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지 마
불면의이쑤신
인간은 본디 해가 지면 졸리고 해가 뜨면 눈도 절로 뜨이도록 설계되어 있다고들 한다. 농경시대에는 예외가 없었다지만 전기의 발명 이후로는 그렇지도 않은데. 현대 사회에도 해 지는 순간부터 졸다가 해 뜨면 반짝 눈을 뜨는, 생물로서 설계에 충실한 호모 사피엔스가 더러 있었으니.
서태웅도 그중 한 명이었다.
여름 새벽은 이르다. 겨울이라면 아직 새카만 어둠에 잠겨 있었을 시간에도 벌써 낮처럼 환하다. 먼 바다의 해무 사이로 낮게 떠오른 햇살은 찹찹하고 습한 밤공기를 미처 데우지 못했다.
미지근한 해무의 입자가 얼굴을 감싸는 바닷길을 자전거로 가르면 억지로 일으킨 바람이 옆머리를 시원하게 넘겨 준다. 쿨러보다 기분 좋다. 서태웅은 위험한 줄도 모르고 살짝 눈을 감고 즐긴다.
갈 때는 웜업, 돌아 올 땐 쿨다운을 핑계로 조금 멀리까지 페달을 밟는다.
익숙한 공원에 자전거를 세우면 피부가 딱 좋은 열기 한 겹을 두른 느낌.
가져온 공을 꺼내 두어 번 튕겨 본다. 스트레칭 겸 가벼운 점프슛. 경쾌한 골인. 날숨을 한 번 크게 내려놓으면.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다음부터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한다.
이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같은 새벽. 아직은 다정한 정도로 밝아 오는 하얀 햇살. 그 너머에서 림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선 누군가를. 그의 스틸과 포스트업과 리치와 단단하게 버티고 선 하체와 끈질긴 디펜스를. 서태웅은 항상 상상한다. 몸에 익은 패턴을 반박자 빠르게, 한층 더 날카롭게, 알아도 못 막을 정도로 정확하게. 또는 페이크를 섞어서, 또는 정반대로 뒤집어 보기도 하고.
잔상과 혼자 씨름하는 농구도 꽤 재밌다. 아는 퍼즐을 다시 풀어 보는 느낌. 서태웅은 바둑이나 장기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사실 복기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으로 꿰어 지나온 모든 수를 다시 한 번. 한 끗 차이로 달라질 수 있었던 수많은 평행우주의 플레이를 현실에서 재차 자신의 몸으로 통과해 본다.
하지만 역시 실물이 있는 것만 못하다. 특히 디펜스는 연습이 어렵다. 아무도 달려들지 않는다.
혼자서 공격에 성공한 서태웅이 땅으로 내려왔다. 림을 통과해 함께 땅에 떨어져 처음엔 크게, 점점 작게,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 오르다, 종내에는 땅바닥을 굴러가는 농구공이 멈출 때까지.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었다.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의 공기를 긁으며 섞이는 거친 숨소리는 자신의 것. 뒷덜미를 뜨겁게 달구는 기분 좋은 심장박동도 자신의 것. 다른 소리는 없다. 다른 사람은 없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
사실은 기다리고 있다.
움직임을 멈추면 자연히 숨이 커진다. 숨이 커지면 자연히 호흡이 정리된다. 거칠었던 것이 고르게 정리되며 차분해진다.
성큼성큼 걸어가 멈춰 있던 농구공을 드리블로 되살린다. 다시 시작. 기다림이 아니라 숨 고르기였다는 듯이. 사실은 그랬을지도 모르고.
기다림이 뒤에서 바짝 쫓아온다. 뒤통수가 따갑도록 노려보고 있다. 신경 쓰지 말아야 해. 떨쳐 버릴 수 있다. 끝내주는 돌파로. 재빠른 점프로. 멋진 슛으로. 그림자와 춤추는 사람처럼 서태웅은 신명 나게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싸운다.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상대와 싸운다.
