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록을 듣지 않아
불면의이쑤신
서태웅은 농구하지 않을 때는 이어폰을 끼고 있다.
윤대협이 이 사실을 깨달은 건 처음 일 대 일 승부를 한 뒤로 무려 1년이 지난 고등학교 3학년 초여름이었다. 그렇게 빨리 알아차렸다고 보긴 어렵다. 윤대협은 관찰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오직 코트 위에서만. 다른 때에는... 놀랍도록 눈치가 없었다.
서태웅은 이제 전국에 윤대협보다 더 나은 녀석이 있는지 없는지 잘 알고도 남을 때가 됐는데. 심지어 국가대표를 뛰었으니 전 세계에는 윤대협보다 더 나은 녀석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텐데. 아직도 틈만 나면 승부하자고 덤볐다. 왜 그럴까 싶다가도 윤대협은 금방 잊어버렸다. 잘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딱히 그걸 물어보러 온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 왜 승부하기 시작했지? 정말 기억이 안 난다.
재밌으니까 됐나.
윤대협은 눈앞의 재미보다 덜 중요한 건 잘 까먹는다. 솔직히 관심도 없다.
서태웅보다 재밌는 건 그렇게 많지 않다.
단순히 농구를 잘해서만은 아니다. 서태웅은 진화하는 존재다. 하루하루 단위가 아니고 경기 중에 질적으로 달라진다. 그런 경기가 쌓이면 정말 몰라볼 정도가 된다. 중학생 티가 안 빠진 말랑말랑한 슈퍼 루키에서, 무브만큼이나 머리 회전도 빠른 슈퍼 에이스로.
요즘 서태웅은 페이크를 정말 잘 한다. 작년까진 아니었다. 말랑말랑했던 서태웅은 감출 생각이 전혀 없는 실력을 곧이곧대로 부딪혀 오는 선수였다. 딱히 눈속임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충분해서였겠지. 그 방법밖에 모르기도 했겠고. 윤대협은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한때 자신도 그랬으리라고 확신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렇지만 서태웅은 스펀지 같은 데가 있어서 한 번 본 건 그 자리에서 흡수했다. 그러고 나면 다른 선수가 되었다. 경기 중에 진화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래 놓고 시침을 뚝 떼고 원래 그 정도는 할 줄 알았던 것처럼 군다. 그런 점이 귀엽다. 아니 재밌다. 음?
어쨌든 서태웅은 이제 모든 플레이를 정면돌파할 것처럼 정색하고 달려들기 때문에 페이크나 트리플 쓰렛이 더 잘 먹히는 종류의 무서운 선수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콤마 1초만 틈을 줘도 정면돌파가 된다. 점점 무기가 늘어난다. 원래 단순하고 초지일관할수록 변칙에 무게가 실리는 법. 직선으로만 가던 폰이 퀸이 되듯이.
그런 식으로 서태웅은 갈수록 재미있어졌다. 한순간도 안 질린다. 끊임없이 진화하기 때문이다. 윤대협 앞에서 농구공을 잡고 있는 한. 이글거리는 두 눈동자의 깊은 곳엔 언제나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이 있다.
시합이라고 해도 10분에 2~3분은 쉬어야 한다. 하프타임도 있다. 일 대 일도 마찬가지로 끝없이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딱히 시간을 재는 건 아니고. 어차피 손목시계도 벗어 놔서 분 단위를 알 순 없으니. 대충 좀 힘들면 손을 휘휘 저으면서 코트에서 빠져나온다. 물을 마시거나 땀을 닦거나. 지금 타이밍은 하프타임이다 싶으면 그 자리에 털썩 앉아서 잠시 쉰다. 처음엔 뚱하니 불만스럽게 서 있던 서태웅도 요즘은 윤대협이 주저앉으면 하프타임인 줄 안다.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적당히 옆에 앉는다.
