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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horts
2024.03.05

자는 사이

불면의이쑤신

송태섭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캡틴은 결코 만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농구는 좋다. 나만 잘하면 된다. 신입생들도 착하다. 말썽쟁이 강백호, 서태웅에게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캡틴이 챙겨야 하는 건 농구만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부 활동 일지. 윈터컵까지 훈련 계획. 합숙 준비. 이것만 해도 제법 귀찮은데.

9월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학생회가 부장회의를 소집했다. 이런 것도 해야 해?! 하루 종일 농구 생각만 하다 수업 끝나면 실제로 농구하다 집에 가는 것에 익숙한 신입 캡틴 송태섭은 당황했다. 그날 부 활동은 매니저들과 정대만에게 맡기고 도살장에 가는 소처럼 구부정하게 학생회실로 향했다.

아젠다는 문화제와 체육제였다. 다행히 정기적인 회의를 쭉 한다는 건 아니었다. 공지 및 각자 결정해야 하는 사항에 대한 고지 회의가 1회(이번 회의에 해당한다), 각자의 계획을 수집하고 겹치는 걸 조정하고 지원 요청까지 마치는 게 1회, 최종 결정 사항을 통보하는 회의가 1회. 그 이후는 자유였다.

축제고 뭐고 머릿속에 윈터컵밖에 없는 송태섭. 별로 다를 바 없는 농구부 친구들. 문화제는 자유 참가니까 패스하면 그만이지만 체육제는 학생회의 요청 사항이 있었다. 각 운동부 학생들이 해당 종목 심판을 맡아 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농구부, 특히 레귤러 멤버는 각 학년 반 대항 농구 토너먼트에서 선수로 참여하지 말고 심판 보라고. 타당한 요청이었다. 일단 1학년 10반만 해도 농구부가 두 명이고 그중 하나는 서태웅이다... 누가 체육제에 농구 따위를 넣었어? 송태섭은 어이가 없었다.

대충 알겠다고 대답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서면으로 동의 서명을 받아야 한단다. 아이고 귀찮아. 송태섭은 짜증을 내지 않으려고 꾹 참으면서 뒷머리만 벅벅 긁었다. 주는 서류를 다 받아서 터덜터덜 체육관에 돌아갔더니 벌써 다들 집에 갔다. 망했다.

미뤘다간 영영 안 하게 될 것 같은, 그만큼 하기 싫은 일이었다. 에이, 쇠뿔은 단김에 뽑아야지. 송태섭은 그날 안에 서명을 전부 받기로 결심했다. 성격은 급한 편이다.

그렇게 결심하고 학교 밖을 나서자마자, 열받게도 별로 차갑지 않은 물방울이 부슬부슬 흩날리기 시작했다. 가을비였다. 송태섭은 우산이 없었다. 에이씨. 동의서를 가방 안에 쑤셔 넣고 냅다 뛰었다.

송태섭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정대만네 집이다. 순전히 인력 동원 차원이었다. 한 명 더 붙어서 나누면 빨리 끝날 것 같아서. 그리고 우산 조달도.

너랑 다르게 나는 말 안 듣는 망아지들이랑 두 시간 넘게 부 활동하느라고 벌써 너덜너덜하다면서 거세게 저항하는 정대만에게 문답 무용으로 동의서를 랜덤 배분해 안겼다. 아 그렇게 체력 딸려서 윈터컵 풀타임 어떻게 뛰냐고 타박하자 궁시렁대면서도 우산을 건넨다. 앗싸. 시간이 반으로 줄었다.

부실에서 베껴 온 주소 목록을 죽 훑어본다. 다행히 부원들의 집은 대체로 학교 근처였다. 오늘 못한 운동이라 생각하고, 돌격대장처럼 우산을 앞으로 기울인 채 어둑한 골목길에 징검다리처럼 늘어선 가로등의 동그란 빛무리와 빛무리 사이를 가볍게 뛰었다. 바람의 저항을 이겨내며 뛰는 건 왠지 조금 더 보람차다.

처음 가 보는 집의 대문 앞에서 살짝 긴장한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익숙한 얼굴이 나오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어딘가 닮은 얼굴의 가족이 나오면 꾸벅, 소리가 날 것 같은 기세로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심까. 농구부 부장 송태섭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한 집 남았을 때 빗줄기가 본격적으로 굵어지기 시작했다. 과연 뛰기엔 무리였다. 안 그래도 기운 빠진 송태섭은 터덜터덜 걸었다. 대부분의 부원들은 제 집 앞에 선 송태섭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거 받으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비도 오는데? 대체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비 올 줄은 몰랐지...

충동적인 행동인 건 맞지만 한 편 후련하기도 했다. 별것도 아닌 사인 하나, 어쨌든 내일부터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학교와 체육관이 배경인 게 익숙한 부원들의 얼굴을 각자의 집 현관에서 만나는 것도 신선했다. 어쩐지 조금씩 더 친한 사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이제는 집을 아니까... 잠깐 따뜻한 차라도 마시고 가라는 부원들이 많았지만 아직 갈 곳이 많다고 다음을 기약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말썽쟁이 투톱 중에 하나. 에이스 서태웅이다.

송태섭은 고즈넉한 단독주택 대문 앞에 섰다.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제법 커졌다. 이제 진짜 끝이다. 집에 가서 샤워 때리고 꿀잠 자야지.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내쉬고, 초인종을 눌렀다.

"네~"

인터폰에서 나오는 친절한 여성의 목소리. 어머니일 확률 90%. 송태섭의 목이 금방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빗소리에 지지 않으려고 성대에 힘을 주고 대답한다.

"아, 안녕하세요. 저... 농구부 주장 송태섭이라고 합니다."

"잠시만요!"

인터폰이 끊어졌다. 송태섭은 조금 초조하게 한쪽 다리를 떨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조그마한 발걸음 소리. 문이 열렸다. 서태웅과 별로 닮지 않은 상냥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 송태섭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꾸벅 소리가 날 기세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 태웅이한테 급하게 동의를 받을 서류가 있어서... 태웅이 집에 있나요?"

진짜 질문은 아니었다. 이미 밤 10시에 가까웠다. 다른 모든 부원들 역시 집에 있었다. 서태웅을 불러 달라는 부탁을 예의 바르게 돌려 말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서태웅의 어머니는 조금 난처해하면서 대답했다.

"태웅이... 친구 집 갔는데."

"친...구요? 태웅이가요?"

송태섭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예의라는 것을 잊고 정직한 의문을 그대로 내뱉고 말았다. 헙, 하고 헛되이 입을 막아 보는 것이 뒤늦은 최선이었다. 서태웅의 어머니는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호호 웃으면서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그러게요. 요즘 자주 가네요. 농구하다 만난 친구라던데."