발을 멈추는 순간, 얼굴의 윤곽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비처럼 굵은 땀방울. 이상하게 한창 뛰는 도중엔 땀이 흐르지 않는다. 맺혀만 있다가 멈추면 그제야 콧날 위며 눈머리 앞을 아슬아슬하게 가로지른다.
속눈썹을 크게 깜빡여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털어낸다. 습하고 덥한 날일수록 땀을 푹 내는 편이 오히려 개운하다. 바람이 불어 말려 주면 시원해지기도 하고.
어느새 태양이 머리꼭지를 강렬하게 비춘다. 적당히 가야 할 시간이라는 뜻.
한 시간 조금 넘게 놀고 여덟시 정도에 서태웅은 돌아간다.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그러면 나른해진다. 눈치 안 보고 낮잠을 잔다. 방학이니까. 부 활동이 있는 날만 졸면서 등교.
공을 둘러메고 갈 준비를 마친 서태웅이 자전거 손잡이를 붙들고 한 번 뒤를 돌아본다. 텅 빈 공원의 농구 코트에는 아무도 없다.
등장할 타이밍을 충분히 만들어 줘도 기다리는 녀석은 오지 않았다.
흥. 맘대로. 서태웅은 쉽게 돌아섰다.
힘차게 페달을 밟아 바람을 일으킨다. 실컷 땀 흘려 촉촉해진 피부를 시원하게 말려 주는 여름 바람.
오지 않을 걸 알면서 계속 기다리는 건 딱히 보답 받지 않아도 충분히 즐겁기 때문이다. 싫으면 관두면 그만인데. 여차하면 그 녀석이 나타날 만한 장소를 고른 것도 맞지만, 웜업과 쿨다운에 딱 좋은 거리인 것도 맞고. 서태웅에게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자각 같은 건 없었다.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뿐.
그래서 오늘도 윤대협에게 졌다는 기분은 없었다.
부 활동은 한시가 조금 넘어서야 끝났다.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나니 쏟아지는 졸음.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의 가장 뜨거운 태양이 이글대는 한낮 동안 서태웅은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오후 네시에도 작열하는 태양. 하지만 몸이 가뿐하다. 태양 정도는 이길 수 있다.
서태웅은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한다. 어머니가 보랭 물병에 얼음을 가득 담아 주셨다. 꾸벅 감사를 표하고 가방 속에 집어넣는다. 묵직하다.
이번엔 뛰어가야지. 서태웅은 현관에 몸을 구기고 앉아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인다.
“다녀오겠습니다.”
문을 열고 환한 햇빛 속을 걷는다. 보이는 모든 것의 채도가 한층 선명하다. 그래도 하교할 때보다는 훨씬 고도가 낮다. 지난주에도 가볍게 뛰어갔지. 이번 주에는 한 단계 올려볼까. 해변까지 걸어가서 모래사장을 뛰기로 결정.
공과 물병과 수건이 들어 있어 제법 묵직한 가방, 발이 푹푹 빠지는 해변, 그리고 여름. 딱히 모래주머니 같은 걸 발목에 묶지 않아도 충분한 페널티. 익숙해지면 다음 주에는 이 조건으로도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여름내 체력을 늘려야지. 어떤 짐도 없는 농구 시합, 모래사장도 아닌 농구 코트, 여름도 아닌 가을과 겨울의 윈터컵에는 세제곱 가벼운 몸으로 하늘을 날 수 있도록.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하지의 태양에 달궈진 모래사장 위를 천천히 달린다. 아스팔트가 뿜는 끈적거리는 열기보단 훨씬 산뜻한 기분. 파도 소리 덕분에 청각도 시원하다. 해무에 반쯤 삼켜진 후지산이 아련하다.
서태웅은 규칙적으로 발을 뻗었다. 무리해서 속도를 올릴 필요는 없다. 달리기 시합도 아니고. 힘을 다 빼면 안 되니까.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포기하지만 않으면 된다. 지금의 꾸준함이 반드시 무기가 된다. 귓가에 울리는 비트 센 음악이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익숙한 코트가 가까워질 때.
