓치지 않으면 승리하는 게임. 그리고 그 찬스를 만들기 위한 흐름의 설계.
나름대로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센도는 일에 감정을 섞지는 않으려고 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즐거울 게 있나.
센도는 언제나 범죄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설계로 인해 누군가의 호흡이 멈춘다든지, 피가 튀고 장기가 파열한다든지, 실제로 살아있는 하나의 우주가 소멸했다는 감각을 느끼지는 않았다. 죽음은 여전히 아득했다. 결과적으로 누군가 거기에 이르는 완벽한 방법을 알면서도. 가상현실의 전쟁 게임에 더 가까웠다.
조금 검소하게 살기로 마음먹는다면 센도는 지금 당장이라도 은퇴할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 두 건은 수입이 좋았다. 이참에 휴가 계획을 접고 진지하게 은퇴 후 투자 계획을 세워야 할까... 센도는 별로 진지한 결심 없이 아, 공부해야 하는데, 되뇌는 학생마냥 멍하니 생각했다.
사실 센도는 한참 전에 은퇴했어도 평생 먹고사는 데에 큰 지장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사회생활'을 시작한 처음부터 큰돈을 벌었고 많은 돈을 썼기 때문에 필요 최소한의 생계비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일반적인 금전 감각을 갖추지 못한 편이었다. 사치스럽기 때문이라기보다 직업적 특성이었다. 범죄에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무기도 정보도 매수나 협박도 다 돈이었다. 그다지 즐겁지도 않고, 위험부담도 큰 직업이지만, 완전히 손을 떼어도 되는 시점인지 확신이 없었던 건 그래서였다. 인간은 관성대로 살기가 훨씬 쉽다. 어떤 직업이든 그렇다.
남의 이름으로 개통한 또 다른 핸드폰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무려 2G망과 연결된 것이다. 세계에는 아직도 구형 네트워크가 사라지지 않은 나라가 몇 있었고 센도는 지금 그중 하나에 와 있었다. 이 핸드폰이 울리면 의뢰가 왔다는 뜻이다.
음. 휴가 가야 하는데. 센도는 누운 채로 잠시 씹을까 생각하다 마음을 바꿨다. 거절하려고 해도 내용을 알아야 하니까.
센도는 관성에 이끌려 습관적인 미소를 지었다.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 손가락 마디를 뚜둑거리면서 노트북 앞에 앉았다. 메시지로 전달받은 암호화된 키 넘버를 통해 상세한 의뢰 정보에 접속한다.
센도의 얼굴에서 상쾌한 미소가 사라졌다.
아는 얼굴과 아는 이름이었다. 세상에 둘이 있다고 생각하긴 어려운.
센도는 졸업 후 처음 보는 루카와 카에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전혀 반갑지 않았다.
일본 프로 농구 리그가 10년 빨리 출범했다면 센도 아키라의 고교 졸업 후 진로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언제나 타이밍이 중요하다. 센도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갈림길이 다가올 때까지. 때가 되면 바로 그 순간까지 축적해 온 데이터를 활용해 최적의 결정을 내렸다.
일본 프로 농구 리그의 개막 시기 같은 것은 센도의 데이터베이스에 없었다. 실은 인지의 한계에 가까웠다. 그런 미래를 감히 꿈꾸지 못했다. 고려 사항조차 아니었다는 의미다.
어떤 또래들은 대학이라는 새로운 온실 속에서 어른이 되기를 유예받고, 어떤 또래들은 공 하나 들고 세계 최고의 무대에 도전하러 무작정 바다를 건널 때, 센도 아키라는 죽었다. 서류상으로.
꼭 필요한 절차였다. 가업을 잇기 위해서. 요리사가 되려는 우오즈미 쥰이 숫돌에 칼 가는 연습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요식업이 아니고 살인 청부업일 뿐.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으려면 자신의 목숨도 없는 편이 여러모로 편리하다. 생각해 보면 최소한의 공평인지도 모른다. 물론 타인은 실제로 죽지만 센도는 서류상으로만 죽는다. 다행스러운 모순이다. 센도에게는.
센도는 자신의 날조된 사인을 모른다. 유령은 생몰의 기억이 없는 편이 낫다고. 서류상의 사망을 꾸며 준 사람, 그러니까 어머니가 충고했다.
센도는 업계 선배로서 어머니의 충고를 귀담아듣는 편이었다. 어머니 역시 서류상으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지 오래다. 가문의 방식이었다. 모든 창작자가 백지를 먼저 준비하듯이, 모든 가문의 살인청부업자는 신분을 지운다.
죽은 사람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센도 아키라는 외조부모의 양자로 출생신고를 하고 고등학교까지 갔다. 그러니까 센도는 어머니의 처녀적 성이다.
살인청부업자에게 가족의 존재는 약점이다. 가문은 가장 쉬운 방법을 택했다. 본인이 사라지고, 남은 가족은 슬픈 유족을 연기한다. 은퇴 후에는 사망신고를 한 곳에서 세 개 이상 현 경계를 넘은 지역의 현청 소재지, 즉 제법 규모 있는 도시에 지금까지 모아놓은 자금으로 정착하여 눈에 띄지 않는 여생을 보낸다.
센도의 어머니는 임신 이후 센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잠정 은퇴를 선택했다. 장소는 도쿄였다. 센도가 어린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보낸 곳이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어린 센도가 물어본 것도, 물어보지 않은 것도.
학교에서 서류에 부모님의 성함을 적어 오라 했을 때 어머니는 절대로 대신 써 주지 않고 옆에 앉아 한 글자, 한 글자 알려주었다. 또박또박 받아 적는 센도에게 어머니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키라, 그건 나의 이름이 아니에요."
센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어머니의 어머니, 아키라의 외조모님의 이름이에요."
센도는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 중 하나를 신중하게 골랐다.
"그러면... 왜 이렇게 써요?"
효과적인 질문일수록 미소가 적은 어머니의 얼굴에 희소한 기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죽었으니까요."
"서류상으로요?"
"맞아요."
똑 부러진 센도의 대답에 어머니는 생긋 웃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센도를 위해 설정된 서류상의 신분, 서류상의 이름, 서류상의 가족, 성인이 되면 모두 사라질 거라는 것도. 굵고 숱 많은 센도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어머니는 말했다.
