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협전
불면의이쑤신
<비익연리> 앤솔로지 수록무릇 일대기를 남길 만한 위인이란 모름지기 탄생부터 비범해야 적격일 터.
그렇다면 평범과 비범을 어찌 나누면 좋으랴?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는 것이 부모의 자연한 심정일진대. 요즈음은 어린애가 조금만 입을 뻥긋하여도 신동이다, 천재다, 아니다 영재다, 아니다 수재다, 점점 더 호들갑이 추가되는 무슨 무슨 말들을 붙여가며 자식 자랑에 요란을 떠는 전염병이라도 도는 기색이지 않은가.
그러나 기실 조그마한 땅덩이에 유난한 재능이 몰릴 까닭 있으랴. 백 명에 한 명이라면 금방 잊을 일이요, 천 명에 한 명이라면 고을에선 알아줄 법하고, 만 명에 한 명이라면 산 넘고 물 건너 이름이 나리니.
그런즉 한 동네 신동이 둘이라면 모를 이가 없으렷다.
신동은 저마다 예사롭지 않은 꿈을 무슨 예고처럼 제 부모에게 건네주고 탄생하는 법.
대대로 요직을 두루 거쳐 무관으로 출세한 윤 장군. 성품이 강직하나 말수가 적은 이로 독특한 겸손을 갖추었으니, 누구든지 둘째 아들 칭찬을 건넬 때마다 퉁명스레 툭 던지는 대꾸가 일정한 양반이라, 아랫것들도 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훤히 꿰고도 남을 지경인데.
말인즉 대협의 태몽은 다름 아닌 청룡이요, 그것도 안마당에서 솟아오른 청룡이 저 하늘 너머 굽이굽이 드높은 봉래산의 협곡을 넘어 상서로운 빛을 쏟는 하늘 꼭대기를 향해 갔다는 게다.
"범상한 아이라면 되레 실망스럽소."
그것이 아비되는 윤 장군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더라.
대협은 아비도, 어미도, 대협이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의 태몽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줄줄 꿰고 있는 고을의 모든 어른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던데. 돌잔치도 하기 전에 갖추어 문장으로 말을 하였고, 형제가 물려 준 천자문을 짚으며 따라 읽으며, 세 돌에는 이미 붓글씨를 쓸 수 있어 구경거리가 났다지.
평생을 말잔등에서 보낸 윤 장군은 아들의 총명을 보고 크게 놀라 제 깜냥엔 감당이 어림없다 느꼈는가, 일찍이 한 동네에서 나랏일과 우애를 나누던 서 재상에게 상의하였고, 서 재상 본인이 아이에게 큰 흥미를 느껴 직접 스승을 자처하였다는데. 논어를 줄줄 외는 조그마한 대협의 머리꼭지를 구경하며 서 재상은 한숨을 쉬며 이랬다더라.
"곧 가르칠 게 없겠구나."
그 조그마한 게 시와 글을 외우는 것은 이젠 여상할 지경이요, 한층 놀라운 일은 성현의 지혜와 기록에 주석을 달고, 제 뜻을 조리 있게 펼치는 모습이어라. 그중에서도 손에서 놓을 줄 모르는 책이 각종 각양 병법서라. 스승을 따라 사서삼경을 눈 깜빡할 찰나에 떼는 와중에도 무슨 언문으로 이야기책 읽는 듯이 흥미진진 탐욕스럽게 읽어 내려가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더라. 상상력이 풍부하고 생생한 어린 대협에게는 실상 재미였는지도 모르는 일.
대협은 글로 읽고 머릿속에 그리는 데서 멈추지 않았는데, 작은 아이가 병법을 써먹고 익히는 전장은 다름 아닌 스승과의 바둑판이더라. 처음 가르칠 때야 열 집을 접어주었지만 그것도 일곱 살이 되기 전에 대등해지매, 열 살을 넘기고는 대체로 스승이 먼저 돌을 던지더라.
무뚝뚝한 윤 대감은 내색은 안 했지만, 누군들 걷기 전부터 못 읽는 책이 없는 대협이 신통하지 않고 배기랴. 빠지는 데는 없더라도 동생의 총명에는 미치지 못하는 첫째 아들이 아비를 닮아 무예를 힘쓰면 될 노릇, 거기에 신동으로 명성이 자자한 둘째는 스승 못지 않은 아니 청출어람 재상감이니, 각자가 문무에서 제 몫을 하면 자식 농사 백 년에 한 번 있을 풍년 중의 풍년이라며 앞서 흐뭇하기 그지없었다던데.
그러나 아비가 미처 몰랐던 것. 장래 청년으로 자라난 윤대협은 무예조차 출중하였던 게야.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를 꼽자면 어려서부터 병법서를 이야기책처럼 줄줄 꿰던 아이가 아닌가. 책상머리 전술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창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활을 쏴 보고 싶은 것이 지식을 머릿속이 아니라 온몸에 새겨야만 즐거운 대협의 순수한 마음이요 진실로 타고난 비범함이더라.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더라지만.
사태가 이렇게 되니 한 지붕 아래 형제들은 시기할 기력도 경쟁할 엄두도 못 내는 것이 당연지사. 뿐이랴 도성의 모든 또래가, 더러는 손윗세대의 선비들마저도 혀를 내두르며 윤대협에게는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모양이더라.
단 한 명만을 예외로.
윤대협도 웃으며 지나칠 수 없는 호적수가 있었으니.
