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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horts
2025.04.05

dust and ashes

불면의이쑤신

숨을 들이켜면 차갑고 건조한 먼지가 폐 안쪽에 달라붙는다.

센도 아키라 백작의 서재에는 벽난로가 없다. 반질반질한 마호가니 가구와 두툼하고 고풍스러운 양탄자가 회색 도시의 외풍을 막아주지만 그뿐이다. 한기를 느낄 때 서재의 주인은 가운이나 담요보다 술 한잔 걸치기를 선호했다. 낡은 책 속의 오래된 잉크가 풍기는 아늑한 향이 크리스털 컵에서 증발한 알코올의 톡 쏘는 향과 공중에서 섞인다.

둥그런 구조의 서재는 그 주인을 닮아 다재다능하고 어지럽다. 어린 시절부터 간직한 작은 피아노 한 대. 점잖은 색상의 길쭉한 벨벳 소파와 기역 자로 놓인 1인용 안락의자. 섬세한 나무 조각으로 장식된 중후하고 넓은 책상. 여러 겹의 책꽂이 속, 두터운 양탄자 위, 긴 소파 면적의 삼 분의 일, 소파에 세트로 딸린 발 받침 위, 그리고 드넓은 책상의 해안선 같은 테두리를 차지한 책. 책더미. 책의 성. 다 읽은 책과 외울 정도로 여러 번 읽은 책과 읽다 만 책과 펼치지도 않은 책. 여백의 공간을 잠식하듯 쌓여 있는 책 표지에 동그란 물 자국을 만들어 버린 술잔 여러 개. 굴러다니는 빈 술병. 아직 마시다 만 술병. 각각 여러 개. 그늘 속에서 음울하게 출렁이는 다양한 빛깔의 알코올. 잉크병과 펜과 쓰다 만 편지. 미처 채우지 못한 편지지와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그 사이로 지폐와 동전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닌다. 귀족들이 으레 그러하듯 센도의 주머니엔 언제나 돈이 남았다. 살 만큼 술을 사고 나서도 그랬다. 부랑자인 양 회색 도시의 찬 바람을 맞으며 서성이다 집에 돌아오면 버릇처럼 주머니를 굴러다니는 동전과 지폐를 아름다운 고가구 위에 성의 없이 쏟아 비웠다.

집에 들어오면 센도는 책상 앞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무언가를 읽거나 끄적였지만 대체로 마치지 못했다. 그나마 한 자리에서 끝까지 읽는 건 편지였다. 지금처럼.

펼쳐진 책과 쓰다 만 편지 사이로 오만 잡동사니가 흩어진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센도는 편지를 읽었다. 충직한 집사가 늦은 시간 은쟁반에 받쳐 온 편지. 밤 9시를 지난 캄캄한 하늘은 어차피 두터운 커튼에 가려져 있다. 주황색 가스등 불빛이 서재 한 가운데의 책상만 동그랗게 비춘다.

커다란 몸을 더욱 커다란 안락의자에 파묻고 앉아, 한 손에 턱을 괸 채로, 정중하지만 다급하게 휘갈겨진 글자를 바라보는 센도의 미간은 제법 심각했다. 가스등 불빛의 짙은 주황색 테두리가 센도의 미간에 잡힌 그림자를 은은하게 흔들었다.

편지는 그와 친분이 있는 귀족 D 부인에게서 온 것이다. 사교계의 어른, 존경받는 미망인, 오랜 가치와 질서를 수호하는 D 부인. 일주일 전, 수도의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스캔들은 D 부인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다름 아닌 그녀가 사랑하고 아끼고 귀여워하던 대녀가 주인공. 무려 사랑의 도피. 그것도 전장에 나간 번듯한 약혼자를 놔두고!

이번 편지도 그 사건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센도는 지난달 무도회에서 본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연과 가까운 교외의 영지에서 교회와 가정교사에 둘러싸여 보낸 어린 시절에서 졸업하고, 수도의 사교계에 처음 발을 디딘, 이제 막 10대를 벗어난 소녀의 어리고, 순진하고, 감정이 풍부한, 나이다운 허영심과 꿈으로 차오른 얼굴.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쟁은 저 멀리 어디선가에서 벌어지고 있다. 험준한 산맥과 만년설로 가로막힌 국경. 도시의 회색 하늘에 포격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황궁과 귀족들은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는 죽겠지만 자신들은 아니니까. 남자들은 밀수한 적국의 술에 취하고, 여자들은 수입된 보석과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나간다. 사교계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했다. 전쟁은 멀고 사치는 가깝다.

D 부인의 순진한 대녀는 멀끔한 외모와 여성을 속이는 말솜씨 외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남자와 만난 지 한 달 만에 야반도주했다. 국경을 넘어 대륙의 어딘가로 사라졌다. 두 사람은 어떤 작별도 남기지 않았다. 가족들 앞으로 두고 간 그 흔한 사죄 편지마저 없었다.

다만 그들이 두고 간 짐 속에서 수많은 연문이 발견됐다. 밀어가 가득한 편지를 태우지도 않은 것은 도저히 현명한 처사라 할 수 없었다. 남자는 거짓된 약속을 남발했고 여자는 모두 믿었다.

문제는 그 남자가 센도가 결혼한 여자의 남동생이라는 것이다. 일단은 친척이라고 할 수 있다. 경멸할 만한 친척이지만. 물론 센도는 자신이 결혼한 여자도 경멸한다. 센도 백작 부인도 부군인 센도 아키라 백작을 경멸해 마지않기 때문에 공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남자가 센도의 서재에서 훔친 수입 술 한 병보다 간직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모든 잡동사니를 잔뜩 버리고 간 장소도 다름 아닌 센도의 집이었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그 잡동사니를 손수 뒤져 문제의 편지 더미를 찾아내 D 부인에게 넘긴 것도 센도였다. 그 남자는 항상 센도의 술을 훔치고 푼돈을 꿔가곤 했다. 센도는 주머니를 비운다는 감각으로 건네주고 한 번도 갚으라고 하지 않았다. 하루의 마무리에 책상 위에 쏟아 놓듯이. 사람들이 알았다면 망나니 같은 게 센도 집안의 돈을 빼돌린다고 수군거렸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그의 누나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센도가 알기로 그 남자는 대륙의 여러 나라를 떠돌며 수많은 여자를 후리고 살았고 그중 셋 정도와 결혼했을 것이며 이혼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D 부인의 대녀는 법적으로 결혼할 수도 없는 남자를 위해 신세를 망친 것이다. 전쟁에 나간 번듯한 약혼자를 놔두고.

D 부인의 간곡한 편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대녀를 찾아 다시 설득해 돌아오게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부인이 센도에게만 이 민감한 일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인척으로서 센도에게 그 망할 놈을 제압할 명분이 있기 때문에. 또 하나는, 아마 이것이 보다 주요할 텐데, 센도 역시 백작 부인을 통해 가문의 불명예를 뒤집어쓸 위기에 처한 동지이기 때문이었다.

센도는 D 부인처럼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리라는 점을 이해했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센도는 누구보다 비상식적인 비밀을 안고 사는 사람이다.