"사람을 죽이려면 거짓말을 많이 해야 해요. 기록으로도 말로도 행동으로도. 그래야 안전하거든요. 그러니 기록을 믿지 마세요. 타인의 말은 더더욱. 직접 보고 만진 것만 믿으세요. 그것도 너무 믿진 마세요."
센도는 잠시 서류 위에 제가 쓴 글자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센도가 어머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머니는 안전해요?"
어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닮은 얼굴 둘이서 서로를 바라본다.
"그건 알 수 없어요. 죽을 때까지."
센도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다만 비밀이 많았을 뿐.
어머니는 센도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생명을 빼앗는 방법.
처음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마 말을 배우기 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조그마한 아기가 벌레를 눌러 죽이거나 작은 동물을 심하게 대하면 정상적인 어른들은 큰 소리를 내며 엄하게 꾸짖는다. 센도의 어머니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센도에게 살생은 언제나 칭찬받는 일이었다. 그리고 들키지 않으면 더 큰 칭찬을 받았다. 그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비결을 알려주었다. 이유가 없는 살생은 피하면 된다. 있었던 사실과 사라진 생명과 남은 시체를 감추는 건 쉽지 않다. 선택과 집중. 꼭 해야 할 때만 죽여라. 먹기 위해서, 또는 살기 위해서.
방학 때는 전국의 이름을 모르는 시골로 견학을 다녔다. 마당을 돌아다니는 닭을 잡아 목을 비틀고 깃털을 뽑고 나머지 손질까지, 칼 한 자루에 의지해 지시만으로 해냈다. 성취감이 대단했다. 어머니가 요리해 준 닭튀김은 맛있었다.
현역 사냥꾼이 사슴을 도축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기도 했다. 가죽과 살과 뼈의 효율적인 분리. 접근을 감추고 급소를 노리고 동선과 행동을 예측해 함정을 파는 사냥 기술. 가장 적은 힘을 들여 가장 큰 놈을 잡는 법. 꼭 해야 할 때만 죽여라. 먹기 위해서, 또는 살기 위해서.
어머니는 센도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어머니와 센도가 안전할 수 없다는 것까지.
그래서 센도는 절대로 어머니가 말해준 것을 타인에게 말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꺼내기 전에 속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들었다. 천 자 정도 생각하면 열 단어 정도 말했다.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어머니는 잘 웃지 않았다. 센도와 함께 있을 때는 그랬다. 타인을 만날 때는 달랐다. 자주 웃었다. 진짜는 모두 웃음 뒤에 숨겼다. 직업도 정체도 감정도.
인간의 얼굴도 믿으면 안 되는구나. 센도는 자연스럽게 배웠다.
어렸을 때 가끔 센도는 악몽을 꾸었다. 자신이 실수해서 비밀이 들통나고, 결국 어머니가 죽는 꿈이었다.
한밤중에 깨어난 센도는 부들부들 떨며 어머니에게 매달렸다.
"어머니... 지금 안전해요?"
눈물과 땀으로 축축해진 센도의 얼굴을 닦아주며 어머니는 말했다.
"그건 알 수 없어요. 죽을 때까지."
악몽은 살인 기술을 연마할수록 줄어들었다. 비밀을 지킬 힘이 있을수록 안전해진다. 센도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센도는 유치원 때부터 취미로 공기총 사격을 시작했고,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이미 클레이 사격에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평범한 이층 주택 지하실에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완벽한 방음 설비를 갖춘 자택 사격장에서 매일 소음기를 끼고 실탄 사격 훈련을 했다. 저격 연습은 방학 때 따라다니던 사냥꾼이 슬슬 본격적인 사냥에 끼워주면서 빠르게 늘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사격부에 들어가지 않고 농구부를 선택한 건 순전히 실력을 감추기 위한 연막이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거짓말이다. 센도는 키가 꽤 커서 입학 때부터 농구부 권유를 받았다. 센도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거절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만 진짜 이유를 말했고 칭찬을 받았다.
농구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그건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센도가 살기 위해, 죽이기 위해, 감추기 위해 했던 전략적 사고와 재빠른 판단과 순발력 있는 행동이 코트 위에선 오직 재미를 위한, 팀을 위한, 승리를 위한 수단이었다. 아무것도 감출 필요가 없었다. 마음이 가벼웠다. 악몽이 사라졌다. 좋은 효과였다. 모든 걸 잊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찾았다.
농구를 할 때 센도는 모든 비밀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러고도 안전했다.
잠시 어머니조차도 잊을 수 있었다.
료난 고등학교에서 스카우트가 왔을 때 수락을 결정한 건 어머니였다. 센도로서는 알 수 없는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한 답변이었다.
어머니는 대체로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저는 복귀할 생각이에요."
육아휴직의 끝이었다.
센도는 진짜로 외조부모님과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센도에게 한 달에 한 번씩 과제를 '실어 보내겠다'고 했다. 그 외의 생활은 센도에게 맡긴다고.
"아키라. 잊지 마세요. 비밀은 곧 안전입니다. 아무도 믿지 마세요."
센도는 조용히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다 물었다.
"어머니도요?"
어머니는 생긋 웃었다.
"물론입니다."
고등학생. 어린 시절이라기엔 너무 자랐지만 결코 어른이 되지는 못한 어정쩡한 3년. 경계선과 같은 신분. 빈틈 같은 시간은 숨어서 쉬기에 알맞다. 마침 바다와 농구가 함께였다.
그리고 루카와 카에데도.
센도는 그 시기에 수집한 아름다운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료난 고등학교 농구부의 눈물, 비밀로 할 필요 없는 정직한 땀방울을 쌓아 승리하는 과정, 바다의 표면에 흩어지는 햇살.
루카와 카에데는 전반적으로 잔잔하고 평화롭고 순수한 다큐멘터리 방송 사이사이에 갑작스럽게 끼어드는 CF 같았다. 평범한 일상 속에 일부러 압축해 놓은 듯이 화려하고, 뜬금없고, 그러면서도 심플한 녀석이 간간히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그 다큐멘터리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대표하는 것 같은. 농구와 바다와 함께한 센도 아키라의 고등학교 3년과 놀랍도록 조화로운 녀석이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허락된 3년이었던가, 하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별난 사이였던 것은 아니다. 센도는 일부러라도 흉금을 터놓을 만한 절친한 친구라든가 평생을 연락할 만한 선후배 관계 같은 건 만들지 않았다. 아무도 믿으면 안 되니까. 센도는 혼자여야 했다. 그래야 안전할 수 있었다. 센도도. 어머니도. 어쩌면 친구들도? 마지막은 그냥 어렴풋한 감각이었다. 아무도 말해준 적 없지만.
