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불면의이쑤신
<靑春 collage> 앤솔로지 수록새 학기가 시작됐다. 고점을 찍었던 더위는 새로운 계절을 향해 확연히 꺾였다. 체질이 뜨거운 윤대협도 밤에 땀 흘리는 일이 없어졌다. 아침이 보송하다. 그렇다고 담요를 꺼낼 정도의 한기는 아니고. 매미의 합창은 그쳤지만 귀뚜라미의 연주는 아직인. 여름도 가을도 아닌 인디언 썸머. 하루가 다르게 하늘이 높아진다. 맑고 쾌청하다.
야외 운동하기 딱이다.
윤대협은 이번 주부터 능남 농구부 주장이다. 체육관은 학기 첫 주의 활기로 가득하다. 기합이 바짝 들어간 후배들의 목청이 유난하다. 은퇴한 3학년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책임감에 어깨가 잔뜩 굳은 동기들도 대꾸가 우렁차다. 부 활동이 없는 날까지도 자발적으로 체육관에 모여 공을 튕기는 멤버가 제법 많았다.
당연히 윤대협은 포함되지 않았다. 룰루랄라 집에 갈 준비를 했다. 그야 부 활동 없는 날이니까. 윤대협은 지극히 정상적인 학생이다. 하지만 다소 정상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농구에 과몰입 중인, 안영수를 필두로 한 2학년 부원들에게 패턴을 예측 당하는 아마추어적 실수를 저질렀다.
교실 문을 나서기도 전에 붙잡혀서 체육관으로 밀려들어 간다.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주장을 찾았다. 대협이 형, 대협이 형 하던 호칭만 주장, 캡틴으로 바뀌었을 뿐. 윤대협은 집에 가려던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기꺼이 자율 훈련을 이끌었다. 성심성의껏 의무를 다했다.
하지만 정말은 어딘가 아쉬웠다. 체육관에 갇히기엔 날씨가 너무 아까웠다. 아까울 정도로 찬란했다. 저 빛깔을 봐. 왜 천장으로 저걸 가려야 하지. 그늘도 필요 없을 정도로 상쾌한 날인데.
물론 신이 잔뜩 난 부원들에게 티 내진 않았다. 자, 가볼까? 우렁찬 대답에 상냥하게 웃어주며 아무도 모르게 주말을 기다렸다.
주말에도 해상도 높은 날씨는 계속됐다. 윤대협은 운동화 끈을 꽉 묶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농구장을 향해 가고 있지만 농구공을 챙길 필요는 없다. 기다리는 사람이 챙겨왔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구경하느라 목이 아프다. 태양까지 시선이 그대로 닿을 것 같다. 대기 중에 아무런 방해물도 없어서. 높이 쳐들었던 턱을 천천히 끌어당기면 시선을 내려도 내려도 계속되는 잉크처럼 파란 하늘.
그 끝에 까만 머리카락이 있었다. 맑은 바람에 흔들리면서. 짙은 그늘 속 자전거에 기대서서.
오늘따라 서태웅이 유난스레 반가웠다. 순전히 날씨가 좋아서였다. 먼저 오른손을 번쩍 들어 본다. 서태웅은 물끄러미 쳐다보다 고개를 까딱. 한다. 건방진 건지 예의 바른 건지. 윤대협은 피식 웃었다.
여름방학 때만 해도 서태웅은 반가운 손님이 아니었다. 순전히 너무 더워서였다. 서태웅과 농구하기보다는 바다낚시가 더 좋았고, 바다낚시보다는 낮잠이 더 좋았다. 땡볕 아래를 달리는 건 농구부 지옥 훈련 메뉴만으로도 지나치게 충분했다. 자발적으로 다른 학교 에이스와 지옥 농구 훈련까지 하고 싶은 날은 매우 드물었다.
물론 세상에 절대는 없다. 자발적으로 다른 학교 에이스와의 지옥 농구 훈련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날도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런 충동은 자신도 스스로 예측할 수 없었고. 그런 만큼 멈출 수도 없었다. 왠지 그래야 한다는 예감 비슷한 게 신체 근처를 배회하며 거절의 단어가 음성이 되지 못하도록 흩어버리곤 했다. 아무리 더워도, 농구부 훈련을 하러 가는 도중이었대도. 승부하자. 그 한마디를 돌려보내지 못했다. 몇 시간이고 넋을 놓고 어울렸다. 기나긴 여름 해가 물러가고 밤의 장막이 휘슬을 대신해 끝을 알릴 때까지.
그런 날은 예외였다. 흔치 않았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서태웅과 하루 종일 농구하는 날.
그런대로 즐거운 기억이다.