서태웅은 1년 동안 한 번도 먼저 타임아웃을 건 적이 없다. 독하다. 죽을 것처럼 헉헉대는 한이 있어도 먼저 떠나는 법이 없다. 어떤 점에선 믿음직스럽기까지 하다.
덥다. 그래도 아직은 바람이 시원한 편이다. 여름에 땀 빼면서 운동한 대가처럼 기분이 좋다.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턱을 위로 들어 올려 뒤통수를 철망에 꾹 기대면 정수리 방향에서 시끄럽게 매미 소리가 귀를 때린다.
서태웅은 쉴 때마다 이어폰을 다시 낀다.
1년간 이 사실을 잘 몰랐던 이유가 있다. 열에 여덟은 수건을 머리 위에 덮어써 버리기 때문이다. 그늘을 만들겠다는 심산인지. 볕 뜨거운 줄은 아는 건가. 그러면 실내에서 좀 하자고 하지... 오늘은 2할의 확률로 수건이 없어서 이어폰이 잘 보였다.
그래서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서태웅은 농구공을 잡지 않을 때는 항상 이어폰을 끼고 있다는걸. 자전거 타고 굳이 윤대협네 학교 근처에 있는 농구장까지 올 때도. 끝나고 다시 홱 가 버릴 때도. 심지어 물 마시고 땀을 닦는 2~3분의 쉬는 시간 동안에도. 3분쯤 지나면 귀신같이 패스했던 게 어쩌면 곡 하나로 시간을 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어폰을 낀 서태웅은 눈을 감고 윤대협처럼 뒤통수를 철망에 기대고 있다. 매끈한 눈밑살 아래로 속눈썹 그림자가 부채처럼 펼쳐져 있었다. 삐죽한 옆머리에서 굴러떨어진 땀방울이 새하얀 목덜미를 타고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여름의 햇살처럼 반짝거린다.
무슨 노래를 듣고 있는 걸까?
윤대협이 무심코 서태웅의 귓불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을 때.
서태웅이 놀란 고양이처럼 퍼뜩 눈을 뜨고 이쪽을 쳐다본다.
윤대협은 어정쩡하게 손을 올린 채로 굳었다.
서태웅이 철망에 기대 있던 상체를 일으키면서 윤대협 쪽 이어폰을 뺀다.
"불렀어?"
아하.
내가 불렀는데 노랫소리 때문에 못 들은 줄 알았구나. 아무 소리도 낸 적 없는 윤대협은 그냥 그런 걸로 하기로 했다. 곤란할 땐 생긋 웃으면 그대로 대답이 됐다. 서태웅은 묵묵히 빼낸 이어폰을 만지작거렸다. 별거 아닌 동작이지만 몰래 쳐다보다 들킨 사람처럼 긴장도가 올라가 있어 예민해져 있는 윤대협의 관찰력으로 판단해 보면 약간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귀청을 때리는 매미 소리 한가운데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다행히 윤대협은 상황을 깨끗하게 끝낼 마법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이제 농구할까?"
서태웅이 이어폰 한 쪽을 마저 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날도 해질 때까지 이어진 일 대 일이 끝나고. 이어폰 양쪽에 꽂고 자전거 핸들을 붙들고 스탠드를 걷어 차는 서태웅의 뒤통수를 윤대협은 나직하게 불렀다. 시험 삼아서.
"서태웅."
서태웅이 아까 그 놀란 고양이 같은 동작 그대로 퍼뜩 돌아본다. 순순히 한 쪽 이어폰을 뺀다. 이번에는 안 놓쳤다. 그런 의기양양함이 평온하게 퍼져 있는 무표정이다. 윤대협은 웃음이 나서 참지 않았다.
"내일도 볼까?"
"부 활동."
"끝나고 와."
"오케이."
다시 이어폰을 꽂고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페달 위에 올라탄다. 절대로 윤대협을 거절하는 법이 없는 서태웅. 윤대협은 벗어뒀던 시계를 도로 손목에 찼다. 모르긴 몰라도 저 녀석도 나를 재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내가 저를 그렇게 생각하는 만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선다.