편지를 쥔 손끝이 차가워진다. 센도는 다시 술병에 손을 뻗어 잔을 채운다. 크리스털 잔에 순도 높은 알코올이 굴러 들어가는 맑은 소리가 울린다. 한 바퀴 손에서 굴리면 작은 소용돌이가 가스등 불빛에 주황색으로 빛난다. 쭉 들이킨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익숙한 온기를 즐긴다. 취하고 싶어도 쉽지 않다. 부정하려고 해도, 억누르려고 해도, 가슴 깊은 곳에서 도저히 꺼지지 않는 저열한 기쁨 때문에...

누구에게도 이 기쁨을 들켜서는 안 된다. 센도는 숨을 깊이 들이켠다. 차갑고 건조한 먼지와 함께 평생을 간직할 비밀이 폐 안쪽에 달라붙는다. 은은하게 흔들리는 주황색 불빛을 따라 글자가 춤춘다.

센도가 선택한 여자는 백작 부인으로서 결코 좋은 평판을 듣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이혼을 당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의 사치와 허영과 수많은 애인들과 사교계에 막 데뷔한 어린 여성들에게 미치는 나쁜 영향은 신 앞에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했던 맹세를 깨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 정도의 도덕적 타락은 다른 모든 귀족 부인에게도 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스캔들은 다르다.

문제의 발단이 된 무도회에 D 부인의 대녀를 초대해 자신의 남동생에게 소개한 사람이 다름 아닌 센도 백작 부인이었다. 충격적인 결말에도 그녀의 직접적인 부추김이나 원조가 있었음을 알아낼 수 있다면... 야반도주 사건은 D 부인과 그 대녀에게는 불행이지만 센도에게는 훌륭한 이혼 사유가 되어 줄 것이다.

여기까지는 딱히 비밀이 아니다. 별로 들켜도 좋다. 번듯하고, 성격 좋고, 똑똑하고, 선량하고, 호구 취급에 가까운 백작 부인의 히스테릭한 언동에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던 센도 아키라조차 도저히 넘어가 줄 수 없는 심각한 추문. 나쁘지 않은 그림이다. 모두가 납득하고도 남을 것이다. 사실 사교계의 여론은 지금까지 부인을 제지하지도 맞서지도 쫓아내지도 않는 센도의 태도를 더 이해할 수 없다는 쪽이었다. 그런 센도의 태도가 오히려 부인의 경멸을 부추기거나 정당화하는 편이었다.

이제 센도에게는 백작 부인의 행실을 문제 삼고도 남을 충분한 권리가 생겼다. 그녀의 자존심이라면 아마 친정으로 돌아갈 것이다. 전성기는 지났을지라도 아직 아름답고 화려한 부인이라면 새출발도 가능하다. 이미 새로운 호구를 잡아 놨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이혼을 바라고 남동생을 부추겼을 수도 있다. 그러고도 남을 여자다. 서로 이득이 된다면 센도로서는 더욱 환영이다. 그런 여자를 적으로 돌리는 건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센도의 진실한 기쁨은 다른 이를 향한다.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된다.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긴장으로 혀가 마른다. 다시 술잔을 기울이게 된다. 그만큼 센도는 기쁘다. 그리고 초조하다. 차마 바라지 못한 사람. 그럼에도 간절했던 사람. 그래서 영원히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는 안전망이 되어주었던 사람.

또렷한 노크 소리가 세 번 들렸다.

"들어와."

센도는 집사의 조용하고 정중한 발걸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방문을 예정한 손님은 없었다. 그러기엔 늦은 시간이다.

그러나 침묵이 계속되었다. 조금 느려진 노크 소리가 세 번 더 이어졌다.

센도는 그제야 천천히 등 뒤의 서재 문을 돌아보았다. 밤의 어둠 속에 묵직하게 가라앉은 나무문 너머에 정체 모르는 방문자가 서 있다. 노크 소리만으로 기대를 품는다면 너무 뻔뻔한 일일까?

센도는 벌떡 일어나서 냉기를 뿜어내는 서재 문 앞에 섰다.

차가운 문고리에 닿은 손가락이 조금 떨린다. 피부 안에서 울리는 맥박 소리가 커진다. 일어날 리 없는 일에, 그래서는 안 되는 일에 설레는 심장이 부끄럽다.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센도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천천히 열리는 문틈으로 밤마다 그리웠던 눈동자가 서서히 시선을 올린다.

"헤이."

익숙한 목소리. 센도는 치솟는 감격을 가라앉히려 잠시 턱을 꾹 물었다.

각 잡힌 장교 제복 차림의 루카와 카에데 소공작은 위엄 없이 목을 부르르 떨더니 짧게 투덜거렸다.

"추워."

센도는 속절없이 웃었다.

경례 같은 것을 붙였다면 미쳐버릴지 모르는 센도의 아슬아슬한 정신 상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로도, 루카와는 센도가 가장 원했던 것을 준다.

센도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루카와는 묵묵히 그것을 마주 잡았다. 거칠어진 손바닥이 틈 없이 맞닿는 순간을 기다려, 그대로 잡아당긴다. 루카와를 마음껏 품에 안는다.

루카와의 군복 코트에서 차가운 흙냄새가 난다. 아마도 그건 전장의 흙먼지. 긴장을 풀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센도는 사양 없는 힘으로 루카와의 상체를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하얀 목덜미 안에서 멋없게 끄응거리는 소리가 났다. 많이 자란 뒷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센도는 소리 내서 웃었다.

그 소리가 너무 낯설어서 알았다. 루카와가 떠난 후로 자신의 웃음소리를 처음 들어 본다는 걸.


센도와 루카와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다. 나이는 센도가 여덟 살 많고 신분은 루카와가 더 높지만.

센도는 백작의 여러 사생아 중 한 명이고 루카와는 공작의 외동아들이다. 그래도 센도는 언제나 루카와를 동등하게 여겼고, 한 편 루카와는 센도를 맞먹다 못해 이기려 들었다. 승마도 사격도 사교댄스까지 전부 다 센도한테 배웠으면서도.

센도는 자신이 특별히 착한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도덕적이고 명예롭고 고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타락하거나 쾌락적이거나 천박하지도 않았다. 아직 무언가를 추구한 적 없는 순수한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위태로운 줄 몰랐다. 다만 루카와 곁에 있을 때면 꼭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센도는 그것이 기뻤다. 자연히 이끄는 역할로서, 가르쳐 주는 선배로서, 조금 더 능숙한 상대적인 어른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물론 루카와가 자신을 격의 없이 대하기 때문에 기꺼운 일이었다. 삼촌뻘이나 할아버지 취급을 했다면 김샜을 것이다. 다행히 루카와는 연상을 공경하는 마음이라고는 없는 귀여운 승부욕의 화신이었기 때문에 센도의 어린 날은 즐겁기만 했다. 그때 루카와가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선하고 명예로운 성격을 형성하며 자랄 수 있었다는 걸 센도는 아주 나중에 알았다.

센도는 전도유망한 귀족 청년이었고 루카와도 그랬다. 외모도 능력도 출중한 두 사람이 가깝게 어울리는 흐뭇한 모습을 귀족 가문의 인사들은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센도는 손아래 남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루카와는 내성적이지만 은근히 연상의 손을 타는 아이였기에 말하자면 꼭 맞는 짝이었다. 두 사람의 특별함은 다른 또래들이 다가서기 힘든 분위기를 형성했다. 자연히 짝을 이룬 채로 주변과 고립되었다.

