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 of heartbreak
불면의이쑤신
now, how did I lose you
윤대협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
하늘의 빛깔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눈을 찌를 듯이 새파랗던 가시광선이 한풀 꺾여 무광 색지처럼 한 톤 차분하다. 여전히 예쁜 하늘색이지만. 수평선 가까이부터 하얗게 탁한 색이 번진다. 아직은 노을이 시작되지 않았다. 노을의 전조 정도. 바다에 유리막 같은 저녁 햇살이 깔리기 시작한다. 태양의 고도가 낮아지며 번쩍이는 윤슬의 방울이 점점 커진다.
오늘은 낚싯대를 가져오지 않았다. 의자가 될 만한 사물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대충 던져 놓은 긴 다리 사이에 늘어뜨린 두 손 안에는. 농구공이 있었다.
커다란 두 손에 익숙하게 감겨 오는 가죽의 촉감. 손끝으로 또 손바닥으로. 위치를 조금씩 바꿔 가며 만지작거린다. 드리블하거나 던지지는 않았다. 놓쳐서 바다에 빠질까 봐. 한 30분 전에는 진짜로 떨어뜨릴 뻔했다. 검지 두 개 사이에 둔 채로 핑그르르 돌리다가 그만. 결국 쫙 펼친 손에 힘을 주었다 말았다 하는 정도밖에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얌전히 있었구나.
새로운 깨달음에 윤대협은 배시시 미소 지었다. 사실 농구공을 가져온 건 누군가를 흉내 내 본 것이다. 그전에는 한 번도 가져온 적 없었다. 별로 어울리는 소지품이라 할 수는 없다. 여기선 농구를 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도 농구공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있던 녀석이었지. 마치 강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말없이 재촉하는 것처럼. 묵묵히 선언하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이게 필요해질 거라고. 넌 어차피 나와 농구를 하게 될 거라고. 오히려 윤대협은 낚시가 목적이라 낚싯대를 잡고 있는 게 아니었는데도.
서태웅은 그랬다.
질리면 혼자 가서 하겠지. 싶어서 윤대협은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서태웅은 고집스럽게 기다렸다. 윤대협도 서태웅과 농구하는 건 언제나 재미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 그래서 적당히 태양이 좀 덜 뜨거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일어섰다.
그냥 만나자마자 농구할 걸.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으면.
서태웅이 미국에 갈 줄 알았으면…
윤대협은 수면에 반사된 햇빛이 드리운 역광 속의 농구공을 멍하니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서태웅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낚싯대를 붙잡고 바다를 바라보던 윤대협 옆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농구공을 꼭 쥐고 기다렸다. 처음부터 그래, 소원대로 농구하러 가자고 일어섰다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했을 텐데. 윤대협은 그게 마지막인 걸 몰랐다. 서태웅은 알았겠지만.
그래서 태양이 좀 덜 뜨거워지기를 기다려 적당히 일어났다.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이었다. 야외 농구장은 물론 더웠지만 견딜 만했다. 재미있었으니까.
어둠이 버저비터 대신 깔리고. 이제 돌아갈 때가 된 것을 둘 다 알았을 때. 서태웅이 말했다.
“나 미국 간다.”
윤대협은 농구부를 통해 그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음 주에.”
하지만 그날이 마지막인 줄은 몰랐다. 서태웅은 알았겠지만.
“그렇구나…”
윤대협은 땀방울을 느리게 닦아내며 잠시 이마를 짚었다. 서태웅은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는?”
그렇게 물었다. 내가 미국에 간다면. 너도 농구부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겠지… 윤대협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제안은 있었고. 고민도 해 봤다. 서태웅이 굳이 그런 게 궁금해서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평범하게 대답했다.
“나는 안 가.”
“왜?”
“글쎄…”
서태웅은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리는 녀석이다. 코트에서만 끈질긴 것이 아니다… 말 돌리기가 잘 먹히지 않는 상대에게는 왠지 과장하거나 포장하거나 군더더기가 붙은 대답을 내놓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곤 한다. 윤대협은 있는 그대로 대답해 주었다.
“나는 여기도 농구하러 왔으니까.”
서태웅의 진지한 무표정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충분히 재밌어.”
진심이었다.
이미 한 번 떠나온 사람은 쉽게 다시 떠날 수 없다. 이곳이 편안해지기까지도 시간이 걸렸고. 노력이 필요했다. 장악이라는 말은 이제야 겨우 쓸 수 있다. 그때 윤대협의 목표는 여전히 전국대회였다. 충분히 의미 있고 아름다운 목표였다. 같이 이루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윤대협은 주장이고 서태웅은 아니었다.
윤대협은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라서 이렇게 말해 보았다.
“미국엔… 나보다 잘하는 사람, 많은가?”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은근하게 누르고 물어보았다. 레퍼런스 당사자인 서태웅은 흥 코웃음 치더니 투덜거렸다.
“당연하지. 멍청아.”
“하하. 그렇겠지.”
윤대협은 흐릿한 가로등 불빛에 비친 서태웅의 윤곽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본 것 같고. 이제 다시는 못 볼 그림자 같은 윤곽.
“여기도 너나 강백호보다 재미있는 녀석들 많이 생기겠지.”