친절하게 웃으면서도 멀리 있었다. 기분 좋게 만나서 기분 좋게 헤어지는 사이. 진심을 다하는 건 농구할 때만.
그런데 루카와 카에데와는 농구할 때만 만났던 것이다.
그는 농구할 때 투명한 속을 다 까뒤집는 순수한 소년이었다. 탈탈 털어봤자 그 속에는 승리에 대한 집착밖에 없는 것 같았지만.
센도에게 농구는, 물론 이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즐거워서 하는 일.
센도 아키라의 인생에선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었다.
센도는 루카와를 볼 때마다 유리공예를 떠올렸다. 용광로에서 막 꺼낸 시뻘겋게 발광하는 덩어리. 흐르는 고체. 딱딱한 액체. 그것을 이리저리 잡아 늘이고 모양을 잡고 색과 텍스쳐로 세공하여 아름다운 작품이 된다. 원석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건 사쿠라기 하나미치에 가깝다. 루카와는 1학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연마된 수준의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러니까 이미 충분히 세공됐는데도 여전히 용광로에서 막 꺼낸 듯이 시뻘겋게 발광하는 이상한 매력을 가진 선수였다. 조용함과 적극성, 섬세한 기술과 거친 파이팅, 전국 수준의 실력임에도 이제 막 고등학교 리그를 경험해 어쩔 수 없이 미숙한, 모순적인 성질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흥미로웠다. 정신을 차려보면 연구하고 있었다. 그 결과 비슷한 것은 어느 날 루카와가 자신을 찾아왔던 날에 툭, 하고 입 밖으로 튀어 나가고 말았다.
그건 아주 이상한 순간이었다.
물어본 적도 없었고, 말할 의도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됐다.
개입을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어둑해지는 노을을 밟으며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결과적으로 루카와 카에데의 농구에 어느 정도는 개입한 꼴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아무런 영향이 없을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제법 영향이 있었다는 건 본인 입에서 들었다. 이번에도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그게 다였다.
센도가 먼저 묻지 않은 것을 말했고, 루카와가 보답하듯 묻지 않은 결과 보고를 해 왔다.
그게 끝이었다. 이후로는 시합에서 맞붙거나 청소년 국가대표로 뽑히거나 전국체전에 한 팀으로 나간 것 이외에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었다. 센도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루카와에게 센도는 적이거나 팀 동료였고, 센도에게 루카와는...
센도에게 루카와는...
일본 프로 농구 리그가 10년 빨리 출범했다면 루카와 카에데의 고교 졸업 후 진로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짧은 미국 유학은 즐거웠다. 결코 만만치 않은, 진짜 도전이었다.
루카와는 많은 것을 깨우쳤다. 실패가 어떻게 성장이 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것을 어떻게 배워나갈 수 있는지, 자신의 한계를 깨는 동시에 끝내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도.
그러나 미국에 루카와 카에데의 자리는 없었다.
미국 농구계의 인종적 편견은 컸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조차 신체의 한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뚫지 못하고 기회조차 얻지 못해 썩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딱 한 번 기회가 주어진 드래프트에서 NBA 30여 개 팀 중 누구도 루카와에게 돈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실력이 그 정도였던 건 아니다. 루카와는 잘 알았다.
그래서 괜찮았다.
좋았기 때문에 끝이 아쉽다는 것 또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루카와는 세상에서 농구를 가장 좋아했지만, 언제나 끝이 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마지막 버저가 울리는 순간에 앞서고 있다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지고 있다면 분노로 눈을 떨궜다.
하지만 인생에는 끝이 없다. 그래서 승패도 없다.
루카와 카에데가 미국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다.
졸업 후의 진로. 안타깝게도 국내 대학은 루카와 카에데에게 선택지라 할 수 없었다. 농구로 대학에 가는 고등학생들은 적어도 혼자만의 힘으로 낙제하지 않을 정도의 공부 머리는 있었다...
루카와에게 대학 졸업장이 별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루카와는 시야가 단기적인 편이었고 당시엔 존재하지 않는 '직업으로서의 농구선수'를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 것은 아직 일본에 없었다.
물론 미국에서는 어려웠지만 인종적 차별이 덜할 수 있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트라이아웃에 도전할 수도 있었다. 루카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농구를 할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아마추어 성인 대표팀에서 꾸준히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최연소 주니어 국가대표로서의 자부심이 컸던 루카와에겐 의미 깊은 일이었다.
외국에서 경험한 외로움이나 아무리 농구를 잘해도 끝내 넘을 수 없었던 차별의 벽도 물론 영향을 끼쳤다. 그것을 다시 겪을 일이 두렵다는 것과는 약간 달랐다. 두려움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중대한 건 아니었다. 그 모든 벽에 다시 부딪힐 만한 도전이라면 루카와는 무릅썼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전력을 다했던 경험과 매우 닮았지만 하위 호환이라 할 수 있는 도전에도 덤벼야 할까? 머릿속에 '하위 호환' 같은 단어는 없었지만, 루카와는 내키지 않는 마음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그 심경을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비슷했을 것이다. '굳이?'
농구를 할 수 있으면 되지. 꼭 그걸로 돈을 벌어야 하나?
직업은... 어떻게든 되겠지.
루카와는 농구만 빼면 다소 태평하고 엉뚱한 기질이 있었다. 부모님도 그를 딱히 압박하지 않았다. 타지에서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다소는 오냐오냐하는 마음이 생겨도 어쩔 수 없었다.
스무 살이 된 루카와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무직이었고, 교육을 받고 있지도 않았다.
그린 듯한 백수였다. 그저 농구를 지나치게 잘할 뿐인.
그러나 부지런한 세상은 그 정도로 눈에 띄는 외모와 훌륭한 신체 조건을 갖춘 젊은 남성을 낭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새벽에 조깅을 하다가 항구의 수산시장에서 배를 내리는 걸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루카와 카에데는 기본적으로 무뚝뚝하지만 얼굴을 익히면 끝도 없이 넉살 좋은 뱃사람들에 의해 즉석에서 일꾼으로 스카우트 되었다. 새벽에 배 들어올 때만 도와달라는 건데 기본적으로 요령이 좀 필요한 막일이었다. 일하는 시간이 짧은 대신 노동 강도와 일당 봉투가 굵은 종류의 직업이었다.
