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light Basketball Club
불면의이쑤신
<Purply Ever After> 앤솔로지 수록"아~ 오늘은 저녁은 뭐 먹지."
북산 농구부 라커룸. 연습이 끝난 멤버들이 각자 옷을 갈아입는 와중에 강백호가 큰 소리로 머릿속을 외친다. 양호열 등등과 우르르 뭔가 사 먹으러 갈 모양이다. 정대만이 거들었다.
"왠지 함박스테이크 땡긴다. 고기 먹고 싶다."
"오 함박 좋은데. 만만쓰 나이쓰."
"고기가 안 먹고 싶을 때도 있어?"
송태섭이 핀잔한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어머니가 일찍 귀가하는 날이라 간만에 함께 먹을 저녁식사를 고대했다. 송아라 이 짜식이 갑자기 삘 꽂힌다고 친구들이랑 놀러가지만 않으면... 각자 저녁 메뉴 후보나 희망사항을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입 안에 침이 흥건하게 고이는 분위기 속에서.
탕.
"먼저 들어감다."
서태웅이 락커룸을 닫고 돌아섰다. 간결한 인사를 남기고 깔끔하게 떠난다. 어어, 잘 가라. 수고했어~ 내일 봐, 태웅아! 각자 건네는 인사에 한꺼번에 고개를 까딱, 웃쓰. 바람처럼 사라졌다.
진짜 쿨한 자식. 송태섭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라커룸 토크에서 먼저 자리를 비운 놈은 없는 죄로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 마련. 강백호가 언제나처럼 뒷담(?) 스타트를 끊었다.
"저 싸가지 없는 여우새끼 맨날 혼자 홱 가 버려, 재수없게."
"왜? 같이 가고 싶어?"
"악!!! 닥쳐 섭섭쓰!!!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맛!!!"
"사실은 제일 배고파서 엄마가 차려 두신 밥 먹으러 쪼르르 간 거 아니야?"
정대만이 제법 귀여운 가설을 내 놓는다. 이러나 저러나 정대만 눈에는 서태웅도 1학년 애송이기 때문에. 의외로 이호식이 적극 동참한다.
"그럴지도 몰라요. 태웅이... 점심도 잘 안 먹으니까..."
"에엥?"
의외의 정보에 선배들이 놀랐다. 강백호는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눈치다.
"저 자식 맨날 옥상 가서 잠만 자잖아. 몰랐어? 입학할 때부터 그랬는데."
"먹고 나서 자는 거 아니야? 아님 깨서 먹겠지."
"그럴 수도 있지만... 잘 모르겠어요. 항상 잠이 우선인 거 같아요."
"잠탱이 여우. 밤에 뭘 하느라 낮에 자는 거야? 음흉한 자식."
"그러고보니 서태웅이 뭘 먹는 걸 본 적이 없네. 이온음료 빼고."
"아침이랑 저녁을 겁나 든든하게 먹는 거 아닐까요? 막 다섯 그릇씩."
"쉬는 시간에 매점 빵을 전부 턴다든가."
"그건 아니에요. 쉬는 시간에도 잠만 자요..."
갑자기 라커룸 전체가 서태웅 식사에 대한 토론으로 웅성댔다.
이렇다 할 근거 없는 추측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에는 결론적으로 북산 최고의 득점왕에게 뭐라도 잔뜩 먹여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다가오는 윈터컵을 위해서라도. 점심시간에 다같이 학교 밖으로 몰래 빠져 나가 패밀리 레스토랑에라도 끌고 가자는 결코 모범생이라 할 순 없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송태섭이 스쿠터를 꺼내면 5교시 시작 전에 돌아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론이었다.
"두 명까진 탈 수 있고 나머지는 뛰든가. 훈련도 되고 배도 꺼뜨리고 좋네."
"어이!"
정대만이 반발했지만 나머지는 재밌을 것 같다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한창 모험을 좋아할 나이의 소년들은 남 모르는 비밀 작전에 두근거리고 키득거리면서 작별을 건네고 집으로 향했다.
그 시각 서태웅.
집에 도착했다. 가족들과 인사했다. 농구공을 들고 근처 코트로 나갈까 했지만, 하지가 지나고 해가 부쩍 짧아졌다. 쳇, 혀를 한 번 차고 씻으러 들어갔다.
침대에 드러누워 손가락으로 농구공을 빙빙 돌린다. 머릿속에서 다양한 농구 플레이를 떠올린다.
서태웅의 저녁식사 메뉴는 북산 라커룸에 있던 그 누구도 떠올릴 수 없었다.
똑똑. 누군가 방문을 노크한다. 서태웅은 조용히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 어머니였다. 쟁반을 받쳐 들고 있었다. 서태웅은 비켜났다.
어머니는 서태웅의 책상 위에 기다란 유리컵, 검붉은 비닐팩, 은으로 만든 가위가 올라 간 쟁반을 내려 놓았다. 은 가위로 비닐팩의 끝부분을 자른다. 진공 포장으로 밀착해 있던 비닐 사이가 팍 떨어져 나갔다. 숙련된 솜씨로 빠르게 내용물을 유리컵에 부었다. 약 5mm를 남기고 빠듯하게 차올랐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서태웅은 검붉고 묵직한 액체로 가득한 유리컵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잘 먹겠습니다."
흐뭇한 어머니의 미소가 바라보는 가운데 서태웅은 신선한 혈액 400ml를 원샷했다.
입가에 묻은 빨간 핏기까지 싹 핥아 먹는 걸 확인하고, 어머니는 그대로 빈 잔과 피 묻은 은 가위와 텅 빈 400ml 수혈팩이었던 것을 쟁반에 얹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니까 북산 농구부의 그 누구도 서태웅의 식사를 짐작할 순 없었다.
서태웅은 인간의 식사는 하지 않으니까.
이온음료, 물, 혀에 희한한 자극을 주는 다양한 간식들도 먹긴 먹는다. 그러나 포만감을 주고, 영양분이 되고, 농구를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는 건 단 하나. 포유짐승의 혈액이었다.
서태웅은 뱀파이어다.
이온음료를 즐겨 마시는 데에는 그저 땀 많이 흘리는 운동부 남고생이라는 것 외에 종족의 특성에 따른 이유가 있었다. 전해질 비율이 높고 액체 형태라 그나마 인간의 음식 중 탈수를 방지하고 수분과 영양소를 흡수하는 데에 가장 도움이 된다. 중세 시대 뱀파이어들은 버터와 함께 녹인 초콜릿이나 한 잔 마시곤 했다는데. 다행히 현대에는 다양한 대체품이 생겼다. 목이 마르거나 간식을 먹고 싶을 때마다 텀블러에 혈액을 담아서 쪽쪽 빨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서태웅이 시도한 바 이온음료가 맛, 접근성, 효과, 가격, 모든 면에서 탁월했다. 그 중에서도 아쿠아리우스. 짱.