다른 누구도 아닌 어린 시절 은사님, 서 재상 댁 막내아들이었더라.
그 또한 신동은 신동이라 빠짐없이 예사롭지 않은 꿈을 등에 업고 났다던데. 딸부잣집 마나님께서 어느 날 아침 잔뜩 신이 난 기색으로 거창한 태몽을 고하시매 들어보니, 새하얀 새끼 곰이 품 안에 달려들어 이내 부인을 등에 매달고 날렵하게 바다를 건너갔다더라. 이는 드디어 집안에 용맹하고 복스러운 아들이 태어날 징조라며 집안이 경사 일색이었다지.
헌데 그 마나님 몸 푸신 날이 다른 날도 아니요 한 해 모든 날의 정결한 시작으로 정월 초하루가 아닌가. 필시 범상찮은 인재가 난 것이라며 너나없이 수군대더라. 이때 윤대협은 막 돌을 지나 천자문을 떼던 중이렷다.
서 재상 댁 막내아들 태웅은 거창한 태몽과 달리 평범하게 자라는 듯싶었는데, 다만 걷고 뛰는 게 남들보다 배는 빠를 뿐이더라. 더구나 아비가 글 가르치는 옆집 신동의 총명에 비교하자면 아둔한 편이 아닌가 하는 시샘이 날 법도 하련만. 막상 서 재상은 돌 지나기도 전에 걷자마자 뛰는 아들내미 볼 때마다 입꼬리를 내릴 줄을 모르더라. 말년에 얻은 자식이 그저 건강하게 뛰어다니는 것만 봐도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행복이렷다.
그러나 끝까지 평범했다면 애초부터 이야깃거리도 아니었을 터.
서태웅은 두 살도 되기 전부터 말잔등에 올려달라 그렇게 고집을 부리더니, 기어이 세 살 되던 해에 망아지를 타고 달리더라. 망아지라 한들 사람을 태울 만 하니 사람의 어른보다는 키가 큰 짐승일진대, 아장아장 아기 발엔 맞는 안장이 없어 특별하게 맞출 지경이라.
그뿐이랴. 다섯 살이 되었을 땐 활쏘기를 배우더니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말을 달리며 과녁을 겨누고 더러 나는 새를 맞춰 오니 부모는 기절할 노릇이렸다.
담을 이웃한 두 양반댁의 입장이 뒤집어지니 이번엔 서 재상이 옆집 윤 장군을 버선발로 찾아갈 때라. 윤 장군은 매우 기뻐하며 태웅의 단풍 같은 손에 직접 깎은 단단한 목검을 쥐여 주고 무예를 가르치겠다 나섰다던데. 말을 재촉할 때, 활시위를 당길 때, 몸을 움직일 때 어린 서태웅은 별처럼 눈을 빛냈다더라.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는 첫째가 망아지 때부터 함께 자란 저희 집 말이요, 둘째가 꼭 한 살 차이 옆집 신동 윤대협이라.
그러나 아뿔싸, 어린 윤대협의 첫째 친구는 책이요 둘째가 서태웅이라. 서로가 둘째가는 친구요 사람으로서는 첫째가는 놀이 상대일진대.
"윤대협. 나와라."
제 집처럼 밀고 들어와 윤대협의 방문을 드르륵 열어제낀 서태웅이 한 마디 내뱉으면, 언제든지 책 한 권 펼쳐 놓고 등을 세운 채 앉아 있던 윤대협은 놀라지도 않고 씨익 웃으며 이렇게만 말하더라.
"그래, 이것만 다 읽으면 가자."
서태웅은 제가 실컷 말 타고 활 쏘고 들을 쏘다니다 심심해지면 그제야 윤대협을 찾아오는 주제에, 윤대협이 책 읽느라 안 나간단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통이 잔뜩 나서 쏘아보곤 하더라. 서태웅의 그런 꼴을 윤대협은 퍽 귀여워하여, 언제 오려나 기다려 놓고도 짐짓 공부 때문에 바쁜 척을 하여 기다리는 모습을 즐겼다던데.
그 나이대 아이라면 벌떡 일어나 토라져 버릴 만도 하건만. 서태웅은 아이답지 않게 험악한 표정으로 아이답지 않게 꾹 참고 인내하며 방구석에서 책 읽는 윤대협을 노려보다가, 기어이 스르륵 잠들어 버릴 때가 많았다 전하더라. 윤대협은 둘에 한 번은 잠든 얼굴을 구경하다 저도 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었고, 나머지 한 번은 굳이 깨워서 졸음 가득한 눈을 하고도 얼른 앞장서는 서태웅의 신이 난 등짝을 따라가더라.
윤대협이 자연스레 무예에 눈을 뜬 또 다른 원인이 서태웅이라는 건 새삼 말할 필요도 없으렷다. 서태웅은 한 살 앞선 윤대협보다 신체 발달이 빠른 편이라 처음엔 무엇이든 나이에 비해서는 앞선 듯이 보였지만, 곧 침착하게 가르쳐 준 바를 몸에 새겨 행할 줄 아는 윤대협에게 따라잡히곤 하여 유독 분해하는 모습이더라. 말재주로는 윤대협을 당할 재간이 없으니 점잔을 빼며 살살 약올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씩씩댈 밖에.