루카와는 해 보기로 했다. 호기심이 반, 쉬울 것 같고 남은 시간은 하루 종일 농구하고 놀면 되겠다는 천진난만한 계산이 반이었다.
탄력과 돌파에 강점을 두고 발달한 루카와의 근신경은 무거운 걸 들거나 끄는 데에 딱히 유리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본 체격이 좋고 무엇보다 젊었다. 초보자치고는 모두의 마음에 쏙 드는 일꾼이 아닐 수 없었다. 반듯한 외모와 묵묵한 성격도 호감 요소였다. 루카와는 금방 뱃사람들의 아이돌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루카와는 고깃배를 타고 연안 바다로 나가고 있었다...
오는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결과였다. 어이, 총각. 이것 좀 들어 줘. 어어 거기다 놓으면 돼. 잘하는데. 아예 내일부터 나와서 일할래? 일당은 이 정도. 능숙해지면 좀 더 올려주지. 이제 좀 익숙해졌나 보네. 항구 사람 다 됐어. 이야, 카에데쨩 팔 근육이 엄청난데. 따로 운동하는 거 있어? 더 일찍 일어날 수 있으면 아예 밤 배 타고 나가 봐. 일손이야 항상 부족하지. 카에데 정도면 믿음직하지. 뱃멀미만 안 하면 말이야.
루카와는 뱃멀미를 아예 안 했다.
처음부터 그랬다. 아무리 파도가 높은 날이어도 엉덩이만 뱃전에 대면 쿨쿨 잘도 잤다. 아기 같이 잠든 루카와의 평온한 얼굴을 본 뱃사람들은 너나없이 감탄했다. 상체 힘이 대단하고 하체가 유연해 처음인데도 파도 위에서 제법 그물을 잘 끌어 올렸다. 슈퍼 루키의 등장이었다.
아저씨들은 모두 친절했다. 어촌에는 젊은이가 많지 않았다. 40대부터는 있어도 20대 일본인은 루카와 하나였다. 어부란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직업은 결코 아니었다.
휴가철에는 고기 대신 사람을 낚았다. 산란기가 지나 맛도 없고 개체수도 줄어든 생선을 쫓아 나갔다가 허탕 치고 오는 것보다는 관광객용 낚싯배를 운영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항구의 아이돌은 이때야말로 진가를 발휘했다. 잘생긴 청년 어부의 무뚝뚝한 설명과 지시, 휘청이는 배에 타고 내릴 때 말없이 내미는 단단한 손바닥에 치마 입은 손님이라면 누구나 얼굴을 붉혔다. 루카와의 고용주는 희색이 만연했다.
루카와의 낚싯배를 타고 낚시 체험을 나갔던 관광객들의 재방문율은 엄청났다. 귀가 후 관광지에서 발견한 숨겨진 진주 같은 남자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 탓에 그들의 친구나 지인들이 따로 예약을 잡는 경우도 많았다. 연예인 뺨치게 잘생겼고 운동선수 뺨치게 몸 좋은 젊은 남성과 함께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향해 나아가는 경험! 이보다 로맨틱한 휴가는 없을 것이다.
루카와는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일종의 카나가와 명물이 되고 말았다. 에노시마 대불만큼 유명하진 않더라도.
물론 누군가는 연애 사건이라 부를 만한 일들도 많았는데, 루카와 카에데에게 묻는다면 아마 '사고'라고 말했을 것이다. 전화번호나 메일 주소를 교환하려는 시도는 숨 쉬듯이 발생했으므로 딱히 사건이나 사고라고 할 수조차 없었다.
관광을 마치고 돌아간 뒤에 진지하게 선 자리를 제안하는 나이 지긋한 분들도 제법 많았다. 물론 루카와는 굴이나 따개비 같은 무표정으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일을 마치고 정리하는 루카와에게 몰래 다가가서 놀래주려다 항구에서 바다로 떨어진 아가씨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있었다. 깜짝 놀란 루카와가 일단 건져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수습해 주었다.
근처에서 머무는 김에 루카와의 근무시간 외 자유시간을 노려 급습하려는(?) 전략적인 여성들도 많았지만 이 경우에는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왜냐하면 루카와는 근무시간 외에는 항구 근처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카와는 근무를 마치면 집에서 자거나, 작업복에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농구를 하러 갔다. 낡은 야외 코트의 농구대는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루카와는 한순간도 농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십 대 내내 매년 국가대표 소집에 응했다. 갈 때마다 한 톤씩 까매지는 루카와를 보면서 그리운 얼굴들이 깜짝 놀라곤 했다.
센도 아키라는 한 번도 없었다.
예약이 없는 날엔 해수욕장에서 라이프가드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파라솔 아래 앉아서 휘슬을 휙휙 불고 확성기로 경고를 하다가 누군가 빠지면 구하러 갔다.
당연히 매일 같이 엄청난 헌팅의 폭풍 속에 처했다. 다행히 루카와는 방년 15세부터 친위대를 몰고 다닌 경력자였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스킬이 나날이 발전해 갔다.
이십여 년이 지나고 서른 살을 넘긴 후에는 젊은 것들은 기운도 좋다는 제법 아저씨 같은 감상이 들기도 했다. 실제로 아저씨나 다름없는 나이였다. 그럼에도 '젊은 것들'은 쉽게 루카와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실한 인생이라고, 루카와는 진심으로 느꼈다.
농구도 계속 하고 있지만, 바다에서 또 다른 팀을 만났다. 농구선수를 직업으로 택했다면 만날 수 없었을 팀. 한 번 항해를 시작하면 목숨을 걸고 의지할 수 있는 팀. 건강히 돌아오면, 거기에 만선이라면, 그것이 팀의 승리였다.
루카와는 아주 오랫동안 팀의 막내였다. 뱃사람들의 구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이가 많아 은퇴하는 경우는 드물게 있었지만, 루카와가 서른이 넘도록 그보다 어린 신입은 없었다. 영원한 1학년 에이스? 어딘가 낯익은 기분이었다.
루카와는 어느 팀에서든 에이스가 좋았다. 어떻게 보면 익숙한 역할이었다. 어떻게 보면 완전히 새로운 일이었다. 낯설고 도전적이었다. 하지만 잘 해낼 수 있었다. 물고기와 달리 사람이 만선일 때는 좀 번잡스럽긴 했다. 그러나 팀이 행복하다면.
