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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horts
2023.05.28

Wouldn’t it be nice

불면의이쑤신

정말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의 결혼식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청명하고 쾌적한 9월의 하와이에서. 화려한 버건디 색 턱시도를 입은 송태섭과 새하얗고 심플한 원 오픈 숄더 드레스에 귓가에 새빨간 백합꽃을 장식한 이한나. 끝없는 태평양 수평선과 가까운 가족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은 두 손을 맞잡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영원을 약속하고 미래를 말했다. 발개진 네 개의 뺨과 촉촉해진 네 개의 눈동자.

물끄러미 신랑 신부를 보던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서태웅과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았다.

결혼식이란 거. 생각보다 좋은 지도...


서태웅만큼이나 나도 결혼식이라는 행사 자체에 원체 흥미가 없었다. 조사도 아닌 경사라면 사실 꼭 챙겨야 하는 건 아니다. 아직까지 당일에 직접 축하를 건네야만 할 정도로 친한 사람의 결혼식은 없었다. 가끔 청첩장을 받았다 해도 대체로 축의만 보냈다. 적어도 고국발 소식에는 그랬다. 현재 거주 중인 미국의 결혼식은 예식이라기보다 파티에 가까웠고. 덕분에 중간에 슬쩍 빠져나가기도 쉬웠다.

송태섭과 이한나가 아니었다면 그 어떤 결혼식이라도 비행기를 타면서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랜 인연인 두 사람이 주인공인 데다가 직접 초대를 받았고 교통비와 숙소까지 대접받는 바람에 안 가는 선택지가 없었다. 사실 난 북산 출신도 아닌지라 껴도 되나 머쓱한 마음까지 있었다. 형식적으론 서태웅 파트너로 참석한 셈이다. 시즌 앞두고 마지막 휴가라서 큰맘 먹고 동행했다. 솔직한 심경은 파티보다 하와이 관광에 기대가 컸다.

신혼부부는 어디 갈 필요도 없이 하와이에서 신나게 신혼여행을 시작했고 먼저 귀국한 우리는 전지훈련을 불태웠다. 금방 새 시즌이 시작됐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몰두하고 승부하고 숨 돌리는 모든 나날에 서태웅이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타국에서 동거한 지 10년. 결혼의 필요성을 느낀 적은... 잠깐만. 신중하게 좀 검토해 봐야지.

진짜로 없다.

눈 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서태웅이 옆에 있는데. 다른 게 더 필요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여긴 제도도 마련된 곳이니까 서류만 챙기면 신고만 하는 것도 가능하긴 하다. 그렇지만 서류를 챙기는 그것이 아주 귀찮다. 심리적 비용에 비해 이득은 거의 없다. 비자나 체류 자격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어차피 계약할 팀이 없다는 뜻이니까 깔끔하게 돌아가면 된다. 지금도 시즌 끝나면 대체로 함께 귀국한다. 각자의 부모님에겐 미국 진출 때부터 인사드렸으니 이미 10년 차 가족이다. 굳이 어떤 선언이나 계약이 필요하다 여길 유인이 없다. 파티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아마 이대로 평생 살았을지도. 송태섭과 이한나의 결혼식이 아니었다면.

성혼의 순간은 군말 없이 좋았다. 이래서 사람들은 결혼식을 하는구나. 그런 순간은 그렇게만 경험할 수 있어서. 난생처음 마음으로 알았다.

서태웅에게도 그 순간은 인상 깊었나 보다. 내 예상보다 더.


해가 바뀌고. 시즌이 끝나고. 플레이오프도 다 끝나고. 첫 휴식일. 서태웅이 와인을 깠다. 송태섭 이한나의 결혼식 답례품. 신대륙에서 제조된 스파클링 화이트 와인의 세련된 라벨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서태웅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도 할까?"

목적어가 없는데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는 건 나에게도 그 순간이 생각보다 인상 깊었다는 뜻일까.

왠지 조금 놀려 주고 싶었다.

"프로포즈 하는 거야?"

서태웅이 한 쪽 눈썹을 까딱 올린다.

"아니."

"너무하네."

"사실 지금도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프로포즈는 아니고..."

서태웅이 와인잔의 기둥을 만지작거린다. 그래 매일 아침 된장국을 끓여 주겠다거나 영원히 내 곁에 있어 달라는 말이 이제 와서 필요한 사이는 아니다. 서태웅은 따로 약속하지 않아도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거고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가 결혼식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건 아마 전적으로 인생에 어떤 장면을 갖고 싶어서다.

나는 이 모든 발상이 농담이라도 상관없기 때문에 식탁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손에 괸 채로 이런저런 이색 결혼식을 실없이 떠올려 본다.

"그럼 역시 농구 코트에서 결혼식 해야 하나. 다 플로어에 앉히고 한 사람씩 번갈아서 덩크라도 꽂을까? 이런 이벤트에도 스타디움 빌려주나 모르겠네."

농구공 대신 부케를 넣으면 되는 건가. 아무리 태웅이라도 웨딩드레스 입고 덩크를 넣는 건 무리겠지. 넘어지면 재밌겠지만 위험하겠다. 터무니없는 상상에 웃음이 샜다.

서태웅은 웃지 않았다.

"네가 좋으면 그렇게 해."

생각보다 많이 진지한데...

와인 한 잔을 채 안 마셨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일렁인다. 나 조금... 설렌 것일까...

"음... 진지하게는 어렵지. 음식 먹기도 불편하고. 아마 어르신들도 올 거고."

"그래?"

서태웅은 역시 결혼식에 대해 잘 모른다. 결혼식의 주인공이 철저하게 신랑 신부인 건 미국에서나 그렇지. 일반적으로 국내에선 양가 부모님이 혼주다.