농구도 실내 스포츠라서 시작했다. 서태웅은 전신이 햇빛에 닿으면 죽는다.
그렇다고 햇빛에 노출되자마자 그 부위의 피부가 치지직 타들어간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랬다면 뱀파이어는 진작에 멸종했을 것이다. 인류보다 훨씬 더 오래 지구에 존재했기에 그 정도 문제는 진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물고기 몸의 일부를 물 밖에 꺼내 놓는다고 바로 죽는 건 아니다. 뱀파이어에게 어둠은 해양생물의 물과 같다. 산소와 같다. 그러니까 대략 신체의 50% 이상이 노출되면 생명의 위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오랜 시간 노출도 당연히.
그래서 서태웅은 한여름에도 주로 긴소매, 긴 바지를 입는다. 실내에서도 웬만하면 반팔 이너를 받쳐 입으려 한다. 까먹을 때도 있고, 시합 때는 유니폼을 입어야 해서 어쩔 수 없지만. 그나마 유니폼 바지보다 조금 더 긴 컴프레션 쇼츠를 입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밖에서 농구할 때도 정 더우면 반팔이나 민소매를 입었다. 땀투성이로 탈진하는 것도, 농구를 못하는 것도 싫었으니까. 그래도 야외에선 아무리 더운 7월 한중간일지라도 바지만큼은 확실하게 발목까지 내려 입었다.
생각해 보면 서태웅은 뱀파이어의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얀 피부. 까만 머리털. 아름다운 외모. 송곳니도 뾰족하다. 다만 입이 하도 작아서 공개될 일이 없었을 뿐.
단 하나. 밤에 뭘 하느라 낮에 자는 거냐는 강백호의 예리한 질문은 안타깝게도 진실을 빗나갔다. 잠이 많은 것만큼은 종족적 특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서태웅은 밤에 동물이나 인간의 피를 사냥하러 다니지 않는다. 식사는 언제나 혈액팩이다.
서태웅의 부모님은 둘 다 의사다. 본인들은 이제 나이가 있다면서 도축장에서 개인적인 커넥션으로 구매하는 소, 돼지, 닭의 피만으로도 만족하셨지만, 아직 자라나는 청소년인 서태웅에게만큼은 가급적 인간의 피를 공급해 주려고 다소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기간 한정으로 일삼는 중이셨다. 들키면 구속이다. 뭐 100년형을 받는대도 종족적 특성상 길다고 느끼지는 않겠으나.
어쨌거나 부모님이 꼬박꼬박 가져다 주는 주로 인간, 가끔 동물의 혈액팩이 있는 한, 서태웅은 고전적인 밤 사냥을 나설 일이 없다. 밤에는 잔다. 모든 인간 청소년이 그렇듯이.
그럼 낮에는 왜 점심도 거르고 자느냐...
그냥 잠이 많아서였다.
9월은 아직 밖에서 농구할 만하다. 서태웅은 부 활동도 개인 연습도 모자라 같은 지역 라이벌을 허구헌날 찾아갔다. 능남의 윤대협이었다.
나약한 인간 윤대협. 해가 지면 금방 림이 안 보인다며 두 손을 든다.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않는데 집에 가겠다고. 사실은 광량이 줄어들 때부터 스태미나가 차오르기 시작하는 서태웅은 억울했다. 낮 경기가 아니고 밤 경기면 내가 더 잘할 수도 있는데. 40분을 풀로 뛰기 어려워서 다리에 쥐가 나는 사태 따윈 안 일어날 텐데. 인간과는 달리 해가 떠 있는 시간 내내 핸디캡을 뒤집어 쓴 채 승부하고 있다는 걸 말해줄 수도 없고.
불만 가득한 태도로 짐을 챙긴다. 윤대협은 속이 뻔히 보이는 서태웅을 보고 웃었다.
"오늘도 우리 집 가서 씻을 거야?"
"어. 가까우니까."
서태웅은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 가 보는 건 아니다. 지난 주에도 윤대협이 혼자 산다면서 씻고 가라고 했다. 개운하고 좋았다. 어두워진 후에는 컨디션이 좋아서 금방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타고 온 자전거를 끌고 윤대협 집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자전거 너머에선 윤대협이 걷는다. 밤바람에서 습기와 열기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가을이 오고 있는 밤.
침묵은 나쁘지 않다. 윤대협은 입을 열 때와 다물 때를 잘 아는 인간 같다고 서태웅은 평가하고 있었다. 시합 중에도 이 녀석이 하는 말은 전부 의도가 있다. 팀에 대한 격려, 적에 대한 도발. 전국대회 전에 건넸던 충고는... 어떤 의도였는지 몰라도. 어쨌든 엉터리는 아니었다.
농구 코트를 벗어났을 때, 지금처럼 아무 의도 없는 순간엔, 윤대협은 어김없이 조용했다.
시끄러운 것보다는 백 배 나았다. 서태웅은 편안히 어둠 속을 걸었다.
윤대협은 항상 손님을 먼저 씻게 한다. 서태웅은 사양하지 않았다.
개운하게 몸을 닦고 나왔을 때 윤대협은 바닥에 누워서 무려 영어로 된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마이클 조던 커버의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서태웅이 눈을 빛냈다. 글자는 하나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윤대협의 팔 안쪽으로 머리를 들이댄다. 윤대협은 잡지를 쥔 채로 재빠르게 한 바퀴 옆으로 굴러 가 버린다. 치사하게. 서태웅은 투덜거리며 침대에 기대 앉아 머리카락을 털었다. 낮게 웃는 소리가 수건 너머로 들렸다.
결국 윤대협은 잡지를 다 읽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다 말라서 보송보송해진 서태웅의 정수리를 잡지로 톡톡 도닥인 뒤, 서태웅의 손 위에 얌전히 건네주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집에 온 지 한 시간도 더 지난 것 같다. 정말 시간관념이 아예 없는 녀석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태웅은 잡지 속 마이클 조던에게 빠져 들었다. 영어로 잡지를 읽을 정도까진 아니다. 몇 가지 단어는 알아 볼 수 있다. 주로 농구 용어. 그것과 숫자와 마이클 조던의 사진을 조합해 구체적인 플레이를 상상해 본다.
윤대협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서태웅은 펼친 잡지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죽은 듯이. 코에 가까이 귀를 가져가 봤을 정도다. 어떻게 이렇게 숨소리도 안 내고 자는 거지? 신기한 녀석이다.
