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불면의이쑤신
1.
유리 벽 너머에 고래상어가 있다.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중학교 2학년 1학기. 윤대협은 수학여행으로 오키나와에 갔다. 바쁜 일정이었다. 하루의 반 정도는 버스에서 보냈던 것 같다. 윤대협은 주로 창문에 이마가 붙은 사람처럼 꿀잠 잤다. 깨어 있을 땐 왁자지껄 게임하고 잡담하고 간식 나눠 먹는 친구들을 구경하거나 가끔 끼어서 놀았다. 어쩌면 그런 시간들이 새빨간 슈리성을 구경하거나 바다에서 실컷 물놀이를 했던 것보다 더 놀러 나왔다는 실감이 들어 특별했을지도 모른다.
츄라우미 수족관은 윤대협이 처음 가 본 수족관이다. 어릴 적부터 바다에 막연한 호감이 있었던 윤대협이 상당히 기대했던 일정이다.
그러나 실제는 상상과 많이 달랐다.
일반 건물의 3층 높이를 합친 것처럼 깊고 거대한 어항 속을 헤엄치는 수많은 꼬리와 지느러미들. 가늠할 수 없는 두께의 유리벽은 짐짓 없는 척 투명하다. 물을 잘라내어 단면을 구경하는 듯한 착각을 준다. 유리벽에 사람들의 동그란 그림자가 비치면 환상은 깨지고 기만은 들통난다. 벽 너머 물속은 밝다. 사람이 선 육지는 어둡다. 실제 바닷속과 정반대로.
츄라우미 수족관의 슈퍼스타. 고래상어가 느리게 지나갈 때마다 남녀노소의 어린아이 같은 감탄사가 도플러 효과처럼 따라붙는다. 고래상어는 고래야 상어야? 상어겠지 바보야. 근데 왜 고래라고 해? 여기 써있잖아. 고래만큼 커서 그렇다고. 상어 중에 제일 크대. 아무래도 좋은 대화를 주고받는 친구들.
한 마리가 유리벽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다가 부딪힐 듯한 위치에서 몸을 옆으로 틀었다. 윤대협은 고래상어와 눈이 마주쳤다는 착각이 들었다. 탁하게 흐려진 눈동자. 반쯤 덮인 눈꺼풀. 누군가 말했다. 쟤는 왜 눈 감고 다니지? 옆에서 대답한다. 졸린가 봐. 귀엽다.
윤대협은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고래상어는 충격적으로 지루해 보였다. 우울해 보였다. 자살할 줄 몰라서 떠다니는 것 같았다. 가늠할 수 없는 두께의 유리벽은 짐짓 없는 척 투명해서 고래상어는 그 너머도 바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코앞에서야 기만을 깨달았을 것이다. 수족관 속 고래상어 중 대부분은 등지느러미가 축 늘어져 휘어 있었다. 하루에 몇 번이나 투명한 벽에 부딪힐까. 이래도 되는 건지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감탄만 하기엔 너무도 아름다운 생물이라서 더 그랬다. 다른 작은 물고기들에겐 그럭저럭 넉넉해 보이는 일본 최대의 수족관이 고래상어에게는 턱없이 협소해 보였다. 거대하고 우아하고 죄 없이 감금된 존재.
윤대협은 수족관 견학 내내 웃지 않았다. 친구들이 컨디션 안 좋냐고 걱정하길래 대충 끄덕였다. 실제로 속이 안 좋았다. 그 핑계를 대고 흑범고래와 돌고래 쇼는 아예 보지도 않았다.
수학여행이 끝난 뒤 윤대협은 도서관에서 해양 생물에 대한 사진이 많고 두꺼운 책을 빌렸다. 사진 속 고래상어는 모두 지느러미가 꼿꼿하고 눈이 맑았다. 고래상어는 바다에서 평균 80살까지 산다. 츄라우미 수족관이 현재까지 최장수라고 자랑한 고래상어는 다섯 살이었다.
책 속에는 다른 거대하고 우아하고 죄 없는 해양생물들, 그러니까 각종 고래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빠른지,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먼 거리를 이동하는지. 1년에 한 번씩 아득한 대양을 횡단하는 터프한 존재들. 인간은 가 본 적도 없는 우주처럼 깊은 심해로 밥 먹듯이 잠수하는 존재들. 잡아먹고 잡아먹힐 위기와 모험으로 가득한 생애.
윤대협은 그제서야 고래상어의 눈동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고작 건물 3층 높이는 너무 작았다. 끔찍하게 비좁았다. 부딪히는 것도 당연하다. 차라리 잠들고 싶을 만큼 지루할 수밖에. 윤대협은 그 이후로 수족관에 가지 않았다.