그 다음 날부터 서태웅은 농구하지 않을 때는 이어폰을 한 쪽만 끼고 있다.
꼭 한 쪽만.
실컷 농구하다 물 마시고 땀 닦으며 2~3분을 쉴 때도. 이제 하프타임이다 싶어서 윤대협이 주저앉을 때도. 너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위치에 있는 서태웅은 꼭 처음에는 이어폰을 두 쪽 다 귀에 넣었다가. 윤대협이 있는 쪽만 하나 톡 가슴팍으로 떨궜다.
아주 대단치도 않지만 무의미하다고 여기기도 쉽지 않은... 변화였다.
무엇보다 서태웅이 변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울림인지 충격인지 닿음인지 알 수 없는 꿈쩍임이 있었다. 윤대협은 그렇게 느꼈다. 서태웅이, 사십 분 안에도 끊임없이 진화해서 괄목상대할 만큼 성장하는 서태웅이, 농구를 더 잘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행여라도 윤대협의 아주 작은 목소리를 놓칠까 봐 행동이 변했다는 게.
아주 대단치도 않았지만 무의미하다고 여기기도 쉽지 않았다.
서태웅은 마지막 순간에만 이어폰을 두 개 다 귀에 꽂았다. 그러니까 물을 마시고 땀을 닦고 농구공을 야무지게 챙기고. 자전거 핸들을 두 손에 쥐고 스탠드를 걷어찼을 때. 무슨 할 말 있냐는 듯이 윤대협을 한 번 휙 돌아본다.
그러면 윤대협은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다.
내일 봐.
그것도 아니면.
다음은 금요일?
서태웅은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한 번 끄덕. 선명하게 위아래로 흔든 다음. 가슴팍을 구르던 이어폰 한 쪽을 마저 귀에 꽂고 페달 위에 훌쩍 뛰어올라 바람처럼 가 버렸다. 작아지는 등을 바라본다.
오늘도 물어보지 못했다.
무슨 노래를 듣고 있는 걸까.
어느 날은 윤대협이 정말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낼 뻔했다.
그날의 마지막 하프타임이 될 법한 시간이었다. 윤대협은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 위에 올려 둔 두 팔꿈치 사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서태웅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역시 주저앉아서 뒤통수를 철망에 기댄 채 노래를 듣고 있었다. 윤대협 쪽 이어폰은 아무렇게나 떨군 채로. 동그란 고무가 달린 이어폰 끝부분이 반바지를 입은 하얀 허벅지 위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귓바퀴 뒤에서 여름 햇살처럼 반짝거리는 땀방울이 서태웅의 새하얀 목덜미로 미끄러졌다.
윤대협은 고개를 틀어서 그걸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매미가 조금 더 조용히 해 주면 그쪽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 소리가 들릴 것도 같은데...
윤대협은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서 서태웅의 허벅지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이어폰 끝을 톡 건드렸다.
서태웅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흘끗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이 커져 있었다. 바짝 위를 향해 일어선 속눈썹이 앞머리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윤대협은 무릎 위에 올려 둔 팔꿈치에 비스듬히 한 쪽 턱을 괸 채로 놀란 고양이 같은 서태웅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두 사람은 잠시간 조용히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상한 대치였다.
윤대협은 스스로의 망설임이 낯설었다. 서태웅에게 농구하자는 말은 정말 쉽게 나오는데. 내일 보자거나 다음에 만나자는 약속도. 그런데 왠지 무슨 노래를 듣냐는 말은 잘 나오지 않았다. 겨우 손끝으로 톡 건드려 놓고 반응을 보고나 있다.