“퍽이나.”
서태웅은 아까보다 더 크게 코웃음 쳤다. 윤대협은 이번엔 참지 못하고 너털웃음을 뿌렸다. 이 엄청난 자신감은 뭐지. 이유 있는 자신감이긴 했다. 윤대협이 생각해도 두 사람보다 재미있는 신입생은 앞으로 20년 정도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은 운이 좋았다. 덕분에 즐거웠던 걸 생각하면 행운 정도는 빌어주고 싶은 마음도 되기 마련.
“그럼. 미국 유학 잘해라.”
그리고 돌아섰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서태웅이 곧바로 뒤돌아 갔는지, 아니면 윤대협이 뒤돌아서는 순간의 모습 그대로, 계속 윤대협이 윤곽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런 것은 알 수 없었다. 언젠가 같은 장소에서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푸른색이 창공 꼭대기로 밀려났다. 북극성의 주변은 조금씩 희게 색이 바래고. 수평선으로부터 하늘색을 서서히 잠식하는 주황색, 다홍색, 붉은색, 황금색. 옅게 깔린 구름 장막 너머로 해가 떨어진다. 파도 없는 물결 위를 물수제비처럼 지나가는 황금빛 햇살이 미친 듯이 번쩍이며 튀어 오른다. 오늘의 마지막 윤슬. 망막에 새겨질 것처럼 무자비하게 빛난다. 아름답다고 계속 바라보다 시력이 손상될 것만 같다. 그래도 눈을 뗄 수가 없다. 하늘보다 먼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잿빛 바다 표면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을 본다. 구름 사이사이로 마지막 햇빛이 타오른다.
이 시간의 바다는 이렇게 아름답구나. 윤대협은 감탄했다. 대체로 이때는 집에 있거나. 반가운 불청객이 있을 때는 신나게 농구했다. 바다와 하늘이 동시에 불타오르는 줄도 모르고. 그냥 림이 보일 정도로 볕이 남았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누군가 찾아와야만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었구나. 너무 몰두한 나머지 누가 함께인지도 잊었던 것 같다. 사라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윤대협은 문득 외부에서 던져진 것 같은 그런 생각을 멍하니 했다. 혼자서 바라보는 노을이 이토록 아름다운데도.
서태웅이 없어도 농구는 재미있다. 윤대협은 잘하고 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올해 여름에는 반드시 전국대회에 나갈 것이다.
하지만 서태웅이 있었던 때만큼 재미있지는 않다.
그러기는 어렵다. 신입생들은 나름대로 귀엽다. 올해 지역에서 가장 잘하는 아이들도 나름대로 수준이 있다. 윤대협을 동경하거나, 윤대협을 의식하거나, 윤대협을 목표로 하는 선수들도 있다. 하지만 중학교 교복에서 벗어나자마자 타도 윤대협을 외치며 실제로 윤대협과 눈높이를 마주한 선수는 아무도 없다. 그렇게 빨리 성장하는 선수도. 그렇게 많은 것을 이미 가진 선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윤대협을 꺾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선수도.
윤대협은 가 본 적도 없는 전국대회에 윤대협보다 더 나은 선수가 있느냐고 물어보는 엉뚱한 사람은 당연히 없다.
이렇게 금방 사라질 줄 알았으면 더 즐겼을 텐데. 윤대협은 그게 아쉬웠다. 일 대 일도 더 많이 해보고. 북산의 전국대회도 구경 가면 좋았을까. 그건 아무래도 훈련 때문에 어려웠을 것 같지만.
서태웅이라면 그렇게 간단히 속지 않았을 거야. 쉽게 풀리는 경기에서 윤대협은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서태웅이라면 거기서 막히지 않았겠지. 좀 더 빠르게 타이밍을 빼앗지 않으면 위험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윤대협이 서 있는 코트에 서태웅 같은 선수는 더 이상 없었다.
윤대협을 따라잡기 위해 서태웅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하는 것은 누구나 알았다. 그러나 윤대협이 더 나아지기 위해서도 서태웅이 필요한 건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윤대협이 잃어버린 것은 윤대협만 알았다.
바다가 태양을 완전히 삼켰다. 수평선과 평행하게 붓으로 그은 선처럼 드리워진 구름 띠가 가장 먼저 잿빛 섞인 보라색으로 물든다. 구름 주변은 분홍색과 주황색 파스텔을 서로 문댄 듯이 번져 있다. 창공이 한 톤 어두워질수록 보라색 구름 띠와 분홍색 하늘이 한 톤 더 진해진다. 잿빛 모래사장은 파도가 쓸고 지나가며 남은 물기로 거울처럼 빛난다. 윤대협은 농구공을 바닥에 내려놓고 발 사이에 고정했다. 팔을 무릎 위에 늘어뜨리고 편안히 감상한다.
순식간에 이 모든 색채와 빛이 사라질 것이다. 어둠은 어둠만의 또 다른 채색을 보여주겠지만. 그래도 지금 보이는 것을 사랑한다면. 가능할 때 최대한 즐겨야 하는 것이다. 사라질 것을 알았다면 기꺼이 그랬을 텐데. 노을 지는 바다에 아까워할 틈도 없어 눈 떼지 않듯이.