몇 년 뒤 동물원에 갇힌 범고래를 한 소년이 탈출시켜 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개봉했다. 감동적이었다. 영화관에서 울어 본 적이 없는 윤대협도 약간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윤대협은 카나가와로 이사 갔다. 새 학기부터는 여기서 고등학교를 다닌다. 아들이 스카우트를 받은 뒤 감독님을 만나고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본 부모님은 무려 자취를 허락해 주셨다. 위험한 동네로 보이지 않아서. 그리고 윤대협보다 덩치가 큰 사람은 찾을 수 없어서? 엇나가는 것도 나름대로 의지와 관심이 필요한 일이라, 제일 재밌는 농구부에만 전념하며 심심하게 보낸 중학 생활의 보답이 여기서 돌아온다. 어머니는 다만 끼니만 잘 챙기라고, 언제든지 불시에 찾아와 냉장고 검사할 거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자취방은 바닷가에선 조금 거리가 있다. 부모님이 바닷바람 직접 맞는 집은 안 좋다고 꺼렸다. 그렇지만 유난히 조용한 밤이면 파도 소리가 어렴풋이 들릴 때도 있다. 짐을 다 옮기고 처음으로 혼자 잠든 밤이 그랬다. 윤대협은 아주 깊이 잘 수 있었다.
꿀잠 잔 덕분에 아침 일찍 눈이 뜨였다. 윤대협은 충동적으로 파카를 챙겨 입고 바닷가로 나갔다. 산책하기 좋아 보였던 방파제를 찾는다. 테트라포드 너머 넘실넘실, 도도한 겨울 바다. 해조류가 별로 없고 햇빛이 강렬해서 수면 아래가 꽤 멀리까지 투명하게 빛났다. 파도는 높지 않았다. 뺨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이 아주 차가웠다. 평평하고 기다란 무채색의 방파제를 따라 한참 걸었다.
방파제에서 낚시를 하는 아저씨가 있었다. 옆에 멀찍이 서서 힐끔힐끔 구경해 본다. 아저씨는 접이식 의자에 앉아서 한참 동안 아무 움직임이 없다. 주무시는 것일까? 윤대협은 방파제에 다리를 걸치고 주저앉는다. 바다를 바라본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저씨가 움직인다. 주무시는 건 아니었나 보다. 두 팔로 낚시대를 들어 올려 자전거 바퀴 굴리는 소리를 내면서 빙빙 감기 시작했다. 윤대협은 이제 대놓고 물끄러미 쳐다본다. 흥미진진.
이윽고 낚싯줄 끝에 팔뚝만 한 은색 물고기가 퍼덕이며 딸려왔다. 윤대협은 자기도 모르게 우와 소리를 냈다. 아저씨가 까딱까딱 손짓한다. 낯가림 없는 윤대협은 털레털레 구경 갔다.
"무슨 고기예요?"
"전갱이도 몰라?"
살림을 해 본 적 없는 윤대협이 알 리가 없다. 살아 있는 물고기를 보는 것 자체가 수족관 이후로 처음이다. 아저씨는 물이 통통하게 오른 전갱이 입에서 바늘을 꺼내더니 이리저리 살펴보고 그냥 놔준다. 윤대협은 깜짝 놀랐다.
"먹으려고 낚으신 거 아니에요?"
"먹을 게 모자라서 낚시하러 온 게 아니다. 욘석아. 그런 건 사 먹으면 돼."
"그럼요?"
"그냥 만나고 싶었던 거야. 그 순간의 짜릿함이 있고. 고마웠다 인사하고 돌려보내 주는 거다."
이건 그냥 스포츠니까. 아저씨가 중얼거린다. 윤대협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무슨 말인지 알 듯 모를 듯. 아저씨가 바다로 던진 반짝이는 전갱이는 눈 깜빡할 사이에 재빨리 깊은 수역으로 사라져 버렸다. 엄청난 스피드. 벌써 보이지도 않는 곳까지 멀어졌겠지. 다시 그물에 잡힐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은 바다로 돌아갔다. 안심이 될 만큼 무한히 넓은 세상으로.
윤대협은 한동안 아저씨 옆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봤다. 수평선에서 끝나지 않는 장대함을. 그 안에 사는 것들을 생각한다. 사진 속에 다큐멘터리 화면에 아저씨의 손안에 있던 것들. 바다의 거대함을 막막하다 생각하지 않고 아늑하다 여길, 매끈하고 반짝이고 스피디한 생명체들. 한순간에 물살을 뚫고 대시하는 폭발적인 에너지. 그런 존재들과 한순간이라도 만나고 싶어서라면 퍽 오랜 기다림도 견딜 수 있을지도. 윤대협은 좋은 걸 발견한 아이처럼 차분하게 웃었다. 가슴이 편안하게 두근거린다.