윤대협은 느긋하게 몸을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 저녁밥을 차리기 시작했다. 시체처럼 곤히 자고 있는 저 건방진 1학년 녀석은 오늘이야말로 밥까지 얻어 먹고 가려나?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고양이처럼 새침하고 경계심이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는 고작 두 번째 왔다고 제 집처럼 풀어져서 자고 있고. 재미있는 녀석이다.
윤대협이 산더미처럼 밥을 차려 먹고, 다 먹은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완벽하게 끝낼 때까지도 서태웅의 동그란 머리는 바닥에 처박혀 자고 있었다.
진짜 죽은 건 아니겠지? 윤대협은 서태웅의 코에 귀를 한 번 더 가져다댔다. 아주 미약하고 따스한 숨이 느껴졌다. 여전히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귀 안쪽이 간지러워 얼른 얼굴을 멀리한다.
간지럽다. 간지러워... 간지럽다?
앗!
윤대협은 불에 데인 사람처럼 허겁지겁 커튼을 젖히고 창문 밖을 본다. 길어진 가을 밤은 벌써 깊었다.
달이 떴다. 휘황한 보름달.
윤대협은 오늘이 보름이라는 걸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달빛이 윤대협의 홍채 안쪽에서 금빛으로 반사된다.
윤대협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큰일났다. 얼른 커튼 뒤에 숨는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허둥거리다 발뒤꿈치를 침대 밑에 쾅! 부딪혔다. 아야야. 아파할 틈도 없다. 빨리 서태웅을 내보내야 한다.
"서태웅. 일어나. 집에 가야지."
서태웅은 바닥에 엎드린 채 흔드는 대로 얌전히 흔들린다.
다급해진 윤대협의 손길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휘까닥 훼까닥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탈탈 털었더니 그제야 으으응,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찌푸린다.
"누구든... 내 잠을 방해하는 녀석은..."
"태웅아. 정신이 들어?"
서태웅은 간신히 눈을 짝짝이로 뜬다. 평소와 달리 외쌍커풀이 찐하게 주름 잡힌 눈.
얼마 가지 못하고 금방 힘이 풀린다. 부스스 감긴다. 다시 고개가 떨어진다.
틀렸어. 이 자식 완전히 취침 모드야. 윤대협은 마음이 급해졌다. 하얗고 통통한 볼따구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 찰싹찰싹 때린다. 당연히 안 아프니까 꿈쩍도 않는다.
차마 싸대기를 때릴 순 없어 양손으로 잡고 꾸욱 잡아 당긴다. 이번에는 좀 먹혔다. 파리채로 벌레 잡듯 매서운 손바닥이 날아온다. 윤대협은 그런 서태웅의 반응을 예상했기 때문에 한 대도 안 맞고 피했다.
빨개진 볼따구를 문지르며 잠이 깨서 기분이 더러운 서태웅이 윤대협을 노려본다.
"뭐야. 다 씻었어?"
"응. 이제 너 가야 돼."
"좀만 더 잘래."
입을 세모낳게 벌리면서 하품을 한다. 남의 집인데 아주 뻔뻔하기 그지없다. 보통 때라면 그러라고 내버려 뒀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비상사태다.
그러나 제가 들인 손님을 다급하게 내쫓을 핑계가 떠오르지 않는다. 윤대협은 초조하게 혀를 굴리다 외투를 챙기기 시작했다. 서태웅이 나가지 않는다면, 내가 나가는 수밖에.
"알았어. 더 자고 있어.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
돌아서는 윤대협의 등 뒤에서 촤라락, 소름 돋는 소리가 들렸다.
시원한 밤 공기가 그리웠던 서태웅이 아무 생각 없이 커튼을 활짝 여는 소리였다.
그 다음에는 창문을 드르륵.
달빛이 여과없이 윤대협을 비춘다.
"어디 가는데?"
달빛을 등에 업고 서태웅이 돌아본다.
그 시선 끝에서.
윤대협의 양쪽 귀가 사르륵 녹듯이 사라졌다.
대신 조금 더 관자놀이에 가까운 쪽에서 커다란 털뭉치가 솟아올랐다. 양쪽에 두 개가 거의 동그란 가마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짐승의 귀였다.
동시에 커다란 털뭉치가 허리 쪽에서 툭 튀어나왔다. 척 보기에도 복슬복슬한 몽둥이처럼 거대한... 짐승의 꼬리였다.
윤대협은 어떻게든 손으로 귀를 가리며 꼬리를 다시 바지춤으로 우겨 넣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사이즈가 아니었다. 곤란한 듯한 미소로 얼버무리기엔 커다란 두 손이 머리와 엉덩이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과히 우스꽝러웠다. 손 두 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서태웅은 묵묵히 그 꼴을 바라보다 성큼성큼 다가갔다.
코너에 몰린 윤대협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덥썩! 기습적으로 꼬리를 붙들었다.
윤대협은 자신도 모르게 커다랗게 짖었다. 깨갱!
서태웅은 손아귀에 가득한 뻣뻣하고 복슬복슬한 이중모를 감각하며 말했다.
"개였군."
윤대협은 발끈했다. 그러나 결코 티내지 않으며 침착하게 웃었다. 이 자식, 농구 외엔 상식이 아예 없다.
"아니지, 태웅아. 보름달에 변하는 건 개가 아니지."
서태웅은 물러서지 않았다. 꼬리를 잡은 손을 앞뒤로 슉슉 움직인다. 부드럽다.
"개 맞잖아."
"아니, 개가 아니고 늑대인간... 하..."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윤대협은 제법 재미를 느끼고 있는 듯한 서태웅의 야속한 얼굴 너머 창가에 높이 솟은 보름달을 마주 본다. 달빛이 전신에 쏟아진다. 이제 막을 수 없다.
윤대협의 전신이 변한다.
뿌드득, 불길한 소리를 내면서 뼈와 근육과 혈관이 있을 수 없는 속도로 커진다. 원래도 2미터에 가깝던 신장이 3미터를 넘어간다. 천장에 머리가 닿아 상체가 숙여져 긴 팔을 늘어뜨리면 손가락이 땅에 닿는다. 주둥이가 길어지고 입술 아래 거대한 송곳니가 번뜩인다. 얼굴을 포함해 전신이 은색, 회색, 간간히 검은색 털로 뒤덮인다. 짙은 눈썹, 새카만 눈꼬리, 새파란 홍채와 검은 눈동자.
머리는 회색 늑대. 상체와 팔은 털로 뒤덮인 인간. 꼬리뼈부터 하체는 다시 늑대. 절반은 인간, 절반은 늑대... 따지자면 3분의 2가 늑대인가? 비율을 헤아리던 서태웅은 고개를 갸웃했다. 수학은 약한 과목이다.