"그래요...?"

송태섭의 얼빠진 얼굴에는 물음표만 늘어간다. 뭐지? 다른 때라면 언제나처럼 체육관에 남아서 혼자 죽어라고 농구하고 있나보다 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텅 빈 체육관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왔다. 야외 농구대에라도 붙었나 하기엔 강수량이 늘었다. 그럼 진짜로 다른 '친구' 집에 놀러 갔단 말인가? 송태섭이 찾아간 집에는 없었지만 정대만의 할당량에 속하는 어떤 집에서 다른 부원 누군가와 나란히 나왔다고...?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멍청하게 입을 벌린 송태섭을 마주한 서태웅의 어머니는 인자하게 웃었다. 그리고 정답을 말해주었다. 농구부 캡틴인 송태섭은 반드시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을 담아서.

"네. 2학년 윤대협 친구요."

송태섭은 잠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 예?????"

놀라는 것조차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송태섭은 물음표를 가득 안고 빗줄기 속을 터벅터벅 걸어서 집에 갔다. 물음표를 가득 안고 뒤늦은 저녁밥을 먹고 물음표를 가득 안고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물음표를 가득 안고 등교했다. 모든 수업이 끝나고, 드디어 부활 시간.

가벼운 스트레칭과 러닝을 마치고 공 하나씩 집어 들기 시작한 부원들. 송태섭은 서태웅을 큰 소리로 불렀다. 공을 든 채로 이쪽으로 온다. 어제 그 서류를 가리키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서태웅에게 서명을 시켰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이름을 정자체로 쓰고 있는 서태웅의 옆에 가까이 다가가, 괜히 주변을 한 번 두리번 살피고 나서, 송태섭은 은밀하게 물었다.

"야, 태웅아."

"넵."

"너 윤대협이랑... 뭐... 무슨 일 있냐?"

목소리가 저절로 낮아졌다. 제가 듣기에도 묻고자 하는 것이 뭔지도 잘 알 수 없는 이상한 질문이었다. 송태섭은 실제로 자신이 뭘 묻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그냥 모든 것이 다 이상했다.

서태웅은 생뚱맞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요."

"너... 어제 집에 없더라고."

"네."

"근데 어머니가 윤대협 집에 갔다고..."

"네."

"그, 그 집에 자주 간다고..."

"네."

표정 하나 변화 없이 간결한 양자택일 대답을 이어가는 서태웅에 비해 송태섭은 점점 더 다이나믹하게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당사자의 침착함이 너무 이상하고 억울한 나머지, 저절로 말이 길어지고, 주절주절 더듬게 된다. 아니 이거 지금 나만 이상한 거냐고?!

"너, 네가 왜 그 집에... 아니, 그 전에 둘이 언제 친해졌어? 너네 어머니는 거의 같은 학교인 줄 아시던데?!"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 너는 왜케 당연하냐?"

서태웅이 눈썹을 살짝 찌푸린다. 이게 무슨 질문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다. 야 고민하지 마 나도 뭔 소린지 모르겠다. 송태섭이 이마를 짚었다.

윤대협과 서태웅. 송태섭이 알기로 둘은 경기마다 매치업되는 지역 최고의 에이스. 특히 이정환이 은퇴한 지금은, 군림하는 최강자와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도전자. 붙었다 하면 서로 도발하고, 치열하게 승부하고, 한 방 먹여주면 곧바로 갚아주고. 화려한 플레이를 주고받는 불꽃 튀는 라이벌.

그렇지만 친구라거나 집에 놀러 가는 사이로는 생각한 적 없었다. 심지어 윤대협네 학교는 그다지 가깝지 않다... 어디 사는지까지는 몰라도...

송태섭은 답답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서태웅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둘이 대체 무슨 사이야?"

서태웅이 턱에 손을 올리고 허공을 본다. 진지하게 생각할 때의 버릇이다. 송태섭은 어쩐지 답을 듣기가 좀 두렵다는 알 수 없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대답은 금방 나왔다. 짧고 간단했다.

"자는 사이요."

"엉?"

"자는 사이예요."

"뭣이라????????"

서태웅은 세 번은 말해주지 않았다. 다 쓴 서류를 척 내민다. 완전히 넋이 나간 송태섭이 얼떨결에 받아 들자, 손에 든 공을 드리블하면서 그대로 골대까지 가 버렸다. 화려한 덩크슛 소리가 들린다. 1학년들이 환호한다. 강백호가 짜증 낸다. 한나가 손뼉을 치면서 주의를 끈다.

이 모든 소음이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집 나간 송태섭의 영혼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집에 가는 길에 비가 내렸다. 그래서 서태웅은 자전거를 돌렸다.

윤대협이 있는 곳으로.

윤대협과 서태웅이 자는 사이가 된 건 8월 말부터다.

그날 서태웅은 전국대회 이후 처음으로 윤대협을 찾아갔다. 쉽지 않았다. 처음에 그랬듯이 체육관에 쳐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윤대협만 없는 게 아니고 아무도 없었다. 서태웅은 텅 빈 남의 체육관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능남은 방학 때 부활을 안 하나? 그럴 리가 없는데. 심통이 난 서태웅은 답답한 마음을 풀려고 굴러다니던 농구공을 하나 주워서 냅다 림을 향해 돌진했다. 그렇게 시간을 잊고 혼자서 끝장나게 농구했다.

기분이 풀릴 때쯤 능남 농구부가 돌아왔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엉망진창 땀투성이가 돼서. 혼자서 당당하게 남의 체육관을 빈집 털이(?)하고 있던 서태웅을 보고 모두가 턱이 빠졌다. 뻔뻔함과 무례함에 어이가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폭풍 같은 돌파, 그럼에도 원할 때는 정확하게 멈추는 순발력과 탄력, 공중을 나는 듯한 점프력, 어마어마한 체공시간,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덩크슛. 박경태가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넋을 잃은 몇몇 1학년들이 따라서 멍하니 박수를 쳤다. 정신이 돌아온 유명호 감독이 눈을 비볐다. 서태웅... 전학 왔나?

안영수는 서태웅이 실내용 농구화까지 정중하게 갈아 신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화낼 기운도 없어졌다. 그래서 박경태 다음으로 크게 박수를 치고 있던 해맑은 새 캡틴이나 질질 끌고 나왔다.

"어차피 이거 찾으러 온 거 아냐?"

"이거라니 너무한데."

당사자는 웃으면서 항의했으나 서태웅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웅. 땡큐."