오늘은 다르다. 여름의 서프라이즈와 정반대다. 윤대협은 평일 내내 오늘을 기다렸다. 체육관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을 정도로. 하늘이 내려다보는 곳이라면 어디든 뛰고 싶었다. 기꺼이 함께 뛰어 줄 상대가 먼저 찾아온다. 이런 날엔 윤대협은 자신이 꽤 행운아처럼 느껴졌다.
서태웅은 말없이 공을 던졌다. 윤대협의 손에 묵직하게 달라붙는 농구공 표면은 그새 따스하게 달궈져 있었다. 서태웅이 교과서 같은 디펜스 자세를 잡는다. 고요하고 침착한 얼굴에 까만 눈만 번뜩인다. 나직한 목소리가 선언처럼 떨어진다.
"덤벼."
윤대협은 웃었다. 발뒤꿈치가 살살 떠오를 정도로 몸이 가볍다.
윤대협은 유난히 컨디션이 좋았다. 날씨 덕분이었다. 뜨겁긴 했지만 습하지 않았다. 목덜미나 등줄기에 열이 치솟다가도 견딜 수 없기 전에 즉시 시원한 가을바람이 가져가 주었다. 단 한 순간도 식지 않는 열기는 서태웅의 두 눈동자 속에만 있었다.
윤대협은 오늘따라 날아다녔다. 서태웅보다 3점 앞서고 있었다. 이런 일은 흔치 않다. 그럴 때 서태웅은 절대로 먼저 쉬자는 말을 안 한다. 최소한 동점까진 아득바득 따라와야 직성이 풀린다. 타임아웃은 언제나 윤대협이 먼저 부르는 편이다.
오늘은 아니었다. 윤대협은 더 날아보고 싶었다. 끝을 알 수 없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싶었다. 무섭게 따라붙는 하얀 손을 따돌리고.
서태웅은 공수 교대를 할 때 잠깐씩 자전거 근처에 팽개쳐 둔 가방 쪽으로 가서 물병을 입에 댔다. 한 모금, 두 모금 정도 마시고 금방 돌아왔다. 그 잠깐에도 윤대협은 농구공을 손가락 끝에서 핑그르르 돌리면서 서태웅을 느긋하게 놀려댔다.
"스태미나 문제? 잠깐 쉴까?"
"닥치고 덤벼."
"네가 덤빌 차례지. 무리하지 마. 슈퍼루키."
"닥치라고."
핑그르르 돌던 공을 톡 튕겨서 넘겨주면 공중에서 낚아채서 정말로 덤비듯이 돌진한다. 대기 중에 아무런 방해물도 없는 날 정수리에 곧장 떨어지는 햇살처럼 직진한다.
윤대협은 정말 즐거웠다. 그래서 쉬는 것도 수분 보충도 잊었다.
한참 승부하던 도중이었다. 광량이 너무 많아서인가? 착지 순간 잠깐씩 어지러울 때가 있었다. 핑 도는 듯한 느낌. 날이 너무 맑아도 방해일 수 있나 봐. 지나치게 깨끗한 안경을 쓴 눈이 좋은 사람처럼 윤대협은 가끔씩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별 건 아니었다. 맞은 편에서 농구공 튕기는 소리에 얼른 떨쳐낼 수 있었다.
고개를 흔들어 현기증을 떨어내고 다시 마주한 얼굴에는 음영이 분명했다. 온 세상에 공평할 터인 가을 땡볕이 혹시 서태웅의 얼굴에만 남몰래 스포트라이트를 때리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새하얀 얼굴이 환하게 빛나 머리카락 아래 드리운 뚜렷한 그림자와 대조됐다. 관자놀이를 트랙 삼아 굴러떨어지는 작은 땀방울조차 빛을 튕겼다. 어디를 봐도 눈부시다.
윤대협은 머릿속에 공격 루트를 정했다. 세 번쯤 공을 튕기고 돌파할 것처럼 굴었다가 뒤로 물러서면서 3점을 노릴 생각이었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서태웅 앞에서는. 그러다가 뺏긴다. 서태웅의 리듬을 흔들어 놓고 뒤로 점프하듯이 한 발씩 내디뎠을 때.
주변이 크게 180도 돌았다.
어라.
새카매진 세상으로부터 눈을 떴을 때. 윤대협은 엉덩이를 땅에 붙인 채 주저앉아 있었다. 갑자기 바닥에 떨어진 둔부와 맨땅을 짚은 오른손바닥이 욱신거린다. 그대로 일어날 생각으로 발목에 힘을 줬는데.
바로 무릎이 꺾였다. 한 번 더 엉덩방아를 찧었다. 뜨겁게 달궈진 모랫바닥을 두 손으로 짚어서 겨우 나자빠지는 꼴은 피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하반신보다 두개골 안쪽이 훨씬 더 아팠다. 관자놀이 양쪽이 조여오는 듯 지끈거렸다. 두 눈을 뜨고 있는데도 눈앞이 까맣게 점멸한다. 다시 시야가 돌아왔다가 또 점멸한다.