윤대협은 낚시를 배워 보기로 했다. 어쩌면 여기엔 고래가 살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윤대협은 농구화를 새로 사러 번화가로 나갔다. 발이 좀 커졌는지 원래 신던 게 약간 끼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오래 신어서 낡은 걸지도. 이래저래 새로 사도 낭비는 아닌 시점이다.
매장에 들어갔을 때부터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것저것 살펴보다 맘에 드는 거 하나를 잡아 사이즈를 묻는다. 원래 신던 것과 하나 큰 것, 두 개를 신어 보고 싶다고 부탁했다. 직원이 창고 뒤로 사라진 사이에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선객이 와 있었다.
잠자는 서태웅이었다.
손님... 손님...? 신발 상자를 손에 든 직원 한 명이 안절부절 우왕좌왕. 서태웅을 깨우고 싶은데 차마 몸에 손을 대진 못하는 모양이었다. 당황했지만 공손함을 잃지 않은 볼륨의 직원 목소리가 아예 안 들릴 정도로 서태웅은 깊이 자는 것 같았다. 다리는 정면을 향해 앉아 있는데 상체는 옆으로 완전히 쓰러져 있다. 유연하네. 윤대협은 냉정하게 감탄했다. 어깨가 넓은데 옆으로 눕는 바람에 목이 홱 꺾인 채로 거의 정수리가 소파에 닿아 있다. 정말 불편해 보인다. 그런데 잘도 잔다. 새근새근하고 아기 같은 소리가 난다.
시트콤 같은 상황이 웃겨서 윤대협은 웃었다. 서태웅의 얼굴 앞에 쪼그려 앉는다. 어깨에 손을 지그시 얹었다.
"서태웅. 일어나."
생각보다 다정한 목소리가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서태웅은 무려 주먹을 휘둘렀다. 잠결이라 그런지 허공을 갈랐지만. 휴 다행이다. 윤대협은 안도의 휘파람을 불었다. 맞으면 꽤 아팠을 것 같다. 뒤쪽에 서 있는 직원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공포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기가 맞을 수도 있었겠지. 윤대협은 참지 않고 큭큭 웃었다.
서태웅이 눈을 끔뻑끔뻑거린다. 내 잠을...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주먹으로 눈을 막 부비는데 잘 안 들린다.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면서 한 번 더 인사했다.
"안녕. 나 기억해?"
"윤대협..."
"정답. 왜 이런 데서 자고 있어?"
"농구화..."
아 하더니 그제서야 직원 손에 들린 신발상자를 발견했다. 직원은 얼른 서태웅 무릎에 상자를 내려놓고 꾸벅 인사하고 사라졌다. 이보다 빠를 수 없는 스피드. 서태웅은 눈을 두어 번 꿈뻑거리더니 직원 뒤통수조차 사라진 방향에 대고 꾸벅 따라서 인사를 한다. 윤대협은 킥킥 웃었다. 아무래도 서태웅은 직원에게 신발 사이즈를 찾다 달라고 부탁해 놓고 기다리는 사이에 잠이 들어 버린 모양이다. 근데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않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대협이 부탁했던 직원도 신발상자 두 개를 가져왔다. 감사합니다. 윤대협은 서태웅 옆에 앉아서 신발을 갈아 신는다. 서태웅이 지 신발 갈아 신다 말고 빤히 쳐다본다.
"응?"
"왜 두 개야? 디자인 똑같은데."
"아. 사이즈가 달라. 발이 커진 거 같아서."
서태웅의 표정이 한층 더 뚱해진다. 쳇, 인지 하, 인지 그 중간적인 코웃음을 짧게 내뱉는다. 뭐가 마음에 안 드냐? 까탈스러운 카나가와 슈퍼루키. 신발 끈을 꾹꾹 당기더니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나도 키 컸어."
윤대협은 환하게 웃었다. 질투한 거구나. 나만 키 컸을까 봐. 귀여워라. 고등학교 1학년. 한창 클 때지.
"정말? 좋겠다. 얼마나?"
"1cm..."
서태웅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객관적으로 자랑할 만한 성장은 아니지만 윤대협은 친절하게 맞장구쳤다.
"꾸준히 자란다니 좋다. 난 키는 아마 안 컸을 거야."
"그래?"