1학년 주제에 건방진 말투에 안영수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하지만 상대하기엔 너무 지쳤다. 그날 능남 농구부는 내내 학교 앞 바닷가에서 달리기를 하다 왔다. 타임 키핑도 하고 사이드런도 하고. 체력이란 체력은 전부 탈탈 털렸다. 갑자기 나타난 타 학교 에이스가 꽤나 궁금할 텐데도, 다들 미련 남은 발걸음을 라커 룸으로 돌려 샤워부터 찾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몸이 너무 힘들면 엔간한 타인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안영수도 마찬가지였다. 냉큼 씻고 갈아입고 집에 갈 생각뿐이었다.

그리하여 체육관에는 윤대협과 서태웅 둘만 남았다. 똑같이 바닷가에서 탈탈 털린 윤대협은 그래도 여유가 남았는지 불청객에게 걸맞지 않은 다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쩐 일?"

서태웅은 잠깐 기억을 더듬었다. 나 여기 왜 왔더라? 아 맞다.

"고맙다."

"응?"

"전국대회 때 생각 났어. 네가 한 말."

서태웅은 그 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너 엉터리가 아니던데."

윤대협은 감전이 된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보일 듯 말 듯, 서태웅의 입꼬리가 아주 미묘하게 상승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서태웅은 웃고 있다.

거울처럼 잔잔한 호수 표면은 아주 조그마한 바람에도 흔들림을 알 수 있듯이.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세계 최고 난이도의 틀린 그림 찾기 같은 변화였지만, 오히려 전반적인 인상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서태웅이 웃었다.

"그럼 이만."

그리고 돌아섰다. 구석에 내팽개쳐 뒀던 교복 재킷을 꿰어 입고, 가방을 챙겨 어깨에 멘다. 윤대협은 멍하니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서태웅은 성큼성큼 체육관을 가로질렀다. 다섯 발자국 정도 걸어간 다음,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고 어깨 너머로 멍하니 서 있는 윤대협을 슥 돌아보았다. 두고 온 게 있는 사람처럼 무심하게. 언젠가 윤대협이 그랬던 것처럼.

윤대협은 서태웅과 눈이 마주치자 충동적으로 물었다.

"농구 안 해?"

서태웅은 잠깐 윤대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흥,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벌써 윤대협은 얼굴에 미소가 돌기 시작했다. 그 가소롭다는 듯한 짧은 숨소리가 무슨 뜻인지 이미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서태웅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구석에 다시 내팽개쳤다. 그게 신호였던 것처럼 윤대협은 돌아서서 체육관 가장자리의 공을 주우러 뛰었다. 드리블을 하며 골대로 돌진하자 재킷까지 벗어 던진 서태웅이 금방 따라붙었다. 윤대협은 강도 높은 유산소 훈련으로 몸이 축축 처지던 것도 잊고 다시 림을 향해 날아올랐다. 최고의 라이벌이 손을 뻗어 가로막는다. 그래야 이겼을 때 최상으로 재미있는 법이었다.

집에 갈 준비를 끝내고 라커 룸에서 삼삼오오 나오던 능남 농구부원들은 농구하는 두 사람을 보고 완전히 학을 뗐다. 특히 윤대협의 미친 체력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서태웅도 학교 끝나고 바로 왔으면 혼자 두 시간은 농구하고 있었을 텐데 어휴... 유명호 감독은 바람직한 자세 좋지만 이제 체육관 문 닫을 시간이라며 두 사람의 귀가를 재촉했다.

윤대협과 서태웅이 서로 곁눈질을 했다. 눈빛이 교환되는 순간, 두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았다.

그때 그 야외 농구장.

그러나 농구는 거기까지였다. 윤대협도 서태웅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태풍이었다. 일기예보보다 이동 속도가 빨라 12시간 정도 빨리 해안 지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애초에 예보도 제대로 안 보고 다니는 두 사람은 그냥 빗줄기가 좀 떨어지다 말겠지 했다. 그대로 일 대 일을 강행할 생각이었다.

물론 어림없었다. 금방 눈앞이 안 보일 정도로 퍼부었다. 더 큰 문제는 강풍이었다. 눈앞이 안 보일 정도의 비가 '가로로' 퍼부었다. 주변에 비 피할 곳조차 보이지 않았다.

윤대협은 일단 무작정 서태웅의 짐을 끌어안고 뛰었다. 제 가방과 겉옷을 쫓아 서태웅이 쫄래쫄래 따라왔다. 작전 성공이었다.

얼굴을 아프게 때리는 빗줄기로부터 해방된 건 윤대협의 방문이 닫혔을 때였다. 한 층에 한 세대인 조그마한 맨션 꼭대기층으로 향하는 외부 계단은 둘이서 나란히 갈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윤대협이 최대한 빨리 열쇠를 돌리려고 애쓰는 동안 뒤에 서 있던 서태웅은 하릴없이 폭삭 젖었다.

비좁은 현관에 센서등이 들어왔다. 귀를 때리던 빗소리가 문밖으로 쫓겨나니 비로소 아늑했다.

어깨를 붙이고 나란히 선 채로 두 사람은 잠시 숨을 골랐다. 서태웅이 부르르 전신을 떨었다. 다소 야생동물 같은 그 움직임에 윤대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 젖은 신발을 벽에 기대 세워 두고, 양말을 벗어 쭉 짜내고, 발바닥을 대충 닦은 다음 최대한 보폭을 벌려 사뿐사뿐 욕실로 뛰었다. 본인은 사뿐사뿐 갈 생각이었지만 바닥은 쿵쿵 울렸다. 서태웅은 생각했다. 아랫집에서 뭐라 안 하나.

윤대협은 젖은 옷을 벗어서 빨래통에 던져 넣고,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쌌다. 그리고 커다란 목욕수건을 들고 현관에 선 서태웅에게 다가왔다.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너 입술 파랗다."

"추워."

"아이고. 빨리 씻자."

서태웅은 윤대협을 따라 주섬주섬 신발을 벽에 기대 놓고 양말을 벗었다. 현관에 짜면 물웅덩이가 생길 것 같아서 그대로 손에 쥐고, 윤대협이 준 수건으로 발을 정중하게 닦았다. 머리카락을 털면서 윤대협이 안내하는 대로 욕실로 간다.

"물 받을 시간은 없고 샤워라도 해."

윤대협은 그 말만 남기고 욕실 문을 닫아버렸다. 갑자기 남의 집에 와서 욕실에 갇혔다. 서태웅은 눈을 몇 번 껌뻑이다 샤워기를 틀었다. 따스한 김이 솟는 물이 나온다. 서태웅은 젖은 옷을 입은 채로 물줄기 아래 몸을 넣었다. 눈을 꼭 감고 온기를 즐겼다.