물론 우리의 경우 예외일 순 있다. 서태웅의 부모님도 우리 부모님도 지난 10년간 막내아들들 결혼식에는 털끝만큼의 기대도 관심도 제안도 없었다. 오히려 둘이 미국 올 때 드디어 슬하의 자식들을 다 털었다며 뛸 듯이 기뻐하셨다. 양가 모두 뿌린 만큼은 거둔지 오래라 이제 와서 막내 결혼식 한다고 사람 부르면 욕먹는다고 손사래를 치셨다. 그러니 어르신들은 올 수도 있지만 원치 않으면 안 올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건 두 사람의 의지인지도. 나는 다시 한번 확인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결혼식 하고 싶어?"

서태웅이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하고 싶은 말이 길 때는, 그러니까 한 문장이 넘어갈 때는 으레 그렇듯이 또박또박 끊어 가며 힘주어 말한다.

"난 너한테 편지를 쓰고 싶어. 손을 잡고 읽어 주고 싶어."

잠깐 말문이 막혔다.

역시 너도 그 장면이 마음에 남았구나. 물론 아름다웠다. 직접 겪는다면 좋을 일이다. 그러나 인생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없으면 죽는 것도 아니고 서태웅을 잃는 것도 아니다. 하고 싶으면 하자고 쉽게 대답할 수도 있지만 서태웅이 진지할수록 나도 솔직해야 한다.

"그건 결혼식을 안 해도 할 수 있잖아. 집에서 읽어 주면 안 돼?"

"안 돼."

단호하시긴. 고개까지 절레. 딱 두 번 절도 있게 흔들었다.

"부모님들, 형제들, 그리고 같이 농구했던 사람들은 다 있어야 해. 넌 누구 초대하고 싶어?"

"음... 꼭 손님들이 필요할까?"

"어. 다 모아 놔야 돼."

서태웅의 눈빛이 반짝 빛난다. 승부처를 놓치지 않는 에이스의 눈동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중요한 사람들은 다 알아야 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무적의 서태웅.

완전한 패배. 무정하게도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하니 표정 관리가 어렵다. 와인 마신 게 확 올라오나 보다. 그런 걸로 하자. 왠지 목이 메어서 나는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입을 손으로 덮은 채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서태웅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나는 거실에서 안경과 노트북을 가져왔다. 그럼 슬슬 가 볼까. 결혼 준비.


결혼 준비란 무엇인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나는가. 이 모든 정보는 인터넷에 다 있었다. 정확히는 국내 굴지의 맘카페와 예신(예비 신부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3시간 전에 배웠다)카페 속에... 가입 조건을 채우는 것이 상당히 귀찮았으나 그만큼의 값어치를 톡톡히 하는 정보의 보고였다... 신세계를 탐험하다 보니 예신, 예랑(예비신랑), 샵쥐(시아버지) 등의 줄임말을 자연 빠르게 습득했다. 샵쥐 귀엽당.

처음에는 그냥 송태섭한테 전화해서 하와이 웨딩 담당해 준 플래너 연락처를 받아 올까 싶었으나. 아무리 그 장면에 영감을 받았을지라도 우리만의 세팅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재방송은 재미없다. 타국일 이유도 없었다. 10년을 살았어도 미국은 집이 아니라 농구 코트라는 감각이 크다. 정말 스타디움에서 할 거 아니면 딱히 의미가 없다. 어차피 서태웅이 있으면 어디든 그곳이 집이다.

장소는 손님들이 참석하기 용이하도록 고국으로 정했다. 미국식 화려한 파티 분위기보다는 오붓하고 싶었다. 일반적으로는 상견례가 먼저이나 우린 생략해도 무방하다. 지난주에도 양가 부모님들 같이 제주도로 수국 보러 가셨던데 뭐.

그럼 첫 단추는... 식장이다.

예산 규모 식사 교통을 고려하여 후보를 추린다. 날짜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시즌에 지장이 안 가는 선에서 올해 안에 끝내려면 9월 안이어야 하는데 벌써 6월이다. 심지어 9월은 4월에 이어 결혼 초성수기였다. 하하. 공교롭네. 나도 웬만하면 식장이 허락하는 날짜에 맞춰 주고 싶지만 NBA 스케줄을 옮길 수는 없어서.

사람을 많이 초대할 생각이 없다 보니 오히려 선택지가 줄었다. 아담하고 교통 편하고 합리적인 곳 중에서 지나치게 양산형 분위기가 안 나는 곳을 찾아 전화 문의를 하고 엑셀 시트에 견적과 가능 날짜를 정리한다. 이 시점에서 우린 이미 귀국해 있었다. 다행이다. 한국 시차 계산해서 전화 거는 거 너무 귀찮은데.

그러다가 발견한 예식장 하나. 와 이런 곳에서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서울 외곽이나 지하철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숲속 야외 식장. 사진이 온통 초록색이었다. 흰 천과 대리석으로 번쩍이던 천편일률적인 실내 식장보단 일단 눈이 편했다. 잔디밭에 많은 하객이 앉을 순 없을 것 같았지만 우리가 예상하는 규모는 충분해 보였다. 이런 데는 대체 얼마일까. 호기심에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극성수기 9월은 빈자리가 없었다.

역시 빡빡하네. 그냥 태웅이한테 보여주고 하나 고르라고 해 볼까? 다 똑같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눈 감고 하나 찍으라고 할까?

어차피 급할 건 없다. 서태웅도 올해 안을 못 박지는 않았다. 정 안 되면 내년 6월로 미뤄도 된다. 이왕이면 재밌게 고르고 싶어서 서태웅한테 제비뽑기를 시킬지 탁구공에 숫자 써서 로또 추첨을 따라 해 볼지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려 보다 며칠이 지났다.

그러다 전화를 받았다.

"취소가 나왔다고요? 갑자기요?"

갑자기 9월 중에 예약이 비었다고. 원한다면 지금 바로 가계약을 걸고 방문해서 보라고 했다.

"어... 네... 일단 그렇게 할까요?"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확신이 없어서 되묻는 꼴이 됐다. 약간 바보같이 대답해 버렸는걸.

사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행운이었다. 단군 할아버지가 사기를 당한 빌미를 제공한 거 아니냐고 할 정도로 맑고 쾌적하고 청명하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아름다운 9월 2주째 토요일... 윤대협과 서태웅은 야외 결혼식을 하게 됐다.