림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서 있던 서태웅을 떠올린다. 쫓는 마음으로, 그러나 쫓기는 마음으로. 윤대협 앞에 서 있었던. 사라질 듯이 희미한 윤곽이 느리게 움직이면서. 조금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국에, 너보다 나은 녀석이 있을까?
바다 건너 보이지 않는 땅. 보라색 구름 띠 너머로 사라져 간 태양이 비추는 곳.
서태웅이 그때 그 마음으로 지금 거기 있는 거라면. 지금 그 마음으로 그때 윤대협에게 왔던 거라면.
윤대협은 어떤 감격을 느꼈다. 동시에 쓸쓸해졌다. 왜냐하면 서태웅은 할 수 있는 한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이 선명해져서. 전국대회 잘하라는 말은 최대한 오랫동안 토너먼트에서 돌아오지 말라는 뜻이고. 미국 유학 잘하라는 말은 최대한 귀국할 일 없으라는 뜻이다. 축복하는 대상이 추구하는 목표를 고려하자면 그렇게 된다.
함부로 행운을 빌어줄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서태웅과 같이 농구하고 싶었다면.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즐거웠는걸.
행운 정도는 빌어주고 싶은 마음도 된다. 진심으로.
수평선 너머로 가 버린 태양의 보라색 그림자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마저도 점점 더 짙어지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손쓸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여기 있어도 된다. 딱히 기다린다 말할 수는 없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니까.
그저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지난 시간의 흐름을 기억해 내는 것
로스앤젤레스는 일 년 내내 덥다. 그래도 습하지 않아서 그늘진 곳에서 운동하긴 최고다. 서태웅은 가져온 긴팔을 몇 개만 빼고 거의 다 집으로 돌려보냈다. 감량할 게 아니라면 후드티 같은 건 입을 일이 없었다.
산타모니카 해변 근처에도 농구 코트가 있었다. 서태웅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고향에서와 달리 항상 사람이 많았지만. 항상 그랬듯이 얌전히 순서를 기다리고 있으면 꼭 붙임성 좋은 누군가가 한 판 쉬고 싶은데 네가 대신 끼지 그러냐고 패스를 던져 오곤 했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과 통성명도 없이 팔뚝부터 부딪히며 농구했다. 학교에서 하는 훈련과는 색다른 재미였다. 아무 정보도 없는 사람들을 몇 번의 플레이만으로 최대한 파악해서 순발력만으로 이기는 것. 연습이 되었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도전자로서 새로 시작한 농구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여기서는 누군가 특정한 한 사람을 이겨야 한다기보다. 서태웅을 가로막는 더 큰 범위의 무언가가 있었다. 얼굴이나 이름 같은 실체가 없고. 하지만 분명히 스스로 깨야만 하는 무언가. 때로는 백 퍼센트를 보여주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기도 했고. 초조함이나 조급함이기도 했고. 정말로 무엇을 돌파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안개 속에 갇힌 듯이 막연한 답답함이기도 했다.
연습만이 유일한 숨 쉴 구석이다. 팀 훈련도 좋았다. 서투른 영어로라도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받고자 하면 배우는 쪽은 주로 서태웅이었다. 완전히 다른 문화권이라 해도 기본적으로 배우겠다는 자세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막상 코트에서 뭔가 가로막힌다는 느낌일 때.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 폭발하고 싶은 만큼 폭발하지 않는, 발휘해 온 것만큼 발휘되지 않는 위화감에 숨이 막힐 때. 서태웅은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윤대협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러면 거짓말처럼 좁아졌던 시야가 넓어졌다. 의식하지 않고도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지금까지 훈련 속에서 몸을 부딪쳐 가면서 배웠던 것과 관찰해 왔던 정보를 바탕으로, 재빠르게 예측하고 딱 한 수 앞질러서 보기 좋게 제쳤다. 폭발하고 싶은 만큼 폭발했고 발휘해 온 대로 발휘했다. 다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괜찮은 경기를 만들어 간다. 하루하루를 간신히 연결해 간다는 느낌이 있었다. 매 경기가 산왕전이다. 쫓아간다는 건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것. 그게 재미있는 거지만. 그만큼 지치는 일이기도 하다.
의사소통도 쉽지는 않았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추가적인 에너지. 그 순간에 잘 알아듣지 못한 건 나중에도 곱씹으며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본다. 하지만 좋은 조언이었다면 추측 같은 것으로 뭉개거나 놓치고 싶지 않은데. 기왕 왔으니까 가장 잘해 나가고 싶은데. 최대한 성장하고 싶은데.
쉬운 건 없다.
그렇게 느낄 땐 산타모니카 해변을 뛰었다. 더워도 타는 게 싫어서 그냥 긴팔을 입고 달렸다. 모두가 반팔, 민소매, 심지어 수영복을 입고 웃으며 걷고 있는 해변을 따라서. 해변엔 언제나 사람이 많다. 웃통 벗고 비치발리볼을 하고. 스케이트보드와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지나가고. 파라솔도 없는 곳에 드러누워 살을 태우고.