하지만 애석할 노릇, 반대로 뒤집어 윤대협의 총명에 서태웅이 물들어 책을 잡았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아니하여라. 예외가 있다면 병법서라. 윤대협은 서태웅과 놀면서도 이러저러 책에서 읽은 병법에 관하여,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병사들이 몇백 몇천 몇만이 모이면 무엇을 일으키는지에 관하여, 그리하여 전쟁은 어째서 존재하며 진짜 승리는 무엇으로 얻는지에 관하여 가장 친한 친구에게 스스럼없이 떠들었고, 어린 서태웅은 주로 묵묵히 듣는 측이었는데. 별 대꾸도 없어 관심이 없나 싶었더라도, 다음 날 꼭 책을 펼쳐 윤대협에게 들은 말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그리 확인해 보았다는 것을 윤대협에게 못 박듯이 밝히는 버릇이 있더라.
그러니까 서태웅은 윤대협이 줄줄 꿰는 식견이 정말인지 확인하려는 의도를 첫째로 글을 익혔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그런 식으로 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타고 난 아이였더라. 윤대협은 그런 서태웅의 순수한 치기랄까 건방짐을 꿰뚫어 보면서도 싫어하지 않았다고 전하니. 그 역시 비슷한 종류의 마음결을 타고났을지도 모를 일이라.
두 신동이 자라날수록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은 한결같아, 급제는 물론이요 장원조차 맡겨 놓은 보따리인 양 당연하게 생각하곤 하였는데, 다만 궁금한 일은 언제일까 그 시기만을 알 수 없음이라. 어느 집이 먼저 경사를 얻어 잔칫상을 푸짐하게 차려주겠는가, 오직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는 군중의 관심사렷다.
세간의 기대를 저버려 윤대협은 열일곱까지 과거에 나아가지 아니하니 모두 놀라더라.
어릴 적엔 그리 좋아하던 책도 딱 멀리하고, 방에 들어앉는 일 없이 강이며 바다며 시장통까지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유람하는 모습이라. 좋게 보는 이들은 문무에 이어 풍류까지 익혔다며 만나면 술 한 잔 사겠노라 큰소리를 쳤고, 숙덕이는 이들은 책벌레가 늦바람 들어 영 못쓰게 되는 것 아닌가고 은근히 부추겨 대더라.
진실은 어느 쪽도 아니요, 윤대협에게는 그저 세상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겪어 가는 과정일 뿐. 그에게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음이라. 타고난 것이 많았고, 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여, 풍부하게 보고 겪고 익히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그 결과를 다시 곱씹고, 나아지고 배웠고 자랐고 살아갔다.
호사가들에게만 인기인 것은 아니라, 윤대협은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신분이나 직업이나 남녀노소를 떠나서 웃는 얼굴로 인사받기 일쑤였는데. 모르긴 몰라도 훤칠하고 꽉 찬 풍채와 신선처럼 가벼운 걸음걸이, 무엇보다 옥관 같은 낯짝이 톡톡히 몫을 했으렷다. 큰 키를 넉넉히 덮은 비단 두루마기가 바람처럼 자연스레 휘날리는 사이로 길고 단단한 다리가 성큼성큼 가볍게 걷는 모양만으로도 이목을 끌었다던데. 희고 잘생긴 이마 아래로 용처럼 꿈틀대는 짙은 눈썹과 색이 옅은 두 쌍의 눈동자며 시원하고 우뚝한 콧대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고 놔주지를 않았다 하더라.
그는 잘난 낯과 스스럼없는 성격으로 쉽게 사람을 사귀었는데. 예로 모르는 바닷가의 운치 좋은 주막에서 홀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다가도 새벽부터 만선 싣고 돌아와 흥이 난 뱃사람들이 한 턱 끼워준다며 곧 죽마고우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하거나, 천 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서 장기를 주고받던 노인들에게 실수로 훈수를 두었다가 그 동네 노인들을 죄다 이길 때까지 붙잡혀 끝내 그 지역 만석꾼의 장인어른 계시는 사랑채까지 잡혀가서 장기 한 판으로 주안상에 숙소에 귀한 벼루까지 선물 받고 오는 일도 있었다 하더라.
그러한 모험의 끝자락마다 윤대협의 발갛게 상기된 머리통은 생각하였으리라.
'돌아가면 태웅이한테 해 줄 이야기가 늘었구나.'
정작 서태웅은 윤대협의 귀환을 내색하여 반긴 적이 없더라. 물론 저만 두고 갔다며 투정하는 일도 없었고. 서태웅은 어릴 적부터 투정을 몰랐던 터라. 사흘이든 나흘이든 이레 여드레 아흐레든, 오랜만에 보는 친우의 낯을 흘깃 쳐다보고 언제나처럼 툭 던지는 것이 아닌가.
"윤대협. 나와라."
윤대협은 언제든지 두말 않고 따라나서더라. 어릴 적처럼 책 앞에서 짐짓 기다리게 두고 그 기다리는 모양새를 훔쳐보며 즐기지는 않았다지. 그야 이미 잔뜩 기다리게 한 이후가 아닌가. 윤대협은 서태웅의 얼굴을 보면 다 알았으렷다. 기다리게 한 죄는 이미 용서받았고, 내색지 않으려 애써도 반가움에 밝아진 낯빛까지 가릴 수는 없었으니.