"내 아들이지만 너는 정말 운도 좋다."

"감사합니다."

"태웅이 같은 애가 너랑 살아주는 걸로 평생 운은 다 쓴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아직 남았었나 봐요."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날짜와 장소를 통보했을 때 반응은 놀랍도록 평상시 같았다. 아무 악의 없는 건조한 반응으로 예쁜 식장 채 간 행운과 예쁜 신랑 채 간 행운을 축하해 준다. 가끔 유달리 섬세한 사람들이 저런 말투 상처받지 않냐고도 하지만 이게 우리 가족 스타일이다. 진짜로 비난이 아니고 칭찬이고 축하다. 난 익숙을 떠나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 뭐 좀 새삼스럽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꼭 자리 빛내 주세요."

"대신 우린 손님이다. 앞에 불러내서 화촉 붙이고 이런 거 안 해. 야외면 그거 불이나 한 번에 붙겠니. 아이고 생각만 해도 지겹다."

손사래를 치면서 선을 그으신다. 물론 누군가를 귀찮게 하려고 식을 올리는 건 아니다. 얼마든지 원하시는 대로.

집에 가니 서태웅 특파원도 부모 형제에게 정확히 같은 리액션을 받아 왔다. 누나들이 그럼 축의금 받는 역할 해야 하냐고 인상 찌푸리셔서 얼떨결에 그런 거 안 받는다고 해 버렸단다. 잘했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자기만족으로 올리는 새삼스러운 결혼식인데 무슨 돈을 받으리. 어깨를 으쓱했다.

"난 태웅이 편지 들으려고 하는 거니까. 다른 건 필요 없지."

가만히 듣고 있던 서태웅이 눈에 안 띄게 주먹을 불끈 쥐는 걸 봐 버렸다. 아차. 불 붙여 버렸네.


그럼 식장 다음엔 무엇인가. 맘카페의 가르침에 의하면... 스드메다.

스튜디오 웨딩촬영, 드레스, 메이크업을 뜻하는 줄임말이다. 결혼 정보를 찾다가 현대 한국어 어휘가 몰라보게 증가한 것 같다. 나도 이제 어엿한 요즘 젊은이네. 왠지 뿌듯하다.

남성용 헤어 메이크업은 여성보다 훨씬 싸다. 정장도 드레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왠지 이득 보는 기분. 그러나 대체로 드레스에 비하면 덤 같은 기분이라 다양한 라인업을 갖춘 곳이 많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가 단골 양복집을 통해 물어 물어 소개해 주셨다. 다행히 웨딩 쪽도 경험이 많으셨고 무엇보다 사장님이 남성 예복에 진심이었다. 시간만 괜찮으면 하루 통으로 예약해서 고르자고 하셨다. 바로 날짜를 잡았다.

결혼식 의상을 고른다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여기가 제일 재밌는 승부처일 듯.

서태웅은 패션 철학이 뚜렷하다. 의외로 어릴 때부터 입고 싶은 옷이 확실했다고. 잘 어울린다는 추천 정도로 아무거나 남의 취향으로 입어 주지 않는다. 어차피 아무거나 잘 어울리는 옷걸이라 그런가? 막상 돌이켜 보면 나라고 연애 시절 이 옷이 예쁘다 저 옷을 입어달라 해 본 적은 없다. 다 좋던데 뭐. 제일 선호하는 반려자의 차림새는... 음... 역시 벗는 거? 하하.

그러나 웨딩산업이 준비한 의상은 한 수 위였다. 둘 다 평소 어지간히 입을 일 없는 고급 예복의 향연. 특히 불편하다고 정장 싫어하는 서태웅에게 각종 각양의 색깔, 패턴, 재질을 입혀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가장 사랑하는 인형으로 옷 갈아입히는 놀이. 나쁘지 않다. 재밌다. 왜 옛날 로맨스 영화에 남자들이 애인 데리고 다니면서 이 옷 저 옷 입혀 보고 전부 주세요 했는지 알 것 같기도.

예복의 세계는 심오하고 생각보다 디테일이 많았다. 타이만 해도 보타이, 애스콧, 볼로, 크라바트... 브로치나 생화 코르사주를 타이 대신 다는 방법도 있었다. 여기에 색깔 패턴 재질 디자인이 달라지기 시작하면 목에 뭘 두르느냐만으로 백 가지 옵션이 생긴다. 반려자의 경우 목 위에 있는 게 너무 잘생겨서 다 잘 어울리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하나 대볼 때마다 사진 찍어 놓느라 고생했다. 패션 카탈로그가 따로 없다.

피곤해 할 줄 알았던 서태웅은 의외로 적극적이었다. 의상의 목적에 따라 본인이 입는 건 나도 입어야 한다는 조건이 마음에 든 듯. 내가 다양한 인형놀이를 할수록 서태웅도 다양한 인형놀이로 반격했다. 바디 랭귀지엔 점점 졸음이 쌓일지언정. 둘 다 좋은데 둘 중에 뭐가 더 좋은지 결정해야 하는 매 순간마다 어머니의 원수처럼 비싸고 반짝이는 옷가지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진지한 얼굴이 재미있고 귀여웠다.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차선을 가차 없이 탈락시키며 순위를 척척 세워 가는 데에는 나보다 서태웅이 소질이 있었다. 난 사진 담당. 사실 무엇을 고를지 그 결과물보다 과정의 서태웅을 구경하는 게 좋았다. 이것도 둘이 해 본 적 없는 새로운 경험이라 즐거웠다.

거의 하루 종일 이것저것 대 보고 입어 보고 최종적으로는 세 세트를 추렸다. 최대한 다양하고 겹치지 않는 스타일군에서 가장 좋았던 걸 뽑았다.