서태웅은 달렸다. 해변 끝에서 끝으로. 다시 반대쪽 끝으로. 아스팔트에서. 모래사장에서. 갈수록 체력이 늘어서 점점 더 거리가 늘었다.
태양이 수평선에 가까워지면 비치발리볼을 하던 사람도 스케이트보드와 롤러블레이드를 타던 사람도 부모님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먹던 아이도 선셋을 보러 나란히 노을을 향해 앉는다. 달리는 서태웅의 눈에 싫어도 들어오는 핑크색 하늘. 붓으로 그린 평행선처럼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보라색 구름 띠. 사라져 가는 태양.
서태웅도 어느새 멈춰서서 정신없이 태양의 마지막 순간을 보고 있었다.
서태웅은 해결되지 않은 답답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오늘 디펜스에서 어떤 플레이를 의도한 대로 해내지 못했다. 타이밍을 잘 못 잡고 있는 것 같은데 상대에게 읽혀서는 아니고 본인의 문제 같았다. 연습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서태웅은 오늘도 산타모니카 해변을 다섯 번 정도 뛰었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답답했다는걸. 태양이 저물며 남긴 보라색 그림자를 보면서 서태웅은 깨달았다.
기숙사에 돌아가 서태웅은 자기 전에 늘 그러듯이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어떤 주소를 물었다.
“대협아, 끝나고 좀 남아라.”
“저요?”
윤대협은 놀란 눈으로 반문했다. 감독의 지시로 주장이 남는 게 일반적으로 드문 일은 아니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윤대협은 그냥 집에 갔다. 어차피 주장이라도 똑같이 훈련받고. 주장이 주장다운 순간은 결국 시합 때인 거라.
농구부 일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감독님은 윤대협에게 개인적으로 줄 것이 있다고 했다.
“네 앞으로 편지가 왔다고. 교무실에서 전하라더구나.”
파란색과 붉은색의 짧은 선이 날개처럼 테두리에 찍혀 있는 에어 메일의 좌상단에는 미국 LA의 모르는 주소가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윤대협은 미국에서 편지를 받을 일이 전혀 없었다.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가방에 편지를 넣고 집에 가는 길. 윤대협은 내내 남의 것을 훔친 것처럼 가슴이 어색하게 두근거렸다. 당장 펼쳐보고 싶은 마음과 최대한 아껴뒀다 하루의 마지막에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 번갈아 떠올랐다.
어느 쪽이 더 끌리는지 가늠하는 사이에 집에 도착해 버렸다. 윤대협은 먼저 편지를 꺼낸 다음 가방을 던졌다. 일단 훈련 때문에 찝찝한 몸부터 씻고. 편지는 침대 위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것으로.
하지만 씻고 나니 또 배가 고팠다. 별난 편지 구경도 식후경이라지. 부모님이 지난 주말에 잔뜩 챙겨 준 반찬으로 배불리 먹었다.
결국 이래저래 잘 준비가 다 끝난 후에야 윤대협은 침대 위에 드러누워 편지봉투로 형광등을 가려 보았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 아래 쓰여 있는 이름은…
알파벳으로 쓴 서태웅이었다.
몸을 홱 뒤집어 베개를 가슴팍 밑에 깔고 엎드린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자. 엽서가 하나 나왔다. 여행 잡지에 나올 법한 근사한 해변의 사진엽서였다. 새하얀 모래사장과 반짝이는 파도와 그림 같은 야자수들. 해변에 바로 인접한 도시가 보였다.
엽서는 이렇게 시작했다.
편지봉투의 우하단에도 일단 윤대협의 이름이 쓰여 있긴 했는데. 혹시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을까 걱정한 듯이 덧붙인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엽서의 내용은 그 바로 다음 문장부터 인사도 없이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단어로 툭툭 끊어지는 듯한 짧은 문장은 디펜스 장면을 묘사하고 있었다. 요는 공격 쪽이 스텝을 멈춘 상태에서 파울이 되지 않는 범위로 발을 절묘하게 밀어 넣어 리듬을 깨고 싶다는 것 같은데. 그 타이밍이 고민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맨 앞자리가 낯선 전화번호.
엽서는 그렇게 끝났다.
윤대협은 다시 천장을 향해 돌아누웠다. 다 읽은 엽서를 배에 올려둔 채로. 산타모니카 해변이 윤대협과 함께 천장의 형광등을 바라본다. 엽서는 아주 짧았다. 읽는 데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편지봉투에 찍힌 소인 날짜는 사흘 전. 사흘 걸려 날아 온 엽서 속의 일 분짜리 내용.
잘 지내냐는 말 한마디 없었다. 윤대협은 후훗 웃어버렸다. 서태웅만 보낼 수 있는 편지다. 서태웅이 윤대협에게만 보낼 법한 편지.
상당히 미묘한 테크닉을 연습하고 있군…
그날 꿈에서 윤대협은 서태웅과 함께 밤새도록 일 대 일을 했다. 꿈에서는 해가 져도 림이 보였다. 적외선 카메라처럼 야광 초록색으로 보이지는 않았고 그냥 평범하게 잘 보였다. 별이 뜨고 달이 뜨고 다시 해가 뜰 때까지 두 사람 다 지치지 않았다.