윤대협은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타다닥 다급한 발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눈앞에 그늘이 진다.
"너... 괜찮냐?"
조심스러운 목소리. 윤대협은 한숨이 나왔다. 이런. 걱정시켜 버렸네. 서서히 심호흡하면서 침착함을 되찾는다. 모르는 사이에 호흡도 엉망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께가 아프다. 심장이 굉장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갑자기 일어나겠다는 계획을 버린다. 나동그라진 다리를 천천히 접어 중심을 되찾고 허리부터 편다.
고개를 들자마자 눈 앞에 서태웅의 얼굴이 있었다.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짚은 채 윤대협을 들여다보고 있다. 윤대협은 농구공 없이 이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서태웅을 처음 봤다. 놀랐는지 표정이 딱딱하다. 무거운 팔을 들어 위팔을 툭툭 쳐 준다. 안심하라고.
"괜찮아. 잠깐 쉬었다 할까?"
"얼굴색이 이상해."
"하하. 악담이야? 너무하네."
윤대협이 웃는 걸 보고 나서야 정말로 안심이 되었는지. 서태웅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너나 스태미나 잘 챙겨."
아주 한심하다는 듯이 쏘아붙인다. 허리를 세우더니 척. 오른손을 내민다.
윤대협은 입맛을 쩝 다시고 순순히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조금은 머쓱함을 담아서. 딴엔 걱정해 줘서 고맙다는 의미였다. 서태웅의 팔에만 의존해서 몸을 일으킬 생각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러나 하체가 윤대협을 배신했다.
반쯤 일어섰을 때 다시 한번 현기증이 났다. 찌르는 듯한 두통이 뒤따른다. 엉거주춤한 상태로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체중이 그대로 서태웅과 맞잡은 손에 실렸다. 무릎을 꿇으려는 모양새로 비틀거리는 윤대협의 체중에 딸려 가듯 함께 휘청이던 서태웅이 다급하게 맞잡은 손을 끌어당긴다. 허리를 붙들고 추락을 막는다.
윤대협은 힘없이 서태웅에게 끌어안겼다. 천근처럼 무거운 머리를 눈앞에 보이는 어깨에 기댔다. 코끝에 닿는 승모근은 땀에 젖어 차가운 편이었다. 아닌가? 축축한 건 내 얼굴인가? 기분 좋다. 어지럽다. 토하고 싶다.
윤대협은 잠깐 그 상태로 멈춰있다가. 힘겹게 서태웅의 어깨를 짚고 몸을 떼어냈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중얼거린다.
"미안. 몸이 좀... 이상하네."
서태웅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제 어깨를 밀어내는 윤대협의 팔뚝을 붙잡고 그대로 어깨 위로 걸친다. 부축인지 연행인지 잘 알 수 없는 모양새로 끌어당긴다.
윤대협은 순순히 끌려가지 않았다. 서태웅에게 기대어 걸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상당히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허리를 세우고 똑바로 걸으려고 했지만. 마음만큼 쉽진 않았다. 찡그린 미간을 펼 틈이 없을 정도로 현기증이 계속됐다.
윤대협이 제 눈과 정수리 사이를 부유하는 검은 덩어리를 제대로 떨쳐내기 전에 서태웅은 윤대협을 코트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까지 끌고 와서 앉혔다.
윤대협은 자신을 붙잡은 서태웅의 팔을 털어냈다. 잠시 혼자 있고 싶었다. 그러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오늘은 분명 컨디션이 좋은 날이었으니까.
"고마워. 나 잠시만..."
서태웅은 윤대협의 중얼거림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뒤돌아서 달려갔다.
윤대협은 서태웅이 없는 틈에 작게 바닥을 향해서 구역질했다. 먹은 게 없어서 토하진 않았다. 피가 쏠린 얼굴을 두 손에 묻는다. 식은땀으로 척척했다. 윤대협은 농구를 시작한 이후로 이 정도로 컨디션을 조져 본 적이 없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모든 증상은 하나로 모인다. 두통, 현기증, 무기력, 구토, 심박 증가, 발한. 일사병.
그러나 윤대협은 냉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더운 날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무리해서 운동하진 않았다. 가벼운 증상이다. 잠시 쉬면 곧.
갑자기 뺨에 차가운 것이 와서 붙는다.
물병이었다. 서태웅이 재빨리 가져온 게.
얼굴 전체를 덮은 손을 살짝 내려보니 전속력으로 뛰었는지 숨을 몰아쉬는 얼굴이 있다. 창백하다. 안색은 너도 이상하네.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목이 바짝 말라서 아무 소리도 안 나온다.