서태웅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다가 무언가를 밟았다. 윤대협이 꺼내 둔 옷이었다. 능남 농구부 반소매 티셔츠, 고무줄 반바지, 그리고 봉투도 안 뜯은 속옷 하나. 서태웅은 감사히 입었다. 남의 집에서 발가벗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윤대협이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비도 오고 추울 때는 뜨거운 국물을 마셔야 한다고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서태웅은 그냥 맛있을 것 같다고만 생각했다.

실제로 맛있었다. 서태웅은 밥을 두 그릇이나 말아 먹었다. 윤대협은 왠지 흐뭇하게 웃으면서 서태웅을 쳐다보았다.

윤대협이 씻는 동안 서태웅은 집에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은 태풍이 왔는데 누구 만나러 간다던 서태웅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걱정을 하고 계셨다. 이 지역은 태풍이 오면 해일을 함께 걱정해야 한다.

"죄송해요. 생각보다 길어져서. 네. 좀 엇갈렸어요. 농구했어요. 그러다 비가 와서. 네. 걔 집이요. ...2학년인데. 알았어요. 안 돌아다녀요... 비 그치면 갈게요. 네. 안녕히 주무세요."

통화를 끊고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걱정을 드린 게 죄송했다. 돌아서자 윤대협이 생각보다 가까운 데 서 있어서 서태웅은 흠칫 놀랐다. 윤대협은 좀 이상하게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지. 재수 없는데. 서태웅이 금방 도끼눈을 떴다.

"뭐야."

"너 공손할 줄도 아는구나."

"흥. 당연하지."

"하하하."

윤대협은 어째서인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큰 소리로 웃었다. 서태웅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상한 녀석. 윤대협은 거실 불을 켜지도 않고 TV 앞으로 다가섰다. 다이얼을 하나씩 돌리면서 저녁 프로그램을 뒤진다. 뭔가 연예인들이 나와서 왁자지껄하게 퀴즈를 맞히는 유명한 프로그램에 놓더니 뒤에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아 비스듬히 등을 기댔다. 서태웅은 멀뚱하게 제자리에 서서 그걸 지켜봤다.

윤대협이 TV에 박혀 있던 눈을 힐끗 돌려서 서태웅을 곁눈질했다.

"앉아. 너 보라고 튼 거야."

서태웅은 그 프로그램에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일단 집주인이 앉으라니까. 소파의 빈자리에 똑같이 털썩 주저앉는다. 윤대협 쪽으로 푹 꺼져 있던 소파가 서태웅의 무게 덕에 균형을 잡는다. 서태웅은 고개를 뒤로 기댔다. 소파 등받이가 안정적으로 뒤통수를 받쳐 줬다. 오늘 하루의 피로가 갑자기 몰려왔다. 윤대협네 흰색 천장이 아른아른 흐려지기 시작한다. 연예인들이 떠드는 소리가 어렴풋해진다.

윤대협은 시선을 TV에 고정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 어쩌다 주워 온 타교 꼬맹이가 지루해할까 봐 대충 무난한 걸로 틀어놨을 뿐이었다. 사실 농구가 아니면 이 애랑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다. 침묵 속에 손님을 방치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평소엔 그렇게 건방진 주제에, 막상 앉으라는 말 없이는 평생 우뚝 서 있을 것처럼 딱딱하게 구는데. 어쨌든 씻기고 먹이고 입혀 놨으니 할 만큼 한 거 아닐까. 따지고 보면 내가 간다는 놈 붙잡고 농구하자고 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니까...

어느새 윤대협은 TV 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창문을 때리며 점점 더 커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 모든 소음을 뚫고 훨씬 더 작은 소리,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소리, 존재하는지조차 아슬아슬한 소리가 이상하게도 귀에 가장 선명하게 박혔다. 서태웅의 일정한 숨소리였다. 조그마한 콧구멍을 살짝 통과하며 가볍게 흩어지는 공기가 남긴 흔적. 온도를 느끼기에는 너무 짧았고, 모른 척하기에는 끝없이 반복됐다.

윤대협은 상체를 반대로 틀어 서태웅을 향해 돌아앉았다. 고개를 꺾어 소파 등받이에 푹 기대고 잠든 서태웅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 TV 불빛이 어른어른 하얀 턱만 밝혔다. 역광이 드리운 그림자가 콧대와 눈두덩을 까맣게 덮었다. 어스름한 불빛과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캔버스처럼 하얗고 깨끗한 서태웅의 얼굴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조용한 잠 숨만이 규칙적으로 조그마한 콧구멍을 들어가고, 나가고, 들어가고, 나가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흔적을 남긴다. 집중해서 듣다 보니 윤대협의 눈꺼풀도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이는 횟수가 점점 줄어든다. 서태웅을 쳐다보는 자세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누구의 고개가 먼저 상대 쪽으로 떨어졌는지, 윤대협도 서태웅도 알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윤대협은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똑같이 길게 누운 서태웅을 품에 안고.

윤대협은 눈을 깜빡거렸다. TV에서는 아침 방송을 하고 있었다. 우상단에 큰 아라비아 숫자로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제법 이른 시간이었다. 어제 일찍 잤으니까. 거실은 밝았다. 비가 그쳤다. 태풍은 짧게 지나간 모양이다.

까맣고 보송보송한 머리카락이 자꾸 TV 화면을 가린다. 또 턱 아래를 간질인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팔을 베고 잠들어있었다. 불편하진 않았다. 앞으로 쭉 뻗은 팔에 서태웅의 어깨와 머리 사이 움푹 들어간 목이 절묘하게 얹혀 별로 저림조차 없었다.

서태웅의 기다란 몸은 구석구석 딱 맞는 각도로 윤대협과 붙어있었다. 신기할 정도였다. 단단한 근육질의 등이나 허리와 엉덩이의 곡선이나 적당히 구부린 무릎이나 대충 얽어 놓은 기다란 다리나, 팔꿈치며 발목 같은 단단한 부위도, 어디 하나 윤대협에게 닿았다고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윤대협의 다른 쪽 팔이 서태웅의 상체 위에 얹혀 있었다. 무겁지 않았나? 윤대협은 제 손이 서태웅의 앞가슴을 감싸듯이 안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깨달았다. 서태웅이 양손으로 제 팔을 안는 베개 껴안듯이 끌어안고 있었다. 역시 조금도 배기는 곳 없이 완벽하게 편안했다.