며칠간 윤대협은 계속 서태웅의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농구부 연습을 하다가도 갑자기 그 상황을 혼자서 재현해 보거나. 잘 안되면 태산이와 일 대 일을 하던 중에 슬쩍 시도해 보기도 했다. 서태웅이 하고자 하는 기술은 금방 가능했다. 지금 윤대협이 하고 있는 게 정말로 서태웅이 하고 싶은 그 기술이 맞다면. 그건 확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이걸 전달할 수 있지. 그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윤대협은 반복적으로 연습하면서 머릿속에 정확한 표현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주장이 뭔가 비기를 갈고 닦는 것 같다고 농구부원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런 거 아닌데. 윤대협은 설명하기 귀찮아서 관뒀다.
하지만 이 기술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윤대협은 좀 더 넓혀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걸 쓰고 싶은 상황이라면 디펜스. 최소한 속공은 아니고. 골밑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그러면 스텝 타이밍보다는 오히려 시선을 어디 두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는데…
평일 내내 윤대협은 그런 식으로 서태웅이 던진 질문에 관해 묻지 않은 부분까지 자세하게 생각했다.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자정.
다음 날 늦게 일어나도 아무 상관 없는 때를 골라서 윤대협은 엽서에 적혀 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왠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여보세요.”
약간 멀리서 들리는 듯했지만. 서태웅의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여보세요.”
윤대협도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서태웅은 잠깐 사이를 두고.
“헤이.”
제법 반가워했다. 윤대협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헤이. 편지 잘 받았어.”
“응.”
서태웅은 전화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지. 평소에 얼굴을 보고 말할 때처럼 가만히 윤대협의 다음 말을 기다리다가. 약간의 사이를 두고 나서야 듣고 있다는 표시처럼 대꾸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너는 스텝 타이밍을 고민하는 것 같은데. 사실 더 중요한 건 시선인 것 같아.”
“시선…”
“그래. 거리 재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대치 상태에서 네가 공격수 다리를 체크하면 이미 거기서 타이밍을 뺏긴 거잖아.”
한참 동안 윤대협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온 것을 설명했다. 먼저 서태웅이 하고자 하는 기술이 완성된다면 대충 이런 모습이 되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그것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포인트를 설명하고. 그러면 서태웅의 고민은 자연스럽게 풀릴 수도 있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도해 볼 만한 것에 대해 제안하고.
어떤 시점에는 벌떡 일어나 몸으로 자세를 잡아 가며 설명하느라 전화기 줄을 몸에 빙빙 두르고 있기도 했다. 수화기 너머에서도 서태웅이 잠깐씩 발을 구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머릿속만으로 잘 안 돼서 실제 스텝을 밟아 보며 타이밍을 상상하는 것 같았다.
만나서 해 보면 금방인데. 윤대협은 생각했다. 서태웅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어때?”
“알 것 같아. 대충.”
“그래. 다음에… 한번 해 봐.”
같이 해 보자. 라고 말할 수 없어서 윤대협은 조금 입이 썼다.
“그래. 땡큐.”
선선히 고맙다고 말하는 서태웅은 조금 낯설다.
“그리고 전화번호 알려 줘.”
끈질긴 점은 하나도 안 변했다. 내심 이번 한 번뿐이 아닐 거라는 예감이 있었던 윤대협은 볼 사람이 없다는 점을 틈타 은근한 미소를 참지 않았다.
“너 시차는 알아? 학교 갔을 때 전화하면 안 돼.”
“당연하지. 지금 일요일 새벽이잖아.”
“오. 잘 아네.”
“흥.”
“부모님이랑 통화 자주 하나 봐.”
“매일.”
“착한 아들이네.”
“여긴 아침이야.”
“그래. 아직 토요일 아침이지.”
과거에 있는 서태웅에게 시간을 맞춰 전화를 걸었다. 타임머신을 통해 속삭이는 것 같다. 이렇게 오래 국제전화를 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이렇게 오래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던 것 자체가 인생에서 한 번도 없었다.
“전화번호 알려 주면 언제 걸 거야?”
“… 지금. 다음 주나… 다다음 주 지금. 아니면. 조금 더 빨리.”
“그래. 전화비 많이 나오니까 네가 걸어. 하고 싶은 말 있을 때.”
“그래도 돼?”
벌써 자기 맘대로 다 해 놓고 그래도 되냐고 물어본다. 정말 웃기는 녀석이다. 윤대협은 전화기로 들리지 않을 만큼 활짝 웃었다.
“재밌으면 받아 주고 아니면 끊을게.”
“참 나.”
“오늘은 재밌었어. 신입생들은 아무도 너 같은 질문 안 하거든.”
“수준이 낮은가 보지.”
“하하. 그럴지도.”
툴툴거리면서도 서태웅 역시 전화를 끊을 기미가 없다. 그게 이상하게 윤대협의 가슴을 간지럽혔다. 서태웅은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이렇게 오래 국제전화를 한 적이 있을까. 아니 국제전화가 아닌 전화 자체를 이렇게 오래 한 적 자체가… 윤대협으로 말하자면 여자친구와도 밤새워 통화한 적이 없었다.
“너 안 자냐.”