"모르겠어. 안 재 봤거든. 그냥 농구화가 좀 끼더라고."
"흠..."
서태웅은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 신발 신는 데 집중한다. 그새 다 신었다. 벌떡 일어나서 몇 번 가볍게 제자리 점프. 양 무릎을 번갈아 가슴 정도로 휙휙 들어 올린다. 좌우로 빠르게 사이드 스텝.
일반인보다 훌쩍 큰 사람이 갑자기 팔다리를 휘두르며 운동하는 기세에 이끌려 매장 내 몇 사람이 돌아본다. 서태웅은 개의치 않는다. 그림 같다거나 모델 같다는 말이 잘 어울린다. 가만히 있을 때보다 움직일 때 훨씬 더. 윤대협은 신발 신는 걸 까먹고 서태웅을 감상했다.
"잘 어울리네."
"감사."
짧게 대꾸한 서태웅이 윤대협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너도 신어. 그래그래.
원래 사이즈에 발을 넣어 보니 역시나 발가락이 약간 눌린다. 한 사이즈 큰 걸 신고 신발 끈을 묶는다. 양손을 짜잔 벌리면서 서태웅을 올려다보고 웃는다.
"어때?"
"일어나 봐."
분부대로 벌떡 일어난다. 멀대 같은 게 한 놈 더 추가되니까 바쁘게 지나가던 직원이 주춤 놀랐다. 아 죄송합니다. 윤대협이 꾸벅 인사를 했다. 서태웅은 윤대협을 세워 놓고 갸웃갸웃 여러 각도에서 살피더니 단출한 평가를 내려놨다.
"괜찮은 듯."
"그래?"
"쿠션 좋아?"
"응. 충분해."
"뛰어 봐. 사이드스텝."
윤대협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서태웅 코치가 시키는 대로 했다. 어때 두 글자에 돌아온 반응이 지나치게 충실해서 웃겼다. 되게 자상하네. 나도 농구화 신어 볼 줄 아는데. 접지력과 무게감을 체크하고서야 오케이 사인을 낸다. 열과 성을 다해 체크해 준 거 치고 담백하게.
"사든가."
"그래야겠다. 골라 줘서 고마워."
어 그래. 서태웅은 쳐다보지도 않고 신발을 갈아 신는다.
둘은 나란히 계산대로 향했다. 가는 길을 막고 늘어선 소품 매대의 상술. 서태웅은 보란 듯이 낚여서 멈춘다. 스포츠 수건을 몇 개 한 손으로 꾹 잡아 본다. 촉감을 테스트하는 듯이. 그러다가 까만 아대 하나를 만지작거린다. 고민하는 것 같길래 윤대협이 냉큼 낚아챘다. 서태웅의 눈을 날카롭게 뜬다.
"뭐야."
"하나 사 줄게. 오늘 고마워서."
"?"
서태웅은 진심으로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윤대협은 아랑곳 않고 계산대에 섰다. 제 농구화랑 서태웅 아대를 계산한다. 종이봉투에 담긴 신발상자를 받아 들고, 서태웅에게 아대를 내민다. 자. 서태웅은 윤대협을 빤히 쳐다보다가... 뒤쪽에 다른 손님이 줄을 서니까 마지못해 받는다. 감사 인사도 없이 서둘러 계산부터 마친다.
윤대협과 똑같은 종이봉투를 든 서태웅이 두리번거리며 계산줄을 빠져나왔을 때, 윤대협은 문가에서 두꺼운 유리 문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옆에 따라붙은 서태웅이 입을 삐쭉거리면서 작은 소리로 말한다.
"땡큐."
"내가 고맙지."
"또 봐."
윤대협은 미련 없이 돌아서는 서태웅의 손목을 충동적으로 잡았다. 왠지 그냥 보내기 아깝다. 오늘 일어난 일 중 제일 재밌는 요소인데.
"이제 집에 들어가?"
"어."
"오늘 뭐 해? 특별히 일정 있어?"
"잘 건데..."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말투에 윤대협이 빵 터졌다. 하하하 큰 소리가 맑게 울렸다. 서태웅이 뒷머리를 긁적인다. 윤대협이 대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잘 거면 나랑 놀래?"
"뭐 할 건데?"
"글쎄. 쇼핑? 책방 들렀다가 밥이나 먹지 뭐."
서태웅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잠깐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윤대협은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그러고 농구나 할까?"
"콜."