첫 번째는 어깨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예복. 잉글리시 컷어웨이 셔츠 컬러를 감싼 흐르는 듯이 풍성한 주름이 겹겹이 접힌 실크 크라바트. 월계수 이파리를 가느다랗게 묘사한 무늬가 금사 레이스로 자수된 반짝이는 흰색 스카프다. 손가락 두 마디 아래에 금색 스카프 링으로 조여서 풍성한 타이처럼 연출했다. 숄 라펠로 길게 팬 베스트와 와이드 넛치 라펠로 근사한 곡선을 그리면서 퍼지는 자켓을 겹쳐 놓은 쓰리 피스 예복은 단추 한 개까지 새하얀 공단으로 싸여 있다. 다른 장식 없이 서태웅의 까만 눈동자만 돋보이는 순백. 좋았다. 본식에서 이걸 입기로 했다.

두 번째는 작약처럼 고운 파스텔 핑크 수트. 귀여운 보타이로 포인트를 준 깔끔한 스탠다드 스타일의 쓰리피스. 이걸 2부 피로연 때 입기로 했다. 원단은 고급이지만 그래도 본식 예복보단 훨씬 편하다. 일단 뭔가 먹을 수 있다. 눈처럼 새하얗고 화려한 예복은 아름다운 만큼 뭘 묻히거나 흘리면 악몽이다. 하늘색이랑 둘 중 고민했는데 이날이 아니면 평생 핑크 수트의 서태웅을 선보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과감하게 밀었다. 서태웅도 이유를 듣더니 그건 너도 마찬가지라면서 쉽게 수긍했다. 그런가?

세 번째는 정석의 새까만 턱시도. 화이트 핀턱 셔츠에 베스트 대신 컴머번드. 코트는 각각 스타일이 조금 다르다. 서태웅은 끝이 두 갈래로 날렵하게 갈라진 테일 코트가 잘 어울렸고 나는 아랫단이 통으로 부드럽게 감싸는 모닝코트를 골랐다. 공들여 알맞게 골랐는데 흰 예복에 밀려서 본식에 안 쓰게 되니 애매했다. 서태웅 턱시도 잘 어울리는데. 진짜 잘 어울리는데...

문득 머리를 스쳐 가는 아이디어.

"태웅아."

"나 졸려."

"그래. 집에 가자. 눈 그만 비비고. 우리 턱시도 고른 거 아까운데, 이거 입고 웨딩촬영할까?"

"사진... 필요한가?"

"필요한 건 아니고 아까워서. 너 잘 어울리는데."

"너도 잘 어울려."

평상복을 갈아입은 서태웅이 주먹을 얼굴에 가져가다 다시 꾹 참고 내린 다음 눈을 크게 꿈뻑인다. 비비지 말라고 했다고. 착해라. 반쯤 비몽사몽이지만 의사 표현은 분명하다.

"네가 하고 싶으면 해."

촬영 업체 예약해야지. 핸드폰을 꺼내면서 인형놀이의 피로가 싹 사라지는 걸 느꼈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위대한 결혼식 구루 맘까페에 의하면 웨딩 촬영은 인스타그램에서 검색하는 게 빠르다. 원하는 스타일의 포트폴리오도 업체 연락처도 어차피 거기 다 있다.

스드메라고 줄여 부른다지만 스튜디오보다는 야외 스냅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모델 체형의 서태웅을 턱시도 쫙 빼 입혀 인공적인 세트 한가운데 세워 놓고 쭈뼛대는 걸 구경하는 재미도 있겠으나... 곤욕을 치를 이유가 없다. 누구의 의무도 아닌 결혼식이니까. 과정 모두가 즐겁기만 한 게 아니면 시작할 필요도 없는 인생의 보너스 이벤트.

앗. 생각해 보니 촬영을 농구장에서 하면 되잖아? 재밌겠다. 이건 서태웅도 무조건 신나는 세팅이다. 인스타그램에서 다른 사람들의 웨딩 스냅을 쭉 훑으며 몇 가지 레퍼런스를 캡처해 둔다. 제일 괜찮아 보이는 업체를 바로 컨택해 촬영일과 의상 고를 날짜를 정했다.

한 번도 안 가 본 예쁜 장소보다는 두 사람에게 의미 있는 장소를 원했다. 결국 주말 오후 모교 농구장을 잠깐 빌렸다. 학교 관계자가 동문의 뜻깊은 이벤트에 쓰여서 영광이라고까지 말씀해 주셔서 민망했다. 오전엔 부 활동 때문에 대관이 안 된다. 그리운데.

자연광 아름답고 사진 찍기 쾌적한 오전 시간이 아쉬워 근처에서 몇 장 찍고 마지막에 농구장에 가기로 했다.

사진작가가 리서치 해 온 장소는 하나같이 추억의 장소뿐이었다.

혹독한 훈련도 분위기 좋은 데이트도 다 받아 준 바닷가. 구두에 모래가 들어가는 게 곤란해서 아예 벗고 맨발로 찍었다. 업고 걷거나 번쩍 들어 올리는 포즈를 제안해서 난 너무 좋았는데 서태웅이 생각보다 부끄러워해서 더 좋았다. 물론 번갈아 한 번씩 했다. 태웅이는 힘도 세네. 내가 이제 너보다 11kg는 더 나갈 텐데. 오늘을 위한 벌크업이었나.

나를 찾아온 서태웅을 만났던 기차역 건널목. 무엇이 출발하고 시작하는 곳이자 영원히 도착하는 장소라는 점이 더없이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보기에도 예쁘다. 소박하고 오래된 풍경 속에 우리만 번쩍이고 각 잡힌 수트를 입고 있어 재미있었다. 사진작가가 손을 잡고 뛰어서 건너보라고 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신선했다.

우리에겐 그저 익숙한 자판기조차 전문가 눈에는 좋은 포토 스팟으로 보였나 보다. 이 시점에는 너무 더워서 자켓을 입을 수가 없었다. 벗어서 팔에 걸치고 셔츠를 걷어붙였다. 보타이도 풀어서 달랑달랑 매단 채로 서로에게 기대어 찍었다. 어깨동무를 하면 서태웅에게서 내가 좋아하는 살짝 시큼 달달한 땀 냄새가 훅 풍겼다. 사진작가는 자연스럽다고 오히려 좋아했다.