...갑자기 빼면 깨겠지? 윤대협은 그냥 가만히 있기로 결정했다. 제가 준 능남 농구부 티셔츠를 입은 서태웅의 상체는 따끈따끈했다. 이불도 없이 잠들었는데 감기 걸리는 건 아니겠지. 베개가 된 팔을 조심스럽게 꺾어서 손끝을 뻗어 드러난 서태웅의 맨팔을 간신히 더듬어봤다. 다행히 차갑지는 않았다.

드문드문 남은 기억을 더듬어 보면, 누군가가 먼저 상대의 어깨로 고개를 떨궜고, 닿은 김에 자연스럽게 누웠고, 꾸물꾸물 몸을 겹쳐 서로에게 최고로 편한 자세를 찾아갔던 것 같다. 지금의 이상적인 자세는 그 결과였다.

실로 오랜만에 최고의 숙면이었다.

커다란 하품이 나왔다. 또 자고 싶다. 서태웅한테서 좋은 냄새가 났다. 익숙한 샴푸 냄새가 모르는 살냄새와 섞여 낯선 것을 친근하게 바꾸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턱을 간질이던 머리칼이 인중에 닿았다. 윤대협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어제는 들리지 않던 규칙적인 소리가 두 번째 수면을 도왔다. 심장 소리였다. 누구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윤대협이 두 번째로 잠든 동안, 서태웅이 눈을 떴다. 일단 가만히 상황을 파악했던 윤대협과 달리, 서태웅은 벌떡 일어났다. 품 안에 있던 거대한 것이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윤대협은 강제로 잠이 깼다. 서태웅은 제자리에 선 채로 반쯤 뜬 눈을 꿈뻑이다 산발이 된 머리를 앞에서 뒤로 쓸어 넘겼다.

서태웅이 윤대협을 돌아본다. 소파에서 눕지도 일어서지도 못한 엉거주춤한 자세로, 역시 반쯤 뜬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서태웅은 푹 잠긴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미안."

윤대협이 갈라진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고 물었다.

"크흠! 뭐가."

서태웅이 옆머리를 긁적였다.

"나 때문에 너도 소파에서 잤잖아."

"아. 뭐 그런 걸로."

윤대협이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았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만족스러운 대형견처럼 입맛을 두어 번 다시고, 두 팔을 배 위에 편안하게 겹친다. 방금 일어난 몰골로 배시시 웃는다.

"난 엄청 잘 잤어. 오랜만이다. 이렇게 잘 잔 거."

서태웅은 윤대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작게 끄덕여서 윤대협도 보지 못했다.

이틀 뒤. 태풍이 남기고 간 저기압의 잔해가 또 비를 뿌렸다.

부 활동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윤대협은 현관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서태웅을 발견했다.

아슬아슬한 현관 처마 아래 쪼그려 앉아 있던 서태웅이 일어났다. 손에는 아직도 물기가 남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윤대협이 왜냐고 묻기 전에 서태웅이 먼저 대답했다.

"자러 왔다."

아주 맡겨 놨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선약이 있었던 줄 알았을 것이다. 승부를 걸어 올 때랑 별로 다르지도 않았다. 뻔뻔하게, 간단하게, 가볍게 그러면서도 희한하게 비장함이 섞인 말투로, 원하는 것만 말한다.

그런데 왜 서태웅이 이럴 때마다 윤대협은 웃음이 날까?

윤대협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도 않고, 우산을 잡지 않은 손을 가볍게 흔들어 비키라는 사인을 했다. 서태웅은 어색하게 두어 계단 내려와서 비켜섰다. 윤대협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서태웅이 따라 들어올 수 있도록 잠깐 잡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빗소리가 한결 멀어져 아늑한 집 안에 반가운 불청객이 또 들어왔다. 서태웅은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더니,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자세히 보니 잠옷이었다. 윤대협이 그걸 보고 웃음이 터진 걸 확인하고는 의기양양하게 욕실로 먼저 쓱 들어간다. 아주 제 집이구만. 불만이 전혀 없는 윤대협은 주방으로 향했다. 자, 오늘은 뭘 먹어야 할까.

그날 윤대협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침대에 누웠다. 윤대협이 뭘 해줘도 싹싹 비워 버린 서태웅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제 칫솔을 꺼내서 양치를 하더니 뻔뻔스럽게도 침대에 가서 모로 누웠다. 저녁을 먹고 나면 얼마 안 가 바로 잠드는 모양이었다. 엄청난 소화력이군. 사돈 남 말할 처지가 아니면서 윤대협은 쉽게 감탄했다.

앉으란 말 없이는 앉지도 않던 서태웅이 이젠 침대에 버젓이 누워 버린다. 윤대협은 왠지 서태웅의 머릿속을 알 것 같았다. 서태웅은 자러 왔다. 당연히 혼자서는 아니다. 그렇지만 집주인이 소파에서 불편하게 자는 것은 미안하다(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니 둘이 함께 침대에서 자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합리적이다. 윤대협은 이의가 없었다.

오늘은 둘 다 잠에 취하지 않은 맨정신으로 자세(?)를 잡았다. 서태웅은 소파에서 그랬던 것처럼 윤대협에게 등을 돌리고 모로 누웠다. 윤대협은 베개를 베고, 가만히 한 팔을 앞으로 뻗었다. 평소 잘 때와는 다른 자세다. 윤대협은 어깨가 넓어 모로 누워 잘 때 머리가 뜬다. 그래서 팔을 꺾어서 손으로 괴고 자야 한다.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즉시 서태웅의 머리가 윤대협의 팔뚝을 베러 온다. 무슨 퍼즐 맞추듯이 목덜미를 딱 맞춘다. 아주 편하다. 은근히 닿기는 하지만 전혀 눌리지 않아 저림이 없다. 그때와 똑같다. 윤대협은 조심스럽게 다른 쪽 팔을 뻗어 서태웅의 갈비뼈 근처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서태웅은 잠깐 가만히 있다가, 두 손으로 윤대협의 손을 잡았다. 가슴께로 끌어 올려 안는 베개처럼 윤대협의 전완을 끌어안았다. 손바닥 안에 얇고 부드러운 면 잠옷 너머 서태웅의 말랑하게 눌린 대흉근이 느껴졌다. 그때와 완전히 같았다. 너무 잘 맞은 퍼즐 조각 사이에 경계가 사라지듯이, 두 사람의 몸이 이불 아래서 완벽히 편안하게 겹쳤다. 즉시 따스한 졸음이 윤대협을 감쌌다. 어지러울 정도로 금방 수마가 몰려왔다. 급기야 턱 아래 조그마한 머리통에서 새근새근 잠 숨이 들려온다. 맞닿은 등짝에서 전해지는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박동이 윤대협의 가슴팍을 자장자장 토닥였다.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윤대협은 깊은 우주의 무중력 속으로 떠오르듯 잠들었다.