그 때문에 살인 청부의 타겟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 없었다.
센도 아키라는 신칸센 그린석을 타고 도쿄에서 카나가와로 향하는 중이었다. 전철은 내키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많다. 군중 속에 섞이면 일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운전은 귀찮고 헬기는 눈에 띈다.
기분이 아주 언짢았다.
머릿속으로 의뢰 내용을 다시 떠올린다.
그럴 때마다 한층 더 표정이 굳어진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센도 쪽에서 의뢰인의 정체나 의뢰 사유를 물어 본 적은 없었다. 왜 이 사람이죠? 그런 질문은 불필요했다. 언제까지죠? 그런 질문이라면 몰라도.
센도는 주로 묻기보다 답하는 쪽이었다. 가능합니다. 싫은데요. 둘 중 하나로. 사실 후자는 그냥 우아하게 무시해도 충분했다.
루카와 카에데의 살인 청부에 대해서는 두 가지 대답 모두 불가능했다.
센도가 루카와를 죽일 수 있을까?
별로 대답이 내키지 않는 질문이었다. 센도는 일단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유보했다.
사실 생각하기도 싫었다. 누가 또 물어보면 짜증이 날 것 같았다.
유감스럽게도 머릿속에서 질문을 던지는 건 자기 자신뿐이었지만.
지금까지 의뢰 내용에 아는 얼굴이 등장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신문이나 뉴스에서 본 적 있는 얼굴 말고. 개인적으로 친밀감이 있고, 대화를 나누어 보았으며, 성격을 알고 있고, 호감을 느낀 사람을 죽일 일은 없었다. 센도는 미성년자 시절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보냈고, 그들은 반드시 살해되어야만 하는 사연에 휘말리거나, 막대한 유산 상속에 얽혀 있거나, 원한과 복수와는 거리가 먼 아주 지루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단 한 명만 빼고.
센도는 어느 날 자신에게 떨어진 의뢰 속에 처음 보는 이름을 단 어머니의 얼굴을 만날까 봐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긴 했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솜씨가 좋은 모양이다. 아직 한 번도 타겟이 된 적 없으니. 어쩌면 이제 은퇴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센도는 알 수 없었다.
과연 루카와 카에데를 죽일 수 있을지.
언제나처럼 멀리 있는, 마지막 도미노가 향하는 종착점일 뿐인, 개념상의 목표에 가까운 타겟이 아닌. 눈동자가 발하는 빛을 알고, 전력을 다했을 때 속눈썹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알고, 가쁜 숨을 내쉬는 코끝과 윗입술 사이의 간격을 알고, 희미하게 식어가는 땀의 온도나, 날렵하게 옆을 스쳐 지나가는 스피드를 알고 있는 루카와 카에데를.
'우아한 무시'는 더더욱 있을 수 없었다. 그건 동일한 직업의 다른 경쟁자에게 루카와 카에데의 살인 청부 의뢰가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신중한 검토 끝에 센도는 한 가지를 알게 됐다. 센도가 루카와를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다른 사람의 손에 루카와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진 않다.
애초에 어쩌다 원한 같은 걸 산 거지, 이 바보 자식은?
센도가 알고 싶은 건 결국 그거였다. 루카와 카에데는 살인 청부와는 정말 거리가 먼 인생을 살 것만 같았는데. 미국에서든 어디서든 영원히 농구만 할 것 같았는데. 만나지 못한 동안 (얼마나 됐지? 이십 년?)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그래서 센도는 철칙을 어기고 의뢰인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쉽지 않았다. 대가가 꽤 비쌌다. 의뢰인에게 알리지 않고 의뢰인의 정체와 살인 청부 사연을 알아낸다는 건. 하지만 그걸 알지 못하면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결과를 보고 센도는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루카와 카에데는 어업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놀랍긴 했지만 그럭저럭 잘살고 있는 것 같았다. 예상대로 평화롭게.
문제는 이 의뢰인이라는 작자인데. 알고 보니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재벌가 3세로 음주는 가능하다 해도 여전히 여인이라기보단 소녀에 가까운 어린애였다. 허구한 날 연예인이나 해외 자산가 자식들과 놀러 다니며 국내에는 거의 들어올 일도 없었던 파티형 신세대이신데, 몇 안 되는 '평민' 친구들의 입소문에서 카나가와의 '잘생남' 낚시 체험 얘기를 듣고는 호기심을 느끼고 말았다는 불길한 사연이었다.
돈 많은 파티 걸은 한가한 다른 돈 많은 파티 친구들과 함께 일주일간 그 배를 전세 냈고, 예상대로 낚시 가이드 겸 선장인 루카와 카에데에게 뿅 갔는데, 자신만만하게 덤볐음에도 매몰찬 대우만 받다가 끝내 망신을 당하고 최악의 휴가를 보낸 끝에 살인 청부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한심했다. 너무나 한심한 사연이라 센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고요하고 깊은 분노를 느꼈다. 이래서 돈이 너무 많으면 안 돼. 어째서 실연의 복수 수단에 살인 청부가 들어간단 말인가. 그 바보 같고 치기 어린 복수를 시행해 줄 전문가로서 나름대로 업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센도가 선정됐다는 것 자체가 소녀의 가문이 가진 자산의 수준을 어렴풋이 보여주었다. 동시에 왜 센도에게 의뢰하면서 그들의 정체와 사연을 극구 밝히지 않으려 했는지 납득하고도 남았다.
거절함이 마땅한 한심한 일이지만 그랬다간 어떤 급 낮은 놈들한테 이 의뢰가 갈지 모른다. 센도는 이 시점에서 의뢰를 맡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죽일 것인지는?
그건 루카와 카에데를 다시 만나면 결정하기로.
그러니까 이 거래는 아직 성사되지 않은 것이다. 거래 상대측은 그걸 아직 모르지만.
위험해질 수 있는 도박이었다. 그래도 센도는 이미 안전장치를 여럿 깔아두었다. 아직 그쪽은 센도가 의뢰인의 정체를 안다는 걸 모른다. 극히 비밀스럽게 캐낸 정보였고 흔적을 지우는 데에도 특별히 공들였다. 센도를 국내 최대 재벌가문의 살인 교사 증거를 갖춘 위험 요소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센도는 신칸센 차창 밖을 바라본다.
실로 오랜만의 카나가와 바다다.