서태웅은 헷갈리고 있었다. 윤대협은 아무래도 노래를 듣고 싶은 것 같다. ... 아닌가? 제 얼굴을 기울어진 눈으로 쳐다보는 윤대협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면 무난한 추측에도 갑자기 확신이 없어졌다. 꼭 노래를 듣고 싶은 것만은 아닌 것도 같은 표정.
생각해 보면 1년 동안 단 한 번도 윤대협이 이어폰을 낀 걸 본 적이 없다. 서태웅이 듣는 노래에 관심을 보인 적도 없다. 이제 와서 관심을 보일 이유도 잘 모르겠다. 그럼 뭐지. 그냥 건드려 보고 싶었나. 이어폰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서태웅은 허벅지를 굴러다니던, 윤대협이 생각보다 뜨거운 손끝으로 툭 건드렸던 이어폰 고무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서 만지작거렸다. 지금 이어폰 끝에서 새어 나와 허공으로 흩어지는 노래의 절반을 들으면서.
이대로 윤대협에게 이어폰 한 쪽을 건네면 된다.
윤대협은 그걸 냉큼 받아들어 모양이 좋고 큼직한 한 쪽 귀에 꽂거나 웃으며 손을 저어 사양할 것이다. 혼란은 끝나고 결론이 나온다. 노래를 듣고 싶었던 건지 그냥 심심해서 건드려 보고 싶었던 건지. 고작 그것뿐인데 왜 그렇게... 그런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는 건지.
서태웅은 스스로의 망설임이 낯설었다. 윤대협에게 승부하자는 말은 정말 쉽게 나오는데. 다짜고짜 농구공을 던지거나 드리블로 파고드는 일도. 그런데 왠지 이어폰 한 쪽을 건네주는 것만은 잘 되지가 않았다. 이상하게도 확실하지 않으면 해서는 안 되는 행위 같다는 막연하고 날카로운 감각에 사로잡혔다.
서태웅은 한참 동안 이어폰을 만지작거렸다.
윤대협이 먼저 일어섰다.
그날 승부는 그대로 끝이었다.
서태웅은 오랜만에 해가 떠 있을 때 집으로 왔다. 학교 또는 공원에서. 농구부 또는 윤대협과. 하다 하다 더 이상 못할 시간까지 농구하다 집에 오는 매일이었다. 간신히 씻고 쓰러져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다음 날이었다. 그러면 또 가장 좋아하는 걸로 하루를 가득 채웠다.
오늘은 조금 달랐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면서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창문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서태웅은 책상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네모나고 커다란 카세트 붐박스 옆의 상자를 열었다. 그대로 뒤집자 빼곡하게 쌓여 있던 카세트테이프가 케이스 째로 책상 위에 와르르 흩어졌다.
알록달록한 자켓만 봐도 노래가 들린다. 서태웅은 하나하나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컬렉션을 살펴본다. 주로 프린스. 가끔 마이클 잭슨. 어떨 땐 퀸. 세상에 멋진 락스타는 많았지만 역시 서태웅은 가장 좋아하는 것 하나를 끈질기게 좋아했다. 주의 깊게 선별해 한 쪽에 모아 놓은 테이프는 전부 프린스였다.
프린스는 장르 스펙트럼이 넓다. 팝, 펑크, 힙합, 락앤롤. 어떨 땐 그 모든 장르가 한 노래에 섞여 있는 것 같다. 사실 서태웅은 음악 장르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들었을 때 심장이 뛰면 샀다. 심장이 뛰는 걸 선명하게 느끼고 싶을 때 다시 들었다. 드럼 비트나 베이스가 드리블 소리를 연상시키면 그때부터 좋아하는 곡이 됐다. 시원한 기타 리프가 가슴을 찢을 것처럼 울리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멜로디를 따라 부를 수 있으면 흥얼거렸고 아니면 조용히 듣기만 했다. 복잡한 화음에 귀를 적시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선별된 프린스 앨범 가운데서 또 몇 개를 고르고. 그중에 또 몇 개를 골라낸다.