늑대의 입가에서 뜨거운 침이 뚝뚝 떨어진다. 차가운 눈동자가 서태웅을 노려본다.
서태웅의 얼굴만한 둥근 코끝이 엄청나게 가깝다. 씨근대는 숨결이 축축하다. 눈을 깜빡이면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작살낼 것 같은 살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팽팽한 대치 속에서 무표정하던 서태웅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씨익 올라갔다.
윤대협은 당황했다. 지금 웃은 거야?
늑대인간은 밤에 변한다. 그믐에 가까울수록 인간에 가깝고 보름에 가까울수록 늑대에 가깝다. 늑대로서의 본능이 강해지면 인간으로서의 자아가 옅어진다.
그래야 하는데. 지금은 완전히... 깼다. 눈앞에서 완전한 늑대인간을 보고도 입술 끝을 비틀면서 서투르게 웃고 있는 서태웅 때문에.
인간 윤대협만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생각이 뇌를 강타한다. 이게 웃는 거야? 얘 웃을 줄도 알아? 지금 웃음이 나와?
"나도 그거야."
서태웅이 불쑥 말했다.
윤대협은 더욱 당황했다. 으르렁거리는 대신 인간의 말이 튀어나온다.
"너도 늑대인간이야?"
"아니!"
서태웅이 씨익 웃는다. 검지손가락을 자신의 입꼬리에 걸더니 옆으로 죽 찢어 보인다.
조그맣고 뾰족한 송곳니를 자랑한다.
"에퐈이어아. (뱀파이어야)"
입이 찢어져서 발음이 다 샌다.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늑대의 얼굴로도 멍한 표정은 잘 전해졌는지. 서태웅이 손가락을 놓고 불평했다.
"뱀파이어라고. 멍청아."
아아. 뱀파이어.
윤대협은 돌발 상황에 놓일수록 침착해지는 편이다. 오늘 일어난 일은 늑대인간 생애에서 가장 황당하고 예측불허였다. 그래서 역으로 급격히 차분해졌다.
보름달이 진하게 만든 늑대의 피가 가라앉고 인간 자아가 갖고 있는 이성이 뇌의 대부분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의 변화도 따라왔다. 윤대협은 천천히 인간으로 돌아왔다.
입은 채로 변하는 바람에 넝마가 된 옷가지를 치우고 사람 꼴을 갖췄다. 서태웅은 민망하지도 않은지 흥미진진하게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윤대협은 헛기침을 했다. 억지로 화제를 꺼내 본다.
"뱀파이어가 진짜 아직도 있었구나..."
"많지는 않대."
서태웅이 윤대협의 하체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망설임 없이 꼬리를 꽉 쥐던 손길이 생각난다. 그걸 찾고 있는 거겠지만 아무래도 부위가 부위인 만큼 상당히 민망한 시선이다. 윤대협은 괜히 베개를 슥 가져와서 다리 사이를 방어했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저녁 안 먹고 그냥 갔구나. 오늘도 잠만 자고."
서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대협은 순수하게 걱정이 됐다.
"너 그럼 밥은 어떻게 먹어? 인간 사냥 같은 거 해?"
서태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모님이 의사야. 피를 구해 오셔. 동물도 괜찮아."
"그렇구나. 학교에서 곤란하겠네. 점심 시간에."
"그냥 안 먹는데."
"그래도 안 들켜?"
"안 들키던데..."
얘 혹시 왕따 당하는 거 아니겠지. 윤대협은 심각하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애가 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 아무도 모른다니. 진실은 서태웅이 북산 고등학교를 왕따시키는 것에 가까웠지만.
다정하게 식사 문제를 걱정해 준 윤대협에게 서태웅도 같은 말을 건넸다.
"너는 먹이 문제는 없겠네."
먹이? 묵과하기 어려운 단어 선택에 윤대협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그러나 서태웅에게서 시비를 거는 듯한 기미는 없다. 일단은 순순히 대답한다.
"뭐... 그렇지."
"개는 잡식이니까."
이번엔 확실히 짜증이 났다. 윤대협은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설명한다. 애들 상대로 화내지 말자.
"개가 아니고 늑대."
"그게 그거지."
윤대협의 잘생긴 이마에 핏줄이 살짝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미소는 흔들리지 않았다.
"너도 박쥐는 아니잖아."
서태웅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거 봐. 너도 헷갈리면 기분 나쁘지 않냐고 말하려던 윤대협에게, 서태웅은 진지한 얼굴로 다만 사실을 바로잡는다.
"박쥐로 변신하는 건 드라큘라야. 친척이다."
"하. 그러세요. 개랑 늑대도 친척이란다."
"호오."
그렇군... 서태웅이 처음 알았다는 듯이 흥미롭게 턱을 매만진다. 무슨 동물 상식 하나 알아낸 것처럼 뿌듯해 하고 있네. 귀엽다고 해야 하는지. 윤대협은 한숨 한 번에 건방진 1학년을 봐 주기로 한다.
한편 서태웅은 담담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제법 신이 난 상태였다.
서태웅은 철 들고 가족 이외에 인간이 아닌 밤의 존재를 처음 만났다.
멸종에 가까운 뱀파이어. 인간과 섞인지 오래라 구별도 어려운 늑대인간. 말수가 적은 부모님께서는 자세히 말씀해 주신 적도 별로 없다. 하물며 실물을 보다니. 함께 대화를 하다니.
서태웅은 하루하루 뱀파이어라는 걸 숨기기 위해 딱히 애쓰며 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인간이 아니라고 공언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감추느라 고생이라 말할 수는 없어도 비밀은 비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비밀이 없었다. 윤대협과 서태웅. 둘 사이만큼은.
이제 밤 늦게까지 농구하자고 해야지. 서태웅은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음 날.
서태웅은 항상 나타나던 능남 고등학교 체육관 앞에도, 기차역 건널목에도, 야외 농구 코트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교길에 그 모든 공간을 스쳐 지나가며 윤대협은 괜스레 한 번씩 주위를 둘러봤다. 서태웅은 없었다.
오늘은 쉬는 날인가? 어제 갑작스러운 상호 정체 공개 사건 때문에 잠시 거리를 두고 싶은 걸까? 하지만 충격을 받았다기보단 반가운 것 같았는데. 그냥 밤늦게까지 떠드느라 잠을 못 자서 쉬고 있을지도. 다양한 가능성 중에 심각할 건 하나도 없었다. 윤대협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놀면 좋지.
물론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일몰이 지나고 달이 휘영청 떠오른 20시 정각.
노크라기엔 너무 터프한 기세로 윤대협의 자취방 문이 두들김을 당했다.
문 앞에 서 있던 건 서태웅. 그 손에 들린 건.
프리즈비였다.