"안녕하세요. 오늘 예약한 센도 아키라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오늘 예약된 낚시 체험 손님의 느긋하고도 경쾌한 인사에 루카와 카에데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극히 자연스러운 대답이 그의 입을 빠져나간다.
"헤이."
그랬다가 루카와는 허겁지겁 다시 인사한다. 어설프게 허리를 숙이다 만다.
"잘... 부탁드립니다. 가이드 루카와 카에데입니다."
몇 년 만이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보다 또렷한 센도 아키라가 눈앞에서 웃고 있다.
루카와는 지금까지 꽤 선명하다고 생각했던 기억 속 그의 얼굴이 생각보다 흐려져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바닷바람을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런가.
루카와는 센도의 정중한 인사와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을 보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사실 루카와는 많이 변했다. 특히 외모가.
혼자 예약한 손님이라 작은 모터보트를 준비했다. 먼저 훌쩍 올라탄 루카와가 따라오라는 듯 센도를 바라본다. 센도는 머리를 긁적인다.
"올라가다 바다에 빠지는 거 아니에요?"
루카와가 눈을 샐쭉하게 좁힌다.
"다리도 길어 보이시는데."
센도는 속으로 웃는다. 어릴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짐짓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인다.
"타이밍을 잘 모르겠어요."
루카와는 아주 한심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센도는 점점 더 즐거워진다. 다시 고등학생이 된 것 같다.
배가 멀어질 때 루카와가 나직하게 신호한다.
"지금."
"엥?"
센도가 주춤거리는 사이, 묶어 둔 밧줄의 탄성에 의해 배가 항구 쪽으로 다시 들어오기 시작한다. 센도가 거기에 맞춰 발을 뻗으려 들자 루카와가 다급히 손을 들어 제지한다.
"지금은 안 돼요. 빠져요."
"엑..."
눈 깜빡할 사이 항구에 툭 부딪힌 배가 다시 멀어진다. 최대한 멀어졌을 때 루카와가 다시 힘주어 말한다.
"지금."
센도가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점프한다.
배가 항구에서 가장 멀어졌던 순간을 지나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을 때 센도의 발이 뱃전에 닿는다.
센도의 무게 때문에 뱃전이 살짝 출렁인다. 이를 예상하지 못해 살짝 헛짚은 센도의 균형이 무너진다.
긴 팔을 휘젓던 센도가 갑판 너머로 쓰러지기 전에 단단한 두 팔이 그를 잡아준다.
아주 가까이 다가온 눈동자가 동그랗게 열려 있다.
모든 게 그대로다.
눈동자가 발하는 빛도, 속눈썹이 드리우는 그림자도, 살짝 열린 윗입술과 코 끝의 간격도.
땡볕 아래 희미하게 솟아오른 땀방울에서 훅 풍겨오는 온도는 기억보다 뜨겁고 바다의 습기와 짠 내가 섞여 있다.
루카와가 침착하게 멀어진다.
능숙하게 모터보트를 출발시킨다.
파도를 가르며 작은 배가 질주한다. 뺨을 스치는 물방울.
센도는 키를 잡은 루카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루카와는 목덜미를 가리는 UV 차단 모자를 쓰고 있다. 등산 모자를 닮은 촌스러운 디자인이다. 넉넉한 챙 아래로도 삐죽 튀어나온 뒷머리칼을 바닷바람이 제멋대로 헝클었다.
센도는 가슴을 크게 부풀려 바닷바람을 가득 마신다. 항구 특유의 비린내는 조금도 느낄 수 없고 청량한 소금내만 코를 간질인다. 아름다운 에노시마의 바다. 오랜만이다. 그리웠다고 할 수는 없다.
센도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실어 보내는' 과제를 낚기 위해서였다. 어떤 쓰레기를 줍든 열심히 살펴보았다. 장화 밑창 사이에 단단히 붙은 비닐과 테이프로 방수처리한 쪽지나 심지어 모험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밀봉한 유리병을 낚을 때도 있었다.
어머니의 지령은 간단한 것들이었다. 후지사와역의 특정 사물함에 무언가를 갖다 놓거나, 버스 정류장 벤치 틈에 들어 있는 열쇠를 발견해 어딘가로 옮겨 놓거나, 아주 평범해 보이는데 잠깐 사소하고도 희한한 행동을 하는 누군가를 감시하는 일이었다.
센도는 자신의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끝까지 관찰했다. 물론 숨어서.
결과는 놀라웠다. 센도는 '도미노' 방식을 그렇게 배웠다.
바다를 통한 메시지는 제때 도착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까 센도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시간이 넉넉하거나, 실패한다면 다른 이에게 넘어가도 무방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센도는 역할을 하고 있다기보다 배우는 중이었다.
과제를 낚고도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센도는 그러지 않았다. 땡땡이를 치고 시합에 지각하고 주장의 은퇴식에 못 가는 한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실어 오는' 과제를 낚아 묵묵히 해냈다. 그때까지도 센도는 어머니가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막연한 불안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첫 의뢰를 해내고 나서야 주박 같은 그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종종 의뢰에 어머니의 얼굴이 모르는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악몽을 꾸곤 했지만.
루카와가 적당한 포인트에 배를 멈추고 닻을 내린다. 수동으로 레버를 돌리는 루카와의 팔뚝이 원형의 움직임을 그린다.
루카와는 작업복 같은 파란 멜빵바지에 검고 얇은 반소매 티셔츠를 받쳐 입었다. 팔뚝이 곡선을 그릴 때마다 소매가 당겨지며 분명한 경계를 그리는 아래쪽 속살의 경계를 언뜻언뜻 보여준다. 셔츠 소매로 가려진 부분은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흰 편이다. 그러나 무자비한 햇살에 드러난 이두근 아래는 잘 구워진 빵처럼 진한 갈색이다.
루카와는 배 위에서 느리고도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배가 흔들리는 것에 맞춰 흔들리는 듯하면서도 안정적인 발걸음이었다. 신기하게 바라보는 센도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낚싯대를 꺼내 세팅한다. 낡았지만 제법 좋은 물건이다. 한때 매일 같이 바다낚시를 했던 센도는 알 수 있다.
루카와는 낚싯바늘을 가져다가 신중하게 미끼를 끼운다. 눈알에 불이 붙은 것 같은 집중력이다. 센도는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얼른 거둔다.
친절하게 낚시 세팅을 마친 가이드가 낚싯대를 건넨다. 센도는 살짝 목례하며 받아 든다.