꿈도 없이 달콤했다.

그 이후로 비가 오는 날마다 서태웅은 윤대협과 자러 왔다.

이상한 규칙이었다. 윤대협은 어렴풋이 농구와 연관이 있겠거니 했다. 정작 맑은 날에 농구를 하자고 찾아온 적은 없었다. 다가오는 윈터컵을 대비해 전력 노출을 피하려는 것인지. 서태웅에게 그런 상식이 있다는 것이 놀랍지만.

9월은 태풍의 달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새파란 하늘과, 무시무시하게 바람 불고 비가 퍼붓는 날씨가 번갈아 반복됐다. 윤대협과 서태웅은 새파란 날에는 부 활동을 불태우며 신나게 농구했고, 폭풍우 치는 날에는 서로 몸을 붙이고 깊고 진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윤대협은 충분하고 질 좋은 수면이 확보되면서 컨디션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원래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는데 훨씬 더 개선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달라진 변수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태풍이 예정되는 날에는 최대한 빨리 귀가해야 했다. 당연히 부활도 금지였다. 훈련이 있다 없다 하는 불규칙한 일정 때문에 초조해하던 유명호 감독은 그 와중에도 몸 상태가 점점 좋아지는 윤대협을 보며 선명한 우승컵의 환상을 보았다.

한편 서태웅은 윤대협의 집에 가도 원래 자던 시간에 잤다. 원래 꿈도 안 꿨다. 원래 그랬듯이 가장 좋아하는 자세로 모로 누워 잤다.

그럼에도 윤대협이랑 자고 나면 이상하게 좀 더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잠들기 직전에도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평소보다 따뜻했고, 안락했고, 등이나 팔뚝에서 느껴지는 적당한 무게감도 좋았다. 안정됐다.

농구 말고 좋아하는 거라곤 자는 것뿐인 서태웅. 윤대협과 같이하면 농구도 재밌고 자는 것도 편하다. 서태웅은 좋아하는 걸 계속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매일 남의 집에서 잘 순 없으니, 처음 갔던 핑계를 되살려 비 오는 날에만 찾아갔다. 서태웅 나름대로는 자제였고 배려였다.

9월이라 좋았다.


그날은 일찌감치 저녁부터 태풍 예보가 있었다. 대충 해 지는 시간과 비슷할 거라고 했다. 캡틴 송태섭은 책임감을 가지고 1학년, 2학년, 3학년 층까지 돌면서 오늘은 부활 금지니까 본격 태풍 시작되기 전에 얼른 집에 가라고 모두에게 얘기했다.

딱 한 사람, 서태웅만 자리에 없었다. 자전거도 없는 걸 보니 벌써 집에 간 것 같다고 이호식이 말했다.

불행히도 아니었다. 서태웅은 체육관에 먼저 가 있었다. 서태웅에게는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습관이 없었다. 아침에 부모님이 태풍 예보가 있으니 일찍 들어오라고 말했지만 조느라고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삼점슛을 쉰네 개째 넣으면서 서태웅은 생각했다. 다들 많이 늦는군...

백이십 개를 넣어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대신 밖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본격적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갈라진 먹구름 틈에서 양동이로 퍼붓는 듯 물줄기가 끊임없이 뿌려졌다. 번쩍, 온 세상이 하얗게 빛났다가, 콰쾅! 귀가 찢어질 듯한 천둥이 울려 퍼졌다. 서태웅은 체육관 문에 뚫려 있는 조그마한 유리창으로 묵묵히 재난 같은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집에 어떻게 가지...

당연히 갈 방법이 없었다. 서태웅은 빠르게 결정했다. 귀가 포기.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곰곰 생각하다가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쳤다. 부실에는 비상용 전화기가 한 대 있다. 얼른 뛰어가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 두 번에 부모님이 다급하게 받는다. 또 사과를 한참 해야 했다. 물론 서태웅이 농구 말고 다른 것에 아무 신경을 안 쓰다가 이런 일을 겪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부모님은 한숨 한 번 크게 내쉬고, 안전한 장소에 있는 거면 됐다고 말씀하셨다. 어차피 태풍이 잦아들기 전까지는 차를 몰고 데리러 오실 수도 없는 노릇. 서태웅은 그냥 체육관에서 버팅기다 너무 늦어지면 체육복 덮고 자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들의 튼튼함을 믿는 부모님은 그래라 하셨다. 비 안 맞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한 건 해결한 서태웅은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체육관으로 나왔다.

이제 농구와 나뿐인가?

서태웅은 다시 공을 잡았다. 진짜로 잠들기 직전까지 농구만 하다가 코트에 누워서 자는 날이 오다니. 꿈 같은 세팅이다. 너무나 익숙한 학교 체육관인데 밤늦게까지 혼자 남아있다는 이유로 무슨 이벤트에 당첨된 것처럼,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온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흥분을 가라앉힐 방법은 역시 또 농구뿐이었다. 서태웅이 가볍게 슛을 쐈다. 3점. 깨끗하게 통과였다. 기분이 좋다.

그런데. 서태웅은 바로 공을 줍지 않고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하다.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데... 그게 뭐지...

윤대협은 집 안에서 초조하게 서성였다. 좀처럼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고 볼 안쪽을 계속 밀고 당기게 된다.

서태웅이 안 온다.

어둑한 유리창을 줄줄 흘러내리는 수천 갈래 빗줄기 위로 윤대협의 망연한 얼굴이 비친다. 번쩍, 번개가 그 얼굴을 가른다. 콰광! 요란한 천둥이 하늘을 찢으며 귀를 얼얼하게 때린다. 교과서에 나올 듯한 태풍의 풍경이었다.

물론 비가 온다고 서태웅이 반드시 와야 한다는 법은 없다. 지금까지도 그런 약속을 한 적은 없었다. 그저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나가는 것처럼, 비가 오는 날에 서태웅이 집 앞에 서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날이 너무나 이상하고 어색하고 허전할 뿐이다.

특히 이런 태풍을 뚫고 윤대협 집까지 오는 건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어쩌면 서태웅이 오지 않는 편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초조해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윤대협은 바짝 세운 앞머리 속으로 네 손가락을 집어넣어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힘이 풀린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가닥가닥 온갖 방향으로 축 늘어졌다. 윤대협은 개의치 않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TV도 켜기 싫었다. 억지로 눈을 감아 본다.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윤대협은 괜히 전화기를 째려봤다. 서태웅에게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혹시 길이 엇갈릴까 봐 걱정되니까 미리 전화라도 걸고 오라는 취지였다. 서태웅은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다. 언제나 현관문 앞에 먼저 와서 서 있었다.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젠 자러 왔다는 말도 없이 익숙하게 두 계단 아래로 비켜섰다. 윤대협이 좁은 계단에서 현관문을 열 수 있도록. 윤대협은 왠지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것을 참지 않고 내버려두면서, 티 나지 않게 서둘러서 열쇠로 문을 열고, 서태웅이 따라 들어올 수 있도록 아주 잠깐 문을 잡고 기다려주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태웅이 없었다. 윤대협은 괜히 있는 힘껏 전화기를 째려봤다.