이 자식이 진짜...
포기를 모르는 개 취급. 윤대협은 이번에야말로 화를 내지 않기 위해 턱을 꾸욱 물었다. 연상이 되어서 가오 빠지게 발끈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 애쓰고 또 애쓰느라 콧잔등이 두 번 빠르게 실룩거렸다.
윤대협의 분노를 아는지 모르는지. 서태웅은 손가락 두 개 끝으로 팽그르르 원반을 돌리면서 말했다.
"헤이. 승부하자."
윤대협은 잠깐 열받음도 잊었다.
서태웅이 농구가 아닌 다른 걸 하자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분명하게 한 톤 밝은 목소리. 서태웅은 제법 들떠 있었다. 윤대협과 놀고 싶어서. 농구가 아닌데도...
결국 또 쉽게 화가 풀렸다. 윤대협은 자신이 생각보다 연하의 애교에 약하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 하고 집을 나섰다. 최대한 달빛이 맨살에 닿지 않게 후드를 뒤집어 쓰고 바닷가로 달렸다. 서태웅은 가벼운 몸짓으로 따라왔다.
모래사장에 정중히 옷을 벗어 놓는다. 보름이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이라 금방 늑대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다.
그 상태로 윤대협은 서태웅과 바닷가에서 일 대 일로 프리즈비 5시간을 내달렸다.
부정할 수 없었다. 윤대협의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다음 날 윤대협은 학교에 왕창 지각했다. 당연하다. 밤이 새도록 바닷가를 뛰고 또 뛰었으니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정오였다. 오후 수업 중에도 내내 하품을 쩍쩍했다. 개운한데 피곤했다.
서태웅은 더 심했다. 아예 자느라고 학교에 못 갔다.
하루종일 잠만 자다 어머니가 저녁 먹으라고 깨웠다. 눈을 부비면서 혈액팩을 원샷하고 다시 프리즈비를 챙겨 집을 나섰다. 그 정도로 재미있었다.
서태웅은 재미있는 걸 가끔씩만 하면서 사는 사람이 절대로 아니다.
실컷 바닷가를 뛰고 나면 온몸이 모래와 땀투성이가 됐다. 첫날엔 그대로 집에 갔지만 둘째날엔 그럴 힘도 없어서 가까운 윤대협 집으로 갔다.
한바탕 씻고 누운 채로 천장을 보면서 비밀이 없는 사이에만 할 수 있는 대화를 했다. 예를 들면.
"그래서 공놀이를 좋아하는군. 개니까."
서태웅은 윤대협의 모든 면을 그의 정체와 연결지어 이해하곤 했다. 그리고 언제나 늑대가 아니라 개라고 했다. 윤대협은 알면서도 매번 열 받았다. 절대로 티내지는 않았다. 연상으로서의 자존심 문제였다.
"늑대라고 했잖아, 태웅아. 공놀이는 너도 좋아하면서."
조금만 방심해도 어쩐지 어금니가 붙은 것 같은 발음이 된다. 화내지 말자. 애한테 화내지 말자. 서태웅이 누워있던 몸을 홱 뒤집으며 반짝이는 눈동자로 윤대협을 바라본다.
"낚시는 왜 좋아하지? 개는 낚시를 하나?"
"아니, 늑대라고..."
윤대협은 반박하는 와중에도 자신이 낚시를 좋아하는 이유를 성실하게 생각해 본다.
"으음... 물 속에서 이렇게 물고기가 살랑살랑 돌아다니잖아. 그냥 재밌어. 그거 보고 있으면."
결국 개와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서태웅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또 묻는다.
"자꾸 지각하는 것도 개라서?"
"아니, 늑대... 하아... 야행성이야. 사실 밤에 별로 자고 싶지 않아."
그렇다. 윤대협도 서태웅과 마찬가지로 야행성이다. 그가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시간은 낮이 아닌 밤이다. 빛이 아닌 어둠 속이다. 밤에 활동하고 낮에 자는 쪽이 신체에 100% 잘 맞는데, 인간과 어울리려다 보니 강제로 밤에 자고 낮에 활동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히 밤에는 수면질이 좋지 않고 자는 시간 자체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윤대협에게 완급 조절의 버릇이 붙은 것도 그 이유가 컸다. 낮 시간에 모든 경기에서 40분 내내 100%를 쏟는 것은 불가능이다. 밤이라면 또 몰라도. 아낄 수 있는 체력은 무조건 아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농구 승패는 커녕 다음 날 일어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었다.
지금까지 서태웅은 자신이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밤의 생물이기 때문에, 낮에 윤대협을 상대하는 건 핸디캡을 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윤대협 역시 늑대인간이고, 밤의 생물이기 때문에, 낮에 서태웅을 상대할 때에는 제 컨디션이라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둘은 처음부터 같은 조건에서 대결하고 있었다. 그냥 서태웅의 스태미나가 윤대협을 따라가기 부족한 게 맞았다.
그걸 깨달은 이후로 서태웅은 더 이상 프리즈비 놀이에 한눈 팔지 않았다. 모든 밤에 일 대 일을 신청했다.
이제 둘은 아예 해가 진 다음에 만났다. 아무도 없는 길거리 농구 코트에서 인간이 아니어야 볼 수 있는 어둠 속 서로의 그림자를 확인했다. 서태웅이 으르렁거렸다.
"림이 안 보인다고?"
"하하, 미안 미안."
윤대협이 머쓱하게 웃었다.
"너는 안 보이는 줄 알았지."
"장난해?"
"뱀파이어인 줄 몰랐으니까."
서태웅이 말 대신 농구공을 집어 던졌다. 그림 같은 포물선을 그린다.
완벽한 통과가 윤대협의 두 눈에 똑똑히 잡혔다. 소리만 들어도 골인이었지만.
그렇게 두 밤의 존재는 일 대 일 루틴을 완전히 어둠 속으로 옮겼다.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모르는 일 대 일을. 해가 졌다는 핑계를 댈 수 없으니 그야말로 무한이었다.
오히려 주변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하면 서태웅이 먼저 반응했다. 헤이, 이제 별이 보이지 않아. 서태웅은 칠흑에서 군청으로 물 빠진 하늘을 올려다 보며 떠나야 하는 사람의 얼굴을 했다.
새벽이 되기 전에 서태웅은 집으로 돌아갔다. 윤대협도 덩달아 집으로 갔다. 먼저 중단을 통보 받는 기분은 어색했다.
자연히 낮은 통으로 수면시간이 되었다. 윤대협과 서태웅은 모두가 깨어있는 시간에 실컷 잤다. 그저 잤다. 농구부 시간에만 운동을 통해 강제로 혈액순환을 돌려서 간신히 각성할 수 있었다.