드리블 소리가 들렸다.
서태웅은 규칙적으로 달리던 발을 천천히 멈춰 세운다. 카세트테이프를 멈추고 이어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가슴이 약간 철렁.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니.
내 코트…
일단 공원 뒤쪽의 수돗가로 후퇴.
레버를 돌리고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에 머리꼭지를 냅다 집어넣는다. 처음에는 뜨뜻미지근하더니 나중엔 제법 차갑다. 정신이 번쩍 든다.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대충 머리를 닦고 푸르르 흔들어 턴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서태웅은 입구 쪽 철망 앞에 다가섰다. 줄 선 식당 앞에서 대기하는 사람처럼 멋쩍게 서서 동태를 살핀다.
먼저 농구장을 차지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키가 제법 크다. 농구부인가. 탕, 탕, 시원한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른 공을 멋지게 림에 집어넣고. 돌아선 얼굴은.
“어?”
이 농구 코트에 서태웅을 처음 데려왔던 사람.
“서태웅이잖아.”
서태웅이 항상 기다리지 않는 척 기다리는 사람.
“안녕.”
윤대협이었다.
서태웅이 집 근처 농구장을 놔두고 여기까지 오는 이유는 애매했다. 웜업은 확실히 핑계에 가깝고. 처음에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자꾸 향했다. 강렬한 기억이 형성된 장소라 그런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명명해 주지 않아서 충분히 알아주지도 못한 그날의 감정. 기억 속의 장소에 자주 방문하고, 떠올리고, 혼자서 농구하는 것으로 조금씩이나마 소화해 왔는지도 모른다.
윤대협을 만나면 좋다. 그런 생각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나오지 않아도 나쁘지 않았다. 막상 부딪혀 보니까 나올지도 모른다는 미묘한 두근거림 속에서 농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결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패배가 분하다고 농구를 그만두지 않듯이. 만남이 없었다고 해서 기다림을 그만두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윤대협이 먼저 와 있으니까…
“거기서 뭐 해?”
활짝 웃으면서 인사를 하니까…
“농구하러 온 거 아니야?”
좀… 별론데.
서태웅은 윤대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림을 등지고 서서 양쪽 무릎을 하나씩 가볍게 털고 있다.
왜 저 자식이 실실 웃고 있으면 기분이 별로일까? 마음이 꿈쩍인다. 심장박동이 불규칙하다. 얹힌 것처럼 불편하다. 없을 때는 없어서 아쉽고, 막상 있으니까 또 재수가 없다니. 도움이 별로 안 되는 녀석인 듯. 농구만 빼고.
서태웅은 일단 질문에 대답했다. 윤대협을 향해 턱을 까딱.
“먼저 왔잖아.”
윤대협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이마 선을 좀 긁적이더니.
“어... 내가 맡아 둔 셈인가?”
또 웃는다.
“그런 걸로 하자. 너 올 때까지 맡아 둔 거니까. 빨리 들어와.”
부드럽게 휘어진 윤대협의 눈가를 따라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서태웅은 그 기분을 완벽하게 알았다. 막상 뛸 때는 맺혀 있기만 하다가 발을 멈추는 순간 후두둑 비처럼 쏟아지는 땀방울. 기분이 좋아서 자꾸 실실 웃나 보군.
어쨌든 먼저 온 놈이 괜찮다니까. 서태웅은 순순히 짐을 내려놓고 공을 꺼냈다. 방금까지 잘만 갖고 놀던 자기 공은 어디 처박혀 있는지, 윤대협은 림 앞에 몸을 낮춘 채 서태웅을 기다리고 있다.
윤대협의 눈이 반짝거린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 짙은 그림자가 생길 정도로 크고 견고한 디펜스 자세를 본 순간. 서태웅의 전신에 어쩔 수 없이 짜릿함이 감돈다.