뜨다 만 눈으로 게슴츠레 쳐다보기만 했더니. 서태웅이 큰 소리로 혀를 한 번 찼다. 서둘러 물병 뚜껑을 따서 다시 한번 내민다. 윤대협은 솔직히 아무것도 위장에 넣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순순히 받았다. 한 모금씩 입 안을 적신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마신다. 다섯 모금 정도 마시고 잠시 멈췄다. 몸 안에 수분이 도는 기분. 다시 한 번. 두 번. 꿀꺽꿀꺽 마신다. 물병은 금방 비었다. 물병째로 얼려 왔었는지 안쪽 벽을 따라 모양대로 남은 얼음이 빙그르르 돌았다.
서태웅은 돌려받은 물병을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그대로 윤대협의 턱과 어깨 사이에 끼웠다. 시원했다. 윤대협은 솔직하게 눈을 감고 뺨을 기댔다. 차갑다. 기분 좋다. 심박이 약간은 잦아든 것 같다.
"고마워."
갑자기 차가운 것이 이마에 닿는다. 눈꺼풀을 열자 윤대협의 속눈썹이 서태웅의 새끼손가락을 건드렸다. 물병 때문에 차가워진 손바닥으로 윤대협의 이마를 짚고 있는 서태웅의 얼굴이 코앞이다. 무표정처럼 보이지만. 눈썹이 약간 꿈틀대는 걸 보면 걱정하고 있는 것 같기도.
"열나는데."
윤대협은 빨리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더웠나 봐. 생각보다."
"쓰러질 뻔했잖아."
"쓰러지진 않았지."
"병원 가자."
윤대협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미소 지었다.
"괜찮아. 태웅아. 네가 물 갖다줘서. 조금만 쉬면 돼."
서태웅은 묵묵히 윤대협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찡그린 눈썹이 펴지지 않았다. 혼란인지 불신인지 걱정인지.
윤대협은 그 모든 가능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기운이 없었다. 그래서 나무에 힘없이 뒤통수를 기대고 심장박동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애썼다. 그냥 숨을 제대로 쉬려고 애썼다는 소리다. 윤대협도 찡그린 미간을 아직 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태웅이 벌떡 일어났다. 윤대협을 등지고 빠른 걸음으로 다섯 걸음 걷다가.
다시 재빨리 돌아온다. 윤대협의 손등에 살짝 손을 올리고.
"잠깐 있어."
그 말만 남기고 순식간에 뛰어간다. 자전거에 훌쩍 올라탄다. 사라졌다.
윤대협은 빛 속으로 사라진 서태웅의 뒷모습을 계속 쫓다가는 또 현기증이 날 것 같아서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서태웅의 손바닥에서 옮아 온 냉기가 조금 남아있었다.
그대로 시야가 잠시 암전됐다.
윤대협은 계단을 헛디뎠을 때처럼 발작하듯 다리를 경련하며 깊은 잠에서 끌려 나왔다.
갑자기 움찔대는 바람에 머리카락에 덮여있던 수건이 스르르 내려와 어깨에 걸쳐졌다.
서태웅이 농구하다 쉴 때마다 머리에 덮고 있던 나이키 스포츠타월이다. 언제 이런 걸 덮어줬는지. 그늘인데도 한 번 더 씌워 준 건가. 맹탕인 듯 의외로 철저하게 햇볕 대책을 하고 있구나. 그래서 얼굴도 하얀가?
윤대협은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오늘도 서태웅은 중간중간 수분 보급을 제대로 했다. 평소답지 않게 신이 나서 오버페이스를 한 건 자신뿐이다. 늘 200%로 달려드는 서태웅을 상대해 주느라고 어쩔 수 없이 최고 기어를 넣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새 한계를 재지 않고 노는 것에 익숙해졌는지도. 승부 자체에 몰두하는 감각이 당연해졌는지도.
윤대협에게 그런 습관을 들여버린 무서운 바이러스 보유자는 지금 윤대협의 눈 앞에서 책상다리를 한 채로 고개만 푹 떨군 채 자고 있다. 기묘한 자세다. 마치 잠든 윤대협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그대로 자신도 잠들어 버린 것 같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윤대협은 서태웅을 향해 조금 움직여 보다가 위화감을 느끼고 멈칫했다.
이마에 뭐가 붙어있다. 더듬어 보니 바스락거린다.
조심스럽게 떼어내서 눈앞에 펼친다. 쿨시트다. 이걸 사러 갔었구나.
그러고 보니 잠들기 전과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 상의가 없다.