서태웅은 아예 하교길에 자전거 위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윤대협 집으로 왔다. 차에 치여도 안 죽는 뱀파이어라고 당당하게 졸음운전...이라고도 할 수 없는 폭렬수면운전을 했다.
비몽사몽 서태웅이 힘없이 문을 두들기면 윤대협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문을 열어줬다. 쓰러지듯 뒤엉킨 채로 둘은 침대도 아니고 방바닥에서 서로를 끌어 안고 새근새근 잠들었다.
눈을 뜨면 밤이었다. 아홉 시. 열 시. 늦잠 자면 자정.
개운한 몸으로 둘은 가뿐하게 농구를 하러 갔다.
그리고 또 해 뜰 때까지 일 대 일.
별빛이 흐려질 때 쯤 서태웅은 집으로 갔다.
날이 추워질수록 밤은 길어졌다. 늑대인간은 추위를 타지 않는 편이지만 뱀파이어는 달랐다. 서태웅은 기온이 낮은 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윈터컵 예선이 끝났을 때쯤엔 더 이상 밖에서 농구를 할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능남도 북산도 윈터컵엔 못 나갔다. 처음부터 모든 경기에 김수겸이 출전했던 상양이 절치부심 끝에 해남을 잡고 현 티켓을 손에 넣었다. 겨울방학 훈련은 가장 따스한 낮 시간에 실내에서 잠깐 하고 끝이다. 본격적인 봄이 올 때까지는 무리하다 다치는 게 더 손해다.
서태웅은 북산 체육관을 몰래 열 수 있었다. 그러나 윤대협이 거기까지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보름이 가까워지면 윤대협은 신체 변화를 컨트롤할 수 없다. 아무도 없는 심야의 농구 코트나 바닷가라면 어쨌든, 능남에서 북산까지 가는 길 내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거란 보장은 어려웠다.
그래서 서태웅은 윤대협을 만나지 못하고 오랜만에 제 방에 드러누웠다.
상당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천장을 노려보았다. 몇 달간 인간이라면 비명을 지르겠으나 늑대인간과 뱀파이어라면 바이오리듬에 꼭 맞는 생활패턴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윤대협이 없는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잘 모르는데. 적당히 인간 따라 누워있다 보면 스르르 잠이 들던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는데. 종족적 특성에 따라, 신체가 타고난 대로, 백 퍼센트 컨디션의 시간대에 최고의 라이벌과 농구하는 기분을 알아버렸는데.
서태웅은 천장에서 눈을 떼고 모로 돌아 누웠다. 어쩔 수 없지. 서태웅은 봄을 기약하기로 한다.
뱀파이어는 성격이 급하지 않다. 영원불멸의 존재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큰 의미가 없다. 그들은 현재에만 집중한다. 그래도 된다. 무한하니까. 끝나지 않는 생에서 윤대협과 농구를 할 수 없는 3~4개월의 겨울은 찰나조차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겨울은 지나가고 봄은 온다. 살아있기만 한다면.
살아있기만 한다면...
서태웅은 문득 경추를 스치는 싸늘한 예감에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윤대협은 뱀파이어가 아니다.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들떠 그도 유한한 존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잊었다. 서태웅의 눈동자가 불안에 흔들린다. 윤대협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아, 깜짝이야. 기척 좀 내라, 서태웅. 뭐? 그건 갑자기 왜? 글쎄. 한 10년 아니냐?"
"아니지, 송태섭. 그건 예전 얘기고. 요즘은 그래도 15년은 살아."
"오~ 만만쓰. 개 키워 봤어? 저기 모퉁이 슈퍼에 사는 쪼끄만 하얀 개 있잖아. 승질 드러운 애. 걔는 내년에 스무 살이래. 요즘은 20세 시대라고 주인장이 그러던데."
"그렇댄다, 태웅아."
"뭐야, 여우 자식 좋으라고 알려준 거 아니야!"
"하지만 서태웅이 먼저 물어봤는데. 개는 수명이 몇 년이냐고..."
쾅쾅쾅. 세상 모르고 잠자던 윤대협의 꿈나라가 굉음의 공격을 받고 흔들린다.
윤대협은 무거운 이마를 겨우겨우 베개에서 들어 올렸다. 머리가 딩딩 울린다. 시끄러워 죽겠네.
아직 낮에 깨어 있기엔 적응이 덜 끝났다. 누구 올 사람도 없을 뿐더러 최근 3개월 간 방문자는 해 뜰 시간에 돌아다니는 걸 꺼리는 뱀파이어 뿐이었다. 내가 영수한테 돈 꾼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윤대협은 허튼 생각이나 하면서 비몽사몽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해 뜰 시간에 돌아다니는 걸 꺼리는 뱀파이어가 서 있었다.
창백한 얼굴. 뛰어 왔는지 헉헉대며 하얀 입김을 뿜는 입술까지 하얗다. 발그레하게 얼어 있는 코끝만 빼고 핏기가 없다. 윤대협은 놀라서 일단 서태웅을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바닥에 앉혀 놓고 난방을 올린다. 담요를 주워다가 어깨에 덮어 준다. 서태웅은 놀랍게도 떨고 있었다. 내장 속이 경련하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정말 추웠나 보네. 손바닥에 닿는 이마며 어깨며 손등이 전부 시체처럼 차갑다.
윤대협은 대리석보다 차가운 뺨을 다정하게 감쌌다. 온기를 빼앗기는 아찔한 기분.
"괜찮아? 무슨 일 있어?"
서태웅이 윤대협을 가만히 노려본다. 떨리는 속눈썹. 신중하게 묻는다.
"너... 몇 살이라고 했지?"
"갑자기?"
세상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2학년인 걸 모르고 묻는 건 아닐 텐데. 곤란한 듯 관자놀이를 긁적인다. 늑대인간 나이로 어느 정도인지 물어 보는 건가? 일단은 상식적인 선에서 대답해 주기로 한다.
"일단은 열일곱살이지. 고등학교 2학년."
서태웅의 얼굴이 한층 더 파리하게 굳었다. 절망으로 커진 눈. 잡티 없이 새하얀 안구 속에 까만 눈동자가 외롭게 떠 있다.
윤대협은 당황했다. 이런 격한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열일곱살인 걸 지금 알았나...?
서태웅은 입술을 꾹 깨문다. 시선을 떨군다. 오늘 탐문을 통해 알게 된 개의 수명을 차례로 떠올린다. 10년, 15년, 이제는 세상이 좋아져서 20년.
그럼 길어야 3년 남았다고...?
서태웅의 깨끗한 눈동자에 맑은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서태웅... 울어?"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진짜로 눈물이 왈칵 솟았다.
코 앞에서 조심스레 살펴 보던 윤대협은 대단히 놀랐다.