“잠이 깼어. 넌 운동 안 해?”
“하고 왔어. 이제 점심시간이야.”
“그래… 밥 먹어.”
“너는 자.”
“알았어. 피곤하니까 다음엔 편지로 하자.”
“싫어.”
“엽서 예쁘던데.”
“목소리가…”
서태웅은 그렇게 말했다가 다시 정정했다.
“말로 하는 게 훨씬 더 좋아.”
윤대협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작별 인사를 했다.
“잘 자, 태웅아.”
“안 잘 거야.”
“나는 잘게.”
“어.”
잘 자.
조금 멀리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서태웅은 망설임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윤대협은 조금 멀리서 들리는 듯한 짧은 신호음의 여운을 잠시 즐겼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사라진 공간을 규칙적으로 채운다.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지연된 수면은 강렬하게 의식을 앗아 갔다.
꿈도 없이 푹 잤다.
멀어져 가는 그때의 나와 그 곁의 너에게
서태웅은 능남이 전국대회 지역 대표로 확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남을 꺾었군. 가장 처음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북산은 왠지 놀랍지 않았다. 그야 내가 없으니까.
왠지 이건 엽서를 보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전? 그렇게 말하나? 서태웅은 산타모니카 해변가의 조그마한 가게에서 소프트 아이스크림과 관광객용 기념품 매대 사이에 꽂힌 해변 사진엽서를 하나 골랐다. 몇 번인가 윤대협에게 보낸 엽서와 겹치지 않는 걸로.
말리부, 엘 마타도르, 에르모사. LA는 아름다운 해변이 많다. 고향에서 본 적 없는 기암괴석이며 절벽, 야자수가 늘어선 색다른 풍경 중 하나를 골라 윤대협에게 보낸다. 지체 없이 우체통으로. 에어 메일은 하루가 걸릴지 사흘이 걸릴지 운 나쁘면 일주일이 걸릴지 알 수가 없다.
축하해, 라고 쓰려다 왠지 멋쩍어서 영어로 썼다.
그 주말에는 윤대협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식 빠르네.”
“축하.”
어쨌든 목소리로도 한 번 더 축하해준다.
“고마워. 넌? 토너먼트 잘 다녀왔어?”
“응.”
“스타팅 나갔어?”
“세 번.”
“굉장한데.”
“당연하지.”
지난 3주 정도는 윤대협과 통화할 수 없었다. 고국보다 좀 더 빠른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원정 토너먼트에 나갔기 때문이다. 서태웅은 피나는 노력 끝에 로스터에 들었고 토너먼트 진행 과정에서 스타팅까지 들어갔다. 다음 토너먼트에서는 더 활약할 수 있을 것이다. 졸업 전까지 최대한 많은 시합에 스타팅으로 나가는 게 목표다.
충분히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이었지만 실제로 얼굴을 보고 자기 일처럼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농구부원들은 친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경쟁자고. 예전과는 다르다. 완전히 내 편이기만 한 사람은 일단 현재 곁에는 없다.
그래도 통화는 할 수 있다. 엽서도 보낼 수 있고. 어쨌든 윤대협의 인정은 서태웅에게 의미가 있다. 가족과는 조금 다르다.
3주 동안 못 한 농구 얘기를 잔뜩 한다. 이건 반드시 윤대협한테 말해야지 생각했던 장면들이 몇 개 있었다. 간결하게만 말해도 윤대협은 잘 알아듣는다. 편하다. 서태웅은 직접 본 장면이니까 머릿속에 선명한 그림이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윤대협이 서태웅의 설명만으로 마치 그 장면을 본 듯이 술술 말하는 건 신기하다. 머릿속에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인 것 같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윤대협과 일주일에 한 번, 가끔 빼먹을 때도 있지만, 어쨌든 주 1회 베이스로 통화하면서. 서태웅은 조금씩 자신이 외로웠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몰랐다. 스스로 외롭다는 사실을. 편한 언어로 마음껏 농구 얘기를 할 사람이 없고, 추측이 없는 확신을 바탕으로 칭찬과 피드백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고, 무조건 자신의 편에서 축하나 아쉬움을 건네주고 공감해 줄 사람이 없었다는걸.
나고 자란 환경에서는 사람이 부족하진 않았다. 혼자서 고민하고 연습하고 시도하는 걸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선 말 한 번 거는 것도 추가로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이라. 그런 추가적인 에너지를 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그런데 혼자가 아니라 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서태웅에게는 점점 더 소중해졌던 것이다.
윤대협과 통화를 끊고 나면 그전에는 몰랐던 외로움을 알게 되곤 했다. 그러나 또한 통화를 끊고 나면 항상 그다음 주말이 찾아오기에. 윤대협의 공백은 결핍인 동시에 더 오랜 시간을 견딜 만한 지지대가 되었다. 주말에 이야기할 무언가를 찾아 더 강하게 발을 딛고 생활할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니어서 버틸 수 있었다.
같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서태웅은 통화와 통화 사이의 타지 생활 속에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윤대협의 목소리가 언제나 잘 자라는 말을 (서태웅은 잘 시간이 아닌데도) 마지막으로 끊어지고, 다시 엿새 밤을 지나서 여보세요, 하고 익숙한 인사를 말할 때까지. 그사이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주로 농구. 때때로 공부하거나 놀거나 하는 학교생활. 윤대협도 같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주로 농구할 때.