반나체로 야외에서 머리에 수건만 쓴 채로 자고 있었다니. 점점 더 민망해진다. 그러나 일사병 초기 대처로는 더할 나위 없다. 땀이 알맞게 식은 몸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열은 분명히 내렸을 것이다.
서태웅은 앉은 채로 고개를 푹 떨구고 미동도 없이 자고 있다. 정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보면, 도로롱 하는 아주 작고 태평한 소리까지 들린다.
윤대협은 웃음이 났다. 충동적으로 쏟아진 앞머리 아래 손바닥을 밀어 넣었다. 놀랍도록 차가웠다. 아직 윤대협에게 열이 남아선지 몰라도.
움찔거리더니 서태웅이 깼다.
꿈뻑꿈뻑 졸린 눈을 부빈다. 갓 태어난 아기 같은 반응에 한 번 더 웃음이 나왔다.
서태웅은 조그마한 입을 최대한 벌려서 하품을 쩌억 하더니 목을 한 바퀴 돌리며 뚜두둑 스트레칭한다. 윤대협의 얼굴을 보더니 바로 인상을 쓴다. 방금 윤대협이 한 행동을 되돌려주듯이 손을 뻗어 윤대협의 이마를 짚는다. 윤대협은 평온하게 말했다.
"다 내렸어."
서태웅은 동의하지 않았다.
"아직 열 있어."
"이 정도는 괜찮아."
서태웅은 큰 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더니.
다짜고짜 윤대협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으려고 했다. 윤대협은 오늘 최고로 당황했다. 이렇게 거리감이 없는 아이였나?
"왜 이래."
서태웅은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아이를 끌어안는 자세로 자신보다 큰 덩치의 윤대협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운다. 여전히 상의를 탈의한 채인 윤대협의 겨드랑이 아래로 쑥 들어간다.
아까보다 훨씬 상태가 나아진 윤대협은 기대주지 않고 슬쩍 물러났다. 살짝 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윤대협이 누르지 않는 한 기대지지 않는다.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서태웅. 어깨를 치켜올려 가며 무리하게 부축하려 들었다. 윤대협이 요리조리 빠져나가자 짜증 섞인 한숨을 푹 내쉰다.
"너."
"태웅아. 나 진짜 괜찮아."
"아까부터 괜찮다고 할 때마다. 쓰러졌어."
윤대협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사실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아까는 확실히 판단 미스가 겹쳐서 여러 가지 추태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괜찮은데... 입을 열어 말하려는 순간 서태웅이 선수를 쳤다.
"또 괜찮다고 하면 기절시켜서 병원 데려간다."
윤대협은 닥치기로 했다.
서태웅은 묵묵히 한 쪽 손으론 제 어깨에 걸친 윤대협의 손목을 꾹 잡고 다른 손으론 윤대협의 허리춤을 붙들고 척척 걸어간다.
그늘에서 햇빛으로 나가기 전에 딱 멈추더니. 윤대협의 어깨에 걸려 있는 수건을 잡는다. 윤대협의 머리를 감싼다. 흘러내리지 않게 턱 아래에서 꽉 묶는다. 아이고. 윤대협이 곡소리를 냈다.
"머리 다 망가지는데."
"진작 망가졌어."
"아이고."
그늘진 윤대협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더니 윤대협의 정수리를 툭툭 치고 다시 팔 한쪽을 들쳐멘다. 어쭈. 건방지게. 윤대협은 속으로 웃음이 났지만 지금까지 걱정시킨 게 미안해서 얌전히 따라가 주기로 했다.
서태웅은 그늘에 세워 둔 자전거까지 윤대협을 데려갔다. 얌전히 개어 놓은 윤대협의 티셔츠를 가리킨다. 드디어 반나체를 벗어날 수 있다.
윤대협이 수건에 돌돌 싸매인 머리를 티셔츠에 겨우겨우 밀어 넣는 동안 서태웅은 가방을 둘러메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윤대협을 돌아보며 좌석 뒤의 짐칸을 가리킨다.
"타."
윤대협은 머리를 둘러싼 수건을 긁적였다.
"다리 끌릴 것 같은데..."
"알아서 쳐들고 와."
"어디로 가는데?"
서태웅이 평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네 집."
윤대협은 여름에 몇 번 서태웅을 집으로 데려간 적이 있다. 너무 더웠기 때문이다. 땀에 푹 찌든 타 학교 후배를 도저히 그대로는 보낼 수가 없었다.
그때의 친절을 이렇게 돌려받게 되었네. 머쓱함에 괜히 농담을 찔러 본다.
"너네 집에서 간호해 주는 거 아니고?"
"당연히 아니지. 멍청아."
"왜?"
"가까우니까."
하하하. 윤대협이 작게 웃었다. 서태웅은 기다리는 게 싫었는지 페달을 팽그르르 굴리며 시위를 한다.