서태웅은 카메라만 보라고 하면 밤에 헤드라이트를 만난 고양이처럼 싸악 굳었다. 서태웅 신랑님~ 미소~ 숙련된 전문가의 지시도 소용없었다. 안 짓느니만 못한 로봇 같은 입술의 곡선이 안쓰러웠다. 그냥 무표정이 차라리 자연스러운지도... 독사진이 정말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내가 카메라 옆으로 가서 이상한 표정을 짓거나 춤을 추고 있으면 표정이 피식 풀렸다. 한심하다는 표정도 굳은 것보단 낫다면. 서태웅은 결혼사진조차도 그냥 모델 화보라고 생각하고 분위기 잡는 게 최선일지도.

나와 마주 보고 있을 때만큼은 작가의 한숨도 멈췄다. 아마 나를 따라서 표정이 조금 풀리는 것 같다. 나는 턱시도를 입은 서태웅의 손을 잡고 추억의 장소로 입장하는 그 순간부터 시종일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이 자체로 결혼식 같았다. 과거의 장소로 돌아가서 현재의 우리를 과시하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런 데다가 서태웅과 눈이 마주치면 뺨이 아플 정도로 활짝 웃음이 터졌다. 나를 바라보는 서태웅의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가만하지만 각별히 다정함이 서려 있어 깊이 음미하면 부드러운 바람처럼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카메라는 거짓말을 안 하니까 아마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찍히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 시야에 비친 모습은 나만의 것이다.

결혼식 하길 잘 했네. 나는 좀 신이 났다.

농구장은 실내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차라리 시원하게 땀을 흘리고 싶어져 컴머번드까지 치워버리고 셔츠 단추 두 개 푸르고 서스펜더가 흘러내리도록 뛰었다. 무슨 스포츠 이벤트 사진처럼 나왔다. 그래도 서태웅은 농구할 때 가장 반짝거린다. 땀에 절어 열심히 세웠던 앞머리가 다 내려왔다. 서태웅도 정성스레 반깐했던 앞머리가 가닥가닥 갈라지고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엉망진창인 채로 농구공을 껴안은 서태웅을 껴안고 찍은 사진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이거 액자 만들자. 서태웅도 끄덕거렸다.

너무 더워서 익숙한 운동장 수돗가에서 물 마시는데 사진작가가 갑자기 촤촤촥 비컷을 찍었다. 서태웅은 아예 머리꼭지에 물을 퍼붓다가 고개를 촥 들면서 CF처럼 화려하게 물방울을 튀겼다. 촤촤촤촥 연사가 터졌다. 레전드 화보의 예감이 든다. 저건 몰래 뽑아서 지갑에 넣어야지...


"결혼반지는 어떻게 할 거니?"

"예?"

어머니가 부르셔서 갔다가 기습을 받고 멍청한 대답을 했다.

"너네 반지 교환도 안 하기로 했니?"

"음... 이미 반지가 있어서요."

난처하게 웃으면서 왼손을 올린다. 서태웅도 자기 왼손 약지를 힐끗 본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낡은 백금 반지. 고등학생 때 서태웅이 미국 가기 전 용돈을 모아서 나눴던 반지다. 평생 한 번의 약속을 간직한다면 그때라고, 새삼 생각할 필요 없이 당연하게 여겨왔는데.

어머니가 한숨을 쉬면서 손안에 쏙 들어오는 벨벳 케이스 하나를 서태웅에게 내밀었다. 서태웅은 내 눈치를 한 번 슥 보더니 조심스럽게 연다.

새파란 사파이어를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가 감싸고 있는 심플한 귀걸이였다.

"이걸로 반지 해라. 다른 형제도 결혼할 때 다 나눠 줬다. 혹여나 따로 예물 그런 거 할 생각 말고. 어차피 이제 물려줄 일만 남았으니까."

"저희도 안 해도 되는데..."

어머니가 코웃음을 쳤다.

"얘는 진짜 가끔 보면 기본이 안 돼 있어. 반지 교환도 안 하는 결혼식이 어딨니?"

서태웅이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나도 비슷한 표정일 것 같다. 제정신을 먼저 차린 건 서태웅이었다. 얼른 꾸벅 인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우리 어머니는 진짜가 아닌 말을 덧붙일 줄 모르는 서태웅이 입을 열 때마다 예뻐한다.

그래서 반지...의 재료가 생겼다. 지금부터 만들어야 한다.

기왕이면 직접 해 볼까?

정보의 보고(=맘까페)를 뒤진다. 아담하고 서비스 좋다는 공방을 하나 찾았다. 데이트 분위기였다는 후기가 마음에 들었다. 전화로 예약을 잡고 서태웅을 모셔 갔다. 내심 귀찮을 텐데 하자는 대로 묵묵히 해 준다. 착해.

아마 이 모든 과정이 결혼식을 하자는 자신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일단 따라나서면 지금까진 다 재밌었으니까 군말 없는지도. 조금은 설레고 있으면 좋겠는데 어떨까. 나처럼.

사파이어는 3캐럿이었다. 전문가가 말해주기 전까지 몰랐다. 반지용으로 다시 세팅해서 작은 다이아 한 개씩 옆에 붙여 두 개를 두꺼운 링 안쪽에 묻는 디자인으로 했다.

직접 만든다고 해도 섬세한 공정 중 아마추어가 손 댈 수 있는 건 아주 한정적이다. 특히 안쪽 모양을 건드리면 낄 때마다 불편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광택 내기 정도였다. 서로의 반지를 맡아 정성스럽게 사포질을 했다. 서태웅은 그 와중에 사포질을 반대로 해서 반지 안쪽에 제법 선명한 흠집을 내고 저 혼자 깜짝 놀랐다.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삐죽 부풀어 오른 채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귀여워서 웃음이 막 났다. 서태웅이 째려봤다.

공방에서는 걱정 말라고 수습해 주려고 했지만 거절했다. 서태웅이 낸 흠집은 디자인이라고 봐야지. 어쨌든 나는 남겨 두고 싶었다. 따로 이니셜 각인을 안 했으니까 그 대신이라고 하지 뭐. 서태웅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있다가 너도 내 반지에 흠집 하나 내라는 둥 턱도 없는 소리를 했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에 뽀뽀나 해 버렸다.