서태웅의 동그란 뺨 위로 네 줄기의 뜨거운 물줄기가 동시에 흘렀다.
운다! 진짜로! 서태웅이! 내 앞에서! 서태웅이! 웬만해선 패닉할 일 없는 윤대협도 과연 여기서는 침착을 유지할 수 없었다.
"왜 그래, 왜 울어. 일단 말을 해 봐. 괜찮으니까."
어떻게든 달래려고 어깨를 토닥인다. 그 서태웅이 갑자기 울다니. 어쩐지 등장부터 안색이 장난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단단히 난 것이다. 그것도 대단한 큰일이.
서태웅은 일단 진정하려는 듯 커다란 손가락으로 두 눈을 꾸욱 덮었다.
그러나 눈물을 그치지는 못하고 오히려 한 번 더 울컥했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커다란 몸이 조그맣게 움츠러든다.
안쓰러워 윤대협은 제가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서태웅의 어깨에 걸쳐 뒀던 담요를 잡고 끌어 당겼다. 따스한 손바닥을 펼쳐 서태웅의 등판을 감쌌다. 또 다른 손으로 서태웅의 동그란 뒤통수를 감싸서 제 가슴팍에 가만히 기대주었다. 서태웅은 순순히 윤대협의 품에 이마를 박고 조금 울었다.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으로 한참 동안 윤대협은 서태웅을 보듬어 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멈춘 것 같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서태웅의 고요한 눈물이 조금 진정된 것을 보니.
서태웅이 머쓱하게 상체를 일으켜 떨어져 나간다. 윤대협은 얼른 휴지를 갖다 주었다.
코를 팽 풀더니 휴지를 구겨서 윤대협에게 건넨다. 음. 뻔뻔함이 돌아왔군. 회복된 모양이야. 윤대협은 냉정하게 평가했다.
창백하던 얼굴에 발갛게 물기가 묻어 있다. 서태웅을 알고 지낸지 사계절이 지나가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다.
어딘가 간지러운 마음을 안고, 윤대협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무슨 일인지 얘기해 줄 수 있어?"
서태웅은 코 밑을 두어번 더 문지르더니.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20년..."
"뭐?"
서태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개는 20년 밖에 못 산다며..."
윤대협은 이번에야말로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아아아아... 땅에 싱크홀을 파낼 수 있을 것 같은 무거운 한숨이 저절로 떨어졌다.
열 받는 꼬맹이. 진짜로 열 받는다. 어디까지 사람 아니 늑대인간을 개 취급해야 만족할 건지? 이마에 튀어나온 힘줄을 문지르면서 윤대협은 무언가 모순된 신체 현상을 느낀다. 자신의 기분과는 거꾸로 자꾸만 상승하는 입꼬리. 긴장이 풀리는 광대뼈. 주름이 잡힐 듯이 움찔거리는 눈가...
윤대협은 정말로 화가 났다. 백번 천번 늑대라고 말해줘도 귓등으로 넘기고 자신을 개 취급하는 서태웅에게.
그리고 윤대협은 진심으로 기뻤다. 자신이 3년 안에 죽는 줄 알고 쪼르르 달려 와 품에 안겨 울어버린 피도 눈물도 없는 뱀파이어 서태웅 때문에.
솔직히 좀 귀엽다. 윤대협의 모양 좋고 시원한 입술이 다채로운 방향으로 이상하게 실룩거렸다. 이렇게 안면 근육의 통제권을 잃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감정 컨트롤도 쉽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꼬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달이 뜬 것도 아닌데 이 정도로 본능이 앞서다니. 그것도 붕붕 지 혼자 신명나게 흔들리는 중이었다. 윤대협은 서태웅이 눈치채기 전에 얼른 이성을 되찾고 꼬리를 없앴다.
침착을 되찾고 자애롭게 웃으면서 서태웅의 두 손을 잡는다.
"서태웅. 나는 개가 아니고. 늑대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늑대는... 얼마나... 사는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어절 사이마다 아직 진정되지 않은 훌쩍임이 끼어든다. 하. 솔직히 좀 귀엽다. 윤대협은 화가 다 풀렸다는 걸 티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여상히 대답했다.
"글쎄. 야생 늑대는 8년 정도?"
서태웅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진다. 윤대협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아니, 그런데 나는 늑대인간이지 늑대인 건 아니니까... 야생은 더더욱 아니고."
"그래서 얼마나 사냐고."
슬슬 퉁명스러움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좀 회복한 모양이군. 윤대협은 시원하게 미소 짓는 입술 위로 검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비밀."
서태웅의 단단한 주먹이 윤대협의 상복부를 가격했다. 컥 소리를 삼키며 윤대협은 배를 감싸쥔 채 쓰러졌다. 명치를 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서태웅은 벌떡 일어나서 덮고 있던 담요를 쓰러진 윤대협 얼굴에 던져 버리고 쿵쾅쿵쾅 나가 버렸다. 짜식, 단단히 열이 받았네. 지금까지 개 취급에 대한 복수다. 혼자 남은 윤대협은 담요에 얼굴을 묻고 낄낄 웃었다.
차가운 뱀파이어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날 이후 서태웅은 매일같이 윤대협을 찾아왔다.
시간은 대중없었다. 낮일 때도, 밤일 때도 있었다. 목 끝까지 코트 단추를 잠그고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장갑을 끼고 왔다. 장갑을 벗겨낸 손등은 언제나 차가웠다.
서태웅은 한 번도 용건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윤대협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됐다는 듯이 돌아섰다. 미련 없이 집으로 가 버렸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려 들지 않았다. 잡지를 건네도 거절하고 NBA 비디오를 보자고 해도 응하지 않았다. 뭐하자는 건지 상당히 알쏭달쏭했다. 농구? 어렵고. 씻을래? 농구도 안 했으니 더더욱 어렵고. 밥 먹을래? 뱀파이어니까 더더더 어렵고. 윤대협은 좀처럼 정답을 찾지 못했다.
겨울방학이 끝날 때쯤에야 윤대협은 어떤 가능성에 생각이 닿았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러 왔던 걸까?
봄이 오고 있는 계절, 윤대협은 서태웅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이제 밤에도 영하는 아닌데. 슬슬 농구하러 가 볼까?"
서태웅은 윤대협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윤대협은 더없이 친절하게 웃었다. 거절하기 어려울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서태웅은 더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언제 떠나는지 알아야 마음 정리를 할 수 있잖아."
역시. 윤대협은 그 말을 듣고 확신했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러 온 거였구나. 지금까지 매일.
그럼에도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건, 매일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에 안고 걸음을 옮기는 마음이 어땠을지.