형제가 있었다고 해도 그보다 더 붙어 다니긴 어려울 지경이었다. 센도는 돈만 안 받았지 거의 루카와의 가정 교사를 겸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장 좋아하는 책을 빌려주고 하루에 하나씩 시시한 승부를 겨뤘다. 땀으로 푹 젖어 누군가의 집으로 우당탕탕 굴러 들어가면 욕실로 내쫓겨 서로의 몸을 씻어 주었다. 눈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함께 있었다.

센도는 루카와가 얼마나 아름답게 자라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다.

어떤 위험이 싹틀 수 있는지 처음 깨달은 것은 루카와가 십 대 중반이고 센도가 이십 대 초반일 때였다.

유난히 뜨거운 늦여름날. 맑은 강가에서 엎치락뒤치락 물놀이를 하다가, 노곤해진 몸을 나무 그늘에 널어놓고 낮잠을 자기 시작했을 때.

센도는 눈을 감고 자는 척 몰래 옆자리에 누운 루카와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거대한 느티나무 이파리가 서로 부딪히며 흐르는 소리에 섞여 가만가만 들려오는 깃털 같은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낮잠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루카와의 숨결이 센도의 광대뼈에 직접 닿았다. 따스하고 습했다. 그 숨이 닿는 거리 덕분에 센도는 눈을 감고도 루카와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과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숨결과 숨결의 간격이 점차 빨라졌다. 강물이 마르며 온기를 앗아간 루카와의 차가운 손끝이 센도의 부드러운 입술 끝에 닿았다.

센도의 얼굴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불가항력이었다.

루카와가 짧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냈다.

숨소리가 멀어져 갔다.

거리가 확보되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려, 실눈을 뜨고 조심히 고개를 돌려 보자 루카와는 센도에게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푹 숙여 드러난 목덜미가 발그랗게 달아올라 있었다. 햇볕 한 점 없는 느티나무 그늘 안에서.

웅크린 루카와의 등을 바라보며 센도는 입안에 모인 침을 삼켰다.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났다. 루카와에게 들렸을까 봐 재빨리 자는 척을 했다. 센도는 루카와가 얼마나 아름답게 자라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다. 루카와가 사람에게 처음으로 욕망을 느끼는 순간에도 센도가 곁에 있었다. 마치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 가장 가까운 자리를 지켜 온 것처럼...

전신을 파도처럼 쓸고 지나간 격렬한 환희는 고스란히 죄책감이 되었다.

그날은 함께 씻지 않았다. 각자의 집에 돌아갔다.

센도도 루카와도 아무렇지 않은 척 여전히 일상을 함께 했지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분명한 신체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둘이서만 자연 속으로 뛰쳐나가 몸을 부딪치며 놀기보다, 사교적인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서로의 가족이 포함된 응접실에서 차를 마셨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럴 때가 되어서 한층 어른스러워진 친구 관계로만 보였을 것이다.

루카와가 있었기 때문에 센도는 보다 선하고 명예로운 자아를 형성하며 자랄 수 있었다.

루카와가 있었기 때문에 센도의 선하고 명예로운 자아는 스스로 목을 조르게 되었다.

하지만 센도가 끝내 금기의 선을 넘을 수 없었던 이유는 자기 자신을 망가뜨릴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루카와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루카와의 명예를 더 사랑할 뿐. 루카와와의 명예로운 관계를 더 사랑할 뿐. 가장 소중한 것을 제 손으로 망치는 것만은 죽어도 싫었다.

그날부터 센도는 누구보다 비상식적인 비밀을 안고 살게 되었다.

루카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순간의 충동이 지나간 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다시 정상적으로' 안정되었는지. 아니면 의식해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을 볼 때 센도와 비슷한 마음일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완전히 떠나지는 못한 채로 비밀을 안고 살고 있는지...

센도는 안전장치를 두고자 했다.

이십 대 중반에 센도는 수도에 두 달 정도 머물면서 가까워진 여자에게 청혼했다. 파티에서 만난 외국 출신의 하급 귀족 여자였고 그만큼 파티를 좋아했다. 화려하게 장식한 칠흑 같은 머리칼과 똑바로 마주해오는 불꽃 같은 눈동자와 오만방자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출신은 변변치 않았지만 돈이 많았다. 그만큼 씀씀이도 크다는 건 결혼 후에 알았지만. 집안에서는 그녀의 가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센도의 선택을 존중했다.

루카와는 한 번도 축하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센도는 비밀스럽게 그 사실에 기뻐했다. 그 기쁨은 고스란히 죄책감이 되었다.

신부 취향의 결혼식은 휘황찬란했으나 그 후의 결혼생활은 그렇지 않았다. 센도 백작 부인은 수도에서 계속 살고 싶어 했고 센도는 아니었다. 수도의 화려함은 센도를 금방 질리게 했다. 매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소박한 자연과 익숙한 얼굴과 루카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부인은 센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센도의 야망 없음을, 섬세함을, 검소함을, 중도를 지킬 줄 알고 결코 품위를 내려놓지 않는 고풍스러운 의미로서의 귀족다움을 결코 장점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경멸했다.

새 백작 부인은 한시도 젊음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반면 백작가의 재산은 낭비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신혼부부는 금방 섹스리스가 됐다. 젊은 신부는 사교계를 휘어잡고 다녔고 센도를 가끔 그럴듯한 액세서리로 옆구리에 차고 다녔다.

인내심이 훌륭한 센도는 한 마디 불평 없이 묵묵히 그런 생활을 견뎠다. 사람들은 그녀가 센도를 이용하고 있다고 욕했지만 실은 센도가 그녀를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문을 좋아하는 귀족들. 결코 입이 무겁지 않은 백작 부인. 사람들은 센도가 여자를 잘못 잡아 불행하다고만 여겼다. 책임감 때문에 그 불행에서 벗어나지도 못하는 바보처럼 성실한 사람인 줄 알았다.

다른 비밀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그러니까 결국 센도에게 그런 고통은 감내할 만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선택이 센도가 스스로에게 내린 벌일지도 모른다. 탐내면 안 될 것을 탐낸 벌. 소중한 것을 너무 소중히 여긴 벌. 곁에 있으면 안 될 사람 곁에 너무 오래 있었던 벌. 그러면서도 진실을 들킬까 봐 영원히 두려워하는 비겁자가 받아 마땅한 벌.

그러나 루카와는 센도가 조용히 벌을 받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다정한 친구였기에.

결혼한 지 서너 해가 지났을 때 센도가 마차 사고를 당했다. 다리가 부러져 밖에 나다닐 수도 없는데 곁에 있는 건 백작 부인뿐이라니. 부인의 히스테리가 극에 달하고 센도가 우울증에 걸리기 직전에 루카와가 수도로 왔다. 루카와는 부모님 댁을 놔두고 굳이 센도의 집에 머물더니 그대로 일 년 가까이 체류했다.

백작 부인은 결혼식 때부터 자신에게 쌀쌀한 루카와를 좋아하지 않았다. 집이 불편해진 데다가 환자로부터 해방된 그녀가 신나게 밖으로 나도는 동안, 센도는 어디서 한눈을 팔다가 이 꼴이 되었냐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불만을 퍼부으며 자신을 극진히 돌보는 루카와에게 찰싹 붙어 비로소 숨을 쉬었다.