결혼식 당일은 아주 맑았다. 이것만큼은 노력이 불가능한 영역인데 다행히도. 행운은 계속된다.

오전에 샵에 가서 헤어 메이크업을 받고 예복을 갈아입는다. 한 시간도 안 걸렸다. 열두시 식인데 아홉시에 도착해 버렸다. 할 일이 없어서 야외 식장을 구경하고 산책이나 했다.

숲속 잔디마당 같은 야외 식장은 머리 위로 설치된 줄을 따라 별똥별처럼 꼬리를 늘어 뜨린 꼬마전구로 장식되어 있었다. 버진 로드를 양쪽으로 메꾼 보라색, 파란색, 노란색 위주의 알록달록 풍성한 꽃들. 정면 단상에도 꽃밭처럼 가득하다. 양옆으로 놓인 원형 나무 테이블과 흰 파라솔. 백 명도 안 부른 식이라 원형 테이블을 둘러싼 자리에 각각 초대객 이름이 쓰여 있다. 접시 위에 놓인 냅킨 위로 크리스탈 문진으로 고정한 하얀 종이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하다. 윤대협. 서태웅.

리허설을 위해 사회자 이한나와 축가 송태섭, 정대만, 강백호가 열 시에 도착했다. 사실 식순도 간소해서 리허설도 오래 안 걸린다. 이한나는 턱시도를 쫙 빼입고 옆머리를 말끔하게 올려서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 같았다. 송태섭이 눈 마주칠 때마다 멋있다면서 정신을 못 차렸다. 신랑들보다 멋있으면 파울 아니야? 농담을 건넸다가 어깨를 야무지게 한 대 맞았다. 손이 맵네...

입장하는 타이밍이나 행사 순서와 서 있는 방향 같은 걸 맞추고 음향을 점검하니 끝이었다. 축가 선곡을 오늘까지 몰랐는데 생각보다 진지한 곡이어서 놀랐다. 근데 쟤네 노래 잘 해? 이제 와서 서태웅 귓가에 소근소근 물어본다. 돌아오는 대답도 귓속말. 나도 몰라. 내가 부탁한 게 아니고 지들이 한댔어. 당일에야 알게 된 진실이었다. 아하. 우린 축가 당한 거구나.

리허설은 10분도 안 걸렸다. 북산 군단은 음료수를 축내면서 왁자지껄 떠들었다. 송태섭은 아름다운 야외 식장을 배경으로 이한나의 사진을 천 장 정도 찍는 것 같았다. 나 저거 영어로 뭔지 알아. 인스타그램 프렌들리 허스번드. 강백호랑 정대만은 의외로 긴장하는 것 같기도 했다. 평소보다도 어색할 정도로 큰 소리로 웃었다. 잘 보니까 손바닥에 가사를 적어 놨다. 까먹을까 봐 불안한가 보다. 북산은 나이 먹고도 귀여운 구석들이 있다.

부모님들은 날씨 좋고 풍경 좋으니 벌써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와인이라도 한 잔 드려야 하나? 고민할 때쯤 슬슬 손님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벌써 열한 시네. 따로 대기실 없이 그 자리에서 오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능남과 북산 식구들이 절반이었다. 이상하게 고교 동창회 같은 분위기. 대학이나 미국에서 사귄 친구들도 더러 오긴 했지만. 모두 예식장에 감탄했고 예복을 칭찬했다. 이렇게까지 빼입은 적이 없긴 하지. 싱글벙글 웃으며 서태웅 미모 좀 보라고 자랑할 때마다 한 소리씩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실인데 어떡해.

예식은 이한나의 힘 있고 낭랑한 목소리로 시작됐다. 송태섭이 자식 학예회에 온 부모처럼 직캠을 찍고 있다. 서태웅이랑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킥킥 웃었다.

"하객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사회를 맡은 저는 신랑 서태웅의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인 이한나입니다."

우아한 목례에 모두 박수를 쳤다. 송태섭이 바보처럼 환호하다 채치수한테 헤드락을 먹고 있다. 북산은 나이를 안 먹는다.

"저 역시 여러분처럼 축하하는 마음을 한가득 가지고 이 자리에 섰는데요. 이미 오랜 세월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로 함께 나이를 먹고 있는 두 사람이 이런 자리를 굳이 마련한 걸 보면 정말 어지간히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자랑하고 싶었나 봅니다."

하객들 사이에 웃음이 터졌다. 조금 간지러운 기분이 되었다. 예리하네. 정말 그런지도 모르지. 아무도 하라고 안 했는데 그냥 그러고 싶었다는 게. 연보라색 히아신스 부케 다발을 잡지 않은 손으로 옆에 선 서태웅의 손등을 조금 만지작거렸다.

"먼저 두 신랑의 부모님께서 자리를 빛내 주신 하객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신랑 윤대협의 부모님과 신랑 서태웅의 부모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세요."

부모님들은 딱히 무대 쪽으로 나오지도 않고 맨 앞 가족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하객들과 함께 박수를 쳤다. 꾸벅꾸벅 밝은 미소로 목례를 하고 다시 자리에 앉으신다. 완전히 손님 모드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제 오늘의 주인공을 차례로 만나 보겠습니다. 신랑 윤대협. 입장!"

입장곡은 서태웅이 골라줬다. Beach Boys의 Wouldn’t it be nice. 서태웅은 가끔 이 노래를 틀어 놓고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딱 딱 치면서 경쾌하게 빙글빙글 거실을 돌았다. 가사가 좋아서 골랐다고 했다.

Wouldn't it be nice if we were older Then we wouldn't have to wait so long And wouldn't it be nice to live together In the kind of world where we belong

성큼성큼 걸어가는 길에 밟히는 천연 잔디가 푹신하고 기분 좋았다. 양옆에서 환호하고 박수 치는 익숙한 얼굴들에 하나하나 눈 맞추며 손을 흔들었다. 행복이 손에 잡힌다면 지금 내 눈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겠지. 발걸음이 투 스텝이 되지 않도록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회자가 약간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네... 아주 입이 귀에 걸렸네요.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지?"