저를 위해 준비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아도 서태웅의 대꾸는 여전히 신통치가 않았는데. 그래도 어릴 적에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주워섬길 때와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어서. 윤대협의 이야기는 더 이상 집에 가서 책을 열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겪고 돌아온 세상의 조각들을 서태웅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기울여 들었고, 저를 빤히 바라보는 칠흑 같은 눈동자를 보면서 윤대협은 그제야 귀가를 마음 깊이 실감하는 것이렷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고개 한 번 끄덕이고, 서태웅은 말타기든 활쏘기든 목검이든 다짜고짜 대련부터 시작하여, 그간 윤대협이 놀러 다니며 소홀히 했음을 다그치듯이 몰아붙이니, 윤대협은 싫든 좋든 무예가 뒤처질 틈이 없어 외려 편한 노릇 아니랴.
서태웅 역시 윤대협과 호각을 다투도록 기골이 장대한 청년으로 자라, 날렵하고 단단한 신체에 희고 매끈한 낯으로 길 가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특히나 화백이 먹으로 단숨에 그린 호랑이 줄무늬와 같이 단호한 눈썹 아래 쏘는 듯이 강렬한 눈매가 도드라져, 매끈한 콧날이나 도톰한 아랫입술 같은 것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늘 웃는 낯이며 표정이 풍부한 윤대협과 달리 노상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다녀도 두 번 돌아볼 만한 미모라. 입술을 꼭 다물고 다녀도 또렷한 턱선 덕에 옹졸하게 보이지 않았고, 낯빛이 희고 목이 길어도 어깨가 반듯하고 훤칠하여 계집 같지 않더라. 또 신선처럼 가벼이 걷는 윤대협과 달리 서태웅은 걸을 때는 평범한 듯 조금 굼뜨게까지 보였고 오히려 말 위에서 훨씬 더 날렵하기로 유명했다지. 두 사람이 함께 큰길을 걸으면 아낙들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붉히고 사내들은 감히 아는 체는 못 하고 입맛만 쩍 다셨다더라.
윤대협이 세상을 유람하는 동안 서태웅은 크게 고을을 벗어나는 일 없이 나날을 무난히 보내었는데. 물론 그것은 서태웅의 기준에서 그러하였고 남들 보기에는 밥 먹고 자는 시간만 빼면 무예에 미친 사람에 다름 아니라. 때론 허벅지에 피가 맺히도록 멀리까지 말을 달리고, 때론 팔이 더 이상 겨드랑이에서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활시위를 당기고, 때론 손바닥 여기저기 물집이 터져 굳은살이 배기도록 목검을 휘두르며 하루해를 넘기더라.
서태웅은 생각하기를, 윤대협이 있을 때는 해가 더 빨리 지더니, 혼자일 땐 천천히 지는 듯이 여겨지니. 아마 윤대협이 있었다면 중간에 말이라도 걸어 쉬엄쉬엄 지나갔을 일이며, 달리고 쏘고 던지고 땀 흘리는 즐거움이란 본래 그러하듯이 혼자보다 둘이 주고받음이 곱절은 나을 수밖에. 무아지경으로 달리고 쏘고 던지고 땀 흘리는 나날의 와중에도 서태웅은 어렴풋이 그리고 내내 윤대협을 그리워하였다가 돌아온 웃는 낯을 보면 까맣게 잊어버리기를 반복하더라.
참으로 별나고 깊은 우애가 아니더냐.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생각하는데, 이는 호흡처럼 자연하여 각자 눈치를 채는 일도 없이 세월만 속절없이 흐르매.
열일곱이 되던 해에 윤대협은 더는 늦추기 어려움을 깨닫고 한 해에 생원시, 진사시, 초시에 모두 장원하였고 다음 해 별시에 한 번 더 장원하더라. 같은 해 가을에 서태웅은 무과 초시에 붙었고 이듬해 가을에 복시와 원시를 치러 임금이 보는 앞에서 갑과 3인 가운데 큰 차이로 으뜸으로 꼽혔으니 그의 나이 열여섯이라. 도깨비와 같은 신성 무인의 등장이라 도성 전체가 떠들썩하더라.
이들의 관직을 두고 조정에선 나름대로 고민이 깊었는데, 재주가 뛰어나니 무슨 일이든 능히 해낼 터라지만 아직 약관에 이르지 못한지라. 논의 끝에 윤대협은 정6품 이조 좌랑으로 나랏녹을 먹기 시작하였고, 무관이나 양갓집 자제요 실력과 성품이 우수한 서태웅은 세자익위사에 중용되어 어린 세자의 호위를 맡더라.
실상 윤대협은 천거가 필요 없는 유명한 인재라. 어린 나이에 학식이 깊으니 이미 육조판서 삼정승에 때로 임금과 직접 나랏일을 논하기에 손색이 없더라. 젊은 임금은 연배 차가 크지 않은 윤대협을 불러 대질하기를 즐겼고, 때로 나이 지긋한 정승들을 끼워 논쟁하기도 하니, 태평성대의 모습이렷다.
한편 서태웅에게는 성실하나 지루하기 그지없는 나날이더라.
타협을 모르고 손익에 어두우며 한 가지 임무에 몰입하는 그는 쉽게 정치적 이유로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어린 세자의 호위에 적격이었으나, 왕권이 안정된 세태에는 평온한 관직이라. 젊은 임금의 후손이 늘고 외척이 득세하면 또 어찌 될지 몰라도. 아들 하나 공주 여럿인 동안에는 어찌 탈이 있으랴. 탈이 없으면 칼 뽑을 일도 없다는 게 티끌이라면 티끌이라. 서태웅은 심심하면 애꿎은 훈련원을 찾아 후배들만 두들겨 패곤 했다네. 그조차 수준이 맞지 않으면 흥도 나지 않는 일.