순순히 뒷좌석에 탔다. 서태웅이 윤대협의 두 팔을 붙들고 제 허리에 척 붙였다.
"떨어지지 마라."
귀여운 짓을 다 하네. 분부대로 긴 팔을 다 써서 허리를 꽉 끌어안았더니 움찔 놀란다. 갑자기 포옹 당한 고양이 같다.
잠시 침묵하더니 곧 자전거가 움직였다. 스르르 나아간다.
눈앞의 곧은 등에 이마를 콕 기대 본다. 달큰한 땀으로 축축했다. 농구할 때 젖은 걸까. 아니면 윤대협을 위해 쿨시트를 사 오려고 전력 질주했을 때?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이 찡했다. 두통도 현기증도 없는데 심장박동수가 다시 빨라지려고 한다.
아까의 짜증은 일사병 증상과 함께 맑은 바람을 타고 증발했다. 아마 자신은 조금 초조했던 것 같다고. 이제서야 윤대협은 회고한다. 반성도 아주 약간.
서태웅에게서 당황하는 얼굴을 끌어내는 건 윤대협의 특기다. 코트에서는. 단 서태웅이 예상치 못한 환상적인 플레이로. 그건 정말 재미있다. 반대로 서태웅에게 카운터를 먹는 것도 생각보단 나쁘지 않다. 물론 패배는 재미있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당황하게 만드는 건 싫었다.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어린애처럼 들떠서 컨디션을 망치고. 연하의 후배를 걱정시키고. 윤대협이 하자는 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수도 없어 우왕좌왕하던 서태웅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귀여웠던 것 같기도...
서태웅이 길을 외우고 있을까? 문득 의문이 솟는다. 윤대협이 집으로 데려갈 때마다 서태웅은 졸고 있었다. 윤대협이 등에 대고 웅얼거렸다.
"너 우리 집 가는 길 알아?"
"대충."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대 방향으로 꺾어지려던 차였다. 윤대협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아니, 우회전!
급정거 후 급회전하려는 자전거 위의 두 사람은 겨우겨우 균형을 잡았다. 비틀비틀.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기운차게 나아간다.
전신을 스치는 바람이 더 시원해졌다. 윤대협은 이제 정말 일사병은 괜찮을 것 같았다.
평소의 바람 같은 주행보다는 조금 느리게. 그래도 두 사람 분을 태운 것치고는 힘차게 나아간 서태웅의 자전거는 곧 윤대협의 집 앞에 도착했다. 애초에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다. 걸으면 금방인데. 아마 끌고 가기 귀찮았던 거겠지?
윤대협은 여전히 서태웅이 묶어 놓은 수건을 뒤집어쓴 채로 자취방 문을 열었다.
현관에서 수건을 풀고 바로 거울을 살핀다. 역시 머리카락이 엉망이다. 왁스가 잔뜩 뭉치고 납작하게 눌린 머리칼은 이리저리 휩쓸려 있다. 손가락으로 슥슥 수습하는 사이에 서태웅은 옆에서 허공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한다. 실례합니다.
신발을 벗자마자 서태웅은 윤대협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아야야. 척척 침대로 걸어가 윤대협을 던져 놓는다. 박력 넘치네. 너 지금 상당히 야릇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고 놀리려는 순간.
농담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서태웅이 윤대협의 티셔츠 밑단을 두 손으로 붙들고 휙 들어 올렸다.
저항할 새도 없이 윤대협의 팔을 이리저리 당겨서 쑥 뽑아낸다. 갑자기 침대로 던져지고 옷을 빼앗겨 맨살이 드러난 윤대협은 적잖이 당황했다. 방금 전에 꺼내려던 저급한 농담이 머릿속에 남아있는 바람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서태웅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윤대협의 티셔츠를 정중하게 접어서 침대 옆 바닥에 내려놓는다.
아직 윤대협이 손에 쥐고 있던 나이키 스포츠타월을 회수하더니 벌떡 일어나서 싱크대로 척척 걸어간다.
촤아아 물줄기가 스테인리스를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수도꼭지를 멈추고. 타월을 모아서 짜낸 물이 주르륵 떨어지는 소리.
서태웅이 돌아온다. 그때까지도 윤대협은 얼굴이 불그레해진 채로 멍하니 굳어 있었다.
서태웅이 윤대협을 마주 보고 앉는다. 다행히(?) 강제로 눕히지는 않았다. 여기서 더 오해가 깊어질 만한 자세로 진행되면 다시 두통이 시작될 것 같았다.
서태웅은 한 손에 수건을 펼쳐 얹은 채로 잠깐 어색하게 기웃거렸다. 초보 일꾼이 일감을 앞에 두고 어디부터 손대야 하는지 잘 몰라서 헤매듯이.