서태웅이 담담하게 자기 얘기를 꺼냈다.
"나는 100살에서 150살 정도야. 아마."
"되게 부정확하구나."
"뱀파이어는 원래 그래. 인간으로 치면 15살, 16살. 비슷해."
뱀파이어는 순혈로만 태어난다. 존재 자체가 유전과 생명의 비틀림인 밤의 생물 중에서도 가장 꼬여있고, 기괴하고, 아름다운 뱀파이어. 시간을 뛰어 넘은 이들.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에서는 인간이 태어난다. 불멸을 타고난 탓에 재생산에 딱히 관심도 없는 이들이라 전쟁, 사냥, 실수로 죽어버린 숫자에 비해 태어나는 숫자는 훨씬 적었다. 뱀파이어는 서서히 멸종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인간의 판타지 속으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반면 늑대인간은 다르다. 서로 다른 종이 교차하는 경계에서 탄생한 완전히 새로운 힘을 가진 존재. 반반이라기보다 화학적 합성. 그런 만큼 인간과도 늑대와도 섞일 수 있다. 인간에 더 가까워지는 방식으로 희석되며 살아남아왔다. 윤대협은 개중에선 상당히 늑대를 많이 이어받은 편이었다. 요즘 시대에는 드물었다. 대체로는 자신의 뿌리를 잘 모르고 그냥 힘 좋고 피지컬 좋고 이상하게 한 달에 한 번씩 컨디션이 끝내주게 좋은 인간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늑대인간과 뱀파이어는 서로를 잘 모른다. 습성이 어떤지, 무엇에 치명적인지, 얼마나 인간과 닮았는지, 얼마만큼의 자연적인 수명을 허락 받고 사는지...
서태웅은 (뱀파이어로서는) 짧은 150년 생애 동안 많은 친구를 먼저 떠나 보냈다. 머리가 좀 커지고 경험이 생긴 100여년 전부터는 유한한 존재들과 그다지 가까워지려는 노력조차 포기했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친해지고, 각별해지고, 소중해지고. 끝이 정해져 있는데 뭐하러. 항상 보내기만 하는데. 상처 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알면서 그러는 건 자학이나 다름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윤대협과 이 정도로 친해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서태웅이 모르는 사이에 가까워져 버렸다. 비밀을 공유한 그 순간부터.
아니 생각해 보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무나 비슷한 영혼이 서로 빨려들듯이...
이제 늦었다. 윤대협이 없으면 서태웅은 반드시 상처 입을 것이다. 오랫동안 슬플 것이다. 남은 영원이 하나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인지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기한을 새겨 두면 그나마 끝을 가늠할 수 있고. 피할 수 없다면 예측이라도 하고 싶어서. 기습적인 이별은 정말 괴로울 것 같으니까... 천하의 뱀파이어도 약간 무서울 정도로.
그런 생각으로 차분히 가라앉은 서태웅의 눈동자를 윤대협이 들여다 본다.
"마음 정리를 하려고? 벌써?"
서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대협이 담담한 어조로 재차 묻는다.
"어차피 내가 먼저 죽을 거라서?"
서태웅의 얼굴이 아주 약간 일그러졌다. 한숨을 푹 내쉰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음 정리 같은 거... 사실 안 되는 거 알아. 그런 건 없더라고."
윤대협은 가슴이 찡하게 조여드는 아픔을 느꼈다. 서태웅의 담담한 어조가 아팠다. 그가 150년의 생애 동안 이미 겪어 본 아픔이 그대로 전달되기라도 한 것처럼.
"네가 사라지면."
서태웅이 한 번 눈을 꾹 감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구겨졌다가 펴진다.
"무엇을 미리 생각해도 그것보다 더 슬프겠지."
윤대협은 점점 목이 메였다. 숨이 막힌다. 쇄골부터 턱끝까지 꾸욱 눌린 것처럼 아프다. 서태웅은 끝까지 힘주어 말한다.
"그래도 언제인지만 알고 싶어. 모르는 건 너무 무서워."
공포를 인정하는 뱀파이어. 거의 속삭이듯이.
"아주 아프고 괴로운 끝이 있어도... 너랑 계속 놀고 싶어."
이번에는 윤대협이 울고 싶어질 차례였다. 절절히 이어지는 고백에 다른 내용은 없었다.
서태웅은 윤대협을 좋아한다.
윤대협은 어둠보다 또렷하게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울고 싶어졌다.
절대로 티내지 않는 대신에 윤대협은 서태웅을 있는 힘껏 껴안았다. 늑골이 눌린 뱀파이어가 흐억. 이상한 소리를 낼 정도로.
윤대협이 서태웅의 귓가에 속삭였다.
"서태웅. 알려줄게."
서태웅이 가만히 두 손을 윤대협의 등 뒤로 돌려 안았다.
"늑대인간... 수명이 있긴 있어."
너른 등 뒤로 돌아간 두 손이 꾸욱 맞잡혔다.
"비밀이니까 너만 알고 있어."
윤대협은 맞닿은 서태웅의 가슴팍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음미하듯이 천천히 속삭였다.
"뱀파이어랑 똑같아..."
서태웅의 혼신을 담은 보디 블로가 윤대협의 복부 한가운데 작렬했다. 윤대협은 침을 튀기며 쓰러졌다. 이번에는 정말 아팠다.
순간의 집중. 순간의 성장. 순간의 스포츠와 사랑과 행복.
서태웅은 태어날 때부터 영원을 가졌기에 두려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영원은 순간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법. 눈앞에 다가온 순간순간에 서태웅은 가장 재미있는 것에 백퍼센트 몰입했고 다음 순간의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불안하지 않았다. 무섭지 않았다. 피하기에는 밀려 올 미래가 영원이었다. 보이지 않는 끝. 서태웅은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지치지도 허무하지도 않도록 순간에 몰두할 줄 아는 존재가 되었지만. 두려울 이유는 없었다. 영원을 타고난 밤의 존재이므로.
그러나 서태웅도 무서운 게 있다. 윤대협을 잃는 것. 그럴 일이 없으니 다행이었다.
영원한 시간. 영원한 청춘. 영원한 스포츠와 사랑과 행복.
윤대협은 태어날 때부터 영원을 가졌기에 매달릴 게 없는 사람이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불운이나 자신만만했던 성취를 눈앞에서 놓치는 경험도 툭툭 털면 다 지난 일이었다. 영원이라는 아득한 미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잠깐의 감상. 윤대협은 그걸 소중히 여겼고 과몰입하면서 충분히 즐겼지만. 매일 필요는 없었다. 영원을 타고난 밤의 존재이므로.
그러나 윤대협도 절대로 놔줄 수 없는 게 있다. 서태웅.
물론 그럴 일이 없으니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