전광석화 같은 대답이었다. 윤대협은 또 하핫 웃었다. 서태웅과 있으면 예상치 못한 것을 발견하는 짜릿함과 예상이 맞아떨어질 때의 쾌감을 둘 다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책방에서 농구 잡지를 뒤적이고 느지막한 점심 메뉴를 고르고 카페에 들러 음료수를 하나 입에 물고 돌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서태웅은 졸았다. 틈만 나면 졸았다. 졸지 않으면 마치 졸음을 참는 것처럼 멍하니 아무 데도 보지 않는 눈을 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는 듯이. 유리벽에 갇혀 있던 고래상어처럼. 뒤쪽 대각선에서 보이는 동그랗고 뽀얀 볼에 졸음이 한가득이다. 신생아 낮잠 타임 방해한 것 같은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쪼금 들어서 윤대협은 약간 눈치를 봤다.
"엄청 졸린가 보네. 그냥 들어가서 잘래?"
그러면 또 고개를 붕붕 흔들어서 잠을 몰아낸다.
"안 돼. 농구해. 약속했어."
농구 못해서 죽은 귀신에 씌었나 보다. 이쯤 되면 윤대협도 궁금해진다.
"원래 그렇게 잠이 많아?"
"그런가 봐..."
서태웅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느리게 답한다. 별로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이. 윤대협은 또 질문이 생겼다.
"농구 안 할 땐 무슨 생각 해?"
서태웅이 졸린 눈을 꿈뻑거린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금붕어처럼 속눈썹과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갔다가, 서서히 올라온다. 그냥... 말꼬리가 늘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라는 듯이.
"농구하고 싶다...?"
윤대협은 또 웃음이 났다.
"그래. 가자. 농구하러."
"어."
"우리 집에 가서 공 가져갈까?"
"어."
"달리기 시합할까?"
"선공 걸어. 일 대 일."
"좋지. 받고 아이스크림 사기?"
"지고 울지 마라."
서태웅의 눈에 활기가 돈다. 냅다 먼저 뛰어간다. 어어 반칙! 근데 너 길 알아?! 윤대협이 음료수를 길가 쓰레기통에 내던지고 쫓아간다. 엄청 빠르다. 따라잡기 쉽지 않다. 이렇게 전환이 빠를 수가. 아까까지 꾸벅꾸벅 졸던 애가 맞는지. 눈도 못 뜨던 신생아가 육상 선수처럼 달리고 있다. 낙차가 지나쳐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서태웅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인 존재다. 팔을 휘두를 때마다 날개뼈가 번갈아 치솟으며 티셔츠를 펄럭인다. 매끈하고 반짝이고 스피디한 생명체. 한순간에 공기를 가르며 질주하는 폭발적인 에너지. 앞서가는 서태웅의 딱 벌어진 등판이 꼿꼿하다. 너른 바다를 가르는 고래상어 등지느러미처럼.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윤대협은 농구부원들과 함께 윈터컵 현 예선 해남 대 북산 경기를 보러 갔다. 인터하이에서 이변을 일으킨 북산은 이제 명실공히 카나가와 3강이다. 해남과 더불어 능남의 최대 라이벌이기도 하다. 달라진 전력과 전술을 분석해야 한다. 이번만큼은 질 수 없다.
스타팅 멤버가 한 명씩 코트로 입장한다. 서태웅은 입장 정렬 인사까지는 누구보다 얌전하고 정적이다. 뒷짐 딱 지고 가만 서 있고 움직임도 별로 없다. 멀리서도 알아보기 쉬운 이목구비만 화려하다. 조그마한 얼굴에 용케도 다 들어갔다.
그렇지만 윤대협은 그런 잔잔함에 속지 않는다. 이렇게 멀리서도 포착할 수 있을 만큼 번쩍이는 눈빛. 당장이라도 질주할 준비가 돼 있다. 장악에 익숙하다. 콤마 1초를 제 맘대로 가지고 놀 집중력을 벼려 놨다.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점프볼. 바로 이 순간 서태웅의 모든 것이 폭발한다. 선수들도 관중들도 입을 벌린다. 환호를 지른다. 경기장 안에 있는 그 누구도 그를 무시할 수 없다. 머리털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전면적으로 내뿜는 압도적인 존재감. 열기 속을 헤치고 가른다. 기세를 휘어잡아 끌고 간다. 공과 하나처럼 튀어 나가고 원을 그리고 꺾어지고 날아올라 덩크. 구름을 떠난 번개. 물 만난 물고기.
바다를 만난 고래.
윤대협은 적진의 에이스를 보고 참을 수 없이 미소 짓는다. 커다랗고 아름답고 역동적인 존재.
카나가와엔 고래가 산다. 너른 농구 코트를 펄펄 뛰어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