이십 대 중반의 루카와. 신체와 인격이 성숙한 모습에는 십 대 때와는 또 다른 찬란함이 있었다. 누가 봐도 힘든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센도를 위해 고집스럽게 식객이 된 수완은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언제 이런 묵묵한 배려심을 배웠을까. 어느새 루카와가 어른이 되어 있었다. 마치 보호자처럼 자연스럽게 방문 간호사와 센도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센도를 문병하러 오는 연상의 귀족들과 정중한 태도로 인사와 편지를 주고받을 줄 알았다. 센도의 쾌차를 축하하는 파티에 참석한 여성들을 나무랄 데 없이 에스코트했다. 담배와 술잔을 든 또래 남자들로 둘러싸인 응접실에서 말수는 적어도 자신만의 의견을 확실하게 가지고 토론했다.

정치든, 예술이든, 역사에 관해서든, 논쟁이 붙을 때마다 루카와는 아이처럼 단순하고 확실한 원칙을 밝혔고 거기서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루카와의 원칙 자체는 지극히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에 어긋나지 않았지만 결론적으로는 지나치게 흑백론인 경향이 있었다. 그런 태도는 때로 오만으로 비추어지기도 했지만 루카와의 반듯한 턱선과 단호한 눈빛과 그림 같이 잘 어울렸다. 루카와는 부정할 수 없이 조화로운 청년이었다. 루카와를 마뜩잖게 생각하는 사교계 또래 청년들의 시선에는 열등감과 두려움과 경탄이 섞여 있었다. 주로 남자라는 생물이 부정할 수 없이 자신보다 잘난 남자에게 보내는 시선이었다.

센도 앞에서는 여전히 아이 때처럼 툴툴거리고, 눈썹을 치켜뜨고, 대놓고 백작 부인을 욕하고, 예의 없이 늘어져라 하품을 하지만.

센도만이 루카와의 완벽한 균형이 어긋나는 순간을 알았다. 훨씬 더 아이 때를 그대로 간직한 모습을 알았다. 고집쟁이지만, 솔직하고, 연상을 선뜻 잘 따르는 순진한 모습을 알았다.

그런 식으로 오직 센도가 포착할 수 있는 편린에만 어린 시절을 남긴 채 루카와는 어른이 되어 간다. 새 계절에 솟아난 여린 잎처럼 막 성인으로 피어난 루카와를 음미하다 센도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루카와가 처음으로 자신을 만질 뻔했을 때. 그 젊은 나날에. 돌이켜 보면 센도만 루카와가 얼마나 아름답게 자라는지 보고 있었던 게 아니다. 루카와도 인간으로서 완성되어 가는 센도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루카와도 센도만큼이나...

그런 가정법이 센도를 사로잡을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센도는 책으로 도피했다. 부러진 다리는 두 달 정도 좋은 핑계가 되어주었다. 서재에 틀어박힌 생활은 생각보다 좋았다. 소파에 길게 누워 팔걸이에 불손하게 발목을 겹쳐 올린 채로 졸고 있는 루카와만 있으면 완벽했다. 루카와는 새 책을 사 와 달라는 심부름에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고, 다리가 다 나은 후에는 매일 같이 센도와 함께 서점에 들러주었다.

센도는 도피에 박차를 가했다. 루카와가 새로 사 온 책까지 끝내 더 이상 읽을 게 없으면 같은 책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었다.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대학교수들과 편지를 주고받고 요청이 있으면 신문에 기고했다. 너도 언젠가 책을 쓰게 될 거라고 루카와는 예언가처럼 장담하곤 했다. 센도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고 웃어넘겼다. 아랑곳하지 않고 루카와는 언젠가 학생들이 네가 쓴 책으로 공부하게 될 거라고 기정사실인 양 주장했다. 늘 그렇듯이 오만하게 단언했다. 센도는 웃었다. 루카와가 그렇게 계속 자신을 우러러본다면 책 정도야 백 권이라도 쓸 수 있었다.

센도는 수도에서 가장 똑똑하고, 선량하고, 그럼에도 여자를 잘못 만나 고생하는 남자로 평판을 굳혔다.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서 문제라는 소문과 함께. 소문의 내용은 대체로 진실이었으나 루카와가 온 후로는 그다지 고생이랄 것도 없었다.

센도는 행복했다. 이대로만 해 나갈 수 있다면 비밀을 간직한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전쟁이 터졌다.

루카와는 당장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부모님의 권유로 다섯 살 어린 또 다른 백작가의 소녀와 약혼했다. 이제 막 십 대 후반이 된 그 소녀는 가문이 좋고 보기에도 예쁘장했고 성격도 순수했다. 어린 시절에 스쳐 지나가며 얼굴을 익혔던 루카와 카에데 공자에게 오랫동안 동경을 갖고 있었기에, 곧 전쟁에 나가야 하는 루카와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순진하게 청혼에 응했다.

센도는 부상 기록과 나이와 기혼이라는 사실 때문에 전쟁에 나갈 수 없었다.

센도는 하루하루 망가지기 시작했다.

루카와를 볼 수 없는 채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까만 밤을 새우고, 다시 햇볕이 누렇게 서재 안에 쌓여 가는 그 모든 나날 동안 센도는 망가지고 있었다. 술과 책과 가끔씩 피아노에 빠져 살았다. 체념한 듯한 미소나 자조적인 농담 말고는 별로 할 말이 없어 사교적인 자리를 최대한 피했다.

도시의 모든 귀족이 센도가 불행하다는 걸,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 이유는 잘못 짐작했다.


그런데 오늘 밤. 루카와가 돌아온 것이다.

약혼녀의 배신 덕분에.

루카와가 다시 센도의 서재 안에 있다. 정중한 집사도, 언제나 불만에 가득 찬 백작 부인도, 소문을 좋아하는 손님들도 결코 들어올 수 없는 센도의 유일한 안식처에 루카와가 있다.

센도는 루카와를 소파에 앉혀 놓고 잠시 방을 나갔다.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서둘러 멀어진다.

혼자 서재에 덩그러니 남은 루카와는 주인이 떠난 공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은 집에서 일 년을 살았기 때문에 루카와는 센도가 이 공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보기에 센도의 서재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엉망이었다. 루카와가 떠날 때는 없었던 것들이 많았다.

책이 늘어날 것은 예측했다. 그러나 센도는 결코 책을 함부로 하는 편이 아니었다. 방구석에 끝없이 쌓아 놓더라도 나름의 질서를 유지했다. 가끔 루카와가 책에 집이 잡아먹히는 감각이 싫어 닥치는 대로 책꽂이에 집어넣기 시작하면,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잔소리를 하면서 못 이기는 듯 정리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펼쳐진 채로 바닥을 굴러다니거나 먼지가 쌓이도록 놔두지 않았다.

가장 눈이 오래 머무른 것은 술병들이었다. 백작가의 충직한 집사는 게으름을 모른다. 센도가 방을 비울 때마다 빈 술병을 모두 정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양이 책상 아래, 소파 아래, 쌓인 책 사이를 굴러다닌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센도가 오랫동안 방에 처박혀 있었다. 또는 그만큼 센도가 술을 많이 마신다.