그러더니 손을 천천히 뻗어서.
차가운 수건으로 윤대협의 이마부터, 뺨을 지나, 턱선 끝까지.
아주 조심스럽게 닦아 내렸다. 유리 조각을 만지는 것처럼 가만가만.
서태웅의 손바닥 면적만큼 닿아오는 타월이 그대로 윤대협의 목줄기를 따라 내려간다. 서태웅은 천천히, 여전히 조심스럽게, 윤대협의 벗은 목과 어깨를, 가슴팍과 상박을, 단단한 복근과 등짝을 문질렀다. 차갑고 묵직한 수건이 부드럽게 스쳐 지나간다. 서태웅이 내리깐 속눈썹은 위에서 봐도 알 수 있는 단정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진지한 태도였다.
윤대협은 다시 심박수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두통은 없다. 현기증은... 아마도 아니다. 조금 다른 기분이다. 가슴을 휘저어 놓은 것처럼 간지러운 기분이 등줄기를 따라서 올라간다. 윤대협은 놀라지 않았다. 누구라도 서태웅이 이렇게 해 준다면...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목이 멜 정도로 소중한 손길로 몸을 닦아준다면.
서태웅은 한 번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두 번, 세 번씩 상체를 꼼꼼하게 문질렀다. 차가웠던 타월이 윤대협의 땀과 체온으로 미지근해질 때까지.
제 손목에 타월을 대 보더니. 윤대협에게 한 마디 던진다.
"이제 누워."
다시 벌떡 일어나려는 서태웅의 손목을 윤대협이 다급하게 붙들었다. 서태웅은 일어서지 못하고 침대에 도로 앉았다.
"왜?"
의문이 가득한 얼굴. 윤대협은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바짝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인다.
서태웅은 오래 기다려 주지 않았다. 묵묵히 제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 손을 뻗어 윤대협의 이마를 짚는다. 차갑다.
다시 가져가서 자신의 이마를 짚는다. 뚱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타월의 온도 때문에 제대로 잴 수 없겠지.
갑자기 얼굴이 다가왔다.
서태웅이 자신의 이마를 윤대협의 이마에 갖다 댔다.
집중하듯 눈을 살짝 감은 채로.
속눈썹이 광대뼈에 닿을 것 같다. 너무 가까이 온 이목구비에 초점이 전혀 맞지 않았다.
그래도 윤대협은 끝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서태웅의 얼굴이 다시 천천히 멀어지는 걸 본다. 긴가민가한 표정.
"내린 것 같기도 하고..."
윤대협은 갑자기 타는 듯이 목이 말랐다.
부엌으로 가거나 서태웅에게 물 한 잔만 부탁할 수 있었지만. 다른 수단을 쓰기로 했다. 완전히 충동이었다.
"그럼 다시 재 봐."
하지만 계산이기도 했다.
서태웅은 아무런 의심 없이 윤대협의 제안대로 얼굴을 바짝 붙인다.
다시 눈을 살짝 감은 채.
이마가 붙으려는 순간.
윤대협은 고개를 살짝 비틀면서 턱을 내밀었다.
입술이 먼저 닿았다.
너무 가깝게 붙어 있어 흐려진 초점으로도 서태웅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게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날뛰기 전에 얼른 상완을 붙들고 도톰한 입술을 쏙 삼킨다. 말랑하다.
뭐라고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는 걸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혀가 얽힌다. 따스하다. 점점 뜨거워진다. 이제 누가 열이 나는지 모르겠네.
서태웅은 어느새 양손으로 윤대협의 허벅지쯤 되는 바짓자락을 꾹 붙들고 있었다. 하의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입천장 쪽으로 파고들 때마다 서태웅의 코가 움찔움찔 찡긋거리는 게 느껴진다.
서태웅의 위팔을 쥐고 있던 윤대협의 손이 스르르 밧줄처럼 서태웅의 등 뒤로 돌아가 전신을 감싼다. 서태웅의 티셔츠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바짝 맞붙은 두 가슴이 들썩인다. 서태웅이 내려 준 열이 다시 오른다. 서태웅 때문에.
쪽, 소리를 내면서 윤대협이 서태웅에게서 얼굴을 뗀다.
끈질긴 키스가 끝났다. 살짝 벌어진 서태웅의 오동통한 입술 가에서 삼키지 못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윤대협은 얼른 달라붙어서 핥아 올렸다. 그 김에 한 번 더 쪽.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서태웅의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하려는 듯이 입을 뻐끔거리는데. 무슨 말이 나오지는 않는다.
윤대협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손가락으로 발개진 서태웅의 뺨을 연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원래 체온계는 입 안에 넣어서 재잖아."