이걸 기다렸으니까.
여태껏 기다린 것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지만.
막상 눈앞에서 만나면.
서태웅은 그 감정을 말로는 잘 설명할 수 없었지만…
신체적인 변화는 분명했다. 일단 심장박동이 거칠어진다. 빨라진 고동이 혀뿌리를 타고 입안에서 두근거린다. 웜업을 안 해도 될 뻔했다. 그만큼 열이 치솟는다. 목덜미에서. 뺨에서. 이마에서. 주먹을 꾹 쥔다. 눈썹 머리가 저절로 모인다. 뱃속에 고여 드는 열을 터뜨리고 싶다.
아마 나는 화가 난 거겠지?
턱을 당겨 림을 막아선 적의 얼굴을 노려본다. 뭐가 좋다고 처웃고 있지.
아마도 내가 화난 건 윤대협이 웃고 있어서겠지. 서태웅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기다리긴 했지만 만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던 곳에서 윤대협을 만나고 나서부터. 서태웅은 윤대협의 미소가 계속 거슬렸다.
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싶다.
쳐부숴 주겠어. 웃음이 안 날 때까지.
서태웅은 포악하게 드리블을 시작하며 자세를 낮췄다. 나직하게 씹어 뱉는다.
“웃지 마.”
“응?”
윤대협이 못 알아들은 사이 재빠르게 파고든다. 방심한 줄 알았던 윤대협은 그렇지도 않았다. 어딜, 하듯이 막아서려 했지만 죽기 살기로 달려든 서태웅보다는 0.1초 정도 느렸다.
공은 시원하게 림을 통과했다.
어떠냐. 의기양양 돌아본 곳에 선 윤대협은. 휘유. 휘파람을 불더니.
“이제 잔재주도 잘 부리네.”
또 웃었다.
서태웅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웃지 마.”
“응?”
공을 주워 와서 패대기치듯 드리블을 하면서 서태웅이 중얼거린다. 윤대협은 여전히 못 알아듣는다. 서태웅은 이제 숫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웃지 말라고.”
“응?”
못 알아듣는 척인가. 여전히 빙글빙글 웃는 얼굴.
서태웅은 이를 악물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 최고 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순환계. 그야 있는 대로 열받았으니까. 이번에 넣으면 얼음물 마시고 와야지.
실패했다. 비등했는데 마지막 순간 윤대협의 블로킹이 공을 스쳤다.
이긴 판에만 물 마실 거야. 서태웅은 비장하게 디펜스 위치에 섰다. 윤대협은 여전히 웃고 있다. 열받아. 목이 말라서라도 이번엔 막아내야 한다.
한참 동안 아무도 공격에 성공하지 못했다. 역시 디펜스가 빡세다. 그래도 아침부터 이미지 트레이닝한 효과인지. 서태웅은 윤대협의 움직임을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결국 공격권을 뺏어 왔다.
윤대협은 이겨도 웃고 당해도 웃는다. 일 대 일은 막아낼 수 있는데 저놈의 빙그레한 웃음기는 막을 재간이 없다. 서태웅은 입을 축인 다음에도 한참 동안 보랭병을 목덜미에 갖다 대고 열을 식혔다. 답답하다. 혼자서 기다릴 때보다도 더. 왜지. 실물이 있는 편이 확실히 더 재미있는데. 너무 재밌어서 오버페이스가 되진 않아야 한다. 좀 더 침착해지기로.
“나도 한 입만.”
가까이 다가온 윤대협에게 흔쾌히 물병을 내민다. 내 물이 더 시원하니까. 얼음도 들었다. 어떠냐.
윤대협은 매너 있게 입술도 안 대고 콸콸 얼음물을 마신다. 너무 많이 마시면 배 아플 텐데.
“고마워.”
물병을 돌려주는 윤대협과 손가락이 스쳤다. 방금까지 보랭병을 쥐고 있었는데도 뜨끈하다. 온도차 때문에 서태웅이 움찔한다.