이럴 때 어릴 적부터 곁에 있었던 윤대협은 나랏일로 아주 바쁜 모양이라. 딱히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서태웅은 삼갔다지.
관직 제수를 축하하여 부모가 지어 준 비단 관복은 닳을 일도 해질 일도 없어라. 서태웅은 이따금 티 없이 빛나는 제 관복이 까닭 없이 부끄러웠다지. 충성스럽고 성실한 호위의 마음 한구석 어딘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리라. 평화는 무관답지 않은 세상이라고.
왼종일 세자를 따라 궁궐을 쏘다니다 보면 윤대협을 스쳐 지나갈 때도 많았는데. 사모관대가 반듯하여 어른처럼 늠름한 그가 차마 남 앞에서 손을 흔들진 못해도 반갑게 웃어주면, 그러한 인사법을 알지 못하는 무표정한 서태웅은 그저 전립 끄트머리를 살짝 붙잡아 아래로 끄덕일 뿐. 꼭대기에 달린 깃털이 스르르 하얀 목덜미를 간질이고, 세자의 행렬 앞에 공손히 허리를 숙인 윤대협을 지나칠 때, 두 사람의 그림자가 잠시 겹쳤고, 그뿐이더라.
그런 날엔 정갈한 궁궐 뜰 구석구석이 이상하게 한 번씩 더 눈에 들어오곤 하여, 전에 없이 낯선 풍경 조각들에서 쓸쓸함을 느끼어, 윤대협도 서태웅도 어느 정도는 당황하곤 하더라.
윤대협은 이조에서 곧 병조로 전임하였고, 약관을 갓 넘겼을 때 식년문과와 별시에 두 번 더 합격하여 벼슬이 참의에 이르더라. 실상 무관으로서 서태웅의 인사 발령과 관직 제수에 관여하는 권한을 가진 꼴이라. 이는 우연이나 운명이 아닌 전적으로 윤대협의 의도한바. 그는 서태웅을 도성을 수호하는 사령부의 지휘관으로 천거하더라.
불만을 가질 만한 인사라 보기는 어려워, 외려 파격이라면 파격이랄 승진이라. 그간의 청렴하고 강직하며 물 샐 틈 없는 서태웅의 태도가 귀감이 된 터, 안팎으로 이견을 제시하는 자는 없어야 마땅했거늘.
정작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는 당사자 서태웅이 반기를 들며 윤대협에게 따지고 드는 것이 아닌가.
입궐 중에 정식으로 이의를 밝히려거든 품계가 위인 윤대협에게 예를 갖추어 고하여야 하는 것이 귀찮고 불편한지라. 서태웅은 밤 깊어 제 집처럼 윤대협의 방문을 드르륵 열어제끼더라. 필시 어릴 적의 버릇이리라, 내가 잘못 들인 탓이라고, 자려던 차림의 윤대협은 한숨을 내쉬었으리라.
말인즉 변경으로 발령을 원한다는 것이 아닌가.
"병력 충원이 필요한 곳은 최전방이 아니냐."
"그 말도 맞지만 수도만큼 중요한 최전방은 없다."
"변경이 뚫리지 않으면 수도도 안전해."
"충원은 충원대로 한다. 인재 한 명을 수도에 둘 뿐이다."
"왜 나냐."
타협을 모르는 서태웅. 칼이나 활이 아니라 말을 던질 때에도 언제나 그랬지. 호롱불에 흔들리는 윤대협의 낯은 웃지 않더라. 그는 내심 갈등한다. 진실은 입속에서 스러지고 명분이 연기처럼 새어나가고.
"궐에서 오래 근무했으니 수도 방어에 적임이기 때문이다."
반박이 어려운 정론 속에도 서태웅은 윤대협이 감추지 못한 갈등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조개처럼 굳게 입을 다문 윤대협에게서 진짜 이유를 들을 수는 없었다지. 그 진짜 이유는 아마도 반박이 아주 쉬울 터, 지금 입 밖에 꺼내 놓는 말과는 정반대로. 서태웅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으나 더 캐낼 요령을 알지 못하여 그저 가만히 기다릴 뿐.
그래도 윤대협은 묵묵부답이다.
서태웅은 이제 어린아이 시절처럼 그 자리에서 기다리다 못해 잠들지 않더라. 조용히 일어나 물러설 줄을 알았고. 이튿날엔 주어진 관직을 받는다.
윤대협이 끝내 털어놓지 못한 이유인즉슨 전쟁의 기운이 지척이었던 탓이라.
실상 외적의 침략이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요, 더구나 안전한 도성의 궁궐에 앉아서는 어불성설일진대. 그럼에도 윤대협의 귀에는 들리고 눈에는 보이는 것이 있었던 게지. 범인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이 위인의 신기요 총명인지라.
실상의 자세를 구태여 들여다보자면, 멀리 변경에서 사귄 친구들과 주고받는 삐뚤빼뚤한 언문 서신 속의 심상치 않은 징조나, 사신들이 전해 오는 국제 정세의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눈덩이처럼 굴러갈 방향 끝에, 어떠한 결과가 있을 것인지. 윤대협에게 보이는 답은 전쟁이어라. 이는 결코 원해서가 아니요, 피할 수 없을 따름이더라.
머지않아 전쟁이 닥쳐올 것을 아는 윤대협은 서태웅을 변경으로 보낼 수 없겠지. 그것이 모든 논리와 이치가 가리키는 제자리라 하여도.