보답으로 콩 뛰면서 엄지손가락을 머리 위로 치켜 올렸다. 하객들과 함께 깔깔 웃었다. 좋아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서태웅이 가르쳐 줬다.

"이 남자가 이토록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 보겠습니다. 신랑 서태웅. 입장!"

Tony Bennett의 The way you look tonight. 이 노래는 내가 골랐다.

부드러운 피아노 전주가 시작 몇 초 뒤에 서태웅의 발이 떨어진다. 느린 멜로디에 맞춰 빠르게 걷기 어려워 약간 삐걱인다. 히아신스 부케를 꾹 잡은 주먹. 자칫하면 손발이 같이 나갈 위기를 간신히 잡고 있는 듯. 아니 잘 보면 박자 때문만은 아닌 것 같기도...

Someday, when I'm awfully low When the world is cold I will feel a glow just thinking of you And the way you look tonight

서태웅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오고 있다. 같이 고른 예복이 눈부시게 감싼 말끔한 얼굴이 긴장돼 있다. 살짝 상기된 얼굴. 필사적일 정도로...

나는 약간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왜 심장이 발치로 떨어지는 듯한 현기증이 드는지. 빈 가슴에 차오르는 이 울렁거림은 뭔지. 나 혹시 감동하고 있는 걸까. 심지어 약간 눈물이 나고 있는 것 같기도.

당황스러운데...

아까까진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가오는 서태웅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놀랍게도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어라.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붕 뜬 고양감 속에 한 가지 다행인 건 맞잡아 오는 손바닥도 작게 떨리고 있어서.

중앙에 서서 서로 마주 본다. 사회자가 적당한 여유를 두고 매끄럽게 다음 순서로 넘어간다.

"오늘 주례를 대신하여 신랑들이 서로를 위해 편지를 준비해 왔다고 합니다. 함께 듣겠습니다."

스태프가 잠시 부케를 받아 간다. 정중하게 양장에 끼워 받친 편지를 건네준다. 서태웅의 희망은 손을 잡고 읽어주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각자 앞에 스탠딩 마이크를 세웠다. 한 손은 내 손을 꼭 잡고 한 손으로 편지를 펼쳐 들고. 서태웅이 목을 가다듬는다.

서태웅은 평소에 스스로의 목소리에 신경 쓰지 않는다. 잠기면 잠긴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산다. 오늘은 목을 가다듬고 있다.

날 위해서.

지난 삼 개월 내내 절대 내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중얼중얼 열심히 연습했던 문장을 읽는다.

"윤대협에게.

안녕.

나는 멋있는 말을 잘 못해. 너랑 다르게.

그래서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했어.

너를 만나고 나는 좀 더 넓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어.

농구 얘기만은 아니야. 처음에는 농구였지만.

이제 농구를 잘 하고 싶은 만큼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인생의 목표가 하나 더 생겼어.

내 새로운 꿈이 되어줘서 고마워.

다른 것도 다 고맙지만 나는 그게 제일 고마워.

알겠지만 나는 절대 꿈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야.

중요한 사람들 앞에서 꼭 너한테 말해 주고 싶었어.

그럼 안녕. 내일 봐."

코가 시큰하다. 눈가에 뭔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서태웅이 살짝 흐려진다. 이거 아닌데. 최대한 눈을 크게 떠서 참으려고 해 봤지만 속수무책으로 붙잡지 못한 무언가가 뺨 위를 빠르게 굴러 간다.

내가 울다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끝까지 편지를 읽은 서태웅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손이 다 잡혀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편지를 스태프에게 맡기고 조심조심 내 눈가를 닦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물이 몇 개 더 떨어졌다.

서태웅 제법인데. 나를 울리다니. 안심시키려고 웃으면서 조그맣게 말했다.

"괜찮아. 행복해서 우는 걸 거야. 아마도."

서태웅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슬픈 내용이 없는데 왜 우냐는 듯이.

상황이 정리된 듯하자 내 옆에 서 있던 스태프가 부케를 가져가며 편지를 내밀었다. 나는 손으로 그걸 정중히 밀치고 대신 서태웅의 두 손을 맞잡았다.

준비한 말은 모두 잊었다. 지금 나를 보는 이 눈동자 속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선명히 잡힌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언제나 그랬다. 아무 말 없이도 네가 다 알아줬을 뿐.

"사실 나는 이런 순간이 필요한 줄 몰랐어.

매일을 너랑 함께 하는 걸로 충분했어.

눈 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곁에 있는데도 이렇게 특별한 시간을 또 만들 수 있는 줄 몰랐어.

우리 생각보다 더 특별해질 수 있네.

10년을 같이 살았고 더 오래 함께 있었는데도. 아직도.

너는 늘 내 예상을 뛰어넘어.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어.

너랑 함께라서 미래를 예상할 수 없어.

나는 그게 최고의 미래라고 생각해.

넌 아무것도 포기하지 마.

항상 너다울 수 있게 내가 잘 할게.

결혼해 줘서 고마워."

눈물이 몇 방울 더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마지막 말을 듣고 서태웅이 환하게 웃었다는 사실이다. 찡그릴 때처럼 드물게 꾹 접힌 기다란 눈꼬리에 물기가 어른 비쳤다. 이슬처럼 아름다웠다. 이제 너도 감동 때문에 눈물 나는 심경을 알겠지? 무심코 사회자의 지시 없이 키스해 버렸다. 박수소리가 더 커졌다.

".... 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키스하는 열렬한 커플이었습니다."

혼나 버렸네. 머쓱해서 혓바닥이 낼름 나왔다. 서태웅이 부케로 옆구리를 퍽 때렸다. 훌쩍이던 객석에서 웃음이 터진다. 잘 보니 덕규 형과 태산이가 냅킨을 세 개째 못쓰게 만들고 있었고 영수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장난스럽게 우우 야유를 날리고 있었으며 경태는 웃으면서 동시에 운다는 진기명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그 테이블에서 아직도 가장 크게 울고 있는 건... 유명호 감독님이었다. 사모님이 대신 부끄러워하고 계셨다. 재밌어 보였다.