구겨진 종이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것도 보였다. 이 역시 집사가 기회를 포착했다면 진작 사라졌을 것이다. 무엇의 초안이었을까. 책? 편지? 루카와는 구겨진 종이 뭉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충동적으로 펼쳐보았다.

종이 꼭대기에는 자신의 이름과 딱 한 단어가 쓰여있었다.

루카와 카에데 중위 겸 소공작에게.

쾅쾅쾅, 조용한 집안을 흔드는 시끄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노크가 아니었다. 서재 문을 발로 차는 소리였다. 루카와는 자신이 이름이 적힌 종이를 접어 코트 주머니에 넣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서재의 주인이 생긋 웃고 있었다. 품 안에 물이 가득한 대야를 들고.

"물을 데우느라 시간이 걸렸어."

센도는 성큼성큼 걸어가 루카와가 앉아 있던 소파 앞에 커다란 대야를 내려놓았다. 그 광경을 황당하게 바라보며 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루카와를 재촉한다.

"뭐해? 빨리 앉아."

"손님 대접이 엉망이군."

루카와는 투덜거리면서 소파로 향한다. 센도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기껏 지친 말을 바꿔 가며 쉬지 않고 달려 탈영하듯 귀성해 부모님 댁보다도 먼저 찾아왔는데. 혼자 두고 나가버리다니. 웬 물을 잔뜩 받아오느라고.

"그런 건 하인을 시켜도 되잖아."

"아니. 내가 하고 싶어. 빨리 앉아."

루카와는 항의의 뜻으로 일부러 품위 없이 털썩, 큰 소리를 내며 앉았다.

옆에 앉을 줄 알았던 센도가 양탄자 위에 무릎을 꿇는다. 깜짝 놀란 루카와가 반사적으로 센도를 일으키려고 손을 뻗었다. 센도는 그 두 손을 부드럽게 모아 잡아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촉촉한 가스등 불빛이 일렁였다.

"손님 대접 제대로 해 줄 테니까. 얼마 만에 찾아 주신 귀빈인데."

얼마 만이지? 일 년 만인가? 팔 개월? 전쟁은 시간 감각을 무디게 한다. 그렇게 오래. 여기에 있지 못했다. 센도를 보지 못했다.

센도의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갑자기 한꺼번에 밀려드는 공백의 실감에 압도된 루카와가 순순히 센도의 명령을 따라 움직임을 멈췄다. 센도가 힘을 실어 밀어주는 대로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 센도는 그러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사람을 순종하게 하는 힘이 있었고 루카와는 어릴 적부터 그것에 전력으로 반항해 왔지만. 이번에는 이길 수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마주한 눈동자라 그런지.

센도가 루카와의 왼쪽 다리를 조심스럽게 대야 옆으로 들어 올린다. 엉망이 된 군화 바닥에서 진흙이 후두둑 떨어져 센도의 실내복을 더럽힌다. 루카와는 눈썹을 찌푸리지만 센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종아리 뒤로 손을 뻗어 단단한 부츠 버클을 풀어낸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센도가 기다란 가죽 부츠에서 루카와의 날씬한 종아리를 뽑아낸다. 두터운 양말을 살살 굴려 벗겨낸다. 루카와의 길쭉한 발날을 조심스럽게 받친 센도가 천천히 두 손을 대야 안에 담근다.

따끈한 수면이 발바닥의 연한 살에 닿는 순간 흠칫, 루카와가 어깨를 떤다. 발끝에서 시작된 온기가 전신으로 서서히 퍼져 나간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려놓는다.

센도가 씨익 미소 짓는다. 루카와는 그 만족스러운 표정에 괜히 부아가 치밀어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센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껏 루카와의 발을 씻어낸다. 부드럽게 발목부터 쓸어내리다가 마사지하듯이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어 누른다. 찰박찰박 조그맣게 물소리가 들린다.

루카와에게는 센도의 집중한 머리꼭지밖에 보이지 않는다. 루카와의 피붓결을 타고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떨리는 손끝. 그 떨림이 닿을 때마다 아까 본 단어 하나가 센도의 집중한 머리꼭지에서 튀어나오는 것 같다. 그리운. 루카와는 무심코 입에 담아 버렸다.

"그리웠어. 아키라."

센도는 딱 굳은 것처럼 두 손을 멈춘다.

센도가 고개를 들지 않는다. 루카와는 조금 후회했다.

센도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조심스럽게 왼발을 내려놓고, 오른 다리로 손을 뻗는다. 아까처럼 정중하게 진흙투성이 군화를 쭉 벗긴다.

"전장에선 아무래도 따스한 물에 발 씻을 시간은 없겠지. 제대로 씻기나 했어? 약혼녀도 두고 갔으니 이런 걸 해 줄 사람도 없었을 테고."

"전장은 오지가 아냐. 귀족의 품위를 유지할 정도는 돼."

"다행이네. 루카와 공작 가의 하나뿐인 후계가 꼬질꼬질하면 완전 나라 망신이잖아. 넌 땀이 많이 나서 이틀만 안 씻어도 냄새가..."

"닥쳐."

루카와가 왼발로 살짝 수면을 차올려 센도에게 물을 튀긴다. 센도는 얼굴을 올려 물방울을 피하면서 짧게 소리 내서 웃는다. 드디어 구김 없는 표정이 보인다. 머리꼭지가 아니라. 그제야 루카와는 내심 안도한다. 이번에는 모른 척할 수 있었다. 굳이 그리웠던 대상을 바로잡아주지는 않았다. 루카와도 이제 그 정도는 어른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자연스럽게 몸이 노곤해졌다. 루카와는 어깨에 힘을 풀며 목을 뒤로 기댔다. 높은 천정을 향해 짙어져 가는 주황색 어둠을 향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센도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좀 잘래?"

"아니."

"자도 괜찮아. 아니 자고 가. 늦게 왔잖아."

"자고 갈게. 지금은 아니야."

센도가 보드라운 수건으로 루카와의 발을 감쌌다. 정성스럽게 물기를 닦아내고 실크 슬리퍼를 신겼다.

센도는 바빴다. 벌떡 일어나 대야를 문가로 치웠다. 루카와를 둘러싼 소파 위의 책더미를 우르르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그다음 슬리퍼를 신은 루카와의 발목을 하나씩 집어 들어 소파 팔걸이에 겹쳐 올려놓았다. 루카와는 영문을 모르고 잡아끄는 대로 소파에 길게 눕게 되었다. 항상 이 방에서 있던 모습 그대로.

센도는 루카와의 머리맡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소파와 기역 자로 놓여 있어 루카와가 자는 동안 책을 읽기 좋아하던 센도 전용 의자였다. 그때와 달리 책을 집어 들지는 않았다. 팔걸이에 턱을 괸 채로 루카와를 바라본다. 루카와도 잠을 자지 않고 센도를 올려다본다. 만족이 가득한 센도의 얼굴이 부드럽게 웃고 있다. 루카와는 눈을 깜빡이며 어둠 속의 그 얼굴을 최대한 기억 속에 새기기 위해 노력한다.

"졸리면 무리하지 마. 정말 자도 되는데."

"자러 온 거 아니야."

"그럼 왜 왔어? 생존 신고?"

"그건 편지했잖아."

"네 편지보다 네가 더 먼저 도착했어."