그리고 전혀 도움을 구하지 않고 제법 먼 곳으로 그림 같이 찌를 날린다.
루카와는 놀라지도 않았다. 역시 센도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센도는 낚싯대를 고정한 뒤 바로 옆 갑판에 앉는다. 낚시를 하려면 바다 쪽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센도의 앉은 방향은 정반대다. 그는 반대쪽 갑판에 서서 먼바다를 바라보는 루카와를 응시한다.
루카와는 그대로다.
물론 많이 탔지만. 하루 이틀 배를 탄 게 아니라는 걸 잘 알 수 있다. 그렇게 야외에서 농구를 해도 타지 않던 피부도 그늘 한 점 없는 바다 위의 태양에는 별수 없었나 보다. 여러 날에 걸쳐 섬세하고 곱게 그을린 살결은 먹음직스러운 갈색이고 거친 곳 없이 매끄럽다. 잘생긴 광대뼈가 동그랗게 햇빛을 반사하는 모습이 탐스러워 보인다.
신체도 변했다. 운동과 노동으로 다져진 근육이 제법 찰지게 붙어 예전의 마른 인상은 찾아볼 수 없다. 세월과 함께 보다 육중해지고 두꺼워졌다. 뱃전에 철썩이며 달라붙는 파도 소리에 따라 유연하게 흔들리는 상체와 달리 바닥을 단단히 짚은 하체는 안정적이다.
그 정도가 달라진 점이다. 태닝이 잘 됐고, 근육이 잘 붙었다. 전반적으로... 아름다웠다. 무언가의 봉오리 같았던 십 대와는 다른, 농익은 남성미. 센도는 자신이 새삼스럽게 루카와의 외모에 감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건 색다르게 느껴지는 외모의 변화와 그 안에서도 변하지 않은 화려한 이목구비 때문만은 아니다. 겉껍데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다. 먼 바다를 향한 루카와의 시선은 어떤 의미가 있다거나 무언가에 취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거의 습관처럼 보이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공허하지 않다. 십 대 때, 골대를 향해 돌진하는 그를 막아섰을 때 마주했던, 센도를 똑바로 쏘아보는 불타는 눈동자와 완전히 달랐다. 잔잔하고 나른하다.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루카와 카에데가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움의 원천은 그대로였다.
그건 영원히 소년일 것만 같은, 지금 눈앞에서 세월의 흔적을 켜켜이 진갈색 근육질에 쌓아 놓고도, 조금도 바래지 않은 소년 그대로의 단순한 느낌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순수하고 맑은 소년의 어딘가 냉담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태도.
뚫어질 듯한 시선을 느꼈는지 루카와가 불현듯 센도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센도는 피하지 않는다.
눈을 피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루카와는 약간 당황한 것 같다. 시선을 고정한 채로 느리게 눈을 껌벅인다. 센도는 어쩐지 미소가 나온다.
문득 인사를 다시 하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센도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여어..."
루카와가 움찔거린다.
센도의 다정한 눈빛과 나직한 인사에 기습을 당한 기분이다.
센도가 갑자기 열여덟 살 옆 학교 라이벌로 돌아간 것 같다. 시간 감각이 이상하다.
센도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 어른스러웠다. 특히 장난스러우면서도 여유 넘치는 표정이 그렇다. 십 대 때부터 그랬다.
루카와는 센도가 새삼스럽게 잘생겼다고 생각한다. 그건 머리털이나 주름살이나 몸매 같은 겉껍데기의 아름다움과는 무관한 종류의 원천적인 조형미다. 센도는 골격 자체가 아름답다. 아마 칠십 킬로 정도 더 찌거나 형편없이 마르거나 쭈글쭈글한 노인이 되어도 그 아래를 탄탄하게 받치고 있는 골격의 아름다움은 그대로일 것이다.
루카와는 어휘가 짧았다. 그래서 정확히 단어로 포착할 순 없었지만, 센도가 앞으로 영원히 기억 속에서처럼,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모습처럼 아름다움을 간직하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루카와가 살짝 휘청이면서 갑판에 서서히 앉는다. 그리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한번 더 말한다.
"헤이."
역시 변함이 없다.
센도가 활짝 웃는다. 루카와의 입술 끝이 미세하게 움찔거린다. 센도는 붙임성 있게 말을 건다.
"잘 지냈어?"
루카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센도는 그의 다갈색 톤 얼굴 절반을 가린 모자 그늘을 치우고 싶어진다.
하지만 섣불리 손을 뻗지는 않는다. 편안히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올려놓으며 허리를 숙인다. 이러면 얼굴을 더 가까이 볼 수 있다.
"왜 모른 척했어?"
루카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예상대로의 반응에 센도는 말없이 웃는다. 먼저 모른 척한 건 센도였다. 루카와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너야말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성대는 가장 천천히 늙는 장기라던가. 센도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대꾸한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루카와가 보란 듯이 커다란 한숨을 쉰다. 뱃전 꺼지겠다. 센도는 후후 웃는다. 어른이 된 것 같은 눈빛도 잠시였다. 말을 섞고 반응을 볼수록 루카와는 소년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투명하게 속을 내보이고 다닌다.
한참 동안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메우고 나서야 루카와는 거의 투덜거리듯이 말한다.
"... 네가 날 못 알아본 것 같아서..."
루카와의 시선이 배 구석에 처박혀있었다. 선크림 바르는 걸 매번 잊었던 건지 유난히 얼굴보다 검게 그을린 루카와의 목덜미가 약간 검붉은 색으로 변했다.
센도는 이유 없이 뱃속이 짜릿해지는 감각을 느낀다. 평생 잊어버리지 않도록 붙잡고 싶은 그런 감각이다. 센도가 빠르게 말한다.
"그럴 리가 없잖아. 루카와."
그 목소리를 들은 루카와가 시선을 들어 센도와 눈을 맞춘다. 한참을 살펴보듯이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카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왠지 만족스러운 것 같다.
센도는 깨달았다.
절대 루카와 카에데를 죽일 수 없다는 걸.
센도가 자신의 깨달음 속에 고요히 잠겨 있는 사이에, 루카와가 말을 걸어 온다.
"나 미국 다녀왔어."
첫 마디가 그랬다. 센도는 진지하게 대답한다.
"그랬구나."
조금 생각하다가 센도가 묻는다.
"재밌었어?"