하지만 윤대협은 이미 농구하러 출신지를 떠나온 사람이었다. 서태웅이 두고 온 곳으로. 서태웅이 미국으로 유학을 온 것처럼 윤대협은 능남으로 유학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루고 싶은 게 있어서. 그게 전국대회 제패라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은 없었다. 서태웅과 똑같았다. 다만 서태웅은 그걸 이루기 전에 미국으로 왔을 뿐. 그렇다고 도망친 건 아니다. 전국대회의 경험이 값지고 즐거웠듯이 미국은 더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유학을 온 곳에서 다시 또 다른 곳으로 유학을 가는 것은 역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태웅에게는 지금 여기가 최고의 무대이기 때문에.
윤대협에게도 같을 것이다. 다른 곳에 서 있을 뿐. 윤대협이 미국에 오고 싶었다면 분명 왔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올 수 있다. 하지만 윤대협은 그러지 않기를 선택했다. 서태웅이 미국에 오기를 선택한 것처럼.
그래서 서태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고 나면 덧붙일 말이 없었다.
아쉽다는 말은 군더더기처럼 느껴졌다.
가끔 통화 중에 서태웅은 윤대협도 무언가를 아쉬워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윤대협은 자기 의사로 미국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쉬울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서태웅은 윤대협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아쉬움이 전해진다고 느꼈다. 막상 그 녀석은 아무것도 아쉽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도. 미국 가서 잘하라고만 했지.
그냥 서태웅의 착각일 수도 있다. 전화는 어렵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서태웅의 의사가 잘 전해지는지. 윤대협의 말투가 제대로 들린 건지. 가끔 확신이 없다. 그래도 영어보단 낫지만.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윤대협의 얼굴은 웃는지 아닌지 상쾌해 보이는 평소 같은 표정. 돌아서면서 서태웅을 바라보고. 그럼, 미국 유학 잘해라.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농구공을 사이에 둔 코트에서의 윤대협. 아래를 잠깐 내려봤다가 서서히 치켜뜨는 땀에 젖은 속눈썹. 그 뒤의 멍한 듯이 집중이 가득한 눈동자. 시선이 따라가는 대로 한눈을 팔았다간 페이크에 걸릴 수 있다는 긴장감. 저기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곳까지 파악하고 있는. 윤대협의 공간 그 자체. 그러니까 서태웅은 윤대협의 얼굴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서태웅이 마주 바라보고 있는 두 눈동자에서 시작해 결국은 코트 전체로 확장되는 장악력. 윤대협이라는 존재 자체를 서태웅은 몸에 새긴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혼자 윤대협을 상대하고 있다. 기억 속의 윤대협. 상상 속의 윤대협. 때로는 지난 주말에 통화했던 윤대협이 설명하는 플레이.
물론 그건 하나같이 농구하는 모습이어서. 통화를 할 때 윤대협이 어떤 얼굴인지 서태웅은 상대적으로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화를 하는 윤대협의 모습 같은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웃음소리가 들리면 웃는 얼굴이 기억나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마지막에 봤던 차분한 얼굴을 대체로 떠올렸다. 가끔 농구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할 때는 왠지 흰색 능남 유니폼을 입은 윤대협이 진지하게 코트를 직접 뛰어가며 설명하는 것처럼 상상하기도 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것이 머리에 그려졌다.
아마 서태웅은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짧아도 두 시간은 훌쩍 넘기는 긴 통화 중에서 그 말을 할 타이밍만은 이상하게 마땅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알기 어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 통화해 줘서? 그때 엽서를 받고 전화해 줘서? 아니면 그 전에 승부해 줘서?
혹은 애초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무 길어지면 군더더기처럼 느껴졌다.
“다음 토너먼트는 언제야?”
“7월.”
“방학이네.”
“여긴 이미 방학이야.”
“부럽다. 우린 다음 주인데.”
“어차피 토너먼트 다녀야 돼.”
“그래…”
이럴 때. 서태웅은 약간 끝이 늘어지는 윤대협의 목소리에서 조금 아쉬움을 느낀다.
“그럼 졸업하고 돌아오겠구나.”
드디어 서태웅은 벼락같이 깨닫는다. 윤대협의 목소리에서 느껴졌던 감정이 무엇에 대한 아쉬움이었는지. 윤대협은 서태웅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면 나랑 똑같잖아.
서태웅은 가슴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답답하다. 윤대협이 미국에 오지 않는 이유를 서태웅이 잘 알고 있는 만큼 서태웅이 다시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윤대협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아쉽다고 말할 이유가 없어서 윤대협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동시에 다급하게 입을 연다. 서태웅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방학 때는 안 돌아가.”
“응.”
“얘네 딱 두 번 쉬어.”
“추석하고 설날?”
“추석은 없고 땡스기빙. 그리고 크리스마스. 인디펜던스 데이.”
“세 번이잖아.”
“세 번.”
“그래… 두 번보다는 낫네.”