루카와가 어깨를 으쓱했다. 센도는 전장의 루카와에게 삼일이 멀다 하고 편지를 보냈다. 루카와의 가족보다도, 약혼녀보다도 더 많이 편지를 썼다.

루카와에게서 그만큼 자주 답장이 오진 못했다. 한 달에 많으면 두 번, 간신히 한 번. 거를 때도 있었고 두 통이 한꺼번에 도착할 때도 있었다. 전쟁은 멀었고 편지는 느렸다. 어쨌든 센도의 마음보다는 훨씬 느렸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편지만 쓰기도 했다.

분명히 일상을 전하려고 시작한 편지인데 두 장 정도를 넘어갈 때부터 어느새 결코 토해낼 생각이 없었던 많은 감정으로 덕지덕지 얼룩져 있었다. 도입부에선 일부러 차분하고 관조적인 태도로 루카와가 없는 수도의 지루함과 백작 부인의 여전함을 비웃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센도를 포함해 전쟁에 나가지 않은 귀족들이 얼마나 비겁한지, 당당하게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고 맞서고 있는 루카와가 얼마나 부러운지, 얼마나 그리운지, 얼마나 걱정되는지, 그게 어떻게 센도를 미치게 하는지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센도는 멈추지 못하고 쓰고 싶은 대로 몇 장이고 가득 채웠다. 내면과 직접 연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펜촉이 닳도록 손을 멈추지 못했다. 한바탕 다 토해내고 나면 그대로 책상 서랍에 처넣고 새로운 종이를 꺼냈다. 적을 수 있는 내용만 뽑아내어 다시 적어 보냈다. 센도의 책상 서랍은 지금도 루카와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 뭉치로 가득 차 있다. 어떨 땐 첫머리에 무심코 뱉어 낸 글자가 지나치게 진심이라서, 단어 하나의 무게를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구겨버린 적도 있다.

"다친 데는 없어?"

"난 후방 부대야. 여러 번 얘기했잖아.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하지 않다고..."

"전쟁에 나가 봤어야 알지. 나처럼 몸도 성치 않은 뒷방 늙은이가 뭘 알겠어. 책으로나 읽었지."

"그 얘기도 했어."

"편지로."

"그래. 편지로."

"말로도 물어보고 싶을 수 있잖아."

"맘대로 해."

"맘대로 하고 있는데?"

루카와가 눈을 위로 크게 홉떴다가. 이내 질렸다는 듯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센도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참을 수 없이 미소 지었다. 언제 답장이 올 지 모르는 편지와 비교할 수 없는 시시껄렁한 대화.

바로 이런 게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센도는 루카와가 전선에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고 영원히 실패했다.

루카와의 곧은 등과 단단한 어깨가 이 더럽고 흥청망청한 귀족 사회에서 벗어나 명예롭게 사선에 서 있다는 사실이 벅찰 정도로 자랑스러운 동시에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 언제든 이름도 얼굴도 출신도 모르는 적군의 총칼에 루카와가 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거기서 루카와를 빼내 오는 일은 루카와를 향한 센도의 감정만큼이나 불명예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무엇보다 루카와가 원치 않는 일임을 계속해서 상기하는 것은 더없이 고통스러웠다.

정반대로 센도는 자신이 혐오하는 더럽고 흥청망청한 귀족 사회의 일부였으며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술과 칩거로 더욱 완전한 적응력을 뽐내고 있었다. 센도가 한때 이룰 수 있었던 지적인 성취나 의미 있는 집필은 도저히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그럴 자격을 잃은 것 같았다.

루카와를 잃고서 센도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루카와가 전쟁에 나간 동안 홀로 수도에 남았다는 죄책감은 루카와를 사랑하는 죄책감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센도를 망가뜨렸다. 그건 아주 여러 겹의 죄책감으로 구성된 사슬이었다. 루카와를 잃고 싶지 않은 이기심에 대한 죄책감. 혼자서 안전한 곳에 남았다는 죄책감. 그럴 자격이 점점 더 없는 못난 어른으로 늙어 가면서도 여전히 루카와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

타락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백작 부인와 그 남동생과는 달리 센도에게는 양심이 남아있고 그래서 매 순간이 괴롭다. 그건 루카와와 함께 자라면서 센도 안에서 형성된 선을 향한 추구심이었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기실 이제 와서 벗어날 수 있는 종류의 굴레라기보다도 센도가 센도일 수 있는 내면의 핵심 중 하나라고 봐야 한다.

문제는 그 양심과 영원히 충돌하는 루카와에 대한 욕망이다.

하지만 그 역시 센도가 센도일 수 있는 내면의 핵심 중 하나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종류의 굴레이자 축복이다.

여러 번 정제를 거쳤음에도 결과적으로 일상을 낱낱이 보고하는 센도의 섬세하고 긴 편지에 비해 루카와의 답장은 언제나 간결했다. 먼저 살아있음을, 다음엔 건강함을 알렸다. 군사 기밀에 해당하는 승전이나 패전, 또는 막사 생활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센도가 시시콜콜 적은 일상에 대해 짧게 코멘트를 남겼다. 너무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고 불가능한 주문을 했고, 센도의 건강을 챙기라는 잔소리를 했다.

집사가 정중하게 들고 온 은쟁반 위에 그 간결한 답장 대신 전사 부고가 놓여 있는 미래를 생각하면 센도는 언제고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런 불면에는 약이 없었다. 진탕 취해야만 했다. 잠들어도 꿈꾸지 않기 위해서.

부고 대신 실물이 도착한 감격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센도는 안락의자 팔걸이에 턱을 괸 채로 루카와의 얼굴을 질리지도 않고 내려다보았다. 가스등의 어렴풋한 주황색 불빛이 루카와의 날렵한 턱을 감싸고 날씬한 콧날 옆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실크 같은 빛무리에 은은하게 감싸인 루카와의 얼굴에는 상처가 없다. 큰 부상을 당한 적도 없다. 후방 부대라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아무리 잠깐이라 해도 병영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루카와가 최전선이 아니라는 증거다.

최대한 모른 척하고 있지만. 사실 센도는 루카와가 왜 돌아왔는지 알고 있다. 최소한 충분히 짐작했다.

루카와가 그 얘기를 먼저 꺼내기 전까지 다른 얘기만 한 건 기다려 준 게 아니다. 센도의 어리광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루카와를 독차지하고 예전처럼 시시껄렁한 티격태격이나 주고받고 싶은 비겁한 마음이었다. 가장 그리웠던 걸 가장 먼저 하고 싶은 탐욕이었다.

하지만 루카와는 망설임이 없다. 금방 본론을 꺼냈다.

"그녀는..."

루카와가 잠깐 말을 멈췄다. 센도를 바라보던 시선이 살짝 아래를 향했다. 루카와는 무언가에 대해 집중해서 생각하거나 말을 고를 때 시선을 내린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두터운 속눈썹의 매끈한 윗면이 보였다. 눈앞에서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루카와의 모습에 센도는 조용히 턱을 물었다.

루카와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도 편지를 보냈어. 네 편지가 도착하기 하루 전이었어."

"뭐라고 썼어?"

누워 있던 루카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 팔을 걸치고 상체를 약간 구부정히 앉은 채로 센도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더 이상 나를 기다릴 수 없다고. 제발 자신을 잊어 달라고. 약혼을 파기하고 싶다고 했어."