도성을 벗어난 적 없는 서태웅은 이러한 소식이나 징조나 지식을 갖춘 바 없어, 그럼에도 그는 무언가가 다가옴을 예리하게 느낄 수 있더라. 그건 새들이 계절이 바뀌기 전에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거나, 쥐들이 산불이 나기 전 재빨리 피신을 가는 것과 유사한 감각으로, 서태웅은 그저 피부로 알 수 있는 것이라. 이대로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해 주던 윤대협의 얼굴에 감추는 빛이 생겨난 것을 눈치채고 나서는 그러한 감각이 더욱 확실하게 굳어질 수밖에. 변경에 가야 한다는, 차라리 초조함을 닮은 의무감은 그러한 감각에서 왔는지도 모를 일.
그러나 윤대협은 서태웅을 보낼 수 없으리라.
아무도 죽지 않는 전쟁은 없어서, 그 어떤 병법서에도 그러한 기적 같은 방법은 없고, 아무리 뛰어난 전술가며 지휘관이 피해를 줄이고 줄이더라도 죽음만큼은 필연인 법. 전쟁은 전투로, 전투는 다시 촘촘한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어, 일일한 죽음은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고, 숫자로 남을 만한 승리였다면 그나마 영광으로 기록되리니.
윤대협은 서태웅을 보낼 수 없으리라. 뛰어난 기량과 용맹한 성정으로 누구보다 앞서 나갈 서태웅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뛰쳐나갈 서태웅을, 그리하여 승리에 톡톡히 기여하고 말 서태웅을 결코 전장으로는 보낼 수 없었던 게다. 차라리 서태웅이 서태웅이 아니었다면, 겁 많고 비겁하고 죽음이 두려워 도망 다니는 이였다면...
그러나 그랬다면 뉘라서 이토록 아꼈으랴.
시간이 흘러 윤대협의 관직은 참판에 이르렀고 서태웅은 금군 대장으로 임금의 호위를 맡더라. 서태웅에게 금군 대장을 맡긴 것은 윤대협이 아니라 다름 아닌 어명이라. 어린 세자를 호위하던 서태웅을 눈여겨 본 터였기에 나라 전체의 심장을 지키기에 적임이라 본 것에 다름 아니다.
윤대협은 초조했다. 임금이 직접 발탁했다는 것은 더 이상 서태웅의 기량을 감출 수 없음이라. 전쟁은 인재를 필요로 하고, 사지일수록 그러할진대, 더구나 장본인이 내심 바라는 바가 그러하다면, 이를 막을 방법이 보이지 않았으니.
한밤중에 윤대협은 서태웅을 찾아갔다. 이는 흔치 않은 일이라, 주로 서태웅이 제 집처럼 옆집을 드나들곤 했으니. 명분은 임명 축하로, 간단한 주안상을 앞에 두고 잔을 나누었으나, 서태웅은 입에 대지 않았고 윤대협만 단숨에 들이키더라.
술기운을 빌어 윤대협은 서태웅을 원망하니.
"너는 아직도 전장 생각뿐이구나."
서태웅은 대답이 없었지만 윤대협은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눈을 보면 안다. 너는 평화 속에서도 전쟁을 꿈꾸지. 그 어떤 명검도 쓸 일이 없는 것이 제일 아니겠니. 칼집 속에 얌전히 있을 생각은 없느냐."
서태웅은 코로 웃더라.
"네가 알려주었잖아."
"내가 무얼."
"전쟁도, 승리도, 진짜 평화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네가 이야기했다."
윤대협은 말문이 막혀 굳더라.
그건 책으로 보고 머리로 그린 세상이었으니. 그 세상 속에선 병사들은커녕 장군들에게도 얼굴이 없었고, 더구나 그중에 서태웅의 얼굴은 없었지 않았던가. 죽음을 모르는 어린아이가 영민한 머리로 계산하고 상상해 낸 전략과 전술과 전세의 흐름이 아무리 탁월하다 한들, 살아있는 한 인간의 죽음 앞에 얼마나 무력한가. 죽음의 가냘픈 가능성조차도 상대할 수 없음이 자명하지 않은가.
"네가 꿈꾸게 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태웅은 아직도 어린아이 같다고 윤대협은 생각할 따름이라.
"그래, 다 내 탓이다. 내 탓이니 그냥 있어. 금군도 네 기량을 펼치기 부족한 자리가 아니다. 이 땅에서 가장 값진 존재를 지키고 있지 않으냐."
"윤대협. 뭐가 그렇게 두려워."
타협을 모르는 서태웅. 언제든지 칼이나 활과 같은 말을 예리하게 과녁에 쏘아 맞히는 서태웅. 윤대협의 잘생긴 얼굴이 흔들리는 호롱불 속에서 일그러지고. 처음으로 진심이 섞여 어조가 달라진 목소리를 울컥 내뱉으니.
"너 개죽음 당하는 꼴 보기 싫어서다."
서태웅의 얼굴도 아주 약간 일그러지더라. 윤대협의 절절한 고통이 그에게는 모욕적이었기에.
"너는..."
서태웅은 더 이상 윤대협을 바라보지 않더라. 내리깐 속눈썹이 분노로 떨리고.
"너는 나를 얕보는구나."
"아니야."
윤대협이 곧바로 부정하여도 서태웅은 믿지 않는다. 윤대협이 자신을 믿는다면 고통스러울 이유가 없으니. 다시 윤대협의 낯을 향한 서태웅의 눈에서 불꽃이 튀고.
"죽음은 몰라도 개죽음은 아닐 것이다."