기준은... 이어폰을 건네주고 싶은 한 사람이다. 그를 떠올렸을 때 어떤지. 어울리는지. 좋아할 것 같은지.
마지막으로 남은 새까만 테이프 하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노래가 딱 하나 들어 있는 싱글 앨범이다. 서태웅은 좋아하는 노래는 반드시 싱글로 샀다. 집에서야 LP도 듣지만 자전거를 타거나 밖에서 농구할 땐 카세트테이프를 들을 때가 많았고 그러면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반복해서 듣기가 힘들었다. 여러 노래를 듣고 싶은 날이 아니면 앨범 대신 싱글을 들고 다녔다. 어차피 서태웅은 좋아하는 것에 한해 잘 질리지 않는 성격이다.
프린스 초기 앨범은 밴드 사운드가 강하다. 락이라고 할 수 있지. 그 녀석이 락을 들을까? 서태웅은 혼자서 턱 아래를 붙잡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다. 짧게 민 옆머리가 시원하게 드러내고 다니는 잘생긴 귀를 생각한다(참 별 군데가 다 잘생긴 자식이다). 아무것도 넣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까만 이어폰 줄을 늘어뜨린 모습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눈 감고 목 젖히고 매미 소리나 바람 소리나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따위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땀에 젖은 옆모습을 떠올린다. 시끄럽다고 할 것 같은데.
고민하는 대신 한 번 들어보기로 한다. 그 녀석을 생각하면서.
새까만 테이프를 네모난 카세트 붐박스에 넣었다. 적당히 큰 볼륨.
서태웅은 눈을 감았다. 드럼 비트와 함께 저절로 발을 까딱거린다.
역시 이거다. 서랍에 넣어 놓은 수많은 노래 중에서. 품 안에 넣고 귀에 꽂고 다니는 많은 음악 중에서. 윤대협과 가장 어울리는 것...
그날은 자기 전까지 그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
서태웅은 두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페달을 시원하게 밟으며 바닷바람 사이를 파고든다. 땀이 나는 동시에 마른다. 별 힘들이지 않고도 원심력과 관성에 기대 속도를 붙인다. 진짜 힘은 농구할 때를 대비해서 아껴 둔다. 걷기보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이유다.
세상은 프린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곧 윤대협의 세상도.
그런 생각을 하면 심장 박동이 살짝 빨라져서 드럼 비트와 어긋난다.
시끄러울 법도 한 바닷바람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윤대협은 드물게도 먼저 와 있었다. 농구공이 없어서 하프라인에 멀뚱하게 서 있다. 거의 농구대만 하다. 멀리서부터 아주 잘 보인다. 윤대협도 멀리서부터 서태웅이 이쪽으로 오는 걸 발견하고 뒤돌아선다. 그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인다.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또 드럼 비트와 어긋난다.
서태웅은 윤대협이 자신을 보면 늘 저렇게 반갑게 눈이 커진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시간만 나면 일 대 일을 붙은 지 1년이 지나고서야. 서태웅은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눈치가 좋은 편은 아니다. 1년 전까지는 우연히 만났을 때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제가 오는 걸 알고 있을 때도 그렇다. 서태웅이 보이면, 자신에게 가까워지면, 윤대협은 저렇게 예쁜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입꼬리를 얇게 들어 올려 살짝 웃는다.
서태웅은 자전거 양쪽 브레이크를 꾹 잡았다. 훌쩍 뛰어내려 스탠드를 걷어찬다. 후드 앞주머니에 넣어 둔 카세트의 버튼을 꾹 눌러서 중간까지 돌아가던 테이프를 뒤로 감는다. 귓전에서 노랫소리가 빠르게 뒤로 되감기는 이상한 소리가 난다. 바닷바람에 머리가 다 헝클어진 서태웅은 자전거를 너무 세게 밟았는지 숨이 벅차다.
가만히 숨을 고르면서 윤대협에게 다가간다.