윤대협도 느꼈나 보다. 물병을 정리하고 돌아서다 서태웅은 갑자기 양쪽 삼각근을 윤대협의 커다란 두 손으로 콱. 붙잡혔다.
서태웅은 내심 깜짝 놀랐지만. 눈이 조금 커진 것 외에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너 엄청 시원하다. 피부가.”
윤대협이 감탄한다. 쓱쓱 팔꿈치까지 손을 쓸어내리며 감촉을 즐긴다.
“아 뜨거워.”
서태웅이 질색한다. 옷 입기 싫어하는 어린애처럼 팔을 하나씩 쳐들어 빠져나온다. 윤대협은 하하 웃었다.
“미안. 내가 열이 좀 많아서. 넌 시원해서 좋겠다.”
“덥거든. 멍청아.”
“칭찬한 건데…”
서태웅은 뜨끈한 윤대협의 체온이 남아 있는 팔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문댔다. 차가운 보랭병의 기운이 남은 자신의 손과 분명하게 감촉이 다르다. 자욱이 난 것처럼 선명하다.
윤대협은 욕을 먹고도 웃고 있다.
“이번에 내가 넣으면 더 만지게 해 주라.”
개소리도 한다.
“헛소리하지 말고 덤벼.”
“왜? 자신 없어?”
“웃지 마. 멍청아.”
“너 할 말 없으면 멍청이라고 하는구나.”
서태웅이 형용할 수 없는 분노에 턱을 악문 사이 돌진해 온다. 주둥이 페이크. 두 번은 안 당해. 뜨끈뜨끈한 윤대협의 거대한 신체가 가까이 밀착한다. 부딪히고 미끄러진다. 아지랑이를 몰고 다니는 윤대협은 그 자체로 태양이다. 델 것 같아도 서태웅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시작된 대결은 한참을 이어졌다.
“웃지 마.”
“응? 뭐라고 했어?”
가끔 잊어버릴 만하면 이런 대화도 아닌 걸 주고받으며.
일 대 일에는 파울 불 심판도 없으니 좀 거칠어질 법도 한데. 서태웅은 오로지 스피드 믿고 제끼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타입인지라 그렇지도 않았다. 윤대협도 파울 관리가 기가 막힌 타입인 만큼 위험한 플레이는 거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패턴만큼은 둘 다 피할 수가 없었는데. 서태웅이 야심차게 파고드는 걸 윤대협이 간파하는 바람에 너무 정확히 가로막으면.
제대로 부딪혔다.
크게 나가떨어져도 서태웅은 별생각이 없다. 아야. 그 정도. 엉덩이로 떨어져서 별로 아프지도 않다. 그런다고 돌파를 포기할 성격도 아니다. 다음에는 더 빨리. 더 낮게. 막을 테면 막아 보라는 생각뿐.
다가온 윤대협이 오른손을 내민다.
“괜찮아?”
웃지 않는다. 오늘 처음인데. 서태웅은 순순히 손을 잡고 일어난다.
“좀 쉬자.”
윤대협은 혼자 맘대로 그늘로 걸어간다. 혼자 남아 미련이 남는 듯 림을 쳐다보다가. 서태웅도 수건과 물병을 챙긴다. 벤치 놔두고 철망 앞에 털썩 주저앉아 기대 있는 윤대협의 옆에 주섬주섬 앉는다. 이마와 목의 땀을 훔쳐내고. 이제 거의 다 녹은 물을 머금고.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해가 지려나 보다. 하늘은 언제부터 주황색이었던 건지. 어느새 아래쪽부터 분홍색, 보라색, 파르스름하게 채도가 흐려진 색으로 물들고 있다. 저녁은 낮은 곳에서부터 온다. 도대체 얼마나 지난 거야. 윤대협과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드리블 소리가 멈춘 공원은 조용하다. 바람이 얼굴을 만진다. 땀이 식는다. 서태웅은 눈을 감았다. 심장박동이 천천히 잦아든다. 기분 좋아. 축축해진 수건과 옷에서 풍기는 자신의 땀 냄새와 섞여 드는. 옆에 앉은 녀석의 뜨끈한 체취.