때르르릉.

거짓말처럼 전화기가 울린다. 윤대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꼭 제가 눈빛으로 뭔가 한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다가 천천히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윤대협."

기다리던 전화였다. 그럼에도 윤대협은 다소 분노와 억울이 섞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어디야."

"나 학교."

"뭐라고?"

"체육관. 부 활동 왔다가 갇혔어."

"북산은 부 활동 강행이었어?"

"아닌 듯. 아무도 없어."

"너 혼자 있다고?"

"어. 그래서 못 갔다."

갈수록 점점 더 경악스러운 소리를 여태 담담하게 툭툭 뱉던 서태웅이 잠깐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의 속삭임에 가깝게.

"미안."

윤대협은 그 순간 볼 안쪽을 꾸욱 깨물었다.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 나갈 것 같았다. 그건 고함일 수도 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울컥임일 수도 있고 이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어떤 단어일 수도 있었다. 도저히 짐작할 수 없어서 윤대협은 필사적으로 그 무언가를 억눌렀다. 그리고 내뱉지 못한 충동이 다른 방향으로 치달았다. 윤대협은 서태웅에게 빠르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밥 먹었어?"

"... 아니."

"지금 뭐 입었어?"

"연습할 때 입는 거... 티셔츠."

"너네 체육관에 샤워실 있어?"

"있어."

"오케이."

윤대협은 확인하고 싶은 걸 다 확인했다. 그다음에 튀어나온 말은 정말로 충동이었다.

"기다려."

그래서 서태웅이 듣거나 말거나 윤대협은 경쾌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윤대협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가진 것 중 가장 큰 배낭을 꺼냈다.

짐을 싸야 한다.

서태웅은 통화 마지막에 윤대협이 한 말이 뭐였는지 반신반의했다.

어떤 미친놈이 체육관 문을 쾅쾅 두들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미친놈은 윤대협이었다.

"여어~"

커다란 배낭을 들쳐 업은 채로 우비를 뒤집어쓴 윤대협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자러 왔어."

서태웅은 얼른 그 손목을 붙잡아 우악스럽게 체육관 안으로 끌어당기며 거의 동시에 문을 쾅 닫았다. 그 잠깐 동안 문 앞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그 정도로 바깥의 태풍은 여전히 살벌했다. 그리고 그걸 뚫고 능남에서 북산까지 온 미친놈이 있었다.

"와~ 죽는 줄 알았네."

서태웅은 아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태풍이니까."

"그렇지?"

윤대협은 왠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평소처럼 차분하지 않았다. 무슨 캠핑이라도 온 사람처럼 상당히 들떠 있었다. 서태웅은 자기도 모르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너... 무슨 길로 왔어. 해변으로 왔어? 너 그러다 쓰나미 오면 죽어. 자전거 탔어? 차 탔어? 그러다 브레이크 말 안 들으면 죽어."

"걸어왔습니다~ 산 중턱 골목으로만 왔고요. 나무 뽑혀서 날라 다니는 거 잘 피해 다녔습니다~"

서태웅이 눈을 크게 뜨자 킬킬 웃는다. 농담이라고. 서태웅은 묵묵히 윤대협을 노려보다 종아리를 퍽 걷어찼다. 아야야. 윤대협이 깽깽발을 두세 번 뛰었다. 하나도 안 아파 보였다.

서태웅은 윤대협이 우비를 벗는 걸 도와주었다. 나름대로 방수 효과는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우비 속의 상체도 습기가 가득 차 축축했다. 물론 윤대협에게는 너무 짧은 우비 밖으로 드러나 있던 무릎 아래보단 훨씬 나았다. 그쪽은 푹 젖어서 구제 불능이었다.

윤대협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줄을 당겨 거대한 배낭을 열었다. 커다란 목욕 수건이 하나, 둘. 일회용 칫솔 두 개. 치약. 반소매 티셔츠. 반바지. 돌돌 말린 오리털 침낭 하나. 그리고 놀랍게도 5단 도시락이 나왔다. 과연 윤대협 상체만 한 거대 배낭이 꽉 찰 법한 내용물이었다.

입이 살짝 벌어질 정도로 경악한 서태웅을 보고, 윤대협은 좀 쑥스러워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그런다.

"그냥 다 볶음밥이야. 시간이 별로 없어서..."

타이밍 좋게 서태웅의 뱃속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윤대협은 더없이 환히 웃으며 수저 두 벌을 꺼냈다.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따스한 김이 피어올랐다. 방금 만든 티가 풀풀 났다. 태풍 속을 뚫고 오면서도 식지 않았다.

서태웅은 눈앞의 광경을 천천히 음미했다. 언제나와 같은 북산 체육관. 그리고 언제나와 전혀 다른 시간. 반짝반짝 빛나는 농구 코트. 그 위에 너무나 이질적인 5단 도시락.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 속에 산처럼 쌓인 소박한 볶음밥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훈김.

"얼른 먹어. 식겠다."

그리고 윤대협.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내려온 윤대협. 차가운 뺨에 이제야 발그레한 혈색이 돌기 시작한 윤대협. 태풍을 뚫고 오느라 하의는 물을 빨아들인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잔뜩 젖었고 상의는 습기를 머금어 후줄근해진 윤대협. 집 안에 얌전히 있으면 되는데, 굳이 숙박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짊어지고 여기까지 찾아온 윤대협.

"윤대협."

서태웅은 많은 것을 느꼈다.

"응?"

그리고 딱 세 글자에 다 담아서 짧게 말했다.

"고마워."

윤대협은 잠시 굳었다. 전부 다 표현할 순 없었지만, 서태웅이 전하고자 하는 많은 것 중 대부분이 와닿았기 때문이다. 윤대협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동안 서태웅은 두 손을 모으고 중얼거렸다. 잘 먹겠습니다.

식사 시간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농구 코트 위의 볶음밥은 빠르게 사라졌다.