약혼 파기.

그리웠던 입술이 내뱉은 달콤한 단어가 악마처럼 센도의 목을 조른다. 센도는 숨을 쉬기 위해 루카와 몰래 마른침을 모아 삼켰다.

센도는 잠시 침묵했다.

약혼녀의 야반도주를 알자마자 센도는 루카와에게 급히 편지를 보냈다. 일주일 전의 일이다. 루카와는 그걸 받자마자 출발했을 것이다. 한 인생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혼인 역시 전쟁만큼 중요한 일이기에 상관의 허락을 받아 탈영하여 지금 센도의 눈앞에 있는 것이리라. 어쩌면 사정 모르는 루카와의 상관으로서는 총을 쥔 젊은 소공작이 전선 한 가운데서 정신적인 붕괴를 겪어 날뛰기 전에 급히 달래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약혼녀의 야반도주 소식은 일반적으로 그 정도의 충격을 준다.

결국 D 부인과 대녀에게, 그 약혼자인 루카와에게, 심지어 황제의 군대 기강과 병력의 관점에서도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오직 센도만이 이득을 취하고 있는 셈이었다. 센도는 그 저열한 기쁨을 감추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센도가 천천히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카에데."

루카와는 망설이지 않았다. 오만하다고 불릴 정도로 새카만 눈동자는 이미 정답을 정해 놓고 있었다.

"약혼은 끝났어."

"아직 어린 소녀잖아. D 부인은 그녀를 찾아낼 생각이래. 오늘 편지를 받았어."

센도가 책상 위에 흩어진 종이를 고갯짓으로 가리킨다. 루카와는 그 방향을 일별하지도 않았다.

"찾아내면 설득할 생각이래. 나에게 처제에 해당하는 그 망나니를 맡기고 싶다는군. 그들을 백작가에 들인 사람으로서 책임질 일이 있다면 나서야겠지만... 난 너의 의사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답장하려던 참이었어."

"그럼 내 의사를 전하면 되겠네."

루카와는 단호했다. 언제나처럼.

센도가 사랑하던 모습 그대로.

"약혼은 끝났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거야."

가차 없는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어 실제보다 더욱 차갑게 들렸다.

센도는 루카와가 상처받지 않았음을 알았다. 부도덕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그럼에도 센도는 굳이 어른이라면 할 만한 말을 덧붙인다. 루카와만큼이나 담담한 태도로.

"그녀가 네게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면?"

루카와의 시선이 다시 내려갔다. 생각을 하거나 말을 고를 때 늘 그랬듯이. 평소에 볼 수 없는 두터운 속눈썹의 매끄러운 위쪽이 보이고. 위 뺨에 은은하게 그림자가 졌다. 부도덕하게도 센도는 자신의 마음에 초조함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느꼈다.

마음을 정한 루카와가 다시 시선을 들어 오만하고 맑은 시선을 부딪쳤다. 언제나 시선을 모으는 아래 속눈썹이 존재감을 되찾았다.

"약속을 깬 건 용서할 수도 있어. 하지만 깨진 약속을 되돌릴 순 없어."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원칙주의적인 선고를 내렸다. 자신보다 연하이고 성정이 나약하며 경험이 부족한 소녀라고 할지라도. 루카와는 가여워하거나 정상 참작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 잔인한 반응이 무엇보다 기뻤다. 부도덕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센도는 농담을 던졌다.

"너무 어린애를 골랐던 네 책임도 있는 거야. 일 년도 기다리지 못했잖아."

루카와는 한 번 더 어깨를 으쓱였다.

"순수한 애였어. 너도 알잖아."

"순수한 애가 도시물이 드니까 무섭더라..."

센도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너처럼?"

루카와는 웃지도 않고 그런 농담을 한다. 센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그래. 그리고 너처럼."

"난 도시 싫어."

"나도 싫어."

"거짓말."

네가 없는 도시는 싫어. 센도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한 입술을 벌린 그대로 활짝 웃었다. 루카와는 물끄러미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상처받으셨을 거야."

"음... 솔직히 어쩔 수 없는 점도 있어. 아들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기필코 짝을 지어놓겠다는 공작님의 고집 때문에 한때 순수했던 소녀 역시 피해자가 된 면도 있다고 보는데. 물론 결과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선택이었지만."

"그건 용서 못 해."

길게 드리워진 까만 앞머리 사이로 날카롭게 빛나는 루카와의 눈동자. 센도는 무심코 감탄했다.

"아깐 별로 화난 것 같지 않았는데... 약혼 파기 때문에."

"가족이니까."

"그래. 넌 가족이 상처 입는 건 절대로 못 참지."

네가 상처 입는 것도. 루카와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한 입술을 이미 다물려 있는데도 한층 더 꼭 물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기특하다는 듯이 빙그레 웃는 센도의 얼굴 앞에서 루카와는 말을 참았다.

센도는 루카와가 어떤 마음으로 전쟁에 나갔는지 모른다.

만난 지 오래되어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소녀와의 약혼은 어쩌면 자식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불안 속에 남겨진 부모님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인 속박일 뿐이었다. 성격이 밝고 순수해 혐오감이 없는 아이로 기억하기에 순순히 부모님의 뜻을 따랐다. 사실 부모님은 루카와가 약혼을 거부하고 입대를 포기하는 편을 훨씬 더 바라셨을 것이다.

루카와는 지켜야 했다. 수도를. 가족을. 센도를.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승패의 소식조차 닿을 듯 말 듯한 먼 곳에서 초조하게 손을 놓은 채로 적군이 눈앞에 오는 것을 기다릴 순 없었다. 가족의 안전은 타인의 손에 맡겨 놓고 맘 놓을 수 있을 만큼 하찮지 않았다. 제 손으로 지켜야 했다.

그게 다였다. 센도가 마차 사고를 당해 다리가 부러졌을 때는 옆에 있으면서 그걸 지켜보기만 했던 백작 부인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 결과 센도가 전쟁에 나갈 수 없게 되자 처음으로 그 여자를 향한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 이기적인 여자의 손에 센도를 두고 가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이것만큼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다. 루카와가 지켜야 했다.

"아키라."

루카와의 부름에 센도가 눈을 마주한다. 루카와는 정말이지 센도가 상처 입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다시 전장으로 떠나기 전에.

"이혼할 거야?"

센도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루카와는 이 질문 자체가 센도를 상처입힐 수 있음을 잘 알았다. 백작 부인을 싫어하면서도 지금까지 센도의 결혼에 대해 가타부타 말 얹지 않은 이유다. 세간의 소문 좋아하는 귀족들이나 다름없이 센도의 결혼 생활을 가볍게 입에 담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루카와는 센도에게 함부로 하는 인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센도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다시 머리꼭지만 보였다. 루카와는 조금 후회할 뻔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루카와가 돌아올 곳은 여기밖에 없다. 센도의 옆에 계속 그 천박한 여자를 놔둘 수는 없다. 그 여자의 남동생이 친 사고 때문에 센도까지 추문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고도 별다른 제지 없이 내버려둔다면 뻔뻔하게 활개 치고 다니고도 남을 여자다. 루카와가 없는 동안 수도의 한가한 귀족 양반들이 센도의 평판에 흠집을 내며 뒤에서 수군대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루카와는 한참 동안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도 센도의 머리꼭지가 올라오지 않았다. 루카와가 낮게 재촉했다.