윤대협이 서태웅의 팔뚝께를 콱 붙든다. 거친 몸짓에 서태웅은 내심 놀라더라. 일그러진 얼굴이 토해내는 말을 들어보니.
"그것이 개죽음이다. 그런 이야기는 흔하디흔해. 날 때부터 뛰어난 무예의 천재, 드디어 전장에서 빛을 발하여, 이리저리 고비마다 적을 맞서고, 나라를 지켜낸 끝에 숭고한 전사로 짧은 생을 끝내겠지. 얼마나 많은 전투를 이끌어도, 끝내 전쟁을 승리로 매조 짓는다 해도, 다시 돌아온 평화 속에 네가 없으면, 네가 없으면...."
그것이 윤대협이 보는 미래더라.
드문드문한 숨을 거칠게 내뱉는 윤대협을 보고 서태웅은 깨달을밖에.
나를 얕본 것이 아니다. 윤대협이 약한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약한 윤대협. 말문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윤대협.
서태웅은 그런 것을 처음 보더라. 한 살도 되기 전에 막힘없이 문장으로 말을 뱉었다던 윤대협. 그는 두려움을 몰라서가 아니라 두려움을 알기에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끝내 두려움을 처치하는 인물이었음에도.
그런 윤대협도 끝내 해결할 수 없는 두려움을 알게 된 것이 아닌가. 그랬노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태웅은 뜻 없이 윤대협의 손등을 토닥이고 있더라. 두텁고 커다란 손등이 어린아이 체온마냥 뜨끈하게 달아올라 손바닥에 달라붙더라.
서태웅은 다른 위로를 할 수 없더라. 죽지 않겠노라 말할 수도, 전쟁에서 몸을 사리겠노라 약속할 수도 없으니. 그것은 서태웅이 아니다.
그럼에도 윤대협의 위로가 되고자 함은 온 마음이라. 그러면 곁에 있을 수밖에. 하릴없이 손등을 토닥이며.
서툰 토닥임을 얌전히 받던 윤대협의 비틀린 입술에서 조금씩 웃음소리가 터지기 시작하더라. 이내 떡 벌어진 어깨가 정신없이 들썩이고. 폭소 속에 찡그린 채 눈물을 털어내는 윤대협을 바라보는 서태웅의 얼굴은 뚱하기만. 그는 조금도 웃음이 나지 않기에. 윤대협을 퍽 이상하다 여길 뿐.
술잔을 나누며 웃고 떠들고 고개를 주억거리다 어느새 밤은 깊고. 서태웅은 방바닥에 스르르 누워 잠드네. 제 팔에 얼굴을 묻고 잠든 자세가 어릴 때와 꼭 같아 윤대협은 속절없이 미소 지을밖에. 상투를 풀어 머리채를 손으로 편안히 풀어주는 손길은 나긋하여라. 술기운에 발그레한 뺨 위에서 잠결에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쓰다듬어볼까 하다 그만두는 마음이 조심스럽다.
다 큰 나이에 윤대협도 서태웅도 자식은커녕 혼처도 없다. 부모를 위시한 모든 이의 의문이었으며 한 때는 임금이 친히 어명으로 혼사를 주선코자 한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까지 돌았으나. 부모의 높은 눈에 차는 이가 없다는 핑계로 지금까지 물려온 터. 서태웅은... 아무런 핑계도 없이 일에만 몰두했고. 하긴 부득부득 전장을 바라는 놈이 처자식은 무슨.
윤대협은 이젠 핑계가 아닌 진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어쩌면 서태웅도.
영원히 말할 일은 없겠지만.
일단은 할 일을 해야겠지. 윤대협은 정신없이 바라보던 서태웅의 동그란 뺨 근처에서 맴돌던 손끝을 거두어 마음을 먹으니.
서태웅의 죽음을 막는 방법이 딱 하나 남았으렷다.
다음날 윤대협은 밤새 쓴 상소를 임금 앞에 올리니, 그 필체와 어투가 사뭇 단호하고도 담담하여 해가 뜨고 짐과 같이 있는 그대로를 고하는 듯하였다더라. 내용인즉슨 주변국을 차례로 방문하는 사절단을 꾸려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이듬해 내로 예상되는 무력 충돌을 방지하기 위함이라, 나라를 대표하는 사신으로 스스로 천거하고 나섰더라.
윤대협은 전쟁을 막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즉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짐은 당연지사. 우선 전쟁이 나리라는 예측부터 의견이 분분하니.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흐름을 짚으며 논박하는 윤대협보다 설득력 있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이가 군신 중에 없더라.
전쟁설을 믿는다 해도 현실적이고 외교적인 문제들이 산적한 처지라. 우선 각국에 사절단의 방문을 타진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짐은 일국의 뜻만으로 정해질 일이 아니라. 방문하여 이루어야 하는 목적 자체도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는데, 표면적으로는 교류이나 실질적으로는 협상이거나 동맹 제안이거나 심지어 때에 따라서는 은근한 협박일 수도 있는 따름이라. 일이 잘못 틀어지면 그 자리에서 목이 베일 수도 있는 위험한 일임은 말할 필요조차 새삼스럽다.
결국 길고 긴 토론 끝에 윤대협이 사신으로 간다면 대부분의 현실적이고 외교적인 문제는 해결되리라는 데에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었으니. 윤대협은 국경을 넘어서까지 이름난 신동이자 시인이자 학자였고, 주변국의 황실에서도 그의 명성을 궁금히 여긴 까닭이라. 방문을 타진하는 서신마저 윤대협이 쓰기로 정하고야 자리를 파하더라.