윤대협이 가져온 건 하나하나 쓸모 있었다. 서태웅에게 치약과 일회용 칫솔 하나를 쥐여주기까지 했다. 별로 젖었다고 걱정해 줄 필요도 없었다. 하나 있는 샤워실에서 야무지게 씻더니 가지고 온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제 집처럼 주저앉았다. 서태웅이 농구공을 던지자 가볍게 받았다가 다시 패스한다.

"씻었잖아. 땀 나는 건 좀."

흥. 서태웅은 코웃음 쳤다. 땀투성이로 자는 게 뭐 어때서. 서태웅은 오늘 정말로 잠들기 직전까지 농구할 생각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윤대협은 반대쪽 코트로 뛰어 가 혼자서 신들린 듯 농구하는 서태웅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을 지켜보기만 하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어슬렁어슬렁 다가간다. 서태웅이 공격 스텝을 밟는 순간 절묘하게 끼어들어 림 바로 앞에서 손끝으로 공을 쳐 냈다. 실제 사람의 수비를 전혀 예상치 못한 서태웅의 슛은 허무하게 내쳐졌다.

서태웅은 전혀 발끈하지 않았다.

"땀 나는 건 싫다며?"

그렇게 말하는 입꼬리에선 오히려 감추지 못한 미소가 꿈틀거렸다. 윤대협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공격할 차롄가?"

서태웅은 순순히 공을 넘겨주었다.

천둥소리가 두 명뿐인 체육관의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졌다. 윤대협이 림을 향해 돌진한다. 서태웅이 막아선다. 백열등은 태양이 아니라 빛을 잃지 않는다. 천둥이든 번개든 태풍이든 여기까진 올 수 없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누군가 잠들 때까지. 영원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 대 일의 시작이었다.


윤대협은 눈을 떴다.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리를 꿈틀거리자 아래 깔린 침낭이 바스락거렸다.

두 사람이 침낭 속에 들어갈 순 없었다. 윤대협은 침낭을 반으로 갈라 펼쳐서 요 대신 깔고, 샤워실 드라이어로 뽀송하게 말린 목욕 수건을 이불 대신 덮기로 했다. 서태웅은 하자는 대로 순순했다. 혼자서 어떻게 잘 생각이었냐고 물으니 그냥 체육복 덮고 잘 생각이었단다. 윤대협은 한숨을 푹 내쉬고 침낭 위에 누웠다. 팔 안을 톡톡 치자 서태웅이 쏙 들어왔다.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언제나처럼 윤대협에게 등을 돌리고, 윤대협의 팔을 베고, 다른 쪽 팔을 가져다가 가슴팍에 꼭 끌어안은 자세.

그런데 지금은 뭔가 달랐다.

서태웅의 속눈썹이 보였다.

윤대협과 서태웅은 마주 보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서태웅의 코끝이 윤대협의 연한 목 피부를 살짝 눌렀다. 쇄골 정도에 닿은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따스하고 습한 숨결 한 조각이 어렴풋이 간지러웠다. 깎아지른 이마 끝의 가지런한 눈썹, 그 아래 정돈된 속눈썹. 그것만 간신히 보이는 각도였다.

윤대협은 거의 똑바로 누워 있었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겨드랑이 근처에 머리를 괴고 엎드리듯 달라붙어 있었다. 평소와 달리 서태웅의 한쪽 팔이 윤대협의 상체를 가로질러 흉곽 위에 가지런히 얹혀 있었다. 무겁지 않았다. 따스했다. 이불보다도 든든하고 안락했다. 서태웅도 항상 이런 기분이었을까. 숨을 쉴 때마다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윤대협의 가슴을 따라 서태웅의 손도 순종적으로 상하운동을 했다.

반쯤 겹쳐 닿은 몸 어디도 배기는 곳 없이 편안했다. 그것만큼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닿는 부위가 달라 기분이 색달랐다. 등 전체에 닿을 때보다는 뭔가 허전하기도 했다.

윤대협은 약간 몸을 틀어 모로 누웠다. 서태웅을 조금 더 마주 보는 대신 몸과 몸 사이에 공간이 생겼다. 닿는 면적이 줄어들어 온기가 사라졌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등 뒤로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딱 달라붙는다. 서태웅이 잠결에 다리 하나를 들어 윤대협의 허벅지 근처를 대충 감았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만족스럽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우주같이 달콤한 잠 속으로 빠져들려는 순간.

체육관 문이 쾅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대협과 서태웅이 번쩍 눈을 떴다. 짠 것처럼 동시에 상체를 일으켰다.

송태섭, 정대만, 강백호, 이달재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간신히 입을 열 배짱이 있는 건 강백호 뿐이었다.

"여... 여우 너 이 자식... 신성한 코트에서 무슨 짓을...!"

"여어, 강백호. 오랜만이네."

"윤대협!!! 니가 왜 여기 있냐고!!!"

"시끄러워 멍청아..."

강백호와 서태웅이 평소처럼 순조롭게 시비를 털기 시작했다. 티격태격하다가 그래 농구로 붙자면서 벌떡 일어나서 서로의 멱살을 잡고 림을 향해 척척 걷는다. 혼자 침낭 위에 덜렁 남은 윤대협은 무심하게 콧잔등을 긁었다. 집에 가고 싶어졌다.

그 꼴을 바라보고 있던 정대만이 드디어 정신줄을 잡고 송태섭에게 조용히 물었다.

"쟤네... 무슨 사이냐?"

송태섭이 움찔했다. 심호흡으로 어떻게든 가슴을 진정시키고. 송태섭은 힘주어 말했다.

"자는 사이래요..."

"허어?????"

"자는 사이라고요..."

"이런 미친..."

"야 이것들아!!!!! 그만 싸우고 대걸레 가져와서 여기 젖은 바닥 닦아!!! 윤대협 너도!!! 썼으면 치워야 될 거 아냐!!!!"

송태섭은 세 번 말할 엄두까진 나지 않았다. 그래서 울분을 질서 유지에 토해내기로 작정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이 사단의 주범들에게 청소와 정리를 지시하기 시작했다. 윤대협은 엥? 나도? 같은 말을 하면서도 거대한 배낭에 갖가지 살림살이를 척척 개어 넣더니 (무려 텅 빈 도시락도 있었다. 서태웅의 엄마냐 너는?) 시키는 대로 야무지게 청소를 해냈다.

절대로 교복이라 봐주기는 어려운 반소매 반바지에 능남 농구부 체육복을 걸친 꼬라지로 윤대협은 할랑할랑 손을 흔들고 떠났다. 서태웅은 고개만 까딱해서 배웅했다. 자는 사이...치고는 담백한 인사였다. 아 뭐라는 거야 진짜! 송태섭은 소름이 돋은 양 팔을 벅벅 긁었다.

서태웅은 생각했다.

이제 일기예보 잘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