지금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노을을 볼 때도 윤대협은 웃고 있을까?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윤대협이 보인다. 서태웅은 흘긋 곁눈질했다.
멍 때리고 노을이나 감상할 줄 알았던 눈동자가 서태웅을 똑바로 본다.
“왜?”
눈이 마주친 윤대협이 묻는다. 얇은 입꼬리가 슬슬 올라간다. 시원한 눈매는 그 끝과 만날 것처럼 내려온다. 크게 휘어진다.
“웃지 마?”
심장박동이 다시 튄다. 평온은 끝났다.
이 새끼 역시 못 들은 척한 거잖아.
서태웅은 벌떡 일어섰다. 왠지 앉아 있을 수 없다. 마음이 그렇다. 들쑤셔졌다. 성큼성큼 걸어가 제 공만 낼름 챙긴다. 머리에 덮어 뒀던 수건과 물병을 가방에 쑤셔 넣는다.
대강 갈 준비를 끝내고 돌아보니 윤대협도 주섬주섬 일어서서 이쪽으로 어색하게 걸어오고 있다. 약간 놀란 듯한 얼빠진 얼굴. 서태웅은 냉정하게 말했다.
“간다.”
“어어…”
당황한 듯한 윤대협을 두고 돌아선다. 갈 때는 천천히 걸어가야지. 지루하면 좀 뛰고.
코트를 벗어나기도 전에 다급한 목소리가 뒤통수를 잡는다.
“태웅아!”
서태웅은 멈췄다. 뭐 두고 간 거라도 있나. 물끄러미 윤대협을 바라본다.
림을 등지고 선 윤대협의 얼굴은 태양의 고도가 낮아진 탓에 콧날 그림자가 크게 드리웠고 노을이 비쳐 조금 분홍색이다. 웃음기가 별로 없는 윤대협이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거린다. 할 말이 있는데 고르고 있는 듯이.
한참을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혹시 화났어?”
서태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난 화가 났나?
그런 것 같긴 하다. 특히 윤대협이 실실 처웃을 때. 딱히 깨진 것도 아니고 비등한 실력인데. 뭣하면 아침의 이미지 트레이닝 덕을 봐서 평소보단 제법 윤대협을 잘 읽고 있는데. 그런데도 화가 나는 것 같다. 특히 윤대협이 웃고 있으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정말로 화가 난 건 아니다. 불쾌하거나. 한 대 패고 싶거나. 용서할 수 없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랬다면 진작 집에 갔겠지. 혼자 윤대협을 생각하며 농구하는 것보다 진짜 윤대협이랑 둘이 농구하는 게 당연히 더 재밌다. 실실 웃지만 않으면…
서태웅이 한참을 선 채로 진지하게 대답을 찾고 있을 때. 윤대협이 툭 물었다.
“져서 그래?”
서태웅의 두 눈에서 번쩍이는 광선이 윤대협을 찌른다. 하지의 햇살보다 강렬하다.
내가 언제? 서태웅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말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오늘 서태웅은 이기지도 않았지만 지지도 않았다는 걸 서태웅도 알고 윤대협도 알고 농구 골대도 안다. 이건 분명히 도발이다.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서태웅은 제대로 도발 당했고. 도발에 순순히 넘어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윤대협을 만나면 언제나 그랬듯이.
성큼성큼 제자리로 돌아와 둘러맨 가방을 다시 벗어 던지고 공을 꺼낸다. 윤대협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슬슬 돌아와 있다.
“그렇게 나와야지.”
“지는 게 뭔지 알게 될 거다.”
“하하하. 그래, 그래.”
“웃지 마.”
“알았어.”