"그럼 다음은 성혼 선언입니다. 사회자인 제가 모든 하객들을 대표하여 기쁜 마음으로 읽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윤대협과 서태웅이 혼인의 연을 맺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맹세의 증표인 반지를 교환하겠습니다."

서태웅의 왼손 약지 손가락에 반지가 쏙 들어간다. 내 약지 손가락에는 서태웅이 흔적 남긴 반지가 자리 잡았다.

"이제 부부가 된 두 사람의 첫 키스를 큰 박수로 축복해 주세요!"

앗. 허락받았다. 시키는 대로 냉큼 달라붙었다. 박수와 함께 환호가 터졌다. 장난스럽게 허리를 꾹 끌어당겼다. 양쪽에서 거센 야유가 터졌다. 아쉽게 떨어졌다. 서태웅이 아까 때린 옆구리를 한 번 더 팼다. 미안.

"다음은 축가 순서입니다. 신랑 서태웅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리그 동료들이 준비했습니다. 큰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긴장을 숨기지 못하는 트리오의 축가는 불평 없이 귀여웠다. 다정한 가사와 박수 치기 좋은 미디엄 템포의 발라드였다. 서태웅과 같은 박자로 고개를 까딱이다가 아는 가사가 나오면 눈을 마주치면서 립싱크했다. 첫날밤의 단 꿈에 젖어 하는 말이 아냐. 난 변하지 않아. 오직 너만 바라볼 거야. 기분이 내켜서 손등에 살짝 키스도 했다. 강백호가 노래 부르다 말고 본능처럼 악 소리를 지르려다 꾹 참는 게 보였다. 객석에서 방청객 같은 반응이 터졌다. 유명호 감독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눈물은 그치셨군요 감독님.

"네. 정말 오늘 풍경에 딱 맞는 발랄하고 감미로운 축가였습니다.

이제 대망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신혼부부가 함께 걸어가는 첫 발걸음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 주세요. 신랑과 신랑. 행진!"

행진곡은 Ella Fitzerlad의 Let’s fall in love.

깍지 낀 손이 따스하다. 양쪽에 서서 박수 치는 아는 얼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웃고 있어 기분이 좋았다. 하나하나 눈 맞추다 돌아보면 가장 사랑하는 얼굴이 있었다.

Let's fall in love, why shouldn't we fall in love? Our hearts are made of it, let's take a chance Why be afraid of it? Let's close our eyes, and make our own paradise Little we know of it, still we can try to make a go of it

행진 끝에서 마주 보고 키스신을 촬영했다. 어느새 몰려든 능남과 북산의 전현직 농구선수들이 다소 과격하게 장미 꽃잎을 집어던졌다. 매우 정확도 높은 슛은 우리 머리를 정조준 하고 있었다. 사진은 예쁘게 나오겠네. 난 불만이 없었다. 입술이 계속 붙어 있었거든.

가족끼리 기념사진을 찍고.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그동안 파이브 코스의 음식이 각자 앞으로 배달되었다. 음식과 와인과 맥주는 초대객의 두 배 양을 준비해 놨다. 뒤 쪽 뷔페에는 와인과 맥주 안주가 깔렸다.

하객들이 먹고 마시는 동안 살짝 빠져서 옷을 갈아입는다. 예뻐서 틈만 나면 쪽쪽거렸더니 의상 스태프가 메이크업 지워진다고 경고를 보냈다. 죄송합니당.

핑크색 정장을 입은 서태웅은 알록달록 꽃이 가득한 초록색 풍경 속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2부 의상으로 우리끼리 사진을 좀 찍었다. 식장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서 알아서 파티를 벌이는 하객들을 내려다봤다. 누군가 우리를 발견하고 환호를 했다. 서태웅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줬다. 뭔가 다스리는 입장이 된 기분인데. 놀랍게도 서태웅도 척 손을 올렸다. 그 포즈는 대선 나가는 사람 같은데 태웅아. 폭소와 셔터 세례가 터진다.

서태웅은 컨디션이 아주 좋았다. 평소 같은 무표정이지만 들뜬 게 보였다. 들이대는 카메라마다 빼지 않고 포즈를 잡아 주는 경지를 넘어서서 세 사람 이상 모이면 알아서 카메라를 향해 어깨동무를 하거나 브이를 내밀었다. 태웅이가 먼저 사진 찍으려는 제스처를 보이다니. 진짜 행복한가 봐. 너무 귀여워. 어차피 우리 결혼식이니까 눈치 안 보고 틈만 나면 쪽쪽거렸더니 온갖 방향에서 스테레오로 쿠사리가 날아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언제 만나도 즐거운 사람들이 한꺼번에 잔뜩 모였으니 누구도 쉽게 자리를 뜨기 어려웠다. 택시도 잘 오고 역까지 셔틀버스도 있으니 마음 놓고 마시라고 했다. 우리도 어울려서 배를 채웠다. 서태웅은 진짜 잘 먹었다. 여덟 시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 당연한가.

재즈 밴드가 연주하는 라이브를 듣던 사람들이 갑자기 우리한테 춤을 추라고 했다. 아마 시작은 정성우가 부추겼던 것으로 의심된다. 미국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 첫 댄스를 꼭 시키는 걸 너무 인상 깊게 본 것 같다.

서태웅이 벌떡 일어나서 나한테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걸 잡지 않은 적이 없다.

후회 없는 인생의 비결이지.

마침 좋아하는 노래네.

Ella Fitzerald의 For sentimental reasons.

나도 서태웅도 춤 같은 건 출 줄 모른다. 그냥 허리를 잡고 손을 꼭 붙들고 이마를 맞댔다. 음악을 따라서 천천히 걸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s I hope you do believe me, I'll give you my heart I love you… and you alone were meant to be Please give your loving heart to me And say we'll never p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