수화기 너머에서 윤대협이 후후 웃는다. 헷갈릴 수도 있지. 우리나라엔 없는 명절이 많단 말이다.
미국에 오고 나서 첫 추수감사절에는 NCAA 토너먼트 견학을 가느라 집에도 안 갔다. 크리스마스엔 시합도 없고 기숙사도 닫아서 얌전히 귀국했다. 매년 부활절에는 유스 토너먼트가 있어 바쁘다.
“그 추석 비슷한 건 9월?”
“10월.”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고.”
“응.”
“인디펜던스 데이는?”
독립기념일 연휴는 칠월 첫 주다.
“7월 4일.”
수화기 너머 윤대협이 잠시 침묵한다.
“그래…”
약간 끝이 늘어지는 목소리. 이건 아쉬움이 아니다.
“그렇구나.”
그때 돌아오는구나, 라고 윤대협은 말하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돌아가는 거야, 라고 서태웅은 말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군더더기라고 느꼈다.
전화를 끊기 전에. 윤대협은 조금 멀리서 들리는 듯한 짧은 통화음을 당분간 듣고 있었다. 오랜만이었다. 나지막한 잘 자. 그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를 여운처럼 채우는 단조로운 소리.
수화기를 내려놓고 윤대협은 침대에 누웠다. 심장이 부드럽게 맥박치는 것을 느낀다. 통화가 끊겼을 때처럼 짧고 단조로운 고동소리.
7월에 서태웅이 돌아온다.
의미 있는 귀국은 아니다.
어차피 윤대협은 미국에 가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서태웅은 미국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윤대협과 서태웅은 각자 자기 자리에 서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궤도를 그려나가면서 농구할 것이다. 나와 함께 농구하기 위해 궤도를 벗어나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 따위는 단 한순간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선의 윤대협이 되라고, 최고의 서태웅이 되라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을 것이다.
기적처럼 그 궤도가 겹치는 순간이 있었다. 같은 지역에서 윤대협이 최고의 에이스였고, 서태웅이 슈퍼루키였던 그때. 윤대협이 거기 있었고 서태웅이 거기 있었다.
그 덕분에 느낄 수 있었던 짜릿한 전율. 빠르게 전신을 울리던 심장 소리. 참을 수 없이 즐거웠던 순간. 이기는 재미와 패배의 쓰라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하게 빚어냈던 일종의 달콤한 조우. 아무나 지나다니는 길거리였음에도. 다른 누구와 공유한 적 없었던 장면들.
그 덕분에. 서태웅이 떠난 뒤에도. 네 통의 에어 메일. 각각 다른 해변가의 사진엽서. 전혀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통화. 누가 엿들어도 전혀 상관없지만. 아무와도 이런 것은 나눈 적이 없었다는 측면에서 내밀한 대화들.
기적처럼 궤도가 겹치는 순간이 지나가고 나서도 연결은 끊어지지 않았다. 과거에서 온 별빛처럼 가늘게. 약 열여섯 시간의 과거로부터 들리는 듯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윤대협만 알고 있는 서태웅. 서태웅만 알고 있는 윤대협.
다시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나 우리 그림자가 겹치는 순간이 온다면.
윤대협은 그 장소가 어디일지 정확히 알았다.
약속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방학이다. 윤대협은 평소의 주말처럼 느지막이 일어났다. 앗. 그런데 부 활동이 있는 날이잖아. 이런. 평소처럼 일어나면 안 되는 거였다. 주말과 방학은 다른 거였지…
주장이 되고 나서도 지각해버리다니. 기왕 늦었기 때문에 윤대협은 무렴히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느긋한 걸음으로 학교를 향해 걷는다. 전국이 빡세기야 하겠지만 두 시간 늦었다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겠지…
익숙한 철도 건널목이 가까워 올 때. 윤대협은 알 수 있었다.
지금이구나.
건널목 너머에 그림자부터 익숙한 사람이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고 있다.
윤대협을 눈치챘다.
윤대협은 미소 지었다.
“여어…”
서태웅은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여어. 승부하자.”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윤대협은 학교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서태웅은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따라온다. 아마 윤대협이 그 길로 갈 거란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윤대협은 문득 찾아오는 충동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아스팔트를 박차고. 7월의 청명한 햇살 아래를 달린다.
두 발짝 정도 뒤를 느긋하게 따라오던 서태웅이 지체 없이 따라붙는다. 제법 빠르다. 윤대협의 옆을 파고들려 한다. 어림없지. 스피드를 좀 더 올린다. 둘 다 목적지를 아는 만큼 봐주지 않고 뛴다.
윤대협은 어린애가 된 것처럼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턱을 꽉 물고 달렸다. 앞머리를 무자비하게 넘겨 버린 바람 때문에 드러난 동그란 이마 아래에서 이상하게 서태웅도 웃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랬다.
한 발짝이라도 더 빨리 농구하러 가야지.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너와 농구할 수 있으니까.
서태웅이 없어도 농구는 즐거웠다.
윤대협이 없어도 농구는 즐거웠다.
그래도.
잠시라도 같이 할 수 있다면.
아마 그 순간을 평생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오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울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그 순간과 계속 연결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칠월에 어느 바닷가에서 농구하던 장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