서태웅은 공을 붙잡고 길게 심호흡했다. 다시 기꺼이 림 앞에 버티고 선 큼직하고 견고한 디펜스 자세. 웜업 없이도 심장이 재빠른 속도를 되찾기 시작한다.
도발에는 도발로. 일부러 속눈썹이 스칠 만큼 바짝 다가가서 천천히 드리블한다. 뺏을 테면 뺏어 봐. 빈틈없는 서태웅의 자세를 탐색하듯 윤대협은 팔을 위아래로 움직인다. 쉽지 않을걸. 물론 서태웅도 돌파 타이밍이 쉽지 않다. 앞뒤로 조금씩 이동하며 대치가 계속된다.
윤대협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가지 마.”
“뭐?”
서태웅의 눈이 커진 찰나. 재빠른 바람이 옆을 스친다. 이런.
서태웅은 바로 뒤돌아 공을 쫓지만 이미 늦었다. 보기 좋게 볼을 뺏겼다. 맨 첫판을 뒤집은 듯한 전개. 승리의 미소를 마음껏 걸친 채로 윤대협은 느긋하게 드리블한다.
“방심.”
“죽인다 너.”
“하하하, 잘 좀 해 봐.”
활짝 웃는 얼굴.
“웃지 말라고.”
분노를 가라앉히려 서태웅은 크게 심호흡했다. 내쉬는 숨이 가슴과 함께 떨린다.
소원대로 해 주지.
서태웅은 오늘 절대 집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의 볕은 길다. 노을도 길다. 일 년 중 가장 길다. 손바닥도 안 보일 정도로 캄캄해질 때까지 떠나지 않을 것이다. 윤대협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는 기적이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경쾌한 드리블이 다가온다. 디펜스는 이미지 트레이닝으론 쉽지 않다. 서태웅은 기분 좋게 자세를 낮췄다. 후우, 숨결을 내쉬며 집중한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서로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기울인 순간. 윤대협의 얼굴에서, 얇은 입꼬리와 시원한 눈매에서, 마침내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이게 좋다.
그러니까 웃지 마.
기다린 적 없는데 매번 선물처럼 나타나는 녀석이 있다. 예전에 학교 앞 건널목에서 그랬고. 그날 딱 한 번 데려온 농구 코트에 오늘 또. 여름의 정취, 갑자기 나타나는 서태웅. 뭐 그런 건가. 언제나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 아무 일정도 없고 마침 주머니에 소시지 있는 날에만 마주치는 고양이처럼.
웃지 말라고 자꾸 시비를 거는데.
무리가 있는데…
윤대협은 서태웅이 그 말을 할 때마다 더 웃음이 났다. 하지의 열기 속에 광대와 목덜미와 온몸이 발갛게 익은 채로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웃지 말라고. 윤대협에겐 이 세상에서 제일 웃긴 모습이었다. 서태웅의 그런 모습을 떠올리기만 하면 고된 훈련으로 죽상을 하고 있다가도 배시시 미소가 나올 것 같았다.
웃지 말라는 으름장을 들을수록 웃어 주고 싶어진다. 괴롭히고 싶어서는 아니고…
사실 서태웅은 내가 웃는 걸 좋아하니까.
윤대협은 알 수 있었다. 딱히 근거를 들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서태웅은 윤대협을 코트에서 발견한 바로 그 순간부터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인다. 컨디션도 끝내줘서 이 더운 날에 거의 무슨 새처럼 날고 있다. 젊음이 좋긴 좋아.
서태웅도 이 근처에 사나? 아니면 지난번에 내가 데려온 이후로 마음에 들어서 종종 오는 걸까? 북산 체육관 놔두고 이 더운 날 굳이? 혹시 나 때문에 매일 오나?
우쭐한 기분 속에 윤대협의 컨디션도 최상이다.
들뜬 마음에 조금 심하게 놀렸더니 바로 가 버리려고 한 건 놀랐다. 다음에는 조심해야지.
내가 다음에 언제 또 여기 올진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가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