이번에는 확실하게 루카와가 미소 짓는다.
"응."
센도는 잠시 말을 잃는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파이어 위에 다이아몬드를 흩어 둔 듯한 에노시마 바다 위에서 루카와가 웃고 있다.
가슴이 먹먹하다.
센도는 그 순간 알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루카와 카에데가 센도 아키라에게 무엇이었는지.
그건 잃어버린 줄 모르고 잃어버렸던 것. 만나고 나서야 그간의 외로움을 알게 되는 것. 거울처럼 자신 안에도 이렇게 맑은 반짝임이 분명하게 존재했음을 상기시키는 것.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강한 예감. 만약 너는 지금 안전한지 묻는다면 진지하게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 본 후 짧고 강한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여 줄 것 같은 든든함. 어쩐지 루카와의 악몽을 꿀 일은 없을 것 같은 기묘한 안심감...
루카와는 간격을 두고 조금씩 말문을 튼다. 미국에서 농구를 하며 있었던 일. 만만치 않았던 유학. 결국 돌아온 이유. 배를 타게 된 것. 한 문장씩 단답처럼 담백하게 이어지는 루카와의 인생.
센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치고 적절한 질문을 던진다. 루카와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모든 질문에 있는 그대로 답한다.
이십여 년을 차곡차곡 쌓아 온 인생. 자신만의 길. 루카와는 그것을 다시 되짚어가듯이, 한발 앞서 느릿하게 산책하듯이, 잘 간직해 온 보물처럼 반질반질한 조약돌을 한 줄로 하나씩 늘어놓는 아이처럼, 센도에게 말해준다.
함께 걷는 기분.
센도에게는 아주 낯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센도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안전을 위해서였다. 자연히 일이 아니면 타인과 대화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평생의 모든 대화를 다 뒤져도 오늘처럼 기분 좋은 대화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남자가 있기 때문에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거다. 센도는 문득 그렇게 생각한다.
루카와의 투박할 정도로 솔직한 태도 앞에서 센도는 무장할 필요를 느낄 수 없었다. 그건 차라리 시골의 소박한 성당 앞에서 경건하게 무기를 내려놓는 군인에 가까운 심경이다. 루카와의 태도에는 전염성이 있었다. 상대를 경계하거나 속이거나 무언가를 감추는 게 아주 바보처럼 느껴진다. 센도는 이 정도로 겉과 속이 일치하는 인간으로 살아 본 순간이 많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 한 개조차 숨길 필요가 없다.
센도는 서서히 마음속에서, 그리고 정교하게 잠가 놓은 머릿속에서 비밀을 놓는다. 태어나서 자의식을 가진 이래 쭉 놓지 않았던 오래된 긴장이 녹아내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완이 편안하게 센도의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간다. 해방감이다. 방심하면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만약 루카와가 지금 이 순간 여기는 뭐 하러 왔냐고 묻는다면 센도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로 답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와 같았다.
센도는 다시 숨을 쉴 수 있다. 해야 하는 일을 잊을 수 있다. 비로소 자유롭다. 바다가 있어서. 농구가 있어서.
루카와가 있어서...
완전히 변해도 괜찮다. 하나도 변하지 않아도 괜찮다. 센도는 루카와를 만나고서 알았다. 어느새 미래에 와 있다는 걸.
많은 침묵과 느린 대화.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다. 센도는 낚싯대 따위는 단 한 순간도 쳐다보지 않았다.
루카와가 손목시계를 힐끔 본다.
"이제 가야 해."
센도는 충동적으로 말한다.
"그래. 집에 가자."
그리고 잠시 망설인 후에 덧붙인다.
"같이 가자."
루카와는 약간 의문을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천천히 레버를 돌려 닻을 끌어올리기 시작하는 뒷모습을 보며 센도는 소리 없이 웃는다.
뭍에 닿으면 그 때부터는 센도가 이야기할 차례다.
먼저 루카와에게 본인의 청부살인 의뢰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것이다. 어떤 반응일까. 일단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지 않을까.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지도 모른다. 의뢰인의 정체를 알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더더욱 어이가 없을까. 한동안은 도피가 필요하다는 사실만 납득해 주면 충분하다. 센도의 머릿속에 다시 심하게 보정된 전 세계의 에메랄드빛 바다 사진이 스크롤을 따라 쭉쭉 스쳐 지나간다. 뱃사람과 같이 간다면 더욱 즐거울 것이다. 센도는 도망과 은신에는 자신 있었다.
문득 한 가지를 더 깨닫는다. 센도는 루카와를 죽일 수 없을 뿐 아니라, 루카와를 살릴 수 있다. 그건 이 세상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강렬하게 실감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임에도.
생각해 보면,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처음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나 안전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도, 의뢰를 받았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약속도 아니다. 센도의 마음속에 무성한 즐거움이 피어오른다. 누구에게도 이런 일은 의뢰받지 않았다. 목숨을 잃을 위험에 놓인 당사자에게도...
비밀이 없는 남자를 비밀로 둘러쌀 것이다. 센도는 비밀의 전문가니까. 물론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귀하지만 단단한 다이아몬드를 아주 얇은 포장지로 조심스럽게 감싸듯이, 루카와의 존재를 여러 겹의 비밀로 둘러쌀 것이다. 한 겹씩 한 겹씩 들통난다 해도, 한없이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은 전부 드러날 수 없는 정교한 비밀들로...
루카와 카에데가 서류상으로 죽는 편이 더 안전할 것인지 머릿속으로 검토하는 사이에 배가 출발한다.
기습을 먹은 센도의 몸이 후미 쪽으로 휘청거리고 모터에서 튀어 오른 하얀 파도 거품이 얼굴을 철썩 때린다. 짭짤함이 입안을 습격한다.
따귀를 맞은 듯한 느낌에 얼떨떨해진 센도의 얼굴을 향해 뭔가 날아온다. 사태를 파악한 루카와가 놀라지도 않고 극히 자연스러운 태도로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신속하게 던져 준 것이다.
황급히 받아낸 수건으로 얼굴을 닦자 주인의 땀 냄새가 훅 풍긴다. 불결하다기보다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매캐한 향에 센도의 얼굴이 붉어진다.
배는 선장과 같이 묵묵히 해변을 향해 돌진한다.
완전한 은퇴를 결심해 개운해진 살인청부업자를 싣고.
바닷바람이 두 사람의 눈썹을 같은 결로 밀어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