"아키라."

센도가 관자놀이를 긁으며 고개를 조금 올렸다. 왠지 머쓱해하는 얼굴이었다.

"고민 중이야."

"뭘 고민해."

"다시 한번 기회를 줄 수도 있잖아."

"진심이야?"

"네가 너무 단호한 거야. 보통 사람들은 망설인다고. 결혼은 그렇게 끊어내기 쉬운 약속이 아니란다."

분노한 루카와가 턱을 당기고 센도를 노려본다. 한층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앞머리 아래로 번뜩이는 눈동자. 또렷한 아랫속눈썹이 각도 때문에 더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센도는 자신을 위해 분노하는 루카와가 사랑스러웠다. 숨겨야 하는 설렘이 심장 안쪽을 쾅쾅 두들겨서 아팠다.

"내 핑계 대."

루카와가 입을 열었다.

"내 핑계를 대라고. 가장 친한... 친구의 명예를 망쳤으니까. 책임을 물어서. 이혼한다고 해."

센도의 심장이 요란하게 무너져 내린다.

항복이다. 망가진 가슴을 감추려고 센도는 힘없이 웃는다.

"그럼 그럴까?"

루카와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센도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와는 만족스럽게 턱을 치켜올렸다. 어릴 때처럼 검지 손가락으로 턱 아래를 긁어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센도는 루카와의 손등을 살짝 잡았다.

"고마워."

루카와의 손등은 따스했다. 내내 실내에 있던 센도의 손끝이 훨씬 차가웠다. 언제 다시 만져 볼 지 모르는 루카와의 손등. 자신을 위해 차가워지고 나를 위해 뜨거워진다. 센도는 쉽게 손을 떼지 못했다. 왠지 루카와의 눈도 마주 볼 수 없었다.

"정신 차려. 술 그만 마시고."

다행히 루카와의 대꾸는 평온했다. 센도는 킥킥 웃었다. 웃지 말라고 루카와가 협박을 몇 마디 건넸다. 센도는 더 큰 소리로 킥킥 웃었다.

루카와가 뺨을 잔뜩 구기고 작은 입을 세로로 벌리며 하품을 했다.

"내일... 다시 가야 해."

센도는 그제야 루카와의 손을 놓고 벌떡 일어났다.

"손님방에서 잘 거지?"

"여기가 좋은데."

루카와가 슬리퍼 신은 발목을 소파 팔걸이에 겹쳐 올렸다. 센도가 그 발목을 모아 잡고 다시 원위치로 내려놓았다. 타이르듯 다정한 명령을 건네면 여독과 졸음에 한층 느려진 반항이 뒤따른다.

"추워서 안돼. 소파가 좋으면 거실로 가. 벽난로 앞에."

"싫어. 그 여자가 아침에 나오잖아."

"집 나간 지 며칠 됐어."

"내일 다시 들어오면."

"알겠습니다. 순순히 손님방으로 가시면 되겠네요. 중위님."

루카와가 다시 한번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한쪽 눈을 비비면서 어기적 일어섰다. 포기한 모양이었다.

루카와는 손님방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다. 센도는 루카와의 흙투성이 군화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뒤를 따랐다. 손님방을 준비하고 복도에서 대기하던 집사에게 루카와의 군화를 맡기고 서재의 가스등과 촛불을 끄라고 지시했다.

손님방이라고 말하지만 그 빌어먹을 놈의 처제는 이 방에서 잔 적이 한 번도 없다. 집은 쓸데없이 넓고 애는 없으니 방 개수는 충분했다. 루카와가 알고 있는 손님방은 루카와가 일 년 정도 살았던 방이고, 루카와와 센도 외에 아무도 그 방에서 잔 적이 없다. 센도는 루카와가 입대한 이후 가끔 그 방에서 잤다.

방에 딸린 욕실에 루카와를 넣어 놓자 센도는 할 일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굳이 방에 가지 않고 침대에 앉아 루카와를 기다렸다.

묘한 기분이었다.

잘 지낸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따스한 물은 오랜만이었는지 루카와는 꽤 오랜 시간 씻었다. 집사가 욕실 안에 잘 정리해 둔, 이 집에 항상 상비된 자신의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나오는 루카와의 몸에서 따끈한 김이 아른아른 솟아올랐다.

어기적 다가오는 루카와의 걸음에 맞춰 센도가 거위털 이불을 들춰주었다. 루카와는 가물가물 감기는 눈으로 센도를 흘끗 째려보고 얌전히 그 자리에 누웠다. 아마 어릴 때 해 주던 버릇에 대한, 애 취급하지 말라는 항의였을 것이다. 센도는 방심한 사이 또 웃고 있었다.

베개에 흩어진 루카와의 까만 머리털이 촉촉하다. 센도는 이불을 가다듬어 루카와의 하얀 목까지 단정하게 덮어주었다. 편안히 감은 눈꺼풀에 드리운 앞머리를 살짝 옆으로 넘겼다. 잘 자라고 말하기도 전에 루카와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낸다. 보송한 거위털 이불에 얌전히 싸인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린다. 뽀얗게 씻어낸 하얀 얼굴이 은은하게 달빛을 반사했다. 센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잘도 잤다.

센도는 한참을 앉아서 루카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정이 지난다.

해가 뜨면 루카와는 센도를 떠난다. 다시 목숨을 걸고 전장에 선다. 지금은 후방 부대이지만, 적군의 침공이 거세지고 아군이 후퇴하면 언제든지 최전선이 될 수 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

센도는 결심한다.

가만히 루카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한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게 된다. 그러나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오래 참을 수 없다. 훅 뿜어버린 날숨 때문에 루카와의 뽀얀 뺨을 얇게 덮고 있는 솜털이 보드랍게 물결친다. 센도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낀다. 십여 년 전 어떤 늦여름날처럼, 루카와의 숨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린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크게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떨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센도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루카와의 입술을 향해 뻗다가... 거두어들인다.

단 한 번의 기회만 허락된다면.

센도는 훨씬 더 조심스럽게 얼굴을 기울인다.

잠든 루카와의 살짝 올라간 윗입술에 자신의 윗입술을, 약간 벌어진 아랫입술에 자신의 아랫입술을 살그머니 겹친다. 천과 천이 맞닿듯이 부드럽게 닿기만 했다가 그대로 떨어진다.

센도는 물끄러미 루카와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센도가 한 짓에도 불구하고 루카와는 평온하게 잠들어있다. 달빛이 먼지보다 고운 루카와의 솜털을 은은하게 비춘다. 센도는 흉곽을 아프게 때리는 심장 소리 사이에 간신히 떨리는 숨을 고른다.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센도는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루카와의 방에서 빠져나갔다.

달칵.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힌 뒤에야 루카와는 천천히 커튼 같은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단 한 번의 기회만 허락된다면.

루카와는 흥. 하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십여 년 전 어느 늦여름날에 루카와가 차마 하지 못했던 짓. 센도는 언제나 루카와보다 아주 조금 더 어른이다. 한 발짝 더 용감하다. 이기고 도망가 버린다.

기분 좋게 두근대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루카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 전쟁을... 승리하고 돌아올 수 있다면. 단 한 번의 기회가 더 허락된다면.

그때야말로 루카와는 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