반갑게 인사말을 건네려는 듯 입을 살짝 벌리면서 이쪽으로 다가오던 윤대협이 서태웅의 얼굴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름대로 평상시처럼 무표정을 유지하려는 생각이지만. 살짝 긴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므로 어쩌면 아주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태웅이 윤대협과 아주 가까이 섰다. 놀랍게도 윤대협도 조금 긴장한 것 같다. 그런 에너지가 전해진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감춰지지 않는다.
서태웅은 말없이 한 쪽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그대로 마주한 윤대협의 귀에 꽂는다.
플레이 버튼을 꾹 눌렀다.
서태웅과 윤대협의 귓속에 똑같은 멜로디가 울려 퍼진다. 오페라틱한 코러스와 자전거 벨 소리 같은 사운드.
서태웅은 가사를 따라서 노래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기보다 영어 실력이 안 됐다. 윤대협은 서태웅보다는 영어 성적이 나았고 그래서 아주 뚜렷하게 귀에 꽂히는 구절이 있었다.
I am yours now and you are mine and together we love through all space and time so don't cry
서태웅은 다소 긴장한 마음으로 가만히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윤대협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본다. 비트가 흐르기 시작하고 윤대협이 눈을 살짝 내려깐다. 고개가 미세하게 끄덕인다. 노래를 잘 아는 서태웅이 내심 맞추던 박자와 일치한다. 서태웅은 그것만으로 완전히 성공한 기분이 치밀었다.
이어폰은 한 사람 용이다. 두 사람이 나눠 끼기에는 반드시 짧다. 한 쪽 귀와 다른 쪽 귀로 연결되어 있을 뿐인데 동시에 같은 소리로 뇌를 채우고 있다는 이유로 꼭 서로의 뱃속이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같은 박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발을 조금씩 까딱이면서. 같은 노랫말에 연결되어 있다.
I am yours now and you are mine and together we love through all space and time so don't cry
서태웅은 갑자기 얼굴이 조금씩 화끈거리는 것을 느낀다. 몸이 점점 더 굳어지는 것 같다. 이어폰 때문에 멀어질 수 없는 간격을 유지한 채로 두 사람은 끝까지 노래를 들었다.
땡볕 아래 마주 선 채로 꼼짝도 않고 그저 노래 한 곡을 전부 듣기만 한 두 사람을 툭 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발랄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노래가 끝났다.
갑자기 윤대협이 팔을 뻗어 서태웅의 후드 앞주머니에 꽂는다. 흠칫 놀라는 사이에 카세트를 꾹 쥐고 있던 서태웅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꺼낸다. 어찌나 꽉 잡고 있었던지 손끝이 하얘져 있었다는 걸 서태웅도 지금 알았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손을 부드럽게 펼쳐 카세트를 가져가더니 톡 열어서 테이프를 꺼낸다. 새까만 테이프를 앞뒤로 유심히 본다. 타이틀을 외워서 사려는 작정이었다. 집에 가서 좀 더 여러 번 들어보고 싶었다. 노랫말도 알고 싶었다. 서태웅이 들려준 세계 속에 빠져 보고 싶었다. 혼자서.
처음으로 끝까지 들어 본 락이었다.
서태웅이 불쑥 말했다.
"가져."
"아. 그게 아니고..."
"가져."
윤대협이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서태웅이 카세트만 낚아챘다. 놀랍게도 그대로 주머니에 꽂더니 뒤돌아서서 자전거에 올라탄다. 갑자기 홱 당겨진 이어폰 한 쪽이 윤대협의 귓구멍에서 아프게 떨어져 나갔다. 서태웅은 딸려 오는 이어폰을 대충 둘둘 감아서 후드 앞주머니에 구겨 넣고 그대로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멀어진다.
아무것도 꽂지 않은 서태웅의 양쪽 귀가 새빨간 색이었다.
윤대협은 멍청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까 들었던 후렴구의 반복적인 가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sing it while we watch them fall...