서태웅이 얼굴을 찡그린다.
작은 얼굴에 꽉 찬 이목구비 사이사이로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가. 느낌표가 지나갔다가. 다시 물음표가 됐다가. 차례로 바뀐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태웅은 한참을 생각했다.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하는 게 빤히 보여서 윤대협은 미소를 지었다. 기특하니까 솔직하게 말해주기로 했다.
"사실 거짓말이야."
"이 자식이."
서태웅이 주먹을 꾹 쥔다. 아차. 윤대협이 바로 가드를 올린다.
하지만 서태웅은 때리지 않았다. 아직 아플까 봐 봐주는 것 같았다.
윤대협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직 물기가 남은 타월을 서태웅의 달아오른 뺨에 가져다 댔다. 흠칫 놀란다. 미지근해진 지 오래일 텐데 차갑게 느낀다는 건.
"태웅아. 이제 네가 열나나 보다."
짚이는 바가 있는지 서태웅이 손등으로 제 이마를 짚는다. 윤대협은 친절하게 제안했다.
"너도 벗을래?"
서태웅이 눈을 가늘게 뜬다. 이런. 수작을 들킨 것 같다.
"헛소리하지 말고 누워. 이제 자."
수건을 뺏더니 어깨를 꾹 눌러 윤대협의 상체를 강제로 침대에 눕힌다. 어라. 적극적이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윤대협이 서태웅의 팔꿈치부터 쓸어올리자 진저리를 치며 도망간다. 격한 반응에 윤대협은 배를 잡고 웃었다.
서태웅이 뭐라 궁시렁궁시렁 욕을 하면서 부엌 쪽으로 간다. 자기 가방을 뒤적이더니 뭘 하나 이쪽으로 툭 던진다. 윤대협이 얼른 몸을 일으키며 공중에서 척 받았다.
"마셔."
포카리스웨트였다. 사는 걸 못 봤는데. 쿨시트를 사러 갈 때 샀는지. 아직 차가운 캔에는 결로가 잔뜩 붙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대로 엄지손가락으로 따서 마신다. 뜨거워진 입 안을 지나 식도로 떨어지는 차가운 액체가 반갑다. 하지만 이것보단 아까 그게 훨씬 더 맛있었는데.
아쉬운 마음을 담아 풀썩. 윤대협은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서태웅이 부시럭 부시럭 툭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분다. 선풍기를 가져왔다. 잘 찾네. 감탄이 나온다. 윤대협의 방을 드나들며 샤워하고 졸다가 옷만 입고 가는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 봐 둔 게 있었던 모양이다.
윤대협은 뭐라고 말을 걸려다 입을 다물었다.
서태웅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였다.
하지만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침묵 위로 규칙적인 선풍기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시원하다. 잠이 온다. 윤대협은 하지 못한 말을 곱씹으며 사뿐히 잠들었다.
한 번 더 할래?
윤대협이 잠들었다.
서태웅은 소리 없이 윤대협의 침대 옆으로 다가섰다.
또 손목을 잡힐까 봐 멀찍이 서서 한참 관찰한다. 규칙적인 숨소리. 살짝 벌어진 입. 미동 없는 속눈썹. 틀림없이 잠들었다.
그제야 편하게 앉는다. 이마에 손을 대 본다. 조금도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드디어 다 나았군. 멍청한 녀석. 센 척하다가 쓰러지기나 하고.
침대에 팔꿈치를 괴고 윤대협을 구경한다. 잘생겼다. 눈을 감고 있어도.
오늘따라... 입술이 크게 보인다.
서태웅은 자신도 모르게 검지손가락 옆면을 제 입술 사이에 대고 꾹 눌렀다. 아까 그 감촉이 되살아난다. 가슴이 울렁인다. 이건 일사병이 아니다. 결코 일사병이 아니다.
검지손가락을 그대로 뻗어서 윤대협의 입술을 향해 가다가. 공중에서 멈췄다. 속 입술을 깨문다. 꾸욱 주먹을 쥔다.
서태웅은 조용히 일어났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가방 속의 포카리스웨트 캔 세 개를 윤대협의 식탁 위에 늘어놓고. 그 외의 흔적을 지운 채로 신발을 신었다. 복도에 서서 최대한 조용히 현관문을 닫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쏟아졌다.
내일부턴... 부 활동만 해야겠다.
절대 들킬 생각 없는 마음의 열을 안고 자전거에 올라탄다. 씩씩하게 페달을 밟는다.
달칵.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닫힌 순간.
윤대협이 눈을 떴다. 천장이 보인다.
서태웅이 떠난 방 안에서 윤대협은 씨익 웃었다.
의외로 승산이 있는 것 같은데.
윤대협은 이길 수 있는 게임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