모든 것이 분명해지자 일사천리로 사절단이 꾸려지더라.
금군 대장 서태웅은 임금에게 비밀리에 독대를 청하니.
차가운 대전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
"이 땅에서 가장 값진 것을 지키겠습니다."
임금의 총명한 눈이 반짝이더라. 겸직 파견을 청하는 금군 대장의 입에서 나왔다고 보기에는 퍽 흥미로운 소망이 아닌가. 윤대협보다 다섯 살, 서태웅보다 여섯 살 많은 젊은 임금은 두 청년의 젊음을 가장 가까이에 두고 지켜본 사람 중 하나로서, 둘 사이에 때로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다가도 안개처럼 흩어지는 무언가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함이 언제고 존재함을 느낀 바 있었고, 지금은 그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어라.
이튿날 어명이 내려, 사절단의 호위로 금군 대장 서태웅이 임명되더라.
"또 당했네."
소식을 듣고 윤대협이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다. 당하고도 그는 웃을 밖에. 저보다 먼저 걷고 뛰던 한 살 어린 소꿉친구가 또 한 번 앞서 나가는 익숙한 기분이라.
여장을 챙기는 일부터 만만치 않더라. 주변국을 다 돌려면 그 거리만도 어마어마하니, 산길에도 뱃길에도 위험이 도사림은 물론이라. 무사히 도착하기도 전에 개죽음을 당할 위험은, 사절단의 맨 앞에서 말잔등에 앉아 저를 기다리는 형형한 눈빛의 장정이 있는 한,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닐 성싶지만.
그러나 외교적인 사유로 사신이 돌아올 수 없게 되면 사절단의 호위도 같은 처지가 됨은 자명하여라.
제 맘을 모르고도 알고도 끝내 가야 할 일이 있다면 사지로 간다는 결심이 괘씸해, 어디 한 번 윤대협이 한발 앞서 사지로 들어가 서태웅이 갈 사지를 없애버리고자 하였는데, 이 지긋지긋한 도깨비 같은 놈은 기어이 거기까지도 따라오겠다는 것이 아닌가. 전략이나 병법에는 분명 윤대협이 한 수 위일 터인데 어째 서태웅에게 한 방 먹기만 하는 기분이 안 드는 것도 아니라.
"그래도 마지막엔 내가 이겨야겠지."
윤대협은 그럴 생각이라. 그러니 웃으면서 출발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앞서가는 서태웅의 뒷모습이 낯설면서도 낯익다. 발로 걷는 것보다도 편하게 말을 다루는 유연한 허리춤과 멀리 길을 이끄는 시선.
이번에는 두고 갈 필요가 없더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길을 떠나는 것은 처음이 아닌가.
마지막일 예정이기도 하지만.
사신 윤대협은 여섯 달 동안 세 개의 주변국을 돌았는데, 그중 두 나라와는 애초의 동맹을 명문화하고 선물을 주고받아 이후의 경제적 교류를 약속하였으며, 전쟁의 위험이 예상되던 한 나라와는 거래를 통한 화친 조약을 맺고 무사히 귀국하더라.
십 년... 잘하면 이십 년? 윤대협은 자신의 성과가 최소한 그동안은 유지되리라고 예측하더라. 물론 나라에 어떤 변고도 없이 이때 맺은 약속을 잘 지킨다는 전제라 하여도.
윤대협이 도성에 돌아올 때에 환영 인파가 구름처럼 밀려들었다고 전하니. 수려한 글과 세 치 혀로 벌어 온 평화라든가 경제적인 이득을 두고 모두가 감읍하며 칭송하더라. 그 유명한 신동이 드디어 나라를 위해 업적을 이뤘노라고 누군들 기쁘지 아니하랴.
겸연쩍은 모습조차 없이 쏟아지는 환호에 자연스레 손을 흔들며, 윤대협은 제가 벌어 온 것이 그것뿐이라고 생각지는 않더라. 시시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 임금의 스승으로, 또 임금의 호위로.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을 목숨 걸어 벌어 온 참이니.
곁에서 어쩐지 뿌듯한 표정으로 무덤덤히 말을 재촉하는, 한시라도 날카로운 경계를 늦추는 법 없는, 호랑이 같은 눈매의 호위무사와 어깨를 나란히 걸을 수 있네.
윤대협 역시 이 땅에서 가장 값진 것을 지켜낸 것이다.
두 사람이 목숨 걸고 얻어 낸 태평성대는 이어졌으니, 임금이 승하하고 윤대협의 가르침과 서태웅의 호위 속에 자라난 세자가 새로이 즉위하여도 계속되더라. 윤대협은 벼슬이 열 정승보다 낫다는 대제학에 이르고 서태웅은 병조판서에 이르러, 내리 세 임금을 모실 때까지도 장수하매, 문무에서 나라의 기둥이나 다만 처자식이 없음을 뭇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더라.
두 사람은 머리가 하얗게 세어 관직을 물러난 후에도 후예를 기르며 조카의 손자와 증손자와 고손자에 둘러싸여 조용히 살다가 어느 날 사뿐히 손을 맞잡고 금강산 유람을 간다면서 길을 떠났는데, 그 여장이 지나치게 가벼워 산책만도 못했다더라. 그 길로 다시는 두 사람을 본 사람이 없어 모두가 윤대협과 서태웅은 이백 살에 신